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9화 (569/813)

563 시주르 대평원

영식. 영혼사가 타인의 악의에 의하여 사망하게 되면 벌어지는 혼력의 흘러넘침 현상.

사고로 인해 사망하거나 나이가 들어 수명이 다해 사망하는 일에는 영식이 벌어지지 않는다.

머리와 가슴은 거짓을 말하거나 행할지언정, 영혼은 자신의 행동을 모두 인지하며 무의식에 거짓을 말하지 못하기에 타의에 의한 살해인지 우연이 빚어낸 사고인지 알기 때문이다.

이것에는 연마되고 단련된 영혼술과 영기, 영력이 빚어낸 초월적인 인지가 있기에 가능한 일.

이게 불가능한 자, 정신적으로 병들거나 미쳐버린 자들의 영혼술은 연마되지 못해 녹슬고 깎여나가 볼품없어진다. 심신이 건강하지 못한 자의 영기는 줄곧 감소한다.

그렇기에 그런 자들의 죽음에는 영식이 벌이 지지 않는다.

이런 모든 상황을 뚫고 살해당한 영혼사로부터 영식이 시작되면 근방의 모든 생명은 일시에 죽음에 다다른다.

초월의 영역에 도달한 불멸자가 아닌 이상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선고.

영식의 범위는 사망한 영혼사의 영혼술이 뛰어날수록, 영기의 순도와 보유량이 많을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진다.

말해서 무얼 할까.

현재 찾아온 3개국 사절단의 대표 정도 되는 이들은 해당 국가의 왕족이나 왕족에 버금가는 인물들. 당연히 영식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영식에 휩쓸리면 혼도 남지 않고 죽는다고 알려져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정작 영식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범위와 범주는 어느 정도인지 그들도 잘 몰랐다.

유일하게 사실에 가장 근접하게 알고 있는 자가 라드세아 주도 라수비탄 학사전의 전쟁 학사 유연.

그녀가 알고 있는 것도 영혼사가 사망하면 영식이라는 정체불명의 현상이 벌어지며, 영역 내에 살아있는 생명체의 혼이 영혼사의 사망과 함께 끌려 나가 혼백이 빠진 인형처럼 변해버린다는 것 정도다.

실상은 그보다 더욱 위험하다.

생명이란 매우 복잡한 자연 순환의 핵심이다.

사람, 짐승, 동물·식물 이런 것만 생명인 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도 생명인 것.

이 미생물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습기만 있으면 살 수 있고 생명체들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에 비해 자연 순환에 미생물이 가진 역할은 매우, 매우매우 중요하다.

단적으로 식물이 단백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산이 필요하지만, 식물은 질산을 그냥 흡수하지 못한다. 물에 녹은 질산이온 형태로만 흡수할 수 있는데 이 질소를 이온 형태로 만드는 것이 미생물, 즉 세균이다.

식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각종 무기염류가 필요한데 이 무기염류를 암석에서 용해해 식물들이 흡수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도 세균이다.

즉 미생물이 사라지면 식물도 죽게 된다. 모든 식물이 사라지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육상 생태계가 망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

바다도 마찬가지다.

물 1㎖에는 100만 마리의 세균이 살고 있는데 이것들이 모두 사라질 경우 벌어지는 일은 하나로 압축할 수 있다.

바다의 광합성량 소멸.

바다 중층의 산소 농도가 사라져 바다 생물이 살지 못하는 사해死海가 된다.

미생물이 사라진 곳은 시체도 썩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무엇도 살 수 없는 환경이 되어버린다.

즉 영혼사가 사망하며 영식이 벌어진 자리에는 다시 미생물이 스며들어 자리를 잡지 않는 이상 죽음의 땅, 죽음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니오네브레스의 지배 계층이 영식의 위험성을 인지하게 된 것은 4급의 성별, 연령 미상의 정체불명 영혼사가 천수백 년 전, 어느 한 도시에서 사망하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영식은 반경 약 4km에 벌어져 족히 1000년간 죽음의 땅이 되었다고 알려졌다.

비교적 흔한 4급의 영혼사가 그 정도다.

영혼 계통 유일 직업자이자 수백 명을 넘어 천 명에 다다르는 여자를 안으며 영기를 얻고 용과 기린까지 안은 데다 5급 이상 미궁 두 개의 심핵력을 몸에 담은 추정 8급의 환인이 사망한다면?

대략적으로나마 그 범위를 아는 사람은 현 세상에 오직 한 명, 대성녀 닌실=아나그뿐일 것이다.

현재 환인의 심기는 말 그대로 심지가 얼마 남지 않은 핵폭탄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분노가 시작된 계기는 주술사가 형태를 변형한 중핵에게 감염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분노라지만, 그 분노로 인해 여타 감정의 임계점이 대폭 낮아지는 것은 간단한 이치다.

차라리 환인이 책임감이 덜하거나 평범한 사람처럼 화내고 짜증 내고 여자 친구들에게 위로를 받았다면 그나마 마음이 풀렸겠지만…….

=영혼사. 주술사의 상태는 어떻지?=

“긍지의 기세보다 주술사의 기세가 점차 강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을 둬 경과를 지켜봐야 알겠지만, 현시점에는 좋은 징후라고 봐도 될 것 같군요.”

=그런가! 잘됐군!=

이성으로 자기 절제를 고집하는 환인이다 보니 이실리테와 짧은 정사를 치러 스트레스를 약간 감소시켰다고 해도, 계속해서 사건과 사고가 그를 찾으며 그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많아지면 많아졌지 줄어들지 않아 감소시킨 스트레스보다 더 많은 양이 누적되었다.

이성적인 대처를 하느라 스트레스를 풀 구멍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이다.

만약 환인이 분노를 그 자리에서 크게 터트렸다면, 물리적인 폭력 방향이 아닌 노여움과 노기를 드러냈다면 3개국 사절 대표들은 ‘아! 지금은 때가 아니군!’하고 냉큼 자리를 벗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멀쩡하다 보니 사절들은 ‘혹시…?’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일하게 통찰력이 다른 종족보다 뛰어난 플라비우스족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이탈한 상태.

한밤중 모닥불에 날아드는 나방처럼 3국의 사절들이 슬금슬금 다가온다. 그와 비례해서 그의 스트레스는 눈덩이처럼 점점 커져만 가는 상황.

사절 중 멍청한 자가 있었다면 급발진을 통해 그의 스트레스 요소를 줄일 수도 있었겠으나, 파견된 이들은 각국에서도 꽤나 눈치가 빠르고 영민한 자들.

폭탄 스위치를 누르지 않고 서로에게 던져가며 환인의 주변으로 모여든다.

3국의 약 50여명.

트라프로넨과 영혼 기사들 및 순찰대 40여명.

1명 1명이 거대하기 짝이 없는 거인들 67명.

이들이 띄엄띄엄 환인을 중심으로 포진해있으니 환인은 사람의 장막에 둘러싸인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냥 둘러싸인 것이 아닌 그들의 시선까지 전부 집중되고 있는 상황.

애초에 환인은 매주 산속에서 홀로 지내며 마음의 여유를 충전하던 인간이다. 한적하고 고즈넉하며 한가로움을 즐기는 환인에게 이런 환경은 말 그대로 독과 같다.

스트레스는 빠져나가지 않는데 쌓이기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환인은 우선 확보해야 할 정보를 생각하며 엘위드리스 가주 직속이라는 순찰대의 선임 조장이란 여자를 불러 취조를 진행한다.

“에어리스 선임 조장. 엘위드리스 가문 내 상황을 요구하겠습니다. 주관을 배제한 객관적인 사실만 부탁합니다.”

=…네. 현재 가문 내에는 크고 작은 파벌 일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최대 파벌인 원로파와 차기 가주로 유력한 이름리아 공녀파 2파전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나머지 다섯은 가문의 소사를 맡아 기반을 유지…….=

일단 환인의 데스노트 최상단에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원이 새겨진 상태.

에어리스를 통해 엘위드리스 가문의 권력 구조와 원로원의 역할, 그리고 차기 가주 선임을 위한 파벌 경연 중이라는 사실에 환인은 잠깐 이엘카타를 떠올렸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털어버린다.

이엘카타는 심약하고 수동적인 인간이다. 영주 같은 책임이 막중한 자리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

자신이 지구로 귀환하기 전까지는 영도에 있어 주는 것이 가장 도움이 된다.

“…….”

환인은 크샤나리가 데려온 수행원 중 하나가 수정구로 어딘가에 연락하는 것을 보았다.

메리아놀의 협의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썩어 문드러져 있을지는 저들의 이후 행동으로 알 수 있겠지.

만약 자신들의 이권과 배를 불리기 위해 자신의 암살 건을 두고 엘위드리스를 해체하려 하거나 삼켜버리고 자신에게는 대충 처벌했다는 시늉만 할 경우…….

환인은 두 배가량 늘어난 심핵력을 생각하며 눈빛을 차갑게 빛냈다.

딸꾹.

=저, 저……. 제가, 뭔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선임 조장 에어리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갑자기 남극의 칼바람 같은 살기 어린 눈빛을 드러낸 환인에게 딸꾹질하며 물었다.

“이제 됐습니다.”

듣고 싶은 것은 다 들었다.

일곱 파벌 중 원로원은 종족 우월주의가 심한 늙은이들의 집합소이며 이엘카타가 가문에서 쫓겨난 것도 원로 측의 입김이 강해서라는 것.

그런 원로들이 엘위드리스 가문 전체 권력의 40%를 차지했고 가주는 30, 공녀는 20가량, 강한 원로 측을 견제하기 위해 가주와 공녀파가 암중으로 힘을 합치고 있다는 것까지.

‘협의회의 엘위드리스 가문 개입은 확정일 테지.’

대성자 후보인 자신이 암살 시도를 당했단 것은 엄청난 일이다. 메리아놀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죄와 잘잘못을 엘위드리스 가문에 덮어씌우려 할 것이다.

마침 명분도 적당하다. 전견시로 보았던 그 사실을 공유하지 않았다는 듯하니.

현재로서는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어째서일까. 속에서 용암이 끓는 것처럼 뜨겁다.

메리아놀의 이면에서 차원 방랑자를 멋대로 소환해대고 있을 것으로 보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서 메리아놀에 자신의 영향력을 심거나 그들을 찢어지게 만들어야 한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

이해하고 있을 텐데 짜증과 분노가 자꾸만 들썩이는 느낌이다.

불안해하는 에어리스를 돌려보낸 환인의 귀에 약간의 기쁨과 환희가 섞인 족장의 외침이 들렸다.

=영혼사! 주술사의 상태 좀 봐라!=

“…….”

=봐라! 머리카락 색과 피부색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 주술사가 긍지를 이겨내고 있는 거지?!=

“예. 확실히 그녀의 영혼이 긍지를 이겨내고 있군요.=

=크하하! 그럼 그렇지! 주술사가 누군데! 암, 주술사라면 해낼 줄 알고 있었다고!=

양반다리로 앉아 크게 웃은 족장은 무릎을 꽝꽝 내려치며 웃다가 환인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모두 작은 영혼사 자네 덕분이다! 긍지를 우리 거인족의 혼이 이겨낸데다 앞으로의 살길마저 만들어주었으니까! 약속하지, 우리 거인족은 네가 도와달라 한다면 설령 땅끝 어디라도 달려가 전력으로 힘이 되어주겠다!!=

“굉장히 든든해지는 이야기군요. 아무래도…… 머지않아 힘을 빌려야 할 때가 올 듯하니까요.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맡겨달라고!! 크하하하하!!=

족장이 우레 같은 웃음을 터트리자 다른 거인들도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행동으로 기쁨을 표출한다.

그런 족장의 행동과 환인의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대꾸에 멀리서 환인의 여자친구들에게 가로막혀있던 3국 사절 대표들은 식은땀을 흘리거나 우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온건하고 평화적이어서 선하다고 할 수 있는 다른 영혼사들과 다르게 환인에게서 자신들과 비슷한 부류라는 것을 느낀 것.

암살자의 잘린 생 가슴을 가지고 갔던 유르파가 돌아온 것은 그때였다.

조금 심각한 얼굴로 다가온 유르파가 푸딩처럼 출렁이는 유방의 시뻘건 단면을 가리키며 말한다.

=자기? 여기에 걸려있던 주술을 분석한 결과가 나왔거든.=

“어떻습니까.”

=흔한…… 음, 걸려있는 주술의 수준은 흔한 게 아니지만, 아무튼 흔한 증거 인멸용 주술이야. 발동하면 새겨진 인물의 심장을 즉각 부순 뒤에 몸 내부를 급격하게 녹여버리는 거.=

“…….”

=술식을 역산해보면 5초 안에 몸 안을 완벽하게 핏물로 만들어버려. 5초 뒤에는 거죽만 남아있다가 그마저도 5초 뒤에 다 녹아버릴 거야. 자기도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환인이 제법 화가 나 있음을 오랜 시간 살을 섞어온 여자의 감으로 눈치챘기에 유르파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걸 쓰는 곳은 암살 집단뿐이야. 그리고 주술의 수준이 굉장히 높은 점으로 비춰봤을 때 저급한 집단도 아닐 것으로 생각해.=

주술 이식 대상을 빠르게 녹이면 녹일수록,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등급의 주술로 분류된다.

저급한 증거 말살용 주술은 시간 단위로 걸리는 편이며 중급은 대강 차 한잔 마실 시간.

“10초 만에 전부 녹인다면 대충 서너 곳으로 압축할 수 있겠군요.”

=맞아. 그리고 만약 저 인간이 진짜 암살 집단 소속이라면……. 트라프로넨 영성님?=

유르파는 확인을 위해 저쪽에서 거인들과 소통중인 영성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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