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 거인숲 미궁
부서지거나 헤진 갑주와 의복 차림에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한 것처럼 초췌한 몰골로 나타난 플뢰 4명은 환인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화색을 띄웠다.
며칠간 어둠 속을 끝없이 헤매다 한 줄기 빛을 만난 표정.
=힉?!=
=……!=
하지만 벌거벗은 여자 거인을 보곤 소스라치게 놀란다.
환인은 그 표정 변화를 포착, 고갤 돌려 새로 나타난 플뢰 집단에 별 반응이 없는 여자 거인을 확인했다.
거기서 자신이 예상했던 가설 중 한 가지가 맞아떨어지는 것을 느낀 순간, 안느의 표정이 새로 나타난 플뢰족 중 가장 앞선 인물을 보고 약간의 곤혹스러움이 스며든 것도 알아차렸다.
약간의 반가움, 약간의 곤란함, 약간의 안타까움.
‘지인인가. 하지만 적이라고 인식했고 해치워야 할 대상이라고 깨달은 표정 변화군.’
=멈추세요. 더 이상 다가온다면 베겠습니다.=
마주친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이실리테가 대검 레드릭 얼터를 내밀며 경고하자 백려강과 유르파도 지팡이와 검을 내밀고 안느도 한발 늦게 무기를 치켜세운다.
환인이 했던 이야기에 따르면 저자들이 거인과 마찰을 빚은 인물들일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전투를 벌였던 흔적이 역력한 차림이라 더욱 경계심이 고개를 치켜드는 모양새.
그에 플뢰족 여자들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서, 성제 예하! 저희는 적이 아닙니다!=
=미궁에서 습격자가 자신을 습격자라 소개하는 일은 없습니다.=
이실리테의 차가운 대꾸에 가장 앞에 나와 있던 여자가 헉?!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두 손을 들어 항복 표시를 하며 재차 소리친다.
=적기사 이실리테 경, 우리는 메리아놀 사법부에서 나온 선행정찰 제1 척후병단의 2조입니다! 여, 여기 가슴에 신분 증명징표도 있습니다!=
여자 플뢰가 무언가에 쫓기듯이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호소하고, 이실리테가 확인을 위해 다가가려 할 때 환인이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보다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겁니까.”
=그게,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생긴 것은 실루엣 메어였지만 알려진 것보다 무척이나 강력해서……!=
=조장님! 놈들이 왔습니다!=
공포 영화의 등장인물처럼 끊임없이 뒤를 힐끔거리던 플뢰족 중 한 명이 그리 외치며 돌아서서 무기를 빼 든다.
그러자 다른 플뢰족도 동시에 무기를 뽑는 동시에 관목을 찢어발기듯이 날려버리며 어둠에 물든 듯한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목구비와 외형은 플라비우스족이나 플뢰족과 닮았지만, 몸에서 드라이아이스 같은 검은색 연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게 다르다.
=침입자!!=
주저앉아 주섬주섬 젖가리개를 집어 가슴을 가리던 여자 거인이 그 검은 인간들을 발견하자마자 노호성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통나무 곤봉을 꼬나쥐었다.
그리고 실루엣 메어silhouette mare는 거인과 또 다른 인간들이 한데 모인 것에 일순간 당황한 듯 뭉그적거렸다.
실루엣 메어 여섯, 플뢰족 넷, 환인 일행, 거인.
이렇게 장내가 형성된 일련의 사태에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두 파악한 환인은 이실리테의 어깨를 토닥였고, 그 신호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실루엣 메어를 향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어, 엇!?=
=방해되니 물러서!=
키야아아악-!!
달려드는 이실리테와 안느의 살기에 실루엣 메어도 반응해 그녀들에게 덮쳐든다.
쐐액— 파밧, 카가가각-!
환인은 이실리테와 안느를 맞서 대항하는 실루엣 메어 여섯의 동작을 유심히 살폈다.
강화 영혼 시야를 통해 위상력이 아닌 의문의 에너지를 몸에 두르고 이실리테나 안느보다 높은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그림자 인간들의 행동이 낱낱이 환인의 눈에 분석된다.
이실리테의 횡베기에 펄쩍 뛰어올라 피하는 동시에 팔을 검처럼 만들어 난도질해가는 두 마리.
안느 쪽은 팔을 송곳처럼, 혹은 망치처럼 만든 괴물 두 마리가 그녀에게 쇄도하는데 공격이 절제와 제식이 없는 마구잡이다.
그 탓에 두 명은 2:1의 싸움이기도 해서 무기를 부딪치고 피하고 막으며 아주 잠깐 수세에 몰렸지만.
콰과곽-! 투두두둑—
환인과 대련하며 체득한 수 싸움 및 전투의 흐름을 읽어 삽시간에 전황을 유리하게 바꾸었다.
캬아아아-!!
=이, 이놈이?!=
그사이 남은 둘 중 하나는 플뢰족에게 달려들어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전투를 시작했고, 남은 하나는 환인 쪽으로 뛰어들었지만…….
쓰걱—
환인은 분석을 통해 알아낸 관절 구동 범위와 공격 방식을 파악, 팔을 창으로 만들어 재미로 찔러 죽이려던 실루엣 메어를 되려 광창으로 팔 째 몸통을 절단해버린다.
=끄에……?=
푹.
철푸덕, 상체는 앞으로 떨어지고 하체는 뒤로 넘어져 버르적거리는 실루엣 메어의 머리에 광창을 꽂은 환인은 괴물이 그 즉시 침묵하는 걸 보고 여자 친구들에게 말했다.
“생김새와 공격 방식은 특이하지만,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다.”
=네!=
=엉!=
환인의 조언에 이실리테는 등 뒤에서 몰래 다중 검기 두 자루를 만들어낸다. 이어 자신의 레드릭을 두 팔로 막아낸 실루엣 메어의 목을 기습적으로 떨어트리고, 남은 하나는 세 방향 동시 공격으로 세 토막을 내어버린다.
안느 쪽은 상황이 더 간단히 해결되었다.
천벌의 망치로 가격하는 척, 땅을 내려쳐 진동을 일으킨 뒤 찰나의 순간 다리가 봉쇄된 실루엣 메어 두 마리를 각각 방패와 망치로 후려친 것.
꽈광!!!
그녀의 위상력에 괴력이 깃든 망치와 방패는 막대한 충격력을 일으키는 타격 병기다.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마리는 반신 골절과 척추 복합분쇄에 즉시 전투 불능이 되었고 이어진 추가타에 머리가 깨진 수박처럼 박살 나 절명해버렸다.
=……?!=
넷이서 하나를 겨우 상대 중인 플뢰족들은 당황했다.
이 괴물들은 위상력을 그리 잘 다루지 못하지만 그 대신 순발력과 힘, 그리고 팔을 무기로 변형시켜 싸우는 기괴한 전투법은 상식을 부수는 수준이었다.
강함은 메리아놀 철목 합격술을 배운 4급 무투파 직업자 셋이서 겨우 하나를 상대할 정도. 5급 투사인 조장까지 합해서야 대등하게 싸움을 벌이는 수준인데 저들은 뭐지?
조장은 적기사도, 성기사도 보고서로 받은 내용보다 강하다는 사실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엇보다 성제님은…….
=도와줄까?=
=큭……!=
옆에서 들려온 안느의 목소리에 조장은 부끄러움과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그녀가 대륙 유일 성제의 영혼 기사가 되어 본국에서는 성기사로 추대해야 한다느니 이야기가 나올 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나.
그리고 지금 자신이 전투 중 잡생각을 할 수 있는 이유도 자신들이 붙잡고 있는 놈이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당황해서 손발이 어지러워진 탓이 아닌가!
여기서 도움까지 받으면……!
=으아압!!=
조장은 자신에게 휘둘러져 오는 도끼 모양 팔의 궤적에 무리해서 몸을 밀어 넣으며 직검을 실루엣 메어의 몸통에 찔러넣었다.
그 바람에 왼쪽 어깨가 두 마디가량, 가죽 견장째로 베여 피가 울컥 쏟아졌지만 그 대가로 실루엣 메어의 폐를 관통할 수 있었다.
=쿠흐커거어겈—!!=
발악하는 실루엣 메어에게서 떨어지다 도끼에 젖가슴을 크게 베였으나 조장은 이정도 상처는 회복약을 쓰면 된다고 생각하며 괴로운 듯 숨을 거칠게 쉬는 실루엣 메어를 오른팔로만 몰아친다.
=조장님이 잡고 있는 지금이다!=
=죽여!!=
=으아아-!=
푸북, 푸부북—
조원들이 실루엣 메어의 몸통과 등에 검을 박아넣어 움직임을 일순간 막았을 때 조장은 머리를 절반쯤 날려버리는 것으로 전투를 끝마친다.
그리고 =크윽.= 무릎을 꿇으며 검에 몸을 기댔다.
쩍 벌어진 어깨와 정확히 세로로 갈라진 왼쪽 젖가슴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진다.
=조장!=
=조장님!=
“…….”
환인은 플뢰들이 조장이라 불린 금발의 여자 플뢰에게 붙어 치료하는 모습을 지그시 응시했다.
피에 젖은 옷을 벗기고 쩍 벌어져 피를 철철 흘리는 어깨를 잡아 붙인 뒤 회복제를 붓는다.
마찬가지로 좌우로 갈라진 젖무덤을 잡아 형태를 맞추고 상급 회복제로 보이는 것을 부으니 상처에서 붉은 연기가 치이익 솟아오르며 상처가 빠르게 아물지만.
=끄으읍……!=
조장이라 불린 금발의 여자 플뢰는 핏발 선 눈으로 옷을 물고 비명을 억눌렀다.
급속도로 상처가 치유되지만 그 대신 치유될 때까지의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밀려오는 듯한 모양새.
금발 여자, 가야=시라넬도 상처와 속살을 달군 쇠막대기로 마구 지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 속에서 환인을 보며 머릿속으로 혼란스러워했다.
방금 그가 보여주었던 창술은 절대 허투루 배운 수준이 아니었다.
본국의 창신이라 불리는 에메스 님과도 견줄 정도의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그래서 공격하고 난 뒤에야 인식할 수 있는 경지의 무술이었다.
유물 무기인 광창 나인볼그를 입수했다는 자료는 그녀도 보았다. 하지만 광창은 오로지 공격력에만 집중한 무기. 행동 보정이나 창술 최적화 같은 유물급 기능은커녕 오히려 페널티인 허기 가속이 붙어 함부로 쓸 수가 없는 무기다.
그런 무기를 들고 변종 실루엣 메어를 일격에 썰었다는 것은 그의 무술 실력이 에메스 님과 견줄 수준이란 것.
=그…만. 됐다.=
고통 탓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가야는 조원들을 밀어내고 피투성이가 된 제복 상의를 다시 걸친다.
피를 한순간에 너무 많이 흘렸는지 현기증이 날 것 같지만 의지력으로 버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 것처럼 복잡한 표정을 짓는 안느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뒤 주눅 든 것 같은 여자 거인과 대화 중인 환인에게 다가갔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 검은 인간들과 한패라고 생각하셨던 거군요.”
=그래…. 공격한 건 사과한다. 미안하다. 그리고 주술사 너 약하지 않아. 강해.=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몇 가지 더 묻고 싶은데 되겠습니까.”
=물어봐라.=
“저 그림자 괴물과는 언제부터 싸웠었습니까.”
=몰라. 어른들도 아주 오래전부터라고만 했다.=
“……당신 동족 중에서 혹시 말이 안 통한다거나 머리가 회색 혹은 백색이라거나 피부가 잿빛인 동족이 있습니까.”
=있다.=
대화를 듣던 조장은 곤혹스러워졌다.
여긴 대체 무슨 미궁이지? 거대형 격리 변화 수해 미궁인가 했는데 거인이 있다니,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미궁에서 오랫동안 살았다는 거 아닌가. 미궁에 정신 침해가 없는 것과 연관이 있나?
‘작물 거대화 기능이 붙은 초거대 미궁이니 이 미궁을 손에 넣으면 국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비록 이블팩션 접경지 인근이라지만 미궁에 이런 기능이 있다면 도시를 세우고도 남을 메리트가 있다.
협의회에 보고를 올리고 이 미궁의 발견과 소유권을 성제님과 협상……?
생각하던 조장은 한발 늦게 환인이 칼날처럼 차갑고 냉혹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침을 꼴깍 삼킨 조장은 즉시 허리를 숙였다.
=성제 예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저와 조원들을 살려주신 데에…….=
“방금 당신의 행위는 명백히 미궁의 범용규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에 해명할 이야기가 있다면 해보십시오.”
=네, 네?=
환인의 칼날 같은 선고에 가야=시라넬과 그녀의 조원들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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