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 거인숲의 마을
환인이 심핵을 본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시간에 따르면 그의 여자들과 가야 일행이 그의 몇 배에 달했을 정도.
“주술사께서는 침입자라고 하셨는데 그 정도면 매우 온건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군요.”
그랬기에 족장과 주술사는 이상함을 못 느끼고 그의 이야기에만 관심을 내비쳤다.
=침입자와 침략자의 차이는 무엇이지? 느낌에는 후자가 좀 더 안 좋은 거 같은데.=
“맞습니다. 침입자는 사전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영역, 권역 등에 무단으로 들어가거나 들어온 사람을 말합니다. 침략자는 정당한 이유도 없이 타국의 영역을 침공하여 공격하는 자들을 뜻하지요. 이 경우에는 미궁을 뺏기 위해서일 겁니다.”
=허어. 허허허.=
자신의 이야기에 아기의 재롱을 보는 것처럼 허허 웃는 족장.
그는 기가 차지도 않았다. 이렇게 작고 조그만 것들이 우리가 사는 땅을 뺏으러 온다고? 장난이지?
“방심과 교만은 파멸을 부르는 법입니다.”
환인의 지적에 족장은 비죽 웃었다.
=들어오는 놈들은 남김없이 죽어 이 땅의 비료가 될 거다.=
“그렇습니까. 오면서 보았지만, 마을의 규모로 보자면 인구는 70이 채 안 되는 것 같더군요.”
마을 바깥에 소(마수)며 닭(마수)며 목축을 하는 게 보였지만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 아이들까지 포함하면 62명이다. 하지만 아이들도 훌륭한 전사지.=
“우타바 양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족장은 환인의 대답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환인은 족장의 착각을 부숴주었다.
“바깥사람들의 숫자는 물경 5천만에 달합니다. 물론 그 숫자가 전부 전사나 술사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제 일행의 몸을 감고 있는 빛이 보이십니까. 저런 외형적 특징을 가진 이들을 직업자라 부르는데, 이들은…….”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얕보던 족장의 표정이 진중해지고 주술사도 환인 일행이 올라와 있는 테이블 가까이에 다가와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중에는 진정한 강자도 많습니다.”
=호오. 어느 정도로 강하지?=
“……각 국가의 수장 정도 되는 인물의 곁에는 여러분들도 항거 못 할 정도의 강자들이 모여있습니다. 아니더라도 여러분들 중에서 그녀들을 이길 거인은 얼마 없겠지요.”
갑자기 주제가 엉뚱한곳으로 빠졌지만 환인은 차분히 족장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었고, 이실리테와 안느는 갑작스레 자신이 지목되었지만, 환인과 족장의 시선에 눈을 빛내며 평소 환인을 흉내 내 갈무리하고 있던 기세를 피워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그 기운에 족장은 눈썹 끝을 살짝 꿈틀거렸다.
겉보기에는 자신의 손가락 한 마디나 될까 싶은 작은 인간에게서 동족의 전사에게나 어울릴듯한 기운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으음……. 그러면 자네는 어느 정도지?=
“단언컨대 저와 비슷한 실력자라면 여러분들은 꼼짝달싹 못 하고 유린당하다 마을을 잃게 될 겁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야기에 족장은 생각이 깊어지는 표정이었고 주술사는 깊은 관심을 표했다.
저 말은 자신들 개인은 어쩌지 못해도 삶의 터전을 쓸어버릴 정도의 힘은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리고 마을을 쓸어버리려면 자신들의 저항에 부딪칠 텐데 그것도 막아내면서 할 수 있다는 이야기? 그건…….
주술사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환인에게 질문했다.
=영혼사님의 말씀에는 거짓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필시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이겠지요. 그렇다면 그만한 힘을 가진 분께서 어쩐 일로 우리 마을에 오신 것인지… 다른 무엇보다 그 점이 가장 궁금합니다.=
환인은 예상 이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거인을 보며 내놓은 새 선택지, 그리고 우타바를 만난 뒤 줄곧 교정하던 기존의 선택지를 놓고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기존의 선택지를 뽑아 들었다.
새로 떠올린 과정은 너무 길고 귀찮다. 빠르고 간단한 게 좋아.
“우리는 이 미궁을 부수러 들어왔었습니다.”
그 순간 족장에게서 종합운동장보다 몇 배는 더 큰 통나무집을 가득 채우는 살기가 쏟아졌다.
비상을 제외한 쿠에들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떨었고 가야와 조원들도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붙잡는다.
멀쩡한 것은 환인과 그의 여자들, 그리고 대범함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비상뿐.
족장의 살기가 잦아든 것은 그 살기에도 멀쩡한 주술사의 이야기가 나온 직후였다.
=들어왔었다는 것은 과거형……. 우리가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셨다는 말씀이시군요.=
“외부의 사람들이 이 미궁에 붙인 이름은 거인숲 미궁입니다.”
=알고 왔었다는 말 아닌가!=
속았다는 심정에 족장이 귀청이 떨어질 듯한 포효를 지르며 더 강한 살기를 쏟아내었다.
그것에는 결국 견디지 못하고 가야와 조원들이 풀썩, 털썩 주저앉았으며 유르파도, 다른 쿠에들도 떨리는 다리로 비상의 가까이에 붙는다.
환인 일행의 반응에 주술사는 곧은 눈썹을 작게 찡그리며 족장을 타박했다.
=족장. 진정하세요. 담담한 작은 사람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나요.=
=주술사! 거인숲이라는 것은 우릴 뜻하는 게 아닌가! 그걸 알고도 부수러 들어왔다는 것은……!=
=좀, 화를 내는 것은 영혼사님의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뒤에도 늦지 않아요.=
=……! 끄으응…….=
화를 내고 싶지만, 주술사의 이야기는 논리에 빈틈이 없어 족장은 울긋불긋해진 표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입을 일자로 꾹 닫는다.
그런 족장의 행동에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쉰 주술사가 다시 물었다.
=영혼사님은 짓궂으신 면이 있으시네요. 우리 족장의 심장이 분노로 폭발하기 전에 설명을 길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설명하려 했지만 족장의 목소리가 커서 자꾸 끊기는군요.”
=거 미안하게 됐군!=
=족장!=
결국 주술사에게서 고성이 나오니 족장은 고개를 팩 돌려 어린애가 삐진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그런 족장을 향해 안대 너머가 보이는 것처럼 한심스레 바라보던 주술사가 환인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다.
=사과할게요. 이제 영혼사님의 이야기를 끊지 않을 거예요.=
“이곳 미궁은 다른 미궁들과 차별화되어있습니다. 바로 미궁 내에 여러분 거인들을 포함한 생태계가 구성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미궁이라 부른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생태계라니…… 다른 미궁은 이렇지 않다는 뜻인가요?=
“미궁 내에서 살아가는 생명은 모두 미궁이 만들어낸 이형종, 반전 개체들입니다. 거의 먹지 않아도 멀쩡하며 미궁에 들어온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미궁의 청소부라 할 수 있겠군요. 사고를 할 줄은 알지언정 말은 못 하며 상대에 대한 지독한 살의만 존재하는 생물 병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랬군요……. 영혼사님은 이곳에 우리 같은 거인이 아니라 그 이형종이라는 거인들이 있을 거로 생각하셨던 거였고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주술사는 족장을 응시했고 족장은 그 시선에 끙, 다시 앓는 소릴 냈다가 고개를 숙였다.
무턱대고 화낸 것을 사과하는 것이다.
환인은 그 사과에 다시 고개를 끄덕여준 뒤 평온의 파동을 펼쳐 약한 공황에 빠진 일행의 정신을 보듬어주었다.
그리고 평온의 파동에 보이는 두 거인의 관심을 외면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당신이 집으로 들어올 때의 대화로 이어집니다. 이곳은 우리가 아닌 자들에게도 알려졌으며 이 미궁은 각국에 있어 매우 먹음직스러운 곳이 되겠지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병력이 계속, 우리가 모두 죽을 때까지 찾아올 거라는 이야기군요…….=
“처음에는 당신들에게 별것 아닌 병력이 찾아올 겁니다. 어렵지 않게 침략자들을 해치우겠지요. 하지만 당신들의 위험성을 확인한 국가는 파병의 규모와 강함을 대폭 상향시켜 다시 보낼 겁니다.”
=그땐 우리도 위험해진다는 건가. 우리 실력을 보고 돌아간 놈들이 우릴 죽일 수 있을 놈들을 보내온다고.=
환인이 그렇다고 고갤 끄덕이자 족장이 살짝 분노를 드러낸다.
=영혼사. 네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없군.=
“사소한 선택의 갈림길은 있을지언정, 여러분들이 죽어도 이 미궁에서 죽겠다고 결심하면 결과는 대동소이할 겁니다.”
족장은 주술사가 무어라 말하려는 것을 막고 불길이 치솟는 것처럼 부리부리한 눈으로 환인에게 말했다.
=머리로는 영혼사, 네 말이 틀리지 않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워. 의문도 생겼고.=
“…….”
=묻지. 그런 이유에서 영혼사 자네가 우릴 찾아온 진짜 이유는 뭐지? 그리고 자네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일 증거는? 정말 밖에는 우릴 모두 죽이고 마을을 부술 인간이 있나?=
“사실 당신들 모두와 싸워 이길 정도의 실력자는 드물 겁니다. 수천만 니오네브레스 인구 중에서도 얼마 되지 않겠지요. 하지만 전투가 아닌 전쟁이 벌어진다면, 당신들의 가장 큰 장점이 약점으로 변해 발목을 잡을 겁니다.”
=장점이 약점으로 변한다고?=
“그 거대한 덩치. 그리고 주술사, 당신의 지팡이에 박혀있는 미궁의 심장.”
=……!=
=…….=
“이 미궁이 여러 가지로 돈이 되겠지만, 그것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버티고 버틴다면 화난 자들이 이걸 몰래 부수려 할거라는 거군요…….=
=우리 그란다들은 몰래 숨어드는 것들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아둔하고 멍청하지 않다!=
“수단과 방법 따위는 머리를 맞대면 무궁무진하게 나옵니다. 세상에는 전사와 술사만 있는 것이 아니니 몸을 숨기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자들이 찾아오거나 실루엣 메어처럼 땅속으로 숨어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
“실루엣 메어의 지능은 없다시피 합니다. 그저 본능에 따라 살육하려 하고 살아있는 생물을 괴롭혀 희열을 얻으려 하는 저능하고 저열한 괴물일 뿐. 그렇기에 패턴은 단순하고 복잡한 행동은 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크으으.=
“그리고 강함에 관해서 물었습니까. 밖으로 나가지요.”
환인은 비상의 등에 올라타 날아서 족장의 통나무집을 나섰다. 그러자 설마 날줄은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쫓아 나가는 족장과 주술사.
그런 두 거인의 앞에서 환인은 중급 정도인 변종 실루엣 메어의 영혼 다섯을 꺼내 뭉친 뒤 심핵력을 주입, 영혼 폭발 구슬로 만들어 저 멀리 보이는 유달리 두꺼운 거목을 향해 날렸다.
꾸과과과과광……!!
두께만 30m가 넘어가는 초超가 붙을 거목의 허리에 블랙홀 같은 폭발이 발생, 폭발 부분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목은 끄드드드— 굉음과 함께 마을의 서쪽으로 쓰러진다.
그걸 넋이 나간 듯이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마을의 거인들.
환인은 위력도 위력이지만 다른 이유에서 딱딱하게 굳은 족장과 주술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이런 공격이 쏟아진다면, 족장과 주술사는 막을 수 있겠습니까.”
=…….=
=…….=
두 거인은 자그마한 새를 타고 날고 있는 환인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만한 공격이면 어떻게든 막고 버틸 수는 있다. ‘자신들’이라면 말이다. 마을의 동족들? 저 폭발에 휘말려 그대로 죽어 나가겠지.
하늘에서 저런 걸 쏟아붓고 도망가버리면 쫓을 방도도 없다.
저들은 미궁 밖을 나갈 수 있지만, 자신들은 몸집 탓에 나갈 수가 없으니.
게다가 저 공격을 쓰는 데 별로 지친 기색도 없다. 저 공격이 전부가 아니란 뜻.
집으로 되돌아가는 환인의 뒤를 따라 다시 테이블 앞으로 돌아온 족장과 주술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마지막 질문의 대답입니다. 여러분들을 만났어도 미궁을 부수어야 한다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왈칵 성을 낼 거라 생각했지만 족장은 심유해진 눈빛으로 자신만 바라볼 뿐이다.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한 환인은 계속 입을 열었다.
“이곳은 존재하면 각국의 분란 거리만 될 뿐입니다. 전생의 불씨가 된다는 이야기지요.”
위치가 절묘한 것도 문제다.
자원을 향한 탐욕은 어디에나 있다.
이곳은 영도의 순찰 권역, 라드세아의 권역, 플라비우스의 권역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느 권역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이블팩션과 완충지역에 있는 거다.
그 말은 벨티칼과 메리아놀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니 말 그대로 4개 국가에서 싸움을 벌일 빌미도 되는 것.
물론 환인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는 저 영롱한 황금빛 광채를 뿌리는 심핵을 부수고 심핵력을 늘릴 생각뿐, 만약 이 거인들이 사악한 성향이었다면 환인은 망설이지 않고 흑옥을 써서라도 몰살시켜버렸을 것이다.
족장과 주술사가 까다로울 것으로 보이지만, 여자친구들과 협공하면 못할 것도 없다.
위상력이 많으면 위상력이 가미된 공격에 내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그것도 신체를 유지하고 남은 위상력의 양이 많을 때의 이야기.
그의 강화 영혼 시야, 일반 영혼 시야에 보이는 두 거인의 위상력은 덩치에 비해 위상력이나 영기의 양이 무직자처럼 그저 그랬다.
저주든 뭐든 쏟아부어서 공격을 퍼부으면 상처 없이 이길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는 이유는 거인들이 선 성향인데다 여자친구들이 보고 있어서다.
환인 나름대로 정의로운 쪽으로 움직이는 중인 것이다.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자 주술사가 서글프면서도 조금 화난다는 기색으로 물었다.
=영혼사님이 우리를 모두 죽이겠다는 뜻이 아님은 알 수 있어요. 하지만 미궁을 부순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어요. 이 차이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요?=
저들이 먼저 이 주제를 꺼내길 기다리던 환인의 눈이 강하게 번뜩였다.
=…….=
=…….=
=…….=
가야와 조원들은 거리감이 이상해질 것 같은 거인들의 마을에서, 그보다 더 거리감이 이상해질 것 같은 부러진 거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장…… 성제님하고 마찰을 빚는 것은 미친 짓이에요.=
=…….=
=조장님. 이 사실…… 본국에 알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금 성제님과 약속을 어기겠다는 뜻이야?=
=성제님 개인의 힘도 무섭지만, 저 거인들이 영도의 산하로 들어갔을 경우가 더 큰 문제다. 본국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급진파의 의견이 대두되어 다소 거칠게 움직이기라도 했다간 봐라. 우리 모국은 커다란 재앙을 맞이하게 돼.=
=오빠, 언니. 잠깐만요. 성제님은 여기서 보고 들은 것만 입에 담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냥 성제님은 엄청 무섭고 위험한 분이니까 건드리면 안 된다고 보고하면…….=
=하…… 에시라, 자초지종 설명도 없이 무턱대고 그런 말을 했다간 사법부의 장관님들이 어떤 생각을 하실지 짐작이 안 가?=
=에시라. 그 말만으로도 성제님은 용서하지 않으실 가능성이 크다. 그럴 거면 모든 것을 먼저 알린 뒤에 그분의 처분을 기다리는 게…….=
가야는 조원들의 갑론을박을 들으면서 고민에 휩싸였다.
‘설마 성제 예하께서 거인 병단을 구상하고 계셨을 줄은……!’
가야는 족장의 집에서 벌어졌던 환인과 족장, 주술사의 설전을 떠올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심리 장악을 통한 언변을 발휘하여 설득력이 높은 회유를 가하면서 적절한 무력 시범까지 선보여 보여 자신의 발언에 믿음과 신뢰를 말도 못 하게 때려 박는 그 과정.
‘저는 여러분들의 안전한 거취를 마련할 수 있는 신분과 지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그 길을 열어보려 합니다.’
‘영혼사. 자네는 어째서 이렇게나, 오늘 처음 본 우리에게 그렇게 신경 쓰는 거지?’
‘사람으로서의 도의입니다.’
‘이 미궁을 부수려 하는 자네의 양심이란 건가. 만약 거절한다면 자네가 우리를 죽이겠군.’
‘죽이는 것은 미궁이 되겠지요.’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정말 믿어도 되나?’
‘여러분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며 호의적으로 따라준다면, 맹세합니다.’
‘……생각이 필요해. 의논도 필요하고…….’
‘예. 충분히 검토해보시고,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기다리겠습니다.’
굳이 ‘나’라고 하지 않고 ‘우리’라고 했으며 맹세에도 해석의 여지가 남는 단어를 채택했다.
거인을 상대로 그러한 권모술수라니. 거인들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그건 틀림없이 족장과 주술사가 다른 거인들을 설득할 시간일 터.
‘으으으으.’
가야는 목욕한 덕분에 뽀얀 금발과 예민한 귀를 한꺼번에 움켜쥐며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답답한 심경을 표현했다.
이대로 거인들이 영도에 합류하고 성제 예하께서 족히 6급? 7급? 그 정도 되는 심핵력을 취하면, 그 사실을 두 달이나 입 다물고 있어야 하는 자신은 파멸이다.
정혼자와 파혼은 당연할 테고 가문에서 제명, 축출까지 당할지도 모른다.
고위 귀족에서 가문의 제명이란 곧 죽음. 안느가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도 미리아스툼 전하께서 보호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척후병단에 있는 한 죽음이 불식 간에 찾아올 수 있다고 각오를 다졌었다. 그랬기에 조원들을 살리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 있었던 거다.
그래도 그건 동료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전사戰死지, 파혼과 가문 축출에 이은 암살로 사망 같은 불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다.
‘차라리 영도로 망명할까…….’
얼뜨기 같은 생각이지만 한순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가야는 정신적인 코너에 몰려있…….
“생각이 많은 모습이군요.”
……다가 어깨를 짚으며 말을 걸어오는 환인의 존재에 입 밖으로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앗, 아, 아니. 그런 게 아닙, 니다!=
환인은 더듬거리며 크게 당황하는 가야의 어깨를 강하게 쥐고 움직임을 멈춘 뒤 안느처럼 길고 뾰족하고 하얀 귀에 속삭였다.
“망명을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린 모습이었습니다만. 아니었습니까.”
=……!=
이, 이 사람은 마음까지 짚어낼만큼 관찰력과 통찰력도 뛰어나단 말인가……!?
=그런 얼뜨기 같은 생각……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은 못 합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여자의 몇 안 되는 동기의 인생이 허망하게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두고 볼 생각도 없고 말입니다.”
=…….=
뭘…까, 이 가슴의 두근거림은. 두려움? 긴장? 아니면…….
“하나만 약속해주신다면, 가야 당신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지 않도록 확실하게 도움을 주겠습니다.”
=무엇……입니까?=
“메리아놀로 돌아가 두 가지, 저에게 정보를 비밀리에 보내주시면 됩니다. 물론 이 약속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것이 조건입니다. 아,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미리 내용도 알려드리지요.”
하나는 엘위드리스의 근황과 동태의 자세한 보고.
또 하나는 메리아놀의 모든 술사 집단에 대한 자료.
=…….=
가야의 하얗고 가녀린 얼굴에 곤혹과 체념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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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거인 내장 탐험같은거 없어요!
왜 자꾸 두근들거리시는거야 ㅋㅋㅋㅋ
그리고 쪽지로 질문+협박하는 분들이 계신데 글쟁이는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전작이랑 전전작 보신분들이면 '아 킹정이지ㅋㅋ' 하실 정도?
히로인 오체분시 같은거 없으니까 안심들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