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 카락스의 어금니
…쿠구구구구구구…….
‘시발…… 시발시발시발.’
하늘에 떠오른 또 하나의 태양이 대지를 진동시키는 가운데 카락스의 암살자 차기 어금니, 아영牙影은 수풀 속에 납작 엎드려 속으로 시발과 망했다를 주문처럼 반복 중이었다.
성제 암살 의뢰.
사안의 중대성으로 관측자 역할을 맡아 성제를 관측 중이던 그녀는 처음부터 이 의뢰를 받지 말아야 한다고 이빨들에게 주장했었다.
성제가 누구인가. 알류겔의 해왕과 인연을 맺었고 영산의 대성녀가 비호하며 라드세아의 현친왕과 인맥을 맺은 인물이다.
그보다 급이 떨어지지만, 라드세아 중부와 남부의 도시 세 곳도 연합해 그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할 거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들려오는 소문만으로도 이 시대의 영웅은 확정이며, 조금 더 나아간다면 대영웅의 호칭까지 거머쥘 인물이라 판단되는 사람이다.
소문을 거짓으로 치부하기에는 전설상의 대영웅 이실리테=아름=위르트의 직업인 검희를 계승한 영혼 기사를 곁에 두었고 땅신 교단의 근육 도깨비라 불리던 성투사까지 거두었다.
어디를 가든 장군급은 충분히 될 사람들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인데 그런 인간이 평범한 인물일까?
더욱이 차원 방랑자라는 소문까지 있는 판국에 유일 직업자라는 풍문까지 돌고 있지 않나.
하지만 이빨들은 엘위드리스 가문 원로들의 암살 의뢰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전전대 어금니를 크게 도와주었던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 하나가 늑대의 어금니, 그것을 내밀며 요구해온 것이다.
늑대의 어금니.
카락스의 암살자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큰 은혜를 입었을 때 상대에게 주는 은혜 갚기용의 증표.
초대가 남긴 신념의 조목에 따라 늑대의 어금니가 돌아오면 그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여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카락스의 암살자라면 정식 암살단원이 될 때 규율의 이빨 앞에서 계약으로 맹세를 한다.
이 때문에 카락스의 암살자는 과거에도 수차례,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의 암살 의뢰를 받아 명맥이 끊길 뻔 했었다.
7번째 늑대의 어금니로 발생한 의뢰에 당시 어금니가 사망하고 고위 단원 3/4이 은퇴하거나 사망한 사건 이후 늑대의 어금니를 배포하는 일은 극도로 줄었지만…… 아무튼.
=…….=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열기가 멈추고 대기의 진동도 멎었을 때, 아영은 다시 푸른색으로 돌아온 하늘을 확인했다.
이어서 침을 꼴깍 삼키곤 슬금슬금, 포복 상태에서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러운 대폭발이었지만, 아영은 저 대폭발이 성제가 일으킨 거라고 확신했다.
거인들의 장막에 가려져 실제로 본 것은 아니지만, 저런 전술급 술법을 쓸 사람이 성제 말고 누가 있다고.
‘저만한 힘이 있다면 당연히 색적 기술도 무시무시할 테고 그 범위도…….’
역시 이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은 자살행위다.
한 10km 바깥까지 멀어진 뒤에 작은 동물을 부리면서 지역순행기관장의 이동을 포착하는 쪽으로 하자. 아니면 순례자의 쉼터 근방에서 잠복해도 되고.
그렇게 수십 미터 정도 거꾸로 물러났다가 야트막한 구릉에 거인들의 모습이 감춰지자마자 상체를 일으켰던 아영은…….
=……!?=
자그마한 녹색 점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목격하자마자 악,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반대쪽으로 줄달음쳤다.
수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비전의 신법과 보법이 그녀의 호리호리한 몸에서 극성으로 펼쳐진다.
전력을 다한 전개 덕분에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아영은 속으로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 망할 대평원! 더럽게 넓어! 숨을 데가 없어!!’
녹색 점, 그건 틀림없이 성제의 탈것인 녹색 쿠에다.
그게 갑자기 날아올랐단 것은 무슨 뜻인가. 자신이 발각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어떻게 발각됐는지는 둘째치고. 만약 상대가 어중간했다면…… 하얀 나뭇잎 무사단의 그 남자 정도였다면 은신술을 극한으로 펼쳐 시체처럼 땅과 동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제에게는 미친 정령술사가 붙어있다. 게다가 본인도 영성급 영혼사이니 영혼을 부려 자신을 찾아낼 수도 있는 일.
눈을 질끈 감았던 아영은 가슴팍을 퍽, 때리며 소리쳤다.
=큰 이빨! 큰 이빨!! 연락받아요. 좀! 큰일 났다고!!=
[……무슨 일인가.]
=들켰어! 성제한테 들켰어!!=
[……!]
쇄애애액— 뭔가 공기가 커다랗게 찢어지면 날듯한 소리가 뒤쪽에서 점차 커진다.
온몸에서 닭살이 솟는 끔찍한 느낌에 아영은 이를 악물었다가 씹어 내뱉듯이 소리쳤다.
=미안! 나, 나 여기 까진 거 같으니까! 이 시간부로 모든 연락 수단을 파기하고 새 어금니를 찾아요! 복수 따윈 생각하지 마! 그거 미친 짓이야!=
[포기하지 마라. 너는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자질의…….]
=누가 그걸 몰라!? 그게 안 되니까—=
꽈과과과광—!!!
…………이이이이잉—
아주 짧은 순간 눈앞이 하얘지며 정신을 잃었던 아영은 귀를 콱 메우는 이명 속에서 쿨럭,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끈적한 피가 복면에 들러붙으며 숨쉬기가 조금 곤란해진다.
어…… 뭐 였…지……?
뒤늦게 자신이 쓰러져있고 자신이 달려가려던 방향이 엉망진창으로 짓이겨져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리는 흙더미와 풀 쪼가리 등이 머리 위로, 몸 위로 쏟아진다.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그것을 맞으며 아영은 ‘조졌네.’하고 생각했다.
이래 봬도 자신은 7급의 상급 성술사로 성력을 신체에 동화시켜 소모해가며 7급 근접 전투 직업자만큼의 신체 내구성을 상시 발휘하고 있다.
신체 재생력 또한 성술로 끌어올려 재생 특화 직업자에 맞먹는 수준.
이 신체 스펙에 더해 20년에 걸친 암살 훈련으로 기감과 육감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며 체술 또한 동급 전투사와 싸워도 박빙이라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나?’
뭐에 당한 건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헐떡이면서 간신히 일어난 아영은 자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늘에서 천천히 하강하는 거대한 녹색 쿠에를 바라보았다.
=…….=
역광 탓에 모습도 잘 안 보이지만, 저 쿠에를 타고 있을 성제는 자신을 향해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암살당할 뻔했으니까 분노라던가 격노라던가 증오라던가 음습하고 찐득한 살기를 드러낼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
저렇게나 감정을 철저하게 다스리다니.
‘진짜 동종업계 종사자가 아닌 게 더 이상한데.’
아영은 헤헤…… 힘없이 웃으며 벌벌 떨리는 팔을 간신히 들어 항복 의사를 드러냈다.
=하, 항복임다…….=
=하, 항복임다.=
“…….”
환인은 두 팔을 들고 벌벌 떨며 항복을 선언한 암살자를 응시했다.
영혼 폭발에 휘말리면 영혼에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간다.
0중첩에 위력을 많이 낮춘 영혼 폭발이라지만 그건 육체에 끼치는 상해의 경중과 관련되어있지, 영혼에 들어가는 피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비록 정통으로 맞지 않았고 폭발에 반쯤 휘말린 형태긴 했지만, 그 정도라 해도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릴텐데 저 암살자, 복면에 후드를 쓴 암살자는 제법 멀쩡했다.
정신을 잃은 것도 0.5초 남짓, 금방 정신 차리고는 이쪽과 전력 차이를 대번에 간파하곤 항복을 선언할 만큼 정신도 또렷하다.
“…….”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앞뒤 재지 않고 전력으로 도주하는 모습에 처음 잡았던 암살자와 같은 조라는 걸 확신한 환인이었다.
잡아서 영혼에 대고 묻든 아니면 갖은 고문으로 심문하든 가만둘 생각이 없던 환인이었는데…….
‘미안! 나, 나 여기 까진 거 같으니까! 이 시간부로 모든 연락 수단을 파기하고 새 어금니를 찾아요! 복수 따윈 생각하지 마! 그거 미친 짓이야!’
환연이 바람 정령으로 실어 날라준 암살자의 외침에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단순한 암살자는 아니군.’
목소리와 어감, 어조 등에서 상대방의 심리를 읽고 파악하는 능력이 뛰어난 환인은 저 암살자가 그저 살육 기계만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암살자가 마지막에 소리친 것은 암살 집단 본거지와 한 통신일 거다.
마지막일수도 있는 통신에서 자신을 포기하고 집단의 안전과 평화를 찾으라고 소리치다니, 평범한 살인귀나 범죄자들이 할만한 행동이 아니다.
게다가 모든 연락 수단을 파기하라고 하였으니 이제 와서 저 암살자를 고문하고 죽여 영혼에 대고 묻는다 해도 카락스의 암살자 본거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겠지.
본거지는 꼬리를 끊고 잠적하기 위해 모든 증거를 인멸하며 바삐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흠…….”
「환인. 일단 팔다리부터 잘라버릴까?」
“아직. 기다려라.”
환인의 시선이 헐떡이며 이따금 떠는 암살자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체형을 보면 여자. 아우라는 소용돌이치는 희미한 안개 같은 형태로 그 짙음을 보면 7급 정도 되는 성술사다.
어금니라는 단어는 카락스의 암살자들, 그중에서 수장에 가까운 자들이 쓰는 일종의 계승 암호명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저 여자는 카락스의 암살자 내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갖췄겠지.
‘엽사 직업 계통으로 각성한 사람이 아니라 성술사를 암살자로 육성하다니.’
환인은 잠깐 어느 쪽이 이득이 될지 저울질하다가 눈 아래를 전부 가리는 복면을 내리곤 =으엑…….= 검은 피를 주룩 게워내는 여자 암살자의 안색을 살폈다.
암살자가 아니라 어느 귀족 가문의 영애처럼 곱상하고 아름다운 얼굴. 하지만 안색이 시퍼렇고 게워낸 피가 검은 것이 내상을 크게 입은 모양새다.
그러나 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겐테아 여자 정찰대원의 영혼을 씌웠다.
=흐그읏.=
그런데 놀랍게도 빙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신의 몸 안으로 영혼이 들어오려 하는 걸 깨달은 듯, 정신력으로 빙의에 저항하는 것이다.
‘방금 영혼 폭발에서도 영혼의 타격이 적었던 게…….’
실제 영혼 빙의에 저항하는 걸 처음 본 환인은 몹시 흥미로워하다가 눈을 차갑게 빛내며 협박했다.
“정말 항복이라면 영혼을 받아들여라.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가진 인맥과 연줄을 모두 동원해 카락스의 암살자를 저세상 끝까지 추적해서 전부 죽여버리겠다.”
=……!=
내가 카락스의 암살자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영혼을 통해 정보를 캐내고 내게 빚을 진 여타 국가에 카락스의 암살자를 추적해달란 요청을 한다면 어떻게 될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
당황했던 아영은 꾸웩, 다시 한번 피를 게워내고는 작게 헐떡이며 대답했다.
=으에…… 저, 저항 안 할게요……. 쿨럭.=
저항을 포기한 직후 정수리를 통해 무형의 무언가가 몸 안으로 쑤욱 들어오는 불가사의한 감각이 그녀의 몸을 잠식한다.
아영은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뭐야 이거, 몸이 안 움직여……!’
하지만 이 떨림도 반사적인 반응이고, 자기 뜻대로는 눈꺼풀조차 움직여지지 않는다.
당황하고 있는 아영의 귀로 환인의 명령이 날아들었다.
“일단 몇 가지 확인하기 전에…… 우선 입고 있는 것을 전부 벗어라.”
‘벗어? 입도 뻥긋 못하겠는데 어떻게…… 에에엑!? 모, 몸이 멋대로 움직인다!?’
환인의 지시가 떨어지자 아영의 몸에 들어간 정찰대원은 빙의라는 경험을 신기해하며 몸에 걸친 타이트한 녹색 가죽 갑옷과 외투, 바지 등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으면서 후두둑, 투둑 떨어지는 온갖 암살 도구들.
한 뼘 길이의 장침부터 시작해서 수 자루의 단검과 줄톱, 뾰족한 송곳에 너클 더스터 형태의 접이식 클러, 소형 바람총 등 종류도 다양하다.
숨겨진 장소도 제멋대로였다. 벨트 안쪽은 흔하다. 허벅지 한쪽에 맨 가터벨트 안쪽에도 있고 옆구리, 등어깨, 허리 뒤, 신발 밑창, 라벤더색 머리카락 안에서도 나오고 목 띠에도 철사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그렇게 알몸이 된 아영의 몸을 따라 환인의 시선이 이리저리 향한다.
회색에 가까운 라벤더색의 머리카락 사이로 길게 뻗은 뾰족한 귀.
근육이 잘 잡히지 않는 플뢰족임에도 식스팩이 살짝 드러나는 복근과 근육이 뚜렷한 팔뚝과 허벅지는 그녀가 얼마나 혹독하게 단련했는지를 보여준다.
잔 상처는 성술로 치료했는지 살결이 뽀얗지만, 손바닥에는 온갖 무기를 사용한 것처럼 굳은살이 안 박힌 곳이 없다.
그런데 영혼이 유달리 푸르다. 푸른 이실리테나 안느와 비교해도 족히 2배에 가깝다.
영혼의 눈으로 추위 때문인지 약간 소름이 돋은 하얀 피부와 푸릉푸릉 떨리는 적당한 가슴을 살펴 자살 도구는 없는지 마지막으로 훑은 환인은…….
=…….=
아직도 파리한 안색의 암살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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