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4화 (564/813)

558 거인의 마을

아직 어두운 거인족 마을을 가로질러 주술사의 집으로 돌아온 환인은 여자 친구들과 일행이 캠프장처럼 쓰고 있는 탁자의 가장자리에 모여 웅성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람이 중핵한테 감염될 수도 있는 거였니?=

=으음. 나도 이런 사례는 처음이라……. 주술사가 저리됐을 때는 아무 생각도 못 했어.=

=언니들. 주술사님이 감염된 경위가 어땠나요? 중핵이 주술사님을 직접 공격한 거예요?=

=야간의 첫 공습은 700여 마리가량 변종 실루엣 메어였어요. 그중에서 중핵이 안 보이는듯해서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중핵은 액체 괴물처럼…….=

=응. 정말 한 줌? 도령이 영혼 방패와 영혼 폭발로 막으려 했지만 그 정도 양이 피부에 붙으니까 몸 안으로 스며들어서 저렇게 되더라. 변이는 정말 한순간이었어.=

=…주인님이 응급처치를 하지 않으셨으면 주술사는 지금쯤 완전한 중핵이 됐을 거예요. 그 뒤로 2차 공세도 이어졌었고요.=

=으으음.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기존의 미궁 학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겠습니다. 사람에게 감염되는 중핵에 사람을 중핵화시키기도 하고 이 미궁의 생태도…….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어마어마한 요소니까요.=

=……가야, 너.=

안느가 미간을 찌푸리자 가야는 그런 거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걱정 마. 성제님께 한 맹세는 잊지 않았어.=

그녀들이 보고 있는 것은 집안 한편의 나무이파리 침대에 누워있는 주술사.

환인이 비상의 등에서 내리자 이른 새벽임에도 모두 깨어있던 여자들이 그에게 다가선다.

=자기, 고생 많았어. 몸은 어떠니, 괜찮아?=

“저는 문제 없습니다. 그보다 안느와 함께 약으로 주술사를 치료해주겠습니까.”

=적당히? 아니면 완전히?=

“깨끗하게 치료하면 됩니다. 잠시 후면 거인 전사들도 와서 자리를 지킬 것이고 저도 계속 주시할 생각이니까요.”

=상처 부위에서 2차 감염이 일어날 수 있으니까 일단 치료해놓고 감시를 붙이겠다는 거구나. 알았어. 안느 아가씨, 좀 도와줄래?=

=어어. 나도 회복술을 조금이지만 쓸 수 있게 됐으니까 써야 할 곳을 알려줘.=

=어머, 성술 열심히 연마했네? 크라빈에서는 못 쓴다고 했었잖니.=

=그때가 언젯적 이야긴데 그래. 그러는 언니도 크라빈 때보다 더 강해졌잖아?=

=…알겠니?=

=어. 이슬이도 눈치챘을걸?=

치료용 물약과 회복제가 들어있는 가방을 가지고 공중 부양 술법을 외워 안느와 함께 주술사에게 날아가는 유르파.

환인은 영혼의 눈으로 유르파와 백려강, 그리고 가야와 그녀의 조원들을 주욱 살폈다.

‘백려강은 푸른색, 유르파와 가야 일행은 회백색.’

=어, 영혼사. 우리 왔다.=

“잘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편한 곳에 앉아 대기하다가 혹시 주술사가 중핵으로 변하면 제압하는 일입니다.”

=알았다.=

이어서 찾아온 두 명의 여자 거인 중 한 명은 푸른색, 다른 한 명은 회백색.

역시 영혼의 눈으로 본 대상의 기운 색이 혼의 색이라고 보아도 무방할듯하다. 그 말은 중핵의 영혼은 흑색으로 악령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영혼의 회백색과 청색, 흑색의 구분은 아직도 이해 가지 않는다.

흑색은 악령이고 적색은 혼재다. 죽은 뒤 변화하는 거라면 위상력과 연관이 있다 여기겠지만, 살아있는 사람도 저렇게 보인다니.

이 세계는 악의마저도 시각화, 실체화할 수 있는 건가.

왼팔에 보관해둔 들개 전사단의 흑옥을 영혼의 눈으로 보자 시커먼 흑색에 내부에는 미약한 푸른색이 느껴진다.

그걸 본 순간 환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계획. 아니, 음모.

‘이걸 이용해 혼옥 계약을…….’

꾸우?

푸른 영혼을 가진 사람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인 뒤 계약하는 방식을 떠올리던 환인은 비상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빛에 생각을 멈추었다.

이어서 비상의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감는다.

맑고 투명한 눈동자에 비친 검고 흐릿한 자신의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악귀나 나찰 같은 느낌이었다.

다시 눈을 뜬 환인은 작게 웃으며 비상의 머리를 다정하게 어루만져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의 손길에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머리를 비벼오는 비상에게서 환인은 이루 말 못 할 위안을 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악귀든 나찰이든 상관하지 않는 비상의 행동.

살인귀가 되어 삶의 나락으로 떨어져도 비상만큼은 그 어떤 왜곡도, 각색도 하지 않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따라올 느낌.

물론 여자 친구들도 나락까지 함께 하겠다고 행동으로 보여줄 테지만, 비상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느낌으로 어둠 속의 길을 곁에서 말없이 따를 것 같다고 할까.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비상과 함께 느릿하게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던 환인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스트레스 수치가 꽤 높아진 것 같군……. 정신을 환기할 필요가 있겠어.’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걸 보면 스트레스가 상당히 높아진 상태로 판단된다.

무고한 사람을 해쳐봤자 평탄한 삶과 멀어질 뿐이다. 자신이 평범한 살인귀가 된다니, 그런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선택지를 고를 리 없지 않나.

스트레스 탓에 판단력과 분간력이 떨어져있음이 틀림없다.

한다면 확실하게 한두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만 명을 죽여 혼돈과 혼란을 일으킬 거다. 그리고 멀리서 그 혼란을 바라보며 평온을 얻겠지.

“……이실리테.”

=네?=

“목욕 준비를 부탁하지.”

=네, 주인님.=

환인은 살기를 제어하지 못해 언뜻언뜻 드러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실리테를 불러 목욕을 부탁했다.

잡생각이나 골치아픈 머리는 뜨거운 물에 몸을 풀면서 여자 친구들을 품에 안고 체온을 느끼다보면 금방 풀리니까.

술 한 잔도 곁들일까.

‘그게 좋겠군.’

=주인님. 기분은 조금 풀리셨나요?=

목욕은 금방 이루어졌다.

가림막을 세워 샤워하는 방식에서 거인들이 잘라준 판자로 나무집을 세워 그 안에 욕실을 만들어놓았던 것.

나무 욕조에 끓인 물을 부어서 온도를 맞추는 구시대적 방식이지만 그건 지구의 이야기고, 수도 설비가 완성되어있지 않은 마을이나 작은 도시에서는 이것이 범용적으로 쓰이는 목욕이다.

40도에 가까운 물속에서 알몸의 이실리테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환인은 그 질문에 푸딩처럼 부드럽고 탄력넘치는 거유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알고 있었나.”

자신의 행동과 반응, 기분에 얼마나 진심인 이실리테인데 당연히 알고 있었겠지.

그저 대화를 이어갈 의도의 반문에 이실리테는 민감한 자신의 젖꼭지를 조물조물하는 환인의 손을 덮으며 작게 대답했다.

=계속 무서운 표정이셨는걸요.=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하군.”

=……주인님, 저는 주인님만의 이실리테예요. 그러니 제가 필요하시면 언제라도 말씀해주세요. 그게 설령 지옥으로 가는 길이더라도…… 저는 기쁘게 주인님을 따를 테니까요.=

“널 데리고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지옥문은 두드리지 말아야겠군.”

하얗고 부드러운 목덜미에 키스하며 해주는 환인의 대답에 이실리테는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고는 풍만한 유방이 잔뜩 짓눌릴 정도로 그의 가슴에 안기며 입술에 짙은 입맞춤을 했다.

욕조 안에서 찰랑이는 물결에 몸이 살짝 흔들리는 거하며 말랑말랑한 입술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마음처럼 다가온다.

잠시간의 키스 후 그에게서 떨어진 이실리테는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주인님이 마왕의 길을 걸으신다고 하더라도 저는 망설임 없이 곁에 있을 거예요. 비상이처럼요.=

단호한 그 대답에는 환인마저 잠깐 굳을 정도의 기백이 서려 있었다.

“……그래. 그때는 너에게도 의지하마.”

잠깐 말문이 막혔던 환인은 작게 웃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며 그녀를 품에 힘껏 끌어안았다.

40도의 물보다 몸에 닿아있는 그녀의 피부가 더 뜨겁게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마음이 그보다 더 뜨겁기 때문이겠지.

=…읏, 하…아…….=

그 마음에 반응한 것처럼 단단해진 불기둥이 그녀의 뱃속 깊은 곳까지 잠겨들어간다.

이실리테는 몸을 반쯤 비튼 불편한 자세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며 존경하는 그가 자신의 뱃속에 분노의 찌꺼기를 토해내 개운해지도록 힘껏 조여주었다.

큰 동작은 없이 그저 앞뒤로 살짝살짝 움직이며 조여주고 풀어주는 간단한 움직임뿐.

그럼에도 환인은 이전에 비할 수 없을 만큼의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며 그녀의 젖무덤을 힘껏 움켜쥐고 하얀 목덜미를 강하게 깨물며 정액을 자궁 앞에 토해냈다.

“으음…!”

=앗… 하으….=

삽입에 이어 사정까지 불과 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환인은 눈앞이 살짝 흐려질 정도의 쾌감에 신음을 흘렸다.

이토록 빠르게 사정한 적은 없었지만 환인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실리테의 속살도 마찬가지로 절정을 느꼈단 듯이 쉼 없이 움찔거리며 그를 조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육신은 쾌락에 작게 허덕이며 움찔거리고 있을지언정 이실리테의 마음속에는 환인을 향한 걱정이 스며드는 중이었다.

그의 행동, 손짓과 몸짓,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학의 분노가 은밀히 숨어있음을 여성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느꼈기 때문.

만약 이때 누군가가 시비 걸거나 공격하면…….

자신의 뱃속에서 움찔거리는 그를 느끼며 그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안고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이실리테의 눈빛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를 향해 서늘하게 빛났다.

나의 주인님은 그 누구보다 훌륭한 인물이 될 분이시다. 그런 주인님의 앞길에 오물을 뿌리는 자는… 당연히 살아있을 자격이 없지.

환인도 눈치채지 못할 찰나의 순간 빛났던 이실리테의 눈빛은 어느샌가 환인을 향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재 주술사의 영혼은 중핵의 영혼을 상대로 우위에 있다. 지금 이대로라면 사나흘 정도의 유예가 있겠지.”

심신 양쪽의 목욕을 끝마치고 나온 환인은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여자 친구들을 모아놓고 입을 열었다.

뒤에서 가야 일행이 듣고 있지만 그녀와는 계약을 통해 한 몸이나 다름없어진 상황.

그녀의 조원들도 현 상황을 완벽히 이해한 모습으로 조용히 시립해있으니 더더욱 상관없다.

“그 사나흘의 유예 안에 격리 변화형 미궁인 이곳의 자그마한 출구로 거인들이 나갈 방도를 찾아야 하니,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좋다고 여겨지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면 기탄없이 말해주길 바란다. 물론 가야 당신과 당신의 조원들도 마찬가지.”

환인의 설명에 가야의 조원들은 살짝 당황한 눈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들도 지금 주술사가 어떠한 상태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주술사가 마을에서 어떠한 위상인지도.

그런데 주술사를 치료하는데 집중하지 않고 미궁을 나갈 방도를 찾는다고?

팔짱을 낀 채 섬세하게 땋은 옆머리를 매만지던 가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처럼 차원막을 통해 출입하는 미궁의 경우, 어느 정도 크기는 융통성을 가져 신축한다고 들었습니다. 먼저 그 신축성의 한계를 확인해보는 게 어떨까요.=

“신축성의 확인이군요. 다른 의견은 없나.”

=자기. 나 있어.=

환인이 목적을 꺼냈을 때부터 눈을 감고 있던 유르파가 손을 든다.

=자기도 알다시피 요즘 내 비술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 중이야. 거기다 영도에서 집중적으로 학습한 덕분에 축소화의 비술을 생명체에도 걸 수 있게 됐거든.=

“살아있는 생물에 말입니까. 그건 듣기만 해도 대단하군요.”

=후후후. 이것 좀 볼래?=

유르파가 주머니에서 스틱 형태의 막대기를 꺼내 한차례 흔들자 우주의 별을 옮겨다 놓은 듯한 환영이 그려지더니 일곱 개의 별이 다른 여느 별보다 강하게 빛난다.

그걸 본 안느가 와, 하고 손뼉을 짝 치며 탄성을 질렀다.

=언니한테서 느껴지는 기운이 강해졌다 싶더니, 언제 7급 비술사가 된 거야?=

=얼마 안됐어. 아직 완벽한 7급은 아니라 위상력의 양은 크게 변하지 않아서 아우라는 그다지 변함이 없지만, 아무튼.=

환인이 가지고 나온 노트북에는 비술사에게 있어 그야말로 유물과 다름없는 정보와 자료가 말 그대로 한가득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지식을 탐욕스럽게 흡수하며 자신의 성장 발판으로 삼았고, 술법과 비술에 과학을 접목하며 마도구와 마도기의 제작에서부터 비술 실력까지 일취월장한 것.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자기 덕분이야. 고마워.=

“위상력의 양이 미세하게 늘고 있다 했더니 7급으로 오르셨었군요. 축하합니다.”

=축하드려요, 언니.=

=유리 언니, 축하해요.=

여자들과 환인의 축하를 받은 유르파는 귀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로 에흠, 헛기침했다.

이렇게 축하받는 거, 기분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좀 부끄럽다.

=우선, 살아있는 생물에 거는 축소화 비술은 소형화라고 이름 붙였어.=

축소화의 비술을 연구해 소형화 비술을 손에 넣은 것은 부피와 질량과 밀도의 정의와 개념을 수학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 것, 기하학에 더해 천체와 물리의 영성까지 엿본 덕분이다.

=사람한테 거는 걸 축소라고 하고 사물에 거는 걸 소형화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아?=

안느의 딴죽에 유르파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제스쳐를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미 축소화는 이미 정식으로 비술협회에 등록된 술법이라서. 아무튼 오늘부터 3~4일이랬지? 난 지금부터 이 소형화 비술의 숙련도를 높이는 데 집중할게.=

“알겠습니다. 그쪽은 부탁하겠습니다.”

=맡겨줘!=

그때까지 생각을 거듭하던 이실리테가 목욕에 더해 좋은 것을 한 덕분에 조금 발그레해진 얼굴로 생각을 이야기했다.

=비술로 거인들을 축소하는 거 하고…… 미궁 출입구의 변화 확인하고 그 두 개면 더 생각할 건 없지 않나요?=

=이실 언니, 출입구를 거인들이 통과할 수 있는지도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아니. 미궁이 역류를 시작하면 이형종들이 미궁에서 막 뛰쳐나오잖아.=

으음? 하며 은색 머리카락이 헝클어질 정도로 긁적이던 안느가 끼어들자 백려강이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그건 이형종이잖아요. 밖에서 들어오는 건 사람들이고요. 하지만 거인들은…….=

백려강이 말하다 말고 주술사의 근처에 주저앉아있는 거인 여전사들을 돌아보자 다른 여자들도 그녀들을 돌아보곤 ‘어…….’ 긴가민가하다는 표정이 된다.

=려강의 말대로 그것도 확인해두어야 할 것 같네요.=

=음~. 도령은 어때?=

생각해둔 방안이 있느냐 묻는 안느를 향해 고개를 돌린 환인은 두 가지 방안을 이야기했다.

“일차적으로 미궁 출구 근방의 벽을 허물어 일차적으로 거인들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통로를 만들어야겠지. 그곳을 통해 시도해볼 만한 방법을 모두 시도할 생각이다. 일차로 차원막을 넘는 메커니즘의 규명, 이차적으로 차원막의 강제 확장 등. 다른 방법으로는 유르파에게 부담을 지우는 일인데…… 좌표 지정 단거리 공간 이동을 하는 거다.”

=아. 소형화 비술이랑 최단 거리 공간 이동 술법진을 병용하면 확실히…….=

“이 경우에는 시간이 문제가 되겠지.”

환인이 한 이야기는 확실히 그녀들이 내놓은 의견을 두루 포용하는 방식이자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방안까지 마련된 식이었다.

문제라면 시간. 소형화 비술을 연마하고 공간 이동 술법진을 미궁 안쪽과 바깥쪽에 연결하는 것은 시간이 얼마나 들 것인가.

환인은 여자 친구들이 가능성을 두고 설왕설래하는 것을 들으며 여자 친구들이 지키는 중인 천 뭉치를 응시했다.

저 안에 든 심핵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가슴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한 파장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저 안의 심핵과 연동해 ‘무언가’를 시도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최후에 최후로 미뤄두어야 할 것이다.

여자들끼리 대화에서 결론이 나왔는지 유르파가 모두를 돌아보며 선언한다.

=그럼 난 바로 준비 착수에 들어갈게. 최소 사흘밖에 시간이 없다면 좀 바쁘게 움직여야 해. 아가씨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거야.=

=말만 해. 얼마든지 손을 빌려줄게.=

“그러면…….”

환인은 유르파가 마차로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오두막에 난 창문 밖을 돌아보았다.

창밖이 명백히 푸르다. 날도 밝았고 이제 슬슬 마을이 깨어날 시간.

거인들도 다들 일어났을 시간이기에 환인은 백려강을 돌아보며 말했다.

“백려강, 비상과 함께 족장을 찾아가서 여기로 와달라고 전해주겠나.”

영혼의 눈을 개방한 환인의 황금색 눈동자를 힐끔거리던 백려강이 깜짝 놀라 백청색 비늘의 용 꼬리를 한차례 휘둘렀다가 안느의 옆구리를 때리고는 꾸벅꾸벅 허리를 숙이며 사과한다.

=괜찮아. 아프지도 않고.=

=네, 네엣! 그럼 다녀올게요. 비상아, 가자.=

꾸우.

난 왜 나가야 하는 거냐며 투정 부리는 비상과 함께 백려강이 나가고 얼마 후 족장이 사자 갈기 같은 금색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어, 불렀다고?=

“예. 날도 밝았으니 미궁을 빠져나갈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혹시 거인 중 미궁을 나갔던 적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죽은 듯이 누워있는 주술사를 한 번 쳐다본 족장은 탁자 근처 빈자리에 대충 앉으며 입을 열었다.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을 보면 그다지 기대가 안 되는데, 나온 대답도 얼추 예상대로였다.

=여긴 넓어 보이지만 그렇게 넓지 않아. 때문에 자네들이 들어온 통로를 찾아내는 것은 금방이었지. 음, 결론을 말하자면 여길 나간 사람은 없어.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나가보려 시도한 몇 명도 결과를 내지 못했지. 올라가는 통로도 좁고 단단하기도 해서 지나기도 어려울뿐더러…….=

땅을 파내도 얼마 안 가 도로 복구되는 데다 계단 주변을 훼손하면 침입자들이 짜증 나게 굴어대서 언제부터인가 나가보려는 거인들이 사라졌다고.

=자네가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제까지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야. 그만큼 우린 이곳 생활에 별 불만이 없었기도 했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별로 도움 안 되지?=

“사람은 각자 뛰어난 분야가 있습니다. 거인족은 거대한 신체에서 오는 강력한 힘이겠지요.”

=크흐흐. 힘만 센 바보들이란 말을 잘도 꾸미는구만. 주술사가 깨어있으면 괜찮은 의견을 냈을 텐데 아쉬워.=

족장의 한탄에 피식 웃은 환인은 일행과 자신이 내놓은 계획을 그에게 들려주며 동의를 구했다.

=대대적으로 입구를 만든 뒤에, 유르파가 그 비술? 이라는 걸로 나갈 방법을 마련하겠다는 거지. 기간은 사흘이고.=

“주술사는 미궁의 심장을 부수고 미궁을 탈출하면 상태가 자연히 호전될 겁니다. 안된다면 되게 만들 생각이고 말입니다.”

=알았어. 이주 준비는 끝난 상태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말해 바로 이동하도록 하지. 점심때까진 마을을 떠날 수 있을 거야.=

“부탁합니다.”

말이 잘 통해서 금방 알아듣고 이주를 서두르러 집을 나가는 족장.

환인이 회의 끝을 선언하자 그의 여자들은 유르파를 도우러 마차 안으로 들어가고 이실리테는 매우 거친 천으로 감싼 심핵 곁에 붙어 경비를 선다.

환인은 중핵의 혼을 상대로 여전히 37:63 정도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주술사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미궁 안쪽은 거인들이 파내게 하고 미궁 바깥쪽은 환연과 함께 나가서 땅의 정령으로 입구 근처의 땅을 모두 파내버리면 되겠지.

정령을 동원하면 미궁 입구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금방일 터.

문제는 차원막과…….

‘추적자들.’

다시 눈을 뜬 환인의 눈은 마치 불이 붙은 황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이실리테와 짧은 정사에 뜨거운 목욕으로 피로를 풀었지만, 정신적으로 날선 살기는 전혀 잠들지 않은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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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않이 댓글 보니까 저보다 심연의 뚜껑이 더 심하게 덜컹거리는 분이 계신데요 ㅋㅋㅋㅋ

자꾸 그러면 제 뚜껑도 공명하다 열릴 수 있어요. 그러면 끔찍한 결과물이 튀어나올 수 있으니 자제하십쇼(엄격근엄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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