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93화 (593/813)

591 천공성 파르세타

뀨, 뀨우! 큣!

아하하~!

꺄아~!

“…….”

환인은 제 꾀에 제가 빠져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비상을 구경했다.

북극성실에 들어오기 전 으름장과 함께 경고해놓은 효과 덕분일까. 비상은 닐비와 비나가 자신의 단단한 발에 채여 다칠까 일어서지도 못하는 중.

꺄하하……!

우와앙…!

뀨으…… 큐웃~! 꾸으!

두 어린 왕의 장난 상대가 되어버린 비상은 자신을 향해 이 작은 악마들을 떼어달라며 울고 있지만, 못된 꾀를 피운 벌은 조금 더 받아야 한다.

자신이 이리저리 놀러 다니는 줄 아는 비상이니 이렇게 스트레스받는 일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 투정과 어리광도 줄어들겠지.

환인의 시선이 짧게 북극성실 내부를 훑는다.

10여 미터에 달하는 돔형 천장과 온갖 신화적 장면을 담은 태피스트리 및 벽화와 조각들.

실내를 채우는 방대한 책장과 서적에 저 벽화와 조각, 태피스트리는 플라비우스족의 신화와 관련된 장면들이고 작게 보이는 책의 이름은 대부분이 플라비우스족의 역사 관련 서적이다.

책장 10개가 있으면 그중 7개가 플라비우스족 관련 문서일 정도다.

그 외에도 위상력 유동 훈련 마도구라던가 부유석을 이용한 체공, 활강 등 비행 훈련 마도구도 보이고 공부를 위한 자리, 식사를 위한 자리, 잠을 자기 위한 침대 등.

이 많은 시설은 북극성실이 아이를 키우기 위한 육아실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때 찬란하고 풍성한 금발을 자연스럽게 늘어트린 미녀가 삼쌍익을 하늘거리며 다가와 살짝 목례했다.

=어제는 미처 통성명도 하지 못했군요. 귀한 손님을 모셔와 제대로 접대조차 해드리지 못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예하.=

“긴급한 일에도 선후가 있는 법입니다. 테이아무스 대공의 행동에 실례는 있을지언정 사과할 일은 아니니 개의치 마시길.”

어제와 달리 오늘 북극성실에는 몇 명의 사람이 더 있었다.

히스론드의 섭정이자 닐비나 천왕 중 여자아이인 비나=루에나의 어미, 테이아무스=프리엔리=호룸=델.

그리고 그녀의 수하와 보좌관, 비서로 보이는 일단의 사람들.

어제의 봉행자 외에 다른 봉행자 여자도 세 명 더.

아드우리 공작이 한 말대로 평소에는 몇 명이 더 머무르는 모습이며, 어제는 자신과 히스론드의 왕이 만날 기회를 일부러 마련했다는 사실을 환인은 알게 되었다.

테이아무스는 자신을 알고 있단 사실에 살짝 놀랐다는 얼굴을 잠깐 지었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하께서는 신분이 높은 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저를 알고 계셨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한 부분만 정정한다면 그 소문은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높은 신분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라드세아에서만큼은 확실합니다.”

라드세아에서 들렀던 도시에서는 빠짐없이 사건 사고가 터졌다. 높아져 가는 명성에 비례해 사건의 경중이 더 무거워졌다고 할까.

알소프는 아예 소멸했고 흐라스린드는 영주가 자살로 끝을 맺었다.

이 세계의 고위 호족은 현실의 대재벌 가문 직계와 다름없는 위상이란 걸 생각하면 이만저만한 사건이 아니다.

=알소프의 소멸 소식은 저희도 들었습니다. 어찌 그리 현명치 못한 자인지.=

환인은 후, 작게 웃음을 흘리며 말을 아꼈다.

누가 누굴 나무라는 건지.

신이라는 존재들 덕분에 쐐기가 박혀있어 그곳을 바탕으로 직업자들이 모여 간신히 국가의 틀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었다면 이형종과 마물, 마수, 괴물들로 인해 언제 멸망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

그게 바로 니오네브레스의 4대 국가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네 곳 국가는 다 똑같았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사람 사는 곳이라는 말이다.

플라비우스족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저 인선을 잘 선택했을 뿐이라는 거지 이들이 전부 착하고 선량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야기를 나눠본 아드우리도 자신이 조금만 더 부족했다면 거만한 태도를 내비쳤을 전형적인 니오네브레스의 고위층 인사였으니까.

말썽을 종종 일으킨 라드세아에서도 환인에게 우호적이며(시하) 계산적인(백중강, 호천명) 인물이 있었단 걸 생각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이야기다.

메리아놀 측도 마찬가지였다. 크샤나리와 다루그라는 자는 제법 생각과 정신이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다르게 만났다면 좋은 인연을 맺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

벨티칼은 부족 국가라 느낌이 모호하지만, 거인에게 고래고래 소릴 질렀던 걸 보면 마찬가지나 다름없다.

이러한 마당에 히스론드라고 다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라드세아의 호천명과 얼굴도 모르는 여왕처럼 눈앞의 여자도 제법 이성적이라는 것.

몇 초 정도의 침묵 속에서 생각의 정리를 끝마친 환인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까.”

=천왕의 눈은 수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완성되는 신의 눈동자입니다. 아직 어리시다고는 하나 수많은 무사와 술사들을 보아오신 분께서 예하를 뵌 순간 피로로 쓰러지셨을 정도시지요.=

“한마디로 저의 존재는 두 분 폐하의 경험치라는 말씀이시군요.”

일순간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에 가슴이 자부심과 긍지로 채워져있던 테이아무스는 흠칫, 날개를 희미하게 떨었다.

일순간 찾아든 정체 모를 오한에 오감이 예민해진다.

테이아무스는 자신의 옆에 선 남자가 인간의 형상을 한 불길하고 시커먼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대공이자 섭정으로서 그에 걸맞는 능력을 갖춘 테이아무스는 그 정체를 금방 깨달았다.

빛이 닿지 않는 수면 아래 조용히 똬리를 튼 심연의 짐승.

평상시에는 그저 심연 속에서 조용히 침묵할 짐승이지만, 빛이 한 줌이라도 닿으면 분노와 증오에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는 파멸의 짐승.

옆의 남자는 그런 짐승이다.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면 몇 년, 몇십 년에 걸쳐서라도 복수하고 보복하고야 마는 분노의 화신 말이다.

테이아무스는 차가운 식은땀이 가슴골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 성제는 심연 속 파멸의 짐승이 황금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쓴 거나 다름없다.

빛이 한 줌이라도 닿으면 세상을 뒤집어버릴 괴물이 태양으로 가득한 대지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알소프가 멸망하고 흐라스린드의 영주가 자결한 것도……!’

생각하던 그녀는 환인과 시선이 마주친 것을 느끼고 흠칫했다.

마찬가지로 환인 또한 그녀의 청록색 동공이 활짝 열린 것을 보고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사람이 공포심을 느끼면 의외로 가장 티 나는 곳이 동공이다. 어둠 속에서처럼 환한 대낮인데도 조리개가 활짝 열리는 것.

그리고 테이아무스의 눈이 그랬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여자가 갑자기 겁을 먹었다면 자신이 실수로 감정을 노출했음이 틀림없다.

환인의 머릿속에서 삽시간에 하나의 시뮬레이션이 끝마쳐진다.

“미안합니다.”

=……네, 네?=

“대공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차원 방랑자입니다. 처음 소환된 곳은 6급으로 추정되는 삼림형 미궁의 한복판이었지요.”

=…….=

“간신히 그곳에서 탈출했고 그 뒤로 신뢰할 수 있는 동료들을 만났지만, 가는 곳마다 사건과 사고가 터졌습니다. 주로 호족들이 일으킨 사건과 사고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심병이 좀 생긴 터라.”

살짝 고개 숙여 진심으로(자신을 속여) 사과한 환인은 비상의 깃털에 폭 파묻혀 까르르 웃는 닐비나를 향해 시선을 주며 말을 이었다.

“고위 관직에 있는 분들일수록 욕심이 거대하더군요. 그리고 그런 욕심을 당연한 것인 양 휘둘렀습니다.”

그런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방어적이 되었다.

“그리고 이곳은 히스론드 권력의 정점이지요.”

너희들도 욕심에 수작을 부리는 것은 아니냐.

환인의 말에서 그러한 추궁을 읽은 테이아무스는 두려움을 잊고 뺨이 빨개졌다.

=……오해할만한 발언과 상황이었다는 점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의도는 없었습니다.=

“의도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상에 익숙해져 버린 사고는 무의식에서 똑같은 일을 하기 마련이라고들 합니다.”

직접적인 의도가 없다고? 그럼 간접적인 의도는?

=…….=

테이아무스는 뺨이 빨개진 채로 입술을 살짝 삐죽이며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이 천진하고 수줍은 처녀의 심통과 흡사하다, 도무지 애 하나 있는 여자의 귀여움이 아닌 수준.

그러한 표정을 미녀가 지으니 뭍 남성이라면 자연스레 분노가 풀렸겠지만…….

“정말 아닙니까.”

임자 있는 여자는 걸어다니는 돌멩이나 다름없는 환인에게 0.1의 영향도 없었다.

환인의 직접적인 추궁에 테이아무스는 이제 얼굴 전체가 살짝 발그스름해진 상태로 대답을 미뤘다.

감정적으로 되었음에도 홧김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생각부터 하는 걸 보면 확실히 섭정의 자격은 있어 보인다.

속으로 숫자를 세며 잠시 기다려주니 그 숫자가 30이 되었을 때 답이 돌아왔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상황은 예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이쪽의 실수인 것이 틀림없겠지요.=

“그렇군요. 저는 영도의 대성자 후보인 성제이고 당신은 히스론드의 섭정. 이 상황은 외교적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섭정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맞…습니다.=

“이 외교적 결례를 무마해주는 대가로 다소 요구하여도 무방하다 보는데 이점은 어찌 생각하십니까.”

=……예하께서는 혹시 전직 귀족 출신이십니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아끼겠습니다. 그래서, 제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시면 좋겠군요.”

=………예하께서 하실 요구의 내용이 어떠하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환인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팔라툼 천왕궁의 이름으로 영도에 식량을 기부하는 것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대강 5만 명이 반년을 먹을 양 정도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뜻밖의 요구에 테이아무스는 눈을 크게 떴다.

식량…… 기부? 영도에? 5만 명이 반년을 먹을 양이라니…… 아!

“영도는 얼마 전 새로운 식구를 맞이했습니다. 나름 그에 대한 대처는 마련했지만,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아무래도 식량난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더군요. 더욱이 알소프의 소멸로 발생한 난민들이 영도에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테이아무스는 영도를 걱정하는 성제의 태도에 혼란스러웠다.

심연의 짐승…… 파멸의 마수 같은 게 아니었나? 내가, 잘못 느낀 걸까……?

“만약 천왕궁이 징세가 아닌, 궁이 보유한 재산으로 ‘직접’ 식량을 구매하여 기부해주신다면 저 또한 의욕적으로 두 분 폐하의 성장에 도움을 드릴 것 같은 기분입니다만…… 섭정의 뜻은 어떠한지 듣고싶습니다.”

백성을 수탈하지 말고 네가 가진 걸로 내놓으라는 주문까지.

환인의 천연덕스러운 이야기에 테이아무스는 섭정의 위치마저 잊고 다시 묻고 말았다.

=예하께서는 정말 귀족 출신이 아니십니까?=

=비상아 잘가~!=

=내일 또 봐…!=

……규으.

두 어린 왕의 작별 인사를 들으며 북극성실을 빠져나온 환인의 표정은 천주산 봉우리를 벗어났을 때 완전한 무표정이 되었다.

‘테이아무스…… 그만한 자리에 있는 여자가 평범할 리는 없겠지.’

자신의 내면을 엿보았기에 틀림없이 자길 괴물처럼 본 것일 거다.

섭정인 여자가 저정도라면 라드세아의 여왕이라는 여자는 대체 어느 정도인 걸까. 벨티칼의 군주나 메리아놀의 ‘공주’는?

‘흠…….’

환인은 말없이 팔라툼의 천왕궁 내부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대공이라는 자가 섭정을 진행 중이며 저런 어린아이들을 왕이라고 소중히 키우는 것을 본다면, 사쌍익은 그저 상징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다.

닐비나의 저 눈의 효용만 보아도 왕의 자질은 충만하다. 신의 가호를 받았다거나 신의 사도나 다름없다고 하는 사쌍익이라면 성인이 되었을 때 틀림없이 진정한 왕이 될 테지.

그렇다면 전대 왕은 어떻게 되었는가.

수명이 다해 자연으로 돌아갔나? 그렇다면 왕이 존재하는 중에는 다음 대의 사쌍익은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

저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죽는다면 다음 대의 사쌍익이 태어나나? 아니면 전대 왕과 현 왕 사이의 공백 기간이 있을 수 있나?

테이아무스와 아드우리의 성향. 자신을 꺼리던 제2 천공기사단. 며칠간 자신과 접촉했던 액정관 수석 상안. 레아우카라는 단장과 천왕궁을 오가며 마주쳤던 인물들의 행동 방침과 표정에서 드러나던 감정.

천주산의 구조와 구성요소에 자신이 이때까지 보고 들어왔던 이 세상의 풍습과 관습까지.

머릿속으로 여러가지 상황과 가정을 조합해 파악해본 결과, 천왕궁은 어찌됐든 자신의 여정에 방해되진 않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적당히 우호 관계만 유지한다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겠지. 이쪽에 권력욕은 없으며 목적이 분명한 여정이라는 걸 안다면 천왕궁의 권력자들도 협력적으로 나올 것이다.

‘성제라는 이름에 효용성은 무궁무진하니까.’

거기에 닐비나 두 왕은 자신에게 매우 우호적이다. 비상과 놀면서도 이쪽을 돌아보지 못해 안타까워했을 정도,

그런 아이들의 마음에 들어가는 것은 사탕을 까먹기보다 쉽다.

‘하지만 그래서는 히스론드와 너무 가까워진다는 문제가 있군.’

가장 오래 지냈던 라드세아의 주도에는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당연히 여왕과 만난 적도 없으며 초대조차 거부했다.

그건 벨티칼과 메리아놀도 마찬가지다.

각 나라가 자신에게 바라는 게 전부 다르다지만, 인간의 지성에 고위 공직을 지닌 한 최종적으로 수렴되는 것은 하나다.

자국과 자신의 권력 확보.

이런 때에 히스론드와 너무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면 ‘공평’이라는 저울이 한쪽으로 치우칠 것이다. 그 결과는…….

규으으…….

탁해진 비상의 울음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환인은 불만 가득한 그 표정을 보곤 큭큭 웃음을 흘렸다.

“어떠냐. 이래도 내가 놀고만 다니는 것 같나.”

꾸엣! 뀨우!

그래도 도와줄 수는 있었잖아!

“그 아이들의 건강 때문에 나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 네가 있던 자리에 최상급 회복 술법진이 새겨져 있던 것은 너도 느꼈겠지.”

…….

“그 아이들이 거기서 나오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인 거다.”

뀨어? 꾸으……?

“그래. 네가 거기서 나왔었다면 그 아이들은 손가락만 빨면서 널 쳐다볼 수밖에 없었겠지.”

……뀨아앙!!

비상은 그걸 알려주지 않은 환인에게 화가나 온몸을 비틀며 난폭한 비행을 펼쳤다.

하지만 환인도 2년 동안 폼으로 비상을 타고 날아다닌 게 아니다.

“하하하하!”

비상의 분노에 찬 비행에 아무렇지도 않게 무게 중심을 맞춰주며 곡예 비행을 즐기니, 어느순간 비상도 그러한 비행이 즐거워져 환인과 푸르른 창공을 질주하며 마음껏 스트레스를 발산했다.

뀨삐잇~!

주택으로 돌아간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수집해온 정보를 확인하며 천공성에서 있었던 일을 전달해주었다.

여자들은 닐비나가 그곳에만 있어야 하는 내막을 듣곤 조금 안타까워했다.

특히 이유나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감금 생활을 겪었던 백려강의 안타까움이 컸다.

=어른이 될 때까지 그 방에서만 생활해야 한다니…….=

=뭐 이유 없이 감금한 것도 아니고 괜찮지 않아?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림에 죽어가는 애들에 비하면 천국 같은 곳이잖아. 당사자들도 별로 싫어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지만…….=

“아영.”

=넵.=

“눈치 챙겨라.”

=넵…….=

탁, 책을 덮고 자료 조사를 기록한 종이를 챙긴 환인은 백려강의 눈치를 보는 아영에게 말했다.

“네 말도 틀리지 않았다. 일리 있는 이야기지. 하지만 과거의 아픔을 드러내는 상대에게 ‘다른 힘든 사람은 더 많다.’라는 식의 의견은 내세울 것이 아니다. 그런 의견과 주장은 일반적인 토의에서나 내세울 거다.”

=읏…… 맞슴다. 려강아, 미안해!=

=으응? 아냐. 괜찮아. 넌 몰라서 한 말이잖아.=

=……으앙~ 려강이 너무 착해~!=

와락, 자신을 껴안고 힝힝 우는 아영을 백려강은 잠깐 당황하다가 포근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훈훈한 얼굴로 그 장면을 바라보던 유르파는 잠시 뒤 표정을 살짝 굳히며 환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 대공님, 제법 감이 날카롭네? 자기의 심기를 간파할 정도라니.=

“8급 성술사입니다. 승급은 못 했지만 그만큼 수행을 쌓았을 테니 남들과 비범한 부분이 있는 거겠지요. 그보다는…….”

환인은 천왕궁을 향하던 도중 마주쳤던 제2 천공기사단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해 기겁해 하던 기사들. 그들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절 두려워해 기겁한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지시를 받은 듯한 반응이었는데 찜찜함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오빠님. 그럼 직접 알아보면 안 될까요?=

오라버님도 아니고 오빠님은 뭘까.

환인은 백려강의 품에 안겨있다 되려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그녀의 푸르른 용 꼬리를 쓰다듬는 아영에게 말했다.

“풀을 때려 뱀을 놀래키는 일은 안된다.”

=넵. 그…… 살짝 비법적인 일이긴 한데 팔라툼 제2 기사단 본부의 도면을 아직 기억하고 있거든요. 오빠의 이야기와 관련된 거라면 틀림없이 문서로 남아있을 거예요. 본부 문서보관소든 단장실이든요. 허락하신다면 몰래 들어가서 확인만 하고 나올 수 있어요.=

즉 전직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이야기다. 솔깃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환인은 고개를 저어 부정의 뜻을 나타냈다.

“허락 못 한다. 네 정체를 레아우카 사바인이라는 단장이 알아보았을 텐데 그자가 찾아왔던 것을 생각해보면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멀리서 이쪽을 감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테지.”

=도령 말이 맞아. 네가 약간이라도 수상한 기색을 드러내면 바로 포착당한다고 봐야 해.=

=음. 넹…….=

=네 의욕은 알겠지만, 너도 영혼 기사라는 사실을 항시 기억해두고 움직여야 한다는 걸 명심해.=

=넵!=

안느에게 영혼 기사로서 마음가짐을 교육받는 아영을 보며 환인은 살짝 의심했다.

‘그날 찾아와서 정중히 사과하고 간 것도 이걸 염두에 두어서 한 행동인가.’

자신이 그 건으로 항의하는 척 정보를 빼가지 못하도록?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뭔데?=

=팔라툼에는 분야별 장관이 있슴다. 그리고 기사단은 무장 장관 직속인데, 그 무장 장관도 두 명이거든요. 한 명은 팔라툼의 외부 무력을 담당하고 한 명은 팔라툼 내부와 천왕궁의 수호를 담당하는데…….=

그중 한 명은 이미 환인도 만났다.

북극성실에서 만나 이런저런 대화와 약속 하나를 한 외력 무장 장관 아드우리=홀디스=크아로티잔.

그리고 아영이 말한 내력 무장 장관 벨로트=투르시온=랄터.

=제1, 제2 천공기사단은 내력 무장 장관 소속이에요. 그리고 레아우카 사바인 제2 천공 단장은…… 정보에 따르면 상층부에 꽤 미움을 받은 상태거든요? 약식이지만 세 번째 쌍익이 발현되었는데도 아직 신분이 중위 귀족인 자작일 정도로요.=

“그러니까 제2 천공기사단장이 널 교육할 때 찾아와 대련을 멋대로 구경한 점, 오늘 있었던 실례를 두고 아드우리 공작에게 넌지시 언급하라는 건가.”

확실히…… 특이한 움직임은 제2 천공기사단에서만 나왔었다. 천공성의 수호와 경비를 맡은 제1 천공기사단 소속 기사들은 자신을 향해 눈을 초롱초롱 빛냈었지.

그 말은 제2 기사단 내부의 행동 방침이라던가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단 뜻이니 설령 일이 꼬이더라도 제2 기사단 단장만의 문제로 끝날 수 있는 일.

거기다 아드우리와는 일부지만 약속으로 우호 라인이 이어져 있다. 만약 제2 기사단의 일이 저쪽의 잘못으로 사태가 진행 중이라면…….

‘이쪽에 생색을 낼 기회가 되기도 하겠지. 제보라고 생각한다면 호의와 감사를 표시할 수도 있고.’

그를 통해 섭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으니 자신에게 일부지만 빚을 진 섭정이라면 아드우리에게 협조할 수도 있을 터이고.

피해는 없을 선택지에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내일 천공성 방문 때 움직여보기로 했다.

그날 오후, 비상을 곁에 두고 저녁놀을 불빛 삼아 정원에서 책을 읽던 환인은 안느가 뭉그적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왜 그러지.”

자신에게 안기고 싶은데 그런 말을 꺼내기 부끄러워 뭉그적거리는 모습은 아니다.

할 말은 있는데 하기 조금 그런 것 같은 태도.

예상대로인지 안느가 은색 머리카락을 검지로 빙글빙글 돌리며 조심스레 묻는다.

=어 도령. 그, 나흘 전에 아를마네 대성당에 갔을 때 말이야. 그때도 르아하고 통신 안 하고 왔었잖아…….=

“음. 그쪽 상황이 마음에 걸리는 건가.”

=조금. 도령 암살 사건으로 한창 시끌시끌할 텐데 내 소속이 소속이다 보니까…… 교단 총본산에도 영향이 없지는 않을 거거든. 특히 대성당을 방문해서 등대의 빛을 분출 신청까지 했는데 연락이 없는 건…….=

안느가 그렇게 뭉그적거린 이유를 눈치챘다.

흐라스린드에서 그녀에게 말했던 차원 방랑자를 강제로 소환하는 일당을 언급했었는데, 이번 등대의 빛 분출 건으로도 저쪽에서 연락이 없으니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

환인은 팔걸이에 머리를 올린 비상의 부리를 쓰다듬으며 생각이 많다는 뉘앙스로 대답했다.

“나로서는 르아윈 추기경이 직접 연락하기 전까지는 기다리고 싶다만.”

=……응?=

“교단 내부 사정은 직설적으로 말해서 외부에서 얻기 힘들다. 그건 너도 인정하겠지.”

=그렇지. 신관, 사제들은 수습이라도 입이 엄청 무거우니까.=

“너도 나의 영혼 기사가 되어 반쯤 외부인에 발을 걸친 상황이라 교단 내부의 중요한 안건에 대해서 정보가 오지 않고 있고.”

=어… 응.=

“르아웬 추기경은 원탁회의에서 나의 초대에 관해 언급한 뒤 초대를 진행하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 뒤로 감감무소식이지. 널 통해 연락해달라는 부탁도 올 법한데 르아웬 추기경을 통해 직접적인 연락은 없었고.”

=뭔가…… 교단 내부에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야?=

“그래. 흐라스린드의 플뢰족 납치 사건에 대해 르아웬 추기경은 자기 뜻을 전해왔다. 그런데도 이쪽에 연락하지 않는 것은 마땅한 이유가 있어서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

환인은 심각해진 얼굴로 생각에 잠겨 드는 안느의 한껏 힙업된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응얏?!=

손이 한순간 푹 살결에 파묻히는 멋진 감촉을 느낀 환인은 나부끼는 그녀의 은색 머릿결을 구경하며 말했다.

“깊게 생각하지 마라. 정확한 정보가 없을 때 하는 근심은 망상증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니.”

=어, 응. 알았어. 그리고 이슬이가 초밥 준비 거의 다 됐대.=

“생선인가. 이 근처에는 호수나 바다가 없어서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알류겔 호수 범람이 가라앉아서 슬슬 생선 물류가 들어오고 있다나봐. 염장한 건 아니고 보존 주머니로 싱싱한 생선을 수송해온 뒤에 귀족들을 대상으로 파는 건데, 이슬이가 영혼 기사라는 게 알려지니까…….=

환인은 비상에게 가자고 손짓한 뒤 안느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이 환히 켜진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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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비상이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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