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 하늘 도시 팔라툼
적지 않은 마차가 오가는 관문 앞 도로. 그 가장자리에 세워진 천막식 대형 왜건은 세월의 풍파를 맞아 자연스럽게 빈티지한 느낌을 내고 있었다.
단순한 짐마차는 아니고 집시들의 이동식 주거 마차와 흡사한 모양새.
이런저런 짐으로 가득 채워진 마차의 수레를 살피는 척, 밖에 나와 있는 남녀 다섯 중 2명의 외모가 눈에 익다.
며칠 전 이레아의 몸 안에 삽입되어있는 통신 마도기를 통해 안면을 익힌 여자와 남자 한 쌍이다.
흰 늑대족인 감유. 천사 혈통의 조인족인 엘미느.
환인의 시선은 생전 백려강처럼 등허리에 난 한 쌍의 검은 날개를 고이 접은 여자를 응시했다.
누런색 리넨 셔츠에 손때가 탄 가죽조끼와 가죽 바지. 그리고 평범한 가죽부츠.
며칠 전 수정구로 보았을 때와 다르게 탁한 분홍색 머리카락과 좌우 옆머리로 살짝 늘어진 검고 작은 날개 한 쌍.
천사족의 혈통이라는데 딱히 별난 점은 느껴지지 않는다. 린덴 폐촌락에서 보았던 그 장소와 모종의 연관이 있을까 했지만, 그저 그런 여자다.
영혼의 눈이 전개되어있는 환인의 시선이 다른 이빨들에게 향한다.
다섯 명 중 그녀와 감유를 포함해 세 명의 기운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탁하고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그 사실에 환인의 눈이 가늘어진다.
‘아우라 억제 약을 마셨나.’
「환인. 주변에 숨어있는 인간은 없어.」
품 안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은 환인은 그들 근처에서 고삐를 당겨 마차를 멈춰 세웠다.
“…….”
흔히 볼 수 없는 독특한 외형의 무광 유선형 검은 마차가 멈춰서자 다섯이 환인을 돌아본다.
=…….=
=…….=
혼난 강아지처럼 기운 빠져있던 감유는 환인과 시선을 교환한 뒤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그대로 멈추었다.
엘미느는 마차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아영과 손을 흔들어 소리 없이 인사를 나누었고 나머지 셋은 긴장한 모습으로 환인을 바라보는 중.
환인이 그들의 무위를 나름의 기준으로 파악을 끝냈을 때, 엘미느가 적당한 거리까지 다가와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환인 님을 뵙습니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예를 차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주세요.=
“…….”
말없이 그 인사를 받은 환인은 대답 없이 등 뒤, 마차 내부와 연결된 쪽창을 텅텅 두드렸고 그 신호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마차에서 내렸다.
웅성.
녹색 쿠에인 비상의 모습에 안 그래도 모이던 시선이 두 여자의 출현으로 단숨에 세 배 이상 늘어난다.
환인은 마부석에서 내려 비상의 등에 올라탔고 안느도 쿠핀을 마차에서 푼 뒤 그 등에 올라탔다.
=앗, 이실리테 언니. 마차는 제가 움직일게요!=
=……응.=
이실리테는 백려강이 내어주는 보조석에 앉으며 밖에 나와 있는 다섯, 그리고 마차 안의 여섯을 기감과 공간 지각으로 파악하곤 기세를 칼날같이 벼리기 시작했다.
만약 저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왔다면 세 자루로 늘어난 다중 검기로 단숨에 쳐버리기 위해서.
“따라와라.”
가타부타 말도 없이 그 한마디만 하고 앞서 나아가는 환인을 일행의 마차가 뒤따르고, 엘미느도 조금 흐려진 안색으로 모두에게 손짓해 마차에 오르라고 지시했다.
=……어, 아. 성제, 성제님이시라고요…….=
이 세상에서 유명인 대부분은 직업자다. 그리고 유명할수록 직업자 등급도 높기 마련이라 그 아우라가 일종의 신분 증명을 해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성제라고 밝힌 남자는 아우라가 없는데.
왜곡벽의 관문 병사는 갑자기 나타난 검은 머리 남자를 보곤 곤란함을 느꼈지만, 일단 몸에 익은 절차대로 위병소에 사람을 보내 사실을 알린다.
=헉!=
이어서 몇 가지 확인 질문을 하려던 병사는 하얀 철제 투구가 덜그럭거릴 정도로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음을 절로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희뿌연 회백색의 파동이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정말 멀리, 끝도 없이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
영혼술이 뛰어날수록 평온의 파동이 멀리 퍼져나간다는 사실을 잘 아는 병사는 척, 반사적으로 경례를 올렸다.
=실, 실례했습니다!=
위병소 쪽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병사들이 뜨악한 얼굴로 후다닥 달려오는 것을 보며 환인은 품에서 미리 준비한 신분증을 내밀었다.
“이건 영도의 대성녀님께서 내어주신 신분증명패입니다.”
아니 증명패가 있으면 그것부터 보여주시지……!
“아우라 무발현 증상자라 대뜸 신분증부터 보여드리면 믿지 못하실 것 같아서 부득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양해해주시길.”
=아, 아닙니다! 오히려 귀빈을 미리 알아보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제2 서쪽 관문의 중급 병사인 루도라는 자기 생각을 읽은 것처럼 나오는 이야기에 살짝 몸을 떨었다. 그리고 몸에 배인 FM에 마음 깊이 감사했다.
만약 대충대충 확인하고 대충대충 대화를 넘기며 대충대충 응대했다면…….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무척이나 송구하다는 마음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가까이 온 상급 병사에게 신분증을 넘겨준 병사는 환인 일행의 신분을 하나하나 정중하게 확인해 나간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관문 신분 확인을 넘길 수는 없다.
신분증을 검문 수정구로 범법 이력을 조회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병사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예우.
일행 또한 타 귀족 마차, 기사처럼 보이는 인물들도 빠짐없이 검문을 받는 걸 확인했기에 순순히 검문에 응했고, 이내 아무런 문제 없다는 걸 확인한 뒤 평범하게 관문을 통과했다.
관문 통과 수수료가 적지 않았지만 그건 주도나 대도시라면 으레 내는 수준.
‘이래서 성문이 아니라 관문이라 했군.’
왜곡벽을 통과한 환인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서 그 이유를 이해했다.
논밭은 성벽 바깥에 있기 마련이다. 라드세아를 여행하며 본 모든 도시와 마을이 그러했다.
하지만 팔라툼은 성벽 안쪽에 논밭이 있었는데, 그 넓이가 족히 수 킬로미터 너머 도시 가장자리까지 이어져 있을 정도.
성벽 너머가 들판이라 할만큼 드넓으니 성문이 아니라 관문이라고 한 거겠지.
환인은 제법 구획이 정갈하게 나뉜 벌거숭이 논밭을 둘러보았다.
봄이 찾아와 농민인지 농노인지 모를 사람들이 파종을 위해 겨우내 쉬었던 논밭을 쟁기로 열심히 갈아엎는 중이다.
하반신이 말인 인마족 여자가 쟁기를 끌며 땅을 갈고 있는가 하면, 거대한 인우족 여자가 그녀만큼이나 거대한 괭이로 땅을 가는 것도 보인다.
다들 열심히 살아가는 평화적이고 목가적인 풍경.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장면이다.
환인은 마차를 몰면서 뒤를 힐끔거리는 아영을 불렀다.
“팔라툼의 숙박 시설에 대해 아는 게 있나.”
=넵! 몇 년 전 팔라툼에서 몇 달 지낸 적이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슴다! 어떤 곳을 찾으세요!?=
목소리에 힘이 과다하게 들어간 게 느껴진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이 상황은 긴장된다는 뜻이겠지.
“우리가 머물만한 단독 주택 형식이면 좋겠군.”
=임대형 말씀이시죠!? 그러면……!=
다행히 관문 검사를 무사히 통과했는지 이빨들의 마차가 뒤쫓아오는 게 느껴진다.
안심한 아영은 즉시 기억 속에서 적당한 부자들이 여행하러 와서 애용하는 임대 장원의 위치를 꺼내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비상을 탄 환인이 마차 근처에서 속도를 맞춰 이동하고 있자 마차 지붕에 올라가 있던 백려강이 환인 쪽으로 다가와 묻는다.
=환인 오라버니. 성에 방문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오라버니께서 도시에 도착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 같은데…….=
“전직 암살자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아.=
“그리고 잠깐 교류하기 위해 방문하는 거면 몰라도 성에 긴 시간 머무를 생각은 없다.”
플라비우스족 사절의 목적은 자신을 초대해 친분을 쌓는 것이라 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세계의 고위 인사들 마인드를 보면 몇 날 며칠이고 흥청망청 놀게 뻔한 상황.
그런 일에 시간을 쓰는 것은 질색이다.
일단 초대장을 받아버렸고 플라비우스족 사절이 유일하게 눈치 빠르게 빠져준 것에서 가산점이 붙었기에 방문 의사가 조금 있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환인은 이번 초대도 무시했을 것이다.
=환인 오빠! 저기예요!=
환인은 마차 앞으로 나아가며 아영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히스론드산은 그 자체로도 높기에 산자락도 넓고 약간의 경사가 져있다.
약간 기울어진 산 아래 도시 한켠,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유럽 관광 도시의 임대 단독 주택 비슷한 건축물이 주르륵 늘어서서 성벽 쪽을 보고 있었다.
부자들의 대여 공간으로 기획된 구역인지 적당한 정원, 뒤뜰을 포함한 단독 주택들이 적당히 늘어서 있는 것이 환인의 마음에 들었다.
=엇……! 호, 혹시 집을 빌리러 오신 분들이십니까?=
아영의 안내에 따라 도심 가장자리로 들어와 숲속처럼 꾸며진 가로수길을 올라가자 관리소 같은 작은 집안에 앉아있던 양 머리의 남자가 후다닥 달려 나와 묻는다.
그 대상은 당연히 녹색 쿠에를 타고 있는 환인. 그러나 환인이 나서기 전, 안느가 쿠핀을 몰아서 그 양 머리 남자에게 다가가 대답했다.
=맞아. 여섯 명과 쿠에 네 마리가 머무를 수 있는 큰 곳이 필요한데, 있어? 정원도 넓으면 좋겠고 밖에서 엿볼 수 없는 곳이면 더 좋은데.=
=아이고 물론 있고말고요. 담장은 조합원을 불러서 식물을 자라게 해 원하시는 만큼 담 높이를 높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양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희귀 아우라 플뢰 여기사의 위용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 일행을 안내했다.
=여긴 누구 땅이야? 보니까 대여를 목적으로 다 지어놓은 거 같은데.=
길은 단정하게 포장되어있고 가로수도 손질받은 흔적이 역력하다. 띄엄띄엄 마도 가로등까지 세워진 걸 보면 돈 많은 누군가가 땅을 사서 영업하는 거라고 봐야겠지.
=이곳은 국가 소속으로 천명부에서 관리하는 곳입니다. 매일같이 병사들이 순찰하기에 부랑자들이나 하층민들이 접근하지도 못해 치안도 확실한 곳이지요.=
힐끔, 그러고는 일행을 돌아보다가 마차 뒤에 따라붙는 집시 왜건에 질색하며 손을 확확 흔든다.
=어어이! 거기 자네들! 여긴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야!!=
=아, 저 사람들 우리가 잠깐 데려온 거야. 신경 쓰지 마.=
=헛! 그, 그러셨습니까? 이거 실례했습니다…….=
양 남자가 메헷, 곤란한 듯 울면서 고개를 숙이니 안느가 작게 웃었다.
=볼일 때문에 잠깐 데려온 거고 볼일 마치면 책임지고 내보낼게.=
=예에.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아, 저 집입니다.=
관리인이 안내한 집은 여자들의 마음에 꼭 드는 곳이었다.
일단 코너를 도는 곳에 세워져 부채꼴 모양으로 정원이 무척 넓었다.
건물의 좌우로 키가 10m에 달하는 관상수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라있어 멀리서도 이쪽이 보이지 않는 구조다.
나무 기둥 부분도 관목으로 채워져 있어 옆집이나 길가의 시선을 신경 쓸 일이 없으며 정원 가장자리를 따라 예쁜 꽃밭까지 꾸며져 있어 보기에도 좋은 느낌.
주택은 고급 회색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었는데, 담쟁이넝쿨이 고상하게 외벽을 뒤덮어 운치가 넘쳤으며 집안도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서 채워 넣은 가구와 실내장식으로 부족함이 없는 곳이었다.
여자들은 잠깐 집안까지 둘러본 뒤 환인에게 이곳을 빌리자고 했다.
=도령, 지하에 온천도 있어! 여기 마음에 들어. 여기 빌리자!=
=주인님. 관리인 씨가 그러는데 여기서 왼쪽으로 나가면 시장 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나가서 멀리 보이는 대형 분수까지 가면 중앙 광장 미궁 거리도 나온다고 해요. 그 미궁 거리 근처에 온갖 상점이랑 조합도 다 모여있다니까 머물기에 좋을 것 같아요.=
위치도 좋고 집도, 정원도 괜찮다.
“이곳을 빌리고 싶습니다. 기간은 아직 정하지 않았습니다만.”
=그러십니까? 그러면 보증 비용으로 5금화, 1일 임대에 4은화가 듭니다. 원하신다면 입주 하녀도 넣어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귀족하녀원 조합에서 파견 나오는 견습 아가씨들이라 비용도 덜 들면서 품위와 예의범절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 수준입니다.=
파견 실습인가.
“하녀는 괜찮습니다.”
여자친구들과 지낼 곳인데 다른 여자의 시선을 굳이 신경쓰고 싶지 않다. 청소라면 정령으로 금방 해결할 수 있으니까.
아스펜드에 손을 대고 6금화와 1은화를 꺼낸 환인은 관리인의 손에 금화 6닢, 은화 1닢을 짤랑짤랑 떨어트려 주었다.
“우선 25일치 대금입니다. 은화는 팁입니다.”
=……! 지, 지금 당장 계약서를 가져오겠습니다!=
관리인은 심장이 벌렁거리는 걸 느끼며 후다닥 관리소로 뛰어갔다. 방금 그거, 유물 맞지?
오랜만에 진짜 부자가 찾아왔다. 마을 같은 곳의 유지랍시고 거들먹거리며 돈은 인색하게 쓰는 졸부가 아니라, 어디 위험한 미궁을 탐험하며 막대한 부를 쌓은 진짜 부자.
이런 부자한테는 섣불리 다가가서도 안 된다. 대개 저만한 부자는 그만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괜히 은화 몇 닢에 눈이 돌아가서 귀찮게 했다간 자신의 목이 물리적으로 달아날 수도 있는 일.
관리인은 최대한 조용히, 그림자처럼, 공기처럼 움직이겠다고 다짐하며 날듯이 뛰어가는 그때.
“마차는 거기 세워두고 다들 정원으로 와라.”
환인은 긴장한 기색과 함께 은연중에 몸에 힘을 주고 있는 카락스의 이빨들을 데리고 정원으로 이동했다.
정식 축구 필드의 절반만 한 정원이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충분한 넓이다.
환인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아영에게 이빨들을 가리켰다.
“아영, 너도 저쪽으로 가라.”
=네? 저는 환인 오빠 건데요……?=
“…….”
=넵! 가겠습니다!=
아영을 보낸 환인은 넓은 정원이 마음에 든 것처럼 정원을 서성이는 쿠에들을 보고 비상에게 말했다.
“비상, 다칠 수 있으니 쿠에들을 데리고 구석에 가 있어라.”
꾸으~
이어서 자신의 기감에 신경 쓰이는 것은 없지만, 혹시 모르기에 환연에게 부탁해서 주변을 한차례 스캔해달라고 부탁한다.
「음, 저택을 중심으로 반경 100m, 땅속 10m까지 전부 다 훑었는데 숨어있다거나 엿본다거나 하는 인간은 없어.」
“우리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천왕궁으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을 잘 보고 있다가 누가 오면 알려다오.”
「그럴게.」
이 일련의 행동에 카락스의 이빨들은 조금씩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야기라면 집안에서 나누어도 될텐데, 혹시 자신들이 습격할 것을 경계하는 걸까?
엘미느는 금방이라도 미궁에 들어갈 것 같은 차림의 영혼 기사들을 힐끔 바라보았다가 불안에 조금씩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하나뿐. 자신들의 죽음으로 카락스의 이름을 후대까지 보전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점을 전한다면 현명하다고 하는 성제이니까 알아봐주실 것이다.
아영을 이쪽으로 보낸 이유가 의문이지만, 지금은 일단 무릎을 꿇—
“그럼, 덤벼라.”
—으려다 환인의 이야기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췄다.
자신이 혹시 잘 못 들은 건가 싶어 옆에 서 있는 감유를 보았지만, 그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듯한 모양새다.
“말로 떠들어봤자 행동 한 번만 못한 법이지. 그리고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끌고 가는 취미도 없다.”
=저, 저희를 모두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청초계 원숙한 미녀 상인 엘미느가 곤란해하는 얼굴로 하는 질문에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나 납득할만한 패색을 내게서 끌어낸다면, 날 암살하려 했던 일은 없던 걸로 하겠다. 영도와 대성녀 닌실 아나그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
“단, 내게서 패색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너희들에게서 한 가지를 가져갈 것이다.”
=하나라면……?=
“카락스라는 이름.”
자기 관리가 철저했던 전직 암살자답게 약간의 불안은 드러낼지언정 잔잔하던 그들의 분위기가 일순 날카로워진다.
카락스는 그들의 존재 그 자체. 그걸 가져간다는 뜻은 무엇인가.
엘미느도 주눅 든 태도를 치우고 한 자루 검 같은 기도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성제 예하. 저희는 모두 은퇴한 암살자들입니다. 현역일 때는 부패한 7급 직업자도 암살했던 이들입니다. 그날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기량과 역량은 조금 줄었다한들 경험은 여전합니다. 정말 저희를 전부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이빨들은 그녀의 그런 이야기에 공감을 드러냈다. 성제가 한 제안이 솔깃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공평해야 뒷말이 나오지 않는 법인 거다.
하지만 아영은 달랐다.
=다들…… 무기를 들고 준비해.=
=아영.=
=진짜 늙으면 죽어야지. 어떻게 판단력이 이렇게 흐려질 수가 있어? 환인 오빠는 그냥 무턱대고 저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야. 오빠가 저리 말할 정도라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진짜 희박하다는 말이라고. 오빨 걱정할 게 아니라 카락스라는 이름을 못 쓰게 될 상황을 걱정해야 한단 말이야!=
그렇게 늙다리들에게 쏘아붙인 아영은 너클 더스터를 끼고 성술을 온몸으로 퍼트리며 몸을 풀어나간다.
긴장감이 가득한 아영의 그런 행동에 이빨들도 그제야 심각성을 인지하고 각자 검이며 단검, 틀로 등을 꺼내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들은 근접 직업자 넷, 원거리 직업자 여섯, 회복 관련 둘로 균형있는 짜임새다.
물론 대결이니 독은 쓰지 못하고 상대를 죽일 수도 없다지만 이런 상태에 1:12를 하겠다고?
엘미느는 어느샌가 2m가량의 길쭉한 봉…… 스틱을 꺼낸 성제를 바라보다 복잡한 심경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준비 끝났습니…….=
뻑—!
=……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끝맺는 순간, 일진광풍과 함께 이빨 중 유일한 회복술 사가 나가떨어져 뒹구는 걸 목격하고 한순간 얼어붙었다.
“한심하군.”
그들의 귀를 찌르는 나지막한 목소리. 이어 잔상을 남기며 수십, 수백 개로 늘어나는 봉.
뻐버버벅콰곽뜩투콱!
=크악!=
=끅.=
=꺼헉……!=
단 2초였다.
두 팔을 교차해 간신히 일격을 막아낸 엘미느와 명치를 얻어맞았지만 늑인족 특유의 터프함으로 버텨낸(환인이 봐준) 감유.
마지막으로 환인이 움직이자마자 일찌감치 도망쳤던 아영만이 두 다리로 서 있었고 나머지 아홉은 여기저기 처맞고 나가떨어져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환인의 무심한 목소리가 그들의 자존심을 날카롭게 찌른다.
“이번은 방심한 거로 생각하지. 아영, 치료해줘라.”
=으~! 진짜 멍청이들이라니까! 내가 그렇게 주의를 줬는데…… 이게 실전이었으면 다 죽었어! 알어?!=
아영은 분통을 터트리며 일부러 환인에게 얻어맞아 뼈가 부러지고 금 간 곳을 퍽퍽 때리며 회복술을 쓴다.
이빨들은 눈에서 번갯불이 튀는 고통을 느꼈지만, 오히려 그덕에 더 빨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긴장을 끌어올리지 못하고 방심했다지만, 자신들의 동체시력과 반사신경은 겉치레가 아니다. 그럼에도 성제의 공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다.
“다음은 없다.”
=……카락스의 광기 2진형으로 가겠어요. 다들 목숨을 거세요.=
소수의 구성원을 제물로 삼아 다수가 상대를 죽이기 위해 몰아치는 필살의 진형.
필살이라지만 상대를 죽여서는 안 되니 급소는 피할 것이다. 죽지만 않는다면 아영의 상급 회복술로 멀쩡히 완치시킬 테니까.
열둘의 암살자가 모여 한 자루의 비도로 변해간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영과 엘미느는 상대가 사람이 아닌…… 흡사 신의 금속, 가즈니움으로 만들어진 인간형 전투 인형 같다고 느꼈다.
무슨 수를 써서도 이길 수 없는 대상.
=…개진!=
그런 불길한 생각을 떨쳐낸 엘미느는 진형 후방에서 흑색 날개를 활짝 펼치며 공격 개시를 소리쳤다.
=망할, 늦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3km 바깥의 하늘에서 목격한 누군가의 비명도 하늘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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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쯤에서 되짚어보는 주인공의 스펙
각종 영혼술
유물 광창 + 마도기 천칭
마도기 천릉(판금갑옷 수준 방어력의 의복) - 아드네빌라 선물
유물 그리모암 장비 (발동시 근력, 체력, 순발력, 정신력 일시적으로 대폭*약5배 증가)
방벽 패널
+ 역쇄류(물리피해 감소) 위상류(술법 피해 대폭 감소 & 면역) - 심핵력 강화시 효과 x2~4배
안느: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