소설리스트

미궁기담-598화 (598/813)

597 잊혀진 옛 도시 미궁

그 후 백작에게 리민=펠드릭스 자작에 관한 이야기를 적당량 수집한 환인은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을 회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리민=펠드릭스 자작의 방문은 내일 오전 10시경.

펠드릭스 백작은 사흘 뒤를 희망한다 했지만, 환인은 니오네브레스인 특유의 시간 감각으로 허송세월하고 싶지 않았기에 당장 내일 보내라 요청하였다.

상대의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 편이 강제력과 강압적임을 드러낼 수 있으니까.

“그 일로 리민=펠드릭스가 반발하거나 응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좋다. 단순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으니까.”

=디전 펠드릭스 백작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상당한 망나니로 보이는데 말이 통할까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최악에는 미궁의 밥으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

비상과 쿠르티를 정원으로 들여보낸 뒤 집안으로 들어선 환인은 집에 인기척이 하나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똑똑, 유르파의 방문을 두드리자 살짝 몸매를 드러내는 회색 로브 작업복 차림의 유르파가 외눈 안경을 끼고 나온다.

=자기 왔네? 갔던 일은 잘됐니?=

“예. 그보다 혼자 있었던 겁니까.”

=안느 아가씨는 아영이 수목화 건 때문에 대성당에 갔고 려강 아가씨랑 아영이는 술법 함정 교습 알아보러 엽사 조합에 갔어. 저녁 되기 전에 올 거야.=

“그렇군요. 그럼 그녀들이 돌아올 때까지 이걸 분석해주십시오.”

고급스러운 검은색 흑단목 상자를 열어본 유르파는 귀걸이형 장식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위상력 방출형 머리보호대? 와, 이거 설마 그거야?=

“예. 그리모암의 모자입니다.”

=성공했구나! 축하해. 드디어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았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쿡쿡. 그걸 그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자기 뿐일 거야. 참, 전에 자기가 부탁했던 내 체취의 미약 작용에 관한 조사도 끝났는데, 나중에 이야기할까?=

그리모암의 모자를 다시 상자에 담아 챙기는 그녀의 질문에 환인은 잠시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듣겠습니다.”

이실리테와 함께 유르파의 방에 들어간 환인은 유르파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가 해주는 설명을 들었다.

=내 체취의 미약 작용은 거의 자기 전용인 거 같아. 아가씨들은 아무 냄새 안 난다고 했거든. 그치?=

=네. 유리 언니한테는 그냥 포근한 향기만 나요.=

“거의……라는 것은 효과가 있긴 하다는 겁니까.”

아예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그걸 묻자 유르파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환연을 불렀다.

=환연아. 자기한테 말 안 했었어?=

「별로 의미 없어서 안 했는데. 뭐 유르파 자궁에 들어갔다 나온 나도 별로 아무렇지도 않았어. 얼굴이 살짝 뜨거워지긴 했지만 금방 식었고.」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환연의 설명에 환인은 잠깐 유르파의 곁에 선 이실리테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이실리테는 망설임 없이 유르파의 허리를 잡아 옆의 탁자에 앉힌 뒤…….

=히잇!? 이, 이슬이 아가씨?!=

……곧장 유르파의 로브 아래, 다리 사이로 들어가 그녀의 은밀한 곳에 코와 입을 묻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유르파가 기겁해서는 부끄러워하며 다리를 바동거렸지만 힘으로 이실리테를 밀어내기란 무리.

결국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읏, 으흑 신음만 흘린다.

환연이 굉장한 걸 구경한다는 듯이 말했다.

「암만 봐도 이실리테가 우리 중에서 제일 이상한 애 같아. 환인 네가 신호를 줬다고 해도 다른 여자 사타구니에 바로 얼굴을 묻나?」

“너도 만만치 않다고 본다.”

「응……? 야! 그건 사고 난 걸 책임지려고 한 거였거든!」

유르파와 그녀 사이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자 윽,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가 되레 성을 내는 환연.

그사이 유르파의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뗀 이실리테가 평온한 얼굴로 소감을 말했다.

=확실히 아무렇지도 않네요.=

=…….=

허벅지를 바짝 모은 채 로브 자락이 구겨질 정도로 움켜쥔 유르파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빨개져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실리테의 갑작스러운 행동은 당혹스러웠던 것.

하지만 악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르파는 헤유,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탁자에서 내려와 옷의 주름진 부분을 탁탁 털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다른 남자한테도 내 체취가 통하나 싶어서 손수건에 땀을 묻혀 혈기 왕성한 남자한테 맡게 해봤거든? 그 사람들도 그냥 좋은 냄새만 난다고 그랬었어.=

“그렇습니까.”

=응응. 거기다 내 체취에 흥분한 자기의 체액이랑 아가씨들하고 사랑을 나눈 뒤의 체액을 조금 모아서 검사도 진행해봤는데 마찬가지로 이상은 검출되지 않았어. 자기의 인지 능력이나 행동거지에 평상시와 다른 점도 안 보였고.=

“문제가 없다고 보면 되겠군요.”

=응. 플뢰족의 수목화처럼 남편이나 아내하고 뜨거운 밤을 보내기 위한 정현족의 보조 능력이라고 생각해.=

그녀가 정현족이 된 지도 반년이 넘었다. 그사이 그녀와 한 관계 횟수는 100번이 넘고 질내사정은 수백 번 단위.

의존증이나 그녀의 몸에 대한 욕망, 욕구가 치미는 일은 없으니 몸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닌 게 확실하겠지.

저녁 시간.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여자친구들과 모인 환인은 그녀들의 이야기부터 들었다.

=저랑 아영이 이야기부터 먼저 할게요. 엽사 조합에서 5급 술법 함정 술사분과 연결되었고 그분에게 술법 함정술을 배우기로 했어요. 강습비는 25금화에요.=

=고급 함정 해체술이라 그런지 확실히 비싸네. 배우는데 필요한 도구나 재료는?=

=엽사 조합에서 준비해주기로 했어요. 비용도 수강비에 포함되어있고요. 아영이가 협상을 잘해줬어요.=

안느의 질문에 대답한 백려강이 환인을 돌아보며 묻는다.

=교습 기간은 2주 속성부터 6주 숙성 두 종류가 있어요. 비용은 동일하다고해서 내일 대답하겠다고 한 뒤에 간이 계약만 맺고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둘이 같이 익히는데 25금화인가.”

=네. 그 부분도 아영이 콕 짚어서 계약 항목에 체크했어요.=

“그러면 2주 속성 과정으로 하지. 필사 금지일 테니 수업이 끝나면 대화를 통해 지식을 외우는데 신경 쓰도록 해라.”

=네, 오라버니.=

=넵!=

백려강과 아영의 차례가 끝나자 안느가 손을 들었다.

=그럼 내 차례인가? 내가 대성당에 간 이유는 아영이 저게 수목화 할 거 같다고 해서 그거에 대해 알아보러 간 거야. 이유는 도령, 들었어?=

이실리테가 주는 커피를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는 =그럼 설명은 더 필요 없겠네.= 중얼거리다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결론부터 말할게. 수목화를 중단하는 방법 같은 건 없어. 육식을 한다거나해서 억지로 수목화를 중단해버리면 이제 겨우 평범한 사람처럼 회복되어가고 있는 아영이 몸에 치명적인 해가 될 거야.=

=어…….=

그다지 좋지 않은 전개에 아영이 약간 주눅 든 표정을 짓는다.

=교단 기록 관리자도 자초지종을 듣더니 놀라워했지만, 그쪽도 우려를 드러내더라. 두 명의 수목화가 한 사람에게 향한 전례가 없다 보니 권장하지 않는다고. 한쪽이 떠나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야.=

“……방법은 두 가지뿐이군. 안느가 수목화를 중단하거나 아니면 아영과 관계를 중단하거나.”

이제는 안느의 표정도 안 좋아졌지만, 아영은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로 손을 살짝 들며 발언을 요청했다.

=오빠. 여기서는 제가 물러나는 게 정답이에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왕족의 수목화 효능이랑 평민의 수목화 효능은 절대적으로 왕족분들이 좋다는 게 주론이거든요. 게다가 전 굴러들어온 돌이잖아요? 아! 파티를 나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오빠랑 그…… 야한 일만 이제 안 하겠다는 거니까요?=

=넌 괜찮니?=

조용히 듣기만 하던 유르파의 진지한 질문에 아영은 꾸밈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당연히 괜찮죠!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오빠 덕분에 저 이렇게나 건강해졌는데요. 이 이상 욕심내면 땅신님께서도 ‘저 싹수 없는 년’하면서 노여워하실 거예요.=

=고기 맛을 아는 수행자가 고기를 끊기 어려워하는 것처럼 너도 이미 알 거 다 알게 되었잖아. 그걸 끊는게 쉬울 거라고 생각해?=

=넵.=

대답은 아니오지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상황.

자신이 여기서 버티면 지금 파티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단숨에 냉각된다.

이 가족 같은 분위기를 해치기도 싫을뿐더러 버텨보았자 추해지고 버려지는 것은 자신 일터.

유르파도 그걸 느꼈기에 환인과 안느에게 물었다.

=자기랑 안느 아가씨, 이 일은 나한테 맡겨볼래?=

“괜찮습니까. 혹시 종족적인 터부라던가.”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야. 아영이도 허락한다면 나도 언니한테 부탁하고 싶어.=

둘의 동의에 유르파는 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내 연구 방향은 아영이의 수목화를 몸에 해가 되지 않는 방향으로 멈추는 방법을 찾는 게 될 거야. 거기에는 안느 아가씨랑 아영이의 협조가 꼭 필요하고.=

=그, 유르파 언니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닌데요. 땅신 교단의 기록에도 없는 걸 언니가 그, 해결하실 수 있다는 말씀이세요?=

=되게 해야지. 한 아가씨의 순정이 걸려있는 일인데.=

싱긋 웃은 유르파는 합류한 지 얼마 안 돼 긴가민가하고 있는 아영에게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가능성을 묻는다면 일단 방법도 있고 지식도 어느 정도는 갖춰진 상태야. 연구 재료도 많고.=

유르파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문인을 이용한 점막 접촉 차단에서부터 수목화의 변화와 완성된 수목화의 상태 조사를 바탕으로 한 체질 변화 및 고정 쪽이다.

니오네브레스인의 인체에 대한 이해는 투시 술법으로 자신과 아가씨들의 피하 상태 및 내장을 보고 지구의 의학에 접목해 꽤나 높인 상태.

=연구 진행 과정에 따라 성공 가능성은 꾸준히 올라갈 거야.=

사회생활을 꽤 해왔던 아영은 지금 유르파가 말하는 게 얼마나 수준 높은 지식과 기술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 대가없이 합류한 지 얼마 안 되는 죄인인 자신에게 베풀어주겠다니……!

가슴이 순간 벅차올랐던 아영은 발딱 일어나 유르파에게 꾸벅,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저도 오빠한테 사랑받고 싶어요! 수목화에 욕심은 없으니까, 부탁드립니다!!=

=그래. 솔직해서 좋네.=

“저도 부탁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방식이 있다고 하지만, 저는 몸과 마음이 함께 해야 그 깊이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니까요.”

환인도 이야기를 전부 듣고 유르파에게 부탁했다.

다들 뜨겁게 밤을 불태우는데 아영 혼자 독수공방하며 손가락을 빨면 지금 당장이야 괜찮을지 몰라도, 나중에도 괜찮다는 장담은 못 한다.

화근은 제거할 수 있다면 제거해놓는 게 상책.

=나만 나쁜 년이 된 기분이네…….=

안느가 시무룩해지자 아영이 재빨리 그녀의 옆구리에 달라붙어 아양을 떨었다.

이러는 게 여러모로 정답이라고, 땅신 교단에 신앙 점수를 써서 정보를 요청한 것만 보아도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준 건지 잘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조금 쓴웃음을 지은 안느는 그런 아영의 뺨을 살짝 꼬집어준 뒤 아공간 주머니에서 땅신의 심볼인 현명한 거대 거북의 무늬가 새겨진 황색 상자를 하나 꺼내 바닥에 놓았다.

=수목화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게. 그리고 며칠 전에 교단 본부에 요청한 갑주가 드디어 도착했어.=

웨딩드레스도 들어갈 법한 커다란 상자 속에 든 것은 흰색과 황색이 조화롭게 섞인데다 금색 수실이 가슴께에서 살랑이는 제복 한 벌.

“이게 등대의 빛인가. 가죽 갑옷 계통이라 생각했는데 의복이군.”

=도령이 입고 있는 무상의 금대가 과거 메리아놀의 여왕님께서 만든 작품이라는 거 말해줬었지? 그걸 보고 흉내 내서 만든 게 이거야.=

방어력은 구세의 빛 > 천릉 > 등대의 빛 순이다. 하지만 기능은 등대의 빛 > 구세의 빛 > 천릉이며 기동성과 활동성 또한 등대의 빛 > 천릉 > 구세의 빛.

무엇보다 등대의 빛에는 일반 금속이 일체 들어가 있지 않은데다 들어간 금속도 정령 친화적인 미스린드.

옆방으로 가서 등대의 빛으로 갈아입은 안느가 거실로 넘어오며 부끄러운 듯 우물쭈물한다.

=으, 이거 생각보다 몸매 너무 많이 드러내는데…… 어, 어때?=

“…….”

환인은 말없이 그녀를 전체적으로 응시했다.

뭐 어깨 망토라던가 목장식이라던가 금색 술이라던가 아무런 무늬 없는 하얀 바지가 팽팽하게 당겨져 드러나는 하반신의 굴곡이라던가 허벅지를 살짝 파고든 벨트라던가 무릎 위까지 올라온 은색 부츠라던가.

세밀하면서도 유려해서 보기 좋지만 무엇보다 가슴.

평소 그녀의 가슴보다 1~2컵은 명백히 더 큰 가슴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실리테도 그걸 보곤 피식피식 웃었다.

=흉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서 방어 소재를 착용한 거야?=

=아이 진짜!=

피식거리는 그녀의 등을 찰싹 때린 안느의 얼굴에 민망함이 가득하다.

그리고는 여전히 대답이 없는 환인을 조금 불안해하는 얼굴로 돌아본다.

=도령, 이상해……?=

“아니. 제복의 정갈함과 단정함이 네 야한 몸과 어울려 무척이나 예쁘군. 이실리테도 부러워서 농담을 던진 거겠지.”

화아악.

하얀 얼굴이 보기 좋게 붉어지고 안느가 쑥스러워하며 옆머리를 매만지는 순간, 환인은 그녀의 등 뒤로 푸른 하늘과 초록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 환상을 보았다.

“…….”

눈을 몇 차례 깜빡이니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방금은 뭐였을까. 저 옷에 매혹 기능이라도 붙어있는 건가.

잠깐 코끝이며 입술을 매만지며 곤혹스러워한 것도 잠시. 팅팅- 위상력을 살짝 흘려 넣자 마치 강철 갑주처럼 쇳소리를 내는 의복에 신기해하는 여자친구들을 불렀다.

=기능은 구세의 빛이랑 비슷해. 다른 점은 정령력 강화하고 청결, 자동 완벽 수선 기능이 더…….=

“자, 이제 펠드릭스 가문을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지. 너희도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으니 다들 모여라.”

=……붙어있어서, 응? 어, 응.=

다시 자리에 앉는 여자친구들에게 환인은 펠드릭스의 대저택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주었다.

돌아온 반응은 환인의 예상과 약간 달랐다.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의뢰라는 태도.

=부모나 조부의 휘광에 기대서 자존심과 콧대만 높은 인간은 어디에나 있지.=

=하지만 펠드릭스 자작은 자기 힘으로 작위에 힘도 쌓았다던데.=

=자식의 교육과 인성 교정도 부모의 의무니까요. 그러지 못하는 부모도 많지만요…….=

=백작의 우려대로 된다면 카락스의 먹잇감이 되기에 좋은 인간상이네요.=

“……그래서 다음 미궁에 진입할 때는 리민 펠드릭스 자작과 동행할 예정이다.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너희들에게 무례하거나 불손한 행동을 한다면 봐주지 말고 두들겨 패버려라.”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다니, 펠드릭스 백작님도 각오를 다졌네요.=

=살아서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바에 죽어서 사라지겠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이게 교육의 대가로 선지급 받은 그리모암의 마지막 유물이다.”

환인은 유르파에게 건네받은 귀걸이형 무선 리시버와 비슷한 물건을 그녀들에게 보여주었다.

=……헉.=

=와아.=

여자들은 허를 찌르는 유물의 공개에 놀랄 타이밍을 놓치고 잠깐 허둥거리다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모두 착용한 사람에게 고위 직업자의 능력을 부여해준다는 유명한 그리모암의 강력을 볼 수 있는 건가?

안느는 환인의 손에 들린 귀에 거는 장식을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구경했다.

=신기하게 생겼네. 귀 장식인가?=

=착용하면 이슬이 아가씨 갑옷인 천상의 장막처럼 역장이 발생해서 머리를 지켜줘. 위상력 감응의 상위 호환 격인 기능이야.=

=뭐야. 역장 기능이라면 어지간한 검격으로는 뚫리지도 않는 기능이잖아. 유물이라면 효과가 더 좋을 텐데…… 엄청나네. 역시 유물은 유물인가 봐.=

=이걸로 유물을 모두 모으신 거네요. 오라버니, 효과는 보셨어요?=

“아직이다. 모두 모였을 때 확인해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유르파의 조사 결과 유물 생성 이후 추가된 추적 기능이나 해로운 기능이 없다는 건 확인한 상태.

환인은 모자…… 리시버를 들어 오른쪽 옆머리를 정리한 뒤 귀에 걸었다.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현상이 벌어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리모암의 혁대, 수파, 양화, 완륜, 모자. 다섯 유물이 한데 모이자 서로의 힘이 이어지며 주변에서 막대한 위상력을 흡수, 환인의 몸에 부여해주었고.

파아아앗—…….

위상력이라곤 전무한 환인의 몸 안에 6급 직업자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의 위상력이 차오르니 이제까지 감춰져 있던 환인의 아우라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넓은 거실을 가득 채운 것이다.

=우왓!?=

=뭐, 뭐야?!=

눈부신 황금빛이 앞을 가린 것도 잠시, 갑작스러운 이현상에 놀라 벌떡 일어났던 여자들은 환인의 몸을 고고하게 감고 흐르는 여러 겹의 황금빛 소용돌이를 보고 입을 쩍 벌렸다.

환인도 갑작스러운 현상에 놀랐지만, 그보다는 몸 안을 가득 채우는 어마어마한 힘에… 달리 말하면 전능감에 취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심핵력하고도, 영기나 훈기와 한기하고도 다른 기운. 하지만 서로가 잘 아는 듯 조금도 반발이나 마찰을 빚지 않고 서로 사이좋게 몸 안을 흐르는 막대한 에너지.

‘이게 위상력인가.’

「아잇, 잘 자고 있는데 눈부시게 뭐야아…… 응?」

그때 환인의 안주머니에서 졸다가 갑작스런 눈부심에 잠이 깨버린 환연이 그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우라가 왜 갑자기 발현됐어?」

=……야, 환연. 아우라라니? 저게 도령의 아우라라는 거야?=

「응. 대성녀가 있던 방 안쪽에 현월의 방 이란 데서 본 아우라랑 비슷해. 그때보단 형태가 훨씬 강하고 짙지만.」

=그때? 아…….=

영도에서 환인이 정말 유일 직업자인지 확인하기 위해 대성녀가 환인을 데려갔을 적을 떠올린 여자들이 감동과 감격이 묻어나는 표정으로 다시 환인을 돌아본다.

자신들도 그의 아우라가 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유르파도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그랬군.”

조용하던 환인이 입을 열자마자 유르파가 학구열이 폭발한 듯한 모습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물었다.

=뭔데?! 자기, 그리모암의 유물하고 뭔가 간섭이 벌어진 거야? 위상류가 해제됐다거나?!=

환인의 몸을 상시 뒤덮고 있는 위상류는 위상력과 관련된 것을 대부분 막고 밀어낸다.

그 때문에 위상력이 섞인 의약품이 통하지 않아 일부러 약초와 영약을 섞어 그에게 쓸 수 있는 회복제를 만들지 않았었나.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의 품에서 조사해보고 싶은 유르파에게 환인이 간단히 설명해준다.

“그리모암의 강력이 가진 기능은 심플하게 하나뿐입니다. 위상력의 부여.”

=위상력의 부여……?=

“예. 위상력 보조제처럼 소비된 위상력을 채워주는 게 아니라 몸 전체에 위상력을 스며들게 해주는 거군요. 이 세상의 법칙 위에 존재하는 유물이어서인지 위상류도 이 기능은 막지 못하나 봅니다.”

=아! 그래서 아우라가 드러난 거구나!=

유르파의 깨달음이 담긴 외침에 여자들도 연이어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지구에서 아우라가 없어졌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세상에 퍼져있는 위상력이 극히 희박해서 그런 게 아니었나.

위상력이 정말 한 줌도 없던 환인의 몸 안에 위상력이 채워지니 그의 아우라도 그제야 발현된 것.

「헤에. 현월의 방에서 보였던 아우라는 적은 양의 위상력 때문에 살짝만 드러났던 거였네.」

=으응. 오라버니의 아우라 너무 아름다워요…….=

=아름답기도 아름답지만, 도령의 아우라는 보통 사람들보다 몇 배나 크네.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못 잊겠는걸.=

환인의 몸 주변을 몇 겹이나 감싼 위상력의 회오리는 얼핏 보면 베일 같기도 하고 얼핏 보면 몇 겹이나 겹쳐진 오로라 같기도 하다.

그의 아우라를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 감상하던 이실리테가 하아…… 애절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황금색 아우라를 내 눈으로 보다니, 거기다 주인님의 아우라 색이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거 같아. 죽지는 않을 거지만.=

=어, 그러네. 나 황금색 아우라 처음 봐.=

아우라 색이 여러 종류라서 황금색도 있기야 할거라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황금색에 가까운 황색이나 주황색, 노란색은 있어도 눈부시도록 찬란한, 진정한 황금색을 보는건 그녀들도 처음이었다.

그 순간 환인의 아우라가 픽- 형광등이 꺼지듯 사라졌고 여자들이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모암의 기능을 꺼서 그런 거니 놀라지 마라.”

=왜 껐는데?=

“전능감이 너무 강하다.”

=……응?=

기본적인 그리모암 세트 효과만 해도 강한 힘이 느껴지는데 위상력까지 생겨나니 힘에 취할 것 같은 게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갑자기 어마어마한 돈이 생긴 사람 열 명 중 대여섯은 충동적으로 돈을 소비해버리고 파산해버린다.

환인의 정신력은 그런 사람들처럼 말랑말랑하지 않지만, 오히려 그랬기에 더 위험하다고 여겼다.

자신마저도 유혹에 넘어갈 것 같은데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겠나.

“이 이유로 그리모암의 강력이 여러 개로 쪼개져 세상에 퍼진 거겠지.”

=음. 하긴, 갑자기 6~7급에 달하는 힘이 생겨나면 어디에든 쓰고 싶지 않을까?=

=갑자기 생겨난 힘이니까 힘 조절도 어려울 테고, 자칫 실수하면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할 수도 있어.=

안느와 유르파의 대화에 다른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걱정은 없다.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달걀 하나를 건네받아 조심스럽게 쥐고 돌리며 일단 그리모암의 강력 5세트의 효과에 익숙해질 노력을 시작했다.

그걸 옆에서 구경하던 유르파가 고개를 갸웃한다.

=알려진 이야기로는 7급에 가까운 신체 능력이랑 위상력이 더해진다는데, 6급에 해당하는 위상력만 얻은 거야?=

=소문은 과장되어서 퍼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거 같은데. 요 몇백 년 동안 그리모암의 유물을 전부 모은 사람은 없었잖아.=

=어째서 무직자들의 꿈과 희망이라는지 알 거 같네. 6급으로 만들어주는 위상력…… 확실히 대단하긴 한데.=

단순히 위상력만 주는 거라면 좀 문제가 있다.

만약 부여해주는 게 근접 직업자의 위상력이라면 신체까지 덩달아 강화해주어 큰 도움이 되겠지만, 술사의 위상력이라면 위상력 제어도 못할 테니 그야말로 애물단지가 된다.

“느낌을 보자면 반반인 것 같습니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보여주던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으니까요.”

=어, 그러면 근접 전투는 물론 술법도 쓸 수 있다는 건가……?=

파아앗—……!

그때 다시 터져 나오는 휘황찬란한 황금빛 아우라.

그런 아우라에 휘감긴 환인의 손안에서 달걀은 조금도 금이 가지 않은 채 띄워 올려졌다가 환인의 손바닥에 내려앉길 반복한다.

급기야 달걀 몇 개를 더 받아 저글링까지 시작하는 환인.

‘벌써 힘 조절에 적응한 거야?’

오히려 평범한 사람보다 더 완벽해진 힘 조절에 여자들은 작게 탄성을 흘리다가 훨씬 편해진 마음으로 그의 아우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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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드디어 표지의 안느가 등장했네요!

길었다...

[작품 설정]

표지!

부끄부끄하는 안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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