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86화 (586/813)

581 하늘 도시 팔라툼

* * * *

환인이 카락스의 암살자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을 무렵, 그의 이야기를 니오네브레스 4대 국가에서도 비슷하게 다루고 있었다.

사비족의 국가 벨티칼에서는 최고 전사이면서 심부름도 제대로 못 한다며 청과 만엽이 대족장에게 얻어터지는 중이었고.

=멍청한 놈들! 가서 이야기 몇 마디 나누는 게 그렇게도 어려웠더냐!!=

=아악! 환장하겠네 증말! 대족장님, 대족장님도 그때 그 인간을 봤어야 한다니까요?! 그럼 그 말 못하히익!=

콰우우욱—!!

집채만 한 그레이터 워 마울의 추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에 청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난다.

=시끄럽다! 친해지라고 보내놨더니 신경을 긁고 온 연놈들이 뭐가 잘났다고 주둥이를 나불거려, 나불거리긴!!=

=으갸갹!=

라드세아의 성궁에서는 대충 그럴 줄 알았다는 중론으로 대청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성제의 성격이 여느 영혼사들처럼 온화하고 부드럽지만은 않다는 것을 호천명 덕분에 성궁의 상층부는 다 알고 있었던 것.

=결국 타국 세 곳 모두 그를 초청하는 것에는 실패하였군요. 네 국가를 전부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행위이거늘 겁이 없는 것인지 담대한 것인지…….=

=아무래도 후자이지 않겠소이까. 아무리 현친왕 전하의 허락이 있다 하였어도 무금부 병조 상서의 따님을 그렇게 다루었을 때부터…….=

=으흠, 어험!=

=……크흠. 아무튼 사절 대표들에게 정중히 돌아가 달란 뜻을 표한 것이 아닌, 잘못을 짚어 그 자리에 있지 못 하게 하였던 술수는 덜떨어진 머리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올시다. 절묘한 거리감을 두고서 관계성을 초기화한 것만 봐도 명확한 사실이지.=

=홍의관의 연구 결과가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겠지요. 계략과 권모 그리고 술수에 능한 간웅 말입니다. 암살 시도를 핑계 삼아 사절을 돌려보낸 그 수는 홍의 참판도 혀를 내둘렀다 하였으니.=

=그렇소?=

=도총관께서는 이해가 안되셨나 보군요. 그러한 수는 자신의 영향력과 지위, 능력을 하나부터 열까지 꿰뚫어 보고 있지 않은 한 낼 수 없는 신묘한 수라고 하였습니다.=

=흐음……. 하지만 의외군. 설마하니 술사의 몸으로 암살까지 막아낼 줄이야. 카락스의 상급 송곳니와 차기 어금니 2인조도 실패했다면, 그를 암살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어.=

=아쉽군요. 니오네브레스의 질서를 흐트러트리는 반동…….=

=규 판서. 입 함부로 놀리다간 크게 다친다는 것도 배우지 못했소이까.=

=낮말은 조인족이 듣고 밤말은 서인족이 듣는다고 하여도 성궁만큼은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요. 또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소?=

=알고 있는 것과 입에 담는 것은 하늘과 땅의 높이만큼이나 차이 나는 법이오.=

=흐음.=

어전회의에 앞서 주제를 토의하던 1~2품 문무관들은 상석에서 부채를 느긋이 흔들고 있는 백여우, 호천명의 헛기침에 입을 다물고 그를 돌아보았다.

=결론은 어찌 내리는 게 좋다고 여기십니까들.=

친왕이자 학사원의 학장인 그의 질문에 무관들은 입을 다물고 문관들은 눈빛으로 의사를 나눈다.

대표로 정1품 문관이 심유한 눈빛으로 미리 문관 회합에서 나눈 결론을 내밀었다.

=가까이해서는 위험한 인물이라 사료됩니다. 허나 멀리 밀어두어서도 안 되는 바, 외직에서 마땅한 이를 차출하여 행적을 조심히 뒤쫓도록 하는 것이 어떠시온지.=

=타국이 그에게 접근할 때를 대비하여서?=

=그러하옵니다.=

=확실히 그편이 위험 부담이 덜하긴 합니다. 자칫 그에게 해를 끼쳤다간 알류겔의 마룡이 뛰쳐나와 수해를 일으킬지도 모르니.=

=……역시, 그런 것이옵니까?=

=십 중 팔, 구할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위험한 매력은 종을 초월하여 여성을 끌어당기는 수준이니까요.=

=확실히. 병조 상서의 여식이 상사병을 앓고 있다 하였지요.=

=끄으응.=

그 딸의 아비가 내는 앓는 소리에 잠깐 웃음이 흐르다 멈춘다.

빙그레 웃던 호천명은 부채를 접고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리하여서는 안 됩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두드릴 새도 없이 뛰어 건너야 할 때도 있는 법. 영도가 그를 품에 받아들인 뒤 얻은 이득을 생각해보십시오.=

=…….=

=…….=

호천명은 문무관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다들 거인병과 니오네브레스 3대 암살 조직 중 하나를 손에 넣게 된 영도를 생각 중인지 표정이 진지하다.

=성제님의 진실한 목적은 현재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라드세아의 옆에 성제님을 두기 위해서는 그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내는 것에서 시작될 겁니다.=

=으음.=

=흐음.=

=비록 1착은 놓쳤으나 2착만큼은 다른 나라에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자리는 그에 관한 주제로 토론을 진행하십시다.=

=예, 전하.=

=예, 전하.=

호천명은 어떻게 해야 성제에게 호감을 살 수 있을지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하는 좌중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친왕으로써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호천명은 솔직히 막막했다.

그 사람, 성제는 말 그대로 돌연변이 같은 인간이다. 평범하게는 기뻐할 만한 선물에도 얼굴을 찌푸리고, 일반적으로는 환영받지 못할 선물에 호감을 드러낸다.

보통은 두려워 까무러칠 일에 오히려 가시를 드러내고 하등 이득도 되지 않을 일에 앞장서서 사태를 이끌어나간다.

그런 인간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나?

‘답이 없군, 답이 없어. 차라리 천문학이 더 쉬울 지경이야.’

환인을 알게 된 뒤로 시름만 늘어가는 호천명이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시름에 잠긴 곳이 따로 있었으니.

메리아놀의 협의회에서는 환인이 하늘에 터트린 문양 강화 영혼 폭발이 계속해서 재생되는 것을 보며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샤나리 공은 어찌하고 있으시오?=

=다가오면 설령 손주라 하여도 베어버리겠다고 선언한 뒤 칩거에 들어가셨습니다…….=

=화가, 많이 나셨나 보군.=

=…1달 이내에 엘위드리스가 직접 이 사태를 해결보지 않는다면 자신께서 엘위드리스 가문의 정문을 봉해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거기에 다루그 오얀 드로거스 왕자께서도 손을 거드시겠다고…….=

협의회 참석자들의 입에서 신음과 탄식이 흘러나온다.

메리아놀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가 크샤나리=루올=알세이시스, 알세이시스 왕실의 왕자다.

그보다 못하다지만 다루그 또한 흑철의 전투사로 메리아놀의 100인을 선정한다면 30위 내에 꼭 들어가는 인재.

그런 그들이 협의회의 간곡한 부탁에 사절 대표로서 파견되었는데 졸지에 암살자로 싸잡아 취급당해 치욕이란 치욕을 다 겪었으니.

=이 사달을 낸 엘위드리스 가문은 어찌 되고 있소?=

=가주인 신비궁사와 공녀파가 손을 잡고 원로파를 압박 중이지만, 자칫 가문이 찢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유출될 예언의 핏줄을 탐내는 타 가문의 개입도 이루어질 가능성이…….=

=……그에 대한 대응은?=

=붉은 나뭇잎, 푸른 나뭇잎, 노란 나뭇잎들과 제2 해군단이 수목 도시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하아……. 이거참….=

의회 주재자는 상석에 앉아 손가락으로 파랑새와 놀아주고 있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이 사단이 나자 =그것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군.=, =내 도움은 크샤나리를 움직인 걸로 끝이라고 여겨주게.=라며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아니, 관심을 거둔 모습이다.

=…….=

주재자는 각자 복잡한 얼굴의 협의회 위원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확실히 말 할 수 있는 것은, 엘위드리스가 보았다는 예언은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이유는 다들 아실 거요. 엘위드리스가 사라져야 한다면 그건 우리 자신들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지.=

=그렇습니다. 타국 타인의 손에 대지가 유린당하면 그 망신은 이루 형용할 수 없겠지요…….=

동의를 표하는 위원들에게 주재자는 한숨을 다시 작게 내쉬며 말했다.

=성제는 본신으로 엘위드리스를 지울만한 힘을 입증해 보였지. 이제부터 의견을 받겠소. 주제는…… 성제를 자극하지 않고 엘위드리스 가문을 해체하는 것과 성제에게 보낼 보상안의 규모요. 다들 기탄없이 발언해주시길 바라오.=

신목 아룬드랑 내에 마련된 협의회 중앙회의실, 밤에도 따사로운 빛이 내리쬐는 아름다운 장소에 무거운 한숨이 채워져 나간다.

* * * *

=응앗!?=

일순간 밑으로 쑥 꺼지는 감각에 화들짝하고 깨어난 아영은 멍한 표정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른 새벽이라 어두컴컴하지만 고급스러운 가구로 채워진 2인실.

=여긴……?=

아, 여기 팔라툼이지 참.

흐아암, 짧게 하품한 아영은 살짝 식스팩이 드러나는 매끈한 배를 쓱쓱 쓸어내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옆 침대를 봤지만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을 뿐, 있어야 할 사람은 없다.

‘오늘 오빠랑 자는 사람은 려강인가……?’

원래는 아영의 곁에 이실리테나 안느 중 한 명이 꼭 붙어 감시했었는데, 어제부로 감시가 전부 해제되었다.

자신이 동료로 받아들여진 거 같아 아영은 조금 기뻤다.

=후우~.=

촤악— 커튼을 젖히자 아직 동도 터오지 않은 어둠 속의 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곧 아침이 시작되겠지.

아영은 20년째 함께 해온 하급 물 정령에게 부탁해 물을 받은 뒤 그걸로 몸을 깨끗하게 닦았다.

차가운 물수건이 몸을 훑으며 지나가자 그 자극에 감각이 톡톡 튀며 정신이 점점 잠에서 깨어난다.

알몸으로 깨끗이 몸을 닦은 아영은 잠깐 고민하다가 전신 거울(유르파가 필요할 거라며 꺼내놓고 갔다) 앞에 섰다.

몸 군데군데 근육이 살짝 잡힌 플뢰족의 가녀린 나신이 그녀의 눈에 담긴다.

한 손으로 적당히 잡히는 가슴, 잘록하지만 근육이 들어차 탄탄해 보이는 허리, 나름 살짝 자랑인 골반과 토실토실한 엉덩이.

=내 몸은 오빠 취향에 어떠려나…….=

나름 몸에 자신이 있지만, 언니들이나 려강과 비교하면 슬프게도 자신이 가장 빈약하다.

이실리테 언니나 유르파 언니와 비교하는 건 그녀들에게 실례일 정도. 자신과 키가 비슷한 려강도 가슴이랑 엉덩이가 빵빵한데다 같은 종족인 안느 언니도 가슴이 크다.

물론 안느 언니는 키가 190이 넘어서 그렇겠지. 비율로 보면 그냥 플뢰족 평균이다.

‘하지만 나랑 비교하면 커.’

아쉬워하며 자기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아영의 시선이 자신의 털 한 올 없이 매끈한 사타구니로 향했다.

‘여기에 털이라도 좀 나면 좋을 텐데.’

수십 년째 코 아래로 체모가 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민둥민둥한 골짜기를 볼 때마다 꼭 아이 같아서 마음에 안 든다.

엘미느 언니처럼 예쁜 삼각형은 아니더라도 좀 북슬북슬했으면 좋을 텐데.

아쉬운 듯 손바닥으로 반들반들한 골짜기 틈을 만지던 아영은 어휴, 한숨을 쉬면서 옷을 챙겨입고 방을 나섰다.

얼른 애들 밥이랑 물 챙겨주고 아침 훈련해야지.

꾸으?

=나야~. 잘 잤어?=

마방의 문을 열고 들어간 아영은 비상이 가장 먼저 눈을 뜨고 바라보는 모습에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쿠흥.

새침하게 콧바람을 내며 고개를 돌리는 비상의 행동에 아영은 마냥 좋아서 히히 웃었다.

며칠 봐서 얼굴이 익었다고 처음처럼 공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쿠에~

쿠엣.

아영은 문을 열어 달라는 것처럼 일어나 서성거리는 쿠에들의 모습에 얼른 마방의 문을 열어주었고, 비상을 따라 나가는 쿠에들을 잠시 구경한 뒤 아직 깔끔한 마방을 정리했다.

정원으로 나간 아영은 날개를 쭉 펴고 홰를 치거나 넓은 정원을 타박거리며 돌아다니는 쿠에들 사이에서 짝짝 손뼉을 치며 녀석들을 불렀다.

=다들 물 마셔~.=

삐이~

=그래그래. 우리 실루가 첫 번째네.=

삐.

자신의 다리에 몸을 비벼오는 실루에게 물 정령으로 깨끗한 물을 받아 마시게 해주며 슬쩍 조그마한 머리며 등을 쓰다듬어 사심을 채우는 아영.

그 후 모여드는 쿠에들에게도 물을 먹여주곤 정원 가장자리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운동이 되도록 성술의 신체 강화는 최저까지 내린 상태.

어제 그런 일이 있어 간밤에 성술의 자연 치유력 향상을 유지해놨지만, 아무래도 타격이 아직 남은 탓에 조금 뻣뻣하다.

이런 뻣뻣함마저 사라지면 자신의 몸은 좀 더 튼튼해지겠지.

잡생각 없이 환인과 대련했던 어제 기억을 떠올리며 아영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까지 죽어라 달렸다.

‘오빤 분명 내 약점이라고 했었어. 오빠처럼 기감을 조절해서 숨길 수 있는 사람한테는 내 초지각이 안 통한다는 이야긴가?’

……그거 사람 맞아?

근처 마을에서 어린 여자애들만 납치해 유흥을 위해 잔인하게 살해하고 잡아먹던 7급 엽사를 암살할 때도 초지각은 시선이며 기척을 모두 포착했었다.

그런데 초지각을 피하는 사람이 나타나다니.

초지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하지? 자신과 비슷한 실력이라거나 언니들 정도만 되면 초지각 없이도 싸울 수 있는데 상대가 환인 오빠 같은 사람이면 어쩌나.

=으~으음~! 푸하아아!!=

대충 한 바퀴 50m인 정원을 20바퀴 돌았더니 심장이 기분 좋게 뛰기 시작한다. 몸에도 적당히 열이 올라서 치료가 덜 되어 뻣뻣하던 근육도 딱 좋은 수준으로 이완된 느낌.

모르겠다. 일단 몸부터 풀자.

=흣! 흡! 후웁!=

허공에 대고 권각 초식을 처음부터 펼쳐가며 관절을 마저 풀고 있던 아영은 비상이 아름답고 멋진 녹색 꽁지깃을 살랑살랑 흔들며 다가오는 모습에 눈을 깜빡였다.

=아하. 나랑 체술 대련 해주게?=

큐읏.

=좋아!=

이제 슬슬 동쪽에서 노을이 번지기 시작한다. 잠시 후면 오빠랑 언니들이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 비상이하고 어울려야지.

쉬익—

=으힛.=

언제 들어도 살벌한 부리 쪼기와 발차기의 파공성에 아영은 대련의 긴장감이 단숨에 차오르는 걸 느끼면서 매섭게 발차기를 날렸다.

와중에 발차기 몇 번을 비상에게 맞췄지만, 위상력을 다루는 마수나 성수들 특유의 위상 장벽 탓에 다리에 찌르르한 감각이 밀려온다.

뀨앗!

파팡!

=꺅!=

그 찌르르함에 0.5초 정도 회수가 늦었을 뿐인데 비상의 무릎찍기가 정확하게 아영의 복부를 찍어버렸다.

그 충격에 뒤로 날아가 뒹군 아영은 발딱 일어나 맞은 배를 어루만지며 투덜거렸다.

언니들도 그렇고 비상이도 진짜 강하네. 초지각을 안 쓰면 상대하기가 어려울 정도라니…….

음. 비상이면 이빨하고도 1:1로 싸워 이기지 않을까?

=강한 사람 주변에는 강한 사람만 모인다는 게 맞는 말인 거 같아. 그게 아니고서야 환인 오빠 주변에 이렇게 강자가 많을 리 없잖아.=

뀨우~

=…….=

아영은 비상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특유의 눈치 덕분에 비상이 말하려는 뜻은 대강 알아듣게 되었다.

전부 비상의 지능이 높은 덕분이다.

그런데 그게 좋은 일이냐고 하면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지금같이 머릴 잔뜩 치켜들고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신을 ‘하수’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니까.

아영은 발끈해서 주먹을 쥐고 손바닥을 팡팡 치면서 아르릉거렸다.

=비상이 네가 먼저 나 도발한 거다?=

뀨후훗.

=간다!=

아직 몸 상태가 완벽은 아니지만, 초지각을 펼치고 성술 신체 강화도 5단계까지 올려 비상에게 쇄도해 들어간다.

그 속도에 깜짝 놀라면서도 자연스럽게 반격 태세에 들어가는 비상. 동시에 자신의 어깨 양쪽과 옆구리, 무릎 쪽으로 기감의 습격이 이루어진다.

아영은 그 즉각적인 태세 변환에 감탄하면서 온몸을 비틀어 날갯죽지, 무릎, 부리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 비상의 방어력이 높은 부분에 펀치 세 발과 킥 여섯 발을 퍼버버버버벅— 연달아 먹였다.

다칠 걱정은 없다. 2급 미만의 직업자 정도로는 비상의 깃털조차 다치게 못할 만큼 강인한 방어력을 지녔고 자신도 주먹과 다리를 보호할 정도로만 성술을 일으켰으니까.

뀻!? 쿠흥!

마음 놓고 먹인 타격에 놀라 물러나면서 반격 태세를 잡아 다시 달려드는, 아니 날아드는 비상.

이 공격이다. 초지각을 쓰지 않고 어떻게 몰아붙여도 녹색 쿠에 특유의 긴 날개로 체공하며 위에서 아래로 1초에 두세 번씩 공격을 퍼붓는 기교.

조인족과도 싸워본 적이 있기에 공중에 뜬 적과 싸우는 것은 익숙하다.

하지만 그런 공중전도 비상이 쓰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보통 조인족은 낙하 강습형 공격인데 비상은 말 그대로 3차원으로 움직이며 온갖 공격을 쏟아붓는 거다.

거기다 눈썰미와 반응 속도, 반사 신경, 공격의 다변화까지 섞이니 회피 난이도는 그야말로 극악.

오늘까지는 늘 얻어터지면서 나뒹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초감각으로 맨살을 드러낸 어깨와 배, 허벅지 아래로 기감을 느끼며 비상의 공격을 모조리 회피, 빈틈을 포착한 아영은 충각을…….

뀻! 퍼더덕—

……찔러넣으려다 허공만 질러버렸다.

=아잇, 야! 치사하게 날아서 도망가는 게 어디 있어!=

꾸우~

꼬우면 너도 날던가~

하늘을 날며 뀨뀨거리는 비상을 쌍심지 켜고 째려보던 아영은 금방 피식 웃어버렸다.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것은 자신의 공격이 그만큼 위협적이었다는 뜻 아닌가.

큐핏.

다시 땅으로 내려온 비상이 살랑살랑 다가와 날갯죽지로 제 등을 툭 치는 행동에 아영은 자신이 그녀에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영도 조금 헝클어진 비상의 깃털을 다듬어주며 말했다.

=너도 진짜 대단하다~. 어디서 이렇게 싸우는 걸 배운 거야?=

큐으.

=……응? 오빠?=

뀻.

아영은 집 쪽을 가리키는 대답에 얼이 빠진 얼굴로 불이 아직 꺼져있는 2층 쪽을 쳐다봤다.

=세상에.=

쿠에한테 전투술을 가르치는 기사단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도 승조술乘鳥術을 위해서지, 이렇게 직업자와 싸우는 걸 상정해 가르치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환인과 그의 여자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영은 잡생각을 버리고 재빨리 그들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오빠,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언니들도 좋은 아침이에요!=

“그래.”

=응. 좋은 아침.=

=아영이 일찍 일어났네. 몸은 괜찮아?=

=네! 비상이랑 잠깐 대련한 덕분에 몸도 다 풀렸어요! 그런데 환인 오빠, 오빠가 정말 비상이한테 체술을 가르쳤어요?=

언니들과 아침 인사를 나눈 아영은 천칭을 꺼내 들고 하얀 소매를 걷는 환인에게 진심으로 궁금함을 담아 물었다.

“제 몸을 지키라는 뜻에서 가르쳤다.”

아니, 진짜였어? 아영의 당황을 읽은 안느가 훈련용 워 해머와 카이트 실드를 꺼내 상태를 점검하며 웃는다.

=비상이 어때? 강하지?=

=네… 자기 단련을 게을리한 5급 직업자 정도는 밟아버릴 정도예요. 저도 확실하게 이기려면 초지각을 써야 할 정도인데…….=

후후후.

아영은 킥킥 웃으며 백려강과 함께 정원을 달리기 시작하는 유르파, 그리고 환인과 대련을 시작하는 안느를 바라보다가 당황스러움에 제 귀를 매만졌다.

그럼 언니들하고 대련하려면 비상이부터 꺾어야 하는 건가?

=아영. 나하고 대련하자.=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아영은 이실리테가 기사검을 가져오는 모습에 빠릿하게 대답했다.

=넵!=

=그 초지각이란 거, 얼마나 쓸 수 있어?=

=급격한 신체 운동을 하는 걸 기준으로 최대 1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어요. 그 이상 하면 감각이 혼란을 일으켜서 병이 재발하거든요.=

=그럼 초지각을 바로 쓰도록 해. 몸에 무리가 가면 꼭 말하고.=

=넷.=

에이, 모르겠다. 비상이하고는 나중에 틈틈이 붙어봐야지. 일단 지금은 이실리테 언니가 얼마나 강한지부터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만만하게 이실리테에게 달려들었던 아영은…….

=하, 항복! 졌어요!=

10분도 지나지 않아 검면에 늘씬하게 쥐어터지고 항복을 외쳤다.

환인이 예술적이고 세련된 공격으로 알아도 못 막는 공격을 해왔다면, 이실리테는 말 그대로 알아도 다 못 막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횟수의 공격을 가해왔던 것.

특히 마지막 1분에는 세 자루의 다중 검기, 알고는 있었지만 보기는 처음인 검희의 기술에 더해 정말 악 소리도 못 낼 정도로 얻어터졌다.

=아야야…….=

=확실히 초지각이란 거 대단하네.=

=헤헤. 그쵸? 초지각이 없었으면 언니 공격을 3분부터는 전혀 막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초지각을 받쳐줄 기술이 형편없어. 자기 몸을 부수면서 펼치는 체술이라니, 삼류도 아니고 뒷골목 폭력배들이나 쓸법한 기술이야.=

=…….=

이실리테는 기술을 향한 비판에 삐죽 입술을 내밀고 토라진 것처럼 고갤 돌린 아영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이런 비판에도 속 좋게 헤헤 웃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앞으로는 죽도록 얻어터지며 기술을 배워야 할 텐데 이런 비판에 실없이 웃을 정도로 투지나 투쟁심이 없다면 버티기 어려울 테니까.

이실리테는 성술로 멍 자리를 치유하는 아영을 보며 말했다.

=주인님의 기술은 전부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최고급 방어술, 상냥하게 말로 가르쳐주는 기술이 아니야.=

=……네?=

=앞으로는 주인님과 대련하기 전에 나와 안느하고 먼저 대련해. 그 과정은 무척이나 아프고 괴로울 테니까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지, 지금 기술을 가르쳐 주신다는 건가?

긴가민가하던 아영은 이어진 이실리테의 이야기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발딱 일어났다.

=충분히 회복했으면 일어나. 다시 시작하자.=

=넷!!=

하지만 5분 뒤, 아영은 족히 100대는 얻어맞고 다시 뻗어버렸다.

초감각을 켜도 공격에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횟수의 공격을 가해오는데 아영은 그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대大 자로 드러누워 끙끙 앓는 아영을 향해 작게 웃은 이실리테는 기사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럼 난 들어가서 아침 준비할 테니까, 나중에 뒷정리하고 들어와.=

=네, 네헹.=

일어서지도 못하고 이실리테를 보낸 아영은 풀밭에 드러누운 채로 온몸이 욱신거리는 걸 느끼며 중얼거렸다.

=이게 내 약점…….=

“그것 외에 다른 약점도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먼저 이실리테가 발견한 약점을 다듬어야겠군.”

=그러게. 영이 저거 생각보다 재능을 막 쓰고 있었어.=

완연한 아침 하늘을 머리 위에 진 환인과 안느의 이야기에 아영은 끙끙 앓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초지각에 약점이 이렇게 많았나?

“그런데 아영의 성투술은 안느 너의 성체술보다 좀 떨어지는 듯하군.”

=당연하지. 내 성술은 수천 년 땅신 교단의 비결이 모이고 모인 결정 중의 결정이야. 그런 땅신 교단 본단의 위상력 회로를 바탕으로 연공한 섬세한 성술이니까 아영이의 마구잡이로 쓰면서 체득한 거친 성술하고 다를 수밖에.=

=……어? 안느 언니도 성투술 쓰실 수 있으세요? 제 성투술은 라드세아의 신성구를 보고 흉내 내서 만든건데.=

시퍼렇게 멍이 든 옆구리를 치유하며 묻는 아영에게 안느는 씩— 웃으면서 워 해머와 방패를 내려놓고 주먹을 쥐며 말했다.

=일어나. 마지막으로 나랑 대련하고 끝내자.=

=네? 넵!=

그리고 3분 뒤, 성체술에 루모까지 빙의한 안느의 주먹질에 나가떨어지며 아영은 괜히 물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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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일러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님들이 좀 계셔서 근황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를 조금해볼까 합니당

우선 비상이 일러가 나왔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물이 진심 개판으로 나와서 차마 못올리겠어요.

포켓몬 디지몬 빵에 들어가는 씰보다 퀄이 구려욧 ㅋㅋㅋ

실력있는 퍼리 일러레가 얼마나 적은지 실감했어요; 나중에 ai로 넣어서 리터칭이나 해볼까 싶네요

그외 이실리테, 백려강, 그리고 아영이 있는데 이 아가씨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많습니당...

씹아싸 글쟁이는 다른 일러레분들하고 사이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해줄 플랫폼이 있으면 좋겠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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