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76화 (576/813)

570 카락스의 어금니

“네 정체는 뭐지.”

환인의 질문에 성력이 몸안을 돌며 내상을 치료하는 감각에 집중하던 아영은 얼굴이 움직여지는 걸 깨닫고 눈을 끔뻑이다 대답했다.

=카락스의 암살자 차기 어금니였던…… 아영입니다. 후에…….=

“먼저 잡힌 암살자와 관계는.”

=그 대원은 상급 송곳니…… 암살대의 일원이에요. 일선에서 의뢰받은 암살을…… 하는 등급이요.=

거뭇거뭇한 피를 몇 번 토해냈던 아영의 푸르딩딩하던 안색에 점차 혈색이 돈다. 입가에 흐르는 피도 선홍빛으로 변하다가 멈춘 상황.

위상력이 상처 입은 몸 안을 들쑤시고 다닐수록 흐트러졌던 흐름이 정상으로 변해가는 걸 본 환인은 호천명의 수행 종자인 야화를 떠올렸다.

그녀도 성술사였으면서 체술과 회복력, 신체 내구 등이 뛰어났었지…….

“네가 여기에 있은 이유는 무엇인가.”

아영은 다 알면서 묻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기에 전부 솔직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잡힌 마당이니 솔직하게 대답할 거였지만.

송곳니가 암살하는 것을 멀리서 관측하는 임무였다.

성패에 연연하지 않고 암살 시행이 1회 끝난 상황에서 자신의 임무는 끝이었다.

남아있었던 것은 암살에 실패하고 사로잡힌 송곳니를 처분하기 위해서.

자신은 성제님의 암살 의뢰를 거절해야 한다고 했지만, 늑대의 어금니가 돌아와서 어쩔 수 없이 받았다.

늑대의 어금니는 어쩌고저쩌고 엘위드리스 원로들한테 보복을 어쩌고저쩌고.

=전 성제님의 영웅담을 굉장히 좋아하고 또 성제님을 선망하고 있어서 슬프고 괴로웠지만, 규제와 규율, 맹약 때문에…….=

“입 다물어라.”

아영은 환인의 이야기에 입술이 딱 붙어 더는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는 우울해졌다.

‘뭔데 이거. 내 몸에 뭐가 들어왔길래…… 영혼? 영혼을 나한테 빙의시켜서 움직이는 건가? 우와, 이 능력만 있으면 암살하기 엄청 편하…….’

……까지 생각했던 아영은 환인의 눈빛에서 살기를 느끼곤 설마 자기 생각까지 읽는 건가, 찔끔하면서 생각을 끊었다.

'멘탈이 굉장히 튼튼하군.'

그보다, 환인은 빙의시킨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이 아영의 생각을 읽고 보내는 이야기에 눈을 차갑게 빛냈다.

백려강이 백치령에게 빙의되었을 때 그러한 낌새가 보이긴 했었지만 설마 진짜 생각을 읽을 줄이야.

읽을 수 있는 것은 표면적인 생각뿐인듯하지만 그게 어디인가. 이것만으로도 사람을 죽여 영혼에 대고 직접 물을 필요가 없어진다.

환인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네놈의 본거지는 어디지.”

=벨티칼 주도에서 남서쪽으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정글 속에 숨겨져 있어요. 찾아가셔도 무의미하실 거예요. 방금 통신으로…….=

“알고 있다.”

=…….=

입을 다물며 데룩데룩 눈알을 굴리는 아영의 표정에 환인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걸 어떻게 해야 할까.

죽이는 것은 간단하다. 그 결과는 자신의 속이 조금 시원해지고 말겠지. 하지만 그 대가로 카락스의 암살자와 원한 관계가 성립될 것이다.

저 여자의 태도가 만약 카락스의 암살자 내부 분위기와 비슷하다면 100%일 터.

저 여자는 암살자들이 자신과 더 이상 얽히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법이다.

게다가 사로잡은 암살자도 이와 마찬가지로 고문해서 정보를 뽑아내봤자 의미가 없다.

아영이라는 저 플뢰 암살자가 모든 걸 시인한데다, 지금 영도에 연락을 넣어 카락스의 암살자 본거지를 쳐들어가라 해도 본거지에 도착한 뒤에는 텅 빈 아지트만 보겠지.

벨티칼 주도 헤뷜트에 연락을 넣어 움직인다 해도 며칠 걸릴 텐데 그리되면 괜히 빚만 지게 되는 셈이다.

반대로 살려두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

7급 성술사. 강한 단련의 흔적. 차기 어금니로 추대될 정도의 능력…….

환인은 라벤더색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아영을 응시하다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허리춤에서 아공간 주머니를 꺼내 주둥이를 열자 환연이 눈치껏 아영의 소지품을 속옷까지 전부 바람으로 들어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 후 빙의시킨 영혼을 회수한 환인은 대충 몸만 가리도록 낡아서 조금씩 헤지고 있는 셔츠와 바지를 아영에게 던져주었다.

“입어라.”

=오. 움직인…… 넵.=

환인의 무감정한 시선에 입을 꾹 다문 아영은 서둘러 옷을 입으며 환인을 힐끔거렸다.

뭐지. 죽임 당할 것까지 각오했는데…… 분위기를 보면 죽일 생각은 아닌 거 같고.

“따라와라.”

=제가 도망가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

=죄송합니다…….=

살짝 도망을 생각하던 아영은 도주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보아하니 도망쳤다간 자신은 물론 자길 가족처럼 키워주고 길러준 카락스의 모두를 남김없이 찾아내 몰살시킬 것 같았기 때문.

야영지로 돌아가자 환인은 마중나온 이실리테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환인의 옷을 입고 털레털레 따라오는 여자에게 고정된 상황.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주인님. 그 여자는…….=

“카락스의 어금니라고 하더군. 이번 암살의 시행 조직이다.”

=…….=

아영은 호박색 머리카락에 무지막지하게 아름다운 여자, 적기사 이실리테가 내뿜는 살기를 정면으로 받았음에도 멀쩡했지만 일부러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적기사는 성제를 매우 매우 사모한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 사람을 암살하려 했으니까 저 여자의 눈에 자신은 악마나 다름없을 거다.

때리러 오면 온 힘을 다해서 불쌍하게 맞아줘야지.

‘엄청 불쌍하게 맞아주면 1대라도 덜 맞을 거야.’

그걸 꿰뚫어본 이실리테는 아영에게 살기를 풀풀 날리면서도 살짝 어이없어하며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 여자 연극하고 있는 거 같아요.=

“플뢰면서 20년이 넘도록 암살자로 키워졌으니 어딘가 이상해져도 이상해졌겠지.”

=저 그렇게 안 이상한데요?=

“…….”

=…….=

=죄송…….=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이쪽 눈치를 살피는 아영과 살기를 풀풀 풍기며 아영을 노려보는 이실리테.

환인은 그녀의 스트레스 수치가 너무 높아지지 않도록 한 가지 제안을 주었다.

“분풀이라면 대련 형식으로 두들겨 패도 좋다. 야화처럼 성술로 신체 강화와 재생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듯하니 다소 거칠게 해도 되겠지.”

=엑……?!=

말하고보니 좋은 생각 같다 여긴 환인은 요구 사항을 추가했다.

“안느도 불러서 같이 대련 하도록 해라.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해서 나중에 알려다오.”

=네, 주인님. 너 따라와.=

=…….=

아영은 살기등등한 이실리테의 뒷모습을 보며 시무룩해졌다.

어쩌지. 대련 형식이라고 했으니 합법적인 구타잖아. 엄청 아플 거 같은데…… 대충 분위기 보니까 대충 맞아주는 척도 안 통할 거 같고…….

……뭐,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 같으니까 됐나! 이 기회에 적기사랑 성기사의 힘이나 가늠해봐야지.

아영은 특유의 긍정적인 마인드로 마음가짐을 바꿔먹고 이실리테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었을 때, 트라프로넨과 만난 환인은 아영을 데려오게 된 과정과 상세한 내막을 들려주며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저 암살자에게 정보를 얻어내더라도 유효한 것은 아닐 겁니다. 기껏 해봤자 집단의 인상착의 정도겠군요. 처우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음. 성제님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는 거 같은데……. 가장 좋은 건 저 암살자도 정신을 차릴 때까지 성제님이 데리고 갔다가 놔주는 거겠지. 죽여봤자 얻을 이득이 없고, 카락스의 암살자들도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들에게 원한을 불태우고 있다니 이독제독이 될 거 같기도 하고.=

“놓아주면 저들이 이쪽에게 우호를 표시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카락스의 암살자는 암살업을 하고 있지만 아무나 막 암살하는 놈들은 아니야. 암살자이면서 어짊과 의로움을 행하려고 한다고 할까? 그게 전부 초대 카락스의 암살자 때문이긴 한데……. 카락스 놈들이 성제님을 노린 건 그 늑대의 어금니 때문인 거잖아?=

아무튼 둘 다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 어떻게든 보답을 하긴 할 거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요즘 카락스의 암살자가 좀 입지가 좁아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더라고.=

“그렇습니까.”

=나사라트의 암살단하고 구주의 독니가 제법 위세를 떨치다보니 자연스레 영향력이 줄어드는 모양새야. 카락스는 암살 말고도 다른 일을 받는 데다 구주의 독니하고 활동 반경이 겹치기도 해서 그렇다는데. 이런 마당에 상급 송곳니를 살려서 돌려보내 주고 차기 어금니도 죽이지 않는다면…… 아무튼 내 생각은 그래.=

“…….”

환인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 들자 트라프로넨은 한차례 눈을 반짝 빛냈다가 씩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뭣하면 저 암살자만 놔주고 아영이라 그랬나? 저 여자는 특급 구속 계약으로 옭아매 버려. 7급 성술사인데다 어금니씩이나 된다고 하니 미궁에서도 제법 요긴하게 쓰일 테니까.=

“그럴까요.”

환인의 담담한 대답에 트라프로넨은 그와 어깨동무를 하며 씩 웃었다.

=말해봐. 성제님도 아영이라는 저 암살자를 데리고 다닐 생각이었지?=

“잘만 다루면 꽤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 어디, 자유로운 7급 성술사가 흔한가? 거기다 체술도 뛰어나니 미궁에서 제 몸도 잘 지킬 테고. 잘해보라고.=

트라프로넨은 그리 말하면서 환인에게 새끼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크크 웃었다.

결과적으로 트라프로넨은 노인이 된 아르겐테아 정찰대 두 명과 포플러 센트 순찰대원 여섯, 그리고 거인들과 함께 영도 귀환길에 올랐다.

=환인 님. 약속입니다.=

“……예. 제가 영도에 방문하는 날, 주술사 당신과 꼭 짝짓기를 하겠습니다.”

=그날이 일찍 찾아오길 기대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주술사는 조율한 내용이 조금 아쉬웠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 외에는 그와 짝짓기를 할 방법이 없었으니까.

이런 결과가 된 데는 서로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붙은 것이 원인이었다.

자신이야 그가 뱃속 깊은 곳까지 직접 들어와 씨앗을 뿌려도 괜찮다. 하지만 그는 절대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

고집이라고 하면 거인족도 만만치 않다.

환인의 거절에 주술사는 고집이 발동했고, 그렇다면 당신이 허락해줄 때까지 따라다니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환인은 직업자가 된 당신이 거인들의 새로운 족장이 되어주길 바라니 영도로 동족들과 함께 가달라고 제안했다.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며 다른 거인들도 눈만 끔뻑일 뿐 나서지 않는 상황.

이때 나서서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 유르파였다.

=주술사님? 자기의 뜻을 그런 식으로 꺾으려는 건 매우 좋지 못한 생각이에요. 그러니 여기서는…….=

현재 소형화는 아직 최적화가 되지 않았다. 다음 영도를 찾는 날까지 당신의 키를 2m까지 줄일 수 있게 연구해놓을 테니, 그렇게 키를 줄인 다음 그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것.

=그러면 자기도 주술사님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이고, 주술사님도 자기와 문제없이 서로 기분 좋은 짝짓기를 할 수 있어요. 그치, 자기?=

“……예.”

=알겠습니다…….=

사실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 해서 그와 짝짓기가 성사될 가능성은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다.

짝짓기는 서로의 합의가 있어야 이루어지는 거니까.

하지만 포기하고 물러서면 가능성은 0%지만, 물러나지 않으면 단 0.1%라도 확률이 생긴다.

그리고 물러서지 않았더니 과연, 짝짓기의 길이 열렸다.

쿠웅…… 쿠웅…… 쿠웅……

환인은 식량을 바리바리 싸든 거인들이 천천히 작아져 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휘잉— 초원의 강한 바람을 몸으로 받아내며 해방감을 느꼈다.

그런 환인의 표정에 곁에 서 있던 백려강이 쿡쿡 웃는다.

=환인 님, 어깨에 짐을 모두 내려놓은 것 같은 표정이세요.=

“그럴 수밖에. 거치적거리던 인간들도 쫓아 보냈고, 주변을 숨 막힐 만큼 가득 채우던 덩치 큰 친구들도 떠났으니까.”

특히 주술사의 마음을 돌리는 데는 정말 애를 먹었다.

처음에는 소형화를 미끼로 어떻게든 회유하려 했었는데 갑자기 주술사가 다가와 짝짓기를 하자며 급발진을 밟는데…….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이야기가 이제 이해되는군.’

주술사의 커다란 목소리에 자꾸만 자신의 이야기가 덮이니 환인도 살짝 짜증이 나버렸던 것.

아무튼 되찾은 평온과 홀가분함이 기껍다.

뻐벅! 퍽, 콰과곽! 쩍.

=아흑……! 잠깐. 뼈, 뼈 맞았어……!=

=누가 뼈로 막으래? 근데 뼈를 분지를 생각이었는데 멀쩡하네. 너 진짜 튼튼하다?=

=히익!=

부웅— 콰곽, 투두둑, 퍼퍽 뻑—!!

=끄약! 바, 방금 머리 박살 날 뻔했다고요?!=

=응. 안 맞았으니까 괜찮아. 이리 와.=

=갸아악……!=

뒤에서 아영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안느의 목소리에 환인은 자신의 옆에서 이제 잘 보이지도 않는 거인의 흔적을 까치발로 살피는 유르파에게 물었다.

“유르파, 일방적 종속 비술 계약을 쓸 수 있습니까.”

=응? 그거야 간단하지. 지금이라면 그것보다 상위 호환인 완전 귀속 비술 계약도 가능해. 저 여자한테 걸려고?=

“예. 도적질도 제법 잘 할 것 같은 무투형 7급 성술사. 멘탈도 뛰어난 편이니 미궁에서 요긴할 것 같지 않습니까.”

=진짜 그러네.=

=환인 님이 쭉 찾으시던 마지막 회복 역할의 동료네요?=

“동료는 모르겠고, 내 목숨을 노리려 한 죗값은 몸으로 직접 갚으라 한다면…….”

=이 근육 도깨비! 날 죽일 셈이지!?=

=……!=

꽝!

=껙.=

환인의 시선이 열받은 안느의 워 해머에 골통을 얻어맞아 기절하는 아영에게 향했다.

저 여자의 성격상 절대 모르는 척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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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이걸로 파티가 완성되었습니다!

"암살자년 골통 안쪼개는거 선넘네 ㄹㅇㅋㅋ"

...같은 감상을 느끼시겠지만 혼수용품으로 좋은거 가져올 예정이니 우리 처녀 암살성직자 아영이 예쁘게 봐주세용....;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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