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5화 (565/813)

559 거인숲 미궁

니오네브레스에서 비술이나 술법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코딩으로 비유할 수 있다.

술식을 짜는 데 실수가 있으면 아예 발동하지 않기도 하고 술식이 덕지덕지 붙으면 효율이 안 좋아지거나 최악에는 엉뚱한 효과가 발동되기도 한다.

반면 술식을 깔끔하고 술식 간에 유기적으로 연동되도록 정확하고 완벽하게 짜놓으면 매우 높은 효율로 매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 해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목적을 분명히 해서 술식을 짰기에 기타 용도로 사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범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축소화 비술과 소형화 비술이 바로 그 예시가 된다.

축소화 비술은 주목적이 무생물의 크기를 축소해 운반과 소지를 편리하게 하고자 함이다.

여기서 초점은 무생물이다.

축소의 개념상 가장 큰 효율과 효과를 내는 것은 무생물이지만, 분류와 효과 측면에서 보면 생물에게도 쓸 수 있다.

하지만 용도에 조금 벗어나는 사용이기에 그 효과는 무생물에게 걸었을 때보다 한참 떨어진다. 짜놓은 술식이 대상과 어울리지 않아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 말이다.

여기서 뛰어난 실력의 비술사는 이러한 부작용의 발생을 최대한 막고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예외 구문 등으로 피해를 흘려보낼 술식을 짜 넣는다.

유르파가 생물에 거는 축소화 비술의 연구 필요성을 처음 느낀 건 환인과 함께 차원 이동에 휩쓸려 지구에 넘어간 뒤 비상에게 축소화를 걸었을 때였다.

일류 비술사일수록 비술이 높은 효율, 강한 효과, 안전함을 갖추는데 유르파는 그 일류에 포함되고도 남는 실력자.

그랬기에 축소화를 비상에게 걸었어도 부작용 없이 ‘무려’ 30분이나 되는 지속시간을 줄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저 막연하게 ‘축소화 비술을 좀 개량해야 하나…?’정도였고 의욕도 크지 않았었다.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문물에 정신을 빼앗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환인이 지구로 다시 넘어가려다 쿠에들을 이유로 차선책을 골랐을 때 ‘축소화 비술 개량’에 본격적인 관심과 의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인숲 미궁으로 향할 때, 그리고 미궁 안에서 축소화 비술의 개량 이론을 머릿속으로 진행하였으며 마악 그 성과가 나왔을 때…….

‘격리 변화형 미궁인 이곳의 자그마한 출구로 거인들이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한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개량 축소화 비술, 소형화라 명명한 비술을 써볼 기회가 찾아왔다.

유르파는 기뻤다. 자신의 실력을 사랑하는 남자에게 뽐낼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부여 비술 전문 술사는 가뜩이나 수수해서 능력을 뽐낼 기회가 별로 없다. 가끔 있는 것도 요청받은 마도구를 만들어낼 때뿐.

그런 기회는 평소 뛰어난 무력을 드러내는 이실리테나 안느와 비교하면 초라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유르파는 새하얀 머리를 뒤로 질끈 동여매 의욕을 드러내며 환인의 요청에 소형화 비술을 본격적으로 다듬는 한편, 그가 부탁한 단거리 공간 이동 술법진의 설치도 준비한다.

그녀의 곁에서 함께 공부하며 나름 술법 지식을 쌓은 백려강의 보조, 다중 검기를 활용하며 공간 지각 능력이 성장한 이실리테의 도움으로 단거리 공간 이동 술법진(대형)은 빠르게 형체를 잡아나갔다.

하루 뒤, 거인들의 확장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미궁 출입구.

딱히 도울 게 없어 천으로 둘둘 감은 심핵을 곁에 두고 지키며 유르파의 말 상대를 해주던 안느는 그녀가 해준 축소화 비술의 이야기에 ‘응?’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율이 언니, 그냥 축소화 비술을 써서 미궁을 나가면 안 돼? 10배나 축소해준다며.=

축소화 비술로 생명체를 축소하면 20분에서 50분 사이의 지속시간과 대충 1/8~1/10스케일 정도의 축소가 이루어진다.

키가 25m 정도라면 축소화 비술을 걸었을 때 2.5m 정도의 키로 줄어든다는 이야기.

유르파는 하루 만에 그려진 최단 거리 공간 이동 술법진의 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술법진에 박을 위상석을 고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비상이를 거위 크기 정도로 줄이는 거랑 25m 키의 거인을 2.5m 정도로 줄이는 건 질량의 변동량 자체가 어마무지 차이 난다는 이야기거든?=

=……아. 대상이 크면 클수록 술법에 가해지는 부하가 커지는 거네.=

=응. 거인들한테 축소화 비술을 걸면 지속시간이 10초나 될까. 크기마저도 얼마 못 줄여. 가만히 아무런 변동도 없는 무생물이랑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물에게 거는 방식은 같으면서도 다르니까.=

2천 마리에 가까운 실루엣 메어를 죽인 덕에 위상석은 많이 확보했다.

마수나 마물도 아니고 이형종도 아닌 어중간한 괴물이다 보니 채집한 위상석도 5~6급이 아니라 1급부터 4급까지 다양해 큰 돈은 아니지만, 비술을 쓰거나 마도 제품을 만드는 데는 흘러넘친다.

30개 정도의 3급 위상석을 골라낸 유르파는 허리를 펴고 거인들이 4교대로 출입구의 벽과 천장을 파내고 무너트리며 한창 확장 공사 중인 입구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현재 목표는 1/10의 비례 축소와 10분의 지속시간에 안정성 증가야. 축소비율이랑 지속시간은 해결했는데 안정성이 조금 문제라서 배운 술식을 짜 맞추는 중이거든? 그런데…….=

=…….=

유르파가 고개를 돌리자 안느의 시선도 덩달아 돌아간다. 그 시선의 끝에는 입구 한쪽에 고이 눕혀져 있는 주술사와 그런 주술사를 주시 중인 환인이 있었다.

몇 시간 전, 주술사의 허벅지에 영혼 화살을 한 발 쏜 환인의 분위기는 여자친구인 그녀들도 함부로 말을 걸기 어려운 상태였다.

거인들은 그런 환인을 두려워하는 모습으로 슬슬 근처를 피하는 상황.

=……비술의 안정성은 심신 상태가 큰 영향을 줘. 그래서 여차하면 자기한테 평온의 파동으로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단 말이야.=

하지만 저렇게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거인들한테 겁주고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고민되는 게 사실이다.

말하면 평온의 파동 정도는 얼마든지 써주겠지만, 거인들은 겁을 집어먹은 상태.

감정이 격해지면 평온의 파동 효과가 줄어드니 비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것이다.

안느는 언니가 못한 말을 이해하고 으음,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확실히 지금 가서 도령한테 살기가 너무 짙다고 말하는 것도 좀 그렇……?=

말하던 안느는 수상한 소릴 들은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며 한쪽 방향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뭐야, 저것들?’

웬 사람들이 미궁 안쪽에서 수풀을 헤치며 걸어오는 게 보인다.

가장 높은 등급이 5급, 나머지는 4급인 4명의 파티.

언제 미궁에 들어왔지? 게다가 안쪽에서 나와? 그저께는 미궁을 헤집느라 실루엣 메어도 미쳐 날뛰어 무척 위험했을 텐데?

안느는 그 사람들이 플뢰족이란 사실에 1차로 불안을 느꼈을 무렵, 출입구 계단 쪽에서 환연이 쌩하니 환인에게 날아가는 것을 발견하고 2차로 불안을 직감했다.

=으응? 연이 쟤는 이슬이 아가씨랑 바깥 통로 확장하러 나갔으면서 왜 혼자 돌아오니?=

=아…… 안 되는데…….=

그렇게 불안에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 환인을 향해 날아가며 소리치는 환연의 목소리에 불안이 적중했음을 깨달은 안느는 눈을 감아버렸다.

「환인! 밖에 플뢰들이 왕창 찾아왔어! 이실리테는 밖에서 혼자 플뢰들을 막고 있는데 어떻게 해?!」

=앗…… 어떡하니.=

유르파가 하던 일도 멈추고 반사적으로 그리 말했을 정도로 환인에게서 한순간 살기의 양이 끔찍하게 늘었다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게 뭘 뜻하는가.

심핵을 지켜야 한다는 임무와 환인을 좌우에 두고 잠깐 고민한 안느는 심핵을 들쳐메고 환인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 불렀다.

=도령.=

“안느인가. 마침 잘 왔다. 심핵은 거기에 두고 빨리 나가서 이실리테를 적당히 다독이며 시간을 끌어라. 그 사람들이 미궁에 들어오게는 하지 말고.=

=어? 어.=

방금의 끔찍한 살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담담하고 태연한 목소리에 안느는 물어보려던 것도 잊고 고개를 끄덕인다.

“환연, 안느와 함께 따라 나가서 주변을 지켜라. 혹 싸움이 벌어지면 릴라이스를 불러서 다 쓸어버려도 된다.=

「알았어. ……저기, 괜찮아?」

“조금 화가 나지만 괜찮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리 대답한 환인은 삐이익, 손가락 휘파람을 강하게 불어 하늘에서 감시 임무중인 비상을 불러들였다.

잠시 후 푸드득, 날갯짓 소리와 함께 플뢰족이 다가오는 방향과 100도 가까이 차이 나는 위치에서 숲을 뚫고 비상이 쏜살같이 날아온다.

날아오다 말고 입구로 접근 중인 플뢰족을 발견하곤 응? 저것들은 갑자기 어디서 나온 거지? 하는 것처럼 힐끔거리다 환인의 옆에 내려서는 비상.

이어서 뀨뀨, 날개를 퍼덕거리며 무언가를 설명한다.

“……저들이 보이지 않았었다고.”

뀨으. 큣!

“…….”

주변을 낱낱이 정찰 중이었는데 저것들이 오는 건 못 봤다는 이야기에 환인은 무심한 눈초리로 접근중인 플뢰들을 응시했다.

비상의 눈은 하늘 높은 곳에서 수십 킬로미터 밖의 자그마한 뿔토끼를 발견할 만큼 시력이 뛰어나다.

시킨 걸 농땡이 치거나 하는 성격도 아니니 저 플뢰들은 은신이 장기라는 뜻이겠지.

마침 넷 다 엽사 직업자. 신빙성이 높은 가설이다. 그 말은…….

“비상, 혹시 모르니 이걸 등에 짊어지고 있어라. 내게서 멀리 떨어지지는 말고.”

뀨우!

환인은 안느가 두고 간 심핵을 비상의 등에 실었을 때, 거인들을 진두지휘하며 미궁 출입구를 넓히던 백려강이 실루를 품에 안고 달려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도 달려오며 저쪽에서 적의가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고 천천히 접근하는 4명의 플뢰족을 보았는지 그쪽을 힐끔거린다.

=환인 님. 안느 언니가 가보라고 하셔서 왔는데…… 저들이 혹시 그 추격자들인가요?.=

“그래. 백려강, 바람으로 기척을 감지하는 건 어느 정도로 숙달됐지.”

=비상이랑 연습을 많이 해서, 강아지보다 작은 것들은 어렵지만 숨어있는 사람 정도는 기척을 감지해낼 수 있게 됐어요. 찾아볼까요?=

“부탁한다.”

=넷.=

백려강에게 지시를 내린 환인도 어제부터 계속 발동시켜놓았던 영혼의 눈으로 주변을 낱낱이 살핀다.

유르파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거동 수상자들을 바라보다가 환인에게 물었다.

=자기, 술법진을 완성하긴 했는데 감추는 게 좋을까……? 거인들이 저 작업을 하고 있어서 감춰봤자 소용없으려나. 일단 저들이 술법진을 훼손할 가능성이 있으니 지키는 게…….=

“술법진이 중요하다지만 당신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멀리 가지 말고 제 근처에 계십시오.”

=으, 응.=

갑작스러운 속삭임에 달콤함을 느낀 유르파는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지팡이를 꺼내 전투가 벌어질 경우를 대비한다.

환인도 천칭을 꾹 쥔 채 남자 둘 여자 둘로 이루어진 그들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그들이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막았다.

“지금 저는 신경이 매우 날카로운 상태입니다. 제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즉시 미궁을 나가시고, 알고 있다면 잘 생각하고 입을 여는 게 좋을 겁니다.”

상당히 부유한 가문의 직계 혹은 방계인 듯, 유르파가 제작한 마도기에 버금가는 위상력 밀도의 녹색 가죽 갑옷을 착용한 남자가 두 손을 든 채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먼저…… 땅신님의 존체에 맹세코 우리는 성제님을 방해할 의도도, 성제님의 앞길을 가로막을 뜻도 없음을 밝힙니다.=

“…….”

갑자기 대면하자마자 신의 이름에 대고 맹세하는 플뢰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환인이 뚫어지게 쳐다보니 내심을 모두 꿰뚫어 보는 듯한 타오르는 황금빛 눈동자에 꿀꺽, 침을 삼킨 남자 플뢰는 침묵이 곧 허락이라 생각하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저는 메이신 섬의…….=

=공자님.=

남자는 뒤에서 들려온 자그마한 목소리에 담긴 제지의 뜻을 깨닫고 움찔, 어깨를 떨었다가 다시 입을 연다.

=제, 제 이름은 핀레셀덴, 성은 엘위드리스라고 합니다. 장자이신 누님, 이름리아 공녀의 뜻에 따라 성제님을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엘위드리스. 그 성姓이자 가문명에 백려강과 유르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엘카타의 전견시를 모두 들어 사정과 자초지종을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 그녀들의 눈빛은 한층 차가워진 정도로 끝났지만, 환인의 눈빛은 무기질의 유리알처럼 번들거리며 무형의 살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남자, 이름리아 공녀의 동생인 핀레셀덴은 가문의 멸문 예지가 뜬 이후 그 내용을 알게 된 누이의 지시에 따라 긴 시간을 라드세아에서 활동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눈앞의 남자, 성제가 얼마나 강하고 또 위험한 인물인지 그간의 조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생각했지만,

‘물렀어……!’

핀레셀덴은 자신의 판단이 물렀다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가문의 예지 부서가 어째서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그 난리를 쳤는지, 눈앞의 남자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 이제야 실감이 온다.

자신들 넷은 한 마리조차 상대할 수 없는 변종 실루엣 메어를 고작 하룻밤 사이 천수백 마리를 몰살시킨 사람.

거인이 모두 해치웠다고 보기에는 실루엣 메어의 사체가 보여주는 흔적은 너무 다양했다.

무언가에 찍혀 죽거나 밟혀 죽은 흔적은 1/5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이 베여 죽거나 터져 죽어있었고 어떤 흔적은 강대한 폭발에 휘말린 것처럼 갈기갈기 찢겨 죽어있었다.

핀레셀덴은 아둔하거나 멍청하지 않았다.

애초에 멍청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전견시와 자신이 직접 본 결과물을 따져 눈앞의 남자는 선 성향 따윈 절대 아니며, 적은 가차 없이 후손까지 불태워버릴… 적으로 삼아선 절대 안 되는 인물임을 알아차렸다.

‘애초에 적대할 생각도 없었지만.’

피부를 저미는 듯한 살기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공포를 호소하는 걸 억지로 다독인 핀레셀덴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고 입을 열었다.

=엘위드리스 가문의 공녀파는 누님과 저를 필두로, 성제님께 그 어떤 해가 될 행동도 하지 않을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

=바, 바라신다면 이엘카타 엘위드리스의 가문 내 위상의 복권과… 가주가 되길 바란다면,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끄으윽- 까아아악—!!!’

‘어째서 가만히 있는 저를 괴롭히다 못해 죽이려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아아아악-!! 당신… 당신이……! 우리 가문으을……! 집어삼키려…… 끄아아악-!’

‘당신의 가문 따위에는 관심 없습니다. 아니, 저는 이 세계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가만히 두면 알아서 떠나갔을 것을…….’

가문의 예지감 부서가 포착한 선명한 멸망의 예지 하나.

거기에서 성제로 확실시되는 남자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밝혔다.

자신들의 가문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 세계 자체에 관심이 없다고.

그 말은 이러저러한 대응을 할 필요 없이 그저 바람이 스쳐 지나가듯 파도가 밀려왔다 돌아가듯 지켜보고만 있으면 지나간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늙어서 머리가 굳은 가문의 원로들은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상대를 죽이네 마네 떠들고 있지만, 핀레셀덴은 성제와 마주한 순간 알 수 있었다.

‘우리 공녀파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바짝 엎드리는 방법뿐이야! 가문의 원로들은 전부 죽을 거다!’

멸망의 예지에서 성제와 대놓고 마주한 것은 비록 영혼 불에 타오르고 있을지언정 자신의 누이가 유일했다.

서자인 이엘카타나 가주는 그 예지의 풍경에 나와 있지도 않았고 원로와 가신들은 죄다 타 죽어가는 중이었다.

더욱이 중요한 사실 하나.

거인들이 입구를 파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제가 거인들까지 휘하에 넣었단 뜻이 아닌가.

거기다 6급이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괴물마저 천수백 마리를 몰살시킨 사람이다. 용을 한편으로 만들었고 숨이 턱 막히는 초월급 정령의 흔적을 마구 뿌리고 다니는 사람이란 말이다.

예언의 때는 머지않았다. 멸망의 예지를 피하려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조건 엎드려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

“…….”

환인은 핀레셀덴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진 자의 심리적 여유와 미래 예지로 가장 안전한 선택지를 골라낸 건가. 현명하다면 현명하다고 볼 수 있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대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을 것인가.

내심 한쪽에서는 ‘죽여! 모두 죽여서 푸른 영혼은 혼옥으로 만들어!’라는 마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중이지만, 환인은 그 모든 걸 무시했다.

황금빛 눈동자로 묵묵히 고개를 조아린 이엘카타의 이복형제를 1분가량 물끄러미 바라보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절 찾은 이유는 그것뿐입니까.”

=예, 예.=

“솔직함은 때때로 난국을 타개하는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

“이름리아 공녀, 핀레셀덴 공자. 그 이름 기억해두겠습니다.”

심장에 올려진 묵직한 무언가가 쑤욱 내려가는 오싹한 기분. 하지만 가벼워진 심장만큼이나 두려움이 차올라 오한이 온몸을 떨리게 만든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숙이고 있던 핀레셀덴은 덜덜 떨리려는 사지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일어네 기사적인 경례를 올렸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저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오른손의 장갑을 벗어 마법의 깃털 펜으로 16자리 숫자와 문자를 적어 환인의 옆에 서 있는 여성들을 힐끔거렸다.

그 시선에 유르파가 앞으로 나가니 핀레셀덴은 흡사 환인을 대하는 것처럼 공손히 장갑을 두 손으로 넘겨주었다.

=이름리아 공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수정구 번호입니다. 용무가 있으시다면 시간이 어떠하든… 개의치 마시고 연락주시면 됩니다.=

환인은 이엘카타처럼 금발금안의 조금 앳돼 보이는 미청년을 묵묵히 응시하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핀레셀덴은 뒤에서 용이 쫓아올 것 같은 공포를 느끼면서도 필사적으로 예의를 차려 미궁의 출구로 걸어갔다.

=환인 님. 반경 100m 안에 숨어있다거나 한 사람은 없어요.=

“그런가.”

=으음~. 안느 아가씨가 있었으면 진실의 주시자 선천 능력으로 거짓말을 바로 파악했을 텐데.=

“……괜찮습니다. 공녀파 쪽은 확실하게 겁을 집어먹었고 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으니 허튼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핀레셀덴은 분명 공녀파라고 했었다. 이엘카타가 해주었던 전견시에 따르면 자신의 앞에서 불타 죽는 여자가 바로 그 공녀.

그 외에는 도시 전체가 혼령주에 불타오르고 있었으니 엘위드리스 가문 내에 가장 세가 강한 것이 공녀파일 거다.

하지만 공녀파라고 파벌을 구분 짓는다면 다른 파벌도 있단 이야긴데, 보통 개짓거리는 세가 약한 파벌에서 저지르기 마련이다.

그 점을 생각해본다면…….

환인이 잠시 생각에 잠기자 후우, 긴장하느라 삼켰던 숨을 내쉰 유르파가 손바닥으로 바람을 부치며 입을 열었다.

=응, 알았어. 그럼 난 소형화 쪽을 좀 더 연구해볼게. 남은 건 안정성 확보인데, 탈출은 언제부터 시작할 거니?=

“…….”

원래 계획은 거인들이 길을 낸 뒤 그 어떤 술법이나 비술적인 보조 없이 차원막의 안전성을 검증한 뒤 위험 부담 없이 탈출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소형화 비술도 충분히 검증하고 이런저런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해봤을 텐데, 주술사를 살리기 위한 시간제한이 발생했다 보니 이것저것 고를 때가 아니다.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

“거인들이 길을 낸 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주술사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은 터라 오래 버티기 힘들 것 같군요.”

=으음. 그럴게. 려강 아가씨, 길을 뚫는데 얼마나 걸릴 거 같아?=

=통로 확장 작업은 아마도 7시간 뒤, 오늘 저녁쯤에 마무리될 것 같아요.=

=7시간인가…… 최대한 힘내볼게. 하지만 안정성을 높이는 데는 심리적 안정도 중요하거든? 만족할 만큼 확보하지 못하면 평온의 파동이 가진 힘을 좀 빌려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저도 거인들을 위압하지 않게끔 주의하겠습니다.”

환인의 작은 웃음이 더해진 이야기에 유르파는 내심이 들킨 기분이라 얼굴이 빨개졌다.

6시간 뒤.

와르르르— 쿠궁, 쾅- 콰광, 콰과광——

미궁 출구 쪽에서 암반이 무너지는 요란하고 거친 소리가 잠깐 이어진 뒤 거인들의 =뚫었다—!=, =우워~!= 포효 소리가 입구 근처를 쩌렁쩌렁 울렸다.

바깥쪽은 이미 땅 정령으로 입구 주변의 개방이 완료된 상태. 이제 계단을 막고 있는 흙을 모두 걷어내면 본격적인 탈출이 시작될 거다.

바깥 상황은 크게 변함이 없다.

5시간 전부터 1시간 간격으로 환연이 내려와 바깥 상황을 전달해주고 있는데 이미 미궁 입구에는 플뢰족과 루크랑족 각 30명 정도가 반쯤 대치하는 형국이며 이실리테와 안느, 환연 셋이 입구를 지키고 서서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중이다.

그리고 1시간 전에 환연이 왔을 때, 멀리서 플라비우스족과 사비족도 지켜보고 있다고 알려주어 니오네브레스의 4대 국가가 전부 이 한 곳에 모였다는 것이 확인된 상황.

환인은 주술사의 몸 안에서 5:5 정도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는 아이보리빛과 거무스름한 빛을 바라보았다.

지난 시간 꾸준히 서로를 밀어내며 힘겨루기를 하던 두 영혼은 현재 힘을 비축하는 것처럼 소극적인 반발을 일으키는 중.

아마도 다음 격전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뉠 것이다.

쿠궁, 쾅, 쿠구궁—

터덩, 쿠우웅, 쿠구구구—

위에서 굴러 떨어트리는지 집채만한 암석에서부터 사람 크기만한 바위까지 쉴 새 없이 쿵쿵거리며 계단을 타고 굴러 내려온다.

갈수록 내려오는 바위의 크기가 줄어드는 걸 보면 길도 거의 다 낸 상황.

때마침 백려강이 바람을 타고 활강하듯 날아와 상황을 전달해주었다.

=환인 님, 길을 다 내서 미궁의 차원막이 드러났어요. 길을 내는 것도 10분 안에 마무리될 거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백려강에게 거인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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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 흐으음. 환인 당신, 제법이군요. 하지만 아무리 당신이라해도 우릴 단번에 물리치진 못할겁니다.

환인: 5....

???: 5개월? 확실히 그정도 시간이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우리도 마냥 당하고만은.....

환인: 4....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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