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52화 (552/813)

546 거인숲 미궁

마주친 여자 거인이 보내오는 반응에서 환인은 이상함을 포착했다.

자신들은 미궁 외곽부터 미궁 내 식생을 조사하고 거인 흔적의 탐색과 수색을 벌여가며 심부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니, 6일 만에 미궁의 1/3 지점까지 이동했으니 이른 편인가.

‘중간부터는 탐색과 이동이 빨라지긴 했지만.’

술법적인 함정이나 미궁이 만든 트랩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빠르게 움직이긴 했지만, 저 적개심이 자신들에게 향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

일단 자신의 추리는 맞았다. 조금 작은 아파트 크기의 저 여자 거인은 이형종이 아니다.

머리카락은 진저라고 부를 만큼 붉은색이며 기워서 이어붙인 가죽을 가슴과 허리에 대충 둘러 밑에서 훤히 보이는 갈라진 살 틈의 생식기에도 붉은색 체모가 소담스레 뒤덮고 있다.

가슴께와 어깨, 그리고 콧잔등을 뒤덮은 주근깨나 피부색에도 반전 개체라고 부르는 이형종의 탈색한듯한 외형적 특징이 없다.

게다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화라는 지성체로서의 활동을 한다는 뜻.

즉 거인숲 미궁은 이형종을 다루지 않고 그저 미궁 내 자연을 유지하기 위한 것에만 힘을 쓰고 있단 이야기다.

문제라면 저 여자 거인이 자신들에게 외친 말이다.

=자, 잠깐만……!=

안느가 당황을 드러내며 대화를 시도하려 했지만, 여자 거인은 그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나가, 이 쥐방울 같은 놈들아!!=

수십 명이 모여 지르는 고함보다 더 큰 목소리가 터져 나와오더니 두께만 수 미터에 길이 20m에 달하는 거대한 통나무 몽둥이를 치켜드는 여자 거인.

무게가 수 톤은 가볍게 상회할 통나무 몽둥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모양새는 근력만 보았을 때 안느의 근력 수준을 몇 배나 상회하는 급이다.

몽둥이를 꺼내는 동작 또한 말이 되지 않게 기민하다. 질량이 커질수록 동작이 상대적으로 묵직해지며 느려지는 것을 고려한다면 저 여자 거인의 1km 달리기는 10여 초에 이르지 않을까 싶은 정도.

아우라가 없는 무직자지만 저 신체 스펙만으로도 중상급 직업자를 찍어누를 수 있다는 걸 눈치챈 환인은 안느의 어깨를 잡으며 뒤로 물러나는 제스쳐를 취한다.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니 진정하십시오.”

그러자 마악 달려들 것처럼 두 손으로 빌딩 같은 몽둥이를 치켜든 여자 거인이 식- 식- 거친 숨을 토해내며 멈춘다.

=나가!!=

우르릉—

여자 거인의 고함에 수풀과 나뭇잎이 우수수 흔들리는 걸 느끼며 일행은 여자 거인에게서 멀어졌다.

거인의 시선이 어디까지 닿을지 모르기에 환인은 일행과 함께 10km 가까이 멀어졌다.

몸집으로 보건대 거리감은 이쪽의 최소 20배 이상. 1~2km 정도 떨어져봤자 거인에게는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춘 것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렇게 거리를 두었을 때, 환인은 자길 노리고 풀숲에서 튀어나오는 호랑이만 한 남미 메뚜기의 머리통을 광창으로 썰어버렸다.

튀어나오는 것과 썰리는 게 동시에 이루어져 녹색과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울퉁불퉁하고 매끄러운 키틴질의 동체가 머릴 잃고 발발 떤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절단면에서 검은색의 선형 기생충이 화살처럼 쏘아졌는데, 이실리테의 검기가 무수한 빛살처럼 휘둘러져 말 그대로 기생충, 연가시를 잘게 토막 내버렸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구렁이처럼 굵고 길다란 연가시의 돌진 궤적으로 광창을 내밀고 있던 환인은 창을 회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쾅!

꿈틀거리는 남미 메뚜기의 사체를 방패로 후려쳐 날려버린 안느가 환인에게 묻는다.

=도령. 거인의 반응…… 좀 이상하지 않았어?=

=이상해? 어떤 점이?=

이실리테의 반문에 안느는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게 잘 설명이 안 된단 말이야. 내 눈에는 아까 그 여자 거인의 반응이 꼭…….=

“공격받아본 경험에서 우러나는 방어기제처럼 느껴졌나.”

=어어! 맞아 그거! 분명 우리랑은 처음 만났을 텐데 아까 여자 거인은 우리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또 온 것처럼 대한 거 같았어!=

그거라며 작게 호들갑을 떠는 안느의 옆에서 유르파가 심각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가 저 거인들하고 먼저 마찰을 빚었다는 이야긴데, 그게 가능한 거니? 입구는 초월급 정령이 설치해둔 감시기 같은 게 작동중이잖아.=

「저기…….」

그때 환인의 목깃에서 머리만 빼꼼 내민 환연이 죄지은 사람처럼 작은 목소리로 고백한다.

「방금 릴이 말하는데 나흘 전에 일부 인간들이 미궁에 들어왔대. 우리가 미궁 탐사로 바빠 보여서 나중에 말해 주려 했다가 깜빡했다는데.」

“…….”

=…….=

=…….=

잠깐 이마에 손을 올렸던 환인은 문득 아귀가 맞지 않음을 깨달았다.

추적자들의 목적은 자신과 접촉일 것이다. 그런데 내부 상황을 알지도 못하는 미궁 안에서 나흘 동안 들쑤시고 다니다 거인과 마주쳐서 마찰을 빚을 확률은 어느 정도일까.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촌락의 자경단 애들도 그러지 않을 거다.

환인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여자들이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짜 상황을 끼워 맞춰본다.

=연이 말대로라면 우리가 미궁 가장자리에서 탐사를 진행하는 사이 추적자 일부가 들어왔다가 거인과 충돌을 빚었다는 걸까?=

=그런 거면 안느가 하려는 설득은 이제 안 통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말도 들으려 하지 않고 무기를 꺼낼 정도로 화가 난 상태면 대화는 불가능할 텐데요.=

=이슬이 아가씨 말대로야. 저들로서는 거주지의 이전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일 텐데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적대감부터 형성되었으니까…… 평범한 수단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이실리테와 유르파의 대화에 안느가 분노한 기색을 풀풀 풍기기 시작한다.

=어떤 바보 같은 인간들이……!=

거인들이 소수인종처럼 대화가 통하는 이들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무참히 죽어 나가는 결말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해 터전을 옮기도록 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임무에 불가능하다는 무거운 추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기분.

표정에서 불쾌감이 있는 대로 흐르기 시작하는 안느와 그녀를 진정시키는 여자친구들을 바라보며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지도를 꺼내 펼치며 안느를 불러 물었다.

“네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범위는 어느 정도지.”

=응? …한밤중에 바짝 집중하고 있을 때면 5km 정도야. 이런 숲이라면 2km가 한계일까.=

“밤에 불침번을 설 때 이상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 예를 들어 이런 자연 속에서는 들을 수 없는 음질이라던가.”

=아니 없었어.=

그렇다면 나흘 전에 추적자들이 들어와 거인들과 마주쳤다고 가정했을 때 평범한 도보 속도를 계산하면…….

추적자들의 이동 경로를 대강 추리던 환인은 그래도 말이 안 된다는 사실에 하던 계산을 멈췄다.

“이상하군.”

환인이 뭘 계산하는지 호기심을 드러내던 그녀들은 그의 이야기에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분노와 불쾌감을 풀풀 피우던 안느도 분노를 멈추고 의아해하는 얼굴로 묻는다.

=뭐가 이상한데?=

“우리가 이 미궁에 들어온 지 오늘로 18일째다. 비교적 빠르게 미궁을 살피고 있다고 해도 파악한 면적은 이제 20% 정도에 불과하지. 그리고 오늘 처음 거인과 마주쳤다. 그런데 나흘 전에 들어온 인간들이 저 거인들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건가.”

=어…….=

“그들 입장에서는 이 미궁의 등급도 알 수 없고 안에 어떤 이형종이 있는지도 모른다. ……모른다고 가정하지. 각국 정보부, 혹은 그 뒤를 따르는 첩보부 소속의 인물들이 확실치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이런 미궁을 무턱대고 돌파할 만큼 저능아들인가.”

분노와 의문에 눈앞이 가려졌던 여자들도 그제야 이상함을 깨닫고 곤혹스러워했다.

=뭐야. 추적자들이 아직 입구 근처에 있다면 누가 저 거인들하고 충돌한 거야?=

안느의 의문에 환인은 여자 거인을 만났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자 거인과 마주친 것은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그리고 거인은 분명…….

“우리를 발견했을 때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한순간 놀랐다가 분노를 드러냈었지.”

생각을 바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자면…… 자신들이 여기에 입장하기 이전에 먼저 진입한 파티가 존재할 가능성. 혹은 미궁 내부에 또 다른 집단이 서식 중일 가능성.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미궁의 이름은 거인숲 미궁. 거인이 토박이일 테고 후에 들어와 자리 잡은 자들은 시간이 흘러도 거인에게 있어 침입자일 뿐.

여자들은 환인의 새로운 견해에 으음, 하고 신음을 흘린다.

그런 그녀들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환인은 담담히 안느를 향해 결정을 촉구했다.

“계속 설득을 시도할 건가.”

=…….=

안느는 생각 없이 그저 구휼과 자비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종교 신봉자는 아니다. 그렇기에 환인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고 고뇌에 휩싸였다.

교단의 가르침대로 생명을 존중하자니 현재 파티와 지금 자신의 직급에 대한 정체성에 충돌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영혼 기사이자 환인의 여자로서 행동하자니 플뢰족 땅신 교단 성직자로서의 자아에 태클이 걸린다.

=도령…… 미안해…….=

기세 좋게 맡겨달라 소리친 주제에. 자신의 머리로는 어떻게 생각해봐도 파국만이 떠올라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라면 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이 있을 거란 믿음에서 나온 행동.

환인은 그런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여자친구들에게 말했다.

“아까 거인을 찾아간다.”

=주인님……?=

“설득도 상대의 수준에 맞춰서 해야 하는 법이지. 말이 안 통하면 말이 통할 때까지 대화를 시도하면 된다.”

여자들은 어리둥절 해했다. 말이 안 통해서 덤비려 드는데…… 계속 말을 건다는 건가?

그때 백려강이 가장 먼저 환인의 말에 숨겨진 뜻을 알아차렸다.

=아…… 말을 들을 때까지 힘으로 찍어누르신다는 거네요.=

=……!=

=아.=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지성인들의 교섭이 있고 촌락 촌민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거래 방법이 있는 법이다. 의복을 걸쳤다지만 생식기를 훤히 드러낸 차림이다. 그런 거인이 지적 문명을 쌓아 올렸다고 보긴 어렵겠지. 화를 내며 힘을 쓰려 하는 것을 본다면 실력 중심 사회가 틀림없을 터.”

키가 무려 20m나 되는 거인에 근골격 밀도가 평범한 사람을 아득히 능가하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래봤자 위상력을 다루지도 못하는 무직자다.

“안느, 네가 저들에게 얼마나 강하고 압도적인 힘을 보이느냐에 따라 설득의 난이도가 결정된다. 이해했나.”

=응!=

“네가 대화의 틀을 제대로 잡는다면 나도 뒤에서 도와주지. 힘내라.”

사랑하는 남자의 응원에 안느는 눈에서 형형한 빛을 뿜어내며 각오를 다졌다.

그렇게 여자 거인과 마주쳤던 곳으로 돌아간 일행은 거인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돌아다니며 식재료를 채취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사람 키를 넘어가는 식물을 뽑아 감자처럼 동글동글한 뿌리를 챙기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 뱀딸기를 크게 키운 듯한 나무 열매를 딴다.

그 외에도 잡초처럼 자란 풀도, 땅을 파헤쳐 더덕 같은 것도 모으는 여자 거인.

그 모습은 전투 종족이라기보단 가난한 촌락의 아낙에 가까웠다.

=거기 거인!=

쪼그려 앉아 뽀얀 뒷음부를 분홍색 항문과 함께 훤히 드러낸 채 초근목피를 채취하던 여자 거인은 안느의 외침에 뒤를 돌아보더니 화들짝 놀라 옆에 내려놓은 통나무 곤봉을 들고 고함쳤다.

=너, 너 왜 또 왔어!!=

=너희 종족에게 할 제안이 있어서 찾아왔다!!=

=시, 시끄러워—! 당장 꺼져, 침입자!!=

바우웅— 그야말로 폭풍 같은 소리와 함께 지름만 수 미터, 길이 수십 미터인 통나무 곤봉이 안느를 향해 내리꽂힌다.

기압의 급작스러운 변화까지 만들어내는 질량의 통나무 곤봉.

보통은 안느가 곤죽이 되어버리는 광경을 상상하겠지만, 벌어진 일은 정반대였다.

콰아앙-!!

양손으로 푸른 빛이 일렁이는 천벌의 망치를 쥔 안느가 내려쳐지는 통나무 곤봉의 옆면을 후려치자 타격점의 섬광이 해머의 몇 배나 번져 나오며 통나무 곤봉을 그대로 튕겨내 버린다.

=으윽?!=

크나큰 타격에 통나무 곤봉이 옆으로 거칠게 젖혀지자 자세가 무너진 여자 거인이 당혹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밟으면 그대로 피떡이 되어버릴 것처럼 작은 게 이렇게나 강한 힘을 내다니…….

그보다 왜 빈틈을 공격해오지 않는 거지? 방금 내 자세는 완전히 무너져서, 그 힘으로 자신의 다리를 때리면 큰 상처를 입었을 텐데?

=야! 할 말이 있다니까! 아깐 네가 우리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서 잠깐 물러나 준 거지만! 지금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안 멈출 거야!!=

=시……끄러워어어어억-!!=

모르겠다. 일단 저 쬐끄만 침입자를 죽인다!

바우우우웅—!!

키 20m 여자 거인과 키 1.9m 여자 플뢰의 전투는 소극적인 양상으로 흘러갔다.

여자 거인이 무기인 통나무 곤봉을 휘두르면 안느는 그 무기를 튕겨내며 할 말이 있다고, 좀 들으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여자 거인은 그 외침을 무시하며 포효와 함께 다시 통나무 곤봉을 휘두른다.

그게 수십 차례 반복되니 점차 여자 거인의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굉장한 체력이네요. 무게가 10여 톤에 가까운 무기를 서른 번 넘게 휘두르고 그만큼 튕겨 나가는데도…….=

“근섬유 다발의 숫자와 뼈의 골밀도가 평범한 사람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거겠지.”

폐활량도 물속에서 수십분은 잠수할 수 있을 수준이 아닐까.

하지만 곤봉을 휘두르는 데 드는 힘, 튕겨 나간 곤봉을 제자리로 돌리는 데 드는 힘, 그사이 드러내는 빈틈을 적이 공격해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

이 모든 게 여자 거인의 체력을 빠르게 소모하고 있었다.

=흡!=

콰아앙-!!

서른여섯 번째 몽둥이질을 쳐낸 안느는 여자 거인이 지친 것과 표정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일그러진 것을 확인, 때가 왔다고 판단해 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발을 굴러 여자 거인의 왼발을 향해 돌진했다.

갑작스러운 패턴 변화에 깜짝 놀란 여자 거인이 반쯤 무너진 자세임에도 발로 걷어차려 했지만.

부웅—

굳은살로 가득한 투박한 발길질을 예상한 것처럼 손쉽게 피한 안느는 지지대 역할을 하는 오른발의 종아리를 성벽의 방패로 있는 힘을 다해 후려쳤다.

쾅!!

살이 아니라 콘크리트를 후려친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오고 끄악!! 비명과 거대한 땅 울림과 함께 쓰러지는 여자 거인.

거인이 쓰러진 직후 안느는 거인의 몸을 타고 달려 올라가 눈 밑 살을 밟고 선다. 그리고 흔들리는 여자 거인과 눈을 마주친 뒤.

=흐아압!=

=꺄악!=

시퍼런 빛을 머금은 천벌의 망치로 얼굴을 내려쳤다.

=………?=

죽음을 예감하고 눈을 질끈 감았던 여자 거인은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이 찾아오지 않아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콧잔등에서 고작 주먹만 한 틈을 남기고 멈춘 망치와, 자신을 여전히 쳐다보는 작은 인간을 번갈아 보았다.

=어때. 이제 이쪽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들어?=

여자 거인의 붉은 기운이 감도는 갈색 눈동자에 혼란이 스며든다.

자신의 곤봉을 쳐낼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소인이다. 저 망치가 얼굴에 꽂혔다면 자기는 머리가 박살 나 죽었을 텐데…….

여자 거인은 사지를 축 늘어트렸다. 졌다는 사실이 사무치며 지친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뭐, 뭘 들으라는 거냐…….=

=우리 이야기.=

여자 거인의 목소리에서 적개심과 투지가 사라진 걸 느낀 안느는 그녀의 얼굴에서 내려왔고, 여자 거인은 몸을 일으켜 앉으며 기가 죽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무슨 이야긴데…….=

들을 준비가 된 여자 거인의 모습에 안느는 밝아진 얼굴로 환인을 돌아보았다.

솔직히 36번이나 되는 거인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쳐내느라 팔과 어깨가 금방이라도 빠질 것처럼 삐걱거리고 척추도 욱신거린다.

내장도 몇 번이나 흔들려 상태가 좋지 않지만, 성공적으로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는 사실에 그저 뿌듯할 따름.

환인은 그녀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나서서 여자 거인에게 말했다.

“저는 환인이고 당신을 쓰러트린 여자는 안느, 제 연인입니다.”

=…….=

“일행의 책임자로서 당신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해주면 좋겠군요.”

=난 약한 놈이랑은 말 안 해.=

고개를 홱 돌리며 대화를 거부하는 여자 거인.

환인은 말없이 그동안 죽여서 회수한 짐승의 중급과 하급 영혼을 모아 영혼 폭발 구슬을 생성, 여자의 가슴 쪽으로 날렸다.

꾸구궁—!!

=켁!=

무형의 충격파가 그녀의 상반신을 뒤덮자 밟힌 개구리 같은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나동그라진다.

그 충격에 코피가 터진 여자 거인은 안느와 싸울 때하곤 비교도 할 수 없는 얼굴로 후다닥 물러났다.

충격파에 날아가 버린 젖가리개와 싸우느라 헐렁해진 허리 가리개가 흘러내리며 조금 튼실한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여자 거인은 아랑곳 하지 않으며 소리쳤다.

=주, 주술사!=

“영혼사입니다. 아직 대화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방금 그것보다 수십 배는 더 강한 걸로 패주겠습니다.”

=하, 할게! 대화할게!=

=…….=

겁먹은 듯한 여자 거인의 적극적인 태도에 안느는 허탈해졌다.

영혼 폭발 한 방에 예의가 주입되어버리다니, 내가 방금까지 했던 드잡이질은 뭐였을까……?

=안느 아가씨? 아가씨가 저 거인 아가씨에게 패배감을 준 덕분에 가능한 거였으니까 그렇게 허탈해하지 않아도 돼.=

=유리 언니 말씀이 맞아요. 만약 환인 님이 다짜고짜 영혼 폭발을 썼으면 오히려 악을 쓰고 싸웠을 거예요. 환인 님도 그걸 눈치채고 버릇을 고쳐놓은 거고요.=

=으응. 위로해줘서 고마워…….=

어쨌든, 일은 잘 풀린 거 같으니 도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던 안느는 멈칫, 기다란 귀를 쫑긋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도령, 도령! 뒤에서 누군가가 오고 있어!=

삼림 미궁 근처의 숲, 자신이 영혼술을 펼치자 긴장과 경계심을 드러내던 유인원들처럼 자신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여자 거인에게 질문을 마악 던지려던 환인은 안느의 경고에 시선을 돌렸다.

“거인인가.”

=아니야. 쇳소리가 들려.=

쇠라곤 없는 거인숲 미궁에 쇳소리? 이실리테는 안느의 이야기에 레드릭 얼터를 꺼내 들었고 유르파와 백려강도 지팡이와 기사검을 뽑는다.

안느도 다시 천벌의 망치와 성벽의 방패를 들며 앞으로 나섰을 때.

파사사삭-!

관목 덤불이 크게 흔들리며 제법 험한 꼴을 당한 차림의 플뢰들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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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겁나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가족 외식을 나가서 비싼 고기를 먹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10시간 가까이 화장실을 들락거렸어요ㅠㅠ

이거 장염 아닌가.... 가족들은 다 멀쩡한데 왜 나만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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