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97화 (597/813)

596 잊혀진 옛 도시 미궁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앙!=

안느는 자신의 앞에 넙죽 엎드린 아영의 연한 자주색 뒤통수를 보며 기막혀했다.

어제 술 마시고 기절한 뒤에 그런 일이 있었다니…….

=잠깐만. 그러니까, 넌 수목화를 임의로 조종하지 못한다는 거야?=

=넵. 저는 평민이라서 불가능해요.=

=저번에 수목화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너 그러겠다고 했잖아. 할 수 있으니까 그리 말한 거 아니었어?=

=보통 수목화에 5년 10년 이렇게 걸리니까…….=

=그때 가서 생각하려고 했다?=

=넵.=

머리가 띵해진 안느는 한 손으로 눈을 덮었다가 곧장 손을 내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지금 수목화가 시작됐어?=

=시작할랑 말랑…….=

슬금슬금 고개를 들던 아영은 뾰족한 안느의 시선을 보곤 다시 머리를 납작 숙였다.

=잘못했습니닷!!=

=아냐아냐. 널 탓해서 그러는 거 아니니까 고개 들어. 아니, 엎드려 있는 거 보기 안 좋으니 일어나.=

=어, 언니 망치로 제 머리 찍으실 거 아니죠……?=

=찍혀볼래?=

냉큼 무릎 꿇고 앉는 아영을 조금 더 기막혀하는 눈으로 바라본 안느가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소파에 풀썩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쩌지.

수목화樹木化가 시작될 거 같다는 것은 몸 안의 노폐물을 내보내고 신체 내부의 자정을 시작해 정수를 생산하기 위한 준비 과정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수목화가 완료되었다는 이야기는 남편의 체질에 맞추어 수명이 늘어나도록, 건강 무탈하게 해주는 생명수를 만들어낸단 뜻이고.

여기까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플뢰 여자가 상대에게 진심으로 애정과 사랑을 품기 시작했을 때, 혹은 마음을 완전히 허락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 수목화다.

아영이 환인에게 마음을 활짝 열었다는 증거이니 어찌 문제가 될까. 싫어할 리 없는 것이다.

‘아니. 내 생명수 말고 다른 게 도령을 건강하게 해주는 건 싫어.’

……그보다, 문제는 한 남자에게 두 명의 플뢰 여자가 붙어 수목화를 일으킨 전례가 없다는 것.

일부일처를 고집하는 플뢰 사회에서 일부다처에 편입된 자신도 이상한 년이고, 플뢰족인 자신이 도령에게 붙어있는데도 도령한테 진심으로 이끌린 아영이 저것도 이상한 애다.

‘도령 여자 중에 평범한 여자가 없긴 하지만…….’

고민이 깊어진다.

따지고보면 이것도 자신의 방심이 불러일으킨 화근이다.

수목화가 그렇게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도령 같은 남자랑 엮이지 않는다면 몰라. 엮인 이상 홀라당 빠져드는 게 당연한 일이지 않나.

거기다 쟤는 도령한테 이거저거 큰 죄도 짓고 은혜도 받고 그랬으니까 수목화의 시작은 시간문제였지.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안느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나무란다.

=너 진짜 쉽네. 도령한테 두 번 안겼다고 몸도 마음도 활짝 열리는 게 말이 돼?=

=안느 아가씨. 그 말은 우리 모두한테 적용되는 말이야.=

머그컵에 커피를 타서 지나던 유르파를 향해 안느가 눈썹을 찡그리자 유르파는 어마 뜨거라 하고 웃으면서 자기 방으로 도망간다.

심란해진 안느는 자기 뺨을 막 문지르다가 자신의 눈치만 보는 아영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네. 내가 방법을 알아볼 테니까 그때까지 도령한테 안기지 마. 펠라 봉사까지는 괜찮지만 밑으로 봉사하는 건 안 돼. 알았지?=

=그게 오빠껄 빨아도 막 몸이…….=

=에잇씨. 너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마. 려강아.=

=네, 언니.=

=혹시 좀 있다 도령이 돌아와서 쟤랑 응응하려고 하면 네가 좀 대신해줄래? 부탁할게.=

안느의 부탁에 조금 빨개진 얼굴로 후후 웃은 백려강이 물었다.

=그런데 수목화를 막을 방법도 있나요?=

=교단 대서고에 있을 거야. 아니, 있길 바라야지. 어째서냐면, 타 종족의 남자 한 명을 위해서 플뢰 여자가 둘이나 수목화 했다는 전례가 없어. 그 말은 두 종류의 생명수로 인해 발생할 후유증이나 여파도 모른다는 거야.=

=앗.=

=아.=

백려강의 옆에서 뒤늦게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는 아영의 얼굴에 참다못한 안느가 쿠션을 던져 맞춘다.

=야이. 려강이는 몰라도 넌 알아야지!=

=죄송합니당!=

=아무튼 대성당에 다녀올 테니까 도령이 돌아와서 나 어디 갔냐고 묻거든 솔직하게 대답해.=

=그럴게요.=

=넵! 다녀오세요!=

미리 잡아둔 약속 시간에 맞춰 집을 나온 환인은 호위 역의 이실리테와 함께 하늘 교류회의 회장이 산다는 귀족 거리로 향했다.

약속은 이미 아드우리 공작이 잡아둔 상태. 가서 대화만 나누면 된다.

“…….”

환인은 매끈하게 면도 받은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보이는 귀족 저택 거리에 시선을 던졌다.

머릿속에 아드우리 공작이 해주었던 이야기가 맴돈다.

‘그는 빈말로 성격이 좋다고 하지 못하오. 그 탓에 교우 관계도 많이 끊겨 근래에는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하더군.’

‘이틀 전, 본인이 찾아갔을 때 한층 더 늙은 데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소. 다만 이야기는 확실히 알아들은 듯하니 성제께 불온한 태도는 보이지 않을 거라…… 믿고 있소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무례한 행동을 할지도 모르니 그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오.’

꾸우~?

“저쪽이다.”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해~?’묻는 비상에게 길을 알려준 환인은 자신이 내밀 거래 조건을 다시 상기했다.

자신을 쫓아 이상 성장한 타락한 바르둘을 죽이고 얻은 적청색 위상석.

자신이 차원 방랑자라는 증거인 박살 난 액정의 스마트폰과 시계.

산란못 미궁에서 중핵 거대 두꺼비를 죽이고 얻은 6급 생명력 강화 위상석.

‘6급 위상석은 보물이라기보다 자산의 느낌이 강하지만…….’

그 외에는 그럭저럭 보물 수집가의 수집욕을 자극할만한 보물이다.

적청색 위상석은 역사상 출현한 적이 전무한 물건은 아니었다. 영도에서 자료를 살펴본 결과 수천~수만 년 니오네브레스 역사에 몇 번인가 출현한 적이 있었다는 것.

물론 기록된 위상석은 적청색이 아니라 녹황색, 흑록색, 적백색이었지만 아무튼.

그게 어떻게 소비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적청색 위상석 또한 보물의 역할은 충분히 할 것이다.

희귀성 뿐만 아니라 실제 위상석의 효능도 보물에 걸맞았기 때문이었다.

유르파가 기나긴 분석 끝에 알아낸 효능은 세 가지.

상처 지속 회복과 위상력 회복 속도 상승,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키니 컨디션까지도 일정 이상 유지해주는 거다.

‘컨디션 유지 효과는 중독성이 강해서 유르파는 사용을 추천하지 않았지만.’

이 사실은 유르파만 알고 있다. 아니, 관련 업계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아무튼 이러니 물질적인 가치로도, 희귀도 면에서도 충분히 보물로 꼽을 수 있는 게 적청색 위상석이다.

그리고 물을 먹어 고장 난데다 류히 일행을 구출하는 도중 싸움에서 부서진 스마트폰에 시계.

이런 폐품을 거래 품목에 넣은 것은, 의외로 차원 방랑자의 소지품을 비싸게 거래하는 곳이 있다 들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소지품 말고 고도의 기계장치 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환인의 손목시계는 지구에서 최고가 브랜드로 통하는 회사의 수제품.

비록 커버글라스에 금이 가고 시침, 분침이 찌그러졌지만 이 세계의 기술력이면 충분히 수리할 수 있고, 수리하면 지금도 멀쩡히 사용 가능하다.

=주인님. 혹시 이 담장이…….=

“그래. 지금 찾아가는 인물의 집이다.”

생각을 정리하며 하늘 교류회 회장, 디전=펠드릭스의 저택 담장에 도착한 환인은 눈에 보이는 저택의 규모에 눈을 차갑게 빛냈다.

도로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길고 긴 장미 담장.

쇠창살에 얽힌 덩굴 사이로 보이는 것은 유럽의 궁궐에 비견될 정도로 오래되고 고풍스러운 대저택이다.

드넓은 정원은 매일같이 손질받고 있는 듯 깔끔하기 그지없으며 대저택 외벽을 뒤덮은 덩굴은 봄을 맞이해 푸릇푸릇해지며 고상한 풍취를 드높인다.

대저택 외에도 크고 작은 저택이 붙어있는 게, 토지 면적만 따지면 축구장 세 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수준.

‘안되면 정의로운 도둑이 출현할 수밖에.’

거래하자고 나타난 뒤에 그 물건이 도둑맞으면 당연히 이쪽을 의심하겠지.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길고 복잡한 단계를 거쳐 의심 사지 않게끔 신경 써야 할 테지만, 그런 수고를 들일 가치는 충분하다.

방법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나와라.’

환인의 부름에 왼팔의 혼옥 보관고에서 여섯의 푸른색 영혼 구슬이 빠져나와 플뢰족 남녀의 모습으로 변한다.

「부르셨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엘위드리스 원로원 직속 아르겐테아 비밀 정찰대원 여섯. 이제는 자신의 정찰용 영혼이 된 자들.

환인은 알몸으로 공중에 둥둥 떠 있는 플뢰족 남녀 여섯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저택 내부를 샅샅이 조사해와라. 숨겨진 방까지 전부.’

「예!」

「넷.」

다섯은 쏜살같이 대저택으로 날아갔지만 하나는 여전히 자리에 남아있었다. 영도로 끌려간 정찰대장의 부관인 여자 플뢰다.

부관 영혼은 영혼임에도 부끄러운 듯 탐스러운 호빵 모양의 가슴과 사타구니를 살짝 가리고 서 있었다.

영체이기에 반투명해 가린 팔 너머로 전부 보인다는 걸 모르는 걸까.

부관 영혼은 송구하다는 듯이 물었다.

「성제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말씀해주시면 그것에 초점을 맞추어 조사하겠습니다. 원치 않으시다면 다시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원로원의 사냥개로 쓰이다 거두어진 뒤 자신의 행보를 지켜보며 무언가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걸까.

환인은 잠시 부관 영혼을 바라보다 사유를 설명해주었다.

「수전노에 구두쇠인 자에게서 그리모암의 모자를 훔쳐내기 위한 사전 조사입니까.」

‘수전노인지 구두쇠인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밑조사로군요. 알겠습니다.」

부관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달리 하늘로 날아오른다. 위에서부터 조감도를 그려나가려는 듯하다.

때맞춰 안주머니에서 환연이 말을 걸어왔다.

「환인. 만약 그 인간이 거래를 거절하면 어쩔 건데?」

“어떻게 할까.”

「정해놓지도 않고 무턱대고 가는 중인 거야? 내가 정령으로 보물 숨겨놓은 데 한 번 찾아볼까?」

자신의 피가 이어진 것을 증명하듯이 훔칠 것을 은근히 종용하는 환연이다.

환인은 후 작게 웃으며 말했다.

“이만한 대저택의 주인이라면 술법이든 정령이든 방비는 해놓았겠지. 그러지도 않을 만큼 허술했다면 이만한 대저택을 지을 재산을 쌓지도 못했을 테고.”

「음.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권력자를 쓸 거야?」

환연의 질문을 들은 이실리테도 쿠르티를 비상 쪽에 살짝 붙이며 궁금하단 표정을 짓는다.

“큭큭.”

「뭐야. 왜 웃어.」

“역시 넌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어서.”

「……?」

=……??=

이거 칭찬이야 욕이야?

이해를 못 한 환연이 입술을 삐죽거리고 이실리테도 고개를 갸웃할 때, 환인은 저 앞에 보이는 정문과 정문을 지키는 경비병을 확인하고 안주머니 쪽을 툭툭 건드렸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야기해주지. 곧 정문이니 이제부터 조용히 해라.”

「응. 시킬 거 있으면 말해. 주변에 상급 정령 불러놨으니까.」

그녀의 이야기에 영혼의 눈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정령은커녕 정령력도 보이지 않는다.

‘날 어지간히도 경계하는군.’

앞으로 정령을 잡아 구슬로 만드는 건 그만해야 할까.

그리 생각하며 정문에 도착한 환인과 이실리테는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문이 없어요…….=

자신감과 힘을 과시하듯 훤히 열려있는 정문 입구. 아니, 아예 문짝이 존재하질 않는다.

보이는 거라곤 150m는 되어 보이는 중앙길과 거대한 분수, 그리고 그 길 끝에 있는 대저택뿐.

용무가 있다면 네가 누구든 들어와 보라는 패기가 느껴지는 구조다.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경비병은 환인이 말을 꺼내기 전에 공손히 허릴 숙여 인사했고, 다른 신분 확인도 없이 곧장 대저택 입구까지 안내해주었다.

자신감의 발로인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가 이미 귀족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진 건가.

‘후자겠지. 이실리테도 옆에 있고.’

경비병의 선행을 따라가며 대저택 입구에 도착한 환인과 이실리테는 타고 있던 쿠에의 등에서 내렸고, 때마침 문이 열리며 수석 하녀 같은 루크랑 인견족 여성이 나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본 저택의 수석 관리자, 르힘이라 합니다. 허락하신다면 곧바로 어르신께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백작의 대저택을 관리하는 인사가 평민일 리 없다.

팔라툼에도 이종족 귀족이 있지만, 그들은 대다수 귀족계급 말단인 남작 계열. 이 여자도 그렇겠지.

“부탁합니다. 비상, 쿠르티와 함께 근처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쿠으~

저택 관리자를 따라 들어간 내부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감이었다.

흑단목을 벽재와 바닥재로 썼는지 온통 거무칙칙했으며 웅장한 느낌의 중앙 계단 또한 검은색 대리석 위주다.

심각한 것은 가구와 꽃병도, 꽃병에 꽂혀있는 꽃에 복도를 장식하는 갑주 또한 검은색이라는 것.

똑똑똑—

=어르신. 성제 예하께서 도착하였습니다.=

[들어오시라 전하게.]

검은색과 갈색이 사선으로 멋지게 가로지르는 흑단목 문 너머로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수석 하녀가 문에서 비켜 살짝 허리를 숙인 걸 보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들어간 곳도 온통 검은색이었다.

반대편의 커다란 창문의 검은색 틀. 가죽 소파와 테이블도 전부 검은색이며 검은색 중역 책상에 좌우 벽을 가득 채운 검은색 책장과 검은색 가죽 표지의 수많은 책들.

검지 않은 것은 중역 책상 너머에 앉아있는 노인의 올백으로 넘긴 하얀 머리카락과 두 쌍의 하얀 날개, 그리고 피부뿐이다.

젊었을 적 고생을 많이 했는지 주름이 심하게 진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정한 몸짓으로 가볍게 목례했다.

=처음 뵙겠소. 본인이 디전 펠드릭스. 펠드릭스 가문의 주인이오.=

이러한 첫 만남에 상대에게 먼저 인사하는 것은 자신이 당신보다 지위가 낮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서 의외로 수전노의 깐깐한 성질머리가 느껴지지 않는 것에 살짝 의아해하며 인사를 정중히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영도에서 과분한 칭호를 받아 세상을 순례 중인 영혼사, 환인이라 합니다. 이쪽은 제 영혼 기사인 검희 이실리테.”

이실리테의 가벼운 목례에 펠드릭스 백작도 고갤 끄덕였다.

=팔라툼 귀족가에서 떠들썩한 분이 이렇게 귀족적인 인물일 줄 몰랐군. 몸이 불편해 예의가 다소 모자란 것을 양해 부탁드리오. 거기 소파에 앉지.=

환인은 펠드릭스 백작이 가리킨 소파에 앉고 이실리테는 그 뒤에 열중쉬어 자세로 선다.

그사이 검은색 흑단목 귀족 지팡이를 짚고 절뚝이며 걸어온 디전=펠드릭스는 플라비우스족을 위한 등받이 폭이 좁은 의자에 앉아 검은색 벨을 울렸다.

=네, 주인님.=

옆방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녹색 도마뱀 머리의 사비족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실 것을 부탁하지. 성제께서는 기피하시거나 선호하시는 것이 있으시오?=

“기피하는 것은 없습니다. 차는 커피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거기 영혼 기사 아가씨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길.=

=음.=

펠드릭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옆방으로 사라진 사비족 메이드는 티 카트를 밀고 들어와 능숙한 솜씨로 홍차와 커피를 내린다.

=차 시중 담당은 사비족만 한 인물이 없지. 특유의 온도 감지로 우려낸 차는 그야말로 일품.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오?=

“확실히 향기부터가 남다르군요.”

피트 기관을 이용해 0.1도의 오차까지 잡아내는 차 시중인인가.

메이드가 내려준 커피는 놀랍게도 우유와는 다른 살짝 투명한 백색이었다.

환인이 유심히 백커피를 살피자 홍차를 받아든 펠드릭스 백작이 작게 웃는다.

=벨티칼의 아주르엔 지역 토산 백커피요. 1년에 불과 500g이 채 나지 않는다오.=

보통 커피보다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커피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뚜렷한 향을 음미하던 환인은 그 이야기에 잠깐 움직임을 멈추었다.

원두 500g이면 대강 50~60샷 가량을 추출할 수 있다.

보통 아메리카노가 1~1.5샷이 들어가니 최대한 많이 마실 수 있게 소분한다 해도 1년에 60잔이 채 안 된다는 뜻.

그야말로 진귀한 커피의 향에 환인은 만족스러움을 드러내며 조금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어디에서도 맡아본 적이 없는 향입니다. 일반적인 커피라면 둘에서 셋 정도의 향이 섞여 있기 마련인데…….”

=아주르엔은 고소한 풍미 하나뿐이지. 그럼에도 커피가 아니라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고.=

커피의 진면목을 알아봐주는 환인의 태도에 펠드릭스 백작은 씨익- 웃으며 붉은 홍차로 살짝 입을 축였다.

그리고 진지해진 얼굴로 이게 본론임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자면, 라드세아 성궁에서 인물이 찾아와 그리모암의 유물을 넘겨줄 수 없냐 물었을 때부터 이 상황이 오리라 확신하고 있었소.=

“그렇습니까.”

=성제께서 본인을 찾아오셨다는 것은 나머지 네 개를 전부 수집하셨다는 뜻이겠지. 그렇지 않소?=

“맞습니다. 앞으로의 여정에 그리모암의 다섯 유물이 꼭 필요하리라 생각해서 이렇게 발걸음하게 되었습니다.”

거래에서 이쪽이 꼭 필요하다는 말은 꺼낼 이유가 없는 소리다. 이쪽이 얼마나 간절한지만 보이는 말이기에 상대방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식이기 때문.

하지만 환인은 굳이 그 말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펠드릭스 백작은 그 말에서 환인의 의중을 읽고는 어려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 이상으로 지혜로운 사람. 이런 사람에게 허튼 소리는 오히려 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펠드릭스 백작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층 더 진지해진 모습으로 말했다.

=아무리 본인이 보물과 재산에 미쳐 있다 하여도 영도의 대성자 후보께 속물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소. 즉, 성제시라면 그리모암의 모자를 내어드려도 괜찮다고 생각하오.=

“대신 부탁하실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역시. 펠드릭스 백작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것은 열정도, 의지도, 기운도 다 빠져버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 같은 분위기.

=부끄럽지만, 죽을 때가 눈에 보이기 시작해서야 본인이 이때까지 잘못 살아왔다는 걸 깨달았소.=

“…….”

=깨달음이라. 깨달음이긴 하지. 대를 이을 하나뿐인 손주의 행동에서 본인의 젊었을 적 추한 행동거지를 보고 말았으니까.=

신음과도 같은 한숨을 내쉰 백작이 간절함을 드러내며 묻는다.

=다음 대에서부터 명예도, 지위도, 재산도 모두 사라질 거라는 미래를 본 늙은이의 기분이 어떨지, 성제께서는 짐작하시겠소?=

“……백작께서 살아오신 날에 비하면 채 반의 반도 살지 않은 제가 어찌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살던 곳에는 반면교사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될 나쁜 본보기를 뜻하는 네 글자.

숨은 뜻이 담긴 환인의 나지막한 이야기에 펠드릭스 백작의 표정이 흐려진다.

=어찌 그렇게 본인에게 걸맞은 이야기인지……. 맞소. 손주의 행동을 보고 나서야 본인이 얼마나 추악한 삶을 보내왔는지 깨닫고 말았소. 그 손주가 누굴 보고 그리 자랐는지도.=

이쯤되면 모른척 하기도 어렵다.

“펠드릭스 백작께서 무엇을 부탁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만, 저는 선생에 자질이 없는 편입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두들겨서 깨달음을 몸에 새겨주는 것뿐인데 어찌 선생이라 불리겠습니까.”

=으음? 그……게 당연한 게 아닌가?=

“……?”

=……?=

서로의 기준이 달라 헛도는 모습에 이실리테는 망설이다가 실례를 무릅쓰고 환인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이 세상에서는 매로 다스리고 가르침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에요.=

=아아. 그랬지, 성제께서는 차원 방랑자시라는 걸 깜빡했소.=

이실리테의 속삭임에 뒤늦게 실수를 눈치챈 펠드릭스 백작은 민망함에, 이 세계가 생각 이상으로 야만적이라는 것을 간과했던 환인은 한숨에 잠깐 시선을 돌렸다.

어색함 속에서 차를 마시는 시간이 지나고 잠시 후.

마음의 동요를 가라앉힌 백작이 조금은 차분해진 모습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드리지. 본인의 손주인 리민 펠드릭스는 펠드릭스 가문의 차기 후계자인데다 나름 그 자질이 뛰어나 열다섯의 나이로 이쌍익을 이뤄낸 인재요.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은 물론 돈도 많으며 신분 또한 높으니…….=

사람이 안하무인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더욱이 본보기가 될 할애비라는 자도 돈과 보물에 미친 인물이었으니 오죽할까.

손주가 망종 중에서도 개망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펠드릭스는 그 충격에 성격이 고쳐졌지만, 문제는 손주.

실력도, 신분도 낮지 않으니 그런 그를 훈계하여 다스릴 선생을 구하기 어려웠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실력있는 사람을 구해와 손주에게 붙여보았지만, 어중간한 자는 신분과 힘으로 찍어눌러 버렸다.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만심만 키워줘 지금은 더더욱 손댈 길이 없어진 상황.

반대로 손주를 힘과 신분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인물들은 그런 선생 같은 일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은 물론, 재산을 뚝 떼어준다 해도 곤란함을 드러냈다.

성공하더라도 자칫 차기 백작에게 원한을 사기 쉽고 실패하면 자신의 명예에 흠이 생긴다.

받아야할 이유가 없는 의뢰였던 것이다.

=그러던 중 성제께서 찾아오신 거요. 알려지기로 검희와 정령 기사의 무술 스승이자 암살자의 암습마저도 막아내는 천재적이면서 천부적인 무술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대성녀님과도 견줄 수 있는 영혼술의 대가.=

힘도, 권력도, 신분도, 위상도 어디하나 나무랄데 없으며 볼일이 끝나면 팔라툼을 훌쩍 떠날 인물.

이보다 손주의 교육 선생에 걸맞는 사람은 없다.

=본인은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소. 최악에는…… 대가 끊기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소. 수백 년 가문의 끝을 망치는 것보다 대가 끊어져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게 조상의 얼굴에 먹칠을 덜 할테니.=

펠드릭스 백작은 흐흐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평생을 망종으로 산 작자가 이제 와 정신을 차리고 후계를 생각한다니, 우습지 않소?=

“반성과 후회는 언제 하더라도 늦지 않은 법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환인은 눈을 차갑게 빛내며 펠드릭스 백작에게 확답을 요구했다.

“정말 손주가 훈육 도중 목숨을 잃어도 상관없으십니까.”

=그렇소. 하늘신님께 맹세코.=

그리 대답했던 백작은 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다 환인과 비슷하게 형형해진 눈빛을 지었다.

=만약 훈육하시겠다면 걸맞는 장소를 추천해 드리지.=

“장소라면.”

=잊혀진 옛 도시 미궁, 거기가 적절할 것이오. 마침 손주도 머리가 굵어져 미궁엘 들어가겠다며 날뛰는 상황이니…… 훈육의 시간은 부자연스럽지 않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오.=

수단과 방법은 상관하지 않겠다. 그 과정에서 죽이더라도 애간장이 끊어지는 심정으로 허락하겠다.

그러니 부탁한다.

환인은 백작의 결심에 가득찬 눈빛을 마주하다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좋습니다. 한 번 힘을 써보겠습니다.”

자신에게는 손해 볼 것이 없다. 두들겨 패서도 말을 듣지 않는다면 미궁 심층에서 목을 벤 뒤 돌아오면 그만이니까.

차기 백작이 죽은 게 뭐 어떻다는 건가. 양측 합의가 된 마당인데.

=다행이군…….=

환인의 승낙에 펠드릭스 백작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숨 한 번에 수명을 더욱 떼어낸듯 좀 더 늙어버린 백작은 약간의 후련함과 우울함,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얼룩진 표정을 감추며 손 안의 종을 다시 울렸다.

딸랑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이번에는 복도와 이어진 문이 열리며 수석 관리자가 신발 상자 크기의 고급스러운 함을 가지고 들어온다.

=교육비는 선급으로 드리겠소. 부디…… 손주를 잘 부탁드리오.=

함의 안에는 뜻밖에 모자나 후드 같은 것이 아닌, 귀에 꽂는 무선 리시버와 흡사한 형태의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리모암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유물.

그리모암의 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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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며칠 전 칼텍의 과학자들이 작은 아기 웜홀을 구현하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당

이제 그 웜홀이 커지고 완전해지면 외차원의 정체불명 에너지가 그 웜홀을 통해 흘러들어와 세상이 뒤집어지는 건가요?

슬슬 특이점이 다가오는 거 같은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됩니당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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