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2 천공성 파르세타
저녁은 이실리테가 직접 쥔 초밥이었다.
호천명의 입위 기사인 주화에게 배운 조리법이지만, 호천명과 헤어진 뒤에는 생선을 구할 수 없어 머릿속으로만 구상하던 음식.
환인에게만큼은 완벽한 요리를 해주고 싶었던 이실리테는 우연히 구하게 된 생선으로 일단 시험 삼아 초밥을 쥐어보기 시작했다.
시험대는 자신과 안느의 입.
=응~! 이거야! 밥의 두께, 식감, 맛 전부 완벽해!=
=이거라는 거지?=
안느는 생선을 못 먹기에 완전한 시식 대상이라고는 못하지만, 그 외에는 전부 알고 있다.
먼저 형태부터 잡아보고 채소로 초밥을 만들어 그 맛을 확인받은 뒤 자신도 먹어서 맛을 각인, 거기에 변동을 주어나간다.
그렇게 준비된 각종 생선, 육고기 초밥의 향연은 환인의 가감없는 칭찬을 끌어냈다.
“맛이 아주 좋군. 생선도 싱싱하고 쿠바로도 코가 아플 정도로 신선해.”
니오네브레스식 고추냉이의 강렬한 맛과 자극에 코끝이 찡해진 환인은 정말 오랜만의 그 자극에 심히 만족스러웠다.
깨끗하게 씻은 손으로 초밥을 계속 쥐던 이실리테의 얼굴에 성취감과 기쁨이 잔뜩 드러난 것은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회의 숙성 상태에 따른 식감과 감칠맛의 변화는 모르는듯해 환인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이실리테. 생선회를 먹는 방법에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건 알고 있나.”
=네? 그, 그런 이야기는 못 들어봤어요.=
=가끔 회 먹을 때 맛이 다르게 나오던데. 그거랑 관계가 있으려나?=
=아. 저도 그래요. 어떨 땐 식감이 무척 부드러운데 어떨 땐 치아가 잘 안 들어갈 정도로 탱글탱글한 게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다른 생선인가보다 했는데 같은 생선이라는 말에 무척 놀란 적이 있어요.=
회의 숙성 상태에 따른 차이를 아는 것은 안느와 백려강이었다. 아영은 별 관심이 없는 쪽이었고 유르파는 그저 음식이 맛있으니까 만족해하는 편.
두 사람은 바다나 바다같이 넓은 호수와 인접한 곳에서 살았으니 그 차이를 아는 거겠지.
활어회, 숙성회, 선어회가 있고 그에 대한 차이를 이야기하니 이실리테는 바로 다음 요리에 적용하기 위해 유심히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비싼 발효주를 곁들여 이실리테가 쥐여주는 초밥을 먹으며 두런두런 담소가 오가는 저녁 식사 자리.
환인은 행복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이실리테가 쥐여주는 초밥을 맛있게 먹던 아영에게 말했다.
“아영. 요즘 몸에 변화가 일어나는 느낌은 없었나.”
=네? 아뇨, 딱히……? 아, 아침에 일어나는 게 편해졌어요.=
=그래? 이전에는 어땠는데?=
이실리테가 만들어준 새싹 비빔밥을 냠냠 먹던 안느가 묻자 아영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힘들었죠. 일어나면 피가 하반신에 고여있다가 밑에서부터 천천히 머리까지 올라오는 느낌? 대충 심장까지 올라오면 그때부터 몸이 움직여지는데 거기까지 30분 넘게 걸리고 그랬어요. 컨디션 안 좋을 땐 밑으로 막 피도 쏟아지고.=
=……그날도 아닌데?=
=월경하는 날은 더 심해요. 거의 비몽사몽? 잤는데 잔 거 같지도 않고, 일어나보면 시트가 완전 피바다였던 적도 있었고요.=
여자들은 그 표현에 미간을 잔뜩 좁히거나 작게 비명, 신음을 지른다.
=그랬는데~ 오빠한테 사랑을 받은 뒤에는 엄청 편해졌어요! 구름 속에 폭 파묻혀서 꿀잠 자는 느낌? 눈 뜨면 몸이 바로 움직여지고 손발이랑 배도 안 차갑고, 요즘은 밤이 기다려질 정도로 완전 행복해요.=
진짜 행복하다는 듯이 헤실헤실 웃는데 라벤더색 단발이 그녀의 기분을 표현하듯 부드럽게 찰랑인다.
다른 여자들은 그렇게 변한 이유를 깨닫고 환인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아영은 몸 상태의 회복에 집중되었나 보군.”
=그러게. 애초에 도령 만나기 전부터 쟤 몸은 엉망진창이었으니까.=
=몸을 최적화해주는 힘이니까 몸 상태가 최악이면 그것부터 정상으로 돌리는구나.=
=……??=
이실리테가 불쌍해하는 얼굴로 쥐여준 흰 살 생선 초밥을 앙~ 하고 입에 넣으려던 아영이 멈칫하고는 눈만 끔뻑인다.
그걸 본 백려강이 살포시 웃으며 알려주었다.
=오라버니한테 사랑받으면 몸이 좋아져.=
=그거, 남자한테 사랑받는 여자는 예뻐진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지?=
=내가 지금 이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도령을 만난 이후야.=
얼마 안 남은 비빔밥을 마저 긁어먹은 안느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에 아영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재차 질문했다.
=오빠한테 단련 받아서 정령 기사로 재각성하는 동시에 환골탈태한 게 아니고요?=
=나도 자기 덕분에 흡정족에서 정현족이 된 거거든?=
=…….=
아영은 입을 살짝 벌렸다.
진실의 주시자를 쓸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종족 혈통이 진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혈관을 흐르는 플뢰의 피는 상대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심을 말하는지 정도는 감의 영역에서 80%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언니들과 백려강은 전부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아영은 절대 멍청하지 않다. 그렇기에 사기꾼의 만병통치약을 넘어 돌팔이 신비의 영약 같은 효과를 의심했지만, 의심해서 자신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빠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서 얻을 이익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자신이 벌써 며칠째 상쾌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증거다.
“아영. 감각 둔화를 풀어봐라.”
=…….=
그의 이야기에 홀린 듯이 성술로 억누르고 있던 통각을 푼 아영은 이내 찾아올 끔찍한 고통에 대비해 몸이 자연스럽게 움츠러들었지만…….
‘고통이, 없어?’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생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고 토막 나는 듯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고통이 전혀 없진 않았다. 의자와 닿아있는 궁둥이, 옷이 스치는 피부, 머리카락이 건드리는 목덜미가 욱신거리고 화끈거린다.
그러나 이 정도쯤은 그녀에게 있어 무통이나 다름없다. 오히려 자신이 건강히 살아있음을 자각케 해주는 자극.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흔들리는 아영의 연한 보랏빛 눈동자에 환인이 말을 이었다.
“네가 그런 상태가 됐던 것은 어렸을 때 약으로 통증을 억누르기 위해 억지로 몸을 망가트렸기 때문이겠지.”
=…….=
“유르파도 흡정족에서 정현족이 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너도 언젠가는 네 언니들처럼 건강하고 강인한 몸이 될 수 있을 거다.”
=……히잉.=
감정의 동요는 암살자의 추문과 같다며 부동심을 익혀야 한다고 누누이 가르침을 받아왔지만, 아영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볼썽사납게 어린애처럼 눈을 가리고 히끅거리며 울던 아영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남자의 커다란 손을 느끼곤 와락, 환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환인을 향한 마음이 천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럼 다녀오지.”
이틀 째 비상을 타고 이천왕궁을 향해 날아가는 환인. 그를 배웅하고 돌아온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정원에 모여들었다.
=오늘 더 외출할 일은 없지?=
=응. 미궁에 들어갈 준비도 다 끝마쳤으니까.=
=그럼 남은 건 도령의 마지막 그리모암 유물하고 아영이랑 려강이 함정술 습득뿐이겠네.=
=네 새로운 갑주는 언제 오는데?=
=분출 절차가 일주일 정도 걸리니까 대충 내일쯤?=
=내일이면 닐비나 천왕 폐하를 알현하러 가는 날 아니야?=
=뭐 알아서 되겠지.=
각자 연습용 무기를 들고 나간 이실리테와 안느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몸을 풀기 시작했다.
내일까진 더 할 일도 없으니 환인이 돌아올 때까지 대련이나 할 생각이었던 것.
그런 둘에게 아영이 손을 들며 물었다.
=언니들. 저 성술 훈련해도 돼요?=
=어떤거?=
=언니들이 대련할 동안 피격에 맞춰서 보호막 펼치는 거요. 기감 훈련이랑 신속 전개 훈련하고 동체시력, 판단력 훈련도 되는 거예요.=
=외부 개입 요소도 훈련의 일환이 될 테니 나쁘지 않네. 이슬이 넌?=
=나도 좋아.=
이실리테의 동의에 안느는 루모와 합체하며 성체술을 끌어올리고, 이실리테는 점점이 떠다니는 빛알갱이 같은 아우라에 더해 휘광까지 입는 안느를 보며 세 자루로 늘어난 다중 검기를 펼친다.
물론 날은 최대한 줄여 몽둥이처럼 만든 상태지만, 휘둘러지는 속도를 생각하면 방비 없이 정통으로 얻어맞을 경우 팔다리가 끊어지고 박살 날 수 있는 위력.
그건 루모와 합체에 성체술로 신체 능력이 무려 4배 이상 늘어난 안느의 공격력도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성투사의 힘과 체력 강화가 하늘이 내린 피지컬에 더해져 어마어마한데 2중 버프까지 더해져 아차 했다간 워 해머에 상반신이 뭉개져 버릴 수 있다.
유르파가 만들어준 호루라기를 입에 문 아영이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말한다.
=7급 회복술 네 발 준비 됐슴다. 타격을 2회 먼저 허용한 쪽이 패배고요. 준비…… 시작!=
쐐액—!
아영의 시작 선언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공기의 벽을 부수며 서로를 향해 돌진한다.
하지만 충돌의 굉음은 없었다.
채재쟁- 콰곽, 드득- 탱!
어느 쪽이든 서로의 공격을 허용하면 치명상일 수 있는 일. 그런 둘의 공방은 그냥 보기에 뭔가 헐렁헐렁한 느낌이었다.
보통 평범한 6~7급 직업자의 대결에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공방이 오가기 마련.
하지만 둘의 공방은 유르파마저도 셀 수 있을 만큼 띄엄띄엄 이어진다.
둘 다 최소 3~4수 이상을 내다볼 수 있게 되었기에 자연히 무기를 주고받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로의 공격 속도에 익숙해지자 이실리테가 본격적으로 다중 검기를 펼치기 시작하고 안느도 워 해머와 방패에 위상력을 담아 전력으로 맞붙는다.
바로 옆에 7급 성술사가 대기중이다. 상처 쯤이야!
퍽-!
첫 타격은 안느가 먼저 허용해버렸다.
두 자루의 다중 검기가 교차해 눈앞을 교란하고 본체가 레드릭 얼터를 휘둘러 신경을 살짝 걷어낸 직후, 한 자루가 뒤에서 안느의 오른쪽 어깨를 쳐버린 것.
=……!?=
콰창! 펏-
물론 안느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뒤에서 맞은 충격을 추진력 삼아 넘어지듯이 달려들며 방패 모서리로 그녀의 대검과 다중 검기 한 자루를 후려친 뒤 회오리처럼 번개같이 돌아 일어서며 워 해머로 올려 친 것.
그에 이실리테가 크게 다치고 말았다.
그녀의 가슴 끝을 안느의 전력이 담긴 워 해머가 스치고 지나가 앞섬이 완전히 찢겨나가며 이실리테의 젖가슴도 피범벅이 되어버린 거다.
=큿.=
콰창-! 소리와 함께 빛무리와 피가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가운데 이실리테가 황급히 뒤로 물러서니 짓이겨진 가슴에서 피가 과장 보태 폭포처럼 쏟아진다.
=이실리테 언니 1패임다.=
아영의 선언에 이실리테가 한숨을 푹 내쉬고, 선취점을 획득한 안느가 후우, 어깨를 주무르며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이슬이 몸 주변에서 빛이 깨져나가던데 그게 네가 친 보호막이었어?=
=넵. 바로 회복을 걸게요.=
피떡이 되어 노란 지방질과 시뻘건 피를 철철 흘리던 젖가슴이 아영의 성술에 언제 상처를 입었느냐는 듯이 뽀얀 살결을 되찾는다.
안느는 그 예쁘고 커다란 젖가슴과 분홍색 유두를 샘난다는 듯이 보다가 맨가슴에 붕대를 감는 이실리테에게 핀잔을 주었다.
=가슴 좀 더 동여매. 대충 매니까 덜렁거리다 걸려서 터지는 거 아냐.=
=꽉 동여맨 거거든?=
=……설마 가슴 더 커진 거야?=
=아냐. 생리 날이라서 조금 더 무거워진 거뿐이야.=
=어휴 월경이라고 가슴이 더 커지다니, 세상 가슴 혼자 다 가졌지. 못된 욕심쟁이 같으니.=
도끼눈을 한 안느의 질투에 이실리테도 눈을 흘기며 붕대로 다시 가슴을 꽉 동여매고 대검을 들었다.
이어지는 실전 같은 대련.
=…….=
백려강은 멀찍이서 파라솔을 세워두고 그 아래서 새로운 마도구를 설계하는 유르파의 곁에 앉아 대련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채쟁- 쾅, 탁- 퍼버벅. 투콱!
=으힉! 야! 좀 살살해! 나 반으로 갈라 죽일 셈이야?!=
=그 자리에서는 안 갈라지거든?!=
=안 갈라져도 내 몸에 세로로 꽂히겠…… 으깃!? 야이 못된 년아! 네 가슴 터트렸다고 보복하려는 거지!?=
=잘, 알고 있네!=
채재재쟁째재쟁—!!
=오오. 언니들 겁나 무.섭.습.니.다. 전 그냥 언니들하고는 대련 안 할래요.=
콰창! 퍼버벅- 쨍! 콰장창! 쫘라라락!
보호막이 한 번 교차에도 두세 번씩 깨어지며 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터져나간다.
거기에 검희의 아우라와 정령 기사의 아우라가 한데 뒤엉키고 다중 검기가 고속으로 질주하니 현란하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대련이 이어지고 있었다.
‘……부러워.’
그리고 백려강은 며칠 전과 다르게 그런 언니들을 보며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다.
언니들의 무력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해서 성장에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그 환경이 부러운 것이다.
언니들도 그렇기에 저런 커다란 상처를 입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기를 나누는 것이 아닌가.
아영도 7급 성술사로서 그 확고한 지위를 파티 가입 직후 확립했고 유리 언니는 파티의 자금과 장비를 책임진다고 봐도 무방한 불변의 지위다.
환연은 모든 속성 정령과 소통하며 이제는 상급 정령하고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초월급 정령과 가계약은 덤.
그녀가 진지하게 힘을 쓰기 시작하면 광역 공격에 한해서는 언니들도 한 수 접어주어야 할 위치다.
‘나 혼자 부평초 같아…….’
안느 언니에게서 성체술을 배웠지만. 몸에서 생겨나는 위상력이 아니라 외부에서의 위상력을 끌어와 쓰는 것으로는 유리 언니가 쓰는 강화술에도 못 미치는 위력만 나온다.
이실 언니의 1:1 검술 지도를 받고 있지만 어느 순간 턱 막힌 것처럼 검술이 더 늘지 않고 있다.
‘내 몸이 아니라서 그럴까?’
백청룡 아드네빌라의 인간 형태를 모방해 만든 완벽한 신체에는 불만 없다. 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육합등약을 몇 달간 계속 받아왔는데 그에 대한 힘의 발현이 없는 것은…… 이 신체가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이겼다!=
=아~! 졌어!=
이실리테의 기쁨에 찬 환호성과 안느의 좌절에 찬 비명에 고개를 숙였던 백려강은 가까이 다가온 아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거 같은데.=
척 봐도 자신의 진로를 잡지 못해 방황하는 훈련생과 표정에서부터 분위기까지 비슷하다.
아영은 머릴 긁적이며 훈련 교관 시절의 경험을 떠올리다가 물었다.
=너 검을 쥐기 전에 다른 무기 써봤어?=
=응……. 창이랑 검, 대검이나 망치 같은 거…….=
=그래? 원거리 무기는 마음에 안 들어?=
=……원거리?=
=네가 검술을 배우는 거 봤는데 딱 맞다는 느낌이 없었거든. 이실리테 언니나 안느 언니를 봐봐. 이실리테 언니가 둔기나 도끼를 쓰고 안느 언니가 대검이나 글러브를 낀 모습이 연상 돼?=
백려강은 잠깐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은근한 기교파인 안느 언니가 대검이라니 상상이 안 간다. 그건 이실 언니도 마찬가지.
=넌 지금 손에 맞는 무기를 못 찾은 거로 보여. 일단 진짜 이거다 싶은 무기는 없는지 알아보는 게 먼저 아닐까?=
그리 말한 아영은 자신이 쓰던 각종 무기와 암기를 꺼내 늘어놓았다.
채찍, 활, 바람총, 투척용 단검과 외날 검, 브라스 너클, 석궁, 차크람, 쌍절곤, 사슬낫.
백려강은 저도 모르게 손때가 묻어 반들거리는 새카만 흑각궁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른 무기를 죽 둘러보곤 사슬낫에도 시선을 주었다.
그걸 예민한 감각으로 포착한 아영은 다른 무기와 암기를 다 빼고 흑각궁과 사슬낫만 내놓는다.
=어, 어? 다른 무기는 잘 못 봤는데.=
=응 필요 없어. 자, 이 활부터 잡아봐.=
=…….=
머뭇거리는 백려강의 행동에 아영은 들어보라며 흑각궁을 그녀 앞에서 흔들었다.
=내 손에 무술 훈련받은 훈련생만 300명이 넘어. 일단 들어봐.=
=응…….=
척 봐도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게 느껴지는 활, 자신의 상반신 길이만 한 짧은 각궁을 받아든 아영은 심장이 살짝 두근거리며 손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뭘까……?’
=자, 여기 화살 들고, 일어서. 저기 40미터 밖에 하얀 새가 앉아있는 나무 보이지?=
=……응.=
=쏴봐. 여기 이렇게 잡고, 화살을 시위에 걸어서 당겨…… 와! 너 힘 세다? 2급 전사나 투사도 그 정도로는 못 당길만큼 장력이 센 활인데. 어, 조준은 여기 이쪽으로, 팔이랑 시선을 해서.=
옆에서 조잘조잘 감상과 설명을 어지럽게 늘어놓는 아영의 수다가 그녀의 오른쪽 귀로 들어왔다가 왼쪽 귀로 빠져나간다.
세상 소리가 멀어지고 목표로 삼은 나무가 갑작스레 크게 다가오는 느낌.
나무 옹이와 우둘투둘한 나무껍질이 커다랗게 보이며 그 주름 하나하나까지 보이는 기분.
백려강은 마치 환인의 양물을 몸 안에 받아들였을 때처럼 몸통이 꽉 조여드는 느낌에 부르르 떨다가 작게 숨을 토해내며 손을 살짝 놓았고.
핑—
피부에 소름을 남긴 채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그녀가 목표로 삼은 나무 옹이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팍! 소리가 나고 파르르 떨리는 화살 깃에 물을 마시며 땀으로 내보낸 수분을 보충하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나무를 돌아본다.
=아.=
푸른 용 꼬리가 흥분으로 딱딱하게 굳은 걸 힐끔 본 아영은 씩 웃으며 그녀의 등을 툭 쳤다.
=활이 네 적성 무기네.=
두 손으로 흑각궁을 쥔 백려강의 표정이 얼떨떨함에 물들었다.
마침 방문 당시 북극성실에 있던 아드우리에게 제2 천공기사단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비상이 닐비나 왕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놀아주고, 테이아무스 섭정이 영도로 보낼 기부품 목록을 확인하고, 이제 자신을 종종 눈에 담는 소년·소녀와 조금 담소를 나누고 주택으로 돌아온 환인은…….
“이 활은 다 뭐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30여 종 이상의 다양한 활과 석궁을 보며 여자친구들에게 물었다.
=아영이 말했는데 려강의 적성 무기가 활이라고 해요. 그래서 나가서 일단 쉽게 구하는 활과 석궁을 전부 사 와서 어느 게 려강에게 가장 잘 맞는지 찾는 중이었어요.=
=플뢰족과 맞먹을 만큼 활의 명수라고 듣는 플라비우스족 주도라서 그런가, 활 전문점도 있더라.=
“그런가.”
활이라.
니오네브레스 기행 중 활을 전문적으로 쓰는 인물은 본적이 없는 데다, 환인 자신도 날아오는 화살을 쳐낼 정도였기에 활에 관해서는 관심을 주지 않았었다.
자신의 마음 속에서 평가가 낮은 무기를 그녀에게 제안할 이유가 없었던 것.
마중 나온 이실리테에게 코트를 넘겨주고 블랙커피를 주문한 환인은 백려강과 아영에게 다가갔다.
=이것도 좋아? 으음, 석궁보단 직접 쏘고 강약 조절, 곡사도 가능한 활이 맞나보네. 용인체라서 근력도 좋으니 복합 강궁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앗! 오빠 오셨슴까!=
=아. 오라버니, 오셨어요?=
“그래. 표정이 좋아졌군.”
=그, 그런가요……?=
환인은 백려강의 표정에서 먹구름이 걷혀나간 것을 보고 활의 유용성, 파티 적합 여부 따윈 아무래도 좋아졌다.
그녀가 활을 쓰겠다면, 활 솜씨가 좋아진다면 그에 걸맞게 장비와 소모품을 마련해 위력을 늘려주면 될 일이다.
속성이 부여된 화살이나 폭탄을 매단 화살, 독을 바른 화살 같은 것도 괜찮겠지.
‘마침 백려강은 바람도 영창 없이 어느 정도 쓸 수 있으니…….’
검 같은 것보다 오히려 활이 더 나을 수도 있겠지.
활은 뛰어난 힘과 감각적인 재주만 있다면 대부분이 해결되는 무기.
그녀는 안느의 성체술도 배웠으니 시위를 당기고 연사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수줍어하는 백려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뿔을 살짝 어루만져준 환인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응원했다.
“필요한 지원은 다 해주지. 네게 맞는 무기를 찾았다면 열심히 훈련해라.”
=네!=
“아영, 부탁한다.”
=넵. 제가 아는 활의 기교를 전부 전수하겠슴다!=
환인은 자신의 응원에 기뻐한 백려강이 아영과 함께 거실 바닥에 늘어놓은 활과 석궁을 모두 치우는 걸 보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예정대로 내일, 작은 다과회와 만찬이 진행될 거다. 미리도르무 수석 상안이 내일 아침에 또 찾아와 드레스를 맞춰주기로 했으니 준비하도록 하고.”
=그럴게. 다른 일은 어떻게 됐어? 제2 천공기사단이 이상한 행보를 보인 건?=
복합궁의 시위를 팅- 팅- 튕겨보던 안느의 질문에 환인은 이실리테가 가져다주는 커피잔을 받아들며 별일 아니었다고 대답했다.
“돌아오기 직전, 아드우리 공작이 전해주더군.”
제2 천공기사단 단장 레아우카=사바인은 자신을 위험 요소라고 판단했고, 자신의 근처에 있으면 사건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며 거기에 휩쓸릴 경우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성제와 거리를 두라고 휘하 기사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야기.
=그자식 뭐야? 되게 웃긴 놈이네.=
이야기를 들은 안느는 분노를 드러냈고, 그 분노는 정당한 것이었다.
앞에서는 한껏 정중한 척 인사하고 돌아가서는 뒷담화와 씨나락을 깠다는 말이 아닌가.
“직위에 걸맞지 않은 행동으로 풍기를 위반했기에 군법 재판으로 해당 사항을 판결할 거라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한 절차는 요식행위일 뿐이고 실제 판결은 정직 6개월로 정해졌다고 한다.
말이 6개월이지 6개월간 자택 구금이나 다름없고, 그사이 2기사단 단장직을 공석으로 해둘 수 없으니 다른 인사를 보낼 텐데 그 결과는 사바인의 기사단장직 박탈로 이어질 거라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유르파와 안느가 얼굴을 작게 찡그린다.
=좀…… 뭔가 음습한 대응인걸.=
=그러게. 찜찜한 느낌이야.=
환인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쓴 커피 맛을 음미하며 말했다.
“아영이 말했었지. 레아우카 사바인은 천왕궁 고위 인사에게 미움을 산 상태라고. 이 기회에 물갈이해버릴 생각인 듯했다.”
=괜히 기사들한테 미움 사는 거 아냐?=
그를 걱정한 안느는 환인이 잠깐 보여준 냉소적인 미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얼굴은 뭔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의 표정인데?
“그래 준다면 오히려 고맙지. 제2 천공기사단 단장이 원 아웃을 저질렀다. 그 일을 두고 기사들이 일어나면 투 아웃이 된다.”
삼진 아웃제 같은 것은 없다. 명백한 잘못을 저쪽이 저지를수록 히스론드 왕가에 받아낼 수 있는 것이 많아질 뿐이다.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무엇을 요구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히스론드의 왕궁이니 쓸만한 유물 활 한 점 정도는 있겠지.’
말을 끝맺지 않고 소리 없이 미소 짓는 환인을 향해 여자들은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그의 반응대로라면 결과는 며칠 안으로 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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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SSR 바람 궁수가 검 들고 놀던 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