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 시주르 대평원
* * * *
=은인님. 이것은 저희 유지들이 은인님께 드리는 사죄와 감사의 마음입니다. 부디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투라드 마을의 사도는 유지들에게 반자발적인 수금을 통해 성의를 듬뿍 담은 주머니를 검은 머리카락의 미남자에게 공손히 바쳤다.
분명 마을로 들어올 때는 갈색 머리카락의 하프 플뢰였던 거 같은데…까지 머릿속에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 즉시 찍어눌러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다.
“……받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이 곤란해지시겠군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떠날 준비를 마친 남자가 조용히 주머니를 받아 가는 모습에 사도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며 심장이 쿵덕쿵덕쿵덕 뛰었다.
역시. 이 남자…… 아니, 이분은 이런 촌구석까지 이름이 알려진 성제님이 틀림없다.
도무지 평범한 여행자 같지 않은 언행과 품격, 그리고 이런 촌민에 대한 눈치 빠른 배려까지.
그런 분께 저질렀던 무례가 차르륵- 머릿속으로 지나가니 한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할 지경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궁으로 갈 때는 없었는데 오면서 데려온 약간 푸르고 하얀 여자의 정체를 확신했다.
‘역시 용이 틀림없어……!’
이틀 전, 환인이 흑마술사를 처단하러 떠난 뒤 사도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저주 폭탄이 발견되어 불안에 떠는 마을 사람들을 다독였다.
그러다 갑자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피해 어느 집 처마 아래로 몸을 피했는데, 하늘이 노한 것처럼 1초가 멀다 하고 뿌려대는 벼락의 비에 불안감으로 꼬리털이 빠질 만큼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꼈다.
이 근처는 폭풍도 1년에 두어 차례 불까 싶을 만큼 평온한 지역이다.
벼락도 몇 년에 한 번, 멀리서 들려오는 우르릉 소리만 들릴 정도인데 1분 1초가 멀다 하고 세상을 가르는 벼락이라니.
꽈광!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귀청을 터트리는 듯한 마지막 벼락이 내리꽂힌 뒤 비가 그치며 시야가 열렸을 때, 서쪽 하늘을 본 사도는 진흙탕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두컴컴한 먹구름 낀 하늘을 밝히는 거대한 백색 용 한 마리.
원근감이 이상해질 만큼 거대하던 용은 잠시 후 사라졌지만, 그 용이 나타난 방향이 방향이었기에 사도는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걸 다스릴 수 없었다.
흑마술사가 자리 잡은 미궁 쪽에서 용이 출현하다니, 우연인가? 그리고 백색과 청색의 용이라면 저 알소프를 망하게 한 마룡일 텐데 그 용이 왜 우리 마을 근처에??
집으로 돌아온 사도는 제발, 용의 출현이 우리 마을과 연관이 없길 속으로 빌고 또 빌며 억겁 같은 1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을의 처녀들을 살려주고 마을을 위기에서 구해준 남자가 하얗고 푸른 여자와 함께 돌아왔을 때는 오줌을 지릴 뻔했다.
숨기고 있다지만 느껴지는 격이 다른 위압감.
아우라가 전혀 없음에도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을듯한 존재감.
90년의 삶을 통해 얻은 경험은 저 여자가 좀 전에 나타났던 용이라고 부르짖고 있었던 것.
갑자기 나타나 마을을 구원해준 남자…… 은인님은 대체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어떤 사람이든 장난이 아니다. 사도는 환인 일행을 귀빈 접대용 주택에 안내해준 뒤 곧장 유지들을 불러 모아 다그치고 닦달했다.
=각자 가진 여윳돈을 전부 가져오게, 얼른!=
=아니 어르신. 갑자기 불러서는 돈을 내놓으라 하시면 어떡합니까? 적어도 이유는 말씀해주셔야지요.=
=은인, 은인님께 드릴 공물이니 잔말 말고 얼른 가지고 와!=
=공물이라뇨? 무슨 공물이라는 말이에요?=
=자네들은 저 하늘에 나타났던 용을 보지 못했나?! 아까 은인님과 함께 왔던 희고 푸른 여자, 그 여자는 용임이 틀림없어! 그게 뭘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되나?! 우리 마을 목숨은 폭풍우 속의 등잔불이나 마찬가지야!=
숨이 넘어갈 것처럼 펄펄 뛰는 사도의 모습에 유지들도 안색이 변해 웅성거렸다.
용이 나타났었어!?
내,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었구먼.
진짜요? 용이 나타났다고요?
지릴 것처럼 쏟아지던 벼락이 그치길래 밖을 내다봤더니 용이 보이더라고…….
유지들은 그제야 사도가 반쯤 실성한 것처럼 펄펄 뛰는 이유를 깨닫고 서둘러 집으로 가 금이며 보석, 금화 등을 바리바리 싸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사도가 아공간 주머니에 그걸 전부 담는 것을 얼이 빠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 아공간 주머니는 흐라스린드에서 영주님께 하사받은 거라고 자자손손 가보로 삼을 거라 했던 거 아닌가?
사도 어르신도 저런걸 내놓으신다면야 뭐.
그렇게 공물을 마련한 사도는 차마 환인 일행의 휴식을 방해하지 못하고 초조함에 벌벌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냥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딸과 손녀를 보내 그분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수발을 보내 트집잡힐 일이 없도록 애를 쓴 것은 당연한 일.
사도는 이쪽의 공물을 받은 뒤 품위 있는 인사를 남기고 떠나가는 남자, 성제님과 그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들의 모습이 안 보이게 되어서야 푸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유지들을 끌고 손님용 주택으로 달려가 방을 샅샅이 살폈다.
없다.
없어!
사도는 삽시간에 몇 년은 늙은 얼굴로 유지들에게 당부했다.
=자네들…… 기억해두게. 우리는 촌무지렁이들이라서 아무것도 몰라. 번개가 마구 치던 날 무서워서 밖을 내다보지 않았고, 아무것도 못 봤고, 아무것도 모르는 게야. 방금 떠난 은인님들은 그냥 갑자기 나타나 우릴 구해주고 떠나신 걸세.=
=예? 사도 어르신, 그게 무슨.=
=알겠나?! 누가 어제와 그저께 있었던 일을 물으면 우리는 무지렁이라서 모른다고 잡아떼!=
마치 조증에 걸린 것처럼 버럭 고함지르는 사도를 곤혹스러워하던 유지들. 그들 사이에 있던 마을 순찰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르신. 대체 뭘 그렇게 무서워하시는 겁니까? 조금 이상하게 보일 정도입니다.=
=이 순진하고 아둔한 친구야……. 용일세, 용!=
=……예?=
사도는 이야기해주었다. 그저께부터 지금까지 후각을 총동원해 마을 내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그 하얗고 푸른 여자는 마을에 들어오기만 했을 뿐 나가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방금 떠날 때도 일행에 없었고! 그게 뭘 뜻하겠나?!=
=……!=
=무려 용과 친분을 가진 분들일세! 우리 같은 촌놈들 따윈 한 손으로 쓸어버릴 정도의 세상에서 온 사람들이란 뜻이야!! 저 주도의 까마득히 높은 분들이나 귀동냥으로 접할 만큼 어마어마한 용!! 모습을 드러냈다간 수십 년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용이란 말이야!! 그런 용과 친밀한 사람이……! 쿨럭, 쿨럭쿨럭!=
유지들은 귀기 어린 기세로 버럭버럭 고함지르는 사도의 패기에 얼어서 입도 뻥긋 못하다가 그가 기침을 크게 하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에 황급히 부축해서 물을 먹여주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허억, 허억……. 우, 우리는 지금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네. 우리 중 누가 입 한번 잘못 뻥긋하면…… 다 죽을 수도 있는 일에 얽힌 게야…….=
=…….=
=…….=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 자네들도 들어봤겠지……. 그래서 말은 못 해주겠지만…… 이거 하나는 기억해두게.=
=듣고 있습니다…….=
=…내 예상이 다르지 않다면, 이제부터 마을에 평범한 척 분장한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올 거야. 쿨럭쿨럭. ……그 사람들이 슬쩍 지나가듯이 어제와 그저께 일어났던 일을 묻거들랑…… 범상치 않은 사람 같아서, 무서워 보이는 사람이라서 말도 못 걸었다고 하게. 얼버무리기를 못하겠다면, 그냥 내게 보내고.=
유지들은 한겨울에 강물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오한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걸 느꼈다.
마을에서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사도다. 그들 중 유일하게 도시에서 아카데미 교육까지 받았던 사람이고 영주님이 마을을 다스리라며 보낸 관리니까.
이때까지 아무 문제 없이 마을을 60년 가까이 다스려온 사도 어르신이 저럴 정도라면…….
=알겠나? 저분들은 키사기와 유피를 우연히 만나 우리 마을의 위험을 알게 되었고, 마을로 오셔서 흑마술사를 잡아주고 떠나신 모험가님일 뿐이야. 그 외에는 모른다고 잡아떼게…….=
=알겠습니다. 몸이 안 좋아 보이시니 그만 돌아가 쉬십시오. 티란, 사도님을 집으로 모셔가거라.=
=네…….=
사도가 후계로 키우는 손녀에게 부축받으며 돌아간 뒤 그 자리에 남아있던 유지들은 심장이 차갑게 식는 걸 느끼며 서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배우지 못해 아둔하다지만 지혜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사도 어른이 말한 사람들이 온다면 그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게 말을 맞춰놔야지.
그 일이 원인이 되어 사도는 얼마 가지 않아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지만, 유지들은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며칠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 * * *
마을 동문을 나와 히스론드의 주도를 향해 길을 따라 나아가던 중 안느가 환인을 불러 물었다.
=있잖아 도령. 사도 할아버지가 뭔가 주던데 뭐였어?=
“대강 60 금화 정도가 든 소형 아공간 주머니다.”
=엥? 저렇게 작은 마을에 무슨 돈이 있다고 그렇게나 준 거래?=
환인은 줄곧 자신에게 두려움을 내비치던 삽살개 머리 노인의 눈동자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삶의 연륜이겠지.”
=응……?=
“아드네빌라와 이쪽의 정체를 대강이나마 눈치채곤 흑마술사와는 결이 다른 위험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린 것 같더군. 연륜에서 오는 직감이라고 보아야겠지.”
=결이 다른 위험이라면…….=
혹시 하고 묻는 이실리테에게 환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용의 흔적을 알아차리고 뒤쫓을 사람들. 어쩌면 우리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 사도가 준 것은 우리가 평범한 여행자나 모험가가 아니라는걸 깨닫고 원한을 사지 않기 위해 바친 공물이라고 해석하면 될 거다.”
=아.=
=그러면 키사기나 유피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거야?=
안느의 응당 할 법한 걱정에 환인은 그저께의 비와 벼락이 모든 구름을 다 걷어버린 것처럼 푸르기 짝이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들에게 우리 정체를 알려줬었나.”
=응? 아니. 이름도 안 알려줬어. 그 아이들도 우리를 그저 은인님, 언니 하면서 불렀고.=
=그럼 상관없을 거다. 오히려 우리가 그 마을에 계속 머무르는 게 더 그들에게는 더 위험하겠지.=
=환인 님. 그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마차 지붕에서 유르파에게 빌린 술법서를 읽던 백려강이 대화에 관심을 나타낸다.
“날 쫓는 쪽이든 용과 초월급 정령의 파장을 느끼고 접근하는 자들이든, 만만치 않은 인물들일 거다.”
이쪽은 유일 직업인 등급 미상의 영혼사에 희귀 직업인 영혼 기사가 둘이나 있다.
만약 뒤를 쫓는 자들이 싸움을 상정하고 있다면 이쪽 전력과 맞붙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을 텐데…….
“이실리테나 안느가 비슷한 실력자와 마을에서 싸움을 시작한다고 가정하면 마을이 어떤 꼴이 될지 짐작이 가겠지.”
=네…….=
“그 싸움의 여파에 살아남더라도 찾아온 집단의 성격이 악 쪽에 치우쳐져 있다면 자신들의 실력을 봤다는 이유로 마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는 흑마술사를 넘어서는 재앙.
백려강도 그렇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환인의 가정에 반박하지 못했다.
봐선 안 될 걸 본 사람을 죽여 입을 막는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 아이들은 무사했으면 좋겠는데.=
“그 마을의 사도는 현명해 보였으니 잘 대처할 거다.”
=응…….=
대처하지 못한다고 해서 이쪽이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들을 보호하자고 투라드 마을에 언제까지고 머무를 수도 없는 일이고, 머물러도 환인이 말한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그냥 아무 일 없을 거라 믿고 떠나는 수밖에.
해가 머리 위로 올라왔을 무렵, 도도하게 흐르는 사파이어 빛 강 근처에 마차를 세운 일행은 점심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율이 언니, 난 애들 물 좀 먹이고 올게.=
=응. 이슬이 아가씨? 실루한테는 뭘 먹이는 게 좋아?=
=태어나고 2일까진 뭐 안 먹여도 괜찮아요. 우리가 먹는 것에 관심을 보이면 달걀 삶은 걸 으깨서 먹여도 되고 아니면 쿠라한테 보내 쿠라가 챙겨주게 해도 되고요.=
=그래? 희한하네. 실루야~ 넌 배 안고파~?=
삐이~?
=이실 언니. 점심은 뭘 만드실 거예요?=
=치즈 닭갈비랑 치즈 그라탕, 치즈 오믈렛을 만들 거예요.=
=고기손질 도와드릴게요!=
=부탁해요.=
여자친구들이 쿠에들을 풀어서 강물을 마시게 해주고 점심 식사를 마련하는 사이 환인은 영도의 대성녀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수정구는 횟수 제한이 있는 통신이다.
상대가 자리에 없어 양방향 연결이 되지 않으면 짤막한 글귀, 그러니까 스마트폰의 문자 정도만 남겨야 하는데 그리되면 횟수를 낭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대화를 이어가려면 연락할 시간을 맞춰놓아야 하고, 대성녀와 이야기를 맞춘 시간은 정오였기에 이 시간이 되길 기다렸다.
“유르파, 부탁합니다.”
=응~.=
실루를 품에 안은 유르파가 다가와 수정구에 위상력을 흘려 넣자 수정구가 푸른 빛을 내기 시작한다.
느릿하게 박동하는 푸른빛. 그 빛이 1분가량 이어졌을 때 수정구 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 위로 난 자그마한 기린 뿔. 은은한 금발에 살짝 웃음을 머금은 미소녀의 부드러운 얼굴.
“대성녀님. 오랜만…….”
[성제. 당신이 가는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인 듯하오.]
“……입니다. 그런데 화가 많이 나신듯 하군요.”
웃는 얼굴로 화를 내는 모습은 무섭다거나 위압감이 넘치는 게 아니라, 여동생이 투정 부리는 듯한 감상밖에 들지 않는다.
환인의 작은 웃음이 닌실은 불만인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가 표정을 풀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게 말을 끊은 것을 사과하겠소. 오늘 아침, 신기하게도 누군가가 지나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서 해왕 아드네빌라가 현신하여 초월급 정령과 싸운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지 뭐요.]
“그랬습니까.”
[머릿속에서 그 누군가가 또 무언가 사고를 당한 것은 아닌지, 사건에 휘말린 것은 아닌지 뿔이 징징 울릴 만큼 고민하고 있다 보니 이게 웬걸. 그 누군가에게서 통신이 온 게 아니겠소.]
사과했지만 말하다 보니 다시 속에서 울컥거리는지 뾰족한 말투가 나오는 닌실.
환인은 실소하면서 최대의 후원자이자 후견인인 신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으음. 흑마술사가 장악한 미궁…….]
“사건은 잘 해결되어 초월급 정령은 환연과 약식 계약을 맺었고 아드네빌라는 돌아갔습니다. 흑마술사가 입수한 것으로 보이는 흑마술서도 봉인해서 교단으로 가져가는 길이니, 걱정하실 일은 없습니다.”
그녀가 불과 이틀 만에 이쪽 소식을 접한 것이다. 이쪽의 행적이 너무 강렬하게 남은 것 같지만 적어도 지금은 걱정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환인의 숨은 뜻을 꿰뚫어 본 닌실은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행적이 너무 강렬하오. 라수비탄의 성도는 물론이고 그대의 소식이 벨티칼에도 전해졌는지 알류겔 호수 동부에서 기묘한 움직임이 보인다는 소식이 들려온 참이니. 혹시 이 소식도 들었소?]
“어떤 이야기 말씀이신지.”
주도의 성궁에서 뭔가 이야기가 나온 건가.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하나를 꼽기 어렵다.
가장 가능성이 큰 거라면 아드네빌라를 토벌하겠답시고 병력을 보냈다가 다 털린 어떤 멍청한 도시의 영주와 관련된 일뿐인데…….
[헬루멘의 영주 시하 사이지의 출산이 임박했다 하더군. 듣기로 세쌍둥이라던가.]
……예상을 초월하는 내용에 잠깐, 환인의 사고가 멈추었다.
[프라버의 군 사령인 백치령도 처녀의 몸으로 임신하였는데 두 여인의 남편이 한 남자란 소문이 무성하다는군.]
“…….”
[파르히스트 - 프라버 - 헬루멘 삼각 교역이 곧 시작되어 라드사에 서북부~서남부를 아우르는 일대 세력으로 급부상하기 시작한단 정보도 들어왔소. 어떻게 생각하시오?]
환인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매를 매만졌다.
시하=사이지=위르트 영주가 임신? 그것도 세쌍둥이라니, 거기다 백치령까지…….
이실리테의 요리 보조로 열심히 음식 재료를 손질하는 백려강을 잠깐 보았다가 양 눈 사이를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절 당황스럽게 할 목적이었다면 성공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걱정이 묻어나던 소녀의 얼굴에 작지만 미소가 흘러나왔다. 한 방 먹여줘서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이다.
환인의 당황은 거기서 끝났다.
시하 사이지와 백치령 사이에 있었던 일은 어디까지나 상호 간에 합의가 있었던 일이다.
그만한 지위의 여성들이 피임을 할 줄 몰라 임신했고 출산을 앞두고 있다? 환인은 믿지 않았다.
가능성이 큰 쪽은 자신을 향한 애정 약간에 자신의 아이를 가지는 것으로 이쪽과 끊어지지 않는 연을 맺기 위한 목적이겠지.
닌실은 흠흠 표정을 고치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성제가 당황하는 걸 보고 싶단 마음도 있었지만, 그대에게 알려주어야 할 내용인 것은 맞소. 삼각 교역의 주축은 헬루멘의 시하 사이지 영주로 그녀가 대영주로서 프라버의 백중강 영주 대리와 파르히스트의 펜리 후스티오 영주와 손을 잡았으며 그 변화는 주도의 성궁에서도 주의깊게 지켜보고 있는 사항.]
“그들의 행보에 따라 라수비탄의 성궁에서 절 어떻게 대할지 정해지겠군요.”
[맞소. 세 도시의 혈맹이 원활히 이어진다면 필연적으로 그대의 자식들이 다음 세대의 주축이 될테고, 그리되면 그 아이들의 부친인 성제가 강대한 힘을 쥐게 될테니 말이오.]
환인의 생각이 깊어졌다.
세 곳 도시가 동맹을 맺었다고 주도가 위기감을 느낀다는 게 맞는 걸까.
영도의 기록실에서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주도의 역량과 전력은 주도 외 다른 도시 전부와 맞서 싸울 수 있을 정도라 보았다.
시하=사이지와 백중강의 성격이라면 불리한 전투는 하지 않을 테지만, 만약 성궁이 약간의 가능성마저도 봐주지 않고 짓밟으려 한다면…….
이건 최악의 경우를 가정했을 때의 이야기. 현친왕이라면 자신과 서부 동맹 세력을 적대하기보단 자신에게 손을 뻗어 우화책을 쓰려할 것이다.
물론 똑똑한 사람들이 모이면 평균 지능지수가 떨어진다는 속설대로 성궁이 병신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대비해야하는 것은 그런 최악의 상황.
‘성궁은 아드네빌라와 마찰을 빚으려 들지 않았었지.’
현친왕이라 불리던 호천명의 행동을 생각하던 환인은 닌실에게 진지하게 질문했다.
“대성녀님. 솔직하게 대답해주십시오. 아드네빌라의 힘은 어느 정도입니까.”
[……인간의 등급제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무력으로 보자면 12~13급 정도이지 않을까 싶소. 천원 쪽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지상에서는 그녀를 이길만한 존재는 한 손에 꼽겠지. 소녀도 비록 비전투 계통이나 11급은 될 거로 생각하오.]
인간의 등급은 10급이 최대이지만, 그걸 뛰어넘는 강함의 척도가 있다는 말인가.
아드네빌라는 자신을 8급이라 했었다. 인간사에 해박한 그녀의 이야기니 틀릴리는 없겠지.
하지만 자신은 유일 직업자. 유일 직업의 8급이 평범하거나 희귀 직업자의 8급과 같을까.
거기에 더해…… 심핵력이 지금의 3배까지 늘면 아드네빌라와도 한 번 싸워볼 만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이긴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맥없이 지지는 않을 정도라는 이야기.
아직은 불명확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실현 불가능한 영역은 아닌 감각적인 느낌이다.
그걸 느끼게 된 이유는 하나, 그녀가 주었던 심핵력의 기술서 때문이었다.
위상력과는 다른 힘. 그러면서 온갖 분야에 접목하여 위력을 드높이는 기적의 에너지. 직접 에너지화해 공격에 쓸 수 있고 다른 기술에 섞어 위력과 효과를 뻥튀기할 수도 있다.
심핵력은 미궁의 근원, 그리고 미궁의 근원은 세상의 자연력이라고 하니 이런 말도 안되는 광범위한 운용이 가능한 걸까.
아무튼.
‘심핵력으로 역쇄류와 위상류를 강화해 물리적, 마력적 대비를 강화하고 다수의 적색, 흑색, 청색 혼옥을 확보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강함만 갖추어도 주도의 위협 정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더는 니오네브레스에서 군대나 인간의 무력을 우려해 피하지 않아도 된다.
최악의 관계가 형성되어 저들이 이쪽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보내더라도, 저들은 전력을 보낼 수 없다.
군 병력은 전쟁 외에도 쓰이는 곳이 많으니까.
그걸 감안한다면 저들이 보낼 수 있는 최대 전력은 라수비탄 총 전력의 1/5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만 해도 도시 몇 개급의 전력이겠지만, 그쯤은 아드네빌라의 힘을 생각했을 때 그녀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상태라면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첫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다면 저쪽의 전력은 대폭 감소해 그 뒤로 보낼 수 있는 병력에 크나큰 제약이 생길 터.
소모된 전력은 단번에 회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니 그사이 자신이 기습과 테러를 시행한다면 본진마저도 털어버릴 가능성이 생겨난다.
문제는 이걸 주도도 파악하고 있을 게 틀림없고, 자신을 견제할지 손을 내밀지 고민하고 있을거란 거다.
‘현친왕의 방문. 아드네빌라와 회견. 그사이 있었던 대화. 나와 그녀들의 관계.’
이쪽의 역량이 어느 정도 성궁의 주인에게 흘러 들어갔다고 봐야 할 테니…….
환인은 자기 생각을 읽는 것처럼 수정구를 통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닌실에게 부탁했다.
“대성녀님. 부탁이 있습니다.”
[성제께서 어떤 부탁을 하실지 궁금하군.]
“이 지역의 미궁 정보를 전부 넘겨주십시오.”
[저, 전부?]
아드네빌라는 자신에게 너무 급격히 성장한다고 경고했었다. 빨리 달릴수록 넘어졌을 때 크게 다칠 거라고 말이다.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걸 알아도 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지.’
그리고 그건 지금이다.
힘을 키우는 것으로 라드세아 주도의 성궁도 간단히 견제할 수 있고 메리아놀의 소환자 집단도, 예언자 집단도 다 해결된다.
환인은 이 기회에 1타 2피를 노려볼 생각으로 눈빛을 서늘하게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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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엘위드리스 가문: 가문이 망한다는 미래시에 몸사리는 중
라수비탄 성궁: 그 미래시를 알게 되어서 머리빠지도록 고민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