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9 거인숲의 마을
이동에는 거인의 보폭에 맞춰 일행이 속도를 올리기로 결정을 내렸다.
키 20m의 여자 거인은 반쯤 달리는 식으로 한걸음에 9~10m씩 죽죽 나아간다. 이 속도를 따라가려면 일행은 달려야 하는 수준.
체력적으로 달리기가 무리인 유르파는 빗자루를 타고 따르기 시작했고 환인은 실루를 데리고 와 비상을 타고 뒤쫓는다.
그 외에는 각자 별 어려움 없이 뒤쫓아 달리는 중이다.
이실리테와 안느는 초속 10m로 하루종일 달릴 수 있으며 백려강도 꾸준히 다듬고 연마하는 용인체의 스펙으로 한나절은 무리 없이 달리기가 가능하다.
가야와 조장들도 각자 5급과 4급의 전사, 투사, 엽사로 구성된 직업자였기에 나름 여유를 가지고 일행의 후미에서 쫓아온다.
“…….”
비상의 고삐를 쥔 채 여자 거인의 토실토실한 알궁둥이와 언뜻언뜻 허벅지 사이로 드러나는 살 틈을 구경하던 환인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서 올라오는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초롱초롱한 붉은 눈동자로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실루.
아무래도 아까 변종 실루엣 메어를 한칼에 죽여버렸던 것이 실루에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던 듯하다.
그간 실루가 이실리테와 안느하고 먼저 친해지도록 일부러 벽을 세우고 있었고 실제로도 효과가 있어 실루는 자신을 어려워해 가까이 오질 않았었는데, 좀 전의 일에 그 심리적 장벽이 단번에 무너진 모양새다.
‘어쩔 수 없군.’
쿠에는 집단에서 가장 강한 개체에게 끌린다던가. 설마 태어난 지 이제 한 달이 넘어 두 달이 되어가는 실루가 강함을 알아볼 정도라는 게 황당하지만, 벌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다.
가능한 실루가 이실리테나 안느 둘 중 하나를 스스로 선택하길 바랐지만, 이 상태를 보면 그건 무리겠지.
‘직접 둘 중 한 명을 정해주고 실루의 지위는 비상의 다음이라고 못 박아두는 수밖에.’
환인은 누굴 실루의 짝으로 정해줄지 잠깐 고민했다.
다중 검기를 쓰며 노을색 쿠에를 타고 전장을 질주하는 검희는 문자 그대로 살육 병기, 전투 마차 사이에서 탱크가 질주하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
하지만 그녀의 기동력은 쿠에가 없다 해도 절대 꿀리지 않는다. 오히려 다중 검기를 발판으로 삼아 전장에서 입체적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 될 수 있다.
관점을 바꿔 안느가 실루와 맞지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원거리는 노을색 쿠에의 특수 능력으로 커버하고 근거리는 성체술을 발동한 안느의 괴력으로 죄다 박살 내버리는, 이실리테가 일반 중형전차라면 안느는 중전차를 넘어 초중전차다.
게다가 성술을 다루니 실루가 다쳐도 빠르게 회복시켜줄 수 있고 체력이 떨어져도 성술로 채워줄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장점.
삐이~
실루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붉은 깃털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힌다. 그 신체접촉이 좋은지 실루는 적극적으로 환인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작게 운다.
‘아직 어리니 천천히 결정하면 되겠지.’
어리기 때문인지 비상도 실루를 경계하지 않는 중이고.
그때 환인의 귀에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와 그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가야와 안느의 대화다.
=앤, 많이 변했군.=
=넌 별로 안 변했네. 그리고 지금은 안느야. 안느라고 불러.=
=그래, 안느. 고맙다.=
=……미리 말해두지만 난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럴 리가. 네가 아니었다면 나와 내 조원들은 실루엣 메어들에게 죽었을 거다. 우리를 미궁의 시정잡배로 인지하신 성제 예하께서 죽도록 내버려두셨을테지.=
=우리 성제님은 그런 분이 아니야. 무례하게 굴거나 적에게는 가차 없지만.=
=좀 전의 상황이 그랬지. 무례하게 괴물을 끌고 왔으니 적으로 간주되어도 이상한 일이 아닌 상황이었잖아?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형편 좋게 일이 해결되진 않았을 거라고 봐.=
실제로 그녀와 한때지만 훈련소 동기였다는 이야기가 나온 뒤에 심장이 떨리는 분위기가 사라졌으니까.
…흥, 작게 코웃음을 친 안느는 일부러 무덤덤하게 대하던 자세를 치우고 약 올리는 것처럼 이죽거렸다.
=기껏 교단의 본단에 선택되어서 상위 성직자로 나아갈 길이 열렸는데 교단을 나가서 하고 있는 일이 척후조야? 거기다 저런 괴물한테 죽을 뻔했고?=
=너무 그러지 마. 저 괴물은 이형종인지 뭔지, 6급의 전투 달인만큼이나 강한 놈들이었어. 생명을 가지고 놀만큼 잔혹한 놈들이기도 했고……. 그리고 그냥 척후조가 아니거든? 사법부 산하 척후병단이라고.=
=어쨌든 척후조란 말이잖아. 넌 성적도 좋아서 그대로 남았다면 대주교까지… 어쩌면 수도대주교도 될 수 있었을 텐데.=
실루엣 메어의 강함 같은 것은 관심 없다는 안느의 태도에 가야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 혼약자 가문에서 교단의 성직자가 가주의 부인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중앙정부로 가는 건 별말 안 했어?=
=되려 강력히 추천하더군. 사법부에 사돈 친척 어른이 계신다고 말이야.=
=그놈의 가문의 이해, 가문의 사정. 아주 지긋지긋해.=
=하하.=
안느가 진저리치는 이유를 잘 알기에 웃던 가야는 실루엣 메어에게 크게 베였던 왼쪽 젖가슴을 잡으며 윽, 짧게 신음을 흘렸다.
베인 옷자락은 실로 대충 꿰매놔서 맨살이 훤히 드러나진 않지만, 봉긋한 물방울 모양 가슴을 정확히 세로로 양분하는 상처 자국은 눈에 띄는 상황.
안느는 징표를 꺼내 말없이 집중, 약한 고통 경감과 약한 지속 치유의 성술을 그녀의 가슴에 걸어주었다.
약한 황색의 기운이 왼쪽 젖무덤 근처를 맴돌다 사라지자 가야는 고통과 상처의 이물감이 많이 감소한 것을 느끼고 소리 없이 감탄했다.
=그런 중경갑을 입고 달리면서 성술을 쓰다니…… 외모에 아우라뿐만 아니라 실력도 많이 늘었군? 무력은 그때도 대단했지만 성술은 낙제생 수준이었는데 말이야.=
=야…….=
앞서가는 환인의 뒷모습을 힐끔거린 안느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눈을 부라렸고 가야는 피식 웃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느, 네 아버지의 전언이 있어.=
=필요 없어. 정치하고 얽혀서 우리 성제님 귀찮게 만드는 건 진짜 사절이야.=
=정치 같은 건 아니야. 그냥 한 아이의 아버지가 혹시 인연이 닿는다면 전해달라는 이야기니까.=
=필요 없다니까. 집안 일은 듣고 싶지 않고 얽히고 싶지도 않아.=
=안느, 그러지 말고.=
단호하게 거절하던 안느는 앞서가던 이실리테가 이쪽의 속도에 맞춰 묻는 모습에 심기가 복잡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야는 갑자기 말을 걸어온 적기사, 붉은 거라곤 없는데 어째서 적기사라고 불리는지 모를 이실리테를 힐끔 보곤 안느를 재차 곁눈질한다.
그 행동에 이실리테는 환인의 담담함을 흉내 내며 그녀들을 설득했다.
=안느. 아버지로서의 전언이면 들어도 된다고 생각해. 아니더라도 가문에서 널 어찌하려는 거라면 주인님도 알아두어야 미리 대비할 수 있을 거 아냐.=
못마땅한 듯이 얼굴을 작게 찡그리던 안느가 후우, 한숨을 내쉬자 그걸 허락의 뜻으로 알아들은 가야는 이실리테를 향해 말했다.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파견된다는 것을 알게 된 안느의 아버지께서 그냥……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기쁘다는 이야기를 전해달라 하셨을 뿐이었으니까요.=
=안느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신가요? 그런 분께서…….=
그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정치와 연관 없이 단순히 걱정을 보일 수 있는 거냐는 이실리테의 의문에 그녀가 메리아놀 내부 정치 구조를 모른단 걸 깨달은 가야는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메리아놀은 한 분의 화신께서 다스립니다. 그 아래로 협의회가 있으며 협의회에는 플뢰족, 프라우드족의 왕이 계시고 루크랑족, 플라비우스족, 사비족, 해린족, 기플라족과 암드룩스, 노티엔의 족장이 협의회를 구성합니다.=
플뢰족과 프라우드족의 왕도 종족의 유일한 왕이 아니라 종족 의사결정기구에서 3명의 왕이나 여왕을 뽑아 5년마다 1명씩 협의회로 보내고, 협의회장직은 10년 주기로 플뢰족과 프라우드족이 번갈아 맡는다고.
가야의 설명이 끝나고 안느가 조금 부족하다고 느낀 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영도에 비유하자면 화신님은 대성녀님이고 플뢰와 프라우드의 왕은 영성님들, 협의회의 족장들은 영성 후보자님들이라는 거야. 내 아버지가 왕이라 불리지만 압도적인 권력 같은 건 없어.=
=그렇다고 해도 왕이잖아. 라드세아의 9급이나 10급 호족 정도 되는 분들 아니야?=
=맞긴 한데…….=
그건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안느의 마음을 읽은 이실리테는 나중에 환인에게 이야기해 주면 그가 알아서 할 거라 생각하고 주제를 돌렸다.
=그런데 왕은 플뢰족과 프라우드족만 있어? 다른 종족은?=
=땅신님께서 만드신 메리아놀은 플뢰하고 프라우드가 받들어 세운 나라야. 대지가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다른 종족을 막지 않고 받아들여서 종족연합국가가 세워진 거거든. 그런 플뢰족과 프라우드족을 존중해서 다른 종족은 왕을 추대하지 않아.=
=정치적인 문제도 있겠네. 라드세아에 여왕이 뻔히 있는데 메리아놀에 자리 잡은 루크랑족이 왕을 내세우면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할 테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
환인은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듣다 고개를 작게 저었다.
일단 안느의 부친은 그녀를 이용할 생각은 없다는 게 확실하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질적인 육체 탓에 쫓겨나는 식으로 메리아놀을 떠났음에도 혈통 보호를 위해 암살자를 보내는 걸 막은 사람이 그녀의 부친으로 추정되니까.
‘땅신 교단에 몸을 의탁했기 때문이란 견해도 있지만.’
아무튼 저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을 내렸을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엘위드리스와 라드세아 호족 연맹 따위에서 보낸 사람들인가.
‘라드세아 성궁은 호천명 친왕을 통해 이쪽을 물리적으로 건드리는 것은 하책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메리아놀의 현 협의회는 의외로 온건파인 듯하고.’
역시 사고를 저지르는 것은 이익에 예민한 상위층이지.
최상위층은 들어오는 정보가 많기에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이득과 손해를 따져가며 움직이기에 오히려 조심스럽고 예민한 편이다.
그러나 상위층은 최상위층 정도 되는 고급 정보는 들어오지 않는다.
손에 들어오는 정보의 신뢰도는 대강 60~70%.
애매한 수치지만 그걸 절대적으로 믿으며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신뢰하기에 멍청한 짓을 저지르기 쉽다.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분산해 보존하는 것이 안전하지만, 그런 정보와 사태 대처보다 눈에 보이는데 한곳에 모아 관리하는 게 편하단 이유로 후자를 선택하는 게 상위층인 것.
물론 돈과 권력에 약한 것도 한몫할 것이다.
환인의 눈빛이 점차 서늘해져 가며 그의 머릿속에서 본보기의 방식이 세워질 무렵.
=작은 인간. 이제 곧 마을이다.=
일행은 거인의 마을을 앞에 둘 수 있었다.
쉼 없이 달린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니오네브레스에도 거인족으로 분류되는 아인종이 사회를 이루고 있다.
주류 4대 인종인 루크랑, 플뢰, 플라비우스, 프라우드 정도는 당연히 아니고 가족, 작은 부족 단위로 대륙 각지에 퍼져서 살아가는 소수 인종, 질리언트다.
그들의 외형적 특징이라면 다 자란 성인의 경우 키가 3~4m에 달하는 데다 근밀도와 체격을 비롯해 신체 조건은 모든 종족 중 최고여서 타고난 전투 종족이라 불린다는 점이다.
무직인 질리언트가 3급 직업자를 찢어 죽일 수 있다 할 정도니 말 다 한 셈.
만약 질리언트들이 호전적이고 번식 욕구가 강했다면 니오네브레스에는 주류 4대 인종이 아니라 주류 5대 인종이 되었을 거란 의견이 학자들 사이에서 팽배한다.
그런 질리언트마저도 아기 취급을 할 수 있는 종족이 환인 일행의 눈앞에서 작은 마을, 크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규모로 따지면 촌락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었다.
키는 무척 다양했다. 얼핏 봤을 때 15m급도 있었고 어떤 거인은 50m도 넘어가는 걸로 보인다.
피부색은 대체로 살구색이지만 청색이나 갈색도 보이고 간혹이지만 회색도 있다. 체모 색도 다양해 금발, 은발, 적발, 청발, 녹발에 백발도 존재한다.
마을의 주택은 주변의 나무를 베어서 만든 듯한 오두막과 땅을 반쯤 파고 들어가서 만든 움집 같은 식인데 마을 풍경을 보면 문화생활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의복은 남자도, 여자도 대부분 우타바처럼 가죽으로 엉성하게 가린 모양새다.
대충 허리에 둘러 하반신을 가린 거인은 대부분이 여자 거인이고, 가죽을 붕대처럼 둘둘 감아 반바지처럼 한 거인은 대부분 남자.
거인들의 표정은 삶에 치인 표정이 아닌, 작지만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표정으로 제법 평화로운 분위기다.
그건 일행을 맞이한 거인들의 행동에도 잘 드러났다.
=크으음.=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띄는 모든 거인의 시선을 받은 일행은 우타바에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서 오라며 환영하는 한편 마을의 족장에게 안내해주었던 것.
우타바의 손에 들려 집을 세워도 될 만큼 넓고 튼튼한 탁자 위에 내려선 환인은 우직한 얼굴로 자신들을 살피는 족장의 시선을 받다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일 텐데도 선뜻 받아들여 주어서 고맙습니다.”
환인의 인사에 밀짚 색 머리카락을 사자 갈기처럼 풀어헤친 남자 거인이 씩 웃는다. 그러더니 우타바를 내보낸 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타바를 도운데다 침입자까지 해치워준 손님들인데 환대는 당연한 일이지. 나는 족장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건 무척 오랜만이군.=
목소리가 흡사 천둥이 우르릉거리는 듯하다.
평소보다 목소리를 조금 크게 냈다고는 하나 거인의 입장에서는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 정도로 작았을 텐데 그게 다 들린 건가.
환인은 족장의 신체 스펙을 가늠하며 대답했다.
“저는 환인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족장.”
마을에서 지위를 가진 자는 이름이 아니라 지위로 불리는 건가 생각하며 자신을 소개한 환인은 바로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여러분들의 능력이면 그 변종 실루엣 메어쯤은 손쉬운 대상일 텐데 곤란을 겪고 계신단 이야기입니까.”
=물론 그따위 것들이 우리에게 위협이 될 리 없지. 한 번 밟으면 터져 죽을 놈들인데.=
그리 말하는 족장의 손에는 변종 실루엣 메어의 사체가 들려있었는데, 그걸 탁자 위에 툭 떨어트린 족장은 집채만 한 주먹으로 쿵, 가볍게 내려쳤다.
=…….=
=…….=
약한 지진이 지나간 것처럼 흔들린 탁자 위에서 여자들은 그 가벼운 손짓에 육포가 되어버린 실루엣 메어의 시체를 보곤 안색을 작게 굳혔다.
특히 실루엣 메어를 직접 가격해봤던 안느의 표정이 가장 심각했다.
비록 힘을 60% 정도밖에 넣지 않았다지만 즉사하지 않고 멀쩡했을 만큼 몸이 질겼던 놈들이다. 그런데 가벼운 주먹질에 떡이 되어버리다니.
=하지만 우리를 피해 벽이나 땅속을 파고 다니는 놈들을 박멸할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이 사실이야. 그리고 아주 방심할 수도 없는 게 우타바처럼 어린 것은 혼자 다니다 침입자 놈들이 떼지어 몰려들면 당할 수도 있단 말이지.=
“그렇습니까. 우타바 양을 보면 어지간한 공격은 전부 무시해버릴 것 같았습니다만.”
=아니, 여자들은 볼일 볼 때 뒷정리가 귀찮다고 가죽을 허리에만 두르고 다니는 일이 많다 보니 말이야. 볼일을 보다가 아이를 낳는 곳으로 침입자 놈들이 들어와 배를 갈라야 했던 여자도 있었어.=
환인은 짐작했던 터라 충격은 없었지만, 여자들은 족장의 적나라한 이야기에 안색이 나빠진다.
“이해했습니다. 코끼리에게 위협적인 것은 동족이 아니라 생쥐 한 마리라고들 하니까요.”
=그 코끼리와 생쥐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 거 같군.=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생각보다 지식이 느껴지는 족장의 언행에 환인은 의문을 품었다.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는 법이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언어 중추의 발달이 저절로 이루어질 리 없는데 어떻게 된 걸까.
‘통역 기관도 있는듯하니 외부에서 들어온 인물들의 지식이 전달된 거겠군.’
환인은 진지한 눈으로 촌장을 응시했다.
사고방식도 그렇고 이쪽을 맞이할 때의 대화도, 족장은 생각 이상으로 지식과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생각 이상으로 통하며 이쪽을 손님으로 대접할 만큼 인성도 나쁘지 않다.
이미 죽은 상태라곤 하나 실루엣 메어의 사체를 모기나 개미를 가볍게 눌러 죽이는 듯한 행동은 꽤 거칠었지만,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실루엣 메어는 그들에게 있어 돈벌레나 바퀴벌레 같은 것들일 테니 문제는 아니다.
진짜 문제는…….
‘힘이 너무 강해.’
우타바에게는 강자존의 사고방식이 박혀있었다. 그 말은 거인들 사이에서도 강자지존의 법칙이 기본이라는 이야기.
그게 족장이라면 거인 집단에서도 가장 강할 것이다.
키를 봐도 앉은키가 20m에 달할 정도네 눈앞의 족장 정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자신 정도 되는 승급한 7~8급의 직업자거나 희귀 직업자, 혹은 대형 생물 병기를 가진 국가의 군대 정도 일 거다.
이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 힘의 차이가 코끼리와 개미만큼이나 차이나는 사람들의 지시나 부탁에 순순히 따를 것인가.
그때 환인을 유심히 바라보던 족장이 입을 열었다.
=신기하군.=
“……무엇이 말입니까.”
=자네 말이야. 자네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미약하기 짝이 없어. 뒤의 작은 여자들과 비교해도 약하고 이 침입자 놈들과 비교해도 미미해. 하지만 자네의 태도나 기세는 우리 전사장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아.=
“그렇습니까.”
=음. 그런 기세는 힘없는 놈들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거란 말이지. 게다가 보아하니 자네가 우두머리인 거 같은데…….=
족장이 인정할 정도의 전사장도 있단 말인가. 거기에 주술사라는 개체도 있을 것이고 족장 본인도 눈썰미가 제법 뛰어나다.
환인은 계획을 약간 수정하며 입을 열었다.
“저도 한 명의 전사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직책으로 일행의 책임자를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직책이라. 그게 무엇이지?=
“우타바 양은 저를 주술사라고 하더군요.”
=주, 술사……?=
“그러나 저는 주술사가 아닙니다. 영혼을 이끌어 신들의 정원으로 이끄는 길잃은 영혼의 인도자, 영혼사이지요.”
=영혼사!=
족장의 3층 건물만 한 머리가 심각한 것을 마주한 것처럼 굳은 얼굴로 가까이 다가오는 것에 환인의 여자들은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올렸다.
족장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환인을 이모저모 살피다가 떨어지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주술사와 비슷하지만 다른 기운이군. 이게 영혼사의 기운인가. 그래, 우타바가 묘하게 기죽어 있다 하더니 자네 때문이었군?=
“약한 놈과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기에 살짝 힘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환인의 태도에 족장은 기꺼운 듯 자기 무릎을 쾅쾅 소리나게 내려치며 웃는다.
=무릇 여자들을 이끄는 남자라면 그 정도 박력은 있어야지! 자넬 얕본 걸 사과하겠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족장께서는 영혼사를 알고 있으시군요.”
=어느 정도는? 음, 내친김에 우리 주술사도 불러와야겠구만. 자네도 주술사가 어떤지 궁금하지?=
정보는 많고 다양할수록 좋기에 환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족장은 바깥의 거인을 불러 주술사를 불러오라 시킨다.
그 뒤 호기심이 묻어나는 얼굴로 물었다.
=잠시 후면 주술사가 올 테니 그사이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자네가 우리 마을을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자네들 같은 작은 인간이 여기까지 내려오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 말이야.=
환인은 눈앞의 사자 갈기 금발의 남자 거인을 가만히 응시하며 족장의 집으로 오는 길에 봤던 마을 내부를 떠올렸다.
하나하나가 주상복합 아파트를 연상시킬 정도로 커다랬던 통나무집들. 아마도 그 집 중 하나에 미궁의 심핵이 숨겨져 있겠지.
가장 가능성이 큰 쪽은 그 주술사라는 거인의 집, 혹은 여기 족장 집이다.
‘족장이나 주술사가 심핵을 들고다닐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군.’
미궁 중에서는 중핵이 심핵을 갖고 다니는 곳도 있다고 영도의 서적에서 보았다.
심핵을 움직일 수 있다면 거인 중 한 명이 직접 들고 다닐 가능성도 크다. 그 대상이라면 역시 족장이나 주술사인가.
환인은 잠깐 딴생각을 했다.
어쩌면 심핵이 줄곧 움직이기에 미궁이 이형종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족장의 성미에 맞춰 할 말을 다듬은 환인이 입을 열었다.
“오면서 거인들의 표정에 평화가 깃들어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지. 평화롭고 따분한 곳이야, 여기는.=
“성가시고 귀찮은 일에 비하면 따분함도 나쁘지 않습니다.”
=성가시고 귀찮은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는 말투구만?=
“바깥세상은 저나 제 일행처럼 당신들에 비해 작은 사람들이 수많은 괴물과 괴수, 진수, 성수, 신수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거대한 이 미궁은 바깥 인물들에게 꽤 군침 도는 곳이 됩니다.”
=…….=
“이제까지 여러분이 조용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미궁에 대한 정보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습니다.”
=침입자와 다른 침입자가 찾아올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환인과 여자들은 입구에서 들려온 여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단정히 어깨 뒤로 빗어넘긴 흔한 갈색 머리. 다른 거인 여자들과 달리 커다란 가죽을 밑단이 짧은 토가처럼 걸친 옷차림.
키는 우타바보다 조금 더 큰 25m 정도지만 그녀보다 훨씬 가녀린 여자 거인이 입구에 서있었다.
특징이라면 두 눈을 가죽 안대로 가리고 있다는 것.
족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가리킨다.
=그녀가 우리 마을의 주술사지. 주술사, 이 작은 남자는 바깥에서 온 영혼사일세.=
=반갑습니다. 영혼사님. 제가 마을의 주술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영혼사로서 대륙을 순례 중인 환인이라고 합니다.”
환인은 자기 소개를 하면서도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의 머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붉은색 나뭇가지(라고 해도 어지간한 나무만큼 굵었다)를 다듬어 만든 지팡이의 머리, 그곳에 산란못 미궁에서 보았던 것보다 조금 더 큰 수정이 박혀있었던 것이다.
내부에 황금빛 구체가 둥둥 떠나며 아름다운 황금빛을 뿌리는 투명한 수정.
거인숲 미궁의 심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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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상위층의 묘사에서 어떤 기업이 생각난다면 오예입니다
사흘 전에 식중독+배탈 증상으로 휴재했었는데 공지도 안하고 그저께 후기에서 양해도 드리지 못한 것을 사과드립니당...
요즘 정신상태가 좋지못해서 배려심이 부족했네요 ㅠㅠ
좀 더 정신줄과 책임감을 가지고 연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