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 거인숲 미궁
미궁 초입의 대파처럼 커다란 달래는 약과였다.
벽을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어지간한 나무처럼 자란 관목이 앞을 가로막았고 진짜 나무는 40층, 50층씩 되는 빌딩처럼 무지막지한 키로 천장을 가린다.
평범한 관목림도 헤치고 나아가기 어려운데 수 미터짜리 나무만 한 관목이 계속 앞을 막으니 여자들은 각자 검이나 단검으로 나무를 베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후두두두둑—
=히잇!?=
그때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진 물줄기에 안느가 작게 비명을 지른다.
순간이지만 식겁했던 안느는 머리를 적신 물의 흔적을 느끼곤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가 푸르르 고개를 털었다.
=뭐야. 이거 비 맞지?=
이해가 안 간다는 중얼거림에 옆에서 물에 같이 맞은 이실리테가 눈앞에 달라붙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대꾸했다.
=미궁 안인데 비가 어떻게 내리는 걸까. 입구 근처에서 봤을 때 물안개도 낀 거 같던데.=
=밖이랑 기후가 연동되어있나? 이런 미궁은 나도 처음이라서 모르겠네. 그보다 도령, 언제까지 앞으로 가?=
“좀 더 나아가다 보면 나무 한 그루가 근처로 다가올 거다. 확실치 않지만 대강 너비가 30m는 되어 보이는 나무였는데 그곳을 목표로 하지.”
크기로 인한 원근감 혼란 탓에 확실하진 않지만, 그 나무는 어림잡아 높이가 300m는 넘어 보였다.
출근길에 63빌딩을 지나다니며 자주 보았던 터라 그때의 감각과 흡사하니 맞겠지.
“그러니 그 나무둥치에 도착하면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주변 지리를 먼저 파악할 생각이다.”
=연이 정령 감시가 얼마나 사기였는지 실감이 나네.=
=그러게.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긴장감이 남달…….=
뀻. 뀨우.
“조용.”
비상의 경고에 즉시 환인이 주의를 날렸고 여자들은 물론 쿠에들도 딱 멈추며 숨소리도 죽인다.
부스럭. 푸서석-
그러자 희미하게 들려오는 수풀과 덤불 헤치는 소리.
점차 커지고 가까워지는 소리에 이실리테와 안느가 기척을 죽인 전투태세에 들어가고 환인은 백려강의 팔을 잡아 유르파와 쿠에들이 있는 곳으로 물러난다.
푸서서석—
“……?”
기감을 예리하게 발휘, 시야를 가리는 울창한 관목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의 정체를 눈치챈 환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직후 나타난 것은 미국의 어느 유원지 마스코트처럼 귀염상이 느껴지는 거대한 회색 쥐였다.
찍?
일행을 발견한 쥐는 뒷다리로 일어서 킁킁, 냄새를 두 차례 맡는데 그 덩치가 철판 갑주에 성벽의 방패까지 든 안느를 훌쩍 뛰어넘는다.
환인 일행에게서 위협을 느끼지 못한 회색 시골 쥐는 관심이 사라진 듯 몸을 돌려 일행이 나아가던 방향으로 가버렸다.
금방이라도 천벌의 망치를 휘두를 것처럼 쥐고 있던 안느가 조금 어색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죽여야 했을까? 적개심이나 적의가 전혀 안 느껴져서 일단은 지켜봤는데…….=
=내 눈에도 이형종이 아니라 크기만 큰 평범한 시골쥐 같았어.=
둘의 시선이 교차하다가 환인에게 향했다.
“지상에서 흘러들어온 쥐가 대를 거치며 거대화한 걸 수 있겠지.”
=그럼?=
“우리는 식량을 비축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마주치는 동물은 전부 죽여서 식량으로 삼는다.”
=응.=
=네.=
봐주지 말라는 이야기에 이실리테와 안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쥐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도무지 미궁이 만들어낸 이형종 같지 않아 주시만 했는데 그의 말이 옳다.
미궁에 들어온 이상 먹고 먹히는 먹이 사슬의 굴레에 편입한 셈이다. 거기다 미궁의 심핵을 부술 생각이니 어차피 다 죽을 목숨.
그럴 바엔 잡아먹어 자신들의 피와 살로 만드는 게 인간 관점의 인의겠지.
첫 나무까지 거리는 제법 멀었다.
기척을 감추고 몇 번 싸우며 이동하느라 느리게 움직였다지만 1시간이나 걸렸던 것.
가는 길에 마주친 동물은 다양했다.
사람 크기만 한 다람쥐와 청설모를 섞은 듯한 동물도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카나리아 비슷한 새가 날아다니는 것도 목격했는데 그 크기가 어림잡아 비상만큼이나 컸다.
그중 본격적인 동물이라 할만한 것은 멧돼지만큼이나 큰 너구리였다.
흔히 사람들이 너구리로 오해하는 라쿤이 아니라 중범죄 저지를 것처럼 생긴 진짜 너구리.
……꾸루룽!
이실리테와 안느를 먹잇감으로 인식하고 덤벼들었던 너구리는 1초 만에 이실리테의 검에 의해 너/구리가 되었고, 여자들은 너구리 사체를 보면서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구리가 이 정도로 크면 사자나 호랑인 얼마나 클까 궁금해지네.=
=그보다 이것도 그냥 동물인데 미궁 안이 어떻게 되어있길래 동물들만 돌아다니는 걸까?=
=미궁 외곽이라서 그런 거 아냐? 강한 것들은 미궁 중심부에 모여있고 약한 것들은 외곽으로 밀려나는 생태계가 이루어져 있는 거.=
=아니 그게 아니라…….=
그렇게 몇 차례의 전투답지 않은 전투를 끝내고 도착한 나무는 정말 어마무시하게 컸다.
지면 위로 나와 있는 나무뿌리가 큰 것은 사람의 몸통만 했던 것.
일단 목적한 장소에 도착한 환인은 일행을 대기시킨 뒤 이실리테와 함께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유르파가 20분 동안 유지되는 무게 격감의 비술을 걸어주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기에 환인은 패널을 밟고, 이실리테는 다중 검기를 밟으며 순식간에 나무를 기어오른다.
=으음…….=
“…….”
그리고 중간 즈음에 뻗어 나온 굵은 나뭇가지에 착지한 두 사람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막막함을 느꼈다.
한 명은 거인의 나라에 떨어진 소인이 된 느낌에, 다른 한 명은 본격적으로 미궁을 공략한다 해도 3~4달은 걸릴 것 같다는 예감에.
아래를 내려보면 지상이 물안개에 희미하게 잠긴 것처럼 보인다.
앞을 보면 거리감이 이상해지는 거대한 나무가 곳곳에 서서 시야를 가로막는데 그런 나무들도 희미한 안개에 잠겨있어 먼 곳까지 보이지 않는 상황.
물리적인 크기 차이에서 오는 근원적인 공포감이 느껴질 정도로 넓다.
=거인의 나라에 간 소인의 심정이 이런 걸까요……?=
“다르지 않겠지.”
노트북에 담아온 기술서 중에는 작도법도 있었다. 이제 좀 더 정확한 지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산란못 미궁에서처럼 미궁 지도를 그려가면서 공략한다 치면…….
‘정말로 4달은 걸리겠군.’
만약 환연이 멀쩡했고 미궁이 정령술을 펼쳐도 상관없는 장소였다면 공략 시간이 절반 가까이 단축됐겠지만, 이곳에서는 환연의 도움을 바랄 수 없다.
그때 환인의 귀에 작은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푸드드득…….
=…주인님, 뭔가가 날아오고 있어요.=
“새군. ……무척 큰 딱따구리.”
퍼더더더더덕—!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난 것은 부리에서 꽁지까지 족히 3m가 넘어가는 데다 좌우 날개까지 하면 7m에 이르는 초대형 딱따구리였다.
그리고 그런 삼백안 같은 딱따구리의 눈은 자신들을 사냥감으로 분석하는 눈이었기에 환인은 체공 중인 딱따구리를 향해 몸을 날리는 동시에 광창을 1초만 발현시켜 목을 잘라버렸다.
채 반응도 못 할 속도에 머리가 날아간 딱따구리는 절단면에서 피를 뿜으며 추락.
환인은 슬슬 유르파가 걸어준 비술의 지속시간이 다 되어감을 느끼고 이실리테에게 내려가자는 손짓을 한 뒤 패널을 밟으며 빠르게 지상으로 내려왔다.
땅에 착지하자 먼저 떨어진 딱따구리 시체의 근처에 모여있던 여자들과 쿠에들이 그를 돌아본다.
=도령 왔네. 이거 도령이 죽인 거야? 갑자기 위에서 엄청나게 큰 새가 떨어져서 깜짝 놀랐어.=
“나도 이 정도로 큰 딱따구리는 처음이라 놀랐다.”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환인의 너스레에 여자들이 픽 웃는다.
=자기, 위에서 보니 어땠니?=
잠시 생각을 정리한 환인은 이실리테가 한발 늦게 내려오는 걸 보며 입을 열었다.
“이형종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인도 보이지 않은 것을 보면 안느의 말대로 거인들의 생활 반경은 미궁 중심부라고 봐야겠지요. 넓이는…… 현재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정석적으로 지도를 만들어가며 미궁을 공략하려면 3달은 가볍게 초과할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느긋하게 미궁을 공략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원래 목적으로 했던 시간 보내기도 달성하고 자기도 심핵을 부숴서 좀 더 강해지겠네.=
=먹을 것도 엄청 풍부하고 저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강도 흐르고 있는 게 틀림없어. 식수 문제도 없어지니까 장기 탐험에 최적화된 미궁이야. 이거 봐.=
보라며 내미는 안느의 손에는 사람 팔뚝만 한 버섯이 들려있었다.
모양만 보면 느타리버섯이지만, 성인 남자의 팔뚝만 한 게 대여섯 개가 붙어있으니 미묘하게 징그럽고 혐오스러운 느낌이지만, 안느의 얼굴에는 기쁨만이 가득하다.
“맛이 어떨지 궁금할만큼 크군.”
=버섯이잖아. 이거도 맛있을 거야.=
근거 없는 믿음에 환인이 피식 웃자 백려강이 손을 자그맣게 들고 발언한다.
=저기…… 환인 님. 미궁에 오래 있으면 정신 침식이 벌어지잖아요. 가끔은 미궁을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미궁에서 정신 침해로 고생한 경험이 있던 백려강의 질문에 안느가 대답했다.
=그건 도령의 평온의 파동으로 해결돼.=
=정말요?=
“그렇다곤 하지만 이런 미궁 안에 너무 오래 머무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지는 않을 거다. 미궁의 모든 게 거대한 상황에 미궁이 육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모르고.”
환인이 너무 높아 어둠이 모여들어 까맣게 보이는 위를 올려다보자 여자들도 똑같이 위를 바라본다.
“그러니 지금은 벽을 따라 한 바퀴 도는 걸 목표로 하겠다. 공동형 단층 미궁으로 보이는 만큼 외벽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컨디션 상태 등의 변화 정보도 얻을 수 있겠지.”
그와 함께 미궁이 매우 넓은만큼 공략에 최소 3개월 이상 걸릴 것을 염두에 두라고 환인이 이야기하자 여자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작된 행군 아닌 행군은 정말 어처구니없을 만큼 길게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거인숲 미궁은 공동형이 맞았다.
알게 모르게 둥그스름하지만, 산란못 미궁처럼 두꺼운 숲과 덤불이 벽을 만들어 돌아가야 하거나 뚫고 지나가야 하는 일 같은 것은 없었던 것.
하지만 그 거리가 무식할 정도로 길었다.
일행이 12일간 걸은 거리만 따지면 약 322km. 더욱 충격적인 것은 이동 경로를 따라 면적을 계산해본다면 미궁의 전체 면적은 약 4,800㎢로 경기도의 절반에 가까운 넓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 내려왔던 미궁의 입구에 도달한 여자들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으로 서서히 밤이 찾아오는 숲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정도면 시주르 대평원 아래에 거인숲 미궁이 있는 수준 아니야?=
=으응… 그 정도는 아니지 않니? 걸은 거리가 322km니까 직사각형으로 곧게 펴면 한 면이 80km인 셈이잖아.=
=그런가……. 계속 걷기만 해서 감각이 좀 이상해졌나 봐. 실제 체감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큰 거 같은데.=
=감각 혼란이 일어날 만한 시간이었긴 해.=
=유리 언니, 안느. 차 마실래요?=
=엉, 나 한 잔 줘.=
=나도 부탁할게.=
보름에 가까운 시간동안 행군한 덕분에 미궁의 생태가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일단 미궁 내부에도 밤과 낮, 기상 변화와 기후 변화가 구현되어있었다.
바깥이 밤이면 미궁도 밤, 바깥에서 바람이 강하게 불면 미궁 내부에서도 바람이 불며 밖에서 비가 내리면 미궁 안에도 비가 내리는 것.
이런 자연 변화 덕분에 여자들은 미궁이 아니라 좀 신기한 지역에서 탐험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러한 감상은 미궁에서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정신 침해에 강한 내성을 지니게 해주었다.
이형종은 놀랍게도 12일간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이것을 두고 여자들은 갑론을박을 벌였지만, 의견은 하나로 좁혀졌다.
미궁은 내부의 유지에 거의 모든 힘을 쓰고 내부 생태계는 외부에서 유입되어 변이한 동물과 짐승들이 구성하고 있다는 것.
=유지에 쓰고 남은 힘은 아마 거인을 만드는 데 썼을 거야. 그러니까 거인숲 미궁의 생태계 최정점은 거인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 아래로 거대화한 짐승들이 자리 잡은 거지.=
이형종은 만나지 못했지만, 위상력에 변이한 마물 다수와 조우했다.
길쭉한 귀가 칼날처럼 예리해 이것으로 적을 베어 죽이는 이어블레이드롭.
길고 날카로운 뿔이 수평으로 나 있는 블레이드윙 버팔로.
뾰족한 부리로 사냥감의 뇌수를 빨아먹는 브레인이터 등.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화한데다 위상력까지 다루는 괴수급 짐승도 우글거릴 것이 예측되는 상황.
삐, 삐잉- 삐이~
잠깐 쉬는 시간을 틈타 점점 어린 불사조 느낌이 나는 실루의 등에 쿠에 기병처럼 올라타 있는 환연을 구경하던 이실리테가 입을 열었다.
=결국 이 미궁은 몇 급인 걸까요? 벽에 내려가는 길이 없었지만, 미궁의 넓이로 보면 5급은 넘는 거 같은데…….=
미궁의 규모에 따라 급을 나누는 방식도 있긴 하다.
파르히스트 근방에 있는 가고일 왕자의 비밀 묘지는 이곳처럼 단층형 미궁으로 5급이다.
넓이만 보자면 대도시만큼이나 넓지만, 그곳의 풍경은 정돈된 미로 타입으로 천장 높이도 평균적으로 3m를 유지한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곳은 파르히스트 쯤은 대여섯 개를 넣고도 넉넉할 정도로 넓으며 천장 높이는 최소 500m. 비교가 안 된다.
“확실한 건 6급 이상이겠지.”
=그럼 7급 중핵이 심핵을 지키고 있겠네.=
=안느 언니. 환인 님은 6급 이상이라고 했으니 7급이나 8급일 가능성도…….=
=그러면 8급 이형종이나 9급 이형종하고 싸우게 되는 거지. 9급이면 용이라 부를만한 괴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는걸.=
투라드 마을 근처에서 보았던 백청색 용을 떠올린 백려강이 살짝 어깨를 떨었다가 물었다.
=서, 설마요.=
“대성녀님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드네빌라는 등급제로 했을 때 14급 정도가 아닐까 하시던데. 9급이 그 정도나 된단 말인가.”
=으응? 아니, 아니. 그분은 신수시잖아. 내가 말한 건 그런 격 높은 존재가 아니라 마물 계통으로 말도 못 하는 열등한 용이야. 그래도 일반적인 모험가나 탐험가한테는 사신이나 다름없지만.=
=……그 용 외에 9급 괴물은 어떤 게 있는데요?=
=음. 알려진 걸로는 타락 요정용 계통인 왈퍼터, 외형은 일단 호랑이지만 사자 같은 갈기가 촉수화해서 사람에게 붙어 기생해 그 사람을 조종하는 마인드로우, 길이만 수 킬로미터인 샌드웜의 변이체인 본스케일 데스웜, 악마 종인 지옥마를 탄 데들리 나이트도 있고…….=
안느의 입에서 줄지어 나오는 괴물은 하나같이 사람의 정신 상태를 무너트리는 재앙 수준의 진정한 괴물이었다.
작은 도시 수준인 이블린 기드 스파이더, 대지의 신수인 베히모스가 영락해 지옥의 거죽을 두르게 되었다는 사이스피터, 어둠과 벼락을 두른 채 무수한 뼈 촉수를 휘두르는 딥워터 드레드피시, 악룡이나 광룡이나 마룡 같은 건 비교적 흔한 편이고 대지가 지옥의 마왕과 결합해 태어난 어스그랜트 같은 것도 있다고.
안느가 묘사를 곁들인 이야기를 멈췄을 때, 백려강은 괜히 물어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고 이실리테와 유르파도 약간 찜찜한 표정이었다.
왠지 목덜미가 서늘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이실리테가 애써 주제를 전환한다.
=그, 그보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질 텐데 주인님은 정령 강령을 못 쓰시고 안느도 루모의 정령 빙의를 못 쓰니까 전력이 많이 줄겠어요.=
“정령만큼 효율은 나오지 않겠지만 괴물이나 짐승의 영혼으로도 강령을 할 수 있으니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나저나…….”
환인은 실루의 등에 탑승한 채로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휘두르는 환연에게 물었다.
“환연, 릴라이스에게서 바깥 이야기는 없나.”
「아직 없어. 한 번 물어볼까?」
해보라고 부탁하자 환령계에 있는 릴라이스와 교신을 위해서인지 눈을 감는 환연.
그랬는데 5초도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는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 미궁 가까이 접근하던 인간이 몇몇 있긴 했지만, 미궁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데……?」
그녀의 대답에 환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겨난다.
“그게 언제 이야기였지.”
「나흘 전이래……. 미궁을 발견한 것도 아니어서 말해주지 않았다고 해.」
환연도 이런 대답이 돌아올 줄 예상을 못 한 모습이다.
“…….”
=…….=
좀 전과는 다른 의미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환인이 추적자를 예상하고 움직이곤 있었지만, 정말 추적자가 가까이 왔었다니.
자연스럽게 그자들이 어디서 온 인물들인지, 이렇게나 끈질기게 쫓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 여자들은 생각에 잠긴 표정의 환인을 응시했다.
“……이쪽은 성제 일행이다. 저쪽도 머저리가 아닌 이상 적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쪽의 영향력과 이름값을 등에 업기 위한 접촉이 주목적일 테지.”
=그럴 가능성이 크겠네.=
유르파의 동의에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밖으로 나가는 출구 계단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래는 미궁을 나가 하루 정도 쉰 다음 다시 내려오려 했지만…… 혹시 몸 상태가 이상하다거나 컨디션이 나쁜 사람 있나.”
=여기가 숲이라서 그런지 난 평소보다 컨디션이 계속 좋아.=
선천적인 숲의 종족이라는 플뢰족의 안느.
=2주 가까이 햇빛을 보지 못해서 살짝 답답한 느낌이긴 한데 장마 기간에 하늘을 보는 거랑 비슷한 수준이라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에요.=
남달리 정신력이 강인해진 이실리테.
=저, 저는 미궁 밖이랑 안이랑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용인체에 빙의해있는 백려강.
=비술 실습을 못 해서 조금 심심한 점을 제외하면 아무렇지 않아.=
툭하면 방에 틀어박혀 햇빛도 안보고 비술 연구와 마도 기구 제작만 하는 유르파.
환연도 정신을 차린 뒤 컨디션이 더 좋아진 상태이며 쿠에들 또한 느긋하게 주변 풀을 뜯어 먹거나 바위 아래 숨어있는 커다란 벌레 같은 것을 잡아먹으며 평온하게 지내는 상태.
환인은 일행의 정신 상태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우리는 미궁 탐사를 계속하지.”
=자기, 그러다 만약 추적자들이 미궁을 발견해서 내려오면 어떻게 할 거니?=
“그 정도로 집요한 자들이라면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요.”
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다. 그러다 트러블이 생기면 뭐, 묻어버리면 그만이지.
이곳은 거대한 숲이라고 해도 엄연히 미궁의 뱃속이다. 죽인 뒤 묻어버리면 흔적 같은 것은 깔끔하게 지워질 거다.
“우선 거점부터 정하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본격적인 거인숲 미궁의 탐사는 입구에서 시작할 생각으로 환인은 길을 거슬러와 출입구에서 3시간 정도 떨어진 나무로 이동했다.
오면서 눈여겨 봐두었던 너비 50m의 초대형 나무로, 나무둥치 아래에 공간이 생긴다해도 끄덕없을만큼 튼튼해보이는 거목이다.
“이제부터 이 나무를 거점으로 활용할 생각인데… 안느, 나무에 의도적인 상처를 내는 것은 별로인가.”
환인의 질문에 거목을 살피던 안느는 응? 하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런 거면 채식은 하지도 못했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식물을 뜯어내서 우적우적 씹어먹는 거니까. 아무튼 나무의 속을 파낼 생각이란 거지?=
“그러기에는 시간도 적잖이 걸리고 흔적도 많이 남는다. 환연, 중급 정령은 잠깐 부리는 게 가능하다고 했었지.”
「응. 환인이 심핵력을 조금 주면 더 오래 있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심핵력은 힘을 늘려주는 게 아니었나. 뭐, 잠시 후에 실험해보면 되겠지.”
환인은 12일간 행군을 하며 머릿속에 미리 정리해둔 것을 환연에게 설명했다.
어려운 것도 없고 그 정도면 땅의 정령 둘을 불러다 10분이면 완성할 수 있는 수준.
「흐응. 바람이랑 땅의 정령을 쓰면 나무 속 파내는 것도 가능한데?」
“굳이 지상에 드러나는 거점을 둘 필요는 없다. 나무 아래를 살펴서 20평 정도 되는 지하실을 만드는 걸로 충분해. 뒤처리도 간편하고 흔적도 남지 않으니.”
미궁 내부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더라도 미궁은 곧바로 수복하지 않고 제법 오래 놔둔다는 것은 그간 몇 번의 미궁 탐사 경험으로 검증한 사실이다.
그러니 땅의 정령으로 거목 아래 지하실을 만들고 입구는 적당히 관목을 옮겨와 심어놓으면 위장도 간편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거점이 만들어지는 것.
「알았어.」
환연은 쿠에 기병처럼 실루를 움직이며 땅의 정령을 부려 거목 아래 지하실을 만들어나갔다.
그러는 사이 미궁에는 다시금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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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등위도 여가부처럼 걍 해체시켰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