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70화 (570/813)

564 시주르 대평원

=오, 유르파 영혼 기사. 오랜만이야.=

=인사는 나중에 드릴게요. 저 암살자를 좀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지. 이봐, 유르파 영혼 기사님이 확인할 게 있으시다니까 그걸 이리로 가져와 봐.=

트라프로넨의 지시에 영혼 기사 둘이 즉각 암살자를 끌고 온다. 유르파는 혼백이 빠져나간 것처럼 흐늘거리는 플뢰족 여자 암살자의 입을 강제로 벌린 뒤 치아를 살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역시 독단이 있네요.=

=응? 뭐가 있다는 거지?=

=자살용 독약이요. 오른쪽 어금니 안쪽에 조금 색이 다른 게 보이시죠?=

=…….=

한순간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 트라프로넨은 허리 주머니에서 얇은 장갑을 꺼내 낀 뒤 유르파가 지목한 어금니를 잡았다.

=이거 꽤 물렁물렁하구만…….=

=위급할 때 바로 씹기 위해서니까요. 조심스럽게 빼내야 해요.=

=그래…… 음, 이거…… 됐다.=

“…….”

환인은 트라프로넨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어금니 치아 모양의 독단을 보며 무표정을 지었다.

암살자.

그가 알기로 니오네브레스에서 가장 유명하고 실력 있는 암살 집단은 단연 카락스의 암살자들이다. 수백 년 전 존재했던 짐승신의 유일 직업자의 직업명을 물려받은 집단.

그 외에 비자룩스에서 들었던 나사라트의 암살단도 있고 벨티칼의 밀림 지역에서 활동한다는 구주의 독니도 있다.

=이런 걸 입 안에 넣고 다니는 놈들이니 다른 자살 방법도 있겠는데. 카힌, 자네가 구속에 대해서 좀 알고 있지?=

=예.=

=데려가서 이 암살자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구속해줘. 죽어도 영혼을 붙잡아 기밀을 토설하게 해도 되지만, 그래도 살려놓았을 때 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그러겠습니다.=

유르파는 다시 영혼 기사에게 끌려가 중죄인을 구속할 때 쓰는 방식으로 포박당하는 암살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또 무언가를 생각 중인 환인을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슬슬 자기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를 거 같은데.

그녀의 시선이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이 가면 같은 얼굴로 3국 사절들을 막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녀들도 지금 저들이 자기와 접촉하면 안 좋다는 걸 깨닫고 성제의 영혼 기사라는 신분으로 접근을 차단 중인 거겠지.

때마침 돌아보는 안느와 시선이 마주친 유르파는 재빨리 손짓해서 그녀를 불렀다.

사비족에게 시달리던 안느가 무슨 일인가 하고 옆에 있는 이실리테에게 맡기고 유르파에게 향한다.

저곳은 적당한 방법이 있으니까, 지금은 자길 다독여주고 풀어주는 게 먼저다.

=언니, 불렀어?=

=안느 아가씨도 느꼈지? 지금 자기의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어.=

=어. 그래서 저 인간들이 도령한테 못 가게 막고 있었는데 당최 말을 들어먹을 생각을 안해. 뭐 좋은 생각 있어?=

=생각이랄게 있니? 지금 자기한테 필요한 건 휴식과 진정할 시간이야. 마침 시간도 밤늦은 시간이기도 하니까…….=

현재로서는 환인의 입장이 무엇보다 우위에 서 있다. 그걸 이용하면 저들을 밀어내고 최소 내일 아침까지는 못 오게 막을 명분이 된다.

알 거 다 아는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이 무슨 무례냐고 말이다.

=알겠지? 저들을 멀리 보낸 뒤에 최소 내일 아침까지는 못 오게 해야 해. 그 뒤에 거인들을 주변에 배치해서 저들이 못 다가오게 막는 거고.=

=그담에는 우리가 도령을 진정시켜야겠네.=

=응. 난 환연이한테 갈 테니까 아가씬 저 사람들을 해산시켜줘.=

=알았어.=

안느는 각오를 다지고 이실리테에게 큰 소리도, 작은 소리도 아닌 말로 떠드는 사비족에게 향했다.

유르파도 그 뒷모습을 보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3국 대표 사절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보다 자기가 몇 배는 더 중요하다.

지금은 무엇보다 냉정과 냉철이 필요한데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를 정도의 분노를 가슴에 품은 상태로는 안 된다.

종종걸음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 중인 환인에게 걸어간 유르파는 그의 팔을 가슴골 사이로 끌어당겨 안으며 말했다.

=자기, 지금 굉장히 피곤해 보여.=

“그렇게 피곤하진 않습니다만.”

=원래 자기 피로는 매우 심해지기 전까지 잘 몰라. 어떤 사람은 매우 피로해져도 모르기도 하고.=

“유르파가 그리 말하니 신빙성이 크군요.”

환인이 살짝 웃으며 그리 말하자 유르파는 귀가 조금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를 샐쭉 흘겨보다가 풀썩 웃은 유르파는 자신의 가슴으로 그의 팔뚝을 포근하게 감싸며 속삭인다.

=밤도 늦었잖니. 시끄럽기도 하고 귀찮으니까 다들 물러나라고 한 뒤에 좀 쉬는 게 어떨까? 거인들도 좀 분위기에 적응할 시간도 필요할 테고.=

“알겠습니다. 유르파도 저 많은 숫자에게 비술을 걸고 술법진을 발동시켰으니 쉬어야겠지요.”

참, 자기가 쉴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쪽까지 신경 써주다니. 이러니까 그에게서 헤어날 수 없지.

유르파는 미소가 지어지려는 입매를 꾸욱 누르며 말했다.

=그럼 연이를 잠깐 데려갈게. 저쪽은 아가씨들이 알아서 정리할테니까 놔두면 될 거야.=

“예.”

환인이 코트 옷깃을 열자 환연이 알아서 유르파에게 넘어간다.

그 둘이 적당한 자리에 땅 정령을 불러 흙집을 매끈하게 짓기 시작하는 걸 바라보던 환인은 트라프로넨과 족장에게 다가가 말했다.

“시간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쉬는게 어떻겠습니까. 트라프로넨 님과 영혼 기사분들도 쉬지않고 달려오느라 힘들었을테니까요.”

=음? 그야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자네만 할까. 족장한테 이야기 들어보니 엊그저께 미궁 안에서 2천 마리나 되는 괴물들을 때려잡았다면서.=

“거인들의 도움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그러면 불침번으로 몇 명만 세우고 쉬도록 하겠습니다.”

환인의 결정에 트라프로넨은 순순히 응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불침번? 저자들은 어쩌고?=

“괜찮습니다. 도망가겠다면 가라고 하십시오.”

오싹—

환인의 무미건조한 웃음에 트라프로넨의 영혼 기사들은 한기가 척추를 따라 달리는 걸 느꼈다. 그것은 포플러 센트 순찰대도 마찬가지.

그의 대꾸는 오히려 도망가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그러든 말든 환인은 밖으로 나온 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오도카니 서 있던 가야 일행을 불렀다.

“가야. 당신은 어쩔 거지. 지금 저들에게 돌아가겠다면 같이 가서 한마디 해주겠다만.”

=아닙니다. 성제님과 저분들 사이에 제대로 된 회담이 시작된다면 그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면 불침번을 부탁하지. 트라프로넨 영성님의 기사들과 의논하면 될 거다.”

=예. 맡겨주십시오.=

말귀를 알아듣다 못해 어떻게 해야 본국으로 복귀한 뒤에도 자신의 영향력이 그대로일지, 그보다 더 높아질지 알고 하는 처신.

그럭저럭 믿음이 가는 모습에 환인은 그녀에게서 빼앗은 소지품을 돌려주었다.

두 손으로 공손히 소지품을 받아 간 가야에게서 몸을 돌린 환인은 여자 친구들 쪽을 보았다가 무심한 눈으로 그쪽을 향해 걸어간다.

무언가 말이 잘 안 통하는지 3국 사절과 실랑이를 벌이는 이실리테와 안느, 백려강.

=……러니까! 대충 알 거 다 알만한 분들이 왜 이 밤늦은 시간까지 우리 성제님을 만나야겠다고 억지를 부리냐는 겁니다!=

=하이고참 이 성기사님 윽수로 답답하네. 억지가 아니라니까?! 오래 이야기 하자는 것도 아니니까, 짧게 이야기만…….=

플뢰 주제에 멀대같이 큰 성기사와는 당최 말이 안 통한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던 사비족 최고 전사인 청은 말하다 말고 엄습해오는 오한에 주둥이를 다물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성제가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게 보인다.

그리고 영혼의 눈을 켜고 있는 환인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청은 포식자의 앞에 선 피식자 같은 기분을 느꼈다.

까딱 잘못했다간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

멀리서 볼 때도 살짝 비늘 떨리는 기세가 느껴지긴 했지만, 가까워지니 투기가 아니라 살기 같은 숨 막히는 기세다.

‘종족 최, 최고 전사인 내가 겁을 먹었다고?’

“벨티칼 측 사절 대표께서는 제게 할 말이 많은가 봅니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눈알만 데굴데굴 굴리던 청은 환인의 이야기에 더듬거리며 대답한다.

=으? 어,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밤늦기도 하고 미궁에서 벌인 전투로 조금 피곤하니 대화는 나중으로 미뤘으면 합니다.”

말은 정중하고 예의 바르지만, 그 속에는 거절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어감이 섞여 있었다.

순간 그녀를 최고 전사로 만들어준 자존심이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지만.

=아, 알았어요…….=

영혼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환인의 시선에 자존심은 삽시간에 소멸, 청은 결혼식을 앞둔 새색시처럼 다소곳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청, 어디 아프나. 왜 그러지.=

=닥……! 시, 시끄럽다. 군말 말고 따라와 시끼야. 느그들도!=

안느는 자신이 말할 땐 코웃음도 치지 않던 사비들이 환인의 이야기에 꼬리까지 말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곤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건 지위에 눌려 돌아갔다기보단 환인의 기운에 주눅이 들었다고 봐야 한다.

자신도 나름대로 기세와 기운을 갈무리하고 발휘하는 법을 터득했는데, 그와 자신의 차이는 뭘까?

루크랑족에게 가는 환인의 뒤를 따르며 생각하던 안느는 루크랑족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성궁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백려강의 어깨를 짚어 뒤로 물린 환인의 이야기에 목과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있던 학인족 여자가 슬그머니 자세를 낮춘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여왕 폐하와 호천명 전하의 전권을 위임받은 학사전의 전쟁 학사, 유연이라고 해요. 이 사절단의 대표를 맡고 있어요.=

“환인입니다. 호천명 전하께서는 잘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네! 전하께서는 잘 지내…….=

“그분의 소식이 궁금하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나눌 때가 아닌듯하니 나중으로 미루었으면 합니다.”

=……시는 데에…….=

힐끔, 터벅터벅 멀어져가는 사비족의 뒷모습을 본 유연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친왕 전하의 이름을 꺼내는 건 서둘렀나? 좀 나중에 말할 걸 그랬네.

그렇게 라수비탄에서 온 자들도 멀리 치워버린 환인은 마지막으로 이실리테와 대치하듯 서 있는 크샤나리와 다루그에게 다가갔다.

포플러 센트의 남은 인원들은 이미 복귀하였는지 인원은 크샤나리와 다루그, 그리고 그 둘의 수행 종자인 다섯 명뿐.

=귀찮게 하여 미안하네, 성제님. 저 치들이 있는 자리에서 발을 뺄 수는 없는지라. 노구는 물러날 터이니 부디 편한 밤이 되길 땅신님께 기도하겠네.=

크샤나리는 환인이 말할 것도 없다는 것처럼 눈치껏 살짝 눈인사한 뒤 다루그와 함께 되돌아간다.

“…….”

누구 하나 뻣뻣하게 나오길 내심 바라던 환인은 다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아직 시간은 많다.

“셋 다 저들을 상대하느라 고생했다. 우리도 돌아가지.”

환인의 뒤를 따르던 안느는 어느정도 사절들과 멀어져 이쪽 대화를 못듣겠다 싶어졌을 때, 작게 투덜거렸다.

=진짜 배운데다 지네들 집에서 신분도 높으니 누구 하나 간단히 말을 들어 먹는 인간들이 없어.=

=하지만 무례하게 막 밀어내고 호통치지 않는 걸 보고 놀랐어요. ‘감히 우리가 누군 줄 알고!!’하고 버럭거리면서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게 아닐까 했는데.=

웃으며 받아주는 백려강에게 안느는 설마, 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다간 도령한테 밉보일 테고, 그게 본국에 알려지면 일을 다 망쳤다며 출세가 꽉 막힐 텐데 미쳤다고 그러겠어? 그나마 만만한 우리 앞에서 뻗대는 정도밖에 못 하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보다 환인 님, 몸은 괜찮으세요? 공격을 영혼 방패로 막으시는 것까지는 봤는데…….=

“괜찮다. 방패가 뚫려도 역쇄류와 위상류가 있으니까.”

대답하던 환인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 심핵력이 대폭 늘었으니 위상류와 역쇄류를 강화하는 것도 시도해봐야겠군.

지금까지는 심핵력을 흘려 넣어도 그 순간만 강해지는 데 그쳤다.

지금은 용량도 2배로 늘었으니 약간씩 흘려 넣으며 지속적인 강화 테스트를 진행해도 될 것이다.

앞으로 쓸 일이 많아질 듯하니 성공한다면 큰 무기가 되어주겠지.

=주인님. 시장하지 않으세요? 주무시기 전에 야식을 만들까요?=

누워있는 주술사의 옆, 캠프장 비슷하게 흙집 몇 개가 세워진 것과 그걸 중심으로 거인들이 적당히 둘러앉은 곳에 도착한 환인은 이실리테의 질문에 그제야 허기가 조금 돈다는 걸 깨달았다.

시선을 들자 거인들이 생고기를 뜯으며 밤참을 먹는 게 보인다.

“그러는 게 좋겠군. 주술사의 상태를 계속 주시하려면 뭔가 좀 먹어두는 게 좋을 테니까.”

푹 쉬지는 못하겠지만 씻고 편히 앉아있는 정도는 괜찮겠지. 그사이 통신 수정구로 연락할 곳도 있고.

대성녀라면 아직 자고 있지 않을 테니 한 번 연락을 넣어보고, 가야를 불러 메리아놀 지역 통신 수정구도 얻어봐야겠다.

이름리아라는 여자와도 대화를 해봐야겠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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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환인이 마왕의 발걸음이라고 오해받은 이유.txt

죽으면 대륙 수준으로 죽음의 땅이 전개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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