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 하늘 도시 팔라툼
책의 내용을 알려달라는 환인의 부탁은 흑마술사를 주적으로 삼은 교단 입장상 쉽게 들어줄 수 없는 부류였다.
어째서인가. 흑암의 힘이 없더라도 지식만 있다면 어느 정도 흑마술을 흉내 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흑마술서의 정화와 정화한 흑마술서의 취급을 대주교급으로 한정 지은 것도 흑마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저주에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완성된 이들이어서다.
한 사건이 벌어지기 이전에는 흑마술서의 관리가 이렇게 엄격하지 않았었다.
상급 사제 이상 3명이 모이면 흑마술서를 정화할 수 있었고 정화한 흑마술서도 본단 기밀보관소에 특수 봉인하는 게 아니라 태우거나 분쇄하는 식이었다.
=자고로 사달은 방심에서 일어난다고 하지요. 약 900년 전, 금속을 매개로 하는 전염병을 실험하려던 흑마술사를 적발하여 화형에 처하고 흑마술서를 정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사제들의 방심으로 더 큰 재앙이 되어 찾아왔다.
당시에는 흑마술서를 불태워 사건을 깨끗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내용에 혹한 상급 사제 한 명이 흑마술서를 암기하기에 이르렀고…….
=연금술 혹은 연단술이라고 하지요. 볼품없는 금속을 금으로 만들고 아무 효과도 없는 잡초를 빻아 귀한 단약으로 만드는 법……. 당시의 상급 사제는 흑마술서에서 그 가능성을 엿보았다고 합니다. 사제는 흑마술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라 비밀리에 실험을 진행하였고 결과는 급성 전염병이 창궐해 그 사제가 거주하던 도시의 수만 명, 도시의 인근 마을 다섯 곳과 열일곱 곳이 넘는 촌락이 전멸하는 대참사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에…….=
=상세한 내막을 심층 조사하여 알게 된 당시 추기경분들은 참오하여 율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지금과 같은 율법과 규율이 정해진 것이지요.=
“그런 비사가 있었군요.”
=지금에 와서는 저와 같은 늙은이들이나 아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이 비사가 알려주는 교훈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여도 지식은 막대한 위험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론하스의 풀어지지 않는 미간에 환인이 담담하게 답했다.
“저 흑마술서에 그때의 위험에 버금가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까.”
여자의 생식기로 이루어진 표지의 흑마술서를 끔찍하다는 듯이 찌푸린 얼굴로 바라본 론하스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악용할 경우, 미궁에 크나큰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단순 붕괴에서 범람과 역류까지도 일으킬 수 있으니 이 내용이 무차별적으로 퍼진다면 대재앙의 시대가 열리겠지요.=
충격적인 내용에 안느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확실히…… 니오네브레스의 문명 기반은 미궁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미궁이 단숨에 무너지면 도시와 인접한 마을, 촌락의 문명 그 자체가 붕괴할 수도 있겠지요.”
=그게 그 정도나 되는 일이야……?=
안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환인은 간단히 예시를 들었다.
“알소프가 소멸한 이후 벌어진 일을 생각해봐라.”
=아…….=
알소프가 소멸한 자리에 난 커다란 싱크홀. 그것은 미궁이 아드네빌라의 순수하고 막대한 선력에 자극받아 폭발해서 벌어진 일이다.
만약 멀쩡한 도시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찌 될까.
미궁 토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반 도시는 미궁 산업 전반의 마비로 그 즉시 파탄의 내리막길을 달려 내려갈 것이다.
그것도 온전히 소멸과 붕괴로 끝났을 때의 이야기다.
알소프 주변 마을과 촌락은 소멸의 소식을 듣고 재빨리 움직여 다른 도시나 근처 마을과 연계해 살길을 도모했다. 이건 알소프만 붕괴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흑마술사가 자리 잡았던 미궁처럼 변질되어 한층 더 강한 괴물이 멋대로 뛰쳐나오게 된다면?
주도 정도의 무력을 갖춘 곳이라면 충격이 덜하겠지만, 파르히스트 정도 되는 대도시도 그 여파에 빗겨나가지 못한다.
기축통화 국가의 금리 인상 충격이 나라와 나라를 거칠수록 심각한 반등을 보이는 걸 생각해보면, 도시 하나가 몰락한다면 도시의 물류 생산과 유통에 의존성이 강한 마을도 직격탄을 얻어맞아 연쇄적으로 몰락할 것이다.
자급자족과 물물교환이 주가 되는 촌락 정도야 그나마 멀쩡하겠지.
예시를 든 짧은 설명에 안느가 반쯤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을 때 론하스는 참으로 훌륭하다는 듯이 추임새를 넣었다.
=성제 예하의 통찰은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이 늙은이도 노년이 되어서야 어렴풋이 보게 된 세상사 복잡하면서도 견고히 맞물려 돌아가는 이치를 그 나이에 깨우치셨다니…….=
“과찬이십니다. 아무튼, 그렇다 하시니 흑마술서의 내용에 관해서는 포기하겠습니다. 곤란한 부탁을 드려 죄송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론하스는 여차할 경우 심안으로 그의 사람 됨됨이를 확인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성제로써 영도의 지원과 비호를 받는 인물이다. 차별받기 쉬운 차원 방랑자이면서도 저러한 인품을 갖춘 사람이니 문제는 없을테지만, 만약을 대비해 확인한 뒤 내용을 알려 주려 했던 것.
그랬는데 스스로 곤란케 했다며 사과하고 물러나다니…….
론하스는 미안함에 무언가 대신해줄 것이 없을까 생각하였고 때마침 알맞은 것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아를마네 대성당을 나온 안느는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믿기지 않는 것처럼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지.”
계속 뒤를 돌아보는 안느의 행동에 환인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무리 흑마술서를 봉납했다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보상을 내어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
“그거 말이군.”
환인이 제출한 흑마술서의 보상은 흑마술서의 내용에 따른 중요도를 상급으로 측정, 2500점의 땅신 교단 신앙 점수가 보상으로 나왔다.
1점의 신앙 점수는 갓 임관한 정식 신관이 한 달간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여야 나오는 점수다. 대주교 같은 경우에는 한 달에 30점가량이 쌓인다.
물론 의뢰라던가 봉사, 기부를 통해서도 점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분야별로 한 달에 획득할 수 있는 상한이 정해져 있어 단순 기부나 무작정 봉사만 하는 것으로는 많은 점수를 단번에 획득할 수 없다.
=참고로 도령이 흐라스린드에서 각 교단에 나누어준 뒷골목 조직 폭력배들의 재산도 기부금으로 취급돼서 좀 나왔어. 우리 땅신 교단 쪽에 도령의 이름으로 87점이 기록됐을 거야. 아무튼…….=
아를마네 대성당에서 받은 땅신 교단 신앙 점수는 최종적으로 3,500점이었다.
흑마술서 반납으로 발생한 2,500점에 론하스가 자신의 점수, 그리고 팔라툼 교구에서 크나큰 기여를 한 이에게 내리는 상점을 보태서 1,000점이나 더 채워준 것.
일반 사제, 신관이라면 291년을 성실히 생활하여야 모이는 수치고 대주교라 하여도 10년은 꾸준히 모아야 하는 수치다.
그러나 신앙 점수를 이만큼이나 모으는 사제는 없다.
신앙 점수는 교단 내에서 온갖 물품의 교환 재화로 사용되기에 자료 열람, 연구 재료 요청, 봉사 활동에 필요한 각종 지원을 요청하는 것에 쓰고, 전투 계통 성직자들은 점수가 모이는 대로 신성 부여 장비를 교환하기 때문.
“내 요청을 거절한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도 있을 거다.”
=하긴. 대성자 후보의 공익적인 요청을 거절하게 된 것은 부담이 적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그때 좀 밀어붙이면 내용을 알려줬을 거 같은데…… 괜찮아?=
“대강은 내용을 짐작하고 있다. 거의 확신하고 있는 것을 확인받을 바에 상황 좋게 물러나서 보상을 조금 더 많이 받는 것이 이득이지.”
환인의 설명에 안느의 표정이 이상해진다.
=내용을 보지도 못했잖아. 근데 어떻게?=
“흑마술사의 방과 그 미궁의 내부 형태, 마력의 흐름, 심핵의 상태, 심핵이 놓여있던 위치……. 거기에 론하스 대주교의 반응과 약간의 설명이면 밑그림으로는 충분해. 남은 것은 가설을 끼워 맞추는 약간의 시뮬레이션뿐이다.”
=…….=
도령이 천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정말 그 정도만으로 흑마술서의 내용을 알아내는 게 가능한가?
안느의 의구심은 환인이 가진 강화 영혼 시야와 일반 영혼 시야의 정확한 효능을 몰랐기에 드는 생각이었다.
위상력, 마력의 흐름이란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알려준다.
더욱이 심핵력을 다루며 아드네빌라가 준 심핵력 기술서까지 습득한 환인에게 있어 미궁은 에너지의 덩어리, 그리고 심핵은 그런 에너지를 다루는 코어 같은 것.
‘흑마술사는 심핵에 흑마술서의 기운을 흘려 넣어 오염을 시도했겠지. 물론 시전자의 능력이 형편없어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필요로 했을 테지만…….’
자신은 다르다. 자기 자신의 몸 안에는 이미 막대한 심핵력이 담겨있는 상황.
이 심핵력을 다루는 것도 익숙해졌으니 시험할 심핵만 있다면 미궁을 자기 뜻대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환인이었다.
‘예를 들어 미궁의 심핵을 장악해 심핵력의 지속적인 확보를 시도해본다거나.’
어쨌든 현재로서는 시도해볼 수 없다.
팔라툼을 떠나면 다음 목적지는 메리아놀이 될 예정, 그 과정에 적당한 미궁이 있기를 바랄 수밖에.
환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도 못 한 안느는 예민한 주제를 일단 넘기고 다시 대성당을 돌아보며 말했다.
=뭐 아무튼, 구세의 빛을 반납하고 등대의 빛을 정령 기사 사양으로 요청하려고 했는데 덕분에 그러지 않아도 돼서 좋네.=
“역시 중장 판금은 벗고 경장 갑주로 바꾸는 건가.”
=튼튼한 것도 좋지만 루모랑 친화력이 점점 오르다 보니까 속도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더라. 특히 요즘은 이슬이의 검세와 동작을 따라가는 것도 벅차다 보니까 더 그래. 루모랑 합체하지 않으면 진짜 이슬이 상대로 방어만 해야 한다니까?=
“루모의 특징이 속도와 화력이긴 하지.”
어느새 안느의 손바닥에 올라와 반짝반짝 빛나는 빛덩어리를 바라보는 환인.
루모를 몸에 강령시킨 안느를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은, 정령이라고 신체 능력을 무조건 균등하게 올려주는 것은 아니란 거였다.
자신의 정령 강령이 전체적인 신체 능력의 강화를 이뤄주는 1단계라면 안느와 루모의 합체는 2단계다.
계약을 맺고 친화력과 친밀도가 높아진 2단계 상태에서는 전체적인 신체 강화에 이어 특화되는 스테이터스가 발생한다.
루모의 경우에는 근력과 순발력.
=지금도 힘과 순발력은 도령이 중급 정령 강령을 걸어줄 때랑 흡사하니까. 루모가 중급 정령에 오른다면 더욱 강해질 거야. 등대의 빛이 그 계기가 되어주길 기대하고 있어.”
“빛의 정령석은 얼마나 남았지.”
=도령한테 받은 거 절반 정도. 루모가 더 먹으려고 안 해. 아직 하급 정령이라서 그런가 봐.=
「~~.」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빛덩어리 속에 9살 남짓한 소녀가 미소짓는 희미한 윤곽이 보인다.
안느가 내민 손가락을 잡고 장난치는 그 모습은 확실히 처음 계약했을 때보다 강해진 모습이다.
계약 당시에는 작은 소녀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는데 지금은 빛으로 온몸을 감싸 그 안에 숨어있으니까.
환인은 루모를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계약 이전에는 분명 이실리테에게 중급 빛의 정령을 강령시켰던 환인이었다.
중급 정령의 특징이라면 12살 정도의 초등학교 고학년생 정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계약 이후의 루모는 하급 정령인 9살 정도의 연령대로 어려졌다.
실제로도 하급 정령 정도의 힘만 발휘했는데 안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었다.
순수한 자연의 정령이었다가 사람과 계약을 맺으면서 사람의 탁기가 흘러들어갔기 때문이야, 라고.
“…….”
환인이 계속 바라보고 있으니 안느의 손가락에 얼굴을 비비적던 루모는 슬그머니 그녀의 옷깃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 또 숨어버리네. 도령 나쁜 사람 아니라니까. 루모~.=
루모가 자신에게서 거리를 두는것도 아마 안느와 계약을 맺기 전의 기억이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무튼, 루모에게 심핵력을 주어 진화를 유도하는 건…… 시기상조겠지.
일단 주문한 등대의 빛이 오길 기다려봐야겠군.
집에 돌아온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모두 모여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우리 다녀왔어~!=
=자기, 어서 와. 안느 아가씨도 어서 오렴.=
=다녀오셨어요?=
=응응. 다들 들어봐, 흑마술서를 반납했더니 신앙 점수를 얼마나 받았는지 짐작돼?=
=얼마나 받았는데요? 신전의 신성 점수는 짜게 주기로 유명한데.=
=들으면 놀랄걸? 흑마술서 반납으로 2,500점에 도령의 화술로 거기에 더해서 1,000점, 3,500점이나 돼!=
=헉!=
=10년 넘게 짐승신 교단에 기부한 큰오빠도 500점을 채 못 모으셨다고 하던데…… 굉장하네요.=
=그 흑마술서가 엄청 위험한 거였다더라. 만약 허접한 흑마술사가 아니라 중상급만 되었어도 세상에 난리가…….=
=어머…….=
안느가 유르파, 백려강, 아영을 상대로 무용담을 늘어놓는 사이 환인은 가까이 다가온 이실리테에게 반코트를 넘겨주며 물었다.
“빨리 다녀왔군. 레드릭을 수리할만한 곳이 있던가.”
=네. 아우라를 드러내고 있어서인지 절 알아보고 대장장이 조합의 조합장이 직접 나와서 의뢰를 받아주었어요.=
인터넷도 없고 신문도 널리 퍼지지 않은 세계에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퍼지는 속도가 상상 이상이다.
사회 상류층이라면 수정구를 통한 전파를 생각하겠지만 대장장이 조합처럼 중간 계층 노동조합이 이실리테를 알고 있다니.
환인은 여자친구들 사이로 가서 앉으며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서 등대의 빛을 정령 기사 사양으로 주문했어. 도착에 5일 정도 걸린대.=
=등대의 빛이요? 그거 유물급에 근접한 최상위 신성 갑주잖아요!=
=어? 어. 아영이 너 되게 잘 안다? 신성 점수가 짜다는 것도 직접 일해본 사람 아니면 모르는 정보일 텐데.=
=카락스의 암살자는 정보를 수집하는데도 진심이었거든요. 중요한건 그게 아니고, 5일 뒤에 신성 마도기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거네요? 기대된다~.=
=그래? 으음, 아무튼 우리 쪽은 일이 잘 해결됐어. 너희는 어땠는데?=
꿈꾸는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던 아영은 안느의 질문에 새삼 감탄스럽다는 얼굴로 이실리테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실 언니는 여기서도 유명하시더라고요. 언니가 대장 조합에 들어가니까 조합장이 두 발로 달려 나와서 언니 무기 수리 의뢰를 받아들이던데요!=
=너는? 네 무기도 보러 갔잖아.=
=전 함정 해제까지 신경 쓰려면 오픈 핑거 타입 너클 더스터 쪽이 알맞은데 여긴 괜찮은 게 없어서 그냥 넘겼어요. 좋은 걸 알아보려면 매주 주말에 열리는 경매장을 찾아보라던데, 모르겠네요.=
경매장이라는 이야기에 헬루멘에서의 경연을 떠올린 안느가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짐작 못 한 백려강은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유르파를 돌아보며 말한다.
=유르파 언니도 이번에 수익을 막대하게 올리셨어요. 보석을 가공한 단순 장신구부터 생활 마도구랑 범용 신체 능력 강화 마도 장신구까지 조합에 판매하셨는데 그게 1,500금화나 됐거든요.=
=1500금화?!=
집에 들어왔을 때 분위기가 뜨거웠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환인은 이실리테가 타온 커피를 받아들며 으쓱거리는 유르파에게 물었다.
“수익이 더 올랐군요.”
=도령이 넘겨주었던 보석들 있잖니. 그걸 가공해서 나온 수익이라서 내가 벌었다고 하기에 애매해서. 아무튼 여기, 판매 대금이랑 자기가 흐라스린드에서 넘겨주었던 800닢 어치 주화를 환금한 거야.=
쿵, 쿵 소리를 내며 올려지는 금화 자루 2개와 그보다 한참 작은 주먹만 한 주머니 하나.
작은 주머니를 열어보니 족히 6급은 되어 보이는 붉고 푸른 위상석 8개가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근력과 생명력, 체력과 위상력의 6급 위상석 약 1300금화 어치, 그리고 각각 500금화가 든 주머니 두 개야. 현금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절반은 위상석으로 대체했어.=
환인은 족히 수십 킬로그램은 될법한 주머니를 들어보았다가 내리며 말했다.
“이곳 비술사 조합의 재정 상태가 제법 좋은가 보군요. 단번에 수천 닢에 해당하는 제품을 인수하면 보통 처치가 곤란할 텐데.”
=마도기나 마도구는 유통기한이 있는게 아니니까. 그리고 이슬이 아가씨처럼 내가 성제 예하의 영혼 기사라는 게 알려져서 아마 조합장이 조금 무리해서라도 구매한 거 같아.=
“그렇습니까.”
=응. 판매 물품 가지고 우리 성제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한다고 경고도 해줬으니까 무뢰배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우리도 이름이 좀 알려지긴 했나 보네. 교단의 기사들도 우릴 바로 알아보던데.=
=조금 민망하긴 하지. 중요한 건 자기가 전부 다 했는데.=
안느와 유르파의 대화를 듣던 환인은 하늘 교류회를 떠올렸다.
비술사 조합은 하급 노동조합이 아니다. 상류층에도 한쪽 발을 걸친 집단들, 그런 곳에서도 그녀들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면 하늘 교류회에도 자신의 이름이 알려져있겠지.
‘그렇다면…….’
환인은 잠깐 생각하다가 유르파의 어깨를 끌어당겨 보듬어주며 말했다.
“거래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읏, 에헤헤.=
“마지막으로 아영의 장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응? 아, 마땅한 제품이 없어서 오늘은 치수만 재고 왔어. 특급으로 주문해서 완성되는데 이틀 정도 걸릴 거래.=
당장 오늘부터 훈련을 시작하려 했었던 환인은 조금 뒤로 미루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들에게 대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대략적인 심핵 활용 구상까지도.
생각보다 중요한 이야기가 튀어나와 긴장하며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들은 유르파는 한숨으로 긴장을 흘려보냈다.
=미궁의 조작이라니, 이게 알려지면 보통 일이 아닐 거야.=
=이건…… 나도 후폭풍이 어떻게 될지 짐작을 못 하겠어. 엄청나게 싫어할까? 아니면 영지 내 미궁의 관리에 유용해서 환영할까?
“아무튼, 오늘로 급한 일은 다 해결했으니 팔라툼 왕성에서 연락이 올 때까지 휴식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하늘 교류회 방문과 백려강 및 아영의 술법 함정 교육은 왕성을 다녀온 뒤부터, 팔라툼의 미궁 정보 수집은 틈틈이 진행하면 될 것이다.
=도령, 만약 성에서 연락이 안 오면 어떻게 해?=
안느의 질문에 환인은 톡 쏘는듯한 향기와 볶은 원두의 고소한 향기, 살짝 탄 내음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커피향을 즐기며 대답했다.
“그때 플라비우스족 사절이 보여준 그 태도를 보면 그럴 리는 없다고 본다.”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 날개 세 쌍의 사절 대표를 생각하면 플라비우스족이 보여줄 태도는 둘 중 하나다.
제2 천공 기사단의 출격을 핑계 삼아 찾아와 초대를 은유적으로 독촉하거나, 아니면 대놓고 사람을 보내와 초청하거나.
“가장 가능성이 큰 쪽은 후자겠지. 온다면 오늘 오후, 아니면 내일 아침일 거다.”
=얼마 안 남았네.=
“그래. 왕성을 방문할 때 입을 옷을 준비해두는 게 좋을 테니 다들 같이 다녀와라. 돈은 아끼지 않아도 된다.”
=진짜?! ……응? 도령은 안 가?=
“나는 파르히스트에서 만들어놓은 것도 있고 천릉을 입고 가도 된다. 그리고 왕성에 들어가면 정신적으로 매우 지칠 테니 그때를 대비해 머리를 쉬게 할 생각이다.”
안느는 함께 가서 쇼핑하길 바라는 마음에 꺼낸 말이겠지. 그러나 어머니와 옷을 보러 외출할 때마다 무척이나 지치는 경험을 했던 환인은 이번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그리고 그 핑계는 매우 잘 통했다.
=하긴. 도령은 쉬는 것도 중요하지……. 그럼 이슬이가 남을래?=
“그러지 않아도 된다. 옆에는 비상도 있고 환연도 있으니까.”
=응… 알았어.=
여자들은 아쉬워하면서도 즐거워하는 얼굴로 외출을 나갔다. 그가 함께 가지 않아도 좋다. 예쁜 옷을 많이 사서 그에게 보여주면 되니까.
=그래도 주도니까 예쁜 옷 많겠지?=
=드레스의 유행은 메리아놀하고 팔라툼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비술사 조합을 가면서 유명 백화점 위치도 봐뒀으니까 그리로 가봐요.=
=좋아! 근데 이슬이 너 왜 자꾸 뒤로 빼는 거야?=
=나, 나는 드레스 같은거 안 어울릴 거야.=
=말도 안되는 소리 하네. 도령한테 예쁜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빼지 말고 얼른 와!=
=맞슴다! 이실 언니의 몸매면 오히려 안 어울리는 드레스를 찾기 힘들테니까요!=
=…….=
재잘거리면서 주택을 나서는 여자친구들. 그녀들이 사라지자 드넓은 주택이 삽시간에 고요해진다.
환인은 고즈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정원에 의자를 내놓고 일광욕과 삼림욕을 합친 휴식 시간을 가졌다.
‘혼자인 건 얼마 만이지.’
정확히는 환연이 실루를 타고 정원을 뽈뽈거리며 돌아다니고 비상도 옆에 앉아있지만, 환인에게는 혼자나 다름없는 시간.
결혼한 뒤 아내가 자식들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갔을 때 유부남들이 느끼는 자유와 비슷한가.
실없는 생각을 뒤로하고 환인은 머릿속을 비워 따스한 봄날의 햇볕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환인은 예상대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주인님. 천왕궁의 액정관에서 사람이 찾아왔어요.=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을 전담하는 부서의 관직자가 두 명의 관내 비서를 대동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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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남의 해방감 5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