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59화 (559/813)

553 거인숲 미궁

실루엣 메어의 소굴은 가야와 마주친 곳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이익, 히이익— 기이한 소리를 내며 껑충이처럼 달려가는 실루엣 메어의 영혼, 그 뒤를 쫓으며 21마리의 실루엣 메어를 해치웠을 때 환인 일행은 사람 키보다 더 굵은 나무뿌리 사이로 드러난 구멍에 도착한 것이다.

짧게 선행 정찰을 다녀온 이실리테가 내부의 설명을 시작하는데 그녀의 옆에는 명치부터 정수리까지 반으로 쪼개진 실루엣 메어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괴물과 마주쳤었어요. 그걸 보면 실루엣 메어의 소굴을 맞는 것 같아요. 소굴의 천장 높이는 2.2m 정도에 폭은 좌우로 팔을 뻗으면 간신히 닿지 않을 정도예요. 직접 땅을 파낸 건지 벽과 천장이 좀 투박한 느낌에…… 안에서 전투를 벌이면 천장이 무너져서 매몰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높이면 난 못 들어가겠는데?=

=응. 네 전투 방식을 생각해도 안 돼. 네가 안에서 해머를 휘두르면 쿵쿵거리다 천장이 무너질 거 같으니까.=

이실리테와 안느의 대화에 환인은 일행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일행을 둘로 나누겠다.”

=자기, 일단 나. 만약 땅이 무너지거나 하면 탈출할 수단이 있어야 하는 데 지금은 연이가 힘을 못 쓰잖니. 내가 대신 할게.=

유르파가 먼저 나서자 이실리테가 다음으로 말을 받는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안느는 진입조에 무리에요. 하지만 제 검기는 조용히 싸우는 데 특화니까 제가 낫다고 생각해요.=

=밖에 애들 지켜야 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까 너나 나나 둘 중 한 명은 밖에 남을 수밖에 없지.=

고개를 끄덕이는 안느를 본 환인은 가야를 돌아보며 손짓했다.

“땅 정령을 다룬다고 안느에게 들었습니다.”

=예. 하지만 이 장소는 정령의 힘이 강하게 닿지 않아 긴 시간 활용은 불가능합니다만…….=

“잠시라도 괜찮습니다. 땅속에서도 정령의 힘이 닿지 않는지 확인할 필요도 있으니 같이 가시죠.”

=알겠습니다.=

“백려강과 비상은 여기서 대기하고 있다가 실루엣 메어가 출현하면 안느를 도와서 죽여놓도록.”

=네, 환인 님.=

꾸으~

=그러면 자기? 순간이동 좌표를 설정할 테니까 10분만 기다려줘.=

“예.”

유르파가 순간이동 지점 좌표를 설정하는 사이 환인은 안느와 백려강, 비상에게 근력과 체력을 올려주는 중급 마수의 영혼을 강령시켜 주었다.

중급 정령 강령이 신체 능력을 전반적으로 3배가량 늘려주는 데 비해 블레이드윙 버팔로의 영혼은 근력과 체력을 약 2.6배가량, 그 외 순발력과 반사신경 등은 1.5배밖에 늘려주지 않는다.

정령 강령이 영혼 강령보다 뛰어난 효율을 보이는 것은 정령이기에 순수해서라고 짐작하고 있지만 사실은 어떨지.

‘그러고 보면 강령 지속 시간에도 차이가 나기 시작했군.’

정령을 영혼 구슬로 만들기 시작한 뒤로는 짐승이나 괴물의 영혼은 갈무리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그동안 강령 지속 시간 = 보유 한계 영혼 구슬 개수(1/min)라고 생각했었는데 블레이드윙 버팔로 영혼을 강령 받은 여자친구들을 보면 각자 96분, 103분, 111분으로 지속 시간이 제각각이다.

그간 여자친구들에게서 꾸준히 영기를 흡수했고 중간에는 아드네빌라와도 잠자리를 같이했기에 영혼 구슬 보유 개수는 영도 에쉬누르를 떠날 당시보다 19개나 더 늘어 151개인 상태.

정령 강령은 151분 동안 지속되는데 평균 100분 정도라니, 효율에 차이가 너무 난다.

“…….”

환인은 정령을 혼옥으로 만들 수 없을까 호기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혼옥을 금방 채울 수 있을 텐데. 들개 전사단을 제외하고 아직 하나도 혼옥으로 만들지 못했다 보니 관심이 쏠리는 느낌이다.

=알겠지? 이 부근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해. 안 그러면 순간 이동할 때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려강이랑 완벽하게 지킬 테니까.=

=응. 자기, 준비 끝났어.=

“예. 우리는 바로 들어간다.”

조금 눅눅하면서도 흙냄새가 물씬 나는 땅굴.

보통은 벌레든 짐승이든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가야. 야간 투시 능력이 있습니까.”

=네. 뛰어난 야간 투시는 아니지만 이 정도 어둠이면 윤곽 정도는 볼 수 있어요.=

“그러면 불을 켜지 않고 가겠습니다. 선두에는 내가 서지.”

=하지만 주인님, 제가 앞장 서는 게…….=

“함정이나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습격 등을 대비하려면 내가 앞장서는 게 낫다.=

유물을 네 개나 모은 덕분에 한시적이라면 5급 직업자 정도의 신체 능력은 발휘할 수 있으며 여기에 광창의 사용을 대비해 식사도 단단히 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성제님? 그러면 제 강화 술법을 받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뛰어나진 않지만 2급 근력 강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가야는 자기 딴에 파티의 기여를 위해 꺼낸 이야기였지만, 이실리테와 유르파가 살짝 눈을 떴다가 후후 웃는 모습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내가 뭔가 실수한 건가?

=아, 웃어서 미안해 가야 씨. 악의가 있어서 웃은 건 아니야.=

=……그러면 어째서 웃으신 겁니까?=

=자기는…….=

힐끔, 환인을 본 유르파는 그의 허락에 살짝 그의 능력을 공개했다. 일정 시간, 대략 2시간 반 정도 지속되는 6~7급 강화술을 쓸 수 있다고.

=예, 예? 7급… 강화 비술을요?=

=응. 다른 비술이랑은 호환이 안 되지만.=

=…….=

강화 비술 사용자는 그 능력의 특성상 설령 다른 능력이 없다 해도 어디에서나 환영받는다.

1~2급이면 3대 300치던 사람을 3대 400을 칠 수 있게 해주는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환영받으며 3급을 넘어가면 도시에서도 약간의 특혜(시민권이나 절세 혜택) 등을 주며 시민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4급쯤 되면 슬슬 군에서도 구애를 보내는 데다 5급이 되면 귀족 가문에서도 눈독을 들이는데 7급? 7급???

=성제님은 여러 신님의 가호를 받으시는 건가…….=

가야는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을 만큼 한 명이 너무 많은 능력을 갖췄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국을 대표할 정도의 무술 실력에 강화 비술도 가능하고 막대한 영혼술에 영도라는 배경과 성제라는 유일 직업에다 정치적 감각에 뛰어난 지능과 지혜까지…….

‘……몇 년 뒤에는 성제님이 필멸자 중 최강자의 지위에 오르시는 거 아닌가?’

“가야. 땅 정령을 불러 땅굴 속 형태를 대강이라도 살펴봐 주겠습니까.”

=아, 네.=

앞서 걷는 환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가야는 환령계에서 나오기 싫어 칭얼거리는 땅 정령을 어르고 달래 재빨리 근처 땅속 환경을 파악했다.

약 10초, 그야말로 대강 훑고는 환령계로 돌아가 버린 땅 정령이지만 필요한 정보는 파악했다.

=동굴은 개미굴 같은 형태이고 넓지는 않습니다. 나무뿌리 식으로 동굴이 뻗어나가니 보이는 갈림길을 전부 살핀다면 길을 잃을 일은 없을것으로 보여요.=

“정령이 나오기 싫어했습니까.”

=예. 땅속이지만 여전히 싫은 것 같았어요.=

“알겠습니다.”

환인의 질문이 끝나자 유르파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에서 걷고 있는 가야에게 물었다.

=가야 씨. 입구에서 가장 먼 곳은 거리가 어느 정도일까?=

=조금 구불구불하지만, 직선거리로는 150m일까요.=

=응, 그 정도면 긴급 탈출 안정권이야. 만약의 일이 벌어져도 안심해도 되겠어.=

“다행이군요.”

땅굴로 내려와 30m,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무슨 일인가 하고 실루엣 메어가 내다보는 일이 잦아진다.

하지만 그렇게 시선이 마주친 실루엣 메어는 모조리 패널 단검에 눈알이 꿰뚫리거나 광창에 목이 떨어져 널브러졌다.

마주치는 실루엣 메어는 죽이고 천장과 바닥, 벽을 유심히 살피며 계속해서 나아가는 환인.

영혼 시야로 보이는 벽과 천장, 바닥의 위상력과 자연력 같은 흐름은 매끄럽다. 술법적인 함정이면 일그러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실루엣 메어가 만든 평범한 함정은 존재할 수 있기에 그런 흔적을 경계할 겸, 실루엣 메어 공략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집중을 풀지 않고 땅굴을 계속 살핀다.

“……?!”

킥?

환인이 놀라서 움찔한 것은 세 번째 코너와 가까워졌을 때였다.

코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실루엣 메어, 검은 아지랑이를 몸에 감은 여자의 모습이 알몸의 안느와 완전히 같았던 것이었다.

움찔한 것도 잠시. 환인의 광창은 그대로 안느의 모습을 한 실루엣 메어의 목을 가르고 지나갔고, 끄트머리만 붙은 실루엣 메어의 머리가 뒤로 넘어가 데롱거린다.

“…….”

잘린 단면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같이 치솟아 올라 흙 천장을 적시는 가운데 피를 피해 물러섰던 환인은 쓰러진 실루엣 메어의 시체를 눈에 담았다.

=아? 이, 이건…….=

=음……!=

안느를 꼭 닮은 실루엣 메어의 시체를 본 유르파, 가야, 이실리테가 차례대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피분수가 잦아들고 시체에 다가가 무릎을 굽힌 환인은 놀란 빛이 그대로 묻어나는 실루엣 메어의 피묻은 머리를 들었다.

말랑말랑한 볼살과 긴 귀.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던 입술. 무표정하면 날카롭지만 미소 지으면 누구보다 부드럽게 휘던 눈매까지.

빛이 닿지 않는 지하여서 색조가 거의 없다 보니 정말 안느와 똑 닮은 모습이다.

탁, 빛막대 마도구를 켜자 그제야 다른 점이 눈에 들어온다.

뽀얗고 하얀 살결 대신 시체처럼 푸르딩딩한 피부. 푸석푸석한 색감의 흰머리.

피 묻은 머리를 내려놓고 일어선 환인은 흐에에에- 시체에서 일어나는 안느와 비슷하게 생긴 영혼을 구슬로 갈무리하며 말했다.

“시커먼 연기도 그렇고 색 덕분에 동료와 착각할 일은 없겠군요.”

=으응. 그런데 정말 기분 나쁠 정도로 똑같이 생겼네. 이게 미궁에 동화되어서 이형종화한 특징인가 봐.=

=이러면 우리를 닮은 실루엣 메어도 어딘가에 나타났겠네요. 혹시 밖에 주인님을 닮은 이형종이 나타났는데 안느가 망설이면서 손을 못 쓰는 건…….=

“그렇다 해도 비상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계속 나아가지.”

=네.=

=으응.=

그 후 환인은 땅굴을 구덩이 하나 놓치는 일 없이 1시간에 걸쳐 전부 둘러보았고, 별로 좋지 못한 결론을 내렸다.

실루엣 메어는 이미 미궁에 종속되었고 미궁이 실루엣 메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런 땅굴이 미궁 전체에 널려있을 거라는 것.

마지막으로 이러한 땅굴에서 실루엣 메어가 계속해서 생겨날 거라는 것.

땅굴이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 없이 안전하게 빠져나온 환인은 모두에게 자신의 추측을 알려주었다.

“지능이 낮은 괴물들이니 복잡한 교류나 작전, 전술을 동원할 리 없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실루엣 메어가 생성되고 있다면 상황은 생각 이상으로 위험하다.”

=이 땅굴 안 하고 근방에서만 60마리를 잡았으니 이런 게 수백 개면 그 숫자만 수천 마리…….=

안에서 자신을 똑 닮은 실루엣 메어를 봤단 이야기에 눈썹을 찌푸렸던 안느가 중얼거린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는 몸 어딘가가 으깨진 채 죽은 17마리의 실루엣 메어 시체가 널려있었다.

“상황이 안 좋다는 걸 확인했으니 우리의 대응에도 변화를 주어야겠지. 마을로 돌아간다.”

=응? 주변을 더 안 살펴봐도 되는 거니?=

“예. 혹시 땅굴이 초대형 개미굴, 혹은 1.5층처럼 지하에 대규모로 연결되어있거나 놈들이 유기적으로 활동하길 바랐었지만 그런 상황은 이제 기대하지 못하겠군요. 물론 어딘가에 대형 땅굴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대형 땅굴에 중핵이 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계속해서 재생성되는 이형종은 수색에 지장을 주겠지.

시간을 땅에 내다 버릴 생각은 없는 환인이다.

=그럼 어쩌려고?=

“이쪽에서 가기 어렵다면 저쪽에서 오게 해야지.”

안느에게 그렇게 대답하며 비상의 등에 올라타려던 환인은 실루엣 메어의 시체 하나를 뚫어지도록 내려다보는 가야를 발견했다.

그 시체도 플뢰족이었는데 표정이 담담하지만 계속 보고 있다는 것은…….

‘공적으로 아는 사이인 건가.’

환인은 그녀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가야. 그 시체의 외형이 아는 인물입니까.”

=예. 제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엘위드리스 가문의 인물입니다. 저와 같은 정찰 특기라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가서 플뢰의 형상을 한 시체를 보는 환인.

흐릿하지만 물처럼 파란색이 묻어나는 머리카락의 제법 아름다운 여자 플뢰 모습이다.

“상황이 더 귀찮아졌군.”

실루엣 메어가 이 형상을 하고 있단 것은 이 여자의 최후가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미궁으로 들어왔단 이야기니까.

여자 플뢰의 얼굴을 기억한 환인은 비상의 등에 올라탄 뒤 모두에게 복귀 지시를 내렸다.

=그렇군……. 그간 눈에 띄는 대로 잡아 죽였는데도 숫자가 줄지 않는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자연발생하고 있었나…….=

환인에게 짧은 정찰 결과를 들은 족장이 심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문지른다.

그런 그에게 환인은 지도를 꺼내 보여주며 물었다.

“족장, 이게 보입니까.”

=작지만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군. 빨간 표시는 뭔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침입자와 마주친 장소입니다. 여러분들의 활동 반경이 마을에서 대략 40km 정도라는 뜻이고, 그 안에 빠짐없이 침입자들과 마주쳤다는 이야기지요.”

=…….=

“상황이 변했습니다. 그리고 족장은 두 가지 선택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습니다.”

=그게 뭐지?=

“하나는 우리가 몇 달을 시간 들여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숨바꼭질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긴장을 곧추세우는 것.”

이 경우 미궁의 심핵을 빼앗기기라도 하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는다.

게다가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흔적이 보인다고 하니 족장의 표정이 더 안 좋아진다.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 목축하는 동물을 모두 도축해서 비상식량으로 만드십시오. 동시에 마을 밖으로 나가서 먹을 수 있는 것도 모두 모읍니다. 그사이 우리는 심장을 들고 밖으로 나가 침입자를 유인하겠습니다.”

=중핵이 스스로 찾아오게 한다는 거구만.=

“본래 중핵은 심핵의 곁에 있어야 하는 존재. 여러분들이 67년 전 빼앗긴 긍지는 이미 중핵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우리가 심장을 들고 밖을 돌아다니면 중핵은 그 본능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크으으…….=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길게 내쉰 족장은 30초 정도 고민하다가 여전히 알몸인 주술사를 데려왔다.

그리고 환인에게 들은 것을 전부 들려준 뒤 의견을 묻는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어차피 미궁을 떠나는 것은 결정 사항, 살림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심장은…….=

=족장. 마을의 지도자는 당신입니다. 이런 중대 사항은 제가 조언자 역할을 한다 해도 끼어들 사항이 아니에요.=

=으음. 그걸 어떻게 좀…….=

족장의 요청에 안대를 쓴 주술사의 단아한 얼굴이 작게 찡그려진다.

=남자가 되어서 한심하게 그럴 건가요? 여자에게 등을 밀어달라는 것만큼 못나 보이는 일은 없어요.=

=…….=

주술사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족장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현관 근처에 서서 팔짱을 낀다.

제대로 골탕을 먹은 표정으로 재차 한숨을 푹 내쉰 족장은 더 생각할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혼사. 두 번째를 선택하겠어. 자네도 시간이 무한정하지 않다고 했으니…… 빨리 일을 끝마치는 게 자네가 바라는 일일 테지?=

“기다렸다가 뒤에 찾아올 사람과 교섭하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글쎄. 자네와 자네 동료들을 보니까 자네보다 진실한 인간이 또 올까 싶기도 하고, 거기다 그 인간이 자네만큼 강할까 싶기도 해서 말이야.=

자네만 한 강자가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을 테고 자네만큼 강하다면 종족 내에서도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을 거다. 그러니 우리는 너와 계속 함께한다.

그 설명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족장이 결정을 내리자 팔짱을 껴 집채만 한 유방을 강조하고 있던 주술사도 작게 웃으며 나섰다.

=괜찮은 결정이었네요. 그러면 영혼사님, 심장은 어떻게 하실지 생각해두신 게 있으신가요?=

“거인 몇 분이 우리와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만으로 심장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침입자들에게 그다지 위협이 되지 못해 산발적인 전투가 이어지며 지지부진해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따르면 빼앗기 위해 그만큼 침입자가 많이 몰려올 거란 이야기이시네요. 알겠습니다. 족장?=

주술사는 밖으로 나가 채집과 사냥을 겸할 전사 두 명과 채집꾼 한 명을 붙여달라고 족장에게 부탁한다.

=위장을 겸하기 위해서지만 싸움도 해야 할 테니 믿을 수 있는 분을 붙여주세요.=

=뭐? 주술사 너도 나가겠다고?=

=당연한 일 아닌가요. 심장을 몸에 지녀야 하는 업무는 저의 것이에요. 그게 아니더라도 중요한 일에는 책임자가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요.=

=끄으으응……. 알겠어. 전사장과 요크를 붙여주지.=

=고마워요. 족장은 다른 이들을 이끌고 영혼사님이 말씀하신 이주 준비를 진두지휘해주세요.=

=그러지.=

이야기가 진행되자 느긋하게 지내던 거인들은 족장의 지휘 아래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와 아기들을 돌보는 육아 담당 거인을 제외한 50여 명이 전부 일에 매달린 것.

그중 21명은 사냥과 채집을 위해 3인 1조로 마을을 나섰고 나머지는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소와 하마를 섞은 듯한 고래만큼이나 커다란 가축을 전부 잡아서 다듬어나갔다.

거인들이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사이.

“그러면 우리도 시작하겠습니다.”

환인도 반응을 보기 위해 주술사 외 3명의 거인과 마을 근방을 천천히 산책하듯 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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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째깍째깍째깍(폭탄 초침 줄어드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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