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71화 (571/813)

565 시주르 대평원

여자친구들과 유르파가 손짓하는 흙집으로 들어간 환인은 내부 풍경을 본 순간 익숙한 장소가 생각났다.

‘화장실… 아니, 욕실인가.’

뒤따라 들어온 안느와 백려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탄성을 지른다.

=우와, 이거 뭐야? 그냥 흙집이 아닌데?=

=벽이 도자기처럼 반들반들해요.=

흙집 내부는 유약을 발라 구운 도자기처럼 우윳빛에 가까웠고 바닥은 미끄러지지 않도록 욕실 타일처럼 홈이 촘촘하게 반복되고 있다.

유르파가 설치해놓은 빛구슬 마도구가 내뿜는 빛에 은은한 광택이 강조되니 제법 고급스럽다.

기본적인 가재도구, 탁자나 개방된 수납장, 침대 프레임 등도 비슷하게 만들어져있는데 색이 다른 것은 환연과 유르파의 감각이겠지.

문 대신 고급 태피스트리 같은 것으로 막혀있는 방에서 나온 환연이 엣헴, 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때?」

=굉장해. 어떻게 만든 거야?=

「상급 정령이랑 대화할 수 있게 되면서 중급 정령한테 좀 더 선명한 생각을 보낼 수 있게 됐거든. 마침 땅에 유약의 성분이 다 있길래 불이랑 땅의 정령으로 만들어본 거야.」

환인이 지구의 온갖 전문 서적을 모아놓은 노트북에는 도자기 굽는 기술서와 강의도 있었는데, 환연은 그걸 보고 만들어본 것.

책에 서술된 대로 ‘장석, 규석, 석회석으로 유약을 만들어봐.’하면 아무리 땅의 정령이라고 해도 ‘이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하며 무시해버린다.

심상을 느끼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정령은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에 문자로만 뜻을 전달하면 이해하려 들지 않는 것.

하지만 환인이 모아놓은 자료에는 유약을 만드는 과정과 그 재료에 대한 영상도 있었다. 환연은 그걸 보고 유약을 만들어 벽에 발라 도자기를 굽는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매끈한 벽을 만져보던 이실리테는 작게 웃으며 환연을 칭찬했다.

=훌륭하네. 확실히 흙벽보다 청결해. 흙집일 때는 옷이나 손에 가끔 흙이 묻어나서 요리에 흙이 안 들어가게 신경 써야 했거든.=

그녀의 실용적인 소감에 환연이 ‘어라?’ 하고 당황한다.

「그, 그랬어? 앞으로는 부엌이랑 주방은 신경 써서 만들어줄게.」

=고마워. 그럼 주인님, 전 야식을 만들어올게요.=

“부탁하지. 환연은 집 만드느라 수고했다.”

「응. 욕실도 더 신경 썼는데 거긴 안 봐?」

갑자기 욕실 이야기는 왜 하는 걸까.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닌듯한데.

=아가씨들~? 침실에 침구를 놓아야 하는 데 좀 도와줄래?=

=엉.=

=네에.=

안느와 백려강을 데려가는 유르파를 잠시 바라보던 환인은 환연과 욕실로 들어갔다가 “멋지군.” 절로 칭찬을 입 밖으로 내었다.

약 20평 남짓한 내부는 대리석 느낌의 우윳빛과 상앗빛이 섞인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욕실 가운데는 수영장처럼 넓은 풀이 수증기를 피워올리고 있고 한쪽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장의자, 다른 쪽에는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마사지 침대가 설치된 상태.

내부에서 부드러운 꽃향기가 나는듯해 주위를 둘러보니 구석에 마련된 소형 탁자에 분홍색 아로마 양초가 하얀 연기를 실선처럼 피우는 중이다.

전체적으로 헬레니즘 양식이 스며들어있는데 이것도 자료에서 보고 따라한 건가.

환인은 수증기가 천장에 난 — — 모양의 여러 홈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을 보다가 환연과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그 잠깐 사이에 저런 걸 만들다니. 정령술이 늘어난 효과인가.”

「어땠어?」

“안느와 유르파가 좋아하겠더군. 내 눈에도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그럼 됐어!」

뭐가 됐다는 걸까. 환인은 이실리테가 음식을 만드는 부엌으로 날아가는 환연을 보다 작게 고개를 저으며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환연이 그런 욕실을 만든 이유는 잠시 후 알게 되었다.

홍합탕에 버섯부추 메밀전, 도수가 그리 강하지 않은 과일주를 마셔 허기를 면할 정도만 배를 채운 환인은 환연에게 이끌려 먼저 욕실로 들어왔는데.

=와아.=

=오오! 엄청 화려한 욕실이잖아?=

=……!=

여자친구들 네 명이 잠자리 날개처럼 얇고 솜사탕처럼 하늘거리는 네글리제만 걸친 채 들어오는 것을 본 것이다.

가뜩이나 우윳빛과 상아빛으로 밝은 욕실인데 그 네 명이 동시에 들어오니 내부가 더더욱 환해지는 듯하다.

소형 풀장처럼 넓은 욕탕 속에서 먼저 몸을 풀고 있던 환인은 그녀들의 매혹적인 나신에 휘감기는 네글리제 특유의 질감을 감상하며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했다.

여자친구들과 함께 목욕한 적은 적지 않았다.

도시나 마을에 도착해 욕실이 넓은 곳에 머무르면 십중팔구는 함께 목욕했다. 욕실이 작을 때면 한 명, 혹은 두 명과 함께 들어갔다.

그럴 때면 그녀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여신보다 아름다운 몸매를 한껏 드러냈었다.

지금처럼 무언가로 약간이지만 몸을 가린 적이 없었던 거다.

환인은 유르파가 풀 줄기를 엮어 꽃으로 장식한 바구니에 무언가를 잔뜩 담아 오는 걸 발견하곤 그제야 이유를 눈치챘다.

흙집 내부를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만든 것. 과도하다 할 정도로 욕실을 이렇게 화려하게 만든 것. 환연이 자신을 먼저 데려와 욕실에 밀어 넣은 것.

‘날 위해서였나.’

=도령, 거기서 우리 알몸 구경만 하지 말고 이리 나와봐.=

여자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환인의 시선에 후후, 호호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잡고 욕탕에서 데리고 나왔다.

“뭘 하려는 거지.”

=음, 좋은 거?=

그리 대답한 여자들은 환인을 먼저 마사지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시작된 그녀들의 봉사.

네 명은 각각 환인의 머리와 팔과 다리, 몸을 맡아 지압 마사지를 해주는데 넷 중 힘이 가장 약하면서 가장 섬세한 유르파가 머리를, 힘이 가장 강한 안느가 몸을,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각자 다리와 팔을 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과 여성의 섬세함이 만들어내는 마사지는 비록 초보라지만 그녀의 마음 씀씀이와 애정이 전해져와 시원함보다 기분 좋음이 앞선다.

환인의 두피를 열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지압 마사지를 하던 유르파가 물었다.

=자기, 어떠니? 시간 날 때마다 자기 노트북 보고 익혀서 좀 어색할 텐데…….=

“충분히 기분 좋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 다행이다.=

환인의 감상에 향유를 손에 바르고 그의 몸을 지압하던 안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주인님, 안느랑 유리 언니가 공부를 제일 많이 했어요.=

=그야 머리하고 몸에는 중요한 부위가 많잖아. 마사지 잘못하면 피로도 안 풀린다는데 열심히 배워야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이실리테도 발바닥과 발가락사이, 허벅지와 종아리를 열심히 누르고 문지르는데 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열이 올라와 혈액이 순환되고 근육에 쌓인 피로가 하나하나 터져나가는 느낌이다.

그건 다른 부위를 맡은 여자친구들의 마사지도 마찬가지.

따뜻하게 데운 수건으로 눈만 가려진 채 그녀들의 지압 안마를 몸의 앞뒤로 받은 환인은 확실히 근육이 풀리고 활력이 몸 전체에 도는 것을 느꼈다.

‘술도 조금 마셔서인가.’

스트레스가 약간 풀어지는 것을 뒷목의 뻣뻣함이 감소하는 것으로 파악한 환인은 다시 욕탕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도령, 가면 안 돼.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네글리제를 벗어 완전한 알몸이 된 안느의 손에 이끌린 환인은 먼저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의자에 앉은 그녀의 허벅지 위에 앉게 되었다.

=자, 나한테 편히 기대.=

“…….”

그녀의 손길에 환인은 자연스럽게 벨벳보다 부드러운 그녀의 배와 가슴에 등을 기댄다.

그러자 안느는 뒤로 살짝 드러누우며 그의 머리를 받쳐주는데, 덕분에 키에서 오는 앉은키의 차이로 안느의 젖가슴이 정확히 환인의 목을 받쳐주게 되었다.

천만 달러 신체 보험에 들어도 부족한 가슴에 무거운 머리를 기대다니. 이보다 더한 호사가 있을까.

=어때? 편해?=

“사랑하는 여자를 의자로 쓴다는 게 무척이나 배덕적이지만…… 그런 게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편하군.”

=뭐야 그게.=

그의 별난 감상에 여자들이 킥킥 웃는다. 환인은 안느가 소리 없이 킥킥 웃는 게 몸 전체로 느껴지는 것도 좋다고 여겼다.

=주인님. 잠시만요.=

다음으로는 곁에서 자그맣게 웃던 이실리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들 중 가장 가슴이 큰 그녀는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와 강한 혈류로 우뚝 선 그의 물건을 가슴으로 감싼다.

그의 대물을 가슴으로 완벽하게 감쌀 수 있는 것은 이실리테뿐.

유르파도 크기만 봐선 이실리테의 뒤를 바짝 따르지만, 유르파의 유방은 탱글탱글 이라기보다 출렁출렁에 가까운데다 크기도 이실리테보다 조금 작다.

그렇게 이실리테가 환인의 대물을 가슴으로 감싸자 그 가슴 골짜기에 백려강이 천연 오일을 아낌없이 듬뿍 뿌렸다.

=주인님, 그럼 움직일게요.=

이실리테는 자신의 가슴을 좌우로 누르며 가슴골에 끼인 환인의 양물을 기둥 삼아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쯔걱, 쩌걱…….

음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평범한 결합과는 결이 다른 부드러움의 쾌감이 그의 양물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으음…….”

가뜩이나 지압 마사지로 근육이 풀리고 감각이 민감해진 데다 피까지 몰렸었는데, 거기에 파이즈리가 시작되니 환인의 입에서 절로 작은 신음이 흘렀다.

그런 그의 얼굴을 덮는 유르파의 흘러내릴 것처럼 부드러운 젖무덤. 그런데 유방의 체온이 평소보다 더 높다.

‘아까부터 가슴에 젖은 수건을 대고 있더라니.’

체온을 올리기 위해 뜨거운 물을 적신 수건이었고, 평소 체온보다 1~2도 정도 높아졌을 뿐이지만 환인은 스팀으로 얼굴을 마사지 받는듯한 따스함을 느꼈다.

그리고 백려강이 마지막으로 C컵의 물방울 모양 예쁜 가슴을 환인의 입에 물렸다.

밑에서는 이실리테가 심혈을 기울여 파이즈리 중이고 안느는 살아있는 의자가 되어 환인의 몸 이곳저곳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애무해준다.

유르파는 부드러운 점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궤를 달리하는 유방으로 환인의 눈을 찜질해주며 백려강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것처럼 환인의 입에 젖을 물린 채 연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핫….=

=으흥…!=

이러니 환인의 손이 못된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백려강의 젖꼭지를 살살 이빨로 물면서 두 손으로 유르파와 백려강의 허벅지 사이 살 틈을 문지르고 찌른다.

그의 몸을 마음껏 주무르면서 그녀들도 살짝 흥분한 상태였는데 민감한 곳에 그의 터치까지 이루어지니 늘어지는 것처럼 애액이 흐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녀들이 환인의 팔에 음부를 마찰하며 점차 성감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이실리테는 그의 거북이 머리 같은 양물의 끝이 가슴골 사이에서 빠져나올 때마다 혀로 날름 핥거나 쪽쪽 키스해주며 성욕을 만족시키는 중이었다.

환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이실리테다.

그의 양물을 애무하며 봉사하는 지금, 아랫도리에는 그 어떤 접촉도 없었음에도 이미 실처럼 투명하고 맑은 애액이 늘어지고 있었다.

그의 의자가 된 안느도 다른 여자들과 상태가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려와 공명하는 플뢰족의 특징을 지닌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채 그의 체취를 흠뻑 흡입하며 그의 육체를 표현 그대로 온몸으로 만끽하는 중.

「자, 환인. 앙~.」

마지막으로 알몸이 되어 작은 과실이며 도수가 약한 술을 날라다 환인의 입에 흘려 넣어주는 환연까지.

하나하나가 여신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들의 봉사에 환인은 말 그대로 천국을 노니는 기분이었다.

얼굴에 닿는 포근하고 달콤한 유방의 살결에 목에서부터 등과 엉덩이, 다리까지 닿는 안느의 말랑말랑한 촉감.

자신의 옆에 바짝 붙은 유르파와 백려강의 피부와 가슴 감촉에 다리 사이에서 가슴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자랑하는 이실리테까지.

말 그대로 여자친구들의 살결에 파묻혀 봉사 받던 환인은 참지 못하고 이실리테의 입 안에 거창하게 사정했다.

=음, 으응. 읍.=

이전 어느 때보다 찐한 그의 정액을 삼켜가는 이실리테의 모습에 환인도 그녀들에게 자신이 느낀 쾌감을 전해 주려 했지만.

=으응으응. 아니야. 오늘 자기는 편히 누워서 우리들의 봉사만 받아주는 날이야.=

“…그래도 되겠습니까.”

=어어…… 도령은 걱정 마아… 우리도…… 무지 기분 좋으니까아……. 헤윽.=

=하읏, 아으…. 환인 님 손가락, 너무 야해…… 아앙….=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의 의자가 되어준 안느도 보면 이실리테가 슬쩍슬쩍 그녀의 음핵을 괴롭혀주고 있는 듯하고, 이실리테는 파이즈리에서 펠라치오로 들어가며 스스로 자신의 성기를 문질러 자위하고 있다.

“알겠습니다.”

뭐, 이런 상태로도 그녀들을 만족시켜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으흣? 하악…! 으읏, 주인……니임…!=

환인은 발등을 이실리테의 둔덕에 가져다 댄 뒤 핏줄과 도드라진 관절로 그녀의 자위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안느, 혀 내놔라.”

=도, 도려엉… 흐읍, 웁…… 하으음…….=

고개를 조금 돌려 안느의 피학심을 자극하는 명령과 거친 키스로 그녀를 흥분시킨다. 그녀의 손은 자유로우니 흥분된다면 스스로 자위하겠지.

=아, 아앗! 자기, 약한 곳마한… 그렇게 집요하게읏……!=

=환인님안대안대그만그……마아앙……!=

남은 두 손은 당연히 유르파와 백려강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니 욕실에는 여자들의 가녀린 교성만 울려 퍼졌다.

그리고 환연은…….

「에휴. 가장 멀쩡한 내가 지켜줘야지 별수 없네.」

환인이 더는 술이나 과실을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환연은 자기 목욕 바구니통을 가져와 근처에서 반신욕을 하며 욕실에서 울려 퍼지는 교성이 바깥으로 흐르지 못하도록 바람의 정령으로 집을 단단히 감싸 막았다.

물론 정령을 널리 퍼트려 아까처럼 암살이나 습격받을 일 없이 경계하는 것도 그녀가 자청한 임무.

흙집 밖에서는 비상이 다른 쿠에들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고, 그 너머에서는 거인들도 집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았기에 이제 습격받을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세상에 0%는 없다고 하니까.’

거인숲 미궁 안에서 쉴 만큼 쉬고 놀 만큼 놀았다.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 자기 할 일을 해야지.

물론 그녀도 그녀 나름대로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다.

조그마한 산딸기의 과육을 손으로 떠먹으며 환인이 허리를 들썩이면서 이실리테의 입 안에 두 번째 사정하는 것을 구경하는 건 나름대로 관음의 요소가 있어 흥미로웠으니까.

만약 욕실을 보았다면 달님도 부끄러워 구름으로 얼굴을 가렸을 시간이 흐른 뒤.

여자친구들의 봉사 덕분에 묵은 감정의 찌꺼기를 모두 토해낸 그는 잠든 여자친구들의 알몸을 이불 삼아 푹신한 침대에 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주술사를 응시했다.

“…….”

주술사의 몸 안에서 벌어지던 중핵과의 싸움은 이제 주술사의 승리가 되기 직전이었다.

힘의 균형도 0.5:9.5인 상태인데다 창백해졌던 피부도 달빛에 물든 듯한 하얀색으로 돌아왔으니 이변이 없는 한 그녀가 정신을 차리겠지.

다만 머리카락이나 음모가 원래는 갈색이었는데 회백색으로 남은 것이 조금 신경 쓰이지만.

‘체모의 색 변화는 여러 곳에서 빈번히 이루어지는 편이니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므우웅…… 화닌… 니임…… 에헤헤…….=

옆구리 부근에서 웅얼거리며 조금 더 안겨드는 백려강의 목에 팔을 감아준 환인은 그녀의 머리에 난 용각龍角을 만지작거렸다.

“…….”

여자친구들의 뜨거운 봉사 덕분에 정신적 피로와 육체적 피로는 말끔하게 풀렸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근원은 아직 멀쩡한데다 처음으로 암살 습격을 받은 것, 그리고 중핵에게 우롱당한 기억은 기름처럼 끈적하게 들러붙어 부정적인 감정을 여전히 자아내고 있다.

비자룩스에서 자신의 음모에 추살당한 알드헬름과 심장이 꿰뚫려 죽은 그놈의 모친처럼, 자신의 손이나 눈앞에서 원로라는 작자들이 죽어 나가야 이 끈적한 감정도 떨어져 나가겠지.

그렇다 해서 여자친구들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다. 그녀들 덕분에 머릿속은 차가워졌고 마음도 냉정해졌으니.

환인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주술사의 거대한 젖무덤을 바라보다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환연의 꽃바구니 침대가 매달려 있었는데,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뭔가 보고 있는지 이 세상에는 없을 빛의 율동이 천장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환연.”

「불렀어?」

“아스펜드 좀 가지고 와라.”

「뭐 하게?」

되물으면서도 옷을 벗어둔 곳으로 날아가 손지갑 형태의 아스펜드를 그에게 가져다주는 환연.

환인은 대답 없이 안에서 영도 통신 수정구를 꺼내 들었다.

「대성녀한테 지금 연락하게? 별로 좋은 생각 같지는 않은데.」

“더 늦어지는 것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거 같다. 대성녀의 성격이라면 틀림없이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자애들한테 몇 번 사정하고 났더니 머리가 개운해지기라도 한 거야?」

환연의 짓궂은 물음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긍정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

통신 연결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났다.

유르파가 자신 없이도 통신할 수 있도록 마도구를 하나 만들어준 덕분에 혼자서도 신호를 보낼 수 있었는데, 신호음이 1번이 채 가기도 전에 수정구가 켜지며 안에서 대성녀의 얼굴이 떠오른 것.

유르파가 해주었다면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영상을 띄웠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곤히 잠들어있으니…….

[성제! 무사한 거요?!]

수정구에서 터져 나오는 큰 소리에 볼륨을 낮춘 환인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대답한다.

“예. 저도 정신이 없어 연락을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

[……하아아. 그대의 연락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소녀가 거기까지 날아갔을 거요. 그런데 그대는 옆에 반려들을 끼고 태평하게 누워있는 모습이라니……!]

아니나다를까 처음에는 걱정하다가 후반에는 작게 부들거리면서 노기를 드러내는 닌실=아나그.

[소녀가 그댈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요?! 이엘이 그대의 미래를 예견하고 트라프 영성을 파견한 뒤 한숨도 못 자고 있었소!]

“그 점을 알고 있어서 이런 밤늦은 시간에라도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아마 연락은 내일이나 되어야 했겠지요.”

[…….]

“미안합니다, 닌실.”

환인의 부드러운 사과에 대성녀는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눈을 안마한다.

[아니오.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오히려 소녀가 미안하오. 그, 음. 몸은, 무사한 거요? 다친 데는 없고?]

“예. 걱정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됐소. 그대가 무사하다면…….]

피로가 역력한데다 적어도 사흘은 잠을 못 잔 얼굴이지만, 적어도 마음은 편해진 모습이다.

그리고 대성녀에게서 이번 암살 건에 대한 일과 그 경위가 흘러나왔다.

대부분은 트라프로넨 영성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가 알기에는 민감한 영역이라 생각했는지 처음 듣는 이야기도 나왔다.

[엘위드리스의 가주, 프슈드 오울 엘위드리스는 사태가 심각해질 경우 모든 잘못을 자신이 책임지고 사퇴, 가주의 권한으로 이엘카타를 후계로 선정하겠다고도 이야기하였소. 이 말뜻은…….]

“제가 받아들이기 나름이라는 거군요. 거절하겠습니다.”

미리 생각해둔 것처럼 즉각 나오는 대답에 대성녀는 으음, 작게 신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그 아이가 가문으로 돌아가 엘위드리스의 가주직을 계승하는 게 그대의 활동에 더 도움이 될 텐데 말이오.]

“도움이야 되겠지만 그녀의 목숨을 장담하지 못하겠지요. 엘위드리스 가문의 예언이 자기실현적인 면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니, 그녀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영도에 머무르는 것이 정답입니다.”

[다행이군. 그대의 이성이 냉혈한 거 같아서 말이오.]

대성녀의 중얼거림에 환인은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어주며 입을 열었다.

“트라프로넨 영성께서 돌아가시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드리겠지만, 대응은 영도에 일임하겠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 이번 일에 엮인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들의 목숨뿐입니다.”

[그대도 잔인한 면이 있군. 암살당할뻔한 피해자의 당연한 권리지만 말이오.]

환인의 요구대로 이루어진다면 엘위드리스 가문은 잘해야 가문을 유지, 잘못했다간 가문 자체가 풍비박산 난다.

가면 죽을 게 뻔한데 종족 우월주의자 원로들이 ‘알겠소.’하고 따라올 거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미련한 일이니.

즉, 환인의 요구는 엘위드리스 가문이 스스로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게 만드는 짓이라는 거다.

“제가 메리아놀 근처에 있었다면 직접 비상을 타고 날아가 그 도시에 흑옥 혼령주를 펼쳤을 겁니다. 그걸 생각해본다면 매우 온건한 요청이 아닐까요.”

[…그런 말은 웃으면서 하지 말아주시오. 기분이 이상해지잖소.]

“알겠습니다. 아무튼 그 일은 닌실에게 일임하겠습니다. 뒤처리를 잘 부탁드립니다.”

[흥. 이제는 대놓고 소녀를 부려 먹겠다는 이야기구려. 대성자 후보가 대성녀를 마음대로 부려 먹는다니, 개탄스러울 일이오.]

대놓고 찡얼거리는 대성녀의 심정을 환인은 알고 있었다.

두어 마디 정도 안부와 걱정, 그리고 몸을 섞은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애정어린 속삭임 정도는 기대했을 텐데 나오는 이야기는 죄다 삭막하고 팍팍한 것들 뿐이니.

그래서 환인은 작게 웃으며 다독였다.

“지금부터 드리는 건 닌실 당신을 위한 겁니다.”

[……?]

친밀하고 신뢰가 있는 거인족 60여 명을 영도로 보내는 것, 그리고 그 거인들의 식량과 관련해 지구의 지식인 농법과 건축법 지식 일체를 전달해주겠다는 이야기.

[어째서 거인들과 함께 있었던 건가 했더니, 그대는 정말…….]

대성녀는 환인의 이야기에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흐렸다.

그가 해준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영도의 작물 소출은 지금의 20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 인력은 충분하니 농사 걱정은 없겠지.

거인들의 주거와 활동도 그의 말대로 영산 인근으로 해놓고 천천히 도시에 섞여들게 한다면 압도적인 생명체의 등장에 영도와 산하 도시의 혼란도 최소한으로 줄어들 것이다.

거인이 자신들의 편이라는 건 그만큼 도시가 안전해진다는 뜻과 일치하니까.

게다가 그의 말에 따르면 거인들은 족히 10만 대군의 위력이란 말이 아닌가.

그의 말대로 거인들이 영도에 정식으로 편입되기만 하면 니오네브레스 4국도 영도를, 영혼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닌실에게는 평범한 장신구 같은 선물보다 영산과 영도, 순례자의 마을이 더 안전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게 좋을듯해서 준비한 선물입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오. 그대가 앞에 있었다면 꼭 안아주었을 정도로.]

“다행입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대성녀는 아주 약간 붉어진 얼굴로 혀끝까지 밀려 나와 대롱거리던 질문을 도로 삼켰다.

아드네빌라, 그 광룡과 몸을 섞은 데다 깊은 사이가 되었다는 게 정말이오?

……역시 묻지 않는 게 좋겠지. 그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귀찮은 여자라는 증거일 테니까.

그리 생각한 대성녀는 큰 산을 넘은 문제로 환인과 소소한 잡담을 이어나갔다.

그대처럼 통이 크고 담이 큰 사람은 처음 봤다.

그런 담으로 신수인 소녀를 희롱한 것이냐.

소녀를 희롱했다면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할게 아닌가.

환인과의 잡담에 마음의 충족을 얻던 대성녀는 갑자기 그가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린 채 그 방향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것에 고개를 기울였다.

[성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났소?]

“예. 주술사가 정신을 차리려 하는군요. 그런데…….”

[그런데?]

환인은 대답보다 수정구를 돌려 주술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창 너머로 주술사의 모습을 확인한 대성녀는 살짝 얼이 빠져 입을 조그맣게 벌렸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여자 거인의 육체.

거기에서 각성자를 뜻하는 은은한 아우라가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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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히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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