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0 하늘 도시 팔라툼
비명도 그냥 비명이 아니었다. 폐가 찢어지고 귀신의 귀곡성에 버금가는 절규.
생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절규에 안느는 깜짝 놀라 아영의 어깨를 놓고 주춤 물러났다.
=왜, 왜 이러지? 내가 치료에 실수라도 했나?=
몸을 웅크린 채 눈물과 콧물과 침을 줄줄 흘리는 아영. 실금까지 했는지 투명한 액체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며 물웅덩이를 만들어나간다.
환인은 유르파에게 위상력 보조제를 하나 더 받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영의 머리를 잡고 억지로 위상력 보조제를 먹이려 했다.
=끄으으읍-! 아아악!! 끄아아아악!!!=
하지만 눈이 뒤집히고 눈동자의 실핏줄이 투둑 터질 정도로 몸부림을 치고 있어 제대로 먹일 수가 없다.
환인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위상력 보조제를 입에 머금고 그녀의 정수리와 턱을 콱, 잡고 직접 그녀와 입을 맞춰 흘려 넣어 주었다.
=끅……! 끕……!=
입으로 흘려넣은 액체가 역류하려하지만, 환인은 아영과 입술을 딱 맞춘 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억지로 불어넣었다.
그렇게 위상력 보조제를 먹이고 나자 그녀의 발작이 잠잠해져 간다.
완전히 발작을 멈추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는 아영을 꼼짝않고 지켜보던 안느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도령, 뭐가 일어났던 거야……?=
“이게 아영이 민감한 감각을 가진 대가인 거겠지.”
=민감한 감각의 대가?=
여자들은 서로를 보면서 눈을 끔뻑였다. 대가라니, 카락스에서 인체 실험이라도 당했다는 이야기야?
그때 작게 헐떡이던 아영이 눈을 힘겹게 뜨고는 기운을 짜낸 미소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죄에…송해혀. 마니 노라셔쬬?=
언제 비명을 질렀냐는 듯이 간신히 웃는 아영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가 묻어나고 있었다.
안느는 놀람은 일단 접어두고 그녀에게 다가가 몸 상태를 살피며 물었다.
=야, 입 벌려봐. 으~ 입 안 다 헐었네. 이제 몸에 손대도 돼?=
=아헤에…….=
회복력 강화고 뭐고 가장 강한 성술을 펼쳐 아영의 신체 파손 대부분을 치유한 안느는 그녀의 입안 상처까지 모두 치료하곤 이마를 훔쳤다.
미처 몰랐는데 식은땀이 살짝 묻어난다.
안느의 성술 치료를 받은 아영은 자신이 싼 오줌 웅덩이에 앉아있음을 눈치채곤 얼굴을 붉혔다.
언니들, 특히 환인을 살핀 아영은 잘 안 움직이는 손을 들어 하급 물의 정령을 불러서 지려버린 흔적과 몸에 묻은 땀까지 싹 치워버리고 부들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자신의 과거, 몸의 체질, 어째서 카락스의 차기 어금니가 될 수 있었는지를 요약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해서 평소에는 위상력으로 감각을 억누르고 차단해서 생활하고 있어요. 하지만 위상력이 바닥까지 내려가 버리면 증상이 다시 발현해요. 방금처럼요.=
=세상에. 바람만 스쳐도 칼로 저미는 고통이라니…….=
=상상도 못할 병이예요…….=
이야기를 전부 들은 유르파와 백려강이 딱하고 애처롭다는 얼굴로 헤헤 웃는 그녀를 바라본다.
안느는 조금 핼쑥해진 표정으로 아까 자신이 짚었던 그녀의 어깨를 보며 물었다.
=그, 그럼 내가 치료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렸고, 어깨에 손을 대서 그랬다는 거야?=
=아뇨? 환인 오빠랑 대련하면서 위상력을 몽땅 끌어다 써버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지옥행 고통 마차를 예약한 상태였어요. 안느 언니가 손대기 전부터 고통은 느끼고 있었죠. 그나마 언니랑 환인 오빠가 치료해주시고 위상력 보조제를 먹여주셔서…… 으그극.=
아영은 말하다 말고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옆으로 철퍼덕 넘어졌다.
=다, 다리, 다리가아……!=
두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리면서 발작이 난 것처럼 바르르 떨린다.
그녀의 상태를 눈치챈 안느는 한숨을 쉬면서 성술을 펼쳐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져주었다.
=바보야. 몸도 안 성한데 무릎 꿇고 앉으니 그렇지. 그나저나 네 인생도 참 기구하네.=
=그, 그래도 괴롭지는 않아요. 아빠 엄마가 죽었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오빠랑 언니들을 얻었으니까요. 제 몸을 다스릴 능력도 얻었고요. 헤헤.=
=……됐어. 이 정도면 이제 움직일 수 있지? 지하에 욕실 있으니까 너도 내려가서 씻고 와.=
=넵! 다녀오겠습니다!=
아직 다리가 저릿저릿하지만, 이 정도는 위상력이 회복되기 시작하면 금방 치유될 상처다.
환인의 앞에서 오줌까지 지렸던 아영은 속옷 바람으로 재빨리 달려 내려갔다.
=참. 이슬이도, 율이 언니도, 강이도, 여기에 아영이까지…… 도령 주위에 모이는 아가씨들은 왜 이렇게 다들 인생이 기구해?=
=안느 너도 만만치 않아. 플뢰면서 근육 도깨비가 되는 바람에 종족 내에서 쫓겨났잖아.=
=너랑 비교하면 난 술도 쓰다고 못 마실 정도거든?=
이실리테와 잠깐 티격태격한 안느는 이윽고 조금 삐진 표정으로 무뚝뚝하게 서 있는 환인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도령도 나빠. 쟤 상태 짐작하고 있었지? 왜 말 안 해줬어.=
“아까도 말했다시피 방법이 없었다. 내버려 두었다면 심인성 쇼크가 일어나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치료를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그건 그래. 그치만 마음의 준비라는 게 있잖아. 진짜 애 떨어질뻔 했어.=
=열심히 피임한다고 애도 없으면서.=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계속 딴죽을 거는 이실리테의 옆구리를 쿡 찔렀던 안느는 힐끔, 자신이 찰싹 때린 환인의 팔뚝을 곁눈질하다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그 손짓에 피식 웃은 환인은 안느의 엉덩이를 다독여주며 사과했다.
“내 생각이 짧았다. 다음에 이런 비슷한 일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지.”
그렇게 이야기를 끝맺자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가 주변을 맴돈다.
환인은 그런 어색함을 치우기 위해 여자친구들에게 하나씩 지시를 내렸다.
=이실리테는 차를 준비해다오. 이빨들이 마실 것까지. 안느와 백려강은 의자나 소파를 다른 방에서 가져와라.=
=네, 주인님.=
=응. 그 인간들 숫자만큼이지?=
“그래. 유르파는 영도와 통신 수정구를 연결해주십시오. 대성녀도 이야기를 같이 들어야 할 테니까요.”
혹시라도 닌실이 카락스를 거두는 것에 부정적이라면 환인은 자신이 그들을 전부 챙길 생각이었다.
정보는 많을수록 좋다.
암살 같은 일은 그만두게 하고 영도의 아랫도시, 순례자의 쉼터에 정보 길드를 설립시켜 운용해도 된다.
운용비는 유르파가 만드는 마도구와 마도기를 넘겨 팔게 해서 충당하면 되고, 그들이 지금껏 모았던 정보가 있을테니 그걸 파는 걸로 수익을 내도 되는 일.
잠시 후 몸을 씻은 원탁의 이빨 소속 여자들이 촉촉이 젖은 모습으로 먼저 올라왔고, 그녀들이 이실리테에게 받은 차를 홀짝이고 있을 무렵 남자들도 올라왔기에 환인은 그들을 앞에 앉혀놓고 영도와 통신을 개시했다.
자초지종을 전부 들은 대성녀는 카락스의 이빨 11인의 면면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흐음. 카락스의 암살자라니…….]
“전직 암살자 출신인 그들을 거두는 것이 꺼려지십니까.”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소. 회개하여 잘못을 뉘우친다면 자애신께서는 누구에게나 자비를 베푸시니까.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지이지. 거기 자네, 임시 큰 이빨이라 하였나?]
=엘미느입니다, 대성녀님.=
[음. 자네들의 마음은 어떠한가.]
=…….=
=…….=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환인의 눈빛이 가늘어진다.
아영은 안느의 탱크탑에 돌핀팬츠를 입고 있다가 그러한 변화를 피부로 감지하곤 얼른 입을 열었다.
=엘미느! 우리…….=
“조용히.”
=…….=
아영의 입을 단숨에 다물게 한 환인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다는 티를 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방금 이야기 했을 터다. 너희들과 싸워 내가 이긴다면 카락스의 암살자라는 이름을 가져가겠다고. 그리고 너희들은 부정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렇습니다…….=
“너희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다.”
=화, 환인 오빠! 10분! 10분만 시간을 주세요, 10분만 주시면 아저씨랑 아줌마들을 제가 설득할 테니까아아앙?!=
다시 끼어드는 아영의 뒷목을 잡아 안느에게 밀어버린 환인은 하던 말을 이었다.
“싫다는 사람을 붙잡을 생각은 없다. 정보 길드의 설립도 경험자가 있으면 좋은 일이고, 없다면 대도시와 몇 가지 거래를 통해 첩보의 인프라를 만들어도 되니까.”
=우응~ 읍읍.=
자기보다 머리가 1.5개는 더 큰 안느의 품에 잡혀 입까지 막힌 아영은 읍읍거리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리를 바동거렸다.
이 멍청한 인간들아! 오빠가 이런 제안을 해주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데 그걸 걷어차려고 해~!
위상력이 다 회복되지 않아 힘이 안 나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힘만 있었으면 저 아저씨랑 아줌마들을 내가 두드려 패서 정신차리게 했을 텐데!
엘미느는 무릎에 다소곳이 손을 올린 채로 상체를 깊이 숙였다.
=성제님께서 해주신 제안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자비인지 저희 이빨 일동은 뼈저리게 알고 있습니다. 어찌 모르겠습니까. 성제님께 ‘네’ 한마디만 한다면 어려움 없이 양지로 나갈 기회인데요.=
[하면 어찌하여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지은 거요?]
=저희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습니다. 그 죗값은, 업은 후회하고 반성한다 해서 간단히 떨쳐낼 수 없는 것. 이런 저희가 영도에 몸을 의탁하면 필시 카락스의 이름에 얽매인 피의 원한이 영도의 영혼사님들에게 향할 것이 자명하온데 어찌…….=
[호오.]
꽤나 기특한 생각이지 않나.
자고로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자들은 저런 생각 방식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범죄자에게 범죄는 일상생활인 것처럼 말이다.
=패배한 개인 저희가 제안을 할 처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허락을 간청합니다. 카락스의 이름에 얽매인 피의 값은 저희 이빨 일동이 짊어지고 갈 터이니 남은 이들을 거두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
11명의 복창에 환인과 대성녀의 시선이 교차했다.
[성제, 그대는 어찌 생각하시오?]
“아무래도 머리가 좀 모자란듯한데 이들을 거두어도 괜찮을지 조금 걱정이 드는군요.”
=……?=
=……??=
모두가 잘 이해하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환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이빨들에게 말했다.
“분명 내가 이긴다면 카락스의 암살자라는 이름을 가져가겠다고, 조금 전에도 말했을 텐데 벌써 잊은 건가.”
=기, 기억하고 있습니다.=
살짝 젖은 분홍색 머리카락의 엘미느가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환인을 올려다본다.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가 있기에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환인은 엘미느의 머리카락 색에서 한 여자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것까지 설명해야 한다니. 앞으로 공부를 좀 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며 오연한 시선으로 이빨들의 어리둥절해 하는 얼굴을 둘러본 환인은 그들이 알아들을 수준으로 설명해주었다.
“카락스의 암살자라는 이름은 앞으로 오직 한 명만 쓰게 될 것이다. 집단이 아닌, 시조처럼 말이다.”
[호오. 그런 방법이…….]
“그 한 명은 아영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거라 생각한다.”
=……!=
“아영의 얼굴은 나의 암살 건으로 니오네브레스 4대 국가 전체에 알려졌다. 마침 좋은 기회지.”
[성제의 곁을 제외한다면 저 처녀는 두 번 다시 햇빛을 밟지 못할 테니까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 될 테지. 오직 성제만이 가능한 일이겠소.]
환인의 이야기와 부연 설명하듯 덧붙이는 대성녀의 이야기에 엘미느를 비롯한 11명의 이빨들의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빛이 일렁였다.
감동, 감격, 환희, 기쁨.
=서, 성제님. 정말…… 정말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너희들의 의견은 받지 않는다. 그러니 너희들의 목숨도 필요 없다. 너희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뿐. 결정해라. 대성녀님과 날 따를지, 아니면 이대로 어둠 속으로 돌아가 그대로 스러질지.”
또르르—
엘미느의 고운 뺨을 눈물 한 방울이 소리 없이 가로질러 턱에 맺힌다.
기쁨과 슬픔과 후회와 회한으로 마음이 가득 차버린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환인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마찬가지로 똑같은 마음인 다른 이빨들도 무릎을 꿇는다.
쿵.
그리고 11명의 이빨들은 동시에 이마를 바닥에 찍으며 맹세했다.
=저희…… 일동, 성제님과 영도에…… 남은 인생을 바쳐 충성을 다 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하겠습니다……!=
=오빠……!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오빠를 따를게요!!=
아영도 환희가 드러나는 얼굴로 환인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납작 엎드렸다.
이로써 전前 카락스의 암살자였던 그들의 몸과 마음은 물론 자존심과 명예, 그리고 아영의 충성과 감정까지 모두 앗아가 버리는 끔찍하고 잔혹한 형벌이 완성되었다.
압도적인 심리적 우위, 그리고 지위와 무력과 권력의 우위에서 짠 환인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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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수능일이었네요 ㅎㄷㄷ
시험 보신 수...능생 분들은 19금 소설 못 보는 나이일테니 여기 없으시겠죠? 그냥 넘어가겠읍니당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