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 시주르 대평원
거인들이 만든 다중 원형의 장막을 벗어나 외곽으로 향할수록 고성이 또렷해진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냐! 그래서 지금 성제님을 뵙기 위해 왔다고 아까부터 말하고 있잖나!!=
=몰라!! 작은 영혼사님이 아무나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 아무나가 누구냐고!=
=아무나다!!=
왁왁하는 소란이 이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프랑스어와 흡사한 사비족의 언어가 들려온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무래도 상급 전사인 듯 거인을 향해 연신 노호성을 터트리고 있지만, 거인 중에서도 유달리 순박한 거인은 아무나 들여보내지 말란 자신의 지시를 매우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상대 사절 측 인사에게 말재간이 있었다면, 아니 상대와 눈높이를 맞춘다는 예의범절이 있었다면 거인을 설득해 ‘아무나’가 아닌 ‘성제에게 중요한 용무가 있는 손님’으로서 지나갈 수 있었겠지만.
=이런 젠장!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머리로 어떻게 방문자를 구분한다는 거냐고!=
=안 한다!!=
=안 하는 거냐!?=
저런 놈들은 절대 통과하지 못하는 거지.
=어, 안녕.=
환인은 일광욕하듯이 느긋하게 앉아있는 여자 거인의 곁을 지나가다 그녀의 인사에 잠깐 걸음을 멈추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바깥은 어떻습니까.”
=저게 진짜 태양이라는 거지? 몸이 따끈따끈해. 눈도 부시고.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를 저 안에서 데리고 나와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고마워하는 마음이 가득한 인사에 순수한 미소를 지은 것도 잠시. 다시 심기를 거스르는 고성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환인은 까닭 없이 흘러나오는 웃음에 피식했다.
거인들에게 사절 같은 자들은 위협거리도 아니란 건가.
어제 사절들의 무력 수준은 모두 파악했다.
각 사절의 대표들은 확실히 강하다. 메리아놀의 8급 전사 승급직인 크샤나리, 투사 승급직인 다루그는 홀로 거인과 상대할 정도이며 이실리테와 안느하고 비교해도 절대 약한 편이 아니다.
벨티칼에서 온 최고 전사 청과 만엽도 강해 보이지만 메리아놀 측과 비교하면 위상력의 양과 자세도 좀 떨어진다.
라드세아 측 사절은 무력보단 인맥에 호소하듯 호천명의 수석 제자 같은 인물이 찾아왔다. 그녀는 몸에 지닌 무력보다 지혜에 치중된 인물이었다.
작게 고갤 끄덕인 환인의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각국의 무력 수준이 도표로 그려진다.
‘대충 세 곳 국가의 무력 수준이 짐작되는군.’
아르겐테아 정찰대 영혼을 통해 그들이 각국 내에서도 상위 0.5%에 드는 실력자란 사실을 알아냈다.
이 시대의 외적 대응 방침과 그간 여행하며 들러 확인한 도시의 방위 체계 등을 종합해보면 대충 각이 나온다.
‘지금의 나는 각국 무력 상위 0.1%에 들겠지.’
자신이 지닌 능력만으로도 그 정도다. 영도라는 배경, 성제라는 능력, 거인들의 친구라는 타이틀까지. 전부 다 하면 도시급 무력이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내가 말도 안 되는 행패를 부리지 않는 한, 그들은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환인은 왁왁하는 소리가 지척이 되었을 때, 살기로 착각될법한 투기를 가감 없이 내뿜으며 거인의 옆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멍청한 자식! 안 할 거면 저리 비켜! 우리는 성제님께 볼일이 있으니…… 까…….=
그리고 계속 나대는 진흙색의 도마뱀 인간에게 언어로 형성한 싸늘한 비수를 날렸다.
“넌 누구이길래 본인의 친구에게 막돼먹은 말을 내뱉는 거지.”
=…어? 어어…….=
성제가 설마 갑자기 나타날 줄 몰랐던 벨티칼의 상급 전사는 그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쏟아지는 막대한 투기에 꼬리 관절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꽁꽁 얼어버렸다.
한겨울에 보온 망토 없이 맨몸으로 들판에 나온 것처럼 비늘 사이사이가 바짝 마른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며 통증을 일으키고 눈앞이 핑글 돌며 현기증이 일어난다.
환인은 공황 상태에 빠져 벌벌 떠는 사비족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저 자도 5급에 이르는 직업자다. 그런데 고작 투기에 얼어버린 건가.
잠깐 자신의 내면과 상태를 살핀 환인은 심핵력과 영기가 자신의 투기에 반응해 공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활용법도 있군.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환인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차원 이동을 바라는 그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모이고 있는 심핵력. 거기에 영성 다섯 명분의 영기가 일으킨 공명은 초월자로 넘어가기 위한 기초 단계, 가진 에너지의 합일合一 과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아무튼.’
투기를 갈무리하긴커녕 도마뱀 인간뿐만 아니라 사비족 사절의 뒤로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모여있는 3국의 사절들을 향해 광역으로 투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자신은 당신들의 눈치를 볼 입장도 아니며 눈치를 살필 생각도 없다는 의지의 발현.
그리고 자신의 암살 시도에 당신들의 탓도 있지 않느냐는 무언의 시위.
메리아놀과 라드세아 사절 대표들은 그 뜻을 읽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간밤에 본국과 통신 연결을 한 그들이 받은 지시는 하나였다.
무슨 수를 써서든 성제와 긴밀한 관계를 쌓아 차후 다시 만날 약속을 받아내거나, 그곳에서 성제에게 협조 승낙을 받아내라는 것.
그런데 그들의 눈에 환인은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기분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간밤에 좀 쉬며 이성을 되찾고 분노를 연마했는지 어제보다 더욱 선명하고 날카로운 투기를 뿌리고 있다.
‘아우 진짜. 저 멍청한 도마뱀 자식들이 또 성제님을 화나게 했어……!’
‘어제도 느꼈지만, 갓 약관을 넘긴 듯한 나이로 어찌 저 정도 성취를 이루었는가. 차원 방랑자들은 정말 개인 간에 잠재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는군.’
‘떠그럴. 좆됐구만. 돌아가면 된통 까이겠어.’
‘아니 씹……. 대족장님은 나한테 악감정이라도 있나? 왜 이런 일을 나한테 시킨 거야…!’
각 사절 대표가 그런 생각을 속으로 토로하고 있을 때, 환인의 입에서 담담하기 짝이 없는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둘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들을 막느라 고생했습니다. 이런 일을 부탁해서 미안합니다.”
=아니다!! 언제든지 부탁해라!!=
가슴을 쿵쿵 치며 헤헤 웃는 거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한 환인은 그를 동족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려보냈다.
그만이 아니라 안쪽을 지키듯이 나란히 앉아있던 다른 거인들도 족장과 주술사가 있는 곳으로 보낸 뒤 환인은 망했다는 투가 역력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그렇게 멀리 떨어져 계시지 말고 모여주십시오.”
환인의 조곤조곤한 이야기에 라드세아 측과 메리아놀 측도 잠깐 멈칫했다가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겉보기만큼 화는 나지 않은 걸까?
그의 앞에 모여있던 벨티칼 측의 청은 날선 투기와 다르게 조곤조곤한 말투에서 약간의 용기를 얻어 입을 열었다.
=크음. 저, 성제님? 그 건에 대해서 벨티칼 어족이 드릴 말씀…….=
“그 말은 지금 다른 사절을 대표해 벨티칼 사절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겠다는 뜻으로 봐도 되겠습니까.”
어? 잠깐만, 책임? 무슨 책임??
……어제 암살 사건의 책임?!
=엑! 아니 우리가 왜요?!=
“그럼 입 닥쳐.”
평온한 어조에서 갑자기 반전된 거칠고 사납기 짝이 없는 말투.
한 단계 옥타브가 내려갔을 뿐이지만 체감은 영하로 내려간 듯한 냉기에 벨티칼의 최고 전사, 청은 입도 혼이 옭아매진 것처럼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그리고 냉기의 창을 머금은 것처럼 쏟아지는 매도와 비난.
“신분을 숨기고 성불행을 비밀리에 해나가는 본인 일행을 추격해온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아침부터 괴성을 지르는 거지. 예의라는 단어는 그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은 건가.”
=…….=
환인의 날선 목소리가 굳어있던 다른 사절들에게도 쏟아진다.
“당신들도 마찬가지. 염치를 알고는 있나. 하긴, 애초에 사람이 염치가 있었다면 암살 시도가 벌어졌을 때 히스론드의 플라비우스 측처럼 훗날을 고대하며 초대장 한 장 남기고 물러섰겠지.”
=…….=
=…….=
“본인이 암살당할 뻔한 것을 목격한 주제에, 그런 암살자가 활동할 상황을 만드는데 일조한 주제에 잘도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며 사교를 주절거리는군. 그 뻔뻔함은 누구에게서 배웠지.”
머엉…….
각국에서 상위 1%안에 드는 고귀한 신분으로 언제 이런 날 선 매도와 비난을 받아보았을까.
“지금 당신들이 보여주는 행위는 이런 거다. ‘네가 암살당할 뻔 한 것은 네 일이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들어라’.”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지 다소 억울함을 드러내며 입술을 달싹거리는 라드세아 측 사절 대표를 향해 환인은 가일층 투기를 쏟아내며 입을 틀어막는다.
“아니라고 하고 싶은가. 미궁에서 막 빠져나와 암살당할뻔한 본인에게 한 말이 뭐였는지는 기억하고 있나. 그런 꼴을 보여놓고서 우호적이고 양호한 상호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건가.”
=…….=
=…….=
=…….=
경멸하는 환인의 표정에도 그들은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의 말에서 틀린 것은 없었으니까.
그런 것도 있고 환인의 투기가 너무 매서운 탓도 있었으며…….
쿵, 쿠웅. 쿠궁. 쿵…….
어느샌가 거인족의 족장이라는 자와 주술사라는 여자, 그리고 유별나게 강인한 기세를 풍기는 거인들이 하나둘, 환인의 등 뒤에 늘어서고 있었기 때문.
그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 기사인 적기사와 성기사도 성제를 닮은 살기와 흡사한 투기를 아낌없이 뿌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트라프로넨 지역순행기관장까지 40의 영혼 기사들과 서 있었다.
저 정도면 어지간한 도시 따윈 반나절이면 함락시킬 수 있는 전력이다. 이쪽이 전원 힘을 합치더라도 5분이나 버틸 수 있을까.
“유연 전쟁 학사.”
=네, 네?=
“호천명 친왕께 연락드려 지금 상황을 알고 있느냐고, 본인이 어떤 행동을 할 것 같으냐고 물으면 어떤 대답이 나올 거라 생각하나.”
=어, 저…… 그…….=
“뻔하지. 친왕이 아닌 성궁 직속 외교부가 연락을 가로채 선민의식 가득한 지시를 내리겠지. 상황이 어떻든 간에 결과물을 내놓으라 이따위 것들.”
어, 어제 받은 지시를 어떻게?!
진심으로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조인족 여자에게 진심으로 하찮다는 표정을 보였던 환인은 이어서 멍청한 표정의 청과 침울한 만엽 최고 전사에게 비수를 꽂았다.
“현 상황이 어떠한지 깨달을 채신머리조차 남아있지 않아 아침부터 거인들에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당신들.”
=어…….=
“아드네빌라는 지금 내가 보고 듣는 것과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다. 보아하니 아드네빌라에게 상위 종족적인 선망과 흠모를 가진듯한데, 그녀의 고고한 성미라면 당신들의 거만하고 몰상식한데다 무법한 태도를 뭐라고 할 것 같은가.”
=…….=
“멋이라곤 새 모이만큼도 없는 당신들의 작태에 틀림없이 경멸을 드러내겠지.”
비늘이 붉어질 정도로 수치심에 물드는 사비족에게서 시선을 돌린 환인은 우묵한 표정의 크샤나리에게 사나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크샤나리 경. 당신에게는 실망했습니다. 기회를 드렸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하셨더군요.”
=……할 말이 없네.=
“게다가, 메리아놀에서의 과거 안느의 관계를 두고 이용하려는 것을 보았습니다.”
=…….=
환인의 목소리와 어조에 진심이 담기기 시작한다.
“미리 경고해두겠습니다. 안느는 모국에서 배척당한 상처가 아직 가슴에 남은 여자입니다. 그런 그녀의 아픔을 헤집다 못해 그걸 이용하려 든다면, 그때는…….”
환인은 2배로 늘어난 심핵력의 위력을 확인할 겸. 여섯 청옥을 모아 영혼 폭발 구슬로 변환, 영기에 심핵력까지 절반가량 부어 넣었다.
그러자 다른 자들의 눈에도 그것이 보이게 된 것은 물론, 가시 같은 날카로운 파동을 펑펑 뿌려대는 형태로 변하는 폭발 구슬.
솔직히 이 변화에는 환인도 놀랐지만, 겉으로는 0.1mg도 드러내지 않고 저 하늘 높은 곳까지 그것을 날렸다.
번개 같은 속도로 삽시간에 하늘의 구름을 뚫고 시야에서 벗어나는 폭발 구슬.
……구구구구구구……!
잠시 후 핵에 버금가는 규모의 폭발이 하늘에서 벌어지며 주변의 아침 구름을 깡그리 증발시켜나간다.
원형으로 거칠게 물결치며 밀려나는 구름.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두 번째 태양.
땅으로 피부가 욱신거릴 정도의 기파와 열기가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은 얼굴에 기괴한 음영을 드리운 채로 경악에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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