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8화 (568/813)

562 시주르 대평원

=허허…….=

메리아놀의 현 국왕이자 미리아스툼 왕가의 가장家長, 그라파든=사리올=미리아스툼의 권유에 사절의 총책임자로서 환인을 찾아온 하얀 나뭇잎이자 알세이시스 왕가의 왕족인 크샤나리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었다.

군단에 가까운 전력의 거인 60여 명. 자신이라 해도 1:1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적기사 이실리테와 성기사 안실라.

영혼사 계통의 유일 직업자인 성제까지.

저 모두가 이쪽을 향해 폭풍과도 같은 살기를 뿌리고 있다.

아무리 자신이 하얀 나뭇잎 무사단의 서열 3위인 8급 검성이라지만 저건 선 넘었다.

막말로 저쪽에 자신 정도 되는 인물이 63명인데 어쩌란 말인가.

종족 연합 국가 메리아놀은 수많은 종족이 모여 형성된 국가지만, 실상은 두 종족이 세력을 양분하고 자투리를 그 외 종족이 차지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메리아놀을 백분율로 나누면 플뢰족이 40, 프라우드족이 40, 그 외 종족이 20을 가진 것이다.

알기 쉽게 미국의 하원 의원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신목의 뿌리회에는 100개의 의석이 존재하고 그중 40석을 플뢰족이, 남은 40석은 니오네브레스의 여타 종족들이 나누는 것. 인구 분포 또한 그와 비슷하다.

그리고 현재 살기를 폭풍처럼 뿌리는 환인과 마주한 메리아놀의 사절들은 제법 복잡한 집단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먼저 메리아놀 협의회에서 환인과 우호 관계를 도모하기 위하여 직접 파견한 사절단 6명.

다수의 플뢰족, 소수의 프라우드족으로 이루어진 이 집단은 혜성처럼 나타나 입지와 능력 양쪽을 동시에 쌓아 올리며 니오네브레스 상위 계층 전체에 입소문을 타고 있는 환인과 흡사한 신분으로 꾸려져 있다.

플뢰족 알세이시스 왕가의 크샤나리와 프라우드족 드로거스 왕가의 다루그가 여기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환인과 직접적으로 얽히게 된 가문의 가주로써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가주가 직접 파견한 가주 직속 정예 순찰대, 포플러 센트의 9명.

원래 포플러 센트 2개 조 31명이 파견되었으나 많은 숫자가 나타나면 적대 행위로 비칠 수 있으며 이동 중 협의회의 사절과 마주쳤기에 22명은 현재 1km 바깥의 후방에서 대기 중이다.

마지막으로 엘위드리스 가문의 원로원 소속 비밀 정찰대, 아르겐테아의 8명.

현재 환인과 직접 마주하고 있는 숫자는 이 뿐이지만, 1km 바깥에서는 이들의 수행원과 조원들 170여 명이 대기 중이다.

나름 환인과 우호를 증진하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불필요한 전력은 남겨두고 필수 인원만 찾아온 것이다.

그랬는데 상황이 영 이상하게…… 아니,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중이었다.

‘미리아스툼 전하께서 하신 말씀이 이거였나…….’

황혼에 접어든 나이지만 외모는 젊은 크샤나리는 품위 없이 치밀어오르려는 한숨을 꾹 누르며 희귀한 녹색 쿠에를 탄 성제, 적의를 가감 없이 보내는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 참으로 면목이 없군. 머저리라 욕하여도 달게 받아들이겠네.=

“…….”

=본인은 플뢰족 알세이시스 왕실의 제3 왕자 크샤나리 루올 알세이시스일세. 참으로 가당치 않게 느껴지겠으나…… 부디 5분만 시간을 줄 수 없겠나? 알세이시스 왕가의 이름으로 부탁하네.=

환인은 푸른 머리카락의 제법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 플뢰의 이야기에 묵묵히 시선만 보냈다.

그걸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크샤나리는 환인에게 등을 보인 뒤…….

=다루그. 미안하네. 양해해주게.=

=…….=

자신과 비슷한 신분인 프라우드족 흑철의 전투사인 다루그에게 양해를 보인 뒤 이 사달을 저지른 흉수들에게 검기를 뿌렸다.

서걱- 스각—

약관의 나이에 전사로 각성하여 300년간 검 한 자루만으로 검성이 된 크샤나리의 푸른색 레이피어가 새빨간 빛을 머금고 빛살처럼 움직여 아르겐테아 정찰대의 양팔을 깔끔하게 날려버린다.

=크악!=

=끄윽……!=

눈 깜짝할 사이 두 팔이 날아간 플뢰들이 무력화되어 비명을 지를 때, 푸른색과 붉은색의 선이 재차 움직여 무릎을 꿇거나 넘어지는 자들의 명치와 아랫배를 갈라버린다.

정령술을 다루기 위한 근본인 정령근, 그리고 위상력을 담아두는 그릇인 위상전을 파괴한 것이다.

두 가지가 파괴된 아르겐테아 정찰대원들이 삽시간에 나이를 먹으며 중년과 노년으로 변해버렸다.

=으, 으으으…….=

=허으, 어으으으.=

크샤나리는 그런 자들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줄곧 불온한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설마 영도의 대성자 후보인 성제를 공격할까 싶어 내버려 두었었다. 여기서 영식靈食을 일으킨다는 것은 4대 국가의 고위 인사들을 전부 싸잡아 죽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니, 그게 목적인가.’

저들은 예언자 가문으로 이름 높은 엘위드리스의 일원들.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크샤나리. 놈들의 품에서 자폭기가 느껴진다.=

=…….=

다루그의 바위 같은 목소리에 크샤나리의 애병이 재차 뱀처럼 여덟의 플뢰의 몸을 훑었다.

2초 후 아르겐테아 정찰대원들의 의복과 가죽, 사슬 갑주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늙어버린 남녀 여덟이 알몸으로 화한다.

크샤나리는 무심한 눈으로 양팔을 잃고 버르적거리는 자들을 응시하면서 좀전의 일을 떠올렸다.

‘공녀파의 핀레셀덴이라 하였나. 그 아이가 이쪽도 눈치 못 채고 파리한 얼굴로 떠날 때 알아보았어야 했거늘.’

틀림없이 성제의 진면목을 깨닫고 도망치듯이 떠난 것일 터.

붙잡고 물어보았어야 했지만 늦었다.

이쪽과는 암울한 전력 차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본 크샤나리는 적기사와 성기사가 저격수를 무력화시키고 신체검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성제는 여전히 심연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응시 중.

‘폭풍이 몰아치겠어.’

크샤나리는 멍하니 서 있는 포플러 센트 순찰대를 향해 레이피어를 겨누었다.

=자네들은 이자들과 다른 파벌이라 했나.=

=……예. 이들은 원로파의 정찰대 아르겐테아, 저희는 가주님 직속의 순찰대 포플러 센트입니다.=

=그런가. 그렇다고 하여도 자네들이나 저자들이나 한솥밥을 먹은 일문의 사이. 무장을 해제해주어야겠네.=

=허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상황이 전부 본국에 전송되고 있으니까.=

=……그러니 자네들의 가문을 위해서, 나아가 메리아놀을 위해서라도 얌전히 투항하게. 메리아놀은 성제 예하와 마찰을 빚고자 함이 아님을 보여드려야 하니 말일세.=

크샤나리의 차분한 발언과 다루그의 묵직한 목소리에 포플러 센트의 선임 조장 에어리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까 중급 바람 정령으로 기막을 형성해 통신할 때 막았어야 했나.

아니, 처음부터 때려잡아서라도 끌고 갔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까.

이대로라면 자신들 가문 내에서 벌어진 특급 기밀이 새어나갈수도 있는 상황.

일급 보좌관을 통해 하달된 가주님의 지령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책감, 주도 패시지의 두 왕가와 척을 지게 되었다는 암담함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가문이 다른 의미에서의 화마에 휩싸이는 미래를 떠올리고 있을 때, 노인이 되어버린 아르겐테아의 조장이라는 자가 악을 썼다.

=이…… 배신자 놈들! 쿨럭쿨럭. 저, 저자는 우리 가문을 불태우고 엘위드리스 가문을 멸족시킬 사악한 마왕이다……! 마왕이 우리만 불태울 것 같은가…?! 저자의 발걸음에 메리아놀의 전 국토가……!=

으적!

=머리 복잡해지니 그 입 좀 다물게.=

상황을 자꾸만 최악으로 몰고 가려 하는 놈의 주둥이를 하얀 구두 뒷굽으로 짓밟아 으깨버린 크샤나리는 포플러 센트 순찰대를 노려보며 으름장을 놓았다.

=뭣들 하나. 본인은 지금 초조해서 자네들을 모두 도륙 내버리고 싶은 심정일세. 성제님은 오히려 영혼 상태인 자네들을 더 원하실지 모르지. 어찌하겠나. 얼른 결정하게.=

=다들… 무장을 해제해라…….=

=옷가지도 남김없이 벗게.=

=……예.=

엘위드리스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장녀인 에어리스는 치욕보다 절망을 느끼며 장비와 옷가지를 전부 벗기 시작했다.

절그럭, 땡그렁- 투둑.

장비가, 옷가지가 하나씩 떨어지며 결혼도 하지 않은 귀족 가문 처녀의 맨살이 드러나자 조원들도 암담함에 우울한 얼굴로 팬티만 남기고 전부 탈의를 끝마친다.

그걸 본 크샤나리도 한숨을 내쉬고는 애병 사파이어 스팅을 내려놓고 다루그도 푸욱, 콧김을 내뿜으면서 거대한 암플레이트armplate로 변신하는 금강 장갑을 벗어 옆에 둔다.

마지막으로 크샤나리는 환인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이쪽이 죄인일세. 본국은 자네를 암살하려 한 자들을 최대한 빨리 색출하여 잡을 것을 약속하겠네. 용서해달라 청하진 않을 것일세. 그저 아량을 바랄 뿐…….=

크샤나리의 옆과 뒤로 다루그와 그들의 수행원 넷이 똑같이 무릎 꿇고 속옷만 입은 포플러 센트의 순찰대도 무릎을 꿇는다.

“…….”

환인은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던 플뢰들을 응시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크샤나리 님과 다루그 님은 일어서십시오. 남들 앞에서 함부로 무릎을 꿇어선 안 되는 신분이지 않습니까.”

=……그대의 넓은 관용과 아량에 감읍할 따름일세.=

=…….=

“크샤나리 님에게 묻겠습니다. 엘위드리스 가문이 절 암살하려 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대답하기 민망하나…… 알지 못하네.=

그 대답에 환인은 투기를 예리하게 가다듬으며 자신이 이엘카타를 만나게 된 경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3분에 걸쳐 간략히 설명해주었다.

엘위드리스가 그렇게 덮으려 하던 내막의 핵심을 알게 된 크샤나리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다루그는 돌덩어리 같은 팔뚝으로 팔짱을 끼며 흥! 커다랗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 그 자식들 언제고 그럴 줄 알았지! 예언이 떨어지면 땅신님의 말씀인 양 목에 핏대를 세우고 간질 발작을 떨어대는 머저리 귀쟁이들!=

“엘위드리스의 핀레셀덴 공자가 몇 시간 전, 날 찾아와 전면적인 항복을 언급했습니다. 전견시로 본 미래가 어떠하였든, 그것으로 벌어지지 않은 일로 발생하려는 문제를 봉합했다 여겼습니다.”

환인은 이야기하며 실루엣 메어 영혼 다섯을 뭉쳐 영혼 폭발을 만드는 한편 심핵력과 영기를 동시에 밀어 넣는다.

웅- 웅웅웅웅웅웅……!!

그의 손바닥 위로 떠오른 황금빛 구체가 위험해 보이는 진동과 에너지의 파동을 뿌리기 시작하니 그 위력을 알아본 자들의 표정이 사색으로 변했다.

환인은 인정이라곤 참새 눈물만큼도 없는 시선으로 늙은이 무리가 된 아르겐테아 정찰대와 헐벗어 젖가슴이며 맨가슴을 드러낸 포플러 센트 순찰대원들을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그랬는데 어처구니가 없군요. 엘위드리스 가문은 예언자의 가문이라 하더니, 자기실현적인 의미에서 예언자 가문이었나 봅니다.”

저, 저게 터지면 이 근방 수백 미터는 깡그리 날아가겠는데?!

우리까지 죽일 생각인 건가…!

사비족이 모인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환인이 재차 입을 떼려 했을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려—!!……

두두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쿠에 발굽 소리와 함께 환인의 귀에 다소 익숙한 남자의 고함이 희미하게 날아들었다.

반대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응한 거인들이 뒤를 돌며 주먹을 불끈 쥔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금방이라도 달려 나갈듯한 거인들을 자제한 환인은 영도의 지역순행기관장, 루크랑 치타족의 트라프로넨 영성이 회색 쿠에를 타고 홀로 질주해오는 모습에 눈길을 주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로 오는 걸까. 어떻게 알고…….

‘이엘카타인가.’

좀 더 시선을 멀리하자 야트막한 구릉에 가려져 있던 일단의 영혼 기사들 무리가 우르르 나타난다.

“…….”

환인은 잠시 불길한 음을 내며 진동하는 황금색 영혼 폭발 구슬을 보다가 심핵력과 영기를 회수하고 비상에게 말해 지상에 내려섰다.

그러자 달리는 걸 좋아하는 회색 쿠에가 눈이 뒤집혀 침을 질질 흘릴 정도로 급히 달려온 트라프로넨이 훌쩍 뛰어내려 10년 감수했다는 표정으로 환인의 팔을 잡았다.

=성제님, 분노하는 마음은 알고 있으나 대성녀님을 보아서라도 제발 참아줘! 그런 걸 쐈다간 시주르 대평원 전체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불모지가 되고 마니까!=

“……과장입니다. 저는 암살을 사주한 자들의 목숨만 거둘 생각으로…….”

=아니아니아니! 성제님은 여러모로 우리 영성과 규격 자체가 다른 인물이라는 걸 알아야지?! 성제님이 흑옥으로 터트리는 혼령탄은 우리 영성 다섯이 펼치는 혼령주에 버금갈 거라는 예측이 파다하다니까?!=

“…….”

호들갑이라고 보기에는 진심이 가득하다. 그 증거로 안느가 당황과 곤혹을 살짝 드러내며 자신을 힐끔거리는 중.

=하—…….=

그의 팔을 잡은 채 십년감수했다는 듯이 땅에 한숨을 푸우욱 내쉬었던 트라프로넨은 이윽고 환인에게서 멀어져 실례했다는 것처럼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 차례 쿵쿵, 쳤다.

=늦지 않아 다행이야. 아니, 성제님이 공격받기 전에 도착해야 했지만, 오는 길에 괴물 무리와 우연히 만나는 바람에 그만 늦어버렸어.=

“……대성녀님이 보내셨습니까.”

=그래. 이엘카타가 불과 엊그저께 미래 하나를 예지했고 대성녀님이 급히 나와 저 녀석들을 급파한 거지.=

그즈음 도착한 영혼 기사들과 영도의 수비대 40여 명이 기절할 듯이 휘청거리는 쿠에들의 등에서 내려 일사불란하게 트라프로넨 영성의 뒤에 늘어선다.

살짝 미간을 모은 환인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줄곧 묵묵히 투기만을 내뿜던 족장이 입을 열었다.

=영혼사. 그 작은 인간들은 적이 아닌 건가?=

=으음? 이봐, 사자 갈기 거인. 우린 성제님과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야.=

=그래? 나는 이 작은 영혼사와 친구인 족장이다.=

=그렇군, 자네가 그 거인이구만? 난 트라프로넨, 친구들은 트라프라고 부르지. 가족의 친구는 내 친구이기도 한 법. 잘 부탁해.=

=크흐흐. 마음에 드는군. 나도 잘 부탁한다.=

“…….”

환인은 자신의 중재 없이도 순식간에 친해져서 시시덕거리는 족장과 트라프로넨을 바라보다 영도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에 대해서는 미래 예지를 못 한다고 이엘카타 본인에게 들었다. 그 말은 주변 인물들…… 엘위드리스 가문 사람들로 예지해서 이 장면을 본 건가.

‘지금 온 것은 읽는 게 늦었기 때문이겠지. 그렇다면…….’

트라프로넨이 족장에게 아는척한 것을 보면 대성녀는 자신이 거인족을 영도로 보내려 한다는 것도 읽었을 것이다.

40명이나 되는 영혼 기사와 수비대를 보낸 것을 보면 확실하다.

환인은 이쪽을 향해 촉각을 곤두세워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는 3개국 사절들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라드세아 성궁과 벨티칼에서 온 사비족 전사들은 두고…….

“…….”

10초 정도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자신을 향해 정체불명의 탄환을 쏜 저격수에게 다가가 영혼의 눈으로 상태를 살핀다.

안느와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의 회색 머리카락을 한 여자.

급히 날리느라 영기 충전도, 중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그 덕에 피투성이에 영혼이 걸레짝이 되었을지언정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

소지품은 이실리테와 안느가 제대로 제거했는지 위상력이나 마력이 깃든 물건은 하나도 없다. 몸에는…….

부우욱—

옷깃을 잡고 좌우로 뜯어버리자 머리만 한 유방 한 쌍이 출렁하고 쏟아진다.

환인은 몸의 마력이 왼쪽 젖가슴 쪽으로 부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을 보고 백려강에게 기사검을 받아 그 왼쪽 젖가슴을 서걱, 잘라버렸다.

“유르파. 여기에 주술적인 처리가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뭔지 알아봐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디…….=

유르파에게 생피가 흐르는 젖가슴을 넘겨주고 저격수의 나머지 옷가지도 찢어 다른 부위까지 살핀 환인은 안느에게 잘라버린 가슴을 치료해주라고 한 뒤 트라프로넨에게 저격수 여자를 넘겼다.

“영혼에 큰 타격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상태입니다. 영도로 데려가서 치료한 뒤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알았어. 술식기관에 넘기면서 아야빗한테 말해두지.=

=트라프 님. 그것도 말씀드려야 하지 않습니까…….=

=응?=

직속 영혼 기사 같은 남자가 트라프로넨에게 속삭이는 것을 본 환인은 플뢰족에게 가려던 발걸음을 잠시 멈춘다.

=그, 프슈드…….=

=아! 맞아맞아. 서두르느라 깜빡했구만. 성제님, 잠깐만.=

트라프로넨이 이끄는 대로 걸어가자 그의 입에서 대성녀가 엘위드리스 가문의 가주, 프슈드=오울=엘위드리스라는 남자와 밀담을 나누었다는 소식이 조그만 목소리로 흘러나온다.

=엘위드리스 가문의 현 가주는 신비궁사라고 부르는 희귀 직업자인데 9급에 근접한 초절의 궁수라지. 그가 대성녀님께 자초지종과 가문의 사정을 이야기해주면서 성제님이랑은 마찰을 빚을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더라.=

“…….”

=문제를 일으킨다면 원로파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는데……. 만약 일이 벌어지면 대성녀님은 성제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셨어. 어쩔래?=

“……저기 노인이 된 자들이 원로파라고 하는 것 같더군요. 이 저격수와 밀약을 맺은 것 같다고 동료가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흠.=

“대성녀님께 통신을 넣어 어찌해야 할지 여쭙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금은 그러기 어렵겠지요. 일단 저자들도 트라프로넨이 데려가는 것은 어떻습니까.”

트라프로넨은 보송보송한 하얀 털이 난 아래턱을 긁으며 잠시 생각하더니 환인에게 조용히 의견을 전달했다.

=일단은 저것들을 데려오지? 아직 밤이기도 하고 내일 정오까진 기다릴 수 있으니까.=

“흠……. 일단은 둘만 남기겠습니다.”

=……나머진 혼옥으로 만들게?=

“안됩니까.”

=안될 거야 없지? 영혼사가 영혼에 벌을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소관이니까.=

그리 말한 트라프로넨은 환인의 왼팔을 힐끔 보곤 노파심이라며 이야기한다.

=보아하니 아직 여덟 개 뿐인 거 같지만, 너무 많은 수를 혼옥으로 만들지는 마. 혼고의 소재는 성제님의 영혼이야. 영혼의 그릇에 다른 영혼이 많이 담겨있어봤자 좋을 게 없어.=

“명심하겠습니다.”

날이 서 있음에도 예의 바른 환인의 대꾸에 트라프로넨은 치타의 얼굴로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노화 방지 마도구도 잘 쓰고 있구만. 여자친구들이랑 오래오래 기분 좋은 걸 하려면 젊었을 때부터 관리하는 게 중요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건 안 벗는 게 좋아.=

그러더니 찡긋, 윙크해주는 트라프로넨이다.

그의 거리감이 절묘한 친화적인 태도에 환인은 작게 쓴웃음을 지은 뒤 이실리테와 안느를 데리고 메리아놀 사절들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잠깐 사이 피로가 표정에서 조금 드러나게 된 크샤나리와 다루그가 긴장하고, 환인은 그 두 명에게 노인이 된 자들을 가리키며 조용히 물었다.

“이 자들을 제가 끌고 가는 것에 이견 있으십니까.”

=입이 있다 한들 구차한 말을 어찌 늘어놓을 수 있겠소. 성제께서 원하는 대로 하시오.=

순순히 넘겨주는 크샤나리는 그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무릎 꿇은 것을 두고 체면을 지켜주었다고 여겨 호의를 가진 상태.

훗날 메리아놀의 치부를 뒤집을 일을 염두에 두어 관계성을 가질 다리를 놓을 생각으로 배려해주었던 것이기에 환인은 그런 크샤나리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사태의 배후에 관해서는 영도에서 연락을 드리도록 언질을 줘놓겠습니다.”

=그리만 해준다면 이 늙은이는 더 바랄 나위가 없소. 성제님의 배려에 감사하오.=

=고맙네.=

플뢰와 프라우드 두 남자의 인사를 받아준 환인은 트라프로넨에게 손짓해 신호를 주었고, 트라프로넨은 즉시 영혼 기사들과 함께 다가와 늙어버린 자들을 끌고 간다.

그사이 환인은 얇은 팬티만 입은 플뢰족 남녀 아홉에게 다가가 물었다.

“당신들 소속은 어떻게 되지.”

=엘위드리스 가문의 가주 직속 순찰대, 포플러 센트 2조와 3조입니다. 저는 가주님께 임시 서임을 받은 선임 조장, 에어리스 리프리라고 합니다.=

열중쉬어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플뢰 여자의 반라 모습에 환인은 옷자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옷은 걸치고 트라프로넨 영성님을 따라가도록. 당신들의 처우는 영도에서 결정할 것이다.”

=…예! 그리고 성제 예하, 여기서 1km 바깥에 저희 포플러 센트 순찰대의 남은 조원 22명이 대기 중입니다만, 그들은…….=

확실하지 않지만 가주의 행적과 공녀파의 움직임을 본다면 원로원 측과 대대적인 피바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그때 힘이 부족하면 이쪽에 나름 호의를 어필하는 가주 측과 공녀 측이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 머릿수는 되돌려 보내는 것이 좋겠지.

잠시 생각하던 환인은 남은 자들을 인솔할 책임자 한 명만 제외하고 모두 트라프로넨을 따라갈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일단 교통정리를 끝내놓은 환인은…….

=이 두 놈이야.=

트라프로넨이 가리키는 둘만 제외. 아르겐테아 정찰대 나머지 여섯의 목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쳐 날렸다.

각자 원한과 분노와 공포와 좌절과 두려움이 묻어나는 머리통이 날아가 구르고 잘린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오른다.

사람의 목을 망설임 없이 쳐버리는 광경이지만, 3국의 사절들은 인상을 찌푸리기보단 환인의 성정이 어떠한지 읽고 이제부터 있을 대화의 장에 어찌 대입할지를 먼저 머릴 굴렸다.

‘냉철하고 냉혹하다. 하지만 상대를 예우할 줄도 알아.’

‘능력은 거인들마저도 친구로 인정하게 만들 정도. 영성도 명백히 손윗사람으로 대하니 대성자 후보인 것은 정확한 소문이었군…….’

‘메리아놀의 두 남자를 대우해준 걸 보면 머리도 똑똑해. 호천명 학사장님 말씀대로야.’

그런 그들이 내놓은 결론은 하나였다.

‘간단하지 않아.’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 모인 모두에게 전투를 걸 것처럼 분노했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분노를 갈무리하고 이성적으로 움직여 상황을 일시적이나마 봉합했다.

그 말은 분노를 억누르는 견고한 이성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억눌려진 분노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라드세아, 메리아놀, 벨티칼 3국의 눈치 게임이 시작되었다.

이 눈치 게임에서 가장 불리한 쪽은 메리아놀 측이었다.

메리아놀의 플뢰족 가문 중 하나의 독단 탓에 영식이 발동하여 모두가 죽을 뻔한 상황이었으니까.

라드세아 측의 사절 대표인 전쟁 학사 유연과 보좌관 돈, 벨티칼 측의 대표인 최고 전사 청과 만엽이 으흠, 어흠, 정중하면서도 메리아놀의 크샤나리와 다루그에게 신경전을 거는 모습으로 환인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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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검의 달인이 되면서 쌓은 눈칫밥과 짬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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