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6 거인숲 미궁
이실리테가 만든 채소 수프, 마수 등심 스테이크, 옥수수 굵기의 아스파라거스구이와 과일샐러드로 환인 일행이 저녁을 해결할 때, 거인들은 사냥한 집채만 한 크기의 마수 생고기를 뜯어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다.
=작은 전사들은 밥 먹는데 꽤 공을 들이는군!?=
=이러면 맛이 풍부해지고 다양해지거든.=
=호오! 어떤 맛인지 궁금한데 얻어먹을 수 있을까?!=
=가능하지만 양이 이거밖에 없어서…… 이 정도로 맛이나 느낄 수 있겠어?=
=일단 먹어봐야 아는 거지! ……크하하핫! 역시 아무 맛도 안 느껴지는군!=
=그거 보라니까. 당신들이 맛을 느끼려면 대형 조리용 솥에 한가득 수프를 끓여야 맛이 느껴질 걸.=
거인들은 체구에 비하면 생각보다 소식했다. 먹는 양을 보면 식당의 밥그릇 절반 정도에 배불러 하는 수준.
방금도 보면 신체 크기로 비교했을 때 9호 치킨 한 마리 정도 되는 양을 주술사, 전사장, 중급 전사, 사냥꾼 네 명이 나누어 먹고 포만감을 느꼈다.
‘영도 근방에 정착시키더라도 식량 대란은 일어나지 않겠군.’
사람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양을 먹긴 하지만, 신체 사이즈에 비하면 거의 물만 먹고 사는 수준이다.
거인족 마을에 전사는 27명, 사냥꾼은 9명이며 채집꾼은 18명 나머지 13명은 아직 어린아이들.
이중 전사, 사냥꾼, 채집꾼 54명은 바깥의 무직자 군인과 비교했을 때 전원 일기당천이 가능한 수준의 전투력을 보유 중이며 전사나 사냥꾼은 홀로 수천 명의 군대를 상대할 정도.
즉 54명이 모이면 산술적으로 10만의 병력이 모인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10만이 하루 소비하는 식량에 비하면 57명이 먹는 양은 1개 대대 정도, 비교도 못한다.
가성비로만 따져도 거인병이 압도적인 것이다.
물론 10만의 군이 모이면 병종이 나뉘며 조합에 따라 숫자 이상의 힘을 발휘하니 단순하게 비교할 것은 아니다.
다만 54명의 거인족을 쓴다면 마찬가지로 한계까지 압축한 기동대, 별동대처럼 운영할 수 있으니 전략과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는 자라면 10만의 병사와 10만 명분의 전투력을 지닌 54명의 거인병 둘 중 고르라 할 경우…….
‘나라면 거인병을 고르겠지.’
10만 명이 입고 먹으며 소모하는 물자의 보급과 관리는 어느 정도며 사기 관리와 전의 고양은 또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명령 체계도 복잡해질 것은 당연하니 10만 명을 수족처럼 부리려면 좀처럼 숙달된 장군이 아닌 한 어렵겠지.
그러나 54명의 거인병이라면 그들을 완전히 장악한다는 가정하에 수많은 이점이 발생한다.
“…….”
불침번을 서면서 거인족을 두고 전쟁 시뮬레이션을 굴리던 환인은 살짝 자세를 고치며 주술사의 약간 단단하면서도 말랑말랑한 분홍색 유두에 등을 기댔다.
그 움직임에 엉덩이 밑이 최고급 물침대처럼 출렁이며 약간 흔들린다.
주술사가 배에 두 손을 포갠 채 곤히 잠든 덕분에 가슴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고 모여있는 상황.
환인은 그 가슴의 첨단에 앉아 불침번을 서는 중이었다.
거인이라고 하지만 여자의 가슴 위에 앉아 불침번을 선다는 생경한 경험. 온돌바닥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주술사의 따스한 체온. 그리고 여자의 부드러운 살 내음.
이 모든 것이 한데 뭉쳐 좀 전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저녁 식사 후 불침번을 정한 다음 잠자리에 들기 전, 주술사가 한 말.
‘영혼사님. 목표를 달성하신다면 저와 짝짓기를 하지 않겠어요?’
‘……당신과 저의 신체 크기는 그런 행위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만큼 차이 납니다.’
‘……? 짝짓기에 몸의 크기는 상관 없잖아요?’
그 표현에서 거인들의 생식 행위는 말 그대로 아이를 가지기 위한 행위, 그러니까 정액을 자궁에 뿌리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환인은 고개를 돌려 주술사의 희고 갸름한 얼굴을 보았다가 그녀의 매끈한 하복부로 시선을 돌렸다.
11자의 흔적이 드러나는 복근과 1자로 옴폭 들어간 배꼽, 그 너머로 도톰하게 튀어나온 치골과 치골을 살짝 뒤덮은 갈색의 부드러운 음모.
크다.
여러모로 정말 크다.
큰 것만 제외한다면 평범한 여자와 다를 바 없는 몸매다.
아니, 환인이 이때까지 보아왔던 여자들… 물론 여자친구들을 제외한 여자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난 비율이다.
치골 부근을 살짝 뒤덮은 갈색 음모를 주시하던 환인은 팔짱을 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과 거인의 혼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거기에 거인이라 해도 사람처럼 심장과 자궁에 영기를 담고 있다. 자신과 주술사의 신체 크기 차이라면 자신이 직접 자궁 안쪽에 들어가 영기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도 않을까.
하지만 그러기 위한 과정이 굉장히 꺼림칙하다.
직접 여성의 질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도 있고, 정액을 뿌린다고 하면 직접 난자에 뿌려야 할 텐데…….
‘인간…… 여성의 난자 크기가 0.1mm라고 하던가. 25m 신장의 크기를 대입하면 거인의 난자는 아마도 작은 콩 정도 크기겠군.’
직접 자궁으로 들어가서 난자를 찾은 뒤 자위해서 정액을 끼얹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고회로가 멈추는 느낌이다.
환인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려 했지만, 주술사는 웃으며 대답은 중핵을 토벌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고 미궁을 빠져나간 뒤에 들려달라고 선수를 쳤다.
한 번 생각하기 시작하니 연상 작용이 일어나며 온갖 변태적인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니, 굳이 주술사의 뱃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크기도 크기이니만큼 밖으로 나가면 정령을 다룰 수 있을 테고, 물의 정령으로 정액을…….
“…….”
환인은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생각과 상상을 멈추었다.
이런건 자신과 맞지 않는다.
애써 잡생각을 털어낸 환인은 거인들의 후속 대처를 떠올렸다.
……거인의 소식 특성은 미궁의 이형종 출신이라 신체 효율이 말도 안 되게 끌어 올려진 여파일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거인은 미궁이 만들어낸 디자인 크리쳐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농사 지식 전수는 예정대로 진행할 생각인 환인이었다.
거인을 영도에 그저 떠넘기기만 할 생각은 아니다. 나름대로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하여 목축과 현대식 농법을 영도에 전수해서 소출을 늘려주려 했던 것.
‘비료와 2모작, 혹은 휴경지 개념만 알려주어도 소출은 2배에서 6배가량 폭증하겠지.’
그 정도면 70명 정도 되는 거인들의 식사는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거다.
거기다 마을에서 키우는 거대 작물의 씨앗도 유르파가 보존 처리해서 챙기고 있으니 식량 문제는 더 신경 쓸 것 없을 거다.
식량은 말 그대로 인류사의 중심이자 핵심이다.
현대식 농법을 전달해 소출이 늘어나고 거인병으로 전력도 확보한다면, 영도가 마음먹을 경우 국가로 탈바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거인들의 주거지는……. 저들도 사방이 뻥 뚫린 곳에서 지내기는 어려울 테니 영산 알노르 근처에 영역을 만들어주는 게 좋을 텐데.
인간에게는 험준한 산맥이지만 그들에게는 제법 높은 뒷산 정도일 터.
문제라면 영산을 신성시하는 영혼사들, 그리고 영산 알노르는 대성녀가 아닌 신수 닌실의 영역이라는 것.
“…….”
환인은 대성녀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거주 부분은 생각을 접었다. 거인들을 보낼 때 슬쩍 의견만 타진해놓으면 되겠지.
겸사겸사해서 프라버와 헬루멘에도 양식과 농축산업 전반 지식을 전수해주고…….
“……흠.”
어느덧 헬루멘을 떠난 지 10개월. 시하=사이지가 아이를 낳았을 시기이니 이걸 보내면 출산 선물로 적당할 것이다.
환인은 광량이 줄어들어 밤처럼 어두워진 미궁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너머로 시하=사이지와 백치령의 곱고 아름다운 얼굴이 떠오른다.
‘아기…….’
그녀들의 아이라면 필시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 태어나겠지.
환인은 시하=사이지의 외모를 생각해 아기의 얼굴을 그려보았지만, 별다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평범한 애 아빠라면 아기들이 당연히 보고 싶을 거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건, 자신의 감정이 변하고는 있지만 완전히 평범해지는 것은 무리라는 거겠지.
자신과 여자친구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진심으로 소중히 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있으니 그것과 똑같이 하면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여자친구들은 사랑이 흘러넘치는 여자들이니 자신이 주지 못한 만큼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아부을 테니까.
“…….”
기분이 조금 가라앉았지만, 부모님을 생각한 덕분에 기분은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옛 기억을 떠올린 덕분에 그도 모르는 작은 웃음이 입가에 새겨졌다.
아버지가 가끔 자신에게도 신경 써달라며 어머니에게 투덜거리시고, 자신을 돌보시던 어머니는 나잇값 좀 하시라며 아버지를 타박하던 광경.
그와 동시에 줄곧 신경을 건드리던 살기의 느낌이 달라져 환인은 눈을 차갑게 빛냈다.
피부를, 속살을 은밀하고 끈적하게 더듬던 살기가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날이 섰다.
환인은 코트 안주머니 쪽을 툭툭, 두 번 두드렸다.
「웅, 응…?」
“적이다.”
「……좀 많네. 700은 넘어 보여.」
“700인가.”
그게 다 5~6급 정도인 이형종이라고 하면 엄청난 숫자다. 하지만 무지막지한 숫자라는 실감은 와닿지 않는다.
낮에만 400마리 가까이 죽였고 지난 사흘간 300마리가량 해치웠다. 700이 작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자연스럽게 주술사가 목에 걸고 있는 미궁의 심핵을 돌아본 환인은 양동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광창 대신 천칭을 꺼낸다.
이어 여자친구들과 비상, 거인들에게 살기를 확 뿌렸다.
=……!?=
=…!=
=어으? 뭐냐!=
괴물이나 이형종이나 마물과는 전혀 다른, 목덜미를 서걱서걱 써는 듯한 살기에 화들짝 놀라며 벌떡벌떡 일어나는 일행들.
환인은 가슴을 출렁이며 몸을 일으키는 주술사의 어깨로 올라가 서늘한 목소리로 알렸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다. 숫자는 대략 700마리.”
끄으으—
갸아아아—
거인들이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백사장과 닿은 숲에서 실루엣 메어들이 기성을 낮게 지르며 슬금슬금 걸어 나온다.
갑주를 챙겨입은 채로 망토만 둘러 잠을 청하던 이실리테와 안느가 무기를 빼 드는 걸 확인한 환인은 주술사에게 호숫가로 물러나라고 지시를 내렸다.
“환연, 물속에 적은 없나.”
「……없어. 위상력이 느껴지긴 한 데 덩치가 큰 거 보면 첨부터 호수에 사는 놈들이야.」
주술사가 호수를 등지고 서자 전사 거인 둘과 사냥꾼 거인 하나가 그녀를 지키듯이 앞으로 나선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그들의 좌우 날개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있는 중에도 실루엣 메어는 쉼 없이 숲에서 빠져나오는 중이다.
놈들이 뿜어내는 거뭇거뭇한 기운에 백사장이 시커멓게 보일 지경. 거인들도 그 모습에는 긴장감이 올라오는지 흐흐흐 웃으며 중얼거린다.
=크흐흐흥. 우라지게 많군.=
=침입자 새끼들 전부 나온 거 아녀?=
=전부 나오면야 좋지. 여기서 우리가 다 때려죽이면 그만이니까!!=
우워어어억—!!!
크아아아아아—!!!
끄워어어어엉—!!!
거인들이 전의를 끌어올리기 위한 전투의 함성을 지르자 그에 자극받은 실루엣 메어들도 끼기긱—! 끄에에에—!! 산발적으로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소음이 호숫가 백사장을 잠식해가는 가운데 실루엣 메어와 환인 일행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일행이 기 싸움을 하는 동안 환인은 숲과 백사장을 뒤덮은 실루엣 메어를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안 보이는군.’
분명 중핵으로 여겨지는 살기는 느껴지는데 중핵으로 보이는 놈은 없다.
설상가상으로 실루엣 메어들과 이쪽이 내뿜는 살기가 뒤죽박죽되고 있어 중핵의 살기가 흐려지는 중.
환인은 주술사에게 질문했다.
“긍지가 보이십니까.”
=……아뇨. 수상한 개체도 보이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다가오는 적은 제가 처리할 테니 당신은 심장을 빼앗기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있으십시오.”
=네.=
낮에 죽인 실루엣 메어의 영혼을 꺼내 일행에게 강령시킨 뒤 영혼 폭발 구슬로 장전하기 시작하는 환인.
6개, 7개, 8개. 가능한 한 되는대로 만들어나가는데 영혼 폭발 구슬이 계속 만들어지는 상황에 환인은 살짝 놀라워했다.
5중첩으로 제약에 걸릴 때까지 만들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영혼 폭발 구슬이 총 19개.
얼마 전까지만 해도 6개가 한계였을 텐데 언제 이렇게 늘었을까. 생각해보면 마지막으로 최대한 생성했던 적이…….
‘린덴 폐촌락에서 타락한 바르둘과 여왕개미를 상대할 때였나.’
몸 주위에 위성처럼 둥둥 떠다니는 청백색 구슬을 환인이 힐끔거리고 있을 때였다.
크아아악—!!
우워어어억—!!
꽈과과광-!
참다못한 거인들이 지진을 일으키며 달려 나가는 동시에 전투가 개시된다.
숫자가 많다는 점 때문에 발구르기보다 통나무 육각몽둥이로 바닥을 쓸듯이 후려치는 거인들.
그저 바닥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땅까지 헤집으며 날려버리니 십수 마리가 거기에 휘말려 으깨지거나 박살 나서 땅에 피와 육편을 흩뿌린다.
=크아아아~!!!=
=워어어엌—!!=
쿠광, 꽈과광— 콰가각, 꾸우우웅!!
겉보기에는 광전사처럼 싸우는 전사들이지만, 불침번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주술사에게서 100m 이상 멀어지지 않으며 눈이 뒤집힌 것처럼 달려드는 실루엣 메어를 곤죽으로 만드는 중이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증거이니 저쪽은 내버려 두어도 되겠지. 체력과 강인함을 늘려주는 영혼을 강령시켰으니 집중 공격을 받더라도 버틸 수 있을 테고.
“…….”
거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여자친구들의 상태를 살피던 환인은 이실리테를 향해 눈을 빛냈다.
어느샌가 두 개던 다중 검기가 세 개로 늘어나 반경 30m 안으로 들어오는 실루엣 메어를 말 그대로 회 쳐버리고 있었던 것.
마치 팔이 세 개가 더 늘어난 것처럼 사방팔방 종횡무진 날아다니는 다중 검기의 공격 패턴에 환인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이군.’
검기가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인데 그녀의 공방력이 2배 가까이 올라간 느낌이다.
이실리테가 동귀어진할 각오로 다중 검기 세 자루에 레드릭 얼터를 휘두르며 달려들면 꽤 곤욕을 치를 느낌.
안느 쪽은 타격이라는 점을 이용해 열 마리든 스무 마리든 달려들면 달려드는 족족 쳐서 날려버리고 있었다.
타격점에서 터져 나온 강한 충격파가 범위 공격으로 주변까지 쓸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리 실루엣 메어가 위상력을 못 쓴다 하더라도 신체 능력만큼은 6급 근접 직업자 수준인데 저 위력이라니.
‘성체술이 더더욱 숙련되고 있군.’
유르파와 함께 빛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으니 빛의 정령과 태그를 맺어 필살기를 만들 날도 멀지 않았을 거다.
속수무책으로 그녀들에게 쓸려나가는 실루엣 메어를 보며 환인은 정확히 판단했다.
‘이제 그녀들에게 적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겠군.’
이실리테나 안느나 진정으로 영웅급에 올라서려 하고 있다. 이제 그녀들을 쓰러트리려면 양보다 질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전투가 개시되고 7분, 서서히 거인들이 흘리는 실루엣 메어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콰과광—!! 꽈과과광—!!
거인들은 여전히 힘차게 실루엣 메어뿐만 아니라 땅까지 분쇄해가고 있다.
그러나 쳐날려 졌음에도 비껴맞아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실루엣 메어가 전장에 복귀하는 척 거인들을 우회해 달려들거나 거인들의 틈바구니를 지나쳐 돌격해오는 것이다.
더불어 처음 700마리가 전부가 아니었단 것처럼 숲 안쪽에서 실루엣 메어들이 다섯 마리, 일곱 마리, 열 마리씩 계속해서 달려온다.
이실리테와 안느도 그걸 느끼고 주술사 쪽으로 움직이며 거인들이 흘리는 실루엣 메어까지 커버하고 있었다.
환인은 중핵이 경계심을 느끼고 도망가지 않도록 힘을 아끼며 중핵의 수색에 신경을 쏟는 중.
가장 뒤에서 두 손으로 심핵을 감싸 쥔 채 긴장하고 있던 주술사가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환인에게 말했다.
=영혼사님, 긍지가 변화한 듯한 괴물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아요. 설마 이 공격도 전초인 걸까요?=
“최근 사흘간 해치운 침입자가 700마리에 여기 모인 것들도 700마리 정도입니다. 미궁이 아무리 넓고 강하더라도 6급 정도 되는 이형종을 무한정 찍어낼 수 없습니다. 더욱이 심장이 잡혀있는 지금은 더 그렇겠지요.”
즉, 여기에 모인 것들이 미궁에 남은 이형종의 9할일 것이다.
이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 미궁도, 중핵에게도 우울한 일이 벌어진다.
수십 년간 아껴가며 모은 에너지로 저 변종 실루엣 메어들을 만들고 중핵을 되살렸을 텐데 그걸 전부 잃는 것은 미궁 입장에선 손발이 전부 잘리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중핵은 틀림없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그리 말한 환인은 모든 정신력을 끌어모아 정신 집중, 주변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기 시작했다.
뇌가 천천히 달아오르며 오버 히트하는 느낌.
환인은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눈에 담기는 모든 것을 파악하던 중, 묘하게 눈에 밟히는 것을 느꼈다.
썰리고 으깨져 죽은 실루엣 메어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번지다가 한데 모여 이쪽으로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혀 이상한 것 없는 현상이다. 수백 명분의 피가 쏟아지면 당연히 강이 되어 흐르기 마련이니까. 경사도 백사장인 탓에 호수쪽으로 살짝 기울어져있고.
하지만 왜 이렇게 검붉은 피가 눈에 밟히는 걸까.
조그마한 피의 강은 주술사의 발치에까지 도달한 상태.
“…….”
약 1초. 환인은 고민하기에 앞서 먼저 몸을 움직였다.
뻐버벙—!!
세 발의 영혼 폭발 구슬이 발치로 날아가 터지며 피를 모래 째 날려버린다.
그 순간 이때까지는 연극이었단 듯이 피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뭉쳐 주술사에게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
순간 환인이 자각하는 시간의 흐름이 평소보다 절반가량 느려졌다.
송곳처럼 모여 느릿하게 주술사로 쇄도해오는 검붉은 핏줄기.
앗……!? 하고 놀라 물러서면서도 심핵을 감싼 두 손은 풀지 않는 주술사.
환인은 눈앞에 별이 폭발하는 듯한 감각을 느낄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며 영혼 방패 열댓 장을 단숨에 펼쳐 피가 날아오는 궤적에 겹친다.
동시에 검붉은 피에 닿은 영혼 방패가 녹는 것처럼 뚫리기 시작하고, 주변에 널린 실루엣 메어의 영혼을 끌어당기는 동시에 장전해놓은 영혼 폭발 구슬을 발사, 핏줄기를 향해 터트리는 것과 함께 재차 영혼 방패를 주술사의 앞에 펼친다.
쿠— 구— 구— 구—
영혼 폭발에 휘말려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핏방울들.
그러나 피와 주술사 간의 거리가 너무 짧다.
남은 거리는 1m 남짓. 영혼 폭발 구슬이 터지며 일으킨 충격파가 핏줄기를 날려버리고는 있지만, 너무 가까워 그녀의 몸쪽으로 튀는 핏방울도 적지 않다.
영혼 방패가 영혼 폭발의 여파를 막느라 내구도가 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다.
백 수십이 넘는 실루엣 메어의 영혼,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안개라고 해야 할지. 자의식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혼을 강제로 끌어당겨 영혼 방패를 형성, 주술사에게 튀는 핏방울을 막으며 재차 영혼 폭발 구슬을 날리는 반복 작업을 뇌가 타오르는 수준으로 동시에 실행한다.
중첩할 시간조차 없고 왼팔의 혼고에 담을 여유도 없어 실시간으로 진행하는 와중, 놀란 이실리테와 안느가 위상력을 내뿜어 막을 형성. 온몸을 보호하는 동시에 날듯이 뛰어오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환인의 눈에 담긴다.
그즈음 주술사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뒤로 몸을 날리지만…….
늦었다.
아니, 핏방울이 너무 빨랐다.
핏줄기가 움직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3초.
착, 차작- 착-
결국 영혼 방패를 뚫고 주술사의 하얗고 보드라운 다리의 피부에 달라붙는 작은 핏방울들.
점 같던 핏방울이 즉시 그녀의 몸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에 환인은 앞뒤 생각하지 않고 영기를 10% 가까이 밀어 넣은 평온의 파동을 발사했다.
쿠우우웅—!!
=아아악……!=
묵직한 진동음과 주술사의 비명이 빛기둥과 함께 터져나가며 거기에 휩쓸린 실루엣 메어의 덜 익은 혼이 그대로 증발하듯 승천한다.
백사장에 흐르던 피 대부분도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검은 연기로 화해 사라져가지만, 주술사와 가까이 있던 핏방울들은 환인의 영혼 방패와 영혼 폭발의 대처가 멈춘 틈을 타 일부가 그녀의 발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었다.
실착, 실태, 실패, 실패! 실패다!
으득.
“……안느!!”
콰앙!
천둥 같은 환인의 외침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눈치챈 안느는 포탄처럼 주술사의 손으로 날아가 성벽의 방패로 그녀의 팔목을 후려쳤다.
으직- 왼쪽 손목뼈가 부러지는 동시에 환인도 주술사의 오른팔로 뛰어내리며 천칭으로 손목의 힘줄이 지나가는 부분을 정확히 찍었다.
쩍—!
그와 함께 주술사의 오므려져있던 손이 쫙 펴지며 천에 둘둘 말린 심핵이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하고, 다중 검기를 발판삼아 뛰어오른 이실리테가 그것을 낚아채 앞으로 몸을 날린다.
=무—어냐! 이 빛은?!=
=앞, 앞이 잘 안보여!!=
그제서야 느려졌던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하고, 환인과 안느도 이실리테를 따라 주술사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몸을 날린다.
혼령주에 못 미치는 강화 평온의 파동에 굳어버린 실루엣 메어들의 머리 위로 영혼 폭발이 퍼버버버벙— 수십 번 터지며 삽시간에 살아남은 이백여 마리를 피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환인은 평온의 파동에 채 성불하지 않은 실루엣 메어의 영혼을 되는대로 끌어당겨 영혼 구슬로 만들며 벼락처럼 호통친다.
“전사장! 동족을 끌고 주술사에게서 떨어져라!!”
=으?! 허!?=
환인의 호통에 흠칫 놀란 전사장이 다른 전사와 사냥꾼의 팔을 잡고 허둥지둥 숲 쪽으로 몸을 피한다.
그렇게 모두가 서둘러 주술사에게서 멀어졌을 때, 일행과 거인들은 뒤늦게 주술사의 상태를 확인하고 으음, 침음을 흘렸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허벅지에 골반 위에서 시작된 검붉은 핏줄이 주술사의 가녀린 육신을 뒤덮어나간다.
=윽, 아…악. 아각…….=
부들부들, 덜덜 떠는 주술사의 하얀 피부가 핏줄에 점령당할수록 창백해져 가고, 체모는 물론 머리카락도 갈색에서 점차 흰색으로 물들어간다.
=아, 윽…… 허윽….=
=주, 주술사, 왜 그러나?!=
=어이! 정신 차려!!=
“…….”
파아아앗!!
재차 10%의 영기를 담은 평온의 파동이 주술사에게 쏟아졌지만, 변이는 멈추지 않는다.
환인이 치욕적이라는 듯이 얼굴을 와락 찡그린 모습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당황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주인님, 저 모습은…….=
=도령. 어, 어떻게 된 거야?=
“중핵은 다른 게 아니라 지금 몰려온 실루엣 메어의 핏속에 숨어있었다.”
=어?!=
=……!=
“평범한 피처럼 흐르다…… 내가 눈치채자 심핵을 쥔 주술사를 목표로 뛰어들더군.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두 번이나 실패했다.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자신의 실태다.
처음은 중핵이 이형종 형태라는 고정관념에 너무 얽매였었다. 두 번째는 피에서 이상함을 느꼈을 때 평온의 파동을 펼쳤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명치 아래 하반신은 완전히 창백해졌고, 핏줄은 하얀 젖가슴을 뒤덮어가는 중.
“저건 미궁의 중핵으로 변화하는 거겠지.”
=…….=
=…….=
전사들의 정신 차리란 고함에도 꺽꺽거리기만 하던 주술사의 입에서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작게 흘러나왔다.
죽여주세요. 제가 저로 있을 수 있는 지금…….
뿌드득.
그 소리에 손등에서 핏줄이 선명히 돋을 만큼 환인의 주먹이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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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잊고 있었는데 어제 저녁부터 반나절동안 반반무였습니다.
반반무 진행중에는 신규 회차 업로드가 안되는 걸 깜빡했어요 따흐흑..ㅠㅠ
미처 공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당!
오늘 자정 연재는 정상적으로 이루어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