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 투라드 마을
예정하지 않았던 하루의 휴일이 발생하자 환인의 여자들은 각자 알아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유르파는 환인의 부탁에 따라 자신의 체질 조사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고 백려강은 그런 유르파의 곁에서 업무를 보조하며 기술을 배운다.
이실리테는 마을에서 배추와 고추에 마늘, 파 같은 향신료를 재배하는 걸 발견하더니 마을의 농부들과 거래해 대량의 채소와 향신료를 갓 수확해 보존 주머니에 보관, 집에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김치를 담겠다며 의욕을 냈다.
안느는 아드네빌라가 출현해 수없이 내려쳤던 번개, 그리고 초월급 정령인 릴라이스를 바로 앞에서 본 것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지 귀찮아하는 환연을 끌고 계약 정령인 루모와 함께 방에 틀어박힌 상태.
“…….”
혼자 남은 환인은 잠시 거실을 서성거리다 알을 품는 쿠라를 살필 겸 비상을 보러 마구간으로 향했다.
훈련을 중단하자 할 게 없어 시간이 붕 뜬 탓이다.
마구간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뽀송뽀송한 지푸라기로 바닥이 가득 깔린 넓은 마방과 가장 안쪽에서 알을 품고 있는 쿠라, 그 주변에 옹기종기 모인 비상과 쿠르티, 쿠핀이 눈에 들어온다.
큐으~
한가로이 앉아있던 비상이 환인을 발견하곤 향해 작게 운다.
이전이었다면 냉큼 날아들어 덮치듯이 몸을 부대껴왔을 텐데. 이제는 환인을 보더라도 반가워하며 울음소리를 낼 뿐 달려들지 않는 비상이다.
“이제 어른이 된 거냐.”
가까이 다가간 환인은 녹색의 폭신폭신한 깃털로 뒤덮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다가 수건을 물에 적셔와 자신에게 머리를 들이미는 비상부터 쿠르티와 쿠라, 쿠핀까지 차례대로 깃털을 닦아주었다.
“이제 10시인가…….”
평소보다 꼼꼼하게 시간을 들여 깃털 사이사이까지 닦아주고 부리도 광이 날 정도로 손질해주었지만, 시간이 남아도 너무 남는다.
이실리테가 배추속 양념을 만드는지 자극적인 젓갈 냄새와 매콤한 고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솔솔 날아오는 중에 환인은 수건을 내려놓고 비상의 옆구리에 기대앉았다.
볏짚이 햇살을 머금은 냄새. 쿠에들의 초원 냄새에 밖에서 불어오는 포근한 봄바람이 섞이니 뭔가 나른한 느낌이다.
흑마술사의 수작질에 인신 공양 당한 피해자들을 추모하겠다는 마을 사도의 이야기는 거짓이 아닌지 마을에서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고 조용해 더욱 나른해지는 기분.
쿠으? 큐읏.
심심하면 하늘을 날러 갈까? 하고 묻는 비상에게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최고급 오리털 침구처럼 따스한 비상의 옆구리에 몸을 더욱 파묻는다.
‘이렇게 한가했던 적이 없으니 적응이 안 되는군.’
하지만 이것도 익숙해져야 한다.
아드네빌라의 말대로 자신은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달려왔다.
휴식 시간, 이동 중에도 명상과 정신집중, 영혼술의 단련과 영기의 순환 훈련을 반복했었다. 이동을 멈추거나 야영 준비를 하면 여자친구들과 전투 훈련을 했고 밤에는 그녀들과 몸을 섞으며 영기를 흡수했다.
이곳이 살기 위험하고 팍팍한 세계인 것은 맞지만, 생활상 자체는 나름대로 취미에 맞았고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자친구들이 항상 옆에서 시중과 수발을 들어주니 지루하거나 심심했던 적은 없었다.
그랬기에 쉬지 않고 계속 달렸지만, 이제는 느긋하게 있는 법도 몸에 새겨두어야겠지.
‘오후에는 무기를 휘둘러볼까.’
생각해보면 여자친구들과 대련만 해왔었다. 목적 없이 차분히, 아무 생각 없이 창을 휘두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무기를 휘두른다고 영혼술이 성장할 리 없을 테니 운동과 체력단련 겸 무기를 휘둘러도 좋겠지.
저녁에는 이실리테가 한가해질 테니 어제 목욕시중을 받지 못한 것을 핑계 삼아 함께 몸을 씻을까.
비박하던 경험을 더듬어 몸의 긴장을 풀고 있으니 비상도 닭처럼 목을 움츠린 채 눈을 감는다. 환인도 눈을 감고 머리와 마음을 비우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가던 중…….
꾸으.
쿠흐?
쿠에엣.
쿠에.
쿠에들이 부산스러워지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알을 품고 있던 쿠라가 몸을 일으켜 둥지에서 물러나고 쿠르티와 쿠핀이 둥지에 다가간다.
비상도 그쪽으로 가고 싶은 듯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난 환인은 비상과 같이 둥지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흔들.
흔들흔들.
톡. 톡톡.
움찔거리듯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는 붉은 알. 잠시 날짜를 계산해본 환인은 오늘로 11일째가 된다는 사실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일반 쿠에는 부화에 2주 정도 걸린다고 이실리테가 이야기했었다. 비상과 붙어 다니는 바람 정령 말로는 비상이 알에서 태어나는 데 12일 걸렸다고 했고.
‘쿠에의 종류에 따라 부화 기간의 차이가 나는 건가.’
미숙한 상태로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던 환인은 집으로 돌아가 환연과 함께 여덟 정도 되는 빛 정령에 둘러싸여 있던 안느를 불렀다.
“쿠라의 알에서 곧 새끼가 태어날 것 같은데 안느 네가 와야겠다.”
=어? 벌써? 오늘이…… 11일째니까 태어나려면 사흘은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녔어?=
“비상이 12일째 태어났다는 걸 보면 부화 기간에 차등이 있을 수 있지만, 미숙아로 태어날 가능성도 있지.”
환인의 대답에서 자신을 찾은 이유를 깨달은 안느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구나. 근데 그건 도령의 원기 주입으로도 될 거 같은데…… 먼저 가있어. 금방 정리하고 갈게.=
고개를 끄덕인 환인이 그녀의 방에서 나가자 두 손이 뻘건 양념으로 범벅인 이실리테가 빨간 앞치마 차림으로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주인님, 방금 쿠에가 태어난다고 하셨어요?=
“그래. 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군.”
=저도 갈게요!=
=으응? 노을색 알에서 새끼가 태어난다고?=
이실리테가 손을 씻으러 주방 안으로 사라지자 유르파와 백려강도 그 소릴 들었는지 문을 열고 얼굴을 내민다.
방에서 정사를 치를 때 아드네빌라가 괜히 소리 차단 결계를 친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그녀들과 함께 마방에 들어서자 쿠라가 꾸으쿠으, 불안해하는 움직임으로 둥지 주변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언니들. 우리가 한 번에 오니까 쿠라가 불안한가 봐요.=
=그러게. 도령, 우린 밖에 있을 테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불러줘.=
“알았다.”
여자들이 전부 마방을 나가자 쿠라는 그제야 진정하며 둥지 근처에 앉는다.
그사이 계속 알을 지켜보던 환인의 눈은 조금씩 찌푸려져 가고 있었다.
‘알의 움직임이 느릿해져 간다. 약해서 알을 깨고 나올 힘이 없는 건가.’
평균 부화 기간이 2주라면 11일만에 껍질을 깨려 하는 새끼는 22%는 덜 자란 미숙아란 뜻이 된다. 사람으로 치면 7~8개월 만에 태어난 칠삭둥이인 셈.
쿠에의 태생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의 아기로 치자면 막달에 이를수록 몸무게가 급증하는 만큼 칠삭, 팔삭둥이로 태어나면 정상 체중인 3kg ~ 3.5kg에서 턱없이 부족한 1kg ~ 1.5kg밖에 되지 않는다.
저 알의 새끼도 마찬가지겠지.
이제 거의 움직임이 사라진 알을 강화 영혼 시야로 보자 뿌연 유백색 그림자 너머로 지쳐 희미해져 가는 생명력이 드러난다.
=어어. 어떻게 해? 저렇게 알로 감싸여져 있으면 원기 회복 물약이나 성술도 안 통하는데.=
마방 밖에서 안을 살짝 엿보던 안느의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여자친구들의 뭔가 방법이 없냐는 대화가 이어지고, 이실리테는 알껍데기를 깨서라도 구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발언을 했다.
만약 이 알이 평범한 쿠에 알이거나 다른 조류의 알이었다면 환인도 인공 파각을 실행에 옮겼을 거다.
하지만 쿠에다. 거기다 최고 희귀등급인 노을색으로 짐작 가는 데다 비슷한 희귀등급인 비상도 지능이 매우 뛰어났다. 인공 파각이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는 만큼 환인은 인공 파각을 최후의 수단으로 미루었다.
여자친구들의 대화와 쿠에들이 움직임을 멈춘 알을 향해 끙끙거리는 것을 귓등으로 흘려넘기며 환인은 손을 수박만큼이나 큰 노을색 알에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부담이 되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원기를 흘려 넣기 시작했다.
몸도 건강하지 않은 신생아가 갑자기 심장이 펌프질하면 당연히 목숨이 위험해진다. 그래서 원기를 너무 퍼부어 몸 상태가 이상해지지 않도록 생명의 빛을 보며 흘려 넣는 원기를 조절하길 얼마간.
알이 다시금 흔들리며 토독 토독, 알 안쪽에서 껍질을 두드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오. 저런 방법이 있었네.=
=아가야. 힘내서 태어나야 해……!=
카턴 마을에서 얻은 원기 흡수와 원기 방출 능력이 의외로 소소하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20분 동안 원기를 꾸준히 흘려준 환인은 마침내 껍질 한쪽에서 금이 쫙- 가는 것을 보고 알에서 손을 뗐다.
콕, 콕콕. 찌직- 찌지직—
금이 간 부분이 점차 넓어져 간다. 처음 깨진 부분은 이제 들썩거리고 있는 상황.
한동안 흔들거리던 알이 멈춘다. 생명의 빛은 그대로이니 마지막으로 힘을 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것일 터.
환인의 예상대로 잠시 후 깨진 부분이 아작— 소리와 함께 뜯어져 열리고 그쪽으로 신생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탄탄한 쿠에의 다리가 빠져나왔다.
이어 거의 몸부림에 가까운 동작으로 알이 깨진 곳을 넓혀가며 힘들게 빠져나오는 불그스름한 새끼 쿠에.
=와아! 태어났어요!=
=후우. 한때는 어떻게 되는 건가 했는데 잘 태어났네.=
=주인님이 원기를 넣어준 덕분이야. 아니었으면 제힘으로 태어나긴 어려웠을걸.=
=그, 그런데 어쩜 저렇게 크니? 보통 새끼 쿠에보다 훨씬 큰 거 같은데……. 몸에 깃털도 제법 나 있고.=
=미숙아 맞아?=
갓 태어난 새끼 쿠에의 크기는 비상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2배 가까이 컸다. 거의 다 자란 수탉 정도 크기.
저 새끼 쿠에가 일찍 태어난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차이는 명백하다.
‘혹시 노을색 쿠에는 불을 쓰는 건가.’
육체 능력이 뛰어나 집채만 한 바위에 불을 붙여 걷어차고 하는 게 불타는 바위를 소환해 떨어트린다는 식으로 와전됐을 가능성도 있다.
녹색 쿠에가 바람을 쓰며 날아다니니 노을색 쿠에가 불을 쓰며 힘과 체격이 좋다는 추측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환인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낑낑 우는 새끼를 영혼 시야로 살펴본 뒤 쿠라에게 새끼를 맡기고 마방을 나왔다.
“상태가 위험하면 성술을 걸어주고 회복제를 먹일 생각이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될 거 같군.”
=건강하다니 다행이네. 사흘이나 일찍 태어나서 건강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했는데.=
“원기로 체력을 보충해주어서 직접 알을 깼기 때문인지 알에 있을 때보다 건강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돌연사할 가능성도 있으니 한 명은 마방 앞을 지키면서 새끼의 상태 변화를 지켜봐야겠지.”
=주인님, 그건 제가 할게요.=
“내가 하지. 변화는 영혼 시야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니.”
다들 할 일이 있는 여자친구들에 비해 자신은 딱히 할 일도 없고 말이다.
점심으로 갓 담근 김치와 혹멧돼지 삼겹살로 만든 수육, 단단한 두부에 하얀 쌀밥을 먹고 마방 앞으로 돌아온 환인은 노을색 새끼 쿠에가 빠른 속도로 건강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막 태어났을 때는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더니 4시간쯤 지나자 깃털도 말라 뽀송뽀송해진데다 나무젓가락 같던 두 다리도 조금 더 굵어지고 통통해졌다.
부리도 단단해서 조금 여문 과일 정도는 무리 없이 쪼아먹을 수 있을 정도에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눈까지 떠서 쿠라에게 바짝 붙어서는 다른 쿠에들을 구경까지 한다.
=그사이에 좀 더 자란 것 같네요……?=
안느와 유르파, 백려강에 환연의 도움까지 받아 100여 포기 김장을 삽시간에 끝낸 이실리테가 합류해 마방 안쪽을 들여다보곤 신기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젖어있던 깃털이 마르면서 부풀어 크게 보이는 거겠지. 그보다 저 크기는 노을색 쿠에의 특징인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밀짚색 쿠에나 갈색 쿠에 새끼는 저렇게 크지 않거든요.=
비둘기 크기 - 암탉 크기 - 거위 크기를 거쳐 준성체 쿠에로 자란 비상을 생각해보면 저 노을색 쿠에는 어떻게 클지 조금 기대가 되는 환인이었다.
그때 비상의 머리 위에 앉아 갓 태어나 온갖 것에 호기심을 드러내는 새끼 쿠에를 복잡한 눈으로 보던 바람 정령이 환인을 찾아와 걱정이 스며든 투로 묻는다.
「인간. 약속은 잊지 않았지?」
“그래.”
「저 시루드가 아무리 강해져도 비상을 홀대하면 안 돼.」
“걱정하지 마라. 내 쿠에는 비상뿐이니까. 그런 것보다 그 시루드라는 건 뭐지. 노을색 쿠에를 가리키는 단어인가.”
「그래. 불타는 대지라는 뜻이야. 비상은 시아루드, 불어오는 바람의 하늘이구.」
언제나 환인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말을 걸어도 잘 대답하지 않던 바람 정령이 묻지도 않은 것까지 알려준다.
거기서 불안을 느낀 환인은 후, 짧게 웃고는 노을색 쿠에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 중인 이실리테에게 말했다.
“너와 안느는 앞으로 저 노을색 쿠에를 타게 될 거다. 저 새끼 쿠에가 너와 안느를 같이 받아들일지 아니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할지 알 수 없지만, 다 자랄 때까지 둘이 번갈아 가며 키우도록 해라.”
=네, 주인님. 그럼 저 잠시 들어가서 봐도 될까요?=
환인은 기대감을 드러내는 이실리테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곤 안느를 찾아가서 그녀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도 그 아이 볼래!=
그러자 훈련도 내팽개치고 마구간으로 달려가는 안느.
「아니 저게 도와 달래서 도와주고 있었더니…….」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된 환연이 기막혀하다가 한숨을 푹 쉬며 자연스럽게 환인의 가슴께로 날아들었다. 그리고 타이트한 코트-재킷셔츠 차림에 분통을 터트렸다.
「이게 뭐야! 내 잠자리 어디 갔어!」
그녀가 애용하던 환인의 안주머니 자리가 사라졌던 것.
아니. 사라지진 않았지만, 이전과 비교해 아주 작아진 안주머니는 무한의 손지갑 아스펜드가 들어가 있다.
아드네빌라가 선물로 준 천릉은 착용자를 시중 받는 게 당연한 사람의 의복으로 디자인했기에 코트 안쪽의 아주 작은 주머니를 제외하면 다른 주머니는 하나도 없었던 것.
섬김받는 사람은 금화 1닢도 들고 다니지 않으며 상품의 대금 지불도 아랫것에게 지시하는 법이니까.
「…….」
“…….”
환인은 환연의 애처로운 시선에 작게 한숨을 쉬며 안주머니에서 손지갑을 꺼냈고, 환연은 이겼다는 듯이 의기양양해 하며 안주머니로 꼬물거리며 들어와 자리 잡았다.
「와. 여기가 훨씬 아늑해. 감촉도 훨씬 부드러워졌고.」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손지갑을 든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가 유르파가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적당한 허리띠 체인을 부탁한 뒤에 손지갑을 코트 안 허리띠에 걸고 다니면 되겠지.
소유권은 자신에게 있고 추적 기능까지 있으니 혹시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더라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을 테니까.
저녁에는 일행의 새로운 동료가 된 노을색 새끼 쿠에의 작명식이 진행되었다.
참여자는 이실리테와 안느.
갓 태어났을 때는 수탉 정도 크기였지만, 노을처럼 빨간 깃털이 말라서 부푼 지금은 거위 정도로 커진 상태.
이실리테는 호기심에 고개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새끼 쿠에를 품에 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이름을 잘 짓지 못해. 그래서 유리 언니한테 도움을 받아 실루라는 이름을 만들었어. 나랑 안느의 이름 두 번째 글자에 들어가는 실, 그리고 쿠라와 쿠핀의 이름을 풀어서 뽑아낸 글자 루, 합쳐서 실루.=
이 아이가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 쿠라와 쿠핀, 그리고 앞으로 이 아이를 책임질 자신과 안느의 이름 한 글자.
그녀의 발언이 끝나자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네 명의 고개가 작게 끄덕여졌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글자 두 개로 이루어진 고유명사지만, 두 명과 두 마리의 끈이 고스란히 이어지는 이름이다.
그에 안느는 패색이 짙어진 얼굴로 발언했다.
=난…… 려강이하고 상의해서 대지를 달리던 불의 영웅의 이름인 닐샤트를 붙이려고 했는데…….=
「뭐야. 이름 짓는데 둘이 도와줬다고? 그럼 유르파하고 백려강은 심사위원 자격 박탈이야. 둘 다 내려가.」
환연의 지적에 백려강과 유르파는 머쓱하게 웃으며 각자 이름 짓는데 도와준 여자들 옆에 가서 앉는다.
그걸 환인의 어깨에 앉아서 지켜본 환연은 말없이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환인을 보곤 종이를 가져와 두 장으로 찢으면서 말했다.
「결과는 이미 나온 거 같지만 그래도 공평해야지? 환인, 그만 눈 뜨고 숫자 적어. 이실리테면 1번, 안느면 2번. 난 저기 가서 적고 올 테니까.」
=잠깐, 만약 둘이 번호가 다르면 어떻게 해?=
미약한 희망을 버리지 못한 안느의 이의제기에 환연은 한심하단 투로 후,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그땐 나랑 환인이 쓴 종이를 내려놓고 저거한테 고르라고 선택하면 돼.=
나름대로 공평하고 합리적인 룰에 안느는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고 받아들였고, 이윽고 환인과 환연이 적은 숫자를 보곤 백려강과 함께 시무룩해졌다.
“이걸로 새끼 쿠에의 이름은 실루로 정해졌군.”
=다 크면 불타는 노을처럼 빨갛고 건장하게 자랄 거 같아서 닐샤트도 잘 어울릴 거라 생각했는데…….=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에 이실리테가 승자의 자그마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느, 이 아이는 암컷이야. 그런데 남자 영웅의 이름을 지으려고 했어?=
=자기 이름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한탄한 닐샤트의 일화는 유명하거든? 그러니까 그 아이한테도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거기까지만 질척거린 안느는 이윽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노을색 새끼 쿠에, 실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튼 실루야, 태어난 거 축하하고 앞으로 우리랑 잘 지내자. 알았지?=
삣.
=어? 방금 내 말에 대답한 거야? 대답한 거지?=
=그냥 우연이었어. 그렇지, 실루?=
…….
자신의 이야기에는 대답하듯 울지 않으니 이실리테의 표정이 시무룩해지고, 반대로 안느의 표정이 밝아지며 그녀에게서 실루를 빼앗아 안아 든다.
그러자 백려강도 실루에게 다가가 부리를 살짝 어루만지며 말을 걸고 유르파도 안느의 품에 얌전히 안겨 눈을 깜빡이는 실루의 자그마한 머리를 검지로 살살 쓰다듬으며 귀여워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여자들을 구경하던 환연은 문득 환인이 좀 전부터 계속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실루가 이실리테나 안느와 친해질 기회를 주려고 일부러 입을 다물고 있는 건가 했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
「뭘 그렇게 고민해?」
“……약간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어떤 거? 용 씨하고 릴이 근처에서 나타났던 거?」
“주변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촌락이나 마을이 없다지만, 용과 초월급 정령이 맞부딪쳤다. 강대한 힘의 파장이 널리 퍼져나갔겠지. 예지든 뭐든 그걸 포착한 인물이나 집단이 있다면…….”
「우리한테 꼬여 들겠네. 얽혀들면 앞길이 좀 성가셔지겠는데.」
“…….”
「그래서 뭐, 몇 달 정도 인적 없는 데서 잠수라도 탈 생각이야? 흐라스린드 사건이랑 이번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
“4달 정도면 소문도 어느 정도 가라앉겠지.”
「그래, 4달……. 4달? 너 설마?」
환연은 진심인가 싶어 환인을 바라보았고, 환인은 대답 없이 잔잔한 눈으로 실루를 귀여워하는 여자친구들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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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처음에는 (노을색 쿠에 이야기를 꺼낸 시점부터)닐루라고 지으려 했는데 이미 선점된 캐릭터 이름이더라구요.
어쩔까하다가 그냥 살짝 수정하는 걸로 @[email protected];;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조금 신기하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