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 아드네빌라의 흉계
수십 년의 동면 회피, 화난 용한테서 피신, 저 인간과 계약 관계 진척.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저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꾀죄죄한 요정도, 정령도 아닌 것과 계약하는 것.
보아하니 저 인간도 동료를 제법 아끼는 부류다. 저 용이 저 인간의 동료를 건드리지 않는 것만 봐도 확실하다.
안위를 위해 자신의 위협에 당장 꼬투리를 잡아 맹세를 요구할 정도로 당돌한 인간이니 동료를 그냥 방치할 리 없겠지.
그러니까 저 작은 동물 같은 것과 계약을 맺으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데다 저 인간 옆에 늘 붙어 다닐 수 있으니 계약을 맺을 기회를 노리기도 쉬워지는 것.
그렇다고 저 자그마한 것이 꼴 보기 싫냐고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자신이 저걸 따라나선 이유도 수상쩍음이 덕지덕지 묻은 이상한 소동물 주제에 어마어마한 친화력으로 중급 정령들을 잔뜩 데려가서가 아닌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쬐끄만 생물의 정령 친화력은 막말로 친화력 자체만 보자면 자신도 거부감 없이 계약할 정도.
비록 이상한 냄새가 섞여 있어 조금 꺼림칙한 것이 없진 않고 환령계의 냄새조차 안 나는 게 이상하지만, 일단은 저 인간과 비교도 못할 만큼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하여튼.
친화력 빼면 볼 것 없는 생물이라 좀 전까진 무시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일단 계약부터 맺고 보자.
〈야, 꼬맹이! 나랑 계약해!〉
「……흐에?」
〈흐에 같은 소리 할 때가 아니야! 내가 앞으로 널 지켜줄게! 나랑 계약한다는 건 힘이 없어서 다른 놈들에게 휘둘리거나 숨어서 지낼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야! 그러니까……!〉
뒤에서 꽂히는 용의 소름 돋는 시선에 릴라이스는 다급히 환연과 계약을 촉구하려 했지만, 그 첫 번째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환인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환연을 손으로 가리고 안주머니로 감추었던 것.
얼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린 릴라이스에게 환인의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 소중한 동료에게 수작 부리지 마라.”
「…….」
〈자, 잠깐! 정령 계약에 타의의 간섭을 받을 이유가 없거든?!〉
“나는 환연의 보호자다. 네가 사욕으로 접근하는 게 훤히 보이는데 내버려 두면 보호자 실격이지.”
〈잠깐! 사욕 같은 거 아니야! 성실하게 계약을 수행할 거야! 진짜로…… 히익!〉
뒤에서 한층 더 강해지는 용의 기운에 릴라이스는 애가 탔다.
사욕은 진짜로 조금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계약도 당연히 성실하게 수행할 거였고. 그랬는데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욕심뿐인 계약으로 비쳤다니, 억울해!
「환인. 나 잠깐만.」
환연이 들어가 있는 안주머니를 옷 밖에서 손바닥으로 살짝 덮어 그녀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있던 환인은 환연의 부름에 손바닥을 치웠다.
그러자 꼬물거리면서 다시금 목깃으로 기어 올라와 머리를 빼꼼 내미는 환연. 그 잠깐 사이 정신을 차렸는지 또렷해진 목소리로 릴라이스를 향해 입을 연다.
「나랑 계약하자는 거 정말이야?」
〈응?! 응!〉
눈앞의 자그마한 동물이 긍정적인 느낌으로 말을 꺼내자 망할 용의 기세가 한풀 꺾이며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느낌으로 변했다.
릴라이스는 당연히 앞뒤 가리지 않고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보니까 자존심 때문에 도망치긴 싫고, 그렇다고 저 용 씨한테 처맞아서 동면하는 것도 싫고, 환인하고 계약도 포기 못 해서 차선책으로 정령도 요정도 아닌 나랑 계약하겠다고 하는 거 같은데.」
〈어, 어떻게……?!〉
「너랑 환인 때문에 정신 잃은 상태에서도 전부 들었어. 꿈인 줄 알았는데 보니까 현실이었네.」
〈……!〉
“…….”
「뭐, 좋아. 계약 받아주지 않을 이유는 없지.」
〈진짜지?! 그럼 지금 당장……!〉
「단, 하나만 약속해줘.」
릴라이스는 뭔가 기시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얘는 뭔데 저 인간이랑 대화하는 느낌이 드는 거지……? 말투도 그렇고 말에서 느껴지는 자신감? 자존감? 그것도 뭔가 비슷하고.
「별거 아냐. 초월급 정령님이라면 아무런 어려움 없이 간단하게 들어줄 수 있는 거니까.」
환연은 그렇게 은근슬쩍 릴라이스를 추켜세워주며 자신의 부탁을 말했다.
계약은 약식 계약으로도 좋다. 단 사흘에 한 번, 정식 계약급으로 자신의 요청을 들어달라.
쓰지 않은 요청은 이월되지 않으며 요청 갱신 시기는 정확히 3일 후 자정.
어떤 불합리한 약속을 들먹일까 긴장하던 릴라이스는 의외로 맥빠지는 부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그거면 되는 건가? 정식 계약이라 해봤자 얼토당토않은 요구나 지시는 내리지 못하니 사흘에 한 번이라 해도 이쪽이 손해될 건 없는데?
불공정한 약속과 계약을 요구하더라도 어떻게든 조건을 조율해서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던 릴라이스는 살짝 의심을 드러내며 재차 물었다.
〈정말 그거면 돼?〉
「응. 그거만 들어주면 계약 뒤에 모습을 아예 드러내지 않아도 되고 반대로 맘대로 나와서 같이 다녀도 좋아. 대신 해약은 내 동의가 있어야 하는 걸로 해줘.」
〈그런 거라면…… 상관없지만…….〉
환인은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진 않나 고민하는 릴라이스를 말없이 응시했다.
방금 환연이 한 말에서 함정을 찾지 못한 건가. 통역 현상이 정확하게 해약解約을 언급한 걸 보면 의미가 다르게 전달되었을 리 없을 텐데.
잠시 고민하던 릴라이스는 결국 이상한 점을 찾지 못하고 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좋아. 계약해.〉
뒤에서 아드네빌라가 존재감으로 가득한 위광을 릴라이스에게만 풀풀 날리고 있어 정신이 쏠린 탓도 있지만, 본래의 깊이 생각하지 않는 성정 탓이기도 했다.
어떻게 일이 해결된 뒤 이실리테와 함께 마을로 돌아온 환인은 여기저기 쓰러져 기절한 마을 순찰대원들을 발견했다.
아무런 상처 없이 졸도한 것처럼 널브러져있는 남자와 여자들.
“…….”
환인의 시선이 하얀 면사포를 쓴 채 뒤따라오는 아드네빌라에게 향한다.
《…내 그래서 사과하지 않았나.》
“아무 말 안 했습니다. 그보다 정체가 들키지 않도록 조심이나 하십시오.”
《그건 걱정하지 말도록.》
따라오겠다는 아드네빌라를 막지 않고 내버려 둔 것은 그녀가 왜 따라오는 건지 그 이유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고, 투라드 마을을 바로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린 호우로 흙탕물이 된 곳에 자빠져있는 순찰대원을 내버려 두고 사도의 집을 먼저 찾아간 환인은 자신이 입장하자마자 벌떡 일어났다가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것은 갔던 일이 잘 해결되었다는 뜻.
잘못한 것이 있기에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염치가 없어 나오는 반응이다.
환인은 신경 쓰지 않고 미안함과 감사함이 표정과 몸짓에서 역력하게 묻어나는 사도에게 말했다.
“흑마술사는 처리했습니다. 미궁은 흑마술사의 손에 오염되었기에 붕괴시켰으며 흑마술사의 피조물도 대부분 정리하였으니 이제 흑마술사에게 시달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저희의 무례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신경 써주시다니 대체 감사 인사를 어떻게 올려야 할지…….=
“감사라면 키사기 씨와 유피 씨에게 하십시오. 그럼.”
말을 끝마친 환인이 망설임 없이 돌아서자 걱정을 한결 덜어낸 모습으로 웅성거리던 유지들과 사도가 화들짝 놀라서 그에게 달려간다.
저 말이 뜻하는 것은 곧장 마을을 떠나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은인님!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희에게 부디 사죄할 기회를!=
=여행자님들을 모실 기회를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인면수심의 짐승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은인님과 은인님 일행분들을 대접하는 걸 허락해주세요……!=
환인은 거의 바짓가랑이에 달라붙을 듯한 모습으로 간청하는 유지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빨리 돌아가서 여자친구들의 상태와 쿠라가 품고 있는 알도 확인하고, 멋대로 찾아와 두통을 선사한 저 골칫덩어리 용도 떼어놓은 뒤에 푹 쉬고 싶은 게 환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절박하게 매달리니 솔직히 말해 귀찮다.
두들겨 패서 떨어트려 놓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을 정도다.
환인은 나오려는 한숨을 조용히 숨결로 내보낸 뒤 입을 열었다.
“대가를 바라고 여러분들을 도와드린 게 아니니 말씀은 거둬주시길.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면 흑마술사에게 인신 공양 당한 피해자의 가족들을 챙겨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씀대로 미궁 주변에서 경작하며 얻은 수입으로 반드시 그 가족들을 챙기겠습니다!=
=그러니 은인님, 부디 곧바로 떠나시겠다는 말씀만큼은 거두어주십시오…….=
“…….”
이들이 이렇게나 대접과 접대에 목을 매는 이유는 나름 절박한 것이다.
도와주겠다며 찾아온 여행자들의 실력을 알아보지 못해 홀대했다. 그런데도 여행자들은 마을에 닥친 크나큰 위협을 제거해주었는데, 보상은 물론 대접조차 제대로 해주지 못한 채 여행자들을 그대로 떠나보냈다는 이야기가 알려지면 마을의 평판과 이미지가 대폭락한다.
어디 어디에 있는 마을이 여행자들에게 소홀하다더라.
인심이 인색하고 야박해서 큰 도움을 준 여행자들에게 제대로 된 대접조차 해주지 않았다더라.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오면 의심하고 못살게 군다더라…….
내용이 각색되고 부풀려지기 쉬운 게 소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것보다 더 심한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자, 모험가들이 발길을 뚝 끊는 것은 물론 평소 거래하던 상단도 거래를 중단할지 모르는 일.
삶의 질을 올려줄 물자 유통을 맡는 상단이 거래를 끊는 것은 뭐, 불편해도 감내할 수 있다. 생필품은 마을 자체에서 생산해 자급자족할 수 있으니 불편함만 감수한다면 견딜 수 있는 거다.
하지만 평판 감소는 이번처럼 마을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다면 심각한 생명의 위협이 된다.
인근 마을이나 도시에 구원을 요청해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클뿐더러 자신들의 안위에 신경 쓰는 용병이나 모험가를 고용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환인은 사람들의 그런 절박함을 읽고는 눈을 감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오오……!=
“잔치를 받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지났고, 동료들의 피로가 조금 쌓인 것도 사실이니 내일 하루 조용히 쉬고 떠나겠다는 겁니다.”
이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면 지금 당장 출발할 거라는 뜻을 비추자 사도가 당혹해하는 유지들을 말리며 입을 열었다.
=은인님께서는 피해를 본 마을 주민들의 슬픔까지도 배려해주시는군요……. 그 뜻을 받들어 일주일간 음주 가무를 멈춰 희생당한 주민들의 추모하는 기간을 가지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잔치도 벌이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마을의 슬픔을 수습하며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러니 은인님께서 떠나시기 전까지 식사와 수발을 드는 것만큼은 허락하여주시길 간청드립니다…….=
“…과한 수발과 식사 차림은 자제해주십시오.”
의견 조율을 위한 과정조차도 귀찮아진 환인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사도와 유지들의 표정에 안도가 번져간다.
사도는 재차 환인에게 읍을 올린 뒤 유지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네들은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서 은인님의 활약으로 마을의 위기가 해소되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전달하게. 나는 은인님께서 조용히 머무실 곳을 안내해드리겠네.=
=예.=
=알겠습니다.=
=네.=
마차 주변에 모여있던 환인의 여자들은 모두 호족이나 고족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내어주는 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집은 8명이 머물러도 충분할 만큼 6개의 방과 2개의 욕실, 3개의 화장실에 부엌과 응접실에 식당까지 갖춰진 반 저택 수준.
《으흠~? 호오~.》
거실 겸 응접실의 소파에 깊게 몸을 묻은 환인은 투시율이 20%도 안 되는 면사포를 쓰고 집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아드네빌라를 응시했다.
한순간이지만 강한 두통과 위광에 시달린 환인은 마음 같아서는 저 용을 그냥 쫓아낸 뒤 편히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저 성질머리가 너무 성가시다.
《그런데 그 아이는 어디 있지? 왜 오지 않는 건가.》
“……백려강이라면 마구간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 몸에 제법 익숙해졌나 보군. 너도, 그 아이도.》
그러면서 휙- 면사포를 벗어 던지는데, 그 아래에 드러난 얼굴을 목격한 환인은 경계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순간 흔들린 것을 느꼈다.
이유는 하나뿐. 설마 아드네빌라는 그것을 노리고 용인체를 넘겨준 건가.
환인은 약간이지만 패배감에 기분이 살짝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대꾸했다.
“매일 밤 그 몸 구석구석을 맛보고 즐깁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보름가량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하핫. 생각 이상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 내가 다 뿌듯한 기분이군.》
성미를 살짝 긁을 생각으로 비아냥거린 거였는데.
아드네빌라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재차 패배감을 느낀 환인은 자신의 속 좁음에 자조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그 몸을 어떻게 쓰는지 확인하기 위해 따라온 겁니까.”
《반은 그런 이유도 있지만……. 어차피 길게 말할 필요도 없으니 잠깐 기다려라. 확인한 뒤에 이야기해주도록 하지.》
“…….”
역시 그건가.
확인해야 한다는 말에 환인이 떠올린 것은 용인체를 매개로 그녀의 영기를 흡수하고 있던 것이었다.
닌실도 첫 교접에서 눈치챈 것을 아드네빌라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란 생각이 어리석은 거다. 아드네빌라의 영기를 흡수하고 있다는 게 들통난 거겠지.
언제고 알아차릴 거라곤 생각했지만 아직 신수인 그녀의 영기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아내지 못해 아쉽단 생각이 치민다.
그때 뒷문이 열리며 그의 여자들이 각자 짐가방을 들고 재잘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해왕 아드네빌라의 위광에 노출되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쾌활한 모습들.
=주인님. 쿠라의 둥지를 정돈해주면서 확인했는데 내일모래정도면 알이 부화할 거 같아요.=
=알에서 맥동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확실하…….=
이실리테의 이야기를 받아 말을 이어가던 유르파가 거실 풍경에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다.
다른 여자들도 환인의 근처에 서 있는 백색과 청색의 색감으로 나뉜 미녀의 모습에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백려강과 똑같은 외모지만 좀 더 성숙하고 조금 더 큰 키.
용의 뿔도 더 날렵하고 기개가 느껴지며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 밑으로 흘러내린 용의 꼬리는 백려강의 그것보다 조금 더 굵고 탄탄해 보인다.
=……!=
언니들과 함께 집안에 들어서던 백려강은 아드네빌라를 목격한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가, 그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아드네빌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백려강을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한다.
귀 위쪽에서 부드럽게 뻗어나가는 용의 뿔도 만져보고 모양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젖가슴도 만지작거린다.
군살은 약간도 없는 허리를 쓸어내리기도 하고 힙업 운동을 막 끝마친 것처럼 라인이 살아있는 엉덩이도 토닥거려본다.
《음……. 빙의가 제법이구나. 육신과 동조율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육신의 특성을 온전히 끌어내고 있어. 반발 현상도 없으니 원래 자기 몸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야. 원견으로는 알아볼 수 없어 고민했었는데 이 정도면 문제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군.》
“당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매일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성제가 그리 말한다면 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만족했다는 아드네빌라의 표정에 환인은 한순간 멈칫했다가 물었다.
“그걸 확인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온 겁니까.”
《저 육신은 엄연한 계약의 증표. 문제가 생긴다면 이몸의 탓이 될 수도 있지 않나.》
“의외로군요.”
《의외라니? 잠자리에서 알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나?》
“…….”
그 말이 키워드가 되어 환인의 기억 속에 한 가지 장면을 끌어올린다.
작은 한숨을 내쉬며 한 손으로 눈을 덮으니 아드네빌라가 짓궂고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백려강을 품에 끌어안고 그녀의 아랫배를 사악사악 쓸어내렸다.
《생각났나 보군. 이몸의 생식기를 건방진 보지라고 표현하기에 만들어준 육체에 오류가 생겼나 전전긍긍했었는데 말이야.》
에엥? 건방진… 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의아함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여자친구들의 얼굴, 그리고 빨개진 백려강의 얼굴.
작게 고개를 저은 환인은 여자친구들에게 가볍게 손짓해서 하던 일을 마저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삼삼오오 흩어지는 여자친구들.
“이실리테. 아메리카노 한 잔 부탁한다. 샷은 두 번 추가해다오.”
《나에게도 같은 것을 가져와라.》
=네에…….=
여자친구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부리는 아드네빌라의 행동에 환인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이내 눈을 감고 소파 머리 받침에 머리를 기댔다.
설마 저렇게까지 둔할 줄이야. 아니면 영기가 흘러나가는 걸 보고도 묵인하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환인에게 나쁜 것이 없는 상황이지만, 혹 훗날 아드네빌라가 그 사실을 꼬집으며 트집 잡는 미래를 염두에 두고 대응법을 세운다.
잠시 후 이실리테가 커피를 가져다주며 더 시키실 것은 없냐고 물었기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부르겠노라며 그녀를 방으로 들여보냈다.
그리고 말없이 진한 커피를 마시는 고요한 시간이 흐른다.
톡, 토독-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이 창틀에 떨어지는 소리가 적막한 거실을 메아리치고, 백려강이 언니들에게 취조당하고 있는지 그녀가 당황하는 기색, 다른 여자들이 꺅꺆거리며 흥분해하는 것이 문 너머로 자그맣게 들려온다.
《…….》
“…….”
그건 그렇고 이제 진짜 쉬고 싶은데.
환연도 릴라이스와 계약한 여파인지 깊은 잠에 빠져들어 대화할 수 없는 상황. 비에 맞아서 꿉꿉한 몸 상태도 그렇고 솔직히 그만 씻고 쉬고 싶다.
그런데 이 여자는 왜 돌아갈 생각을 안 하는 걸까.
환인은 참을성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본심을 적나라하게 입에 담았다.
“용무가 끝났다면 그만 돌아가십시오.”
《큰맘 먹고 유흥을 즐기러 나온 것인데 남도 아닌 사이에 너무 야박하게 구는군.》
“유흥을 즐기려면 라수비탄이나 프라버엘 가지 왜 놀 것도 없는 여기에 와서 이러는 겁니까.”
《성제여. 인간의 유흥 따위, 이몸에게 가치가 있을 거라 생각하나?》
으스대듯이 훌륭한 볼륨의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쭉 내밀고 하는 말에 환인의 눈빛이 썩어들어간다.
바로 돌아가지 않고 빈대처럼 들러붙겠다는 뜻이었으니까.
생김새가 백려강과 닮은 점이 무척 많다 보니 경계심의 빗장이 자꾸만 헐거워지려 하는 것도 마음에 안들고…….
솔직한 말로 릴라이스를 두들겨 패며 짜릿한 손맛도 느꼈고 스트레스도 풀지 않았냐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환인은 정신적 피로로 인해 인내심이 얕아진 것을 자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럴 때 말을 많이 해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
안 되겠군.
환인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자친구들의 방을 찾아가 이실리테에게 목욕 준비를 부탁한 뒤 자신의 방에 놓여진 꽃바구니 침대에 기절한 듯이 잠든 환연을 조심스레 눕혀주었다.
“…….”
자신만큼이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라 릴라이스와 계약하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작고 왜소해 보이는 녀석이 진흙으로 더러워진 채 색색 숨 쉬는 것을 보니 자신의 선택이 올발랐는지 의문이 들려 한다.
고개를 작게 흔든 환인은 유르파와 힘을 합쳐 삽시간에 목욕 준비를 끝낸 이실리테의 부름을 듣고 욕실로 향했다.
아드네빌라의 음흉한 눈빛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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