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 흑마술사의 마궁
미궁으로 내려온 환인은 가장 먼저 내부 공기부터 확인했다.
지하 공기에서 유독 별난 냄새가 섞여 있다면 일차적으로 의심을 했겠지만, 평범한 지하 동굴의 약간 무거운 냄새뿐이다.
물이 가득 차오르고 다시 빨려 나가며 나쁜 요소까지 전부 휩쓸어나갔기 때문일까. 별 냄새는 안 난다.
일단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지하였지만 시계는 나쁘지 않았다. 동굴 자체가 매우 희미한 빛을 뿜어내는지 천연 바위 동굴 같은 통로는 어렵지 않게 윤곽을 확인할 수 있는 수준.
저벅저벅저벅-
일행이 걸음을 옮기며 바짝 마른 돌가루와 모래를 밟는 소리가 모난 바위 동굴 벽을 반사하며 울려 퍼진다.
이게 초월급 정령의 제어력일까. 불과 1분 전까지 물이 가득 차 있었을 미궁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메마른 느낌이다.
약간의 물기도 느껴지지 않는 통로를 자이언트 카이트 실드인 광휘의 빛을 꺼내든 안느가 선두에서 나아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술 하면 특유의 고기 썩는 냄새와 약초, 독초 냄새인데 공기가 깨끗하네. 괴물 소리도 안 나고.=
“…….”
=안느 언니는… 흑마술사 토벌도 해보셨어요…?=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묻는 백려강에게 안느는 시커면 동굴 벽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난 안 해봤어. 하지만 교단 전투 실습으로 흑마술사의 동굴을 재현한 장소는 체험해봤지. 흑마술사 토벌전을 몇 번 참여해본 선배 말로는 재현율이 90% 이상이었다고 하니까 오류는 없을 거로 생각해.=
=유의해야 할 점은 전부 구현해놓았을 테니까….=
=그렇지.=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조그만 대화 소리를 들으며 좀 전부터 느껴지는 미묘한 위화감에 집중했다.
안느의 경험담에 릴라이스가 킥킥 웃는 것 같은 느낌도 신경 쓰이는데…….
=도령. 앞에 피조물 시체야.=
세 번째 방, 삶은 것도 아니고 타버린 것도 아닌 사족 보행 괴물의 시체가 30평 정도 되는 공간에 널브러져 있는 것에 환인은 무엇이 이토록 위화감을 주는지 깨달았다.
“잠시 멈춰라.”
전기가 흐르며 피조물을 말 그대로 속부터 지져버린 듯한 피조물 시체.
‘흘렀다’는 점에서 위화감의 원인을 알게 된 환인은 강화 영혼 시야로 미궁의 벽과 천장, 바닥을 전부 낱낱이 살폈다.
“……다르군.”
=응? 뭐가 달라?=
“다른 미궁과 마력의 흐름 형태가 다르다. 마력 자체도 무언가 변질된 느낌이다.”
=……도령 눈에는 그런 게 보여?=
“미궁은 위상력을 먹으며 성장하는 일종의 무기 생명체라고 알려져 있다. 내 시야로 보면 특유의 마력 흐름이 벽을 따라 희미하게 흐르는 게 보이는데, 이곳은 이전에 들렀던 미궁들과 달라. 흑마술사의 힘으로 변이가 일어났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도령의 강화 영혼 시야는 마력의 흐름마저도 볼 수 있다. 도령 눈썰미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면 그게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안느는 물론 뒤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이실리테도 벽과 천장을 둘러보고 위상력 감응으로 이상한 점을 파악하려 애를 썼지만, 자신들의 감각에 그런 건 느껴지지 않는다.
〈제법인걸.〉
릴라이스의 재미있다는 감탄을 귓등으로 흘려넘긴 환인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여자친구들에게 지시했다.
“안느는 흑마술과 함정 탐지에 좀 더 집중하고, 이실리테는 앞으로 나가서 안느의 뒤에 붙어 적이 출현하면 적이 접근하기 전에 최대한 멀리서 죽이도록 해라.”
=어.=
=네.=
환인의 지시 이후 제법 긴 통로를 지나 방 같은 것을 세 번째 지나쳤을 때, 흑마술사의 피조물과 흡사하게 생긴 늑대 떼가 출현했다.
몸 곳곳에 부푼 혹. 털이 빠져 듬성듬성한 모피, 진물이 흐르는 눈과 코와 주둥이. 이형종 특유의 창백한 질감.
그르르르르-
으르르—
작은 곰만큼이나 큰 덩치의 늑대 네 마리가 으르릉, 역한 냄새를 풍기는 침을 뚝뚝 흘리며 일행을 향해 살기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실리테가 날린 빛의 검이 허공을 빠르게 수놓은 순간 이형종의 머리가 동시에 투두둑 떨어졌다.
방패를 세운 채 조심스럽게 다가가 교단의 증표로 사체를 살핀 안느가 환인을 돌아보며 말한다.
=딱히 저주라던가 사후 2차 피해를 일으키는 부류의 육체 조작은 이뤄지지 않았어. 단순한 시체야.=
“……그런 식의 변이도 가능한 건가.”
=연성 계통 흑마술사라면 생물을 살아있는 역병 폭탄으로 만들어 돌진시키는 것도 있으니까.=
사람의 머리로 만든 저주 폭탄을 떠올린 환인은 새삼 뒤숭숭한 세계라고 생각하며 거무튀튀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도령. 이놈들…… 물이 빠져나간 뒤에 태어난 거겠지?=
“그래.”
미궁으로 내려왔을 적, 처음에는 시커먼 동굴 천장과 벽을 보고 원래 이런 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천칭의 끄트머리로 바닥을 긁자 회색이 드러난다.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는 전압의 전기가 흐르며 표면을 살짝 구워버려 이런 색이 된 것이며, 전기는 이곳까지 흘렀다.
그러나 저것들의 몸에는 전기가 흐른 흔적이 없다. 그 말은 물이 전부 빠져나간 뒤에 재생된 이형종이란 뜻이다.
그걸 눈치챘던 안느가 으음, 신음을 흘리며 미궁의 안쪽으로 향하는 통로를 노려보았다.
=원래는 하이어 울프가 나오는 미궁인데 이런 게 나타났다는 건…….=
“흑마술사의 손에 변이된 미궁이 새로 만들어낸 이형종이라는 거지.”
투라드 마을 사람의 이야기로 들은 바에 따르면 이 미궁은 방이 12개 정도 있다고 했다. 여기가 4번째이니 1/3 정도 지나왔다는 뜻.
“계속 간다.”
안느와 이실리테가 먼저 앞장서고 환인도 강화 영혼 시야로 미궁의 상태를 상시 주시하며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지나 빈방을 넘었을 때 일행은 농구장 정도의 커다란 방에 들어설 수 있었고 그곳에서 변이 늑대 떼와 다시 마주쳤다.
그다음 방에서는 석주 기둥에 매달린 채 바짝 타죽은 늑대 사체 다수를 발견했다.
8번째 방, 9번째 방에서 변이 늑대 2~4마리 무리와 마주쳤고 10번째 방에서는 대량의 늑대 사체가 한데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머릿수로만 빠르게 숫자를 센 안느가 입을 열었다.
=17마리야. 미궁 입구에서 해치운 게 14마리였고 오면서 발견한 늑대 사체가 여덟. 총 서른아홉이니…… 투라드 마을을 물리적으로 밀어버릴 정도의 전력이었네.=
=확실히 오면서 싸운 이형종은 2급에서 3급 사이 정도로 느껴졌었어. 그만한 괴물이 40마리면 아까 본 투라드 마을 전력을 생각해봤을 때 막아내는 건 불가능 했을 거야.=
=거기다 저주 폭탄도 있었구요…….=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여전히 거무튀튀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군……. 흑마술사의 힘이 부족해서 이형종을 변이시키는데 그친 건가.’
흑마술로 만든 함정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줄곧 정신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여기까지 오며 함정은커녕 늑대를 제외한 다른 이형종을 보지조차 못했다.
게다가 거의 일방통행이나 다름없는 미궁 구조다. 틀림없이 자신들의 진입을 확인했을 텐데 흑마술사가 아무런 대응을 해오지 않는 것도 의심스럽다.
‘설마 번개에 죽었나.’
〈후훗.〉
재미있다는 듯한 웃음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시야 한가득 릴라이스의 풍만한 물빛 반투명 유방이 환인의 얼굴을 덮었다.
물과 같으면서도 따스한 질감. 그리고 몸을 통과해 건너편 벽이 보이는 상황에 잠깐 굳었던 환인은 두 걸음 물러서며 입을 열어 물었다.
“왜 웃지.”
〈너 마음에 들어. 나랑 약식 계약하지 않을래?〉
“…….”
=……?!=
=……!=
크게 놀라는 여자들과 다르게 환인은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왜 웃었지.”
〈이야기해주면 약식 계약할 거야?〉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여 몸을 돌리니 이번에는 릴라이스가 허공을 헤엄치는 것처럼 부드럽게 날아와 몸으로 환인의 앞을 가린다.
그러면서 손을 뻗어 그의 뺨과 목선을 섬세한 손길로 어루만졌다.
〈물은 모든 것을 조용히 포용하여 천천히 시간을 들여 정화하는 생명의 원천이야. 하지만 번개와 벼락은 삿되고 부정한 것을 단숨에 태워서 정화하지.〉
“……내가 물로 흘려보낸 벼락에 미궁이 정화되었다는 건가.”
〈물에 번개를 더했어. 정화에 정화를 더하였으니 역겹고 더러운 것들이 사멸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
쿡쿡,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은 릴라이스는 기다란 물고기 하반신으로 환인의 몸을 살짝 휘감고는 유방을 그의 어깨에 사뿐히 올리며 말했다.
〈원래 못생긴 것은 상종하지 않는 나이지만, 너는 달라.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응, 무척이나 재미있어. 관심이 생겨. 못생긴 것쯤이야 나랑 약식 계약을 맺으면 조금 보완되겠지? 그러니 나랑 약식 계약하는 것을 허락해줄게. 나랑 계약해.〉
“필요 없다.”
=앗……!=
=아…!=
환인의 칼 같은 대답에 안느와 백려강이 안타까움의 탄식을 짧게 흘렸다가 릴라이스를 힐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 행동에 다시 키득 웃은 릴라이스가 연인처럼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속삭인다.
〈저 암컷들이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너라면 알 텐데?〉
그럼에도 자신과 계약을 하지 않을 거냐는, 절대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가득한 목소리.
정령과 계약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릴라이스가 말한 약식 계약, 그리고 안느와 루모가 맺은 정식 계약.
정식 계약은 주도권을 계약자와 정령이 8:2 정도로 나눠 갖는다.
정식 계약자가 정령에게 요구하거나 지시를 내리면 정령은 어지간해서는 거절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거부도 대체로 존재와 관련된 것, 물의 정령에게 용암 구덩이로 뛰어들라거나 불의 정령에게 바다로 들어가라는 식의 지시에만 이루어진다.
그러나 약식 계약은 주도권이랄게 없다. 계약자가 정당한 요구나 지시를 내리더라도 정령이 내키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약식 계약.
이를테면 능력이 부족한 정령사가 강한 정령과 계약을 맺을 때 쓰는 방식이다. 약식 계약으로 붙어다니며 친화력을 올린 뒤 정식 계약을 맺는 것.
이 때문에 약식 계약에서 계약자가 부담하는 정신력, 체력, 마력적인 부분은 정식 계약과 다를 바 없다.
문제라면 환인에게는 정령 친화력이 없다는 것. 최악에는 에너지 셔틀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초월급 정령이라면 소환 시, 그리고 명령을 내릴 시에 드는 체력과 정신력 또한 막대할 것이다.
막말로 릴라이스가 역소환을 거부하고 계속 현세에 구현되어있길 바란다면 환인은 체력과 정신력을 계속 헌납하며 기절한 채 지내다 사망한다는 미래도 있는 것.
환인은 차가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가 처음 했던 말을 벌써 잊었나.”
〈…….〉
“너는 확실히 강하다. 하지만 그뿐이지. 그 강함을 빌리기 위해 제멋대로인 네 비위를 맞추며 여행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손해다. 계약은 사양하지.”
비위를 열심히 맞춰주어도 귀찮다고, 재미없다고, 지루하다고 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는데 만약 위급한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말 그대로 끔찍한 재해가 된다.
그런 불확정성에 노력과 심력을 부을 생각이 없는 환인은 릴라이스를 밀어내며 아깝다는 표정이 역력한 여자친구들에게 미궁 안쪽을 가리켰다.
“계속 나아간다. 흑마술사가 죽었을 가능성이 생겼지만 방심하지 마라.”
=으응.=
=네, 주인님.=
〈…….〉
환인의 꾸밈없는 진심과 무시에 릴라이스의 표정이 기분 나빠진 여고생처럼 변했다.
감히 내가 먼저 약식 계약을 제안했는데도 거절해?!
자신이 먼저 아까 있었던 일을 사과하고 고개를 숙인다면 환인도 다시 생각할 것을 릴라이스도 알지만, 이 세상에 다 합쳐 오십도 안되는 물의 초월 정령인 자신이 먼저 사과하고 고개를 숙인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삐진 여고생 같던 얼굴로 점차 멀어지는 환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릴라이스는 어느새 조금 풀어진 얼굴로 그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그렇다고 걷어차긴 아까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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