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3화 (563/813)

557 거인숲 미궁

* * * *

‘영혼사님.’

‘안 주무셨습니까.’

‘미안해요.’

‘무엇이 미안하다는 겁니까.’

‘후후. 갑자기 짝짓기를 하자는 말로 당황하게 해서요.’

‘……알고 계신다면 반성하시고 그만 눈 붙이십시오.’

‘그럴게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차가운 땅바닥에서 불침번을 하는 것보다 따뜻한 제 가슴 위에서 하는 게 편할 테니까요. 높은 곳이면 주변도 더 잘 보일 테고요.’

‘…….’

‘그렇죠?’

‘……….’

* * * *

그녀가 힘겹게 내뱉은 말은 자신이 어떤 상태라는 걸 인지 중이라는 뜻이다.

자신의 실수가 불러일으킨 사태에 환인은 분노하면서도 영혼 시야와 강화 영혼 시야를 번갈아 사용하며 주술사의 상태를 파악하는 한편, 어찌할 줄 몰라 허둥거리는 전사장에게 소리쳤다.

=전사장! 지금 즉시 주술사의 팔과 다리를 부러트리십시오!=

=뭐?! 왜!!=

=그녀는 지금 중핵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죽일게 아니라면 완전히 변화하기 전에 제압해놓아야 합니다!=

=이런 쒸부랄!!=

전사장의 통나무 육각몽둥이가 휘둘러져 점차 떨림이 사라져가는 동시에 완전히 이형종처럼 색이 변한 주술사의 허벅지를 후려친다.

으적!

살이 짓뭉개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쿠우웅- 큰 소리를 내며 주술사가 나자빠졌지만, 어떠한 반응도 없다.

이어 전사장의 통나무 육각몽둥이가 주술사의 가녀린 양어깨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쿠웅!

단 세 번의 몽둥이질에 사지가 분질러졌음에도 비명이나 고통도, 미동도 없이 드러누워있는 주술사.

그사이 환인은 완전히 회색으로 변한 머리카락과 시체처럼 창백해진 피부 너머로 불가사의한 기운의 흐름을 두 눈으로 좇고 있었다.

‘신체 잠식은 끝났을 텐데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주술사의 정신이 내면에서 중핵과 싸우고 있는 건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보리 느낌의 은은한 기운과 거칠고 끈끈한 다크브라운 느낌의 기운이 주술사의 몸 안에서 이리저리 요동치는 게 희끄무레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두 가지 영혼 시야를 반복해서 쓰고 있자니 머릿속이 물리적인 의미로도, 정신적인 의미로도 점점 뜨거워지는 가운데 두 눈도 덩달아 타오르는 듯하다.

하지만 환인은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제 또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전사장과 거인들에게 소리쳤다.

“가서 질긴 풀줄기를 가져와 주술사의 몸을 묶어주십시오. 입마개도 하면 좋습니다.”

=어, 어어!=

참혹해 하거나 침울한 얼굴로 환인의 지시대로 주술사를 꽁꽁 포박하고 바위처럼 딱딱한 나뭇가지를 입에 물리고 마찬가지로 줄기로 꽉 묶어버리는 거인들.

구속당하는 중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던 주술사를 줄곧 응시하던 환인은 거인들과 여자친구들을 뒤로 물렸다.

전사장의 몽둥이질에 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갔다는 것은, 중핵에게 잠식당했어도 신체의 변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말은 위상력 관련 능력이 개화할 수도 있단 이야기.

주술사는 기감이 무척 뛰어났다. 만약 중핵화하며 그런 특성이 극대화로 발휘된다면 그 기감에 더해져 새로 얻은 능력이 일행에게 향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이실리테는 미궁의 심장을 지켜라. 다가오는 것은 다 죽여버리고 안느는 생명력 탐지로 살아남은 것들을 마저 해치우도록. 거인들은 숲에서 침입자가 더 찾아올 것을 경계하십시오.”

=네.=

=응.=

=아, 알았다.=

환인이 무서운 표정으로 주술사를 응시하고 있자니 품 안에서 조그마한 말소리가 흘러나온다.

「환인… 미안해. 피가 설마 중핵일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어…….」

“네 잘못이 아니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내 잘못이지.”

품 안에서 작게 사과하는 환연을 토닥여준 환인은 두 가지 영혼 시야로 주술사의 상태를 지켜보며 그녀를 구할 방도를 찾아 머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켰다.

그 탓에 머리의 열은 더욱 강해지고 정신적으로도 막대한 압력이 가해지던 중.

“……!”

갑자기 두 눈이 차갑게 달아오르는 고통에 환인은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가렸다.

너무 차가운 물이나 바람은 역설적이게도 뜨겁게 느껴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눈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그러한 감각이었다.

두 눈을 뽑아서 액체 질소 같은 것에 빠트린 듯한 작열통.

한순간 눈을 뜰 수 없었지만, 그러한 고통은 빠르게 가라앉았기에 환인은 눈을 가리던 손을 내리고 찡그렸던 표정을 천천히 풀었다.

아직 눈알이 욱신거리고 뻑뻑하지만, 안구 운동을 조금씩 하자 그러한 감각도 옅어진다.

그리고 무언가가 변했음을 느낀 환인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실루엣 메어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강렬한 피와 내장, 살점의 냄새가 그의 폐 속을 가득 채운다.

덕분에 고통으로 무뎌졌던 정신이 또렷해지며 눈을 감은 상태임에도 눈꺼풀 너머로 무언가…… 미세한 입자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환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또다시 변한 것을 깨달았다.

그간 영혼 시야를 쓰며 얻은 경험이 압축되어 흡사 3차원 입체 그래픽처럼 세상을 그리며 대상의 정보를 모두 받아들이는 느낌.

환인이 가장 처음 얻었던 영혼 시야는 니오네브레스에 트립한 직후 이 세상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능력이다.

유기물인 대상을 총천연색으로 보는 것.

영기의 소유량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해주는 것.

빛이 없는 곳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리고 문양 에너지, 심핵력을 얻으며 강화할 수 있게 된 영혼 시야.

강화 영혼 시야는 생명력의 강약과 몸에 흐르는 에너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위상력이나 마력, 정령력 같은 것이 일정 이상 뭉쳐져 있거나 흐르고 있으면 그것을 볼 수 있게 된 거다.

이 능력의 유용성은 상대적 비교를 통해 대상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알 수 있다는 점이지만, 환인의 눈썰미에 밀려 그다지 빛을 보지 못한 능력이었다.

그랬는데 지금 환인은 일반 영혼 시야와 강화 영혼 시야가 합쳐져 더욱 향상된 것을 표현 그대로 눈으로 느끼고 있었다.

미궁의 벽을 타고 흐르는 자연력과 미궁 내부를 은하수처럼 어지럽게 흐르는 온갖 에너지들.

이실리테의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강렬한 위상력과 안느의 몸안에 가득한 정령력과 위상력, 그리고 두 사람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의 영기에 푸른색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생명력의 빛.

비상도 위상력과 정령력으로 몸 안이 충만했으며 푸른 생명력의 빛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거인들의 몸 안에서도 흡사 태양처럼 푸르른 생명력의 빛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환인은 주술사를 본 순간 그 생명력의 빛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영혼…….”

주술사의 몸 안은 회백색에 가까운 아이보리색의 빛과 초콜릿색의 거무스름한 빛이 서로 충돌하듯 어지럽게 일렁이고 있었다.

생명력이 두 가지 색으로 나뉠 리 없으니 회백색에 가까운 아이보리색 빛은 주술사의 영혼, 초콜릿색의 거무스름한 빛은 중핵의 영혼일 터.

환인은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 능력을 종료한 뒤 영혼 시야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일반 영혼 시야가 아닌 변화한 영혼 시야로 전개된다.

변화한 능력이 정착한 것을 확신함과 동시에 이 능력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영혼의 눈.

“…….”

환인은 다시 눈을 감고 차분히 머릿속과 분노로 들끓는 가슴을 다스린다.

덕분에 과열돼서 달아올랐던 머리가 차갑게 식었고 냉정한 사고와 맞물려 몇 가지 대처 방식을 떠올릴 수 있었다.

환인은 이전과 비할 바 없이 선명하게 보이는 생명의 빛, 영혼의 빛을 응시하며 시체처럼 누워있는 주술사에게 걸어갔다.

=도령…… 어? 도, 도령 눈이.=

“왜 그러지.”

=도령 눈동자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어.=

“눈이 빛났던 적은 몇 번 있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이전에는 그저 영혼술이 채 다 담기지 못해 눈을 통해 흘러내리는 느낌의 황금빛이었다면, 지금은 마치 그의 눈앞에 알몸으로 서 있는 듯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다.

여기에 뭔가 굉장히 분노한 듯한 느낌이 더해지니 아무리 천연덕스럽고 인싸 기질을 발휘하는 안느라지만, 수줍어하는 처녀처럼 좀처럼 말이 나오지 않는다.

환인은 그녀의 가죽 견갑을 다독이며 말했다.

“이전과 다르게 느껴진다면 영혼 시야가 성장해서 그런 거겠지.”

=느, 능력이 성장했어? 조금, 갑작스럽네.=

“나 자신을 향한 분노가 방아쇠 역할을 한 것 같다. 아무튼, 시도해볼 것이 있으니 옆에서 날 좀 지켜다오.”

=어응. 알았어!=

거인들의 손에 의해 양어깨와 허벅지가 모두 부러졌음에도 포박되어있는 주술사. 그녀의 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약 7:3으로 주술사의 영혼이 불리한 형세다.

훌쩍, 주술사의 알몸 위로 올라간 환인은 모든 공격 수단을 염두에 두며 좌우로 살짝 늘어진 가슴 사이 골짜기를 걸어 다녔다.

“…….”

이어서 1자 배꼽을 지나 아랫배로 내려가 창백한 피부를 밟으며 근처를 돌아다닌다.

영혼의 눈으로 보이는 아랫배 안쪽, 자궁의 영기와 그 근방을 뒤덮은 거무스름한 빛을 확인하며 돌아다니길 잠시.

영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곳에서 멈춘 환인은 무릎을 꿇고 주술사의 아랫배에 두 손을 짚었다.

‘자궁보다는 심장 쪽에서 시도하고 싶지만…….’

아랫배와 달리 심장은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것이 많았으며 거무스름한 빛과 아이보리색 빛의 격전지이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자궁은 복막을 제외하면 뱃가죽 하나뿐이며 거무스름한 빛의 점령지.

후우, 작게 숨을 내쉰 환인은 그대로 5%의 영기를 담아 평온의 파동을 방출했다.

후와아아악— 주술사의 아랫배 피하皮下에서 불가사의한 빛이 확 터져 나오며 복부 근방을 짧게 밝히다 사라진다.

그 순간 거무스름한 빛이 크게 위축되었고 그 기회를 잡은 아이보리빛이 거무스름한 빛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어? 배 쪽 피부가 원래 색으로 돌아왔어!=

‘성공이군.’

전체적으로 7:3이던 저울추가 5.5:4:5 정도로 균형이 맞추어진다.

그때 뒤에서 전사장의 커다란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퍼졌다.

=어이, 영혼사!! 방금 그거 몇 번 더 써주면 안 돼?!=

“……숲 쪽을 경계하라고 했는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어, 어? 아.=

“남은 침입자들이 몰려오고 있을지 모릅니다. 놈들에게 심장을 빼앗기거나 주술사가 공격받으면 그때야말로 끝장입니다. 동족들을 모두 죽일 셈이 아니라면 당장 가서 적습을 경계하십시오.”

=알았, 알았다고!! 알았으니 화내지 마!!=

전사장과 거인들은 살벌한 환인의 기세에 찍소리도 못하고 서둘러 백사장과 숲의 경계선 근처로 가 주위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거인들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 환인은 다시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

후우, 작게 숨을 내뱉은 환인은 주술사의 몸 안쪽에서 벌어지는 영혼의 힘 싸움을 찡그려진 얼굴로 응시했다.

일단 급박한 상황은 넘겼지만…….

=……도령, 방금 그거 한 번 더 쓰면 안 돼?=

“안 된다. 평온의 파동은 영혼에 영향을 주는 기술이다. 함부로 쓰면 주술사의 영혼도 영향을 받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몸 안에 평온의 파동을 쓴 것도 중핵의 핏줄기가 평온의 파동에 증발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방금은 거무스름한 빛이 하반신 전체를 뒤덮고 있었기에 위험을 감수해서 썼다. 내버려 두면 결국 주술사의 영혼이 밀려 소멸했을 상황이었으니.

=아…….=

“…….”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몇 가지 방안이 있지만 하나같이 안정성이 입증되지 않은 식이라 쓰려니 고민된다.

꾸우~!! 뀨으엣~!!

=침입자다!! 놈들이 또 몰려오고 있다!!=

비상과 거인의 외침에 환인은 안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안느, 저건 최후의 발악 같은 것일 테니 주술사와 이실리테가 든 심장을 노리고 달려들 거다. 특히 중핵이 되어가는 주술사를 더 격하게 노릴 테니 이쪽으로 못 오게 막아다오.”

=……응. 도령도 힘내.=

쿠웅, 콰광— 콰과광, 쿵쿵쿵쿵—

안느가 훌쩍 뛰어내려 전장으로 달려가고, 환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전투의 폭음을 들으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영혼에게 있어 심장과 자궁의 영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듯 아이보리빛의 영혼은 그 두 곳을 필사적으로 지키고 있고 거무스름한 빛은 그런 아이보리빛의 수비를 뚫기 위해 맹렬히 공격 중인 상황.

“…….”

환인은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다.

이어서 천칭을 쥔 채 주술사의 복부와 가슴을 가로질러 그녀의 귀 근처로 가서 목소리에 영기를 0.1%가량 담아 말했다.

《주술사. 짝짓기를 하자는 데 대한 대답이 듣고 싶다면, 견뎌내고 버텨내십시오.》

그리 말한 환인은 다시 부러진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가면서 심장을 품에 안은 이실리테가 다중 검기 두 자루로 미친 듯이 달려드는 실루엣 메어를 쓸어버리는 장면을 바라본다.

자신의 키보다 더 큰 천 뭉치를 들고 있지만, 방어는 견고하다. 주술사에게 벌어진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백사장에 흐르는 피까지 피하는 모습.

하지만 다중 검기는 체력을 많이 소비하는 기술인만큼 오래 버티진 못한다. 이실리테도 그걸 염두에 두어 검기 세 자루가 아니라 두 자루로 응전하고 있다.

=크아아아아-!!=

=우워어억-!!=

쿵쾅쾅쾅! 콰과광! 꽈광!!

거인 셋은 숲 초입에서 쏟아져나오는 실루엣 메어를 닥치는 대로 때려죽이고 있지만, 실루엣 메어는 거인들을 무시하고 지나쳐 절반은 이실리테에게 향하고 남은 절반은 이쪽으로 달려오다 안느에게 가로막히는 중이다.

환인은 그녀들에게 죽어 널브러진 실루엣 메어의 되다 만 영혼을 끌어당겨 영혼 화살로 가공, 눈에 보이는 놈들을 향해 무차별로 난사했다.

피핏피피핏—

크에에에엑—!!

키아악……!

까르르드드득……!!

머리와 심장에 영혼 화살을 맞은 실루엣 메어는 즉사, 혼마저 소멸당했고 그 외 몸에 맞은 것들은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한 괴성을 지르며 땅을 뒹군다.

영혼술이 강해지며 영혼에도 심대한 타격을 주게 된 영혼 화살에 크나큰 피해를 본 모습.

그렇게 일행이 숨돌릴 틈을 준 환인은 주술사의 뭉개진 허벅지에 도착, 영혼 화살을 생성해내 그녀의 뭉개진 허벅지에 대고 쏘았다.

거무스름한 빛이 장악한 곳이다.

푸슉—

덜컥! 덜그럭 덜걱.

선명한 화살 모양의 회백색 빛이 허벅지를 관통하자 죽은 듯이 늘어져 있던 주술사의 육체가 생선처럼 펄떡거리며 뛴다.

특히 팔다리, 거무스름한 빛에 잠식당한 부위의 난동이 심각하다.

환인은 그녀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자세를 낮춰 버티는 한편 몸 안의 힘겨루기 상황을 살핀다.

싸움의 균형이 4:6 정도로 아이보리 빛의 우세가 강해졌다.

환인은 거무스름한 빛과 아이보리 빛의 힘겨루기가 이전만큼 격렬하지 않고 어딘가 부실해진데다 힘이 조금 빠진 것을 읽었다.

‘이것도 효과가 있지만, 육체의 주인이 주술사이다 보니 그녀의 영혼에도 적잖은 타격을 주는 것 같군.’

자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연달아 쏘면 주술사의 영혼도 빠르게 무너지겠지.

“…….”

눈을 감고 숨을 내뱉은 환인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 응급처치를 시행하면 중핵도 죽겠지만 주술사도 죽는다.

어느덧 일행의 전투도 마무리되었기에 환인은 주술사의 몸에서 내려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어정거리는 전사장을 불렀다.

“할 수 있는 응급처치는 끝났습니다.”

=주술사는 무사하냐?!!=

“현재 그녀의 몸에 침투한 긍지와 그녀의 영혼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녀가 이긴다면 거인의 영혼이 긍지보다 뛰어남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고, 패배한다면 그녀는 미궁의 수족이 되어 여러분들을 해치려 들겠지요.”

현재 주술사의 몸 상태는 굉장히 기괴했다. 몸 곳곳이 하얗고 창백하게 물들어있는 데다 사지가 부러져 덜렁거리고 있으며 머리카락도 회색으로 물든 상태.

거인들은 환인의 설명을 들으며 죽은 듯이 누워있는 주술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영혼의 사투……인가……. 멋지군.=

=그래, 멋지다. 그리고 똑똑한 주술사라면 틀림없이 긍지와 싸워 이겨 거인의 혼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겠지.=

=어. 주술사는 주술사니까.=

=…….=

=…….=

그야말로 야만족 같은 거인들의 대화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동료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뭐 저런 마음가짐이니까 이곳에서 오랜 시간 살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

안느의 작은 목소리에 거인숲 미궁의 심핵을 단단히 끌어안은 이실리테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을로 복귀하겠습니다. 토베라, 주술사를 조심스럽게 안아 드십시오.”

=음!=

가죽을 붕대처럼 온몸에 둘둘 감고 있는 여자 거인에게 주술사를 맡긴 환인은 모두를 뒤로 물린 뒤 20%의 영기를 담아 회백색 혼령주를 펼쳤다.

쿠우우우웅—

=흐으음.=

=우워!!=

=으음. 이 빛 어쩐지 기분 좋다.=

낮고 묵직한 음이 퍼져나가며 눈부시지 않은 빛이 900여 마리에 가까운 실루엣 메어의 시체를 뒤덮는다. 그와 함께 공기를 타고 조금씩 전해져오는 진동.

웅웅웅웅웅…….

혼을 대규모로 정화하고 정신적 안정을 주는 혼령주에 미궁이 반응하고 있는 건가.

“…….”

환인은 작게 흐르던 피의 강과 피 웅덩이에서 희미한 어둠이 증발하는 것을 보다가 더 이상 증발하는 것이 없게 되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비상의 등에 올라탔다.

총 나흘간 1,700마리의 이형종을 죽였다지만, 애초에 미궁도 힘이 없어 위상력도 얼마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변종 실루엣 메어다.

미궁이 도로 회수하는 힘도 적을 테니 이제 거인들이 미궁을 탈출할 때까지 실루엣 메어의 습격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지.

거인 마을로 돌아온 이실리테와 안느는 크게 다치고 중핵에게 당한 주술사를 본 거인들이 화를 낼 거로 생각했었다.

=……음. 그래서 영혼사 자네가 그토록 화가 나 있는 건가? 주술사가 당한 게 자네 탓이라고 여겨서?=

“좀 더 신중했다면 막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아니야. 자넨 할 만큼 했어. 전사장에게 들어보니 자네가 아니었다면 주술사를 살려놓지도 못했겠더구먼. 주술사가 당한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당장 죽는 것도 아니라면서?=

“…….”

=주술사도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자넬 따라 나간 거야. 그걸 두고 자네가 그리 행동하면 오히려 주술사의 명예를 욕보이는 거지. 그러니 그냥 넘어가. 뭐 자네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은 내가 할 말 없고.=

하지만 족장의 태도는 전사장과 다를 게 없었다.

주술사가 다쳤어? 음,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이랬던 것.

오히려 환인이 어떤 점에 화가 났는지 단번에 꿰뚫어 본 것을 두고 여자들은 놀라워했다.

거인에게 저렇게 섬세한 면이 있었던가.

자리에 앉아있던 족장은 탁자 위에서 말없이 서 있는 환인에게 상체를 꾸벅 숙였다.

=아무튼, 나흘간 고생 많았어. 동족들을 대신해 감사하지. 2천 마리나 되는 침입자를 죽이고 긍지도 저런 식으로 회수해주어서 고마워.=

“……주술사가 중핵……. 긍지를 이겨내고 쾌차할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그건 알아서 해. 참, 자네가 시킨 건 거의 마무리 됐어. 혹시 모른다고 해서 풀드라는 수컷 암컷 각각 1마리씩, 어린 풀드라도 암수 1마리씩 남겨놨어. 밖에서 심을 종자도 유르파가 다 보존 처리했고.=

“보존 식량화가 끝났습니까. 생각보다 빠르군요.”

=이게 빠른 건가? 흠 잘 모르겠는걸.=

“밖에서는 이런 식으로 고기를 방치해놓으면 썩습니다. 보존 처리가 중요하지요.”

=썩어? 으음. 그러면 밖에서 먹을걸 만드는 게 어려워질 텐데.=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천천히 하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주술사보다 현명한 영혼사인 자네가 그리 말하니 믿도록 하지.=

“내일부터는 미궁을 나갈 방법을 찾아보도록 합시다.”

=알겠네.=

집으로 옮겨놓은 주술사가 신경 쓰이던 환인이 비상의 등에 올라타자 족장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더 도와줄 건 없나?=

“혹시 모르니 여전사 두 명을 주술사의 집으로 보내 상주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주술사가 각성에 실패해 날뛸 때 시간벌이구만.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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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 저쪽에서 엄청 살벌한 소리가 나던데.... 어떻게 합니까?

???: .....안 가는게 좋겠지?

???: 솔직히 가면 죽을 거라는 생각 밖에 안듭니다...

???: 나도 마찬가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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