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95화 (595/813)

593 천공성 파르세타

* * * *

시중인들의 두 손 모은 배웅을 받으며 천왕궁의 북녁궁에서 나온 테이아무스 섭정은 부쩍 포근해진 날씨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아리도록 파아란 하늘.

겨울 하늘과 봄 하늘, 둘에 차이는 없을 터인데 어찌 봄 하늘은 저리도 포근해 보인단 말인가.

=전하.=

=그래요.=

가까이 다가온 보좌 가신의 부름에 대답한 테이아무스는 좌우에서 허리를 숙인 보좌 가신들 사이를 지나가며 입을 뗐다.

=오늘 닐비나 천왕 폐하의 용태는 어떤가요.=

=유례없이 건강하고 쾌활하십니다.=

=…….=

보좌 가신의 대답에 테이아무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정오 다과와 저녁 만찬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수석 주방장께서 이른 새벽에 일어나 차질 없이 준비 중입니다.=

=성제 예하는 타 차원의 귀족이란 말도 전했겠지요.=

=빠짐없이 전하였습니다. 그 세계의 요리도 준비 중에 있다 하였으니 성제 예하께서도 흡족해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2 천공기사단에서 벌어진 사건의 추이는 어떻게 되었죠?=

=레아우카 사바인 백작은 순순히 칙령을 받아들여 제2 천공기사단 단장직에서 물러나 저택에 감금되었습니다.=

=감금? 분명 정직 처분이라 전하였을 텐데 하여튼 강성 파벌 그치들은…….=

=이 기회에 평온주의 파벌의 힘을 깎아놓으려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실제 제1 천공기사단에서 일부 기사가 각출 되어 사바인 백작의 저택을 감시하고 있다는 연락이 새벽에 들어왔습니다.=

=…….=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인해 은색으로 빛나는 천왕궁 겨울 정원을 가로지르며 테이아무스는 속으로 근심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틀 전 북극성실에서 보았던 성제의 그 모습 덕에 테이아무스는 사바인 백작의 행동을 공감하고 있었다.

그날 보았던 성제의 소름 끼치는 인외의 형상은 자신의 착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착각이었다면 요 이틀간 자다가도 그때 일이 생각나 흠칫거리면서 몇 번이고 깨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파멸의 짐승…….’

혹시 메리아놀의 예언자 가문으로 유명한 엘위드리스의 원로들도 그걸 보고 경기를 일으켜 성제를 암살하려 든다는 미친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자신이야 그저 감만으로 느꼈지만, 그들은 혈계술로 현실같이 선명한 예지를 보았을 테니까.

‘실제로도 아드우리 공작이 전해주었지. 플뢰들이 이르길, 사악한 마왕이라고.’

머리는 성제와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고 설득하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정 반대였다.

어째서인가하면…….

=엄마!=

=닐비나 폐하. 어미가 아니라 호칭을 부르셔야지요.=

=으응. 아직 업무 시간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테이아 엄마는 아직 엄마예요.=

테이아무스는 자기 삶의 목표이자 이유나 다름없는 사랑스러운 딸의 애교에 잔뜩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안아달라며 내민 귀엽고 아기자기한 두 팔에 그녀를 보듬어 안은 테이아무스는 소중한 딸의 따스한 체온에 한껏 행복을 충전하다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크레아 닐비도 같이 안아준다.

성제와 단호히 거리를 두지 못하는 이유. 이것 때문이다.

=그래요. 비나 루에나 그리고 크레아 닐비, 눈은 어떤가요?=

=좋아요! 환인 형이 세 번 왔다 가신 뒤로 이제 눈이 안 아파요!=

=저도요. 어젯밤에는 한 번도 잠에서 안 깼어요.=

=정말인가요? 과연 성제 예하는 커다란 분이시네요.=

=네!=

=네~!=

성제가 오기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지혜열로 두통을 호소하며 축 늘어지던 사랑스러운 딸과 딸의 미래 낭군이었다.

그랬는데 그가 다녀간 뒤로 소중하디 소중한 닐비나 폐하께서 이토록 건강해지신 것이다.

궁내 어의의 소견도 동일했다. 자신의 희망이자 히스론드의 미래와 다름없는 분들이 이토록 건강해졌는데 어찌 어미된 자로서, 섭정으로서 그에게 반발한단 말인가.

하늘신님의 사도가 되어 왕이 되실 사쌍익의 아이들이 어째서 성인이 되지 못하고 요절하는가.

신의 눈동자가 주는 부담을 이겨내지 못해 알에서 태어난 직후부터 수명이 깎여나가기 때문이다.

100명의 사쌍익의 아이가 태어나면 그중 70은 아기일 적 사망하고 20은 유아기에, 8은 유소년기에 사망한다.

남은 두 명도 오랜 투병 및 와병 생활로 약해진 몸 탓에 성인이 되어서도 온갖 치유 불가능한 위상력 질병에 괴로워하다 성년이 되고 얼마 안 가 사망하기 일쑤.

역대 최장수한 사쌍익의 아이가 스물셋일 정도이니 신의 사도만 아니었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 불러도 무방한 일이다.

그런데 닐비나 폐하께서는 여느 또래의 아이들처럼 건강해지셨다.

가문 대대로 수백 년간 어의의 위치를 확립해온 가문의 가주인 그녀의 소꿉친구가 말했었다.

‘성제 본신에 깃든 막대한 정보가 두 분 폐하의 눈동자를 강제로 한 단계 끌어올린 거야. 지금 닐비나 폐하의 눈동자 변화 형태는 성인이 되기 직전과 동일해. 이게 뭘 말하는 거겠어?’

두 분 폐하의 수명을 깎아내는 그 기간이 99% 가까이 단축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많은 군중을 보며 신의 눈동자에 가해질 부담을 조금씩 적응시키는 단계뿐.

약간의 피로만 줄 뿐이지 수명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마지막 요식적인 절차 뿐이다.

즉 이번 대의 천왕 폐하께서는 오래오래 무병장수하실 거라는 이야기.

‘거기다 영기 전수 치료까지.’

영성의 영기는 생명의 기운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치매가 들어 망령 난 늙은이의 정신마저 멀쩡하게 되돌릴 정도.

그걸 영성도 아닌 유일 직업 영혼사가 펼쳐주었으니 그 효과는 또 어느 정도일 것인가.

‘정말…… 이래서는.’

히스론드에 끔찍한 해악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이상 그를 못 본 척하거나 거리를 둘 수가 없다.

=환인 형의 아우라 엄청 멋있는데. 또 보고 싶다.=

=나두.=

=형한테 같이 궁에서 살자고 하면…… 안 되겠지?=

=안돼~. 오빤 훌륭한 성제님이잖아. 우리 말고 다른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도 도와드려야 한다고 그랬어.=

=으~. 비상이랑도 더 놀고 싶은데에.=

자신의 품 안에서 속닥거리는 목소리에 테이아무스는 눈이 번쩍 뜨였다.

=크레아 닐비. 성제 예하의 아우라라니요? 혹시 그분의 아우라도 보이시는 건가요?=

=네! 엄청 엄청 멋있어요!=

=오빠 얼굴이 안 보일 정도로 아우라가 짙어요. 그리고 넓어요.=

테이아무스는 숨 쉬는 것도 잊고 두 소중한 왕의 이야기를 단서로 머릿속에 그 아우라 형태를 그렸다.

황금빛 태양의 베일을 여러 겹 몸에 두른 모양새.

그 범위는 평범한 직업자의 수십 배에 달할 정도이며 그 형태 또한 희귀하기 짝이 없고 농도마저 역대 출현한 여느 직업자와도 비견되지 않는 짙음.

닐비나를 품에서 내려준 테이아무스는 어머니의 미소로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뺨에 쪽쪽, 뽀뽀해준 다음 북극성실 내에 마련된 사무 책상으로 향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드우리 공작. 듣고 있으시겠지요. 빨리 북극성실로 오세요.=

=……결론은 그거로군. 유일 직업자의 강대한 아우라와 그 아우라에 깃든 정보가 신의 눈동자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

=성제가 신의 눈동자에 끼친 영향의 이유를 조사하려던 계획은 중지해야겠어요. 미래에 태어날 사쌍익의 아이들을 위해 모으려 하였는데…… 안타깝게 되었네요.=

=그러는 게 좋아 보이오. 지난 사흘간 성제를 보며 생각한 건데, 오히려 알려진 소문이 과소평가되었단 느낌이 강하니까.=

=…성궁과 영도에서 정보 공작을 펼쳤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시나요?=

=라드세아의 음흉한 여우 자식이라도 성제를 다 분석하지는 못했을 거요. 대충 8할? 영도의 대성녀님은…… 그분도 인간사 세파에 조금 찌드셨다곤 하나 신수 기린이시니 절반 정도가 아니겠소?=

거창하게 내놓은 답이지만 완전히 틀렸다.

닌실 대성녀는 환인과 정사를 치르며 그의 심성을 토대로 거의 완벽에 가까울 만큼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였고, 라드세아의 호천명은 오히려 그의 능력에 홀려 인성을 간과한 것.

=이것을 참작해본다면 알려진 소문은 성제의 실력에 절반이 아닐까 의심해보아야겠지. 신의 눈동자를 크게 성장시켜줄 정도가 고작 그정도일리 없으니까.=

=…….=

=…….=

테이아무스 섭정과 아드우리 공작의 표정이 흐려진다. 덩달아 대화도 멈추었다.

히히히!

꺄하하!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고 항상 청결을 유지하는 마법의 원단으로 만든 의복을 입고 장난치는 사쌍익의 두 아이, 닐비나를 잠시 바라보던 아드우리는 기품있게 고개를 저은 뒤 입을 열었다.

=복잡하게 생각해봤자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없소. 히스론드의 미래에 빛을 비춘 은인이지 않소이까?=

=그렇지요. 이때까지의 행적만 보면 호의에는 호의로 답하는 사람이니까요.=

=음. 금일 연회와 만찬은 섭정께 맡기겠소. 그 외 평온주의 파벌과 강성패도 파벌의 중재와 뒷수습은 본인에게 맡겨주시오.=

=부탁하겠어요.=

* * * *

이번에 찾아온 수석 상안 미리도르무는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자연을 주제로 환인의 여자들을 여신처럼 꾸며주었다.

대지의 호박색, 바다의 푸른색, 구름의 하얀색, 낮과 밤의 은색과 라벤더색.

게다가 현대적인 감성의 이전 드레스와 달리 이번에는 제법 니오네브레스의 시대상과 잘 어울리는 중세풍 드레스. 여기에 금화 수십~수백 닢은 될법한 장신구를 걸쳐서일까.

=너, 너무 화려한 게 아닌가요?=

환인의 여자들은 히스론드 왕궁엘 가는데 이렇게 화려해도 될까 걱정을 드러냈지만…….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제 예하와 영혼 기사 여러분께는 모든 허가가 내려온 상태이니까요!=

미리도르무의 자신에 찬 발언에 얼떨떨한 얼굴로 얌전히 드레스와 장신구를 착용했다.

천주산 봉우리로 향하는 과정에 저번 같은 말썽은 일절 없었다.

비상이 이번에도 천공의 배를 가져온 천공의 매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저번과 다르게 이번 천공의 매는 그 기품만큼이나 여유 있는 모습으로 비상을 포용해서 다독였던 것.

부리 끝으로 친밀함을 드러내고 뺨을 맞대는 걸로 호의를 표시하는 행동에는 비상도 골을 낼 수가 없었다.

아름답게 꾸민 여자친구들과 천공의 배에 오른 환인은 느긋하게 상승하는 천공의 배에서 팔라툼의 전경을 감상했다.

가장 높은 산의 산자락에 위치한 도시. 그리고 좌우로 그보다 더 낮은 봉우리의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두 도시.

“천주산 기슭의 도시가 중심 도시인가.”

=넵. 서주산과 동주산은 각각 농업과 공업이 특징인 도시임다.=

“그냥 보아서는 다른 평범한 대도시와 흡사하군.”

이만큼 높은 곳에서 보니 지구의 밝고 깨끗한 관광특구 대도시 같은 느낌이다.

아니, 공기는 폐부가 시릴 만큼 맑고 자동차나 기차 같은 철마의 시끄러운 소리가 없어 오히려 이쪽의 경관이 더 훌륭하다.

하늘을 나는 배의 선수에서 지상을 구경하며 도착한 봉우리에는 컨버터블 마차와 제1 천공기사단의 기사 여섯 명이 예식복 차림으로 나와 대기 중이었다.

천공성으로 가는 길은 눈마저 깨끗이 정리되어 레드카펫이 깔린 모습.

어딜 봐도 귀빈을 맞이하기 위한 모습이지만, 저번에 왔을 때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 대접에 여자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다.

6인승 마차에 올라앉자 그의 옆자리에 앉은 안느가 팔짱을 끼며 귀에 속삭였다.

=있지, 도령. 혹시 우리한테 말 안 해준 거 있어?=

“글쎄. 중요한 것은 다 해주었는데.”

=근데 사흘 만에 대접이 하늘 수준에서 하늘을 뚫고 올라간 수준이 됐잖아.=

“닐비나 천왕 폐하의 신안에 내가 큰 도움이 되었나 보지.”

=응? ……아.=

천공성에 들어와 저번처럼 원반을 타고 북극성실에 도착한 여자들은 갑자기 변한 대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환인 형!=

이전에는 환인을 보고 열이 펄펄 끓던 두 아이가 그야말로 쌩쌩해져서는 우다다 달려와 환인의 다리에 덥석 매달렸던 거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마음을 사지 않은 이상 나오지 않는 행동.

이뿐만이 아니다.

북극성실 내부에서 대기 중인 시녀도 봉행자가 아니라 평범한 귀족 영애 시녀들이며 천공기사단의 기사들이 정복 차림으로 기사 석상처럼 우뚝 서 있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아 다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증거.

과연, 이래서 대접이 이렇게 바뀌게 된 거구나.

여자들은 환인을 다시금 대단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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