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 거인숲 미궁
* * * *
종족연합국가 메리아놀.
메이신 섬의 엘위드리스 시 인근 바다.
쏴아아아악—!!
푸른 아지랑이를 대양의 파도처럼 휘감은 화살 하나가 벼락처럼 수면을 따라 질주하며 나가naga 족 수십 마리를 말 그대로 분쇄해버린다.
그 한발로 끝나지 않고 이어서 바다의 기운을 품은 화살 수백 발이 비처럼 떨어지고 파도처럼 쇄도하니 메이신 섬 서부에 상륙하려던 나가족 군단은 삽시간에 궤멸해 간신히 살아남은 몇 마리만 도망쳤다.
수면이 나가족의 붉은 피로 물들고 갈가리 찢어진 바다뱀 인간의 형태가 파도에 밀려 해안선으로 다가온다.
참혹한 광경이지만, 실상은 적대적 아인종의 침공을 방어한 장면일 뿐이었다. 더해서 엘위드리스 시의 적지 않은 수입이 발생하는 광경이기도 했고.
수목 도시 엘위드리스의 영주이자 엘위드리스 가문의 가주, 프슈드=오울=엘위드리스는 무표정으로 가문의 병사들이 물의 정령을 부려 위상석과 시체를 수거하는 장면을 지켜보다가 신비궁을 접어 팔목에 차면서 말했다.
=거인숲 미궁인데 안에는 이형종화하는 실루엣 메어밖에 없었다고.=
가주의 질문에 일급 보좌관은 두꺼운 서류를 넘기며 보고서에 기반한 내용만을 언급한다.
=예. 그 신체의 강함은 족히 6급에 이를 정도였으나 팔의 변형 외에는 특수 능력과 방어 능력이 전무해 5급 정도로 판단된다는 보고입니다.=
=그 안으로 성제가 들어간 것은 확실한가.=
=거인숲 미궁의 변종 실루엣 메어 특징은 사람을 먹지 않아도 대상의 형상을 따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에 연관하여 습격해온 실루엣 메어 중 하나가 성제의 영혼 기사 중 한 명, 성기사 안느의 외모였다고 합니다.=
이어 서류를 덮은 보좌관은 바닷바람에 거칠게 나부끼는 가주의 황금색 머리카락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제 견해를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해보도록.=
=현재 성제님께서 들어가신 미궁은 최소 200년 전까지 10m 내외의 거인들이 출현하는 미궁이었다고 중앙정부 기록관리실의 자료에 나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궁에서 실루엣 메어가 이형종화 하고 있다는 사실은, 계통 특화 미궁 내에 변곡점이 발생하여 주류 계통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증거로…….=
거인숲 미궁에 발생한 특이 사항을 열거한 보좌관은 이때까지 분석한 성제의 정보를 떠올리며 견해를 내놓는다.
=그 특이 사항의 발생은 미궁의 변곡이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 내부에서 기존의 이형종이었던 거인과 새로운 이형종인 실루엣 메어의 세대교체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
보좌관은 가주가 먼바다를 보고 있지만 계속 듣고 있음을 알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와 정보에 따르면 엘위드리스 절멸의 전견시에 등장한 인물은 성제님일 확률이 80% 이상. 이때까지 알려진 그분의 행적에서 추산한 판단력과 추리력을 보았을 때…….=
=지성을 가진 미궁의 거인들과 접촉 중일 것이라고 말할 참인가.=
=그렇습니다.=
프슈드는 몸을 돌려 오랜 시간 자신과 가문을 섬겨온 충성스러운 보좌관을 응시하며 물었다.
=자네 말은 미궁의 이형종이 선 성향 아인종화하여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가주님. 전례가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 아드섹트족의 선조 또한 미궁의 이형종 태생입니다.=
=그것은 미궁 안의 생명체를 밖으로 끌고 나와서 벌어진 일이다. 미궁과 연결이 끊긴 이형종의 진화라고 부르지 않나.=
미궁 밖이면 몰라도 안에서 벌어질 수는 없는 일이란 지적에 보좌관은 역시 공부를 멈추지 않는 가주님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였다.
=학자들은 미궁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한 것이 없는 미지의 정점.=
=……예. 상식에 얽매여서는 본질에서 멀어지기만 할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러나 성제가 거인과 접촉하였다는 추리는 논리의 비약이다. 과정이 없어.=
=그러나…….=
=원로원은 여전히 성제의 미래와 과거를 볼 수 없다는 점을 들며 엘위드리스의 위협이라고 말살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원로원 측 정찰조에서 들어온 이 정보도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할 것이다.=
=…예.=
일급 보좌관도 어느 정도 억지를 가미한 견해라 생각하였기에 완고하지만 부드럽게 타이르는 가주의 뜻을 공손히 받들었다.
프슈드는 바닷바람에 섞인 비린내를 맡으며 원로원 측과 공녀 측의 활동 보고서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포플러 센트 순찰대 2개 조를 거인숲 미궁으로 파견해 원로원 측과 공녀 측이 허튼짓을 못 하게 막도록.=
=예. 협의회와 성궁에서 보냈을 인물들과 마찰을 빚지 않도록 2조와 3조를 파견하겠습니다.=
=음.=
메이신 섬에서 엘위드리스 가문의 가주가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메리아놀 제1 본섬에 위치한 주도 패시지의 협의회에서는 엘위드리스 가문에 흘러 들어간 정보를 플라잉겟한 의원들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1 척후병단의 2조는 이미 죽었다고 보아도 타당하지 않겠소? 엘위드리스의 정찰부대는 강인하기로 이름 높은데 그런 자들도 후퇴한 미궁이오. 가야 시라넬 2조장이 비록 실력자에 안목도 높다 하나 일개 정찰대일 뿐이잖소.=
=시라넬 조장이 사망했다면 생명의 나무 잎사귀도 말라버렸을 겁니다. 하지만 사법부에 있는 생명의 나무 잎사귀에는 아직 변화가 없습니다. 죽었을거란 견해는 이르지 않습니까.=
=저도 센트렌 의원의 의견에 동감이에요. 시라넬 조장은 시라넬 가문의 장녀로서 책임감이 누구보다 훌륭하며 해수의 쓰나미에서도 훌륭한 공적을 남긴 뛰어난 나뭇잎이죠. 미궁에서 연락 한 통 없이 스러질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 점은 본 의원도 인정하오만……. 너무 허황되지 않소? [미궁의 이형종이 자아를 가져 아인종화하여 무리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니, 허 참.=
=확실히 그건 허풍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저도 생각합니다만…….=
=가야 시라넬 조장이 아직도 연락 한 통 없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미 4시간째 회의 중이지만 결론이 나지 않으니 상급 의원들의 시선이 가장 상석에 조용히 앉아있는 빼어난 은발의 미남자에게 향한다.
=미리아스툼 전하.=
호칭에 스며든 의원들의 자그마한 재촉. 그에 그라파든=사리올=미리아스툼은 뜻 모를 신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메리아놀에서 수십 년째 가장 아름다운 플뢰라 불리는 남자의 미소에 여러 종족으로 구성된 협의회 상원 의원들이 어험, 으흠, 살짝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돌린다.
=여러분들의 걱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면… 어찌하는 게 좋을까요?=
=폭풍이 불어오면 사람은 움츠리거나 숨어야 하지요.=
상급 의원들은 이번 임기의 국왕이 보내는 선문답에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뭔가를 깨달은 듯이 눈을 크게 뜨거나 미간을 좁혔다.
인랑족의 남자 루크랑 상원 의원이 회색 늑대 귀를 쫑긋 세우고 브리핑용 자료를 보며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라드세아의 성궁에서 선수를 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영도를 등에 업은 성제가 성궁의 편을 든다면 우리 메리아놀은 입장이 불리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자국민 매매에 라드세아의 도시 하나가 통째로 가담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밀려난다면 메리아놀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필연. 막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움직여야 하지만, 지금이 그러한 때일까요.=
=……?=
=음…….=
혼란스러운지 상급 의원들 사이에서 개인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하자 흡사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작고 단단한 체구의 근육질 프라우드족 남자가 탕! 회의용 대형 탁자를 내려치며 소리쳤다.
=그라파든 전하의 선문답은 우리가 이해하기 너무 어려워! 각국 정세와 움직임, 나아가 거인숲 미궁이 가진 미궁학적 가치때문이라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부대를 보내야 한다고 봄세! 이견이 있는 자 있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태풍에 휘말린다 해도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평가는 떨어질 뿐이니까요.=
=움직이면 평가가 떨어지고, 움직이지 않아서 평가가 더 떨어진다면 움직일 수밖에 없지요.=
=움직이더라도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면 안 될까요?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정치란 그렇게 감각적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주어진 표와 수치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법. 록타스님의 말씀에 저도 찬동입니다.=
=식생이 거대화하는 미궁은 그 가치만 하여도 어마어마하겠지요. 틀림없이 소식을 접한 히스론드와 벨티칼도 움직이려 할 테니 지금이라도 준비하여 병력을 파견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곱 명 중 찬성 여섯에 반대 하나! 그라파든 전하, 용단을 내려주시오!=
=모두가 그리 결정했다면 움직여야겠지요.=
그라파든은 작게 웃음을 흘리며 섬세한 손을 들어 빛의 정령을 불러내어 회의장 밖으로 날려 보냈다.
=하얀 나뭇잎 무사단의 크샤나리에게 부탁해봅시다.=
혼란스러운 엘위드리스와 패시지의 협의회와는 다르게 라드세아의 성궁에서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엘위드리스에 흘러 들어간 자료가 그들의 손에도 쥐어진 상황이지만, 대청을 차지한 문무 10관은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10개의 계단 위 옥좌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여왕을 응시했다.
눈이 내린 것처럼 하얀 머리카락과 여우 귀 뒤로 아우라처럼 너울거리듯이 하늘거리는 아홉의 하얀 여우 꼬리.
여왕이 눈과 입을 다문지도 한 식경. 태산과 같은 늑대가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부채를 촥 펼쳐 피처럼 붉은 입술을 가린 여왕은 마찬가지로 노을빛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듯한 눈을 떠 대청을 훑는다.
그 시선이 자신의 친동생이자 라수비탄 학사전의 학장을 맡은 호천명에게서 멈추었다.
=호 학장.=
300평은 되는 대청을 가벼이 채우는 요염한 목소리에 문관과 무관들은 숨을 멈추고 옥좌에서 다섯 계단 아래에 서 있는 호천명 친왕에게 시선을 준다.
=예, 폐하.=
=어찌 생각하시나요?=
=저는 세간에서 학사전의 영속 학장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과분한 칭찬이라 생각하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신하들은 현친왕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밑밥을 까는지 궁금해졌다.
3년마다 시험을 통해 교체된다고 하는 학사전의 학장을 15년째 연임 중인 명실상부한 라드세아 최고의 지혜.
누구도 그걸 의심하지 않을 텐데 저렇게 믿음을 강조하는 발언이 필요한가?
=아마도 영도의 몇 분을 제외한 세상 사람 중 저만큼 성제님을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요.=
호응은 없지만, 대청 안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걸 느끼며 호천명은 후, 작게 숨을 흘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장면이 생각난다.
하늘의 먹구름을 가르며 내려오는 한 마리의 백청룡.
세상을 오연히 아래에 두는듯한 그 존재감 앞에서도 한 치 주눅 드는 일 없이 자존감을 세우는 인간.
당사자는 그러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말로 표현하자면 희대의 영웅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의 본모습은 영웅 같은 것이 아니었다.
=성제님은 운명의 총애를 받는 듯한 사람입니다. 마땅히 그러할 만한 능력도 있으며 흐름까지 따라주는, 시대가 허락한다면 왕이 될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눈빛으로 묻는 각 관청의 대신들에게 시선을 돌린 호천명은 안면에 살짝 띠었던 미소를 거두며 입을 열었다.
=그런 분이 현재 거인숲 미궁에 20일간 머물고 계십니다.=
그때 라쿤을 닮은 머리의 신하가 한 손을 들며 발언했다.
=알려지기로 거인숲 미궁은 5급, 그간 성장하였다 치면 6급입니다. 그만한 미궁을 돌파하는 데에 20일은 부족한 게 아닐까요.=
=완웅 대감께 묻겠습니다. 성제님께서 크라빈 마을 인근에 발생한 5급 산란못 미궁을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을 짐작하시겠습니까?=
발언한 대신에게 호천명이 질문하자 미궁 내부 조건을 전해 들은 대신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보편적인 5급 미궁의 돌파에는 사전 조사와 탐색을 거쳐 약 4개월이라는 시간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빼어난 무용과 훌륭한 영혼 기사를 거느린 성제시라면 2달정도가 아닐까요.=
=……마을에서 납치당한 100여 명 이상의 피해자를 구출하고 내부의 이형종 수천 마리를 정리, 중핵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일이었습니다.=
=10, 10일…….=
=허어.=
=세상에…….=
=덧붙여 산란못 미궁 공략 당시에는 본인도, 영혼 기사들도 현재보다 훨씬 약했었다고 합니다.=
드넓은 대청이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해진다.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지 능력이 없는 한 누구도 모릅니다. 그리고 현재에는 엘위드리스 가문도 그분의 행적을 유추하지 못하는 듯하군요. 이에 따라 저는…….=
유일한 혈육이라 할 수 있는 여왕을 돌아본 호천명은 허리를 공손히 숙이며 입을 열었다.
=성자께서 거인숲 미궁 안에서 무언가 작업을 진행중이시며, 그것은 거인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9할 이상이라 판단합니다.=
호천명의 답에 여왕은 시선을 내려 작은 탁자에 놓인 자료에 시선을 주며 입술을 뗐다.
=즉, 호 학장은 간자가 보내온 [미궁의 이형종이 자아를 가져 아인종화하여 무리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글귀를 신뢰한다는 말이군요.=
=덧붙인다면 그 자아를 가진 거인을 수중에 넣고 계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주장이 비약적이라는 인지는 있나요? 그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는 짤막한 글귀뿐이잖아요.=
다른 이들에게는 듣기 좋은 요염한 목소리지만, 친동생 입장에서는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 호천명은 털이 곤두설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누님은 다 좋은데 신하들의 설득에 자신을 이용하는 게 영 아니다.
하지만 누님은 여왕, 자신은 학자.
호천명은 담담히 그러한 결론을 낸 이유를 보고서에 기록된 것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원래 거인의 미궁이던 곳에서 실루엣 메어가 새로이 이형종화하고 있다는 사실. 진입한 사람을 베끼는 실루엣 메어의 특징. 성제 일행의 모습을 베낀 이형종의 발견. 정신 침해가 멈춘 현상.
거기에 자신이 지켜본 성제의 행동 방침과 사고방식까지.
거기까지 설명한 호천명은 다시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투라드 마을 인근에서 알류겔의 마룡이 출현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왔음을 여러분들도 아실 겁니다. 더해 정령사들이 초월급 정령의 흔적을 발견했으며, 마을 주민들의 목격담을 종합해본다면 마룡 아드네빌라는 성제님과 친밀하고 긴밀한 사이를 맺은 것이 확정이며 초월급 정령과도 모종의 관계가 생긴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용이 일개 개인과…….=
=영도의 대성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음을 본다면 두 신수의 가호를 받고 있다 보아도…….=
=초월급 정령이라니, 메리아놀에도 몇 없지 않나…….=
=확실히 그만한 인물이 한 달 가까이 미궁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면…….=
=좌중은 들으라.=
수군거리던 대신들은 여왕의 근엄한 발언에 즉시 고개를 조아렸고 호천명도 허리를 숙인다.
=현 상황은 제법 긴급을 요하는 건이라 볼 수 있다. 학장의 주장대로 된다하면 거인은 성제의 설득에 응하게 될 일.=
여왕은 대신들에게 직접 지시를 하달했다.
메리아놀과의 분쟁에 성제 환인의 조력을 청하는 것은 즉시 중단할 것. 성제 환인과 앞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을 방안을 구상할 것. 메리아놀과 정상회담을 준비할 것.
=메리아놀 협의회와의 회담 대응은 모락, 자네에게 일임하겠다. 그 외 대신들은 모락이 협조를 요청할 경우 수용하여 최우선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명에 따르옵니다.=
=명예 따르옵니다!=
=호 학장은 성제 환인과 친밀도를 쌓을 수 있도록 가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 필요한 경비는 무제한으로 허가하겠다.=
=분부에 따르겠나이다.=
어전회의가 끝나고 누이를 따라 집무실로 자리를 옮긴 호천명은 하아, 부담이 역력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니.=
=누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제님은 무욕의 화신이자 물욕의 화신, 남의 손에 든 것을 거저 건네받을 바에는 죽여서 빼앗는 쪽을 더 선호할 성품입니다.=
=호감을 사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뜻이구나.=
호천명은 어딘가로 보낼 서신을 쓰기 위해 고운 손으로 직접 먹을 가는 누이를 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애초에 그분이 신뢰하는 사람은 옆에 거느리고 다니는 영혼 기사들 뿐입니다. 그 외에는 신뢰가 아닌 이득 관계, 그것도 이쪽이 좋지 못한 의도를 품는다면 그 즉시 베어버릴 얄팍한 끈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못 한다고는 않는구나.=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위험 부담도 적지 않고 통할지도 조금은 의문인지라.=
=시하 사이지 영주와 백치령 총사령이겠지?=
=……임신 사실이 그분의 귀에도 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 붙여놓은 첩자에게서는 그 어떤 연락도 없습니다. 그 두 명을 끌어들인다 해도 과연 어디까지 통할지…….=
=사내로 태어났다면 자신의 직계 혈육에 무심할 수 없음이 본능이라, 단시일 내에 성과를 내라곤 하지 않을 테니 한번 시도는 해보려무나.=
호천명은 자신에게 또 일감을 떠넘기는 누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다 양 소매에 손을 넣으며 어디 당해 보란 듯이 입을 열었다.
=차라리 누님께서 그분과 맺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남편 점수만으로 보자면 누님의 기준을 아득히 상회할 듯합니다만?=
=너무나도 상회한다는 것이 문제로구나.=
=딱히 혼인까지는 생각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이 떠난 후 헬루멘과 프라버가 입은 유형, 무형의 이득을 보자면 누님이 눈 딱 감고 그분과 한 번 동침하면 지금까지 쌓인 문제 대부분이 해결될지도 모르니까요.=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렴.=
호천명은 누이의 꾸중에 읍을 올렸지만, 누이의 표정에 미약하다곤 하나 곤혹이 묻어나는 것을 보고 소매로 입매를 가리며 막타를 넣었다.
=농담이 절반이지만 진담도 절반입니다. 한 번 고려해보시길.=
=…….=
* * * *
“…….”
=영혼사님, 왜 그러시나요?=
알몸으로 서 있던 주술사는 손바닥을 위로 오게끔 포갠 손 위에 서서 자신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환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에 시선을 내리며 물었다.
“누군가가 저를 두고 숙덕거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근처에서 영혼사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그리 말하며 주위를 돌아보는 주술사의 눈에 띄는 것은 밟혀 죽고 베여 죽고 곤죽이 되어 죽은 실루엣 메어들의 시체와, 전사장 못지않게 강한 영혼사의 호위들 뿐이다.
“……별것 아닐 테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주술사의 가슴에 등을 기대고 있던 환인은 그리 말하며 그녀의 젖가슴에서 등을 뗐다.
주술사가 고개를 돌리느라 어깨가 돌아가는 바람에 자신의 상체 크기만 한 분홍색 젖꼭지가 어깨며 머리를 툭툭 쳐대 이루 말 못 할 이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
유두 자체는 말랑말랑하고 따뜻해서 아프다거나 하진 않지만, 약간 젖냄새가 나는 자신의 상반신 크기 유두에 맞는 기분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다.
‘아무리 그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 해도…….’
머리 위에서 떨어질 수 있는 실루엣 메어의 습격을 대비해 대략 반경 50m 정도는 기감으로 커버할 수 있는 환인이 주술사와 미궁의 심장을 지키는 중이다.
그래서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술사가 옷을 입고 자신은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는 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그녀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 문제군.’
자신의 보호는 감사히 받겠지만, 자신도 제 몸을 지키는데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겠다고 주장하니 환인으로서는 말릴 명분이 없었던 거다.
=주인님! 부산물 확인 끝났어요!=
아래에서 이실리테가 외치는 소리에 환인은 앞의 숲속을 손가락질했고, 그걸 본 주술사는 망설임 없이 선두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밖 중핵 유인 작업 3일 차. 매일 300마리 이상의 실루엣 메어들의 습격을 받는 중이다.
현재까지는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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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뺨 맞으면 생각보다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