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61화 (561/813)

555 거인숲 미궁

쿠웅- 쿠웅- 쿠궁— 쿠우웅-

거인 셋이 걷는 소리는 멀리서 발파 작업 소리가 들려오는 것과 비슷했다.

거인들의 발소리는 시험 삼아 확인해본 결과 50m 밖에서도, 곤충들도 잠드는 밤에는 100m 밖에서도 들린다. 땅속에서는 소리가 들리진 않겠지만 대신 진동이 전해지겠지.

천연 신호 발생기 같은 것이다.

환인은 주술사의 손바닥 위에서 그 소리를 들으며 지도를 펼쳐 습격받은 지점, 실루엣 메어 무리가 들이닥친 방향, 숫자, 시간 등을 써넣는다.

그렇게 표시를 마치고 나자 지도에는 거인 마을을 중심으로 여섯 개의 지점에 집중선이 그려진 모양이었다.

지난 사흘간 여섯 번의 습격을 받은 흔적.

실루엣 메어의 습격은 말 그대로 단순무식 그 자체였다.

우회 기동해서 후면을 습격한다거나, 매복했다가 튀어나온다거나,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다거나. 평범하게 생각해봐도 간단히 떠올릴 수 있는 전술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이쪽을 포착하면 무작정 직선으로 달려온다.

“…….”

환인이 묵묵히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주술사가 살짝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그를 내려다본다.

덕분에 사르륵, 털실처럼 굵은 갈색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쏟아져 그를 뒤덮었다.

=영혼사님. 그 그림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건가요?=

“……침입자가 어느 방향에서 가장 많이 왔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그린 표식입니다.”

몸에 얽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걷어내며 대답하자 주술사는 손바닥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재차 묻는데, 그 덕에 부드럽고 말캉한 젖가슴이 손바닥 위를 침범하며 환인이 서 있을 공간을 잠식해간다.

=선이 가장 많이 그어진 방향에 긍지가 있을 가능성이 크군요?=

선이 가장 많이 그어졌다 = 그 방향에 규모가 크고 실루엣 메어가 많이 있는 소굴이 있다 = 소굴이 크면 중핵이 있을 확률도 높아진다.

이것이 주술사가 내린 결론이었고 환인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주술사의 이런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심했다.

머리카락이 몸에 얽히는 것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 거인이라서 생리 활동 자체가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지 불결한 냄새나 머릿기름 같은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향수 같은 것을 쓰지 않은 평범한 여성의 부드러운 살냄새만 나기에 기분 나쁘진 않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접촉이 강한 행위에 환인은 여러 가지 의문을 느꼈다.

평범한 여자였다면 이걸 남자에게 부리는 끼 같은 것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말도 못 할 체급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

한편으로는 상대가 여자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여자는 성욕을 느낄 때면 대상이 뭐든 상관없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남자는 성욕을 느낄 때 일단 여자라는 카테고리에서 슬렌더, 글래머, 골반, 가슴, 엉덩이, 얼굴, 목덜미, 겨드랑이, 음부와 같이 세부로 나뉘지만, 여자는 성욕을 느끼면 상대가 뭐든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적다.

막말로 성욕이 일어났을 때 자신을 설득할 적당한 이유만 있다면 상대가 유기물이든 무기물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환인은 주술사가 그러한 연유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라 해석하곤 속으로 한숨을 쉬며 손바닥 절반을 잠식한 그녀의 젖무덤에 등을 다시 기댔다.

그러자 최고급 소파처럼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살결이 몸을 반쯤 뒤덮는다.

그 상태로 주술사의 질문에 대답했다.

“아무리 지능이 낮더라도 사흘간 수백 마리의 희생이 났다면 패턴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 따라 침입자의 습격은 오늘이 분수령입니다.”

=그러네요. 변하지 않으면 이대로 돌아다니며 긍지가 있을법한 곳을 유추해내 습격하고, 변한다면…….=

잠깐 생각해봤지만, 주술사는 침입자의 패턴이 변할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주변을 일단 닥치는 대로 정리하나?

“패턴이 변하면 그건 십중팔구 일제 공격일 겁니다. 지금처럼 산발적인 공격이 아니라 하루이틀 한 곳에 모였다가 수백 마리가 동시에 공격해오겠지요.”

=아……! 그렇게 모인다면 긍지도 거기에 섞일 가능성이 작지 않겠군요.=

주술사의 탄성에 환인은 작게 긍정하며 말을 이었다.

“침입자는 사람과 형상이 같지만 지능이 매우 낮아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점에 착안해서 행동 방식을 유추해본다면 답은 하나뿐. 다만…….”

중핵이 그 일제 공격에 끼어있을 확률은 패턴이 변한 직후가 가장 높다.

만약 그 무리에 끼어있지 않다면 그때는 다른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고 환인은 그녀에게 이야기해준다.

주술사는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환인을 감탄과 호감이 듬뿍 묻어나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안 될만큼 작은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지혜로울까.

동족들은 좋게 말해도 머리가 좋다고 할 수 없다. 그나마 주술사와 대화가 통하는 것은 족장 정도, 나머지는 미래라는 걸 생각하지 않고 그저 오늘을 즐기는 것처럼 살아간다.

생각이란 걸 할 수는 있지만, 사는 데 중요하다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거인들 사이에 가득한 것이다.

그 때문에 주술사는 때때로 고독을 맛보았다.

모든 사물과 현상에 ‘왜?’라고 질문을 던지는 자신과 다르게 동족들은 속 편하게 살아가다 보니 외딴 섬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을의 남자들에게 관심과 흥미가 사라진 주술사는 마을 남자들이 짝짓기를 제안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럴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이다.

족장도 은근히 짝짓기를 바라는 눈치였지만, 주술사는 30%의 긍정과 70%의 부정으로 나뉜 감정 때문에 그의 신호도 외면했다.

거인 마을에서 임신과 출산은 반쯤 의무다. 주술사가 만약 평범한 거인이었다면 마을의 의무를 저버린다고 지적받았겠으나 주술사는 마을에서 유일한 약사이자 치유사이며 조언가.

반쯤 특례를 인정받아 짝짓기를 거부해도 ‘똑똑한 주술사라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며 그 행동을 인정받았다.

실상은 마음이 동하지 않은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남자에게서 다섯 번째 짝짓기를 거절했을 때, 주술사는 스스로 안대를 만들어 눈에 감았다.

종족을 향한 미안한 마음과 사죄하는 마음으로 시각을 포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족들의 오해가 더욱 강해지도록 하려는 방편이었다.

시각을 포기한 것은 그녀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각을 포기했더니 오히려 기감이 예민해져 피부에서 10m 정도 되는 범위는 무생물이든 뭐든 그 형체를 인지할 수 있게 된 거다.

이번에 그녀가 옷을 모두 벗은 것도 옷이 피부를 덮으면 그 부분은 기감이 둔해지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팔과 다리 정도로도 생활하는데 어렵지 않지만, 습격을 방비하려면 알몸인 상태가 좋으니까.

아무튼, 주술사는 지금 와서 환인과 짝짓기를 하고 싶단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단순한 강함으로 따져도 족장과 맞먹을 정도에 지식과 지혜는 자신을 뛰어넘는다. 이런 남자가 거인들 사이에서 태어나려면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할까.

하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그런 거인이 태어날 확률은 매우 적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고를 선택지는 하나뿐.

설령 상대의 키가 자신의 손가락 두 마디 정도라 해도 그녀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임신은 남자의 하얀 액이 뱃속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왔을 때 이루어지니까.’

주술사는 그의 목욕을 잠깐 훔쳐보았을 때 신체 형태는 거인과 다른 것이 없다고 확인했다.

그렇다면 그의 하얀 액체를 자신의 뱃속에 받아들이기만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게다가 거인들은 키가 중구난방이기에 크게는 키가 세 배까지 차이 남에도 겉모습이 어른이면 짝짓기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그와 자신의 신체 차이는 그보다 더 극단적이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주술사는 해볼 만하다고 생각 중인 것이다.

“……?”

침입자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며 괴물들의 대응 방식에 따라 차후 계획을 단계적으로 수립하던 환인은 갑자기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살기와는 다르다. 아니, 비슷한가? 욕망 같은 게 느껴지는…….

꾸우~!

“……전투 준비.”

머리 위를 비행하며 사방을 감시 중이던 비상의 습격 경고에 환인은 생각을 접었다.

요즘 자신이 조금씩 이상해져 가는 기분이다. 살기는 그렇다 쳐도 욕망같이 불분명한 것을 느낀다니.

‘실루엣 메어의 기척을 오인했나.’

아무렴 좋다고 생각한 환인은 키르르륵- 크르으으으— 괴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변종 실루엣 메어들에게 집중한다.

벌거벗은 남자와 여자 모습을 한 괴물의 숫자는 약 50마리.

지난 사흘 평균 숫자보다 많다. 거기에 이전처럼 무작정 달려들지 않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눈앞에 놓인 생선에 달려드는 고양이처럼 무조건 돌진만 하던 이전과 명백히 다른 행동.

=이 벌레 같은 놈들!!=

=밟아 죽여주마!!=

키가 40m를 넘는 거인 전사장과 전사가 으르렁거리며 통나무 육각 방망이를 들고 나서지만, 그 위협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실루엣 메어들은 달려들지 않는다. 그저 갸으으— 괴성을 지를 뿐.

변종 실루엣 메어의 반응에 환인은 주술사의 거대 젖꼭지와 젖가슴을 밟고 뛰어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섰다.

=영혼사님?=

그녀가 손바닥으로 받쳐주려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의 머리카락 한 뭉치를 잡은 채 주위를 살피니 꾸우~! 큐으~! 비상의 경고가 머리 위에서 연이어 날아들었다.

“……아무래도 침입자들은 참을성이 생각보다 더 없었나 봅니다.”

=…….=

환인의 경고에 뒤를 돌아본 주술사는 세 곳 방향에서 각각 70~100마리 정도 되어 보이는 실루엣 메어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에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한 자세.

환인은 이실리테와 거인 셋, 비상에게도 강령을 걸어주며 고함을 질렀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뒤를 맡아라! 비상은 둘을 지원하고! 거인 전사들은 앞에서 다가오는 침입자를 저지해라!!”

=크와아아아악—!!!=

=우워어어억—!!=

환인의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거인족 전사 둘은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포효와 함께 개미나 메뚜기를 밟아 죽이고 때려죽이는 것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사냥꾼으로 데려온 전사도 두 손에 통나무 방망이를 쥐고 빨래하듯 실루엣 메어를 떡으로 만들어나간다.

=하압-!=

=흐읏!=

안느와 이실리테도 위상력을 가득 끌어올리며 전력으로 실루엣 메어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성체술을 일으키고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에 위상력을 가득 담아 분쇄기처럼 실루엣 메어를 갈아버리는 안느.

두 자루 다중 검기와 레드릭 얼터를 휘두르며 칼날 폭풍처럼 실루엣 메어를 썰어버리는 이실리테.

거기에 맞서 실루엣 메어들도 6급 근접 직업자에 맞먹거나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발휘해 여자친구들을 숫자로 덮어 버리려 하고 어떻게든 거인들의 다리를 타고 오르거나 두 팔을 송곳으로 만들어 상처를 내려 한다.

하지만 전황은 이쪽이 압도적이다.

=하아압-!=

=아아아아—!=

촤라라락—!

콰광, 뻐걱! 콰지직…!

이실리테와 안느를 숫자로 찍어누르려던 실루엣 메어는 그대로 육편으로 화해 피보라를 사방에 뿌리는 중이었고.

=크하하학!! 이거 속이 뻥 뚫리는구먼!!=

=죽어! 죽엇!!=

=크어어어~!!=

쿵쿵쿵쾅쾅쿵쿵-

거인들은 실루엣 메어의 공격을 받아 다리에 생채기가 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탭댄스를 추는 것처럼 실루엣 메어를 밟아 죽이는 한편 몽둥이로 땅을 통째로 후려치거나 내려찍어 대여섯 마리씩 잡아 죽이고 있다.

추정 몸무게 수백 톤의 거인 셋이 날뛰니 주변에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린다.

그렇다고 곤란한 것은 실루엣 메어들 뿐.

흔들리는 땅 때문에 무릎이 꺾이며 주저앉거나 무릎 꿇는 것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이실리테와 안느는 선상의 숙련된 선원처럼 말 그대로 실루엣 메어를 갈아버리고 있는 것.

“실루엣 메어의 시선이 미궁의 심장으로 모이는군요. 확실히 심장이 목적인듯합니다.

=그러네요.=

짝-!

=가슴에 침입자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져요.=

콰앙-

모기를 잡는 것처럼 다리에 달라붙은 실루엣 메어를 손바닥으로 때려죽이는가 하면 거인들을 피해 달려드는 실루엣 메어를 발로 퍽 걷어차며 대답하는 주술사.

신체가 전사들에 비해 왜소하다지만 주술사 역시 키 25m의 거인족이다.

발길질에 땅이 크게 파헤쳐지며 달려들던 속도보다 더 빨리 튕겨 나가거나 손바닥에 찍혀 피곤죽이 되어버리는 실루엣 메어들.

주변에 피의 강이 흐르기 시작하고 모여든 실루엣 메어도 2/3가량 죽어 널브러졌을 때

쫙—

주술사는 자신의 음부를 목표로 뛰어오르는 실루엣 메어를 느끼고 손으로 살 틈을 가리는 한편 손바닥으로 쳐날린 뒤 환인에게 물었다.

=긍지는 보이시나요?=

“특출나거나 유별난 개체는 안 보이는군요. 설마하니 저 속에 죽어있을 리는 없을 테고……. 비상! 주변에 적이 더 보이나!”

큐엣~!

없다는 비상의 대답에 환인은 영혼 폭발 구슬을 해제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이 정도로 끝인가 봅니다.”

=그런가요. 아쉽네요. 긍지가 이 무리에 섞여 있었다면 빠르게 해결되었을 텐데요.=

마을의 가축을 도축해 보존 식량으로 만드는 작업도 어느덧 60%를 돌파했다. 이쯤에 중핵을 찾았다면 일정이 제대로 맞아떨어졌을 텐데

주술사가 그리 말할 무렵 마지막으로 서 있던 실루엣 메어의 목이 다중 검기에 의해 날아가고 전투가 마무리된다.

죽은 숫자는 족히 400여 마리.

=거기 작은 여전사들! 정말 대단하군! 둘이서 우리 셋이 잡아 죽인 것보다 훨씬 많이 잡지 않았나!?=

=우린 성제님의 영혼 기사야. 이 정도도 못 해서야 영혼 기사 자격 미달이지. 오히려 당신들이 수행 부족인 거 아냐?=

=뭐?! 크하학학학!!=

=푸핰핰핰!! 이거 할 말 없구만!! 카핰핰핰핰!!=

환인은 거인 전사들과 여자친구들이 대화하는 것을 듣다가 그녀의 가슴을 미끄럼틀처럼 타고 내려가 손바닥에 착지하며 말했다.

“내일, 어쩌면 오늘 밤 결판이 날 것 같으니 아쉬움은 접어두십시오.”

=네?=

“무언가가 지켜보는 것이 느껴집니다.”

좀 전에 느꼈던 소름과는 다른 끈적한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다. 그야말로 마물 그 자체의 시선이다.

너무 멀어 방향을 알 수 없지만, 이렇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지금 몰려온 400마리 정도 되는 괴물은 말 그대로 선발대라는 뜻.

힐끔, 머리 위 높은 곳을 날고 있는 비상에게 신호가 없는 것을 확인한 환인은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밖에서 야영하겠습니다. 이실리테, 안느. 작업은 대충 마무리지어라. 곧 이동한다.”

해가 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위상석 탐지 도구로 실루엣 메어의 시체를 살피던 여자친구들과 통나무 몽둥이에서 살점을 털어내던 거인들이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사이 환인은 다시 지도를 펼쳐 방금 습격해온 방향을 표시한 뒤 계속해서 은밀하고 끈덕지게 들러붙는 시선을 경계하며 코트 안주머니 속의 환연을 불렀다.

빈틈을 적당히 보여준다면 이쪽을 습격하겠지.

아니라고 해도 환연에게 부탁하면 방향 정도는 알려줄 테고.

벽 안에서 흘러나와 다시 벽 너머로 사라지는 강이 한데 모이는 지저 호수, 환인은 그 근방으로 일행을 이동시켜 야영을 준비했다.

거인숲 미궁의 거대화 규모에 걸맞게 수평선이 살짝 보이는 거대한 호숫가. 그 크기에 걸맞게 하얀 백사장이 형성되어있으며 폭도 300m 남짓이다.

거인들에게는 30여 걸음 남짓하고 6급 근접 전투 계통 직업자에도 10여 초면 주파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그 정도면 습격에 대응하기에 충분한데다…….

“땅을 파고 다가온다 해도 모래의 움직임이 그걸 알려줄 겁니다. 무엇보다 머리 위에서의 습격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불침번 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될 테지요.”

물론 이곳도 지하 공동이기에 천장이 존재한다. 하지만 수백 미터 높이의 천장에서 추락하면 아무리 실루엣 메어라도 으깨져서 죽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근방에 침입자의 대형 소굴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중핵이 선발대를 먼저 보내 이쪽의 싸움을 지켜보았다고 가정한다면 꽤 약삭빠른 성격일 거다.

습격을 부추기려면 적당히 조건을 맞춰주는 게 가장 좋다.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은근히 병력을 모으기 쉽도록.

환인이 이곳에서 야영해야 하는 이유를 거인들에게 차분히 설명해주었지만, 거인들은 널 신뢰한다며 설명을 대충 듣고 몸을 씻으러 호숫가로 걸어간다.

그도 딱히 거인들에게 뭔가를 바래서 설명한 것이 아니었기에 환인은 잘 마른 풀과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기 시작하는 여자친구들에게 다가갔다.

“이곳으로 올 동안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나.”

=시선? 음, 여기에 올 때까지 주변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런 건 못 느꼈어.=

=저도 방심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어요.=

“……비상, 너는. 너도 느끼지 못했나.”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돌아온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비상도 ‘적이 근처에 있다고?’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위로 쭉 빼고 주위를 돌아본다.

거인들도, 주술사도, 여자친구들과 비상도 그 시선을 못 느낀다.

이쯤 되면 자신의 착각인가 하고 의심할 법도 하지만 그런 건 환인과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도 느껴지고 있고.’

환인은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비상의 머리를 내려서 쓰다듬어주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언제 놈들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 밤에 잘 때도 반쯤 정신을 깨우고 있어라. 습격이 들어와도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네, 주인님.=

=그럴게.=

작게 대답한 이실리테는 모닥불에 솥을 올려 저녁 준비를 시작한다.

옆에서 그걸 잠시 구경하던 안느는 다른 거인들과 함께 호숫가에서 몸을 씻고 있는 주술사를 힐끔 보곤 환인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있잖아, 도령. 저 여자 거인 말이야.=

“음.”

=아무리 봐도 도령한테 흑심이 있는 거 같아.=

“…….”

적당히 채 썬 야채와 미리 만들어두었던 베지터블 스톡 네 개를 솥에 떨어트리던 이실리테도 조금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느꼈어요. 주인님을 바라보는 눈빛이 되게 엉큼했는데. 은근슬쩍 가슴을 문지르기도 했고.=

=그치? 거인들 덩치가 다들 제각각이던데 그래서 도령한테도 흑심을 품은 거 같아.=

=거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연애 같은 것도 없나 보던데 짝짓기 대상으로 주인님을 보는 거겠지. 그런데 신체 차이가 말이 안 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한다고 해도 방법도 문제지 않아?=

=진짜.=

“…….”

여자친구들의 숙덕거림에 이마를 잠깐 감싸 쥐었던 환인은 그녀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주고 자리를 피했다.

아무리 자신이 개방적인 성향이라 해도 마크로 필리아 같은 취향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거인 여자를 상대하는 취미는 없다.

그런 입장을 입에 담아봤자 이야기만 복잡해질 뿐. 주술사가 마음을 고백해오면 그때 거절해도 된다.

모닥불에서 적당히 떨어진 환인은 몸을 깨끗하게 씻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주술사를 잠깐 본 뒤 안주머니 속의 환연을 불렀다.

“환연. 오면서 부탁한 것은 확인해봤나.”

「응, 잠깐잠깐 바람 정령을 불러서 주위를 살폈는데 확실히 뭔가가 쫓아오고 있어. 지금 환인이 앉은 데서 3시 방향 부근이야.」

어수룩하게 그쪽을 돌아본다거나 하는 일 없이 환인은 재차 질문을 던졌다.

“형태를 확인 못 했다는 건 은신 같은 특성을 보인 건가.”

「환인 네 세상에서 광학미채라는 거 있잖아. 빛을 굴절해서 모습을 감추는 기술. 그런 걸 몸에 덮은 거 같아.」

“…….”

「좀 더 확실하게 보려면 불 정령을 불러내서 열 감지를 하는 게 좋은데 불 정령은 아무리 구슬려도 안 나오려고 해. 그래서 파악하기 힘들어.」

“성장한 네 힘으로도 안 된다면 영기로 유혹해도 어렵겠군.”

미궁에 들어오고 21일째. 환연은 미궁이 정령력을 흡수해가는 것에 적응한 뒤로 오히려 정령력을 다루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코어 운동을 한 것처럼 뺏어가려는 정령력을 지키다 보니 자연스레 정령술 기본, 근본도 강해진 것.

릴라이스와 가계약을 하며 성장한 정령술에 이번 일로 정령근精靈根까지 강해져 그녀 말로는 밖에 나가면 상급 정령까지 부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기에 환인도 기대 중이다.

“알았다. 이제 쉬어도 된다.”

「응. 놈들이 습격해오면 나도 도와줄게.」

“중핵으로 판단되는 놈이 도망치려 한다면 잠깐 훼방 놓는 정도로 충분하다. 아직 힘에 익숙하지 않을테니 무리는 하지 마라.”

「알았어.」

쿠웅- 쿠우웅- 쿠우웅—

환인은 몸을 씻어 한층 더 깨끗해진 주술사가 알몸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며 살짝 미소 짓는 모습에 한숨을 감추었다.

저 여자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영도로 보내 무력의 일각을 담당하게 할 생각인데, 거인들 사이에서 존중받는 주술사를 함부로 대할 수도 없고…….

중핵의 싸움을 대비하는 것보다 주술사의 심정에 대응하는 게 더 골치 아픈 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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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심연의 뚜껑은 단단히 밀봉되어있으니 안심하고 보십시오 독자 여러분!

주인공이 여자 거인의 뷰지 속에 들어가 자궁과 컨텍트하고 자궁 안에서 난자와 헤엄친다던가 하는 씬은 주인공 성격과 맞지 않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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