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 거인숲 미궁
빗방울이 추적추적 내리는 거인의 숲속.
입구로 물이 들이치지 않도록 주변과 이질적이지 않게끔 지붕을 만들고 배수로를 판 환연은 땅의 정령과 함께 지하실을 만들고 벽과 바닥을 단단하게 다져나갔다.
삽시간에 만들어지는 지하실에서 환인의 여자들은 거주할 공간을 꾸미기 시작했다.
=환연, 여기에 부엌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 굴뚝도 자그맣게 만들어서 연기가 위로 빠져나가게 하면 좋겠는데.=
「연기랑 음식 냄새 때문에 적이 끌리는 거 아냐?」
=오면서 독한 냄새를 풍기는 풀이랑 꽃을 발견했어. 환풍구 끝에 풀줄기로 짠 그물을 올려두고 그 근처에 꽃을 옮겨심으면 괜찮을 거야. 냄새가 강한 음식은 애초에 피할 생각이고.=
「알았어.」
=연아. 이쪽에 작업대 만들어줄래? 높이는 40cm 정도면 돼.=
「어떤 모양으로?」
=여기 그림 그려놨어.=
=연연연. 목욕할 수 있는 곳도 만들자. 10일 넘게 성수포로 몸만 닦았더니 좀 씻고 싶어.=
「물을 만들어내고 데우고 없애는 데는 전부 정령력을 쓰잖아. 그건 환인한테 먼저 허락받아.」
=허락받았어. 물은 근처에 강이 흐르니까 내가 퍼올 거야. 당연히 물도 안 데워줘도 되고. 씻은 물만 없애주면 돼.=
「흐응. 어느 쪽에 만들 건데?」
그렇게 각자에게 필요한 장소도 만들고 바닥과 벽에 양탄자와 벽걸이를 만들어 냉기가 침투하는 것도 막는 모습에 환인은 입구 옆 의자에 앉아 속으로 일정을 저울질했다.
지난 12일간 느낀 감상이지만, 이곳은 미궁이긴하나 미궁이 아닌 느낌이다.
그렇게 느낀 이유에는 미궁의 분위기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다.
일반적인 미궁은 입장한 순간 무형의 손길에 심장을 어루만져지는 감각이 밀려든다.
미궁 심도가 깊어질수록 그 감각은 목덜미까지 차오르게 되고, 깊이가 4~5계층에 이르게 되면 평범한 정신력을 가진 자나 직업자가 아닌 이들은 그러한 감각에 버티지 못해 부정적인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이른바 정신 침해, 정신 침식이다.
일례로 백려강이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걸렸던 자조와 질투도 정신 침해 증상 중 하나.
하지만 여기 거인숲 미궁에는 그런 정신 침해 효과가 느껴지지 않았다.
압도적인 거대함에 약간 위축되긴 했으나 12일간의 행군을 통해 기본적인 정신 침해 현상은 일행 중 누구에게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환인은 콧노래를 부르며 거주지를 꾸미는 여자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미궁 외곽의 분위기만 이러할 뿐일 가능성도 있겠지…….’
공동 형태인 미궁의 중심부로 나아가면 정신 침해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
환인은 데코처럼 천장을 꾸미고 있는 굵은 나무뿌리를 보며 생각하다 쿠에들이 머물게 만든 장소에서 비상을 데리고 나왔다.
“이실리테. 주변을 정찰하고 오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지만 1시간 이상 걸리진 않을 거다.”
=주인님, 그럼 저도 같이…….=
“아니. 비상을 타고 날아서 근방을 둘러볼 생각이니 너는 돌아오면 저녁 식사를 식사할 수 있도록 준비해다오.”
=네, 주인님.=
밖으로 나가는 계단 앞에서 기감으로 주위를 먼저 살핀 환인은 조심스레 지하실을 빠져나와 비상을 타고 날아올랐다.
“비상, 어떤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니 비행은 조용히, 소리 없이 해라. 거인이 보이거나 느껴지면 이야기하고.”
뀨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비상의 자그마한 날갯짓 소리를 감추어주는 가운데 환인은 비상의 목을 어루만져주며 좀 더 천장 가까이 날아오를 것을 지시했다.
조용한 바람 소리와 함께 상승기류를 탄 것처럼 날개를 활짝 펼친 채 빙글빙글 돌며 날아오르는 비상.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아래쪽이 어둠에 잠겨 들며 거대한 나무 기둥이 암흑 속에서 불쑥 자라난 듯한 기괴한 광경으로 변한다.
꾸우.
기분 나쁜 곳이라며 칭얼거리는 비상을 달래면서 좀 더 높이 올라간 환인은 그제야 비가 어떻게 미궁 안에 내리는지 알 수 있었다.
천장에 박힌 융털처럼 무수한 돌기. 그곳에서 맺힌 물방울이 비처럼 떨어진다.
‘지상의 빗물을 받아 안으로 흘리는 건가.’
손바닥에 빗물을 받아 표면장력을 시험해본 결과, 자신이 작아진 것은 아니란 결론이 나온다.
자신들의 크기가 작아졌다면 당연히 면적당 표면장력이 강해진 것이 느껴져야 할 테지만, 물은 평범하게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으니까.
환인은 담력 시험을 하기에 어울리는 듯한 주변 풍경, 사람 크기만 한 나뭇잎이 수십, 수백만 장 붙어 어둠 속의 섬처럼 어른거리는 풍경을 돌아보았다.
머리 위는 얼핏 바위 생물의 내장처럼 보이는 천장. 주변에는 어둠속에 둥둥 떠있는 듯한 거대 나뭇잎 섬들.
오래 볼만한 게 못 되는 풍경 속에서 환인은 긴장한 것처럼 깃털이 반쯤 선 비상의 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지상이 보일 정도로만 내려가자. 비행은 나무와 나뭇가지를 따라 모습을 은폐하는 식으로 하고.”
쿠에~
비상의 녹색 깃털은 밑에서 보면 나무의 녹색 이파리와 그다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 혹 거인들이 나타나더라도 하늘을 나는 비상은 금방 발각당하진 않겠지. 발견되더라도 평범한 새라고 생각할 테고.
지상이 눈에 보일 정도로 다시 내려온 환인은 나무들이 마천루처럼 곧게 뻗은 거대한 숲을 무음 비행하며 주변을 낱낱이 살폈다.
그 결과 지상에서는 보지 못했던 다양한 생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 크기만 한 살덩어리를 물고 줄지어 가는 강아지만큼이나 큰 녹색 개미.
고층 빌딩만 한 나무에 붙어 수액을 빨아먹고 있는 사람 크기의 녹색 장수풍뎅이.
검은색, 빨간색, 녹색이 알록달록한 사람 사이즈의 거미가 실만큼이나 두꺼운 거미줄로 짓고 있는 거미집.
모두 말도 안 될 만큼 커다랗지만, 숲 전체로 보자면 작고 미미한 곤충들.
그런 곤충을 잡아먹는 동물도 보이고 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기척을 감추고 자세를 낮춘 녹색에 눈이 세 개인 여우, 다리가 여섯 개인 검은 늑대, 풀과 나무뿌리를 파헤쳐 먹는 트럭만 한 멧돼지에 나뭇가지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올빼미도 있다.
한강은 비교도 못 할 거대한 강 주변에는 올챙이 꼬리가 길게 나 있는 자동차 크기의 개구리도 있었고 물속에는 어선만큼이나 큰 민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고 있다.
만약 이 숲이 거인을 기준으로 형성되어있다면 거인의 키는 최소 20m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말이 20m지 거의 15층 아파트 높이다.
‘그렇게나 거대한 생물은 뭍에서 물리적으로 살 수 없을 텐데.’
어느 정도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코끼리가 50cm 높이에서 추락하면 다리가 죄다 부러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20m 키의 이족보행 생명체? 지구 과학 상식으로는 평범한 골격과 뼈대를 가지고 있다면 서는 것은 물론 걷는 것도 무리일 질량이겠지만…….
‘이곳은 니오네브레스지.
20분 정도 나무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다 보니 이쪽을 먹이로 여긴 전투기 사이즈의 맹금류가 날아들었지만, 대부분은 환인의 살기 투사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으며 생존 본능이 떨어지는 일부는 비상의 바람술에 핏덩이가 되어 추락했다.
‘이형종은 아예 없는 건가. 이때까지 본 것들은 전부 평범한 동물 같은데.’
미궁 안 이형종의 특징이라면 색이 없는 신체를 특징으로 볼 수 있다. 회색이나 하얀색의 모피, 체모, 피부색을 가진 것이다.
게다가 이형종이라면 살기에 도망가는 게 아니라 살심이 폭발해 죽일 듯이 달려든다.
피와 깃털을 흩뿌리며 추락하는 검녹색 수리 계통을 차가운 눈으로 보던 환인은 시선을 다시 들어 숲 전체를 둘러본다.
걸리버가 거인국에 들어갔을 때 이렇지 않을까 싶은 풍경이 눈에 가득 담긴다.
‘이렇게 돌아다니는데도 거인이 안 보이는 건…… 숫자가 적기 때문인가 아니면 비 때문에 어딘가에 숨어있는 건가.’
아무리 거인숲 미궁이 경기도 절반만 한 면적이라 해도 수백 미터 하늘로 올라와 내려다보면 시야 거리만 60km가 넘는다.
물론 비가 내리느라 미궁 전체의 광량이 보름달 뜬 밤보다 조금 더 밝은 수준이기에 가시거리는 1/3도 안 되고 거대한 나무 탓에 시야가 제법 막혀있다.
그러나 비상을 타고 20분 넘게 날아왔다.
직선이 아니라 나무를 따라 이동하느라 이동이 두서가 없지만, 시야로 탐색 범위를 정한다면 미궁의 절반은 확인한 셈.
그런데도 거인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거인이 없다기보단 비 때문에 수풀 등으로 몸을 숨긴 거인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
“……비상 돌아가자.”
큣.
환인은 이쯤에서 탐색을 접기로 했다.
현재 위치는 제법 미궁 최심부에 가까워진 곳이다. 조금 더 안으로 날아가면 시야에 최심부가 닿을 정도의 위치.
어디에 심핵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심핵 근처에는 미궁의 보스라고 할 수 있는 중핵이 있다.
중핵의 특성이나 형상도 모르는데 이 이상 깊이 들어가는 것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지를 걷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환인은 마지막 확인 사항을 위해 미궁 입구로 되돌아가면서도 강화 영혼 시야로 다시 한번 차분히 지상을 살폈지만.
‘환연의 탐지 능력이 간절하군.’
자신의 탐지 능력이 형편없다는 사실만 재차 알게 되었다.
결국 거인을 발견하지 못한 환인은 속으로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떠올리며 밖으로 나가는 계단 초입에 내려섰다.
경우의 수가 별로 좋지 않은 것들이라 기분이 안 좋아지는 가운데 이실리테가 대파 같은 달래를 뽑은 자리를 찾았다.
“역시…….”
꾸우?
뭐가 역시냐며 머리를 들이미는 비상에게 이실리테가 달래를 뽑았던 자릴 보여주었다.
비도 내리고 시간이 흘러 묻히긴 했지만, 손으로 밀어내자 달래가 뽑혀 나간 자리가 다시 드러난다.
“어쩌면 이 미궁은 니오네브레스에서 처음 발생한 특이점일지도 모르겠다.”
뀻?
정찰을 나간 지 40분 만에 거점으로 돌아온 환인은 지하 거점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 찬 것을 맡을 수 있었다.
메뉴는 고기를 곁들인 버섯 소테인지, 버섯을 곁들인 고기 소테인지 알 수 없는 음식.
“다녀왔다.”
=아, 주인님 어서 오세요. 마침 식사 준비가 방금 끝난 참이었어요.=
그녀의 환영에 그런가 보다 하며 1자로 길쭉한 암석 테이블로 가서 앉은 환인은 환연이 혼자 날아와 자신의 귀에 대고 고자질하는 것을 들었다.
「거짓말이야. 20분도 전에 마쳤지만, 환인 오기 전에는 먹을 수 없다고 우리한테 음식 고문했어.」
피식 웃고 있으니 안느와 유르파, 백려강도 와서 음식 나르는 것을 돕는다.
그리고 시작된 식사에 환인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자신의 앞에 놓인 1kg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스테이크.
한 점 썰어 맛을 보니 등심 특유의 식감과 달콤하면서도 짭조름한 소스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이건 미궁에서 잡은 짐승의 고기인가.”
=네. 사흘 전에 마주쳤던 블레이드윙 버팔로의 등심이에요.=
“맛이 훌륭하군.”
10t 트럭만 하던 들소를 떠올린 환인은 잡내가 거의 나지 않는 스테이크를 다시 맛보다가 아까부터 시선을 빼앗는 음식에 눈길을 주었다.
멧돼지만큼이나 거대한…… 버섯 통구이.
=주인님, 여기요.=
이실리테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부분만 잘라주는데 그 크기가 1kg 스테이크 못지않게 거대하다.
대부분의 버섯이 그렇듯이 특별한 맛이랄 건 없지만, 후추 소금을 살짝 뿌리자 그것만으로도 감칠맛이 폭발하며 쫀득쫀득 쫄깃한 식감과 어우러져 큰 감동을 준다.
큼직하게 썰어 한입 가득 버섯을 씹는 느낌을 즐기며 저녁 식사를 마친 환인은 배불러 하는 여자친구들을 불러 모아 정찰 결과를 알려주었다.
“이곳의 생태계는 미궁이 거의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12일이 지났음에도 재생하지 않은 달래의 흔적.
이형종을 제외한 먹이사슬.
미궁의 심부로 나아가도 들지 않는 정신 침해 효과.
혹시나 자신들이 작아진 게 아닐까 했지만, 그게 아님을 증명하는 몇 가지 요소들.
“거인도 이형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확인해 보려 했으나 비 때문인지 아니면 시간 탓인지 거인을 한 마리도 발견할 수 없어 그 점은 확인하지 못했다.”
=으음. 거인이 한 마리도 안보였다고? 이형종도 마찬가지고?=
“그래. 그 때문에 미궁의 정확한 등급도 산출하기 어렵고…… 중핵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는 상황에 미궁 심부까지 다가가기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복귀했지.”
=현명한 판단이야. 보통 미궁 돌파 부대도 급하지 않은 이상 최소 6개월을 일정으로 잡고 중핵의 능력 파악에는 한 달 이상 쓸 정도니까.=
그러고는 탁자에 두 팔을 올리며 심각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면서 중얼거린다.
=믿어야 하는데 믿기 어려운 이야기라서 머리랑 가슴이 티격태격하는 기분이야.=
=어째서인가요?=
다소곳이 앉아 환인과 언니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던 백려강이 궁금함을 드러내자 안느는 아예 탁자 위에 엎드리며 대답을 힘없이 입에 담았다.
=도령 말은 미궁이 닥치는 대로 위상력과 생명력을 착취하지 않고 생태계 순환에서 발생하는 자원만 환수한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미궁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야기란 말이지.=
=아. 저도 그 이야기는 들어봤어요. 땅신 교단 분들은 미궁이 땅신님의 축복을 받아 생겨났기에 땅을 비옥하게 만들기 위하여 끊임없이 성장하려 드는 성질을 가진 장소라고 생각한다고요.=
=정확해. 도령의 정찰 결과는 내가 교단에서 배운 거랑 완전히 상반된 거라서…….=
=안느. 여태까지 이런 미궁이 발견된 적은 없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없어.=
=이 미궁이 전례가 없는 경우라는 건 둘째치고…… 자기는 아직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거 같아.=
유르파의 이야기에 여자들은 상석에 앉아 팔짱을 낀 환인을 쳐다보았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듯 그윽하면서도 심유한 검은색 눈동자와 무심한 듯한 표정.
“거인입니다.”
=……거인?=
“거인이 이형종이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전부 죽이고 심핵을 부순 뒤 탈출하면 그만이니까.”
그 말에서 아, 하고 짧게 탄성을 지르는 유르파.
=자기는 거인도 이형종이 아닐 수 있다고 보는 거구나.=
=잠깐, 잠깐잠깐. 미궁 안에 거인이 이형종이 아니라 질리언트일 수 있다고? 어떻게 그런 가설이 나오는…….=
말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은 안느의 표정이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해진다.
환인이 했던 이야기에 나와 있었다.
이형종이 없는 미궁. 전부 평범한 동식물로 구성된 생태계. 바깥에서 들어와 변이한 것처럼 거대화한 생물들.
“만약 이곳의 거인이 이형종이 아니라 인간이 변화한 것이라면, 혹은 미궁이 만들어냈던 이형종 거인과 인간 거인의 혼혈이 자리 잡고 있다면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극히 적다.”
=…….=
“이미 추적자가 근처까지 찾아온 마당이다. 이런 미궁의 특성을 각국이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낱낱이 조사하려 들겠지. 그리고 자기 터전이 타지인에게 헤집어지는 걸 두고 볼 원주민은 없다고 생각한다.”
=도령은…… 만약 이곳의 거인들이 이형종이 아니라 사람이라 해도 미궁을 부수겠다는 거야?=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안느와 백려강은 희미한 침음을 흘렸고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들이 의사가 소통되는 사람이라면, 내가 그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이주 하나뿐이다. 물론 이것도 거인들이 이쪽의 제안을 우호적으로 수용할 때에 한한 이야기지만.”
=그, 그들이 앞으로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게 손봐주는 건…….=
“바보들이나 생각할법한 낙천적인 관점은 선호하지 않는다. 훗날 다른 자들이 찾아와 미궁을 엉망으로 만들게끔 두고 떠날 생각은 없다. 한다면 내가 하고 원망과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내가 받을 거다.”
여자친구들이 의견을 꺼낸다면 거부하는 일 없이 우선하여 수용해주던 환인의 칼 같은 태도에 안느가 시무룩해진다.
그녀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은 그가 악의를 가지고 의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바라는 상황으로 결론이 날 일은 열 중 아홉도 되지 않을 거란 것.
안느가 눈에 띄게 풀이 죽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유르파는 그녀의 팔에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어… 안느 아가씨? 거인들이 꼭 사람이라는 법은…….=
“유르파. 그런 희망적인 관측은 진실이 반대로 이루어졌을 때 절망과 분노만 낳을 뿐입니다.”
환인의 단호한 이야기에 안느를 위로하려던 유르파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무언가와 싸우듯이 고민에 고뇌하는 안느의 모습을 환인은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실리테와 유르파는 자신이 하자고 하면 대도시에서 민간인 학살도 이유가 있을 거라며 말없이 따를 여자들이다.
하지만 안느는 환인에게 많이 물들긴 했지만 그래도 성직자라고 할 수 있는 가치관과 사고를 가진 여자.
잠시 후 내면에서 결론이 나왔는지 안느가 후우— 숨을 길게 내쉬고 환인에게 부탁했다.
=도령. 만약 거인들이 사람이고 그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설득을 나한테 맡겨주었으면 해.=
“땅신 교단의 성직자로서 의견인가.”
=……응.=
“그래. 그런 상황이 오면 너에게 부탁하지.”
=고마워.=
그 어떤 찝찝하고 어두운 감정 없이 말 그대로 고마움이 듬뿍 묻어나는 안느의 대답에 환인도 무표정을 풀고 작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6일. 미궁 탐험 탐험은 순조로웠다.
미궁에 항거 불가능한 강적의 출현이 알려진 듯, 야생 동물들의 습격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으며 전투는 생각이라는 것을 거의 하지 못하는 곤충이나 작은 양서류 정도로 제한되었다.
덕분에 미궁 탐험이 아니라 일반적이지 않은 비경의 탐사 같은 시간만 흘렀다.
해가 뜨면 지도를 만들 겸 눈에 띄는 곳만 표시해가며 숲을 헤쳐나간다.
그리고 해가 지면 세계수의 자식이 아닐까 싶을 만큼 거대한 나무로 다가가 뿌리 아래 지하실을 만들어 쉰다.
해가 뜨면 머물던 지하 거점은 흔적도 없이 덮고 다시 탐사를 시작.
그게 여섯 번 반복되었을 때.
환인의 여자들은 그의 판단력과 추리력이 가정의 한계를 넘어 초월자의 직감 영역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침입자! 나가라!=
도시 미녀라기보단 시골 처녀에 가까운 키 30m의 여자 거인, 처음으로 조우한 거인은 환인 일행을 향해 포효 같은 고함을 질렀다.
그 목소리에는 총, 균, 쇠를 가지고 침략한 콩키스타도르를 마주한 원주민 같은 적개심이 스며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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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들썩들썩(심연을 담아둔 뚜껑이 흔들리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