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 하늘 도시 팔라툼
“그러면 팔라툼에서 할 일을 정리하지.”
아침 훈련을 마치고 이실리테가 간만에 솜씨를 낸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마친 환인은 여자 친구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파티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일은 팔라툼의 왕성 방문, 미궁의 술법 함정 해체 관련 기술 습득, 안느의 정령술 관련 장비의 교체, 팔라툼의 미궁 정보 수집, 투라드 마을에서 획득한 흑마술서의 교회 제출, 유르파의 공간이동술 마도기 제작 재료 확보…… 대강 이 정도군.”
수첩을 꺼내 메모했던 것을 체크해보는 환인.
그중 엘위드리스 가문의 공녀 측에게 받은 통신 수정 번호가 시선을 끌어당겼지만.
“…….”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죽죽 선을 그었다.
자신이 굳이 먼저 저쪽에 연락할 필요는 없다. 기다리면서 저쪽의 반응을 보다가 마뜩치 않을 경우 가문 전체를 싸잡아 죄를 물으면 그만이니까.
저쪽이 자신에게 연락하지 못해 벌어지는 일 따위, 배려해줄 이유는 없지.
그때 아영이 번쩍!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저 함정술에도 약간이지만 일가견이 있습니다! 중급 함정 해제 자격증도 있어요! 허락하신다면 술법 함정술을 배우고 싶습니다!=
파티의 회복 술사 역할에 함정 해제까지 맡으면 자신의 파티 내 입지는 무척 탄탄해질 것이고 기여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자신의 파티 기여도가 높아지면 덩달아 영도로 간 가족들의 안전과 대우도 좋아질 테니 아영의 입장에서는 절호의 기회.
그녀의 하늘을 찌를듯한 의욕에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 백려강을 돌아보며 물었다.
“백려강.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저도 같이 배우라는 말씀이신가요? 음, 아영이가 잘못될 경우를 생각하면 함정 해제술을 저도 익혀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술법 함정은 고급으로 분류되는 기술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배울 수 있을까요……?=
그녀의 타당한 걱정에 환인은 파르히스트에서 배웠던 것을 요약해놓은 작은 수첩과 자물쇠 해제 숙달에 쓰던 도구를 꺼내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파르히스트의 길드에서 기술을 배우며 나름대로 정리해놓은 것들이다. 이 책자의 내용을 암기해놓으면 고급 함정술을 익히는 데 도움이 되겠지. 차후에 아영에게서 다시 배워도 되는 일이고.”
=네. 그럼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백려강이 수첩과 자물쇠 따기 도구 등을 챙기자 이번에는 안느가 손을 살짝 들며 입을 열었다.
=도령, 정령술 장비 구매는 잠깐 미룰 수 있어?=
“이유가 뭐지.”
=그 전에, 흑마술서를 땅신 교단에 제출하는 건 확정이야?=
“그래. 땅신 교단에 네 이름으로 낸다면 너의 평판과 실적이 오를 테니까.”
환인의 답에 아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흑마술서? 흑마술사하고도 싸우셨다는 이야기?
그의 대답에 안느는 잘됐다며 웃었다.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흑마술서를 제출하면 엄~청 많은 교단 기여 점수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그거랑 지금 가진 구세의 빛을 반납하면 좀 더 좋은 장비로 교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그 정도인가.”
=흑마술사는 니오네브레스 전체의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기니까.=
“그렇군. 정령술 장비라면 메리아놀과 땅신 교단 측에서 구하는 게 품질이 훨씬 뛰어나겠지……. 그러면 잠시 후 같이 교단을 방문할까.”
=응. 좋아.=
안느의 대화가 끝나자 유르파가 손을 들어 백려강과 아영을 가리키며 묻는다.
=자기, 려강이 아가씨랑 아영이는 언제 보낼 거니?=
“시간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 팔라툼의 왕궁을 방문한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좀 있다 려강 아가씨랑 팔라툼 비술사 협회를 방문해도 될까? 그동안 만들었던 마도구랑 마도기를 전부 팔고 아까 자기가 말한 공간이동술 마도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사놓으려고.=
“괜찮겠지요. 마도기 제작 재료의 비용은…….”
=그건 괜찮아. 그동안 만들어서 팔고 모은 돈이랑 이번에 만든 걸 다 팔아서 합치면 대충 1000 금화 정도는 될 거거든.=
=처, 천 금화?!=
=와…….=
천 단위 금화라는 이야기에 여자들이 크게 놀란다. 그 금액은 그녀들이 이때까지 미궁에서 벌어들인 수익과 거의 비등한 수준이었던 것.
환인도 제법 놀랐다. 그녀에게 맡긴 것은 저급 위상석이 전부였는데 그런 것들로만 대강 1년 만에 1,000닢을 벌여 들었다니.
“제가 넘겨주었던 1~3급 위상석은 다 합쳐봤자 100금화가 채 안 될 텐데. 대단하군요.”
그의 치하에 유르파는 에헤헤 웃으며 작게 손사래를 쳤다.
=알고 보면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야. 마도구와 마도기의 수요는 도시보단 마을, 마을보단 촌락에 집중되고 또 한 곳에서 팔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으니까.=
도시에서 마도구, 마도기 등이 많이 팔리긴 하지만 그만큼 라이벌도 많다. 특히 조합이나 협회 등이 설립되어있어 개인으로서는 판매 루트를 개척하기도 어려울 정도.
그랬는데 유르파는 환인과 함께 여행하며 도시, 마을, 촌락 가릴 것 없이 보이는 대로 들렀으니 판매 수익이 껑충 뛰는 게 당연한 일.
거기다 헬루멘과 프라버, 영도의 지휘부, 지배 계층을 상대로 팔아넘긴 것도 제법 된다.
환인의 이름을 파는 식이었지만 유르파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의 이름으로 판 마도기와 마도구는 그만큼 품질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중요 소재인 위상석을 전부 자기랑 아가씨들이 공급해줬잖아? 마진율도 예전과 비교가 안 되니까 돈이 금방 모일 수밖에.=
“그것도 실력이 받쳐줄 때의 이야기지요. 아무튼 수고했습니다.”
=응. 조합에 들러서 필요한 재료를 산 뒤에 남은 거 전부 정산할게.=
고개를 작게 끄덕인 환인은 말을 꺼낼 기색이 없는 이실리테와 백려강을 돌아보았다.
“이실리테와 백려강은 외출 계획이 없나.”
=전 레드릭 얼터 수리와 요리재료 구매 외에는 없어요.=
=저어…… 저는 시간이 나면 팔라툼의 도서관을 방문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중간에 휴식일을 가질 테니 그때 하도록 하지.”
=도령은 개인 용무 없어? 아까 계획에 그리모암의 모자는 말 안 했었잖아.=
다 마신 차를 내려놓은 안느는 환인이 수첩에 일정을 정리하는 걸 보다가 그의 어깨에 살짝 기대며 물었다.
“마지막 유물은 히스론드 하늘 교류회라는 곳이 소유하고 있다더군. 팔라툼의 미궁을 들르기 전에 방문해서 거래 의사를 타진할 예정이다.”
=이름만 들어도 부자들의 취미 생활 같은데?=
=안느 언니 이야기대로예요. 자체에서 탐험가를 다섯 팀 정도를 고용해 희귀한 물품 등을 수집하는 팔라툼 상류 모임이에요.=
=헐~ 그런 사람들한테서 원하는 걸 얻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쪽이 제안할 물건도 드문 것은 아니니 일단은 접촉해볼 생각이다. 안된다면 다른 거래 방식을 찾거나.”
아침 회의를 끝마친 환인은 백려강과 비술사 조합으로 외출하려는 유르파에게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아영이 입을 가죽 방어구 위주다.
“아영의 장비 옵션은 이런 식으로 구해주십시오.”
=음. 신체 탄력 증가, 체력 증가, 근력 증가…… 마도기 하나에 세 가지 기능이 전부 붙은 걸로 할 거니? 아니면 따로따로?=
이실리테가 구해주는 가죽으로 연습한 덕분에 한층 고차원적인 비술 부여를 가죽에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유르파는 방어구 제작자가 아니다.
방어구의 방어력과 기능은 방어구 제작자의 실력을 따라가는 법.
팔라툼은 히스론드의 주도이기도 하며 술법적인 분야는 메리아놀과 맞먹을 만큼 뛰어나니 이곳에서 그녀의 장비를 일단 맞출 생각이었다.
“마도기 파손 상황을 고려하면 모든 파츠의 기능이 같은 것이 좋겠지요. 박투를 상정한 장비인 만큼 손가락과 팔목의 장신구는 제외해주십시오.”
=비용은 내가 알아서 할까?=
“예.”
=응! 그럼 다녀올게~.=
그녀들이 출발한 뒤 이실리테와 아영도 레드릭 얼터의 수리와 아영이 쓸 건틀릿을 보러 시장으로 갔고, 환인은 안느와 함께 땅신 교단 팔라툼 교구의 대성당으로 향했다.
=저쪽이야.=
그녀의 안내대로 비상을 타고 대로를 이동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블랙홀처럼 끌어당겨 진다.
비상의 색, 그리고 옆에서 쿠핀을 타고 이동 중인 안느의 아우라 때문이다.
안느는 그 시선이 영 마뜩잖았다. 환인과 만나기 이전에는 안 좋은 의미로 여러 시선을 모으곤 했기에 이러한 관심이 별로였던 것.
속으로 눈썹을 찡그리던 그녀는 옆을 돌아보곤 작게 웃었다.
그도 시선이 몰리는 걸 느끼고 있을 텐데 하나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이 말 그대로 독보적이었기 때문이다.
=도령이 아우라 무발현이라 참 다행인 거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비상이랑 도령의 아우라가 합쳐지면 말 그대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움직이기도 어려웠을 테니까. 덩달아 여자들한테도 더 인기가 많아졌을 테고?=
“확실히. 처음부터 아우라가 드러나고 있었다면 내 행적은 지금과 완전히 달랐겠지.”
율캄에서 영도까지는 팔라툼과 거리가 거의 비슷하다. 로아팅스 정글 북쪽으로 올라가면 거의 직선으로 영도까지 향할 수 있다.
만약 자신의 아우라가 영혼술 계통이라는 게 그때부터 드러났다면 영도는 즉시 사람을 보내 자신을 이끌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 이실리테도, 이엘카타도 백려강과 유르파, 안느와 환연 모두하고도 만나지 못했을 테지.
=땅신님께서 도령을 만나라고 운명을 점지해준 느낌이지 않아?=
“그 말대로라면 땅신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부금이라도 내야할 것 같군.”
=나도 낼래. 도령을 만난 덕분에 매일매일이 행복해서 행복세를 내야할 거 같으니까.=
킥킥 웃는 안느와 잡담을 나누며 지중해 도시 거리 같은 대로를 따라 오르고 있자니 현실의 대성당과 비교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 백색의 화려한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높이는 50여 미터에 달하고 곳곳에 뾰족한 첨탑 구조물이 솟은 데다 아치형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환인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듯한 대성당을 보곤 작게 감탄했다.
“상당히 화려하군…….”
=팔라툼의 분위기에 맞게 건축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대. 메리아놀의 본단은 이 정도는 아니야. 좀 더 거룩하고 엄숙한 느낌?=
팔라툼 교구는 여느 대성당들처럼 주변이 드넓은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어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니오네브레스 전체 인구가 수천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 유동량만 본다면 1/10은 될법한 인구가 팔라툼에 살고 있을 느낌이다.
대성당이 있는 드넓은 광장에 들어선 안느가 먼저 쿠핀의 등에서 내리며 말했다.
=도령, 내리자. 교구 대성당 근처에는 탈것에 내리고 날개를 접어서 걷는 게 규율이야.=
“신에 대한 공경인가.”
=응.=
그의 눈에도 날개를 접고 걷는 플라비우스족과 탈것에 내려 고삐를 잡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기에 불만없이 비상에서 내려 팔라툼 교구의 대성당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엇……!=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오는 입구로 걸어가고 있자니 입구를 지키는 황금색 갑주의 플뢰족 기사들이 눈을 크게 뜬다.
4명 중 1명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고 다른 한 명은 절그럭거리며 7개의 계단을 서둘러 내려와 환인에게 접근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영도의 대성자 후보이신 성제님과 성기사 안느 님, 맞으십니까?=
“예. 맞습니다.”
=아……! 두 분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히스론드 팔라툼 교구 아를마네 대성당 소속의 3급 기사, 도함입니다. 두 분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마워. 근데 우리가 올 줄 알고 있었어?=
=한 달 전쯤 본단에서 성문이 내려왔습니다. 성제님과 성기사 안느 님께서 오실 거라고 말입니다. 아, 고삐는 제게 넘겨주십시오.=
“괜찮습니다. 비상은 저 외에 고삐를 맡기지 않는지라.”
=그, 그렇습니까……?=
도함이라는 기사의 이야기에 잠깐 굳었던 안느가 설마하며 그에게 재차 물었다.
=혹시 그 성문, 아기오시스 추기경이 보낸 거야?=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윽. 짧게 신음을 흘린 안느가 찌푸린 얼굴로 입술을 오물거리다 환인의 옆에 찰싹 붙으며 속삭였다.
=도령, 어떡하지. 르아가 또 화낼 거 같아.=
“자주 연락하라 했었는데 프라버 북쪽에서의 통신이 마지막이었으니까. 족히 반년만인가. 화낼만도 하군.”
=자, 잠깐. 나 영도 나왔을 때 연락하려 했지만 도령이 하지 말라고 했었잖아…! 시주르 대평원에서도…!=
소리를 잔뜩 낮춘 안느에게서 당황을 읽은 환인은 큭큭 작게 웃었다.
=웃지 말고…! 르아가 화내면 도령이 옆에서 나 변호 해줘야 해! 변호해줄 거지?!=
“그래. 해줄테니 울상 짓지 마라.”
=우, 울상 안 지었거든.=
그렇게 도함을 따라간 곳은 VIP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측면 출입구였다. 웅장함이 특징인 정문과 달리 세밀하고 섬세한 음각이 특징인 화려한 측문.
건물 안에까지 비상을 데려갈 수는 없기에 도함을 잠시 따라가 있으라고 한 환인은 도함이 열어주는 두터운 석문을 지났다.
“…….”
여러 곳에서 찬란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니 빛내림 현상이 상시 이루어지는 듯한 내부 복도가 그의 시야에 한가득 담긴다.
말 그대로 아기 천사들이 날아다니며 웃음을 터트릴것처럼 성스러운 공간이다.
그런 복도를 안느와 단 둘이 조금 걷고 있자 플뢰족 상급 여사제 두 명이 복잡하고 섬세한 꽃다발을 두 손으로 공손히 쥔 채 기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귀한 분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두 명은 환인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한 뒤 꽃다발로 살짝살짝 양어깨를 건드려 축복을 내린 뒤 사뿐사뿐 걸으며 교구장에게 안내하기 시작했다.
잡담은 일체 없는 경건한 몸가짐들.
자신들이 정문에서 측문으로 오는 데 걸린 시간은 대충 2분. 그사이 이런 준비를 했다는 것은 이미 말을 맞춰놨다는 뜻이겠지.
두 상급 사제를 따라 조용히 대성당을 걷던 환인은 3층에 위치한 교구장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대한 거북을 새겨놓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문을 본 환인은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분이 높아져서 좋은 점은 번거로운 신분 확인 과정이 없어지고 최고 결정권자와 바로 독대할 수 있다는 편의성과 편리성이다.
반대로 마음에 안 드는 점은 이처럼 예식을 차려야 할 자리가 많이 이루어진다는 것.
눈앞의 플뢰족 중년인은 그런 예식을 극도로 발휘해야할 인물이었다.
교구장이라는 직책에 걸맞은 내실, 황색을 기조로 꾸며진 밝고 찬란한 교구장실에서 중년의 흔적이 얼굴에 새겨지고 있는 남자와 마주한 환인은 담담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땅신 교단 팔라툼 교구 본성당에 어서 오십시오. 제가 아를마네 대성당의 교구장, 론하스입니다.=
“영도의 대성자 후보인 환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성제 예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만 실제로 보니 놀라움이 더해집니다. 이토록 젊고 능력 있는 분께서 다음 세대 대성자 후보시라니……. 영도의 앞날에 자애신님의 찬란한 빛이 비침을 느낍니다.=
“그저 역마살이 낀 일개 영혼사에게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그것 또한 자애신께서 환인 성제님께 관심을 가지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 이리로.=
플뢰족 남자인 교구장과 악수를 하고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덕담을 나눈 환인은 그의 안내에 따라 고급스럽고 우아한 의자에 앉았다.
현대에서도 족히 수백만 원은 호가할듯한 백색과 황색 기조의 앤틱스러운 의자.
환인은 피곤했지만 목적을 위해 시간을 들여 론하스와 호감도를 쌓기 시작했다.
적당히 겸손한 느낌으로 자신이 대성자 후보가 된 사정을 풀고 그가 궁금해하는 아드네빌라와 인연도 맛보기 정도로만 살짝 꺼내 그의 흥미를 유발한다.
=오오, 확실히 무상의 천릉은 지난 수백 년간 수많은 사람이 찾으려 하였지만 끝내는 상실되었다는 결론을 내린 작품! 알류겔의 백룡께서 소지하고 계셨다면 아무도 모를 수밖에 없겠지요!=
그녀와의 인연은 환인이 몸에 걸치고 있는 반코트의 멋들어진 제복이 증명했기에 론하스는 의심하는 기색 없이 믿었고, 환인은 계속해서 그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며 담화를 해나갔다.
간간히 절품絕品의 차를 리필해서 마시며 1시간가량 담화를 나누었을 때, 환인은 충분히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그의 기품있는 얼굴에서 한껏 느껴지는 우호의 감정.
이 이상 호감도를 쌓기는 어렵겠지. 이보다 더 높이기 위해서는 그의 부탁도 들어주며 시간을 들여 천천히 올려야 하는 단계다.
하지만 그럴 것까지는 없다. 자신의 신분과 안느의 존재가 그에게 우호도의 추가 보정을 줄 테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자신이 바라는 것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환인은 적당히 틈을 보아 본론을 꺼내 들었다.
“제가 오늘 이렇게 귀 교단을 방문한 것은, 여정 도중 흑마술사를 죽이고 입수한 흑마술서를 송부하기 위해서입니다.”
=흑마술서!=
깜짝 놀라는 교구장의 반응에 확신을 가진 환인은 조용히 안느를 불렀다.
“안느. 그걸.”
=응.=
안느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축성 받은 끈으로 꽁꽁 싸매 봉인한 사람 가죽 책을 꺼내 수정으로 만든 탁자에 올렸다.
=흐음. 주기적인 축성이 꼼꼼히 이루어졌군요. 그런데도 이렇게 짙게 느껴지는 암흑의 기운이라니…….=
자리에서 일어난 론하스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환인에게 허리를 숙였다.
=성제 예하와 영혼 기사님들의 활약으로 니오네브레스의 우환이 하나, 이렇게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환인 성제 예하의 판단과 결정에 땅신 교단의 대주교로서 깊은 감사와 찬탄의 뜻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짧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그 감사 표시에 대답한 환인은 그의 기분을 파악하며 조심스럽다는 뜻을 어필하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영혼의 성불행으로 혼의 안식을 찾는 일도 중요하다 생각하지만, 땅신님의 은혜가 과다하여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과 시름에 잠기는 것을 예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대로입니다. 관리받지 못한 그분의 은혜가 흘러넘쳐 주변을 피폐히 만드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제가 흑마술사를 발견한 것은 우연한 기회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흑마술사는 1급 정도인 미궁을 발견하여 제 소굴로 삼은 상태였지요.”
=허어!=
환인은 적당한 화술을 발휘해 그 흑마술사가 흑마술을 이용해 미궁을 강화했으며, 그 원흉은 책에 기록된 내용인 듯하다, 앞으로 방문할 미궁에서 그러한 흑마술의 흔적을 분간하기 위해서라도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았으면 한다는 뜻을 전했다.
론하스는 자신의 무릎을 탁, 때리며 그의 뜻에 감탄을 드러냈다.
=참으로 올바른 생각이십니다! 과연 성기사 안느 경이 따를만한 분이시군요! 그러한 뜻이라면, 알겠습니다. 제가 흑마술서의 정화를 겸하여 흑마술서를 개봉해 내용을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론하스는 두 손에 각각 소규모 성술 결계를 펼친 뒤 하나로 합친 다음 그곳에 흑마술서를 담았다.
반투명한 황색의 구체 속에 잠긴 흑마술서가 상극의 기운에 괴로워하듯 부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 진동에 축성받은 끈이 천천히 분해되어가니 이윽고 흑마술서의 겉표지가 드러나고, 여자의 음부를 잘라 이어붙인 흑마술서의 표지에 론하스가 참으로 신성모독적이라는 노기에 찬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음부는 태곳적부터 생명 탄생을 뜻하는 신성한 것, 그것으로 표지를 만들어 신성을 모독하니 그야말로 끔찍한 타락의 부산물입니다!=
여자의 성기를 고스란히 잘라서 이어붙인 표지는 그 말을 증명하는 듯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안느가 징그럽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린다.
=우리가 입수했을 때는 봉인할 때까지 그렇게 암흑을 풍기지 않았었는데…….=
=안느 자매. 번개란 또 다른 정화입니다. 당시에는 번개에 큰 충격을 받아 잠시 힘을 잃었던 것이겠지요.=
후우, 작게 숨을 내쉰 론하스는 성력을 끌어올려 온통 황색 빛무리에 감싸인 뒤 천천히 흑마술서를 펼쳐 눈에 담기 시작했다.
환인은 교구장이 왜 저렇게까지 하는지 그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성술로 심신을 보호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장이 넘겨질 때마다 시커먼 안개와 연기 같은 것이 일렁이며 뿜어져나와 그의 양손 결계 속을 채우다 사라져갔고 일부는 살짝 흘러나와 그의 아우라를 핥듯이 어루만졌던 것.
‘앞으로 저주받은 것이나 흑마술서를 얻게 되면 멀리해야겠군.’
그냥 보아도 성가시기 짝이 없는 특징의 기운이다. 저런 것에 오염당한다면 떨쳐내기란 무척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 될 테지.
약 10분 뒤, 얇은 흑마술서는 암흑의 기운을 뿜어내지 않게 되었고 교구장은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살짝 훔친 뒤 약간 성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성제 예하의 짐작이 맞았습니다. 이 흑마술서는 땅신님의 은혜를 고의로 모독하여 변환, 자신의 힘으로 삼는 식이 쓰여있었습니다.=
그의 분노에 안느는 굳은 얼굴로 맹세했다.
=……땅신님의 존귀함에 맹세코 저희 일행은 그 책의 내용을 보지도 않았으며 한 글자도 눈에 담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신실한 자매가 곁에 있었습니다. 자매의 기운은 지금도 땅신님의 가호를 맑게 증명하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맹세하지 않아도 믿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게 좋은 법이니까요.=
그녀의 말대로다. 괜한 의심을 살만한 일은 싹부터 제거해야 하는 법.
작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론하스 대주교의 감정이 분노와 후련함으로 적당히 채워진 것을 파악,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흑마술서의 내용을 알려달라 부탁했다.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지구로 돌아가기 위한 고등급 미궁의 공략에 힌트가 될 요소가 있을지,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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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슬슬 임종을 맞이하려는거 같네용.
작업중에 화면이 갑자기 까매지더니 다시 켜지는 거 보고 식겁함;;
기왕 컴 새로 맞추는거 좀 고사양으로 하고 싶은데 4060은 내년 초에나 출시한다고 하고...
기다렸다가 컴 새로 맞출지 아니면 작업용 노트북을 하나 장만할지 좀 고민해봐야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