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 시주르 대평원
대성녀에게 미궁의 위치와 대략적인 개요를 들은 환인은 통신을 종료하고 여자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마침 음식이 다 완성되었는지 접시에 음식을 옮겨 담던 안느가 돌아보며 묻는다.
=도령. 얼른 와서 밥 먹어. 닭갈비랑 그라탕이랑 오믈렛 있는데 뭐 먹을래?=
“닭갈비와 오믈렛으로 부탁하지.”
그녀가 건네주는 치즈 오믈렛과 치즈 닭갈비 접시를 받아 자리에 앉으니 여자친구들도 근처에 모여 앉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환인은 노랗고 폭신폭신한데다 치즈가 주우욱 늘어나는 오믈렛을 먼저 떼어먹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고 통통한 식감에 쫀득하고 고소한 치즈가 멋들어진 하모니를 이뤄낸다.
특히 살짝 짭짤하면서도 씁쓸한 치즈 맛은 체더 치즈와 비슷했는데, 덕분에 심심한 오믈렛의 맛을 밑에서 받쳐주어 치즈나 오믈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안 먹는 것이 좋을 정도의 맛이 완성되었다.
너무 맛있어서 한 번 먹으면 잊지 못해 생활에 지장이 생길 정도였으니까.
“이게 인우족의 우유로 만든 치즈 맛인가…….”
환인이 복잡한 심경을 말로 드러내자 그의 여자친구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가 알게 모르게 인우족의 우유를 피하는 걸 다 알고 있었기에 나온 반응.
새빨간 양념의 닭고기에 오믈렛을 올려 한 입 먹은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키득거리는 것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대성녀님에게 미궁 세 곳의 위치를 들었다. 다만 자료가 갱신되지 않아 세부적인 것은 가서 직접 확인 하는 것을 추천하더군.”
=세 곳이나 돼?=
“관측한 지 300년가량 되는 4급, 5급, 5급 미궁인데 마지막으로 확인한 것이 50년 전이라했다. 셋 다 100년 이상 등급의 변동이 없는 미궁이다.”
=와, 100년…….=
귀부인으로서 교육을 받았던 백려강이 교본에 나올듯한 반듯한 자세로 치즈 그라탕을 떠먹다가 감탄한다.
그런 그녀의 몸가짐과 행동거지를 몰래 관찰하며 습득한 덕분에 몸짓과 손짓에 기품이 조금씩 우러나기 시작하는 이실리테도 포크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 의문을 드러냈다.
=최소 150년은 변동이 없었다는 이야기네요. 미궁이 그렇게 오랫동안 성장 안 할 수 있는 건가요?=
“미궁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환인의 질문에 잠깐 생각한 이실리테는 도시라고 대답했다.
“그 말대로다. 미궁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위상력과 자연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자연력은 시간이 흐르면 쌓인다지만 위상력은 그렇지 못해. 미궁 안으로 많은 생명체가 들어와 활동해야 누적되는 거지.”
=아. 이런 대초원은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고 괴물도 없으니까, 버려진 미궁이 오랜 시간 정체되는 거네요.=
“그래. 대성녀님이 알려준 미궁 세 곳이 그런 곳이다. 100년간 변동이 없기에 위험 요소가 낮다고 생각해 지속 관찰 요망 항목에서 뺀 장소. 단 한 번도 역류가 일어난 적이 없다더군.”
이야기를 죽 듣고 있던 유르파가 설마, 하고 입을 열었다.
=미궁이 고사했을 수 있겠네.=
“그래서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좋다고 하더군요. 위치는 받아서 표시해놨으니 점심을 먹은 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미궁으로 향하겠습니다.”
=도령, 갔는데 미궁이 없으면 어떻게 해?=
“우리가 히스론드로 향한다는 이야기에 그쪽 미궁 상황을 알아놓으시겠다더군. 미궁이 전부 사라졌다면 다시 통신을 넣으면 된다.”
고개를 끄덕인 여자들은 잠시 멈췄던 식사를 재개했다.
일행을 먼저 출발시킨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목적지가 있는 방향을 가르쳐준 뒤 마차의 뒤를 따르면서 마차 이동으로 생겨나는 흔적을 지웠다.
“정령력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꼼꼼하게 해다오.”
「시키니까 할거지만…… 언제까지 할 건데? 얼마나 멀리 있는지 모를 미궁에 도착할 때까지?」
“상황 봐가면서 정하도록 하지. 그리고 감시도 부탁한다. 하늘에서 추적자가 올 수 있다는 걸 염두에 두어야 할 거다.”
「막 부려 먹네.」
“너도 정령에게 시킬 거지 않나.”
「그건 그렇지.」
후미에서 비상을 타고 흔적을 지우며 따라오는 환인의 모습에 백려강은 마차 지붕에서 으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환인 님이 과잉 반응하는 거란 생각이 드는 걸까……?’
흐라스린드의 영주 호족 가문이 망했다는 사실은 권위 의식이 남다른 호족 세계에서 예민하게 반응하기에 충분한 사건이다.
호족 가문의 패망 이유에 누가 있느냐에 따라 호족의 권위를 침범당했다고 여겨 라드세아 호족들이 칼을 빼 들고 뭉칠 수 있는 건수인 것.
하지만 흐라스린드의 영주 사망에 이쪽이 개입한 건 없지 않은가.
주도에서 친왕님이 오시긴 했지만, 환인 님을 공손히 대하신 걸 보면 이쪽이 어지간한 실수를 저질러도 폭력이나 무력을 쓰려 하시진 않으실 텐데.
그것도 그럴게 환인 님이 어떤 분이신지 친왕님이 바로 옆에서 확실히 봤었잖아.
=……저기, 안느 언니.=
자기 머리로 해답을 내기 어려웠던 백려강은 안 되겠다 싶어서 안느를 찾았다.
=계속 끙끙거리길래 뭘 생각하나 했더니 그런 걸 고민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신경이 쓰이는걸요. 환인 님은 꼭 적이 쫓아오는 걸 상정하고 움직이고 계시니까…….=
안느는 백려강의 고민을 듣고 으음, 작게 신음을 흘리며 마차 뒤를 따라오고 있는 환인을 보았다.
=려강이 네가 호족 자녀였다지만, 성장 배경이 배경이라 귀족… 호족 사회는 잘 모르는 거지?=
=사교계 다과회나 만찬장에서 조금 이야기는 듣긴 했지만요.=
=음음.=
잠깐 생각하며 할 말을 다듬은 안느는 그녀가 이해하기 쉽도록 될 수 있는 대로 부드러운 표현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도령의 대비는 내 입장에서 마땅히 할 법한 대처라고 생각해.=
=그런가요……?=
=호족이든 귀족이든 족장이든, 사회 고위층은 변화를 아주 싫어해. 변화란 곧 불안정을 뜻하거든.=
=확실히 그랬던 거 같아요. 목적을 위한 변화가 아닌 것에 신경질적인 분들을 많이 봤어요.=
=응. 사회가 불안정하면 자기 기득권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커져서 그래. 그래서 현 사회에 지장을 주는 불안 요소에 다소 거칠게 반응해. 도령을 만나기 전의 백중강 공자나 백치령을 생각해볼래?=
=…….=
=힘이랑 권력을 가진 자들은 생각을 깊게 하지 않는 편이야. 그래서 불안 요소는 대화 같은 걸로 좋게 해결하기보단 쓱싹해버리는 경향이 커. 힘으로 찍어 눌러버리면 편한데 굳이 먼 길을 돌아갈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생각인 거야.=
후우, 작게 콧숨을 내쉬고는 은색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머릴 긁적이던 안느는 조금 맥없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태도를 증명하는 게 나야.=
=언니가요?=
=난 플뢰지만 도령을 만나기 전에는 키가 지금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어. 그때 내 허벅지가 지금 이슬이 허리보다 더 굵었는데 그만한 근육이 온몸에 붙어있었다면 믿어져?=
허벅지가 사람 허리만 했다는 이야기에 백려강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런 나도 사회의 불안 요소로 취급되어서 거의 도망치듯 메리아놀을 나왔는데 도령을 봐. 힘이면 힘, 인맥이면 인맥, 용하고도 인연이 있고 라드세아의 세 곳 도시는 물론 영도에도 굉장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어.=
게다가 도시의 사회 구조를 통째로 바꿔버릴 만한 지식도 가지고 있다. 여기에 차원 방랑자이기까지 하다.
=아마 호족들한테 도령은 살아있는 폭탄처럼 느껴질걸.=
이런 말을 하는 자신도 호족들이 무식하게 힘으로 달려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사절이든 사신이든 계속 보내서 도령이랑 접선하려 할거고 회유해서 끌어들일 생각이겠지.
중요 포인트는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우리 도령 성격에 그런 회유가 통할까? 무려 자신들이 먼저 내민 손을 내쳐진 호족이나 성궁은 자존심이 크게 상할 테고, 자존심 상한 호족들이 얼마나 저질스럽고 징그러운지는 려강이도 잘 알 거야.=
=네…….=
=그런데 그런 살아있는 폭탄이 흐라스린드 영주 일가의 몰락 사건에 옆에 있었어. 알류겔 호수의 마룡이 나타난 곳에도 있었네? 그런데 조사해보니까 미궁을 건드렸던 흑마술사의 흑마술서가 그 폭탄의 수중에 들어간 거 같아. ……어때?=
안느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백려강의 고운 얼굴이 찡그려진다.
=환인 님이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움직이시는 게 이해 가는 기분이에요…….=
=도령도 극단적인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은 작게 보고 있을 거야. 하지만 일행을 책임지는 리더의 관점에서 최악은 가정할 수밖에 없지.=
대비하지 않고 태평하게 지내다가 뒤통수 맞는 상황을 맞이하기보다, 최악을 대비해서 움직이는 것.
=지금 우리 상황은 최악을 대비해 움직인다 해도 문제 될 게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지 않으면 잘된 거고, 찾아온다면 준비해둔 것이 위력을 발휘할 테니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거네요.=
=응.=
그제야 이해한 백려강은 알기 쉽게 설명해준 안느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언니가 잘 설명해주셔서 이해했어요.=
역시 메리아놀의 공주님이었고 땅신 교단의 성투사를 하셨던 언니구나. 시야를 넓게 보고 예상과 예측을 추리하는 게 남다르다.
=이슬아. 이 언니가 하는 말 잘 들었어?=
=그렇게 우쭐거리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다르게 봤을 텐데.=
=에이~ 또또 수줍어하기는~.=
=하지 않았거든.=
이실리테와 투닥거리며 키득키득 웃는 안느를 조금 존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백려강은 두 손을 깍지 끼고 짐승신에게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부디 환인 님의 앞길에 평온함이 가득하길. 그리고 호족 사회가 환인 님을 적대해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동쪽 지평선으로 뻗어 나아가는 가도에서 벗어나 북상한 지 사흘째.
길이 없는 초원을 달려가는 마차와 그 뒤를 따르며 일행의 이동 흔적을 지우던 환인은 사흘째가 되어서야 흔적 지우기를 멈췄다.
사흘간 일행이 이동한 거리는 족히 250km에 다다른다. 이런 거리까지 뒤쫓을 수 있다면 흔적 감추기는 의미가 없으니까.
“추적자를 대비한 흔적 지우기는 이 정도로 할까.”
사흘 내내 정령을 부려 흔적을 지우던 환연이 지친 표정으로 환연을 흘겨본다.
「환인. 너 진짜 편집증인 거 아니지?」
“글쎄……. 요즘은 아니라고 대답하기 미묘한 느낌이군. 그보다 비행하는 추적자는 안보이나.”
「응. 500m 안에는 안 보여. 하늘 높은 데서 둘러봐도 짐승은커녕 흔적도 없어.」
“…….”
추적자가 없는 것은 다행이지만, 짐승이 없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환인이었다.
동서남북, 어딜 봐도 바람결에 흔들리는 수풀과 잔디와 지평선뿐이다.
이 정도로 넓은 초원이라면 유목민이 있어도 이상할 게 없고, 초식 동물이 떼지어 돌아다녀도 돌아다닐 만한 환경이다.
그리고 초식 동물이 있다면 그런 초식 동물을 사냥해서 먹고사는 육식 동물도 있는 게 당연한 일.
그런데 짐승이 하나도 없다니. 게다가 키사기 말로는 팔라툼과 투라드 사이에 정체 모를 괴물이 출현한다고 하지 않았나.
마부석으로 비상을 몰고 간 환인은 이실리테와 교대해 마차를 모는 안느에게 말했다.
“날아서 주변을 돌아보고 오지. 미궁도 찾을 겸 한 비행이니 늦어도 1시간은 걸리지 않을 거다.”
=어. 우린 계속 이 방향으로 가?=
“그래.”
대화를 끝마치자 말을 할 것도 없이 비상은 형식적인 두 차례 도움닫기 뒤 하늘로 훌쩍 날아오른다.
내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익숙해지질 않는 감각과 함께 삽시간에 작아지는 마차.
「봄이라고 이제 바람이 아프지 않네.」
“그래.”
순식간에 수백 미터까지 고도를 높였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여전히 초원과 지평선뿐이다.
대체 이 시주르 대평원은 얼마나 넓은 걸까.
이때까지 봤던 대평원은 구릉지도 있고 자그마한 언덕 등이 곳곳에 있어 원근감이 이상해지지는 않았는데 이곳은 정말 일一 자 지평선뿐이라 눈이 이상해지는 느낌이다.
오랜만에 하늘 높이 올라와서 좋은지 재잘거리는 환연의 이야기에 그래, 그렇군, 그런가 대충 장단을 맞춰주며 지상을 살펴보지만 살아있는 동물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안 보인다.
강화 영혼 시야를 열어 지상을 살피고 지평선을 돌아봐도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동물들의 대이동 이후에 공백지가 되어버린 건가.’
속으로 자신의 지식 안에서 설명되는 가설을 생각하던 환인은 신발 뒤꿈치로 비상의 배를 가볍게 건드리며 지시를 내렸다.
“비상, 저쪽으로 가자.”
꾸우~!
쐐애애애액—
비상이 바람으로 보호막을 펼쳐주었음에도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선명할 만큼 빠른 비행 속도.
환인은 조금 더 집중해 미궁 찾기를 시작했다.
길에서 벗어나 사흘간 북상했다. 슬슬 대성녀가 알려준 첫 번째 미궁이 보일 때인데…….
「환인. 저쪽 땅.」
뀻!
근 30분을 수색하던 환인은 둘이 동시에 같은 것을 발견했는지 한 지점을 가리키기에 그쪽을 돌아보았다.
“……저게 미궁 입구인가.”
그리고 벌레가 살을 파먹은 것처럼 지면에 뚫린 갱도 입구 같은 것을 발견했다.
“내려가 보지.”
환연과 비상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발견도 못했을 만큼 은밀하게 구멍을 드러낸 미궁 입구.
돌출면이 전혀 없는 데다 근처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수풀이 가리고 있다. 대강의 좌표만 듣고 걸어 다니며 찾으려 한다면 수십 일은 시간을 낭비했을 형태다.
환인은 입구를 천천히 살폈다.
폭은 4m 정도며 좌우 벽과 천장은 바위처럼 굳은 흙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은 돌계단이 형성되어있어 미궁이 성장할 만큼 성장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성장이 미숙한 미궁은 내부 형상부터 먼저 잡기에 입구까지 미궁 변화가 닿지 않는 법이니까.
강화 영혼 시야로 보니 안개 같은 기운이 일렁이며 계단 안쪽에 모여있다.
그의 어깨 위에서 같은 것을 들여다보던 환연이 소감을 말한다.
「흠. 이 미궁에서는 별로 끔찍한 냄새가 안 풍기네.」
“그런 게 느껴지나.”
「응. 내가 태어났던 미궁은 땅속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싫었어. 많은 괴물 냄새가 막 섞여 있기도 했고. 그런데 여긴 뭔가 상쾌해.」
“격리 변화형 지하 미궁인 것 같은데 그 때문인가.”
「격리 변화…… 다른 차원에 한 발 걸쳐져 내부가 밖이랑 완전히 다른 미궁 말하는 거지?」
영도에서 살펴본 미궁 관련 서적으로 얻은 지식에 따르면, 미궁의 종류는 굉장히 다양하다.
웨이포드의 빛이 닿지 않는 미궁이나 헬루멘 근처의 폭군룡 미궁처럼 그냥 땅속으로 평범하게 형성된 미궁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처음 트립되었던 삼림형 미궁처럼 아예 자연 속에 펼쳐져 있는 미궁도 존재한다.
산란못 미궁처럼 자연 속에 있지만 불가사의한 힘에 의해 안과 밖이 나뉜 곳도 있고 파르히스트의 감옥 미궁처럼 입구의 ‘막’을 통과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격리형 미궁도 있다.
격리형 미궁 중에는 격리 변화형 지하 미궁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파르히스트 감옥 미궁처럼 입구의 막을 통해서만 입장할 수 있으며 안쪽 형태는 바깥과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땅속인데 바다가 나올 수 있고 하늘이 나오고 고산지가 나올 수 있고 그런 것이다.
그렇게 기초적인 미궁 종류가 결정되면 내부가 계층형인지 합층형인지로 나뉘고 미궁의 성장에 따라 강화 계층이 등장할 수도 있고 형태와 다양성이 말 그대로 천차만별인 것.
「환인. 안에 들어가 볼 거야?」
“아니. 미궁이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돌아간다. 그전에 대강 내 키 높이 정도 되는 흙 언덕을 만들어놓지. 이곳을 찾기 쉽도록.”
「알았어.」
그 후 비상과 환연의 시력에 의존해 마차로 돌아온 환인은 예상보다 미궁이 더 멀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돌아올 때는 거의 마하에 가까운 속도로 날았는데 그러고도 10분가량이 걸렸으니 마차에서 180km가량 떨어져 있다는 이야기니까.
10분 동안 전력을 다해 비행해서 할딱이는 비상에게 원기를 주입해주고 있으니 안느가 머리를 긁적이며 묻는다.
=그럼 적어도 이틀은 더 가야 한다는 거네?=
“그래.”
비포장인데다 노면이 정리되어있지 않은 초원이라 이동 속도가 무척 느린 탓이다. 길이 있다면 180km 정도는 속도를 좀 높였을 때 하루면 충분하니까.
그 시간이 아까운지 안느가 작게 혀를 내두른다.
=날아서는 넉넉잡고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인데 마차를 타고는 이틀을 가야 한다니, 시간 낭비가 엄청나게 느껴지네.=
=걸어서는 사흘 넘게 걸릴걸.=
이실리테의 짧은 대답에 안느는 앓는 소리를 흘렸다.
=끙. 이러니까 조인족이나 플라비우스족이 정찰과 순행으로 주목받는 거겠지. 프라버의 하늘 기사단이 중부에서 손꼽히는 강력한 기사단인 이유도 그거 때문일 테고.=
품에 안은 실루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안느는 문득 든 생각에 환인이 타고 있는 비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불한당의 기운을 느낀 비상이 눈썹을 치켜뜨곤 부리로 그녀의 허벅지를 마구 쪼아대기 시작했다.
장난으로 쪼는 게 퍽, 퍼벅! 타격음이 제대로 날 정도로 강한 부리 쪼기다.
피멍이 들 것 같은 쪼기에 기겁한 안느가 황급히 지붕 위로 피신하며 항의한다.
=야! 비상이 너 왜 언니를 쪼는 거야!=
꾸우! 뀻!!
그런 안느를 향해 비상이 화난 얼굴로 꾹꾹 우니 환인은 피식 웃으며 비상의 머리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는 한편 안느를 나무랐다.
“그런 생각을 하면 쪼일 만도 하지. 이번에는 네가 잘못했다.”
=잉.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찔끔했지만 설마 비상이 자기 생각까지 읽었을까 싶어 딴청을 피운 안느였으나, 이어진 환인의 이야기에는 용서를 빌 수밖에 없었다.
“비상에게 알을 낳게 해서 녹색 쿠에 편대를 만들 생각을 하지 않았나.”
=윽…… 그건 미안해. 날아다니는 게 워낙 편리하고 유용해보니까 그만. 그래도 직접 말은 안 꺼냈잖아?=
뀨앙~!
날개를 활짝 펴서 위협하는 비상의 행동에 움츠러든 안느는 곤란한 표정으로 환인에게 물었다.
=비상이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말로 꺼냈으면 용서 하지 않았을 거라는군.”
=…….=
그냥 생각으로 끝내서 다행이다. 안느는 속으로 안도하면서 비상을 흉내 내 삐앙~ 울며 자기 밑가슴을 콕콕 쪼는 실루를 진정시킨다.
그 헤프닝에 작게 실소를 흘린 이실리테가 환인에게 물었다.
=주인님. 지금 가는 미궁은 어떤 곳인가요?=
“내부에 변화가 없고 대성녀님이 준 정보가 맞는다면 거인숲 미궁일 거다. 등급은 5급일 테고.”
=거인숲 미궁……. 듣기만 해도 안이 어떤 풍경인지 연상되는 이름이네요.=
마차의 마부 보조석으로 자리를 옮긴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모든 것이 거인에 맞춰져 있는 숲이라고 하니.”
둘의 대화에 실루의 자그마한 붉은 부리를 잡고 =사람을 쪼면 안 돼.= 훈육하던 안느가 끼어들었다.
=숲이면 식생도 형성되어있을 테니까 식량은 부족하지 않게 구할 수 있겠네. 지금 우리 식량이 며칠 분 남았더라?=
=투라드에서 조금 보충한 걸로 35일 분량이야. 맛을 신경 쓰지 않고 재료를 전부 먹을 거로 만들면 61일 정도는 될 거로 생각해.=
=그 정도면 채집이랑 사냥을 병행하면 3달은 충분히 버티겠네.=
=응. 모든 게 거인에게 맞춰져 있다면 야채도 굉장히 클테니까. 맛은 어떠려나. 크기만 크면 맛이 없을텐데.=
=그래도 버섯은 큰 게 나오면 좋겠다. 흐라스린드에서 먹었던 황금 버섯 스테이크 진짜 맛있었는데…….=
=맞아. 나랑 주인님이랑 려강은 사람 크기만 한 펑거스 로머도 먹어봤어.=
=헉, 진짜? 어디서? 무슨 맛이었는데?=
=소도시 웨이포드의 미궁에서. 황금 버섯보다는 맛이 좀 옅지만, 특유의 시원한 향이 굉장히 매력적인 느낌이었어. 식감도 뽀득뽀득했고.=
=부럽다…….=
여자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환인은 다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 미궁이 그대로 거인숲 미궁으로 남아있다면 그 영역은 무척이나 거대하겠지.
지상에 짐승이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환연이 입구에서 상쾌한 냄새가 난다고 했을 정도다. 냄새에 민감한 초식 동물이라면 충분히 그 냄새에 이끌릴 수 있겠지.
그런 식으로 초식 동물이 미궁으로 다 사라지면 육식 동물도 그 뒤를 쫓아 미궁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먹이가 사라져서 다른 곳으로 떠났을 터.
그러면 이 정도로 거대한 공백지가 생길 수 있을 거다.
그때 잠깐 뒷머리가 근질거린 환인은 뒤돌아 하늘을 쳐다보았다.
강화 영혼 시야를 펼쳐 안력을 힘껏 돋워도 무언가가 날아다니는 것은 안 보인다.
기분 탓인가.
……환인은 기분탓으로 넘기지 않고 노파심에 환연에게 재차 확인했다.
“환연. 하늘 잘 감시하고 있겠지.”
「응. 바람 정령들 시켜서 사방팔방 확실하게 주시하고 있어. 왜?」
“……아니다. 사소한 거라도 나타나면 바로 이야기해라.”
「걱정하지 마. 확실하게 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보조석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바짝 조여진 정신을 조금은 풀었다.
이틀 뒤면 미궁 안에서 다시 바짝 긴장을 조여야 할 거다. 그때를 위해 지금은 머리를 조금 쉬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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