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 시주르 대평원
* * * *
[그런가…….]
=안 됩니다. 그냥 안되는 거예요. 까마득하게 멀리 있었는데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고요. 아직도 소름이 다 안 가라앉았어요.=
[정말 불가능한가.]
=일단…… 첫 번째로 감이 말도 안 되게 뛰어납니다. 반사신경도 어마어마해요. 공격하자마자 능력인지 뭔지 방패를 십수 겹 꺼내 막는데, 영혼을 먹어 치우는 악령탄으로도 고작 세 장을 부수는 데 그쳤다고요. 악령을 성술로 잡아서 정제한 그 악령탄이요.=
[흠…….]
=그 방어력은 둘째치고 대응을 정말 찰나에 해낼 만큼 술법 발동과 공간 인식 능력이 굉장해요. 뒤에서 습격을 가해도 실패할 확률이 70% 이상입니다. 성공해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
=게다가 대상이 애지중지하는 작은 요정 같은 것의 정령력이 미친 수준이에요. 최소 반경 500m, 최대 반경 1,500m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500m 바깥까지는 어떻게 다가가도…… 500m 안쪽으로 들어가면 99% 발각됩니다. 그 1%를 뚫고 들어가더라도 거인이 문제인 게, 덩치는 산만하게 기감이 죽여주게 예리합니다. 발밑에 지나가는 개미도 눈치채는 수준이라고요.=
[……음.]
=결론적으로 대상은 착하고 순해 빠진 영혼사님 같은 게 아님다. 오히려 우리하고 비슷한 부류죠. 그냥 포기하는 게 정답입니다. 3km 떨어진 이곳도 위험하다고 제 감이 징징 울리고 있어요. 자릴 뜨고 싶은걸 억지로 참고 있다고요.=
[그래도 하라고 한다면 어쩌겠나.]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지금까지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머어어얼리 도망가는 수밖에.=
[후우……. 알았다.]
=어? 저 도망가요?=
[이런 식으로 다음 세대를 잃을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후속 처리는 필요하다.]
=옙. 걱정 안 해도 영혼술에 당해서인지 넋이 나가버려 취조받을 상태가 아니니까요. 영성님이 복귀하는 길에 틈을 보면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보다…… 보복이 필요할 거 같은데요? 그곳이 제공한 정보가 전혀 안 맞잖아요.=
[그쪽은 추진 중이니 임무를 마친 뒤 돌아와서 확인하도록. 그리고…… 대상에게 신원을 절대 들키지 마라. 이 대화록으로 회의가 진행될 텐데 틀림없이 개입엄금, 간섭불가 단계가 내려질 테니까. 대상과 얽힐 일을 만들어선 안 된다.]
=알고 있슴다. 저도 죽기 싫으니까 조심할게요.=
* * * *
주술사의 몸에서 아우라가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이른 새벽 즈음이었다.
거인들은 주술사의 몸에서 일어나는 이변에 당황해서 모여들었지만, 환인의 설명을 듣고는 안심하고 다시 흩어졌고 환인도 주술사가 정신을 차리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10명은 누울 수 있는 침대 한복판에 환인이 눕자 백려강이 외투를 벗고 얇은 네글리제 차림으로 환인의 곁에 다가오며 묻는다.
=환인 님. 주술사님을 안 지켜봐도 괜찮을까요?=
“중핵은 그녀의 몸 안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중핵과의 싸움으로 영혼이 지쳐 잠든 상태이니 깨어나려면 몇 시간은 더 지나야겠지. 그보다…….”
환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양반다리로 앉아있던 안느가 머리를 긁적이려다 이실리테의 품위 없다는 지적을 떠올리곤 사타구니에 손을 모으며 대답했다.
=율이 언니하고 그 아우라에 관해서 이야기 나눠봤는데 언니도 모른다네. 처음 보는 아우라라고 했어. 물론 나도 모르고.=
“트라프로넨 영성님과 그의 기사들도 모른다 했으니 꽤 희귀한 직업일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거인족의 유일 직업일 가능성도 있겠고.”
=유일 직업이 그렇게 쉽게 나타나는 게 아닌데 거인족인 것도 그렇고 도령이 그리 말하니까 또 혹시 하게 되네.=
“됐다. 나머진 날이 밝은 뒤에 하기로 하지.”
환인이 그리 결정을 내리며 그녀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리자 누구는 머뭇머뭇, 누구는 서슴없이, 누구는 수줍어하고 누구는 기뻐하며 그의 품에 안겨든다.
고양이가 골골거리듯 그의 팔과 옆구리에 안겨있기를 잠시, 순식간에 잠에 빠져드는 여자친구들의 모습에 환인은 이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늘 마지막 섹스 차례인 여자친구하고만 잠들다 이렇게 모두와 함께 있으니 감각이 색다르다고 할까.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이런 시간을 가져도 나쁘지 않겠군.’
환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누워있다가 여자친구들이 모두 잠든 것을 확인, 수거해놓았던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영혼 구슬을 꺼내 영체화 시켰다.
피로는 풀렸고 잠도 달아났다. 하릴없이 누워있기보단 이 틈에 몇 가지 일을 처리해두는 게 시간을 아끼는 일이겠지.
「어떻게…… 이런일이…….」
「아아…….」
「이리되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불려 나온 영혼은 여섯.
정령근과 위상전이 파괴되어 삽시간에 늙어버렸지만, 늙어버린 지 얼마 안 되어 환인에게 목이 떨어져서 생전 젊었을 적의 모습인 남녀 영혼이다.
아직 살아있는 둘은 취조받은 뒤 사형당하면 몸과 영혼의 괴리가 줄어들며 영혼도 늙은이가 되어버리겠지.
그런 것보다, 전원 푸른색 영혼인 걸 보며 환인은 눈을 차분히 빛냈다.
‘플뢰족에는 푸른 영혼이 많은 건가.’
그간 죽인 강도나 도적은 적지 않은 편이었고 그중에는 직업자도 있었지만, 그들의 혼은 거의 전원이 회백색이었다.
파르히스트에서 죽였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조인족 여자도 고등급이면서 회백색이었고.
그걸 생각해보면 플뢰족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크샤나리와 다루그가 데리고 왔던 다섯 명의 혼도 푸른색이었으니.
환인은 잠든 여자친구들 틈에서 빠져나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뒤 여섯 영혼을 향해 강제력을 발했다.
‘꿇어라.’
「큭…….」
「흐윽…….」
환인의 강제력에 어두운 표정과 암울한 얼굴로 무릎 꿇는 남자 둘, 여자 넷의 영혼들.
성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알몸의 여섯을 앞에 두고도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눈으로 환인은 그들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내밀었다.
‘비록 네놈들이 날 죽이려 했다지만, 나는 영혼사로서 최소한의 선택지는 주겠다.’
하나는 자신과 계약해 청옥으로서 자신의 도구가 되라는 것. 기간은 최대, 자신이 죽는 그 날까지.
다른 하나는 이대로 영혼 화살에 꿰뚫려 소멸하는 것.
「그건 선택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억울한 듯이 대답하는 남자 플뢰의 영혼을 향해 환인은 얼음창 같은 말로 그를 꿰뚫었다.
‘그럼 네놈들은 어떤 선택을 했기에 날 죽이러 온 거냐. 현시점에서 나는 엘위드리스 가문에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
환인의 반문에 남자 플뢰 영혼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영혼 구슬이 된 채로 환인의 혼고 속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은 덕에 전말을 전부 알게 되었다.
자신들은 원로에게 속았다. 성제는 까닭 없이 가문을 멸할 악적이 아니었다. 가문의 진정한 적은 원로원이었던 거다.
「죄송합니다……. 호브만도 못한 아둔함에 성제님께…….」
뒤늦게 그걸 상기해낸 남자 플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사죄했다.
다른 자들도 그런 남자를 따라 알몸으로 이마를 땅에 대고 용서를 빈다.
환인은 이들의 성향을 한눈에 파악했다.
좋게 말하면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이다.
지구의 인터넷이라는 독에 물들어 이기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성향만 발달한 게 아닌, 폐쇄되어 정보 교류가 극히 제한된 사회에서 어른들이 이용하기 편한 성격으로 자라난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
나쁘게 말하면 주어진 정보의 옳고 그름을 자기 머리로 판단하지 않고 그저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멍청한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환인은 흔히 말하는 알몸 도게자 차림의 여자와 남자 플뢰들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신념도 어떠한 신념이냐에 따라 다르다. 귀에 들어온다고 그것을 전부 진실로 믿는 자가 신념을 가지면 그것만큼 주변에 불행을 뿌리는 일은 없겠지. 네놈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생각 없이, 줏대 없이 남이 하는 말의 진실과 거짓을 깨닫지도 못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강요하는 머저리들.’
「…….」
「…….」
‘선택해라. 내 도구로서 세상을 경험하다 때가 되어 신의 정원으로 오를지, 어리석음을 끌어안고 영혼의 티끌조차 남기지 못한 채 소멸할지.’
「……성제님께 봉사하며 참회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성제님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겠습니다…….」
환인은 여섯 모두 반발 없이 수긍하는 모습에 눈을 차갑게 빛내며 손을 뻗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혼을 상대로 이것저것 실험해본 환인은 청옥 상태의 혼에 대해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정령력을 쓰지 못하는 인조 정령이군.’
흑옥, 들개 전사단은 악령화 되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지시를 내리면 알아듣고 움직이긴 하지만 지성이 꽤 떨어졌는지 연상과 자율성이 필요한 임무에는 극도로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영혼술인 화살, 방패, 폭발 등에만 쓰는 편인데 그마저도 효과는 부패와 부식.
위력도 대단히 높다 보니 제압에도 쓰기 어려워 활용도가 낮은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청옥으로 변한 아르겐테아 정찰대는 달랐다.
「성제님. 반경 2km 정찰 결과 살아 움직이는 동물의 수는…… 종류는…….」
「현재 지점에서 동쪽으로 1082m 지점에 메리아놀 협의회 사절단 일행 46명이 야영 중입니다. 남자 25명, 여자 21명으로 직업자의 수는…….」
「벨티칼 사절단은 춥다, 힘들다를 연발하며 낮은 기온에 지극히 취약한 면모를 보이고 있습니다. 현 자연환경에 불만을 느끼고 있으나 성제님을 향한 불손한 언행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성제님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하였습니다.」
대충 지시만 내리면 ‘알아서’ 정보를 수집해 돌아오는 것.
‘개인적인 사견이 들어가있지만 그 점은 감안해서 걸러야겠지.’
그렇다 해도 유용한 것들이다.
=여, 성제님. 간밤에 청옥 계약을 끝마쳤나 보더군?=
같은 영혼사가 아니라면 정령들에게도 들키지 않는 완벽한 정찰대이니까.
환인은 밖을 나가자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는 치타 머리의 남자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예. 생각 이상으로 도움이 되더군요.”
=편리하지. 멀리까지 정찰해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성제님의 청옥 계약자들은 생전 뛰어난 정찰대이기도 하니 잘 쓰면 큰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잊지 말라고.=
“과한 혼옥의 보유는 영혼의 오염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그래. 자넨 현명하니 잘하겠지. 그나저나…… 거인은 참 거대하군.=
환인은 트라프로넨이 미동도 하지 않는 주술사를 올려다보며 하는 말에 숨겨놓은 뜻을 읽었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있으신가 봅니다.”
=주술사의 아우라 말이야. 나도 궁금증에 잠을 설치다가 비마르한테 연락을 넣어봤거든. 잊지 않았지? 역사 기관장.=
“물론입니다. 비마르 영성께서도 저 아우라 형태에 대해서는 모르셨나 보군요.”
=그렇다니까. 거인 직업자라는 이야기에 얼마나 흥분하던지 대화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어. 하지만 결론은 ‘모른다’였지.=
“제 여자들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사절들도 이에 대해 아는 것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트라프로넨과 함께 주술사의 머리 쪽으로 걸어가며 말하니 트라프로넨도 동감이라며 고개를 주억인다.
=알려지지 않은 직업이라 해서 기대감과 의아함이 반반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전투 쪽으로는 기대 못 할 직업도 수두룩하지 않나.=
“어느 쪽이든 거인들이 자리 잡는 데는 도움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 아니더라도 그녀의 치유술은 큰 도움이 되겠지요.”
거인에게는 작은 생채기라도 인간을 기준으로 보면 뼈와 내장이 드러날 정도의 중상이다.
그런 중상을 가벼운 주문으로 치유해버리니 거인들 사이에서는 가벼운 상처 치료의 술법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상처 치료와 다를 바 없는 수준.
=음. 그리 생각하니 전혀 다르게 보이는구먼. 비전투인 채집꾼이라고 해도 군인 수백 정도는 우습게 밟아버릴 정도니까 신체 능력도 우월하고.=
“예. 어쨌거나 키가 30m에 가까운 거인이니까요.”
환인도 궁금하긴 하다.
전사장은 홀로 수천 명의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저 신체를 십분 활용할 근접전투 직업이라도 얻으면 시너지가 엄청나게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술사 계통이라면 시너지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을까. 몸의 크기는 위상력의 보유량 차이와 별 연관이 없으니까.
쿠우웅—!
=저리 가라! 우리 친구 아직 안 나왔다!!=
……! ……!!
=나 어려운 말 모른다! 가라! 안가면 내려칠 거다!!=
트라프로넨과 함께 거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던 환인은 작게 웃었다. 트라프로넨도 큭큭하고 웃는다.
=정말 호감이 가는 친구들이란 말이야.=
“동감입니다. 그보다 주술사가 이제 일어날 것 같군요.”
주술사의 영혼의 움직임이 조금씩 활발해진다. 트라프로넨과 함께 주술사와 거리를 두자 그녀의 눈매가 작게 찡그려지더니 곧이어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워우. 가슴이 정말 크군. 저 위에 올라가면 어떤 기분일까……?=
주술사의 흘러내리는 거대 유방의 움직임에 트라프로넨이 호색한 같은 소릴 중얼거린다.
‘확실히 최고급 물침대처럼 부드러웠지.’
체면 떨어지는 그의 혼잣말을 못 들은 척해준 환인은 조금 목소리를 높여 주술사를 불렀다.
“주술사. 정신이 듭니까.”
그에 곧장 고개를 환인 쪽으로 돌린 주술사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드러나는 회백색 눈동자.
머리카락과 같은 색이다.
‘단순 고통과 감염으로 머리카락 색만 물에 빠진 게 아니었군. 신체의 변화까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영혼사님.=
환인은 자신을 향해 주술사의 커다란 두 손이 내려오는 걸 목격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서 듬뿍 묻어나는 고마움에 가만히 서 있는다.
그러자 이 위로 올라와달라는 듯이 손바닥을 위로한 채 땅에 가만히 내려놓고 기다리는 주술사.
환인이 그 위에 올라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살짝 눌렀다.
그녀의 손바닥과 가슴 사이에 압박당할 생각이 없었던 환인은 훌쩍 뛰어올라 주술사의 가슴 위에 섰고, 주술사는 웃으며 손바닥으로 밑가슴을 받쳐 서로 마주 보기 편하게 위치를 잡아주었다.
=부럽다!=
아래쪽에서 들려온 철없는 소릴 무시하고 한층 얼굴이 가까워진 주술사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네. 그 일에서부터 성제님이 제 곁을 지켜주셨던 것, 동족들을 미궁 밖으로 모두 데려 나와 주신 것, 제가 긍지에게 굴복하려 할 때 도움을 주신 것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설명은 더 필요 없겠군요. 무사히 깨어나 다행입니다.”
=깨어나려 무던히도 노력했지요. 성제님께 짝짓기에 대한 대답을 듣기 위해서요.=
주술사의 웃음 섞인 대답에 환인은 일순간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그런 말도 하긴 했는데…… 들으라고 일부러 강제력까지 발휘하긴 했었는데.
여기서 못하겠다고 하면 주술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자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듯하니 너무하다며 모기 잡듯이 잡으려 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대답을 신중히 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진다.
미리 생각해둔 것은 있지만, 바로 말하기보다는 나중에 분위기를 잡아서 대답하기로 한 환인은 주제를 전환했다.
“그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에 합시다. 지금은 당신의 몸에 일어난 현상을 파악하는 게 급선무인 듯하니까요.”
=그런 거라면…… 성제님? 혹시 의념이 깃들지 않은 무기가 있으신가요.=
설마 직업을 각성하며 본능적인 능력의 활용법을 깨달은 건가.
그녀의 요구에 환인은 잠시 소지품을 생각하다 기사검을 꺼내 들었다.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에서 반혼 기사를 해치우며 얻은 전리품. 실력 있는 대장간에 맡겨 새것처럼 매끈해진 날 길이 130cm의 장검이다.
주술사는 환인이 내민 기사검을 가만히 바라보다 검지를 내밀어 기사검을 톡, 건드렸다.
“……!”
그 간단한 손짓에 평범한 은색의 날이 표면에 무수한 음각을 새긴 것처럼 쭈글쭈글해지더니 삽시간에 까맣게 물들어버린다.
가뜩이나 예술품 같은 자태의 기사검이었는데 날까지 이리 변하니 특정 예식에 쓰일법한 외형이다.
게다가 기사검의 표면에 흐르는 짙은 위상력의 기운.
‘마법검.’
영혼의 눈으로 검은 기사검을 살핀 환인의 눈빛이 무거워진다.
쉬잉— 한차례 검을 휘둘러본 환인은 무기가 지나간 흔적에 남는 거뭇거뭇한 흔적에서 복합적인 능력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일시적인 힘의 부여가 아니란 것.
“이건 어떻게 한 겁니까.”
=상처 악화와 내구성 상승의 힘을 걸었어요. 지금은 일주일에 한 번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 말에서 환인은 주술사가 얻은 능력을 간파했다.
그녀의 직업 능력은 소지품을 지니고 중핵을 해치웠을 경우 소지품에 깃드는 미궁의 힘을 재현하는 것이다.
저런 능력을 얻은 것은 중핵의 혼을 집어삼킨 여파인건가.
검은 기사검은 척 봐도 유르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내는 마도기와 비슷한 수준이며 이실리테의 주무장인 레드릭 얼터에 담긴 힘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다.
이런 걸 일주일마다 만들어낸다고 하면…….
“부여할 수 있는 힘은 그 두 가지뿐입니까.”
=무기에 내구성 상승, 절삭력 상승, 상처 악화 셋을 제 임의로 조절해서 부여할 수 있을듯해요.=
“……등급이 상승한다면 부여할 수 있는 물건의 폭이 넓어질 수 있겠군요. 부여할 수 있는 능력도 다양해질 가능성도 있고.”
직업이 성장하며 늘어나는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지금 한 말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만약 확장되지 않고 현재 능력만 강화되더라도 금화 수십 닢짜리 무기를 양산할 수 있게 된다.
=이 능력이면 성제님께 도움이 될까요?=
“예. 무척이나 도움 될 겁니다.”
=잘됐네요.=
환인은 밝게 웃는 주술사의 모습에서 피할 수 없는 미래를 느끼고 말았다.
‘유르파를 재촉해야겠군.’
그 미래를 현실로 만들지 않으려면 유르파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환인은 여자친구들과 환연, 트라프로넨에 족장까지 주술사가 있는 곳으로 데려와 철저한 방음, 방청 환경을 마련한 뒤 대성녀와 통신을 연결했다.
“그녀의 능력이 알려진다면 위협을 느낄 집단이 적지 않을 겁니다.”
[성제 말씀대로요. 중핵 처치의 부산물인 마법 무기를 양산하는 능력이라니…….]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자 갈기의 족장에게 환인은 눈맞춤 설명을 해주었다.
“족장이 쓰는 양손 둔기에 주술사의 힘을 불어넣으면 좀처럼 부서지지 않는 양손 둔기가 됩니다. 여전히 소모품이지만 수명이 말도 안 되게 늘어나는 셈이지요.”
=……엄청난 능력이군!=
[그렇다 하여도 우리가 해야 할 일에는 변함이 없소. 거인 여러분들을 우리 영도의 일원으로 맞이해 살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고 친구로, 가족으로 맞이하는 것.]
대성녀는 물욕이 전혀 들지 않은 얼굴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미 우리는 여러분이 도착하면 머무를 곳의 준비를 시작하였소. 하지만 당사자들의 의사가 무엇보다 중요하지. 영도에서 모두의 뜻을 모아 하나로 묶는 대성녀가 거인 여러분께 묻겠소. 여러분들은 정말 영도의 그늘에 들어오시길 바라시오?]
=그래. 우리 작은 영혼사 친구와 미궁을 나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그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에서 결정을 내렸어. 우리 동족들은 생각 이상으로 단순하고 멍청한 면이 있어 그늘 없이 떠돈다면 이리저리 이용만 당하다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에는 하나둘 죽어 나가다 결국 멸종할 거라고 말이야.=
[부정할 수 없군. 여러분들의 무력은 힘에 관심 있는 자의 눈에 무척 매력적이고 먹음직스러울 테니까.]
=뭐 그런 거요. 나는 작은 영혼사 친구를 믿고, 친구는 대성녀를 믿지. 그러니 우리도 대성녀를 믿겠소.=
[그 믿음에 부합하도록 소녀도, 영도도 힘을 합쳐 노력하겠소. 그러니 족장과 주술사 두 분도 다른 거인분들을 설득하여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협조를 부탁드리겠소. 그러면 트라프로넨 영성.]
=예, 대성녀님.=
[오실 때 거인족과 조심해서 돌아오시길 바라오. 소녀는 영도에서 여러분과 만날 날을 고대하며 기다리겠소.]
작은 회담은 그것으로 끝났다. 그리고 환인은 대성녀를 새삼 신수라고 상기했다.
주술사가 각성한 직업의 능력은 영도의 전력을 족히 서너 배까지 끌어 올릴 수 있는 힘이다.
한 집단의 우두머리라면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능력일 텐데 대성녀는 그에 대하여 조금도 욕심을 드러내지 않다니.
그녀에게 주술사는 그저 영도의 새로운 가족이 될 종족의 일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겠지.
만약 자신이 대성녀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약속을 통해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무기를 만들어달라 부탁을 넣었겠지. 결고 피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구슬림을 통해서.’
=그러면…….=
생각하던 환인은 귀에 주술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오자마자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슬슬 미뤘던 일을 해결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주술사의 시선이 목덜미를 찌르지만, 이건 가감 없는 사실이다.
좀 전부터 3국의 사절이 모여 자신과 회견을 바라는 소리로 시끄러웠으니까.
매를 맞고 싶다고 떠들어대는데 그걸 내버려 두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니다.
‘원한다면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때려주지.’
연좌제. 이 얼마나 듣기 좋은 울림인가.
이때까지 그런 경험을 겪어본 적이 없을테니 이번 기회에 제대로 겪게 해줄 생각으로 환인은 몸을 돌렸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아슬아슬하게 안걸린 정체불명의... 여자!
늦었습니당.
낮에 일이 조금만 있으면 지각이네요 흐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