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거인숲의 마을
가야가 제안을 거절하면 쓰려고 준비한 수단은 동원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겠습니다…….=
표정으로만 두 번은 죽고 세 번은 고문당하고 네 번은 가문에서 추방당하는 것을 보여주던 가야는 마지막에 퇴로가 전부 막힌 얼굴로 고개를 숙였던 것.
환인은 세상 다정한 남자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을 걸기 전, 멀리 보내놓았던 가야의 조원들을 부른 다음 반론은 허락 못 한다는 웃음으로 그들의 소지품을 모두 압수했다.
무기와 갑옷에서 아공간 주머니까지, 말 그대로 입고 있는 옷 한 벌만 제외한 전부다.
“압수한 소지품은 여러분들을 풀어줄 때 돌려드리겠습니다. 식사도 우리가 책임져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길.”
=저, 저어. 성제님, 갈아입을 옷이랑 속옷도 그 안에 다 있는데…….=
가야의 조원 중 가장 어리고 앳된 외모의 녹색 양 갈래머리 소녀가 손을 들며 조심스레 말했지만.
“………….”
=아, 아니에요! 그냥 이대로도 괜찮아요!=
웃는 얼굴에서 솜털이 곤두설 정도의 압박감이 쏟아지는 것에 황급히 도리질 치며 물러선다.
사색이 된 채 벌벌 떠는 플뢰 소녀를 10초 정도 응시해준 환인은 가야를 돌아보며 주의를 주었다.
“이곳은 별로 안전한 곳이 아닌 만큼 단독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휴식도 유르파와 비상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네에…….=
꽤 머리가 잘 돌아가는 걸로 보였으니 이 정도만 말해주어도 알아서 처신할 테지.
그 증거로 환인은 자신이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혼란과 복잡함으로 버무려져 있던 얼굴이 한결 편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음의 정리는 다 끝났다는 이야기.
가야에 대한 일도 마무리 지은 환인은 캠프를 설치한 곳으로 돌아가며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다.
일반적인 스타디움의 2배라고 해도 믿을 만큼 높은 통나무 천장과 드넓은 통나무벽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곳은 주술사의 집에 있는 탁자 위다. 탁자라고 해도 폭이 60m * 40m인 작은 운동장 수준.
족장의 집은 거인들이 회의를 해야 해서 주술사의 손에 들려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차분히 주술사의 집안 풍경을 살피지만 딱히 특별하거나 유별난 것은 없다.
가구라곤 탁자 하나뿐인 족장의 집보다는 나았지만, 탁자, 의자, 침대, 나무를 깎아 만든 식기 등 가재도구라고 해봤자 원시인이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벽에 줄줄이 걸려 건조되고 있는 정체 모를 풀과 식물을 바라보던 환인은 외따로 떨어진 곳에 매달려있는 거대한 고깃덩어리를 응시했다.
‘보통 저렇게 생고기를 밖에 놓아두면 썩기 마련인데.’
거인의 머리통보다 더 큰 고깃덩어리는 5개가 줄지어 걸려있었는데 마치 건식숙성을 하는 것처럼 표면이 말라가고 있었다.
드라이에이징은 보통 섭씨 1도 정도에 습도는 70~80도로 맞춘 뒤 공기가 잘 순환되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곳 미궁 평균 기온은 아침 14~15도에서 정오 22도 정도를 오간다. 절대 드라이에이징이 이루어질 환경이 아닌데…….
여긴 미생물이나 박테리아가 힘을 그다지 못 쓰는 장소인가. 아니면 저 고기의 질량이나 특징 문제일 수도.
신기한 현상에 잠깐 원리를 유추하던 환인의 귀로 여자친구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쪽을 돌아보자 여자친구들이 모여 저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 중이다.
임시 가림막을 세워 그곳에서 목욕한 덕분에 뽀얗게 된 모습은 예쁘지만, 다들 가벼운 옷차림이라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환인이었다.
무릎 위 허벅지 절반까지 올라오는 반바지에 민소매 나시며 오픈숄더 블라우스며…… 그녀들 정도는 나은 편이다.
한때 남자 못지않게 우락부락한 신체를 가졌던 안느는 피부를 드러내는데 저항감이 상당히 적어 개방적인 옷차림을 자주 하는 편이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
검은색 돌핀 팬츠에 회색 브라톱을 입고 있다지만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차림.
무엇보다 옷자락 밖으로 속옷 일부가 삐져나와 검은색 레이스가 드러난 상태인 게 환인의 눈에 밟힌다.
스림으로 만든 뽕은 제거해 눈으로 보이는 풍만감이 줄었지만 그건 상관없다. 그러나 속옷 일부가 보이는 건 문제다.
“후…….”
이건 소유욕에 질투인가. 환인은 가슴 속을 채우는 색다른 감정에 피식 웃으며 안느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복숭아처럼 매혹적인 엉덩잇살이 물결치듯 짧게 흔들리고, 안느는 맞은 자리를 문지르며 환인을 돌아보곤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갑자기 왜 때려?=
“옷 밖으로 속옷이 빠져나와 있다.”
=응? 앗!=
“남자도 있고 거인들도 몰래 구경하고 하니 이곳에서는 옷차림에 조금 신경을 써주면 좋겠군.”
약간 빨개진 얼굴로 옷차림을 정리하던 안느는 이쪽으로 다가오는 가야의 일행 중 남자 플뢰를 보았다. 그는 다행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눈치.
=가, 갈아입고 올게!=
안느가 목욕할 때 쓴 가림막 뒤로 얼른 돌아가고, 잠깐의 해프닝을 구경하던 여자들은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실 언니, 바닥도 나무인데 이대로 불 피워도 되나요?=
=직접 불을 피우는 게 불맛이 올라와서 더 좋지만…… 안전을 위해서 열선 플레이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으응. 앞으로는 넓적한 돌판도 가지고 다녀야겠네요.=
=어떤 상황에서 야영해야 할지 모르니까 준비는 다 해놓는 게 좋겠어. 짐의 제약은 이제 많이 사라졌으니, 까……?=
환인은 조잘거리며 대화를 나누는 여자친구들 앞에 제법 큰 바위를 내려놓았다.
가장 긴 폭은 2m에 가장 긴 높이는 1m에 달하는, 산 모양의 바위다.
=자기, 이건 언제 넣은 거니?=
아스펜드에서 나왔을 게 틀림없는 바위에 손을 올린 유르파가 웃긴다는 듯이 킥킥 웃는다.
“혹시 몰라서 챙겼습니다. 이만한 바위를 100m, 200m 상공에서 떨어트리면 그것만으로도 무서운 타격 병기가 되니까요.”
……공격용이었어?
여자들은 황당해하다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바위에 달라붙어 이것저것 길이를 잰다. 이어서 이실리테가 검기를 세워 사삿- 단숨에 여덟 장의 넙대한 돌판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돌판을 바닥에 깔고 백려강이 흙을 가지고 돌아와 사이사이에 채우자 화재 방지를 위한 간이 부엌이 완성된다.
환인은 이실리테가 백려강을 데리고 장작을 꺼내 불을 피우니 재료를 손질하니 저녁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다 유르파와 약간 헐렁한 칠부바지에 브라탑 위로 라운드넥 티셔츠를 한 장 더 걸친 안느를 불렀다.
“마차를 다시 조립하겠습니다.”
=갑자기 마차는 왜 조립해?=
=우리가 마차에 들어가면 거인들이 옮기기 쉬워져서?=
“아닙니다. 일단 오늘 밤 잠자리이기도 하고……. 생각해둔 것이 될지 안 될지 모르니 일단 마차를 조립하도록 하지요.”
조립과 해체를 몇 번 반복한 덕에 쌓인 숙련도는 마차 조립을 채 20분이 지나기 전에 완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구조와 이격, 유격의 확인마저 끝낸 환인은 조용히 아스펜드와 마차에 손을 올렸고.
슉-
=…앗?=
=아.=
“음.”
마차가 신기루처럼 훅- 사라지는 광경에 세 명은 짤막하게 탄성을 흘렸다.
=이게…… 무게 제약이 없으니까 이럴 수도 있는 거구나.=
유르파가 간과했다는 듯이 조금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이 시대의 아공간 주머니는 무게 감소 몇 퍼센트, 용적량 얼마, 이렇게 표시해서 구분한다.
하지만 그 점을 깊게 생각하는 사람은 적다. 주머니는 수납 가능한 무게, 그러니까 사람이 들 수 있을 무게가 중요하지, 가방 내부의 크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막말로 무게 감소가 0%면 내부 공간이 10㎥라 해도 의미가 없다.
아공간 주머니의 용도는 보통 짐의 운반에 쓴다. 그리고 보통 평범한 사람이 짊어질 수 있는 무게는 신체 능력에 따라 다르고 거리에 따라 또 달라지지만 대략 30~40kg 정도.
아무리 넓어봤자 물건을 조금 채우면 무게 때문에 들지못하게 되는 거다.
물론 사람이 옮기지 않고 짐말이나 마차, 수레에 넣어 옮기는 것이나 집 안에 보관하는 용도 같은 게 있지만, 아무튼 사람들은 넓이보단 무게 감소 쪽에 신경을 더 많이 쓴다는 이야기.
그랬기에 여자들은 아스펜드의 특징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접근했으며 환인은 아스펜드의 사용법에 사용하기 편리하겠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다 그의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가 고공 공격용으로 혹시 몰라 챙겨두었던 바위였다.
아스펜드의 내부 크기는 대형 짐수레 정도. 그렇다면 그 공간을 차지하는 면적은 어떻게 계산하는 건가.
속이 꽉 찬 바위와 속이 텅 빈 마차를 넣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오늘 밤, 마침 잠자리를 마련해야 할 상황이 왔고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시도해봤는데 조립한 마차는 아무런 장애 없이 아스펜드에 수납되었고, 용적도 완전히 분해했을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아스펜드는 부피로만 계산한다는 거니?=
=그것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질량으로 계산할 수도 있겠지요.=
부피는 뭐고 질량은 뭔가. 옆에서 듣고 있던 여자들은 이해되지 않는 문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만도 한 게 니오네브레스에 이런 지식은 유르파 같은 마도구, 마도기 제작자들이나 알고 있을 지식이다.
의무 교육 기관이 없다 보니 각자 업무에 맞는 지식만 익힐 뿐, 지구의 현대인들처럼 얕지만 폭넓은 지식은 갖추지 못한 것.
그래서 환인은 이해 못 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친구들에게 부피와 질량의 차이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부피란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공간을 차지한 크기다. 물로 예를 들자면 같은 양의 물을 가열해서 수증기로 만들면 차지한 공간이 더 넓어진다. 이처럼 상태의 변화에 따라 차지하는 공간의 면적이 달라지는 것이 부피다. 하지만 질량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가리키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위상력을 가리킬 수 있다.=
사용하는 것으로 소모되긴 하지만, 그 자체로는 환경이 어떻든 변하지 않는 불변의 에너지.
=아. 그럼 아스펜드가 부피로 내부를 계산하면…….=
“적재 용량은 생각보다 더 적겠지. 질량으로 계산한다면 더 넓어질 테고.”
환인의 추가 설명에 알아들은 사람은 가야 일행과 환인 일행 중 백려강뿐이었다.
그래서 환인은 조금 더 설명해주었다.
“1㎥의 공간에는 1,000ℓ의 물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이 1,000ℓ의 물이 기화하게 되면 그 부피는 1,700배 가까이 팽창하게 되지. 1㎥의 공간에 전부 담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 때문에 부피로 계산하면 물질의 어떤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지도 중요해지기에 계산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환인이 느끼기에 아스펜드는 질량으로 계산하는 느낌이 강했다.
느낌이라고 하는 이유는 환인이 인지하는 아스펜드 내부 공간은 어디까지나 감각적이기 때문.
물론 부피인지 질량인지를 알아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아스펜드 안에 모든 짐을 다 꺼낸 뒤 물을 가득 채운 다음 그 물만 따로 빼내 무게를 측정하는 것.
‘하지만 귀찮다. 문제도 있고.’
아스펜드 안에 물만 가득 채우면 유물에 어떤 부하가 가해질지 모른다.
트럭이든 짐수레든 적정 하중이 존재한다. 그 하중은 차를 가장 오래 쓸 수 있는 제한 무게나 다를 바 없다.
즉 적정 하중을 최대한 채워서 달리면 덜 채운 것보다 마모 속도가 빠르다는 것.
이건 일종의 물리 법칙이다. 그게 유물에도 통할지, 아니면 통하지 않을지는 이 유물 가방을 만들어낸 심핵만이 알겠지.
=음~.=
=으응.=
환인은 안느와 가야만 설명을 이해한 듯한 태도에 그만 이 주제를 끊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거다. 이실리테, 음식은 다 되어가나.”
=네? 아, 거의 다 됐어요.=
“그럼 저녁 먹을 준비를 하지.”
아스펜드 안에서 마차를 다시 꺼내놓은 환인은 가야의 조원들을 부려 탁자와 식기를 꺼내 차례차례 준비시켜나갔다.
거인들의 회의는 밤이 깊어지고 다시 날이 밝아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환인은 그런 거인들의 동태를 신경 써서 불침번을 선언했으며, 환인의 지시 아래 가야 일행과 그의 여자들이 반반씩 섞여 밤을 보냈다.
아무리 마을이라지만 이곳은 피아 구분이 아직 되지 않은 거인들의 주거지. 마음 놓고 쉴 수 없다는 것이 환인의 주장이었고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수긍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
몇 분 전, 스스로 가장 서기 힘든 불침번 시간대를 보낸 환인과 교대한 가야는 소인小人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곳에서 맞이하는 아침의 어스름을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느. 너 성제님을 사랑하지?=
=응.=
세상 모든 긍정을 담은 듯한 한 마디에 가야는 어깨에 걸친 숄을 조금 더 여미며 비싸 보이는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가며 공부하는 옛 훈련소 동기를 돌아보았다.
플뢰족의 고귀한 피가 짙게 이어진, 플뢰족의 선망이 담긴 백금 같은 은색 긴 머리와 은색 눈동자.
플뢰족이면 누구나가 부러워할 만큼 완벽한 길이와 모양의 길고 날렵하면서도 뾰족한 귀.
오뚝 선 콧날과 붓으로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갸름한 턱선은 미인 그 자체다.
눈매가 살짝 올라가 날카롭게 느껴질 법도 하지만 세밀하고 유려한 눈썹이 새초롬한 공주님의 느낌으로 바꾸어준다.
적기사의 크고 둔해 보이기만 하는 가슴과 다르게 여성성을 드러내면서도 과하지 않은 가슴과, 잘록하지만 너무 가녀리지 않은 허리에 아이를 열이고 스물이고 무리 없이 낳을 것 같은 순산형 엉덩이와 잘 발달한 골반은 플뢰족의 미의식을 몽땅 때려 부은 몸이다.
우락부락한 질리언트와 다름없던 거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플뢰 왕실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 같은 금지옥엽 공주님 같은 자태.
‘저러니 그 남자가 체면도, 염치도 모르고 그 난리를 떠는 거겠지.’
그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나 생각했던 가야는 이내 금발이 작게 살랑거리는 수준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딴 놈이 무서운 성제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까불다가 죽어도 내 알 바는 아니다. 오히려 일찍 죽어주면 우리 가문에 더 이익이 될 테지.
……사실 그런 것보다 저런 무서운 사람과 연관되는 걸 더 늘리고 싶지 않다는 심장이 더 큰 이유다.
어렸을 때부터 감이 좋다고 들어왔던 가야는 환인과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환인의 주변에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며 그와 나쁜 쪽으로 얽히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그러니 그와 이 이상 얽힐 일은, 그의 감정을 건드릴 일은 하기 싫다.
=겨우 그거 물어보려고 그렇게 분위기 잡았어?=
안느가 별소리 다 한다는 듯이 툭 던지는 말에 모닥불 앞에서 웅크리고 앉아있던 가야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그렇게 무서운 분을 용케 사랑하게 됐네?=
=너한테나 무섭지, 우리한테는 세상 다정한 남자거든.=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그야말로 죽음의 사신 같은 모습만 보여주는데 그녀나 다른 여자들을 대할 때면 플뢰의 피가 섞인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자상하면서도 자애로웠으니까.
그게 아니었다면…….
생각을 접은 가야는 본론을 입에 담았다.
=나, 성제님하고 계약 맺었어.=
=……무슨 계약?=
=본국에서 그분이 궁금해하는 걸 조사해서 알려주는 계약이야. 대가는 내 안전.=
대충 짐작이 간다. 아마 엘위드리스 가문이랑, 자신을 니오네브레스로 불러들인 놈들에 대한 거겠지.
=그래서 혹시 오해 빚을까 봐 미리 이야기해주는 거야. 난…… 성제님처럼 무서운 사람 옆에 있고 싶지 않아.=
으음. 확실히 도령이 가야한테 좀 살벌하게 대하긴 했지.
속으로 중얼거린 안느는 나름 동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언 하나를 주자고 마음먹었다.
=나도 하나 이야기해줄게. 우리 도령, 적에게는 정말 가차 없어. 도령하고 협조하기로 했고 약속했다면 그건 죽어도 지키는 게 좋아. 한마디로 배신하거나 이쪽저쪽 간 보는 거 하지 말라는 뜻이야. 그럼 네가 죽는 일이 생겨도 무시하지 않고 적어도 네 복수는 확실하게 해줄 테니까.=
=그래? 무서워서 성제님을 배신할 생각은 꿈도 못 꿨는데…… 억울하게 당하면 복수를 확실히 해주실 거라고 하니까 조금 안심되네.=
웃으면서 말을 끝낸 가야는 플뢰족 특유의 비상한 청력으로 주변의 동태를 연신 확인하며 오랜만에 만난 동기와 이야기꽃을 자그맣게 피웠다.
족장, 주술사, 전사장, 목장.
거인의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네 명이 모여 밤새도록 진행한 대화의 결론은 환인에게 긍정적인 쪽으로 났다.
=우리는 영혼사, 네 뜻을 따르기로 했다.=
노트북을 열어 건축과 목축, 농업 전반에 대한 지식과 이모작과 사모작, 토질, 기후, 비료의 제작과 성분, 씨앗과 모종의 차이 등.
적지 않은 자료를 옮겨적고 정리하던 환인은 주술사와 함께 찾아온 족장의 발언에도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안전과 정착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의 협조와 협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주십시오.”
=협조와 협력이라면 어떤 것입니까?=
환인은 족장의 참모, 지식 주머니 같은 역할을 하는 주술사에게 영도 근처로 이주한 뒤 하게 될 일과 해도 되는 일, 해선 안 되는 일 등을 차분하고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렇군요. 우리는 그 영도라는 조직에 합류하게 되는 겁니까…….=
=착한 작은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이라는 거구만. 그 착한 놈들을 이용하려는 것들도 적지 않고, 그곳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침입자 같은 밟아 죽일 놈들이 널려있고. 우리는 그 착한 작은 인간들을 지켜주고 하면 되는 건가?=
“해야할 정확한 일은 저보다 그곳에서 가장 강하면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대성녀님에게 들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분도 느끼셨겠지만 저는 무투파이면서도 과격파이기도 한지라.”
=그리 말씀해주시니 우리도 영혼사님에게 믿음이 생깁니다.=
줄곧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것처럼 경색되어있던 주술사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바짝 당겨져 있던 어깨도 풀어지고 자세도 한층 자연스러워지는 것이 긴장도 조금 풀린 모습.
환인은 그런 주술사에게 살짝 웃음지어주었다.
“상대가 배신하고 공격하고 적대하지 않는다면 저도 조용히 지낼 뿐입니다.”
적대하는 게 개인이면 개인을 부순다. 집단이면 집단을 박살 낸다.
간단하고 명료한 일이다.
=그래. 하지만 하나 문제가 남아있다.=
이제 대화도 끝났고 남은 것은 거인들을 바깥으로 내보낼 수단이라 생각하던 환인은 족장의 발언에 의아함을 품었다.
문제라니, 마을 안에 거인의 영혼이나 실루엣 메어의 영혼이 있지도 않았고 문제 될 요소는 안보였는데…… 혹시 이곳을 나갈 방법에 대한 것인가.
=그것은 제가 영혼사님에게 설명할게요.=
막 입을 열려던 족장은 주술사를 보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그리고 주술사가 천천히 문제라는 것의 내막을 이야기해준다.
대충 거인의 마을이 변종 실루엣 메어와 다퉈왔던 역사의 이야기. 거기서 요점을 간추리자면…….
“침입자들이 훔쳐 간 여러분들의 긍지를 되찾아야 한다는 거군요.”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거인으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이유와 같은 것. 부서져도 우리의 손으로 부수어야 한다.=
족장의 그 말과 함께 주술사가 지팡이를 내려 머리를 일행에게 보여주었다.
황금빛 광채를 뿌리며 빛나는 심핵의 바로 옆자리, 거기에 무언가가 뽑힌 자국이 하나.
=자네… 영혼사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그거다.=
“그걸 되찾아와달라는 부탁이군요. 그 거대한 몸으로 실루엣 메어를 뒤쫓는 것은 어려우니까.”
족장과 주술사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잠시 긍지가 무엇인지 유추하던 환인이 질문했다.
“만약 긍지를 가져간 침입자가 이미 부순 상태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겠지.=
=미궁이 소멸하면 침입자도 모조리 죽을 테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겠지요. 다만 부서진 파편만이라도 가져다주시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이 미궁의 넓이가 굉장히 넓은데다 침입자의 활동도 어떤지 모르는 만큼, 수색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각오해두시길.”
=알았다…….=
=부탁드립니다.=
그 후 족장과 주술사는 마을의 거인들에게 결정을 알리러 집을 나섰다.
70에 가까운 거인 하나하나를 만나 결정 사항을 알려줄 거라고.
족장과 주술사가 집을 나가자 여자들이 다가와 환인에게 어렵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꺼냈다.
=도령. 여긴 대도시가 열 개, 스무 개가 들어갈 정도로 넓은 곳이야. 거기다 놈들은 땅을 파고 돌아다니는 습성까지 있고. 진짜 모래밭에서 모래알 찾기나 다름없어.=
=처음부터 보내려 했던 남은 3달을 전부 다 써도 어려울 거 같아요…….=
=환연이 정령을 다룰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불가능하고요.=
여자친구들의 부정적인 의견을 차분히 들어준 환인은 왼팔의 혼옥 보관고에서 영혼 구슬 하나를 꺼내며 대답했다.
“무식한 방식으로 수색한다면 그렇겠지.”
그 영혼 구슬에 영기를 살짝 주입, 실체화시키자 그의 여자들 및 가야 일행도 눈을 부릅떴다.
키에에에— 끄오오에에에—
귀곡성을 흘리며 몸을 비트는 변종 실루엣 메어의 영혼 하나.
환인은 그것을 차가운 눈으로 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걸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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