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 하늘 도시 팔라툼
11인의 카락스가 전개한 진형은 흡사 전갈을 연상케 했다.
좌측과 우측 집게발에 해당하는 2명. 머리로 해당되는 곳에 3명, 몸통과 다리 역할의 2명, 마지막으로 전갈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꼬리에 2명.
여기에 아영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녀는 카락스 역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질의 차기 어금니.
이 제2 진형은 협동 공격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데, 아영은 단독 행동 시에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있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으으~.’
아영은 이빨들이 전갈 진형으로 환인에게 달려드는 것을 최대한 기척을 감추고 자세를 낮춘 채 지켜보며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녀의 눈에는 이빨들이 두꺼운 철문에 돌진하는 멧돼지처럼 보였다.
태어날 적부터 그녀가 가진 가장 큰 축복이자 저주가 그들의 패색을 읽는다.
양 집게발이 부서지고 머리가 박살 나고 꼬리 독침이 끊어지고 몸통이 으깨지는 광경.
그녀에게는 여러 가지 자질이 있었다. 성술의 자질, 체술의 자질, 뛰어난 직감과 그런 직감을 다룰 줄 아는 지혜, 지능.
하지만 그것들도 그녀가 타고난 선천적인 축복이자 저주에 비하면 한 수 떨어지는 것이었으니.
그녀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일반인들의 수십에서 수백 배에 달하는 초지각超知覺, 그중에서도 촉각이었다.
단순히 뛰어난 수준의 감각이 아니다. 바람만 불어도 살갗이 베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옷이 피부에 닿으면 바늘로 푹푹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그 수준은 사람이 쇼크사를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 바로 지구에서 CRPS라고 복합부위통증 증후군으로 불리는 병이다.
이 통증의 범주와 강약은 사람마다 다르고 발병시기도 제각각이다.
증세가 약하면 각종 치료와 진통제를 통해 어느 정도 통증을 다스릴 수 있지만, 그녀의 경우는 그중에서도 최악이라 할 정도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을 쇼크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강도의 고통으로 인지하는 수준.
정령술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아영의 부모가 괴물에게 살해당한 것도 그녀의 통증을 줄여주기 위해 정령으로 상시 지켜주느라 정령력을 과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지구였다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겠지만 자연 친화적인 플뢰로 태어나 정령술의 도움을 받은 그녀는 어찌어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불행이라 할지 행운이라 할지, 우연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마침 카락스는 통각 조절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실험 대상으로 자원한 그녀는 감각 수치를 대폭 낮추는 법을 터득한 것.
그 결과 감각 과민증을 천형天刑이 아닌 천혜天惠로 개화시켜 일반인의 수백 배에 달하는 정보를 피부로 받아들이는 법까지 익히는 데 성공했다.
글로 쓰면 두어 줄로 끝날 설명이지만, 그녀가 거기에 쏟아부은 노력은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수준.
그런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는 어마어마했다.
누구보다 빠른 나이에 카락스의 차기 어금니로 선정되었으며 카락스 내부에서 1:1로 그녀를 이길 이가 없을 정도로 성장한 거다.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그녀는 부모를 잃었고 평범하게 살 수 있던 삶도 잃었으며 담백한 것이 특징인 플뢰족의 성정과 전혀 딴판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고통은 그녀의 삶을 관통하고 있었다.
고통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지만 완벽한 것이 아니어서 그녀는 상시 전신 근육통을 달고 사는 것.
하여튼, 초지각超知覺은 마주하면 상대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어떻게 공격해올지 피부가 알려준다.
그녀가 브래지어와 팬티의 속옷 차림으로 잔디밭에 납작 엎드린 이유도 그에 따른다.
맨살이 드러나야 기감이 더 예민하게 느껴지기 때문.
감각 한도를 더 올리면 옷을 입은 채로도 가능하지만 그랬다간 통각 영역에 들어서기에 오히려 방해된다.
쉬쉬쉬쉭—
이빨들이 암살자의 특징으로 소리 없이 환인에게 쇄도해간다.
그리고 이어진 격돌. 예상과 짐작대로 아영의 눈에 이빨들이 처참히 깨어져 나가는 게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콰쾅!
=끄헉-= =꺽…!=
집채만 한 바위도 번쩍 들어 집어던지는 근력의 이빨과, 5급 황술사의 포톤 미사일에 직격당해도 멀쩡한 강인함의 이빨이 공격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사혈死穴, 맞으면 죽는다고 하는 약점을 무자비하게 얻어맞아 튕겨 나간다.
퍼버벅, 채챙- 쨍—!
=아악!= =끅!=
마음먹고 달리면 바람조차 따라잡지 못한다 해서 수뢰라 불렸던 이빨도, 바람 속에 폭풍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한눈에 센다는 이빨도 환인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 채 허리가 반으로 접히며 수 미터를 내동댕이쳐졌다.
‘우와.’
이빨 중 강인하기로 둘째라면 서러워할 아저씨, 아줌마들이 봉질 한 번에 붕 나가떨어진다.
그냥 보아서는 봉을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모습일 뿐인데 거기에 이빨들이 스스로 몸을 가져다 대며 얻어터지는 불가사의한 모습.
아영은 그게 창술의 극에 달해 무중생유,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처럼 상대가 얻어맞아야 할 상황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쐐쇄쇅—
제물 역할인 전갈의 앞발이 박살 나는 순간 불, 물, 바람, 번개, 각종 술법과 암기와 화살이 환인에게 쏟아지지만.
째쟁- 퍼버버벙—
2m짜리 봉을 쓱쓱 움직이자 일부는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일부는 봉에 쳐내어져 폭발해버리고 암기는 그대로 땅에 떨어진다.
1초 간격으로 다음 공격이 쏟아진다. 다들 익힐 수 있는 한계까지 연마한 저주와 약화.
=어둠의 시야!=
=감각 혼란!=
=이익, 느려지는 발!!=
“…….”
하지만 경악스럽게도 저주가 아예 통하지 않는 모습이다.
=거, 걸리지 않아! 어째서!?=
=에테르 패싱이다!=
=위상류라고?!=
그게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침묵과 정적을 미덕으로 삼는 이빨들이 저도 모르게 소리칠 정도.
‘저 정도면 직접 술법 공격도 거의 안 통하겠는데?’
같은 생각을 엘미느도 하며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큿, 제1 진형 전개! 감유!=
=크허어어엉—!!!=
감유의 신체가 급격하게 부풀며 라이칸스로프화하더니 그야말로 웨어비스트의 모습 그대로 환인에게 뛰어든다.
그런 그의 거대한 덩치 뒤에 숨어 아직 멀쩡한 일곱이 필사의 각오로 환인을 덮쳤으나.
“흥!”
바우우웅—! 콰과과과곽!!
뒤로 피하거나 할 거라는 아영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환인은 태풍이 일듯한 후려치기에 이어 검은 섬전처럼 수십 번, 벼락같이 감유의 요혈을 찔렀다.
끔찍한 타격음과 함께 달려들던 속도 그대로 튕겨 날아가는 감유.
그가 번 시간은 고작 2초였지만 남은 이빨들에게 그 시간은 공격을 퍼붓기 위한 준비에 차고 넘쳤다.
=하아압-!!=
암살이 아닌 대련이기에 기합을 지르며 쇄도하는 일곱 이빨들. 그리고 뒤로 물러나긴커녕 두 걸음 앞으로 나서는 환인.
이어진 광경은 뛰어난 체술의 자질을 지닌 그녀로서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술의 결정체였다.
유柳를 극한까지 연마해 공방퇴를 곡선에 모두 담아낸 창술의 정점.
2m의 봉이 유려한 ∞를 그리자 이빨들이 그 궤적에 휘말려 무기를 놓치거나 옆 사람을 찌르거나 충돌해버린다.
이빨들의 수준을 생각한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하지만 엄연히 벌어진 현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쏟아지는 검푸른 빛살의 향연에 이빨이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아영은 숨 쉬는 것도,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고 그 모든 장면을 눈에 담았다.
하복부가 뜨거워진다. 속에서 부끄러운 물이 넘쳐흘러 속옷을 적신다.
그만큼 흥분한 아영은 허벅지를 오므리며 얼굴을 붉혔다. 상스럽다. 저런 아름다운 창술을 보고 이렇게 발정해버리다니.
“…….”
=아, 윽.=
엘미느는 장전해놓은 저주를 채 쓰지도 못하고 결판나버린 광경에 얼어있다가 환인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모습에 주춤거렸다.
11명의 이빨 중 두 다리로 멀쩡히 서 있는 것은 자신뿐.
항복해야 할까 아니면 저항해야 할까 고민했지만, 엘미느는 아직 아영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입술을 앙다물고 환인에게 심혈을 다한 5급 무력화의 저주를 내렸다.
그리고 저주가 튕겨 나와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마, 말도 안 돼.=
5급 무력화의 저주를 약화하는 게 아니라 아예 튕겨내다니, 이런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아무리 위상류라고 해도……!
기함한 엘미느는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축축 늘어지는 걸 느끼며 양손 가득 검푸른 저주를 담아 마구잡이로 쏘아 내려 했다.
그러나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딱! 소리와 함께 고개가 뒤로 꺾인 엘미느는 눈을 까뒤집은 채 침몰해버린다.
=……휴우.=
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절하거나 다친 곳을 부여잡고 빌빌 기는 아저씨, 아줌마들을 돌아보았다.
하나같이 중상을 입고 전투 불능에 빠진 모습들.
최상의 컨디션으로 모든 준비물을 확보한 상태라면 60% 확률로 자신도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같이 갑작스러운 상태에 그럴 수 있을까?
아영은 오한에 실금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박살 나는 것처럼 자신도 박살 날 거 같아서, 그래서 환인 오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것 같아서.
“네가 마지막이다.”
환인의 목소리에 움찔했던 아영은 너클 더스터를 두 손으로 꽉 쥐며 말했다.
=으음. 오빠 진짜 강하시네요. 마도기랑 유물의 힘을 빌렸다고는 해도 창술만으로 아저씨랑 아줌마들을 모두 꺾으시다니……. 그거 창술 맞죠?=
“그래.”
=휴…… 암담하지만 어쩔 수 없네요.=
얇디얇은 속옷 차림이지만 아영은 부끄러움을 잊고 자세를 잡았다.
자신이 오빠의 창에 유린당해 쓰러져야 화룡점정, 계획이 완성된다. 물론 맥없이 쓰러져서는 안 된다.
카락스가 얼마나 쓸모 있는지를 어필해야 하니까.
“…….”
=…….=
그와 대치하니 긴장으로 인한 소름이 온몸으로 번져간다. 유두와 클리토리스가 딱딱해지고 도드라지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아영은 그런 가려움과 비슷한 오한을 이겨내며 성력을 남김없이 끌어올려 모든 것을 신체 강화로 돌렸다.
긴장감이 점차 고조된다.
환인도 제법 뛰어난 무투가의 태가 나는 아영의 자세에 흥미가 솟고 있었다.
이빨들은 그저 그런 수준이었다. 이실리테와 안느가 단순 기술과 힘으로 상대한다면 홀로 셋까지 상대할 수 있고, 직업 특수 능력까지 동원한다면 모두 이길 수 있는 정도.
물론 상대의 생사를 도외시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아무튼 그 정도였다.
환인의 눈에 보이는 아영도 종합적인 전투력을 가늠해보면 이빨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녀와 대련해본 안느의 평가와도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환인은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제법이군.’
자신이 그녀의 몸에 시선을 주면 그 부분이 움찔하면서 반응할 정도로 기감에 예민하다.
성격이나 암살성직자라는 직업의 특이성, 특수성만으로 차기 어금니로 선정되지 않았을 테니, 그녀의 진짜는 저 예민한 기감이라는 뜻이겠지.
=크, 르륵…… 아, 아직이오……!=
“…….’
환인은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는 감유를 향해 눈썹을 찌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 여섯 번의 타격으로 침묵시켰다.
1초에 6대를 전신에 얻어맞고는 수인화까지 풀린 채 벌거숭이로 나자빠지는 감유.
입가에 게거품이 흐르는 걸 보면 방금 공격에 뼈가 족히 1.3배는 늘어났겠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아영에게 고개를 돌린다.
“…….”
그러다 대여한 주택의 지붕 위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거기에는 얼빠진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플라비우스족 열두 명이 있었던 것.
전원 4급부터 7급의 직업자에 날개만큼이나 하얗고 우아한 갑주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착용하고 있다.
거기다 두 쌍의 날개까지.
그중 7급인 직업자는 두 쌍의 큰 날개에 한 쌍의 작은 날개도 허리 부근에 나 있었다. 그것까지 친다면 세 쌍의 날개다.
‘팔라툼의 기사단인가.’
잠깐 그들을 바라보던 환인은 지금 상황에 개입할 뜻이 없음을 읽고 아영에게 고개를 돌리며 무표정으로 말했다.
“유혹을 잘도 참았군.’
=에이~ 제가 달려들었으면 바로 때려눕히셨을 거면서.=
환인의 농담에 아영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녀라고 해서 그가 딴 곳에 시선이 팔렸을 때 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뿐.
고개를 돌린 순간 ‘들어가면 죽는 범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10여 미터 밖에 서 있었음에도 소름이 돋아서 허벅지가 절로 오그라들었을 정도이니 말 다 했지.
자신이 너무 긴장하고 있음을 깨달은 아영은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통통 뛰듯이 몸을 다시 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움직임에 살짝 식스팩이 만들어져있을 정도의 근육이 탄력적으로 흔들리며 건강한 움직임을 내보인다.
그리고 전조 없이 아영의 몸이 짓쳐 들었다.
본능적으로 환인의 무술이 인체 근섬유의 동작을 읽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보인 무신호 펀치.
환인은 그 궤적과 방향, 도달점을 읽고 그녀의 옆구리에 실낱같이 발생한 빈틈으로 천칭을 찔러넣으려다 멈칫했다.
빈틈이 사라졌다. 덩달아 이쪽의 공격에 반격하려는 동작이 더해진다. 뻗어오던 주먹은 이미 회수한 상황.
그의 눈에 호기심이 더해졌다.
천칭이 방향을 슬쩍 바꾼다. 아영의 자세가 변하며 드러난 몇 안 되는 빈틈, 그중 함정으로 만들어놓은 빈틈을 빼고 무릎과 어깨를 동시에 찌…….
=……!=
……르려다 다시 물러섰다.
자신이 물러나자 공격받는 지점을 보호하며 반격하려던 그녀의 동작이 다시 예비 자세로 돌아간다.
“그런 거였군.”
=……흐에엑, 헤엑! 후억! 뭐, 뭐가요?!=
1초 사이 공격과 반격과 회피와 반격의 준비 자세를 네 차례나 반복했던 아영은 전신 근육이 터질 듯이 조이는 걸 느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솔직한 말로 죽을 맛이다. 1초 사이 공격 지점이 세 번이나 바뀌는 걸 피부로 감지했다. 당연히 거기에 대비하려 근육을 억지로 움직였더니 근섬유 파열이 일부 벌어진 상황.
허벅지와 옆구리 일부, 어깨가 불그스름하게 달아오른데다 딱딱해진 피부가 그녀의 상태를 설명한다.
“그럼 가지.”
=……!=
환인이 눈 깜짝할 사이 들이닥치는 광경에 흐억, 숨을 짧게 들이켠 아영은 모든 생각을 지우고 피부로 전해져오는 정보에만 집중,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환인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
=단장님. 저기 쓰러진 놈들을 포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러다 도주하면 잡기 곤란해지는 것은 물론 위에서 문책도 내려올 겁니다.=
=……그다지 현명치 못한 행동일 듯하군.=
=예?=
=저길 보게. 적기사와 성기사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지 않나. 몰라서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일부러 놔두고 있다는 뜻인 거다.=
=으음.=
=저자들의 수준을 보면 카락스의 암살자, 그것도 상급 암살자 일터. 하지만 도망치려 하거나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나선다면 월권행위나 다름없다.=
=확실히. 영성급 영혼사님의 주변은 한시적 치외법권 지대가 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암살자들이 성제를 습격하려 한다는 보고에 황급히 날아왔지만…… 어째 암살자와 싸우는 게 아니라 무언가 입단 시험 같은 걸 하는 모양새다.
성제가 암살자들에게 시험 받는 게 아니라, 암살자들이 성제에게 시험받는 듯한 광경 말이다.
더욱이 자신이 사비를 들여 시주르 대평원에서 벌어진 일을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성제는 무척이나 권모술수가 능한 자였다.
그런 자가 암살자들을 쓰러트린 뒤 생각 없이 저렇게 놔둘까?
주도 팔라툼의 제2 천공기사단 단장, 레아우카=사바인은 성제와 싸우는 반라의 라벤더색 머리카락 여자 플뢰를 응시했다.
=그보다 굉장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확실히 굉장합니다. 성제가 저렇게나 창술이 뛰어나다니, 짐작도 못 했습니다.=
레아우카는 부관을 향해 한심하다는 눈으로 쯧쯧 혀를 찼다. 천족 가에서 똘똘한 아이라 해서 부관으로 받아들인 건데 원.
부관은 단장의 시선에 조금 주눅 든 표정으로 물었다.
=단장님.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이틀 시간을 주지. 자네가 무얼 실수했는지 알아내어 보고서로 올리게.=
=윽. 네…….=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슬쩍 물러난 부관이 옆의 선배 기사에게 질문하는 게 보였지만, 레아우카는 신경 쓰지 않고 성제를 상대 중인 여자 플뢰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여자의 체술은 무척 뛰어났다. 어떻게 성투술을 익혔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다른 이야기, 저정도면 중급 천기사 정도에게도 통하겠지.
그런 체술보다 뛰어난 것이 기감이다.
성제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걷어내고 피하는 모습을 보자면 자신도 검술만으로 저 여자를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정도.
성제와 싸우는 여자가 저정도라면 그런 여자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성제는 얼마나 강할 것인가.
부관이 저지른 실수는 이에 기반한다.
레아우카는 플라비우스족 선천 능력, 천인의 눈을 발동해 성제에게 주었다.
그를 휘감는 평온한 마력의 흐름. 영혼술을 쓰는 기색도 없다. 가끔씩 몸에 걸친 마도기와 유물이 발동의 빛을 살짝살짝 흘릴 뿐이다.
‘괴물이군, 괴물이야.’
창술이 그리 뛰어나 보이진 않았기에 오히려 그 이유로 레아우카는 성제의 창술이 신의 반열에 든 거로 생각했다.
그 왜,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평범하게 보인다고 하지 않나.
초식을 내려놓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창의 극의를 얻었기에 평범해 보이는 거라 판단한 것이다.
레아우카는 불과 2분여 만에 땀투성이가 된데다 무리한 움직임으로 전신이 벌겋게 달아오른 플뢰 여자를 바라보았다.
몸이 저런 꼴이라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울 텐데 여자는 말짱해 보인다. 고통 경감 기술이라도 익혔나.
=…….=
슬슬 결판이 날듯하다. 다른 기사들은 필요 없겠지.
=레베카.=
=네, 단장님.=
레아우카는 자기가 저지른 실수를 깨닫고 시무룩해진 부관에게 짤막하게 지시를 내린다.
=병영에 연락해 각 관문의 검문을 4단계로 끌어올리라 전해라. 중점 검문 배색은 1A-3C-513DB다. 명령권자는 무장 장관 벨로트 투르시온 랄터.=
=예.=
=시아이나와 아리드만 남고 나머지는 복귀하도록.=
=단장님은……?=
=성제님께서 이쪽을 눈치채셨으니 응당 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야지.=
레아우카는 상급 기사 둘만 곁에 두고 나머지는 복귀시킨 뒤 지붕에서 사뿐히 내려섰다.
* * * *
=하악! 하아악!=
환인은 비 오듯이 온몸으로 땀을 흘리는 아영을 담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복숭아처럼 붉어진 피부. 쉴 새 없이 들썩이는 어깨. 몰아쉬는 숨 탓에 계속 흔들리는 가슴.
허벅지와 어깨, 팔뚝은 처음과 비교해 1.3배는 부풀었고 신체에 부담이 극한까지 달했는지 온몸이 잘게 떨리기까지 한다.
성술의 자연 회복이 신체의 부담을 따라가다 결국 위상력이 바닥난 모습이다.
땀을 먹을 대로 먹어 속옷의 기능을 전부 상실해 속살까지 내비치고 있는 아영은 아직도 투지를 잃지 않고 있었다.
‘제법 흥미롭군.’
암살자로 자란 탓일까. 아니면 아직 그녀를 곤경에 빠트릴 정도로 강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일까.
자신의 약점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데다 기술도 미흡한 곳이 제법 보이며 무엇보다 그녀의 반사신경에 신체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만약 그 약점을 모두 없앤다면 기술만으로는 이실리테나 안느도 아영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그게 한계지만.’
뛰어나봤자 신체는 일반인의 능력을 성술로 끌어올린 것뿐, 이실리테처럼 필살기를 만들어낼 수도 없고 안느처럼 막대한 신체 능력을 바탕에 성체술을 걸어 더더욱 뻥튀기시킬 수도 없다.
환인처럼 한순간에 상대의 근육 움직임을 읽는 눈썰미와 남들의 수 배에 달하는 사고 능력을 기술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한 한계는 명확한 것이다.
단점이 명확하지만 그건 곧 장점이기도 하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전방에서 여러 적과 싸우는 전열 근접 타입이다. 그런 그녀들과 다르게 아영은 후위라고 할 수 있는 암살 성직자.
환인이 생각한 파티 구성 요소를 가입 전부터 모두 충족하고 있으니 기술만 가르치고 그녀의 약점을 커버해준다면 파티 내 중요도는 이실리테와 안느에 버금갈 정도가 되겠지.
“숨도 돌렸을 테니 슬슬 끝낼까.”
=히잉…….=
끝끝내 환인을 한 대도 맞추지 못한 아영은 진심으로 울상을 지었다.
온몸의 근육이 찢어지고 파열될 정도로 몰아붙이면 어떻게, 한 대는 때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과는 이 꼴이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이 상황에 부닥치고 보니 무능함을 지적받는 거 같아 생각보다 더 괴롭다.
그리고 저 말은 무슨 뜻일까. 자신이 모르는 약점이라도 눈치챈 것 같지 않은가.
아영은 긴장하면서 환인에게서 날아올 기감을 대비했다가 퍽— 아랫배에서 극심한 고통이 올라오는 걸 느끼고 =컥.= 타액과 함께 격한 숨을 토해냈다.
=꺼어어……?=
뭐, 지? 어떻게……?
“이게 네 약점이다.”
아랫배를 타고 올라오는 짜릿한 고통도 고통이지만, 절대적인 신뢰를 주고 있던 초지각이 반응하지 않았다는 게 그녀에겐 더 충격이었다.
=허읍, 흐어.=
아랫배에 가해진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 탓에 몸이 말이 안 듣는다.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아영은 허우적거리다가 이윽고 위상력이 완전히 바닥났다는 걸 깨닫고 눈앞이 흐려지는 걸 느끼면서 환인에게 반쯤 매달렸다.
=…더, 하버만 더허…….=
“그 몸으로는 더 못한다.”
내, 내가…… 좀 더 노력해서 오빠한테 인정받아야…… 하는데…….
하지만 축적된 피로와 환인에게 여러 차례 받은 타격으로 육체는 이미 한계.
아영은 삐이이— 귓가에 이명과 환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것을 들으며 까무러치고 말았다.
힘없이 쓰러지려는 그녀를 받친 환인은 그녀의 땀에서 라벤더 향이 나는 걸 느꼈다. 안느의 체취와는 또 다른 향기.
몸 일부가 시퍼렇게 질리고 있는 걸 보면 성술의 자연 치유력 증가 효과가 종료되어 조직이 괴사하려는 현상.
아영을 안느에게 데려가 치료하려던 환인은 이빨들이 여기저기 부러지고 다친 몸으로 다가와 자신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응시했다.
체념과 함께 어딘가 후련한 모습. 전부 현실을 받아들인 태도다.
=성제님, 저희는…….=
이마에 커다란 혹이 난 엘미느가 입을 열었을 때, 환인은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불청객도 있고, 이야기는 아영이 일어난 뒤에 하도록 하지.”
고개를 돌린 그의 시야에 아까 보았던 7급 플라비우스족, 천사처럼 세 쌍의 날개를 단 남자가 여자친구들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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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안느: 쟤 나랑 대련할 때 힘 다 안썼었네.... 일어나면 또 대련하자고 해야지. (찌릿)
이실: 넌 저번에 했으니까 이번에는 내가 할 거야. 주인님 공격을 처음부터 따라가는 실력이라니....
려강: (댕무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