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 거인숲 미궁
* * * *
절레절레.
끝없이 펼쳐진 대초원의 한복판. 땅을 훑던 하급 땅의 정령이 두 손을 작게 들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에 녹색 후드 망토를 깊게 눌러쓴 플뢰족 추적자가 지친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장. 흔적을 완전히 놓쳤어요.=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던 플뢰족 추적자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물처럼이나 파란 머리카락을 귀족적으로 땋은 여자 플뢰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한숨을 폭 내쉰 여자 추적자는 대장처럼 녹색 후드를 벗어 부슬비를 맞기 시작했다.
녹색 머릿결에 빗방울이 스며들며 촉촉해지고 과도한 정령력의 사용과 정령 교감으로 정수리에 맺히던 열이 그 빗방울에 천천히 식어간다.
머리 위로 옅은 김을 피워올리던 여자 추적자가 불퉁거리며 다시 말을 걸었다.
=대자앙. 임무 속행 불가능 판정 내리고 그만 귀환하죠?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잖아요.=
=아니. 계속 추적한다.=
가녀리고 고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고지식한 대답에 추적자는 재차 한숨을 폭 내쉬었다.
=으~ 비 와서 흔적이 다 사라졌는데 어떻게 추적한다는 거예요. 저쪽에 상급 정령사라도 있는지 가뜩이나 흔적도 옅고 희미했는데 이제는 그 흔적도 비때문에 다 씻겨져 내려갔어요. 느라움도 난감해한다고요.=
=성제 일행이 갑자기 가도를 벗어났다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쪽의 추적을 눈치채고 이탈, 교란을 시작한 것과 다른 하나는 애초에 목표가 팔라툼이 아닌 미궁이라는 거지. 흔적의 이동 경로를 생각해본다면 이탈 교란이 아니라 미궁 탐색이 목적으로 판단된다.=
=응? 대장, 시주르 대평원의 미궁 위치 정보 알고 있으세요?=
=모른다. 그러니 정령력 아끼지 말고 아이들을 전부 풀어서 근방을 탐색해라.=
=……어휴.=
=대답.=
=뉘에~.=
반항심이 가득한 추적 담당 대원의 대답에 대장이라 불린 여자는 비에 젖어 늘어진 푸른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부대원 둘도 기약 없이 늘어나는 임무 기한에 지친 기색이 드러난다.
외부 장기 임무를 끝마치고 돌아가려는 중에 위에서 내려온 긴급 지령. 그건 특정 인물의 추적과 접촉이었다.
3달에 걸친 장기 임무였고 드디어 돌아가서 쉰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기약 없는 장기 임무가 하달되었다. 지칠 만도 하지만…….
‘속도 편한 녀석들.’
현재 가문 내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는 대장은 그녀들과 달리 속이 편하지 못했다.
전령에 적힌 임무 지시를 분석해본다면 가문에서 원로파와 공녀파가 본격적으로 맞붙을 분위기가 드러나고 있다.
그걸 생각해보면 공녀파 쪽에서도 성제와 접촉하려 사람을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 자신들의 임무 결과에 따라 가문의 흥망이 갈릴 수도 있는 것이다.
대장은 입이 툭 튀어나와 있는 부하의 머리에 사안의 심각성을 주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기관에서 내려온 명령서를 보면 우리뿐만 아니라 라드세아의 성궁과 본국의 협의회에서도 성제와 접촉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거기에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걸 공녀파도 알고 있을 텐데 그들이라고 얌전히 있을까.=
=…….=
=어느 쪽이든 우리보다 먼저 접촉한다면 이쪽의 임무는 실패다. 그건 도시와 가문에 큰 위협이 된다는 사실과 직결되지. 오랜 임무 탓에 지쳐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의 추적은 그런 우리에게 지령이 내려질 정도로 중요한 일이다. 도시를 위해, 가문을 위해 좀 더 힘을 내다오.=
=…에이 참. 그렇게 말씀하시면 의욕을 낼 수밖에 없잖아요.=
추적자가 다수의 물, 바람, 땅의 정령을 불러내는 걸 본 대장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며 형형한 눈빛을 냈다.
이 임무는 실패해선 안 된다.
‘설령 다른 추적자들을 모두 죽여서라도…….’
이엘카타의 전견시가 불러온 여파가 환인의 지척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 * * *
미궁 입구의 물결치는 검은 막은 20계단 정도 내려갔을 때 나타났다.
그리고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처럼, 검은 막을 통과하자 바깥과는 전혀 다른 공기와 분위기가 일행을 맞이했다.
비와 수풀의 싱그러운 내음이 삽시간에 사라지고 짙은 숲속의 향기가 일행의 폐부를 찔렀던 것이다.
계단과 좌우, 천장의 단단한 흙벽은 변화 없이 여전한 상태.
조명이 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음에도 동굴의 윤곽이 어렴풋이 보인다.
일행이 말없이 저 앞에 어둠이 아가리를 벌린 것 같은 계단 끝을 향해 내려가던 중.
=스으읍—=
가죽 갑옷 상의의 가슴 부분이 살짝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깊게 들이마신 안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입구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던 냄새랑 같아. 미궁의 정체성은 그대로인가 보네.=
=그러면 미궁이 여전히 5급일지 아니면 6급 이상으로 성장했을지가 관건이겠네. 안느 아가씨, 계단이 얼마나 긴지 알겠어?=
유르파의 소리죽인 질문에 입을 다문 안느는 두 손을 기다란 귀 뒤에 대고 저벅저벅, 계단 내려가는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가 살짝 곤혹스러워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어…… 반향음이 좀 이상한데?=
“어떻게 이상하지.”
=일반적인 통로의 반향음은 일정한 감쇄 현상 끝에 소리가 사라져. 그런데 이 통로는 그런 반향 감쇄 현상이 갑자기 확 늘어나는 느낌이야.=
=통로가 갑자기 넓어진다는 건가요?=
백려강의 질문에 안느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그 증거가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폭이 5m 정도이던 계단이 갑작스레 좌우로 크게 넓어지더니 천장마저 아득히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
=…….=
어느덧 폭은 100m 가까이 넓어졌고 천장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러자 어둠이 갑자기 성큼 다가온 듯하다.
휘이이—
=아, 바람이…….=
이실리테의 작은 목소리대로 앞에서 숲 내음이 물씬 풍기는 바람이 마치 실체를 가진 것처럼 가느다랗게 불어와 주변을 스쳐 지나간다.
“…….”
환인은 이런 변화에 놀라지 않고 숲 냄새에 느긋해진 것처럼 편안해하는 모습으로 뒤따라오는 쿠에들을 돌아본 뒤 입을 열었다.
“쿠에들이 긴장하고 있지 않는다는 건 출입구 근방이 비교적 안전하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거인에게 도망쳐야 한다면 이쪽으로 오는 것은 하책이겠군.”
=그러네. 이만한 넓이면 거인이 끝까지 쫓아올 수 있을 테니까.=
거인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만한 높이라면 대부분은 쫓아올 수 있을 거다.
그런 상황을 가정하는 이유는, 층의 높이가 너무 높아서였다.
미궁을 많이 다녀본 안느가 경험에서 우러나는 의견을 꺼낸다.
=아무래도 여기, 단층 미궁 같지?=
“그래.”
오른쪽 벽에 딱 붙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려온 지도 좀 됐다. 깊이로 따지자면 거의 150m가량.
그런데도 계단은 끝나지 않고 있고 천장은 계속 높아져 간다.
백려강이 이러한 변화에 위축된 듯 쥐 죽은 듯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츠, 층의 높이가… 미궁의 깊이랑 관련이… 있나요……?=
=이만한 높이를 아무런 지지대 없이 지탱한다는 거 자체가 미궁이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뜻이야. 차라리 격리 변형이 하늘로 적용되어있다면 괜찮은데, 이런 높이의 미궁이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는 건 미궁의 힘도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지.=
=그, 그럼…….=
“이런 층이 몇 개 더 있다면 5급이 아니라 7급, 8급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 사실이 뜻하는 것에 미궁 경험이 적은 유르파와 백려강이 침을 꼴깍 삼켰다.
지금 나온 말에 따르면 이 층에 1급부터 최소 5급까지의 이형종이 뒤섞여 돌아다닌다는 뜻이고, 미궁이 만약 7~8급이라면 7~8급 이형종도 돌아다니고 있을 수 있단 말이니까.
그때 안주머니 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환인은 옷깃을 열었다. 그러자 골골거리는듯한 힘 없는 목소리가 좀 더 명확해진다.
「으으… 환인, 여긴 정령이 힘을 못 쓰는 장소인 거 같아…….」
“무슨 뜻이지.”
강화 영혼 시야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딱히 수상한 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미궁 전체가…… 자연의 힘을 조금씩 빨아들이는 거 같아……. 하급이나 최하급 정령은 아예 모습을 나타내지도 못할 거고, 중급도 별로 오래 못 버틸 거야…….」
=미궁이 변화하면서 자연력을 흡수해 존재 유지에 쓰고 있단 걸까.=
옆에서 듣고 있던 안느의 분석에 같은 생각을 한 환인이 안주머니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넌 괜찮나.”
「난 반반이니까 괜찮아…. 지금은 조금 힘이 없는 정도지만, 익숙해지면 움직일 수도 있을 거야…….」
“그래. 그때까지 쉬어라.”
「응…….」
좁은 안주머니다.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어야 하니 불편할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따로 놔둘 곳도 마땅치 않다. 환인은 옷깃을 여미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들었다시피 환연의 도움은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좀 더 긴장해서 주변을 살피도록. 유르파는 실루를 안고 쿠에들과 함께 있으십시오. 비상, 너는 유르파와 다른 쿠에들을 지켜라.=
뀨웃!
=저어, 환인 님 저는 어떻게 할까요?=
“너 정도 실력이면 4급 이형종과도 어느 정도 싸울 수 있겠지. 무리하진 말고 내 옆에 붙어있어라.”
=네엣.=
그렇게 일행의 포지션을 정한 뒤 10분가량 더 내려가고 있자니 일행의 말수가 완전히 사라졌다.
천장은 이제 까마득히 올라가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고 계단의 반대쪽 벽도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기 때문.
그 순간 눈앞의 시야를 가리던 어둠이 갑자기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행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좀 더 긴장하며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고…….
=……우와.=
=이, 이게…….=
이어서 드러난 눈앞의 풍경에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촉촉이 내리는 비로 물안개가 낀 숲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는데 보통의 숲과 달리 모든 것이 바깥보다 최소 10배 이상 컸다는 점 때문이다.
뭔가를 발견한 안느가 당황이 드러난 목소리로 그걸 가리켰다.
=이슬아. 이, 이거 달래꽃 맞지?=
=맞는데 크기가…… 우리 머리만 하네…….=
안느가 자기 머리 반만 한 하얀 꽃망울을 가리키자 이실리테가 할 말이 없다는 듯이 중얼거린다.
보통 달래꽃의 크기는 사람 손톱 정도다. 그녀들의 머리가 작은 탓도 있지만 그런 달래꽃의 꽃망울이 사람 머리만하다니.
이실리테는 잠깐 망설이다가 자기 허리높이의 달래를 캐기 시작했다.
일단 달래라면 소화제로도 쓸 수 있고 무치거나 데쳐서 무침으로 만들어도 맛있으니까.
달래 뚝배기 불고기를 떠올리며 달래를 뽑은 이실리테는 혀를 내둘렀다. 보통은 실처럼 가느다란 달래잎이 무슨 대파처럼 굵다.
킁킁, 냄새를 맡아본 이실리테는 끝을 살짝 잘라 잘 닦아서 입에 넣고 우물거려본다.
=……응. 냄새도 맛도 달래 맞아.=
그 말에 안느의 눈빛이 강하게 빛났다.
이만큼 커다란 달래라면 틀림없이 버섯도 클 테니까.
사람 크기만 한 버섯이라니!
꾸우. 꿋.
그때 커다란 바위를 퍽, 걷어찬 비상이 퍽 소리가 날 정도로 번개같이 땅을 쪼았다.
이윽고 들려진 비상의 부리에는 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고 커다란 지렁이가 물려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저, 저거 지렁이 맞아? 뱀 아니니??=
쿠르티와 쿠핀, 쿠라가 그걸 나눠 먹는 모습에 유르파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다른 여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여자친구들과 그걸 잠시 바라보던 환인이 입을 열었다.
“……정령들이 힘을 못 쓰는 이유를 알 거 같군. 다들 주의를 기울여라. 아무래도 숲뿐만 아니라 생물도 거대화한 것 같으니까.”
여자들은 쿠에 네 마리(실루는 작아서 못 먹었다)의 부리로 사라져가는 2m짜리 뱀 지렁이를 보며 조용히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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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오랜만에 폴드4로 폰을 바꾸었습니당.
성능이야 아이폰보다 낮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태블릿 들고다닐 필요도 없고 게임이랑 유튜브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망설이다가 샀죠!
중요한건 이게 아니고...
가운데 힌지 접힘이 엄청 신경쓰인다는 분이 계시는데 저는 오히려 이 부분이 좋네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살짝 접혀 볼록 튀어나온 부분의 감촉이나 감각이 애액으로 코팅된 민둥뷰지의 살틈이랑 흡사해서...
살살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계속 만져보고 싶은데 코팅 벗겨지고 때 탈까봐 자제 중입니다...
독자님들도 근처 삼성 매장 가셔서 만져보세요. 진짜 비슷함 ㅋ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