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 거인숲 미궁
솨아아…….
대초원에서 내리는 부슬비는 세상의 다른 소리를 전부 집어삼키고 대신 저음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노이즈 소리 같은 것으로 채워놓는다.
빗소리를 제외하면 방음 커튼을 친 것처럼 고요하고 적막한 세상.
부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는 오전, 이틀 만에 목적했던 거인숲 미궁 입구에 도착한 환인은 후드 망토를 쓴 채 회색으로 물든 세상을 둘러보았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어제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가 지금까지 계속 내리는 중이다.
하루 꼬박 비가 내리면 그게 부슬비라고 해도 여행자의 흔적을 전부 집어삼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냄새는 빗물에 씻겨 내려갈 것이고 지나온 흔적은 내리는 비를 머금어 급격히 성장할 수풀과 잔디가 뒤덮겠지.
있을지도 모르는 추적자들에는 최악이고 일행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상황.
혹시 모를 추적자를 대비해 방향을 이리저리 돌리느라 이틀이 걸렸었는데 이러면 추적자가 쫓아올 확률은 한없이 희박해지겠지.
“이제 마차를 분해한다.”
여자들은 환인의 지시 아래 비를 막을 천막을 먼저 치고 그 아래에서 차분히 마차를 분해해나간다.
먼저 마차에 걸려있는 술법진을 정지시키고 위상석을 뽑는 유르파. 그 뒤에 천장에서부터 차근차근 마차를 분해해나가는 환인과 여자들.
린덴 폐촌에서 하늘 기사단의 공병대와 함께 마차를 재조립한 경험이 있어 조립의 역순으로 해제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복잡한 마차 하부 골조는 왜건을 만들며 한 번 경험해보기도 했고.
=접착제를 안 쓰고 술법으로 해결하니까 분해도 간편하네.=
=하지만 리벳은 재활용할 수 없기도 하고 리벳을 뽑아낸 자리가 벌어져서……. 여러 번 분해 조립은 못 하겠어.=
안느의 감상을 이실리테가 받아주자 유르파가 고개를 끄덕인다.
=슬림 추출액으로 만든 수지를 쓰면 새것처럼 고정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다시 분해는 어려우니까. 분해 조립은 마모율을 생각했을 때 최대가 2번 정도겠네.=
그렇게 1시간에 걸쳐 마차를 전부 분해한 뒤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부품을 깨끗하게 닦고 손질해서 넘겨주는 걸 전부 아스펜드에 수납했고, 의외로 용량이 얼마 채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절반 정도는 여유가 있다.”
=아스펜드의 용량이 큰 거니, 마차의 질량이 작은 거니?=
“수납 방식의 차이겠지요. 평범한 주머니에 공을 집어넣으면 부피로 내부 용적을 차지하지만, 아스펜드는 질량으로 내부 공간을 셈하는 듯하니까요.”
=오.=
환인의 설명을 한 번에 알아들은 것은 마도구와 마도기를 만들고 환인의 노트북을 통해 수학까지 깊이 익힌 유르파뿐이었다.
=그럼 자기, 이것들도 넣을 수 있겠어? 마차 예비 부품들인데 무게가 무거워서 애들이 짊어지기 어려울 것 같아.=
그녀가 내미는 마차 부품까지 아스펜드에 수납하니 남은 용량이 1/3 정도로 줄어든다.
아스펜드의 무게 감소율은 100%에 가까워 대형 짐수레 정도 되는 공간의 2/3를 채웠지만, 무게는 조금 무거운 스마트폰 수준.
“남은 자리는 혹시 모를 고가의 부산물 보관 슬롯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도령. 나머지 짐은 전부 애들 등에 실을 거지?=
“그래. 쿠핀의 등에는 운송용 아공간 상자만 올리고 나머지는 반반씩 쿠르티와 쿠라의 등에 올려라.”
=비상이는?=
“비상은 쿠에들을 지켜야지.”
5명의 생활용품과 약 한 달 치 식료품, 쿠에들의 사료에 취사도구와 개인 물품 등을 다 하면 10t 트럭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다.
하지만 세 마리 쿠에의 등에 올려놓은 짐은 8명의 백패킹 준비물 정도의 부피였다.
=휴우~ 아공간 주머니랑 보존 주머니를 틈틈이 개선해놓아서 다행이야.=
마지막 짐을 쿠르티의 등에 올린 유르파가 이마에 살짝 흐른 땀을 닦으며 말하자 옆에서 돕던 이실리테가 쿠에들의 등에 올려진 짐을 보고 감탄한 눈으로 대답했다.
=가방이 간결해지니 아이들의 부담도 많이 줄었네요. 아공간 가방은 전부 새로 만든 거예요?=
=응. 마차를 몰고 있어서 짐의 제약에 영향을 덜 받는다지만 언제 마차를 놓게 될지 모르잖니. 가능한 최적화는 해놓아야지.=
이전에는 다양한 용적의 주머니와 가방을 써서 가지고 다니던 것만 2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린덴 폐촌에서 마차가 부서지는 걸 경험하며 유르파의 생각이 바뀌었다.
혹시라도 마차가 부서지면 이렇게나 많은 가방은 문자 그대로 짐이 될 뿐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 후 우선적으로 아공간과 보존 가방의 개선에 힘을 썼고, 영도에서 비술 실력을 한층 끌어올리며 가방의 용량과 무게 감소를 최적화하는 데 성공했다.
4m * 4m* 4m 사이즈에 무게 감소가 50%나 되는 아공간 가방을 제작해낸 것.
쿠우~
쿠에?
쿠엣.
등산용 백팩 사이즈의 가방을 4개씩 짊어진 쿠르티와 쿠라, 수컷이라 좀 더 건장했기에 운송용 상자를 짊어진 쿠핀이 서로 내 짐이 더 멋있다느니 내 짐이 더 무겁다느니 자랑한다.
등짐용 안장을 채운 뒤에 짐을 올렸기에 다소 활발한 활동에도 안정적인 모습이다.
그걸 바라보던 이실리테가 유르파에게 물었다.
=가방에 빈자리는 어느 정도인가요?=
=절반밖에 안 돼. 거인숲에서 채집하든 나오는 이형종을 잡아서 부산물을 획득하든 꽤 많은 양을 보관할 수 있겠지?=
=그 정도면 확실히 많지만…… 3달이나 보낼 예정인데 충분할까요?=
=부족하면 가방을 더 만들면 되니까. 일단 뭐가 나올지 모르니 음식 재료가 보이면 다 채집해도 괜찮아.=
=아하하.=
자기 생각을 읽은 듯한 대답에 이실리테가 작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짐과 쿠에들의 상태를 점검한 환인은 여자들을 불러 모아 입을 열었다.
“유르파, 그건 준비됐습니까.”
=응? 아, 위치 표시기 말이지. 준비해놨어.=
그녀가 꺼낸 것은 경화 수지로 만든 일종의 나침반으로, 대략 200m 내에서 자신이 있는 방향을 표시해주는 추적기다.
정확히는 자신이 가슴에 달아놓은 마도기의 위치를 추적하는 표시기.
그것과 작은 주머니를 환인에게서 건네받은 백려강이 주머니를 살피며 물었다.
=환인 님. 이 주머니는 무엇인가요?=
“생존 킷이다. 보존 주머니 안에는 5일 치 식량과 식수, 상급 회복제 1개, 중급 회복제 2개, 위상력과 원기 회복제가 각각 1개씩이 들어있지. 식량은 아껴서 먹으면 10일은 먹을 수 있을 양이다. 만약의 사태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방금 나누어준 표시기로 날 찾아와라.”
함정 중에는 밟은 대상을 무작위로 전이시켜버리는 함정도 있었다.
안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모르는 만큼 최소한의 대비는 필요하기에 만들어놓은 준비물이다.
그렇게 입장 준비를 마친 환인은 여전히 추적거리며 비가 내리는 하늘을 잠시 살피고 여자친구들에게 선언했다.
“10분 뒤에 입장한다. 그때까지 쉬도록.”
환인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 유르파는 꼼질거리며 후드 로브를 거꾸로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복장.
=유리 언니, 그 옷은…….=
=자기가 이제 안 입는 전투법사복의 치수를 조정한 거야. 잘 어울리니?=
=오, 잘 어울리는데? 도령이 쓰던 거라 기초 방어력도 보장되어있는 거니까 좋네.=
=유리 언니가 그렇게 입으니까 꼭 숙련된 모험가 같아요.=
=후흐흐.=
여성용 조끼에 셔츠, 검은색 바지에 부츠, 그리고 반코트를 걸쳤으며 작은 주머니가 여러 개 달린 모험가 허리띠를 걸었다.
허리는 물론 커다란 가슴을 밑과 옆에서 꽉 잡아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아웃핏 베스트vest에 두꺼운 반코트로 방어력을 올리고 타이트핏 트라우저를 입어 활동성도 보강한 복장이다.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백발도 이실리테처럼 포니테일로 묶어 올렸기에 모험가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강조된 느낌.
삐이~
완드를 들고 잡담을 나누는 유르파를 구경하던 환인은 발치에 느껴진 감촉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다리에 머리를 비비며 친근함을 드러내던 실루도 그를 올려다본다.
“…….”
삐, 삐이.
말없이 묵묵히 쳐다보는 환인의 시선은 평범한 사람도 주눅이 들기에 충분한 부류다.
당연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실루는 그 시선에 잔뜩 주눅이 들어 꽁지깃을 바짝 내린 채 주춤거리며 뒷걸음치다가 후다닥 이실리테에게 달려가 버렸다.
그걸 그의 어깨에 앉아 지켜보던 환연이 귀엽다는듯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환인. 실루한테 너무 무정한 거 아냐?」
“친해지는 건 나중에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지금은 이실리테나 안느와 친해지는 것이 먼저다.”
「비상이랑 같이 다니는 바람 정령이 한 말 때문에 그래?」
“그럴 리가. 쿠에들을 이끄는 리더는 비상이고 실루가 자라더라도 그건 바뀌지 않는 부동의 서열이다.”
아니더라도 비상이라면 실루를 힘으로 눌러버릴 수도 있을 테고.
「그런 거면 친하게 지내도 되지 않아?」
“비상이 질투한다. 실루가 날 어려워하는 거리가 가장 좋아.”
환인의 대답에 잠깐 묘한 표정을 지은 환연은 쿠에들의 사이에 의젓하게 서 있는 비상을 보며 피식 웃었다.
「몸은 다 컸어도 아직 아이네.」
“그보다. 릴라이스는 아직 다 회복되지 않은 건가.”
「릴하고 연결된 감각을 보면 거의 다 회복되긴 한 거 같은데……. 네가 용 씨하고 섹스할 정도로 가까웠던 게 충격인가 봐. 뭔가 고민하고 있어.」
“…….”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계산해본 환인은 릴라이스에게 자신이 생각한 것의 가능 여부를 물어달라고 부탁했다.
부탁이란 미궁 입구에 일종의 감시기를 설치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가 가까이 오면 신호로 알 수 있느냐는 거지?」
“그래.”
「……물어보니까 된다는데? 부탁권 쓸까?」
직접 대화할 필요도 없는 건가.
“부탁한다.”
환인은 자신의 추측으로 총 두 곳, 많으면 다섯 곳까지 자신을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당연히 라드세아의 주도 라수비탄에 자리한 성궁이다. 흐라스린드의 사건과 성궁 개인적인 관심사, 현친왕과 접촉을 생각하면 단연코 1위 확정이다.
두 번째는 메리아놀의 협의회.
안느의 삼촌이라는 아우반을 생각하면 안느를 데려가려 하거나 접촉해 연을 맺기 위해 사람을 보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다른 이유로는 라수비탄과 마찰을 빚는 이 상황에서 편을 들어주길 바래서.
세 번째는 엘위드리스 가문의 추적.
네 번째는 라드세아의 호족 사회 관련 집단.
다섯 번째는 사비족의 모계 족장사회인 국가 벨티칼.
사실 세 번째부터는 환연이 말했던 것처럼 편집증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 가정이다.
두 번째까지는 확정이라 보지만 세 번째부터 현실성은 60%, 50%, 20%라고 생각하는 것.
‘정확한 정보가 있다면 판단의 결과물도 보다 구체적이 될 텐데 그런 게 없으니.’
특히 다섯 번째는 대성녀가 벨티칼의 움직임이 수상쩍다고 하지 않았다면 가정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 위상류에 미묘한 반응이 일어난 것을 느낀 환인은 강화된 영혼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가 미궁 주변을 정령력이 살짝 뒤덮은 걸 발견했다.
수면에 반사된 빛처럼 일렁이는 푸른색이 정령력이라고 알아차린 것은 환연 덕분이었다.
「환인, 릴이 해준대. 특별히 누가 몇 명이 왔는지도 알려준다네.」
“고맙다고 전해다오.”
이정도로 했다면 할 수 있는 대비는 다 한 셈인가.
잠시 행동을 검토하던 환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비를 막기 위한 천막을 아스펜드에 수납한 뒤 흔적의 뒤처리를 환연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변을 살핀 뒤 여자친구들에게 입을 열었다.
“미궁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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