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37화 (537/813)

531 흑마술사의 마궁

“…….”

환인은 잠시 눈을 감고 정신 집중과 이완을 통해 릴라이스로 인한 정신적 피로를 풀어나갔다.

실상은 스트레스 요인을 강제적으로 마음속에 파묻어 인지 요소를 줄이는 방편이지만, 감정적으로 돌발행동을 저지를 확률을 대폭 낮추기에 그럭저럭 효용성이 있는 기술이다.

그렇게 정신적 피로를 미래로 보내놓은 환인은 살기를 갈무리하며 삐졌다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고 흥흥거리는 릴라이스를 응시했다.

정령. 100% 영적 속성 생명체.

영도의 기록실에서 읽은 정령에 관한 서적에서 정령의 등급은 최하급 - 하급 - 중급 - 상급 - 최상급 - 초월급 - 정절頂絶급으로 나누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정령의 발생은 특정한 체질의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의 잔류물로 발생하는 것이 정령이라고 알려졌다.

열정적인 사람. 냉정한 사람. 포근한 느낌의 사람. 주변을 활기차게 만드는 사람. 정적과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 땅과 흙에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 밤이 좋거나 밤에 오래 지내는 사람. 비를 부르는 사람…….

이런 식으로 발생하는 정령은 최하급~중급까지다.

상급부터는 영맥靈脈이라 부르는 위상력의 맥에서 맺힌 결정에서 태어나거나 해당 속성력이 밀집되어 속천屬泉이라 통용되는 장소에서 작용과 개화가 벌어져 태어나는데, 그런 방식으로 탄생한 정령의 힘은 하급과 중급의 차이를 몇 배나 뛰어넘는, 일종의 격에 가까운 차이를 가진다고 한다.

최하급은 1급 직업자. 하급은 2~3급 직업자. 중급은 4~5급 직업자와 비슷하지만, 상급은 사람의 절정 수준이라고 하는 7급이며 최상급은 추정 8~9급 정도의 강함인 것.

이실리테와 안느가 대략 7급에서 8급 사이의 강함이니 응집된 자연의 결정에서 태어난 상급 이상 정령이 얼마나 강한지 익히 짐작 가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저 정령, 릴라이스는 어떤 등급인가. 9급 직업자 정도인 최상급?

아드네빌라와 동급이라 생각해본다면 9급으로도 미진한 느낌이다. 역시 초월급인가.

환인의 생각이 깊어져 가는 와중에 안느가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환인을 불렀다.

=도령…….=

“음.”

=저 정령, 아무리 봐도 초월급이야…….=

“역시 그런가.”

정절급은 계통별로 단 한 개체뿐이다. 그 힘은 신력이라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니오네브레스 역사를 통틀어 정절급의 정령이 나타난 것은 단 한 차례.

수많은 정령을 납치, 포획해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려 연구하던 어느 집단의 손에 상급 정령까지 잡혀 에너지화되던 중 현신, 해당 지역을 통째로 지워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그때 피해 반경이 2,000km에 달했다던가.

그 정도면 중국이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넓이다.

공식적으로는 역사상 그 누구도 정절급과 계약을 맺지 못했다고 전해져온다. 그런 정령이 작은 호수에 처박혀있을 리 없으니 현실적으로 초월급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초월급 정령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나.”

=솔직히 들쑥날쑥해. 메리아놀에도 초월급 정령과 계약을 맺은 분이 두 분 계시는데 두 분의 힘 차이는 상하 격차가 뚜렷하다고 하거든. 그런데 저 정령은 그런 두 분의 이야기보다 더 강한…… 느낌이야. 물론 직접 느끼고 경험해본 게 아니라서 확답은 못 하지만.=

“소환자가 있으면 더 강하고 안정적인 존재가 정령이라 하지 않던가.”

=맞아.=

“그런데도 저 정도라는 거군.”

=……맞, 아.=

“후…….”

환인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과 버금가는 그런 존재가 뒤에서 기분 나쁜 티를 풀풀 내고 있다는 것은 사신의 낫이 목에 드리워진 것과 마찬가지다.

사주팔자라던가 점괘 같은 것은 믿지 않는 환인이지만, 솔직히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다.

대체 자신의 운명에 무슨 액운이 끼었기에 가는 곳마다 이런 일을 당하는 건가.

뭐만 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과 마주치거나 하니 니오네브레스에 진절머리가 나는 환인이었다.

=저어, 주인님. 저 정령이 주인님께 무슨 짓을 하려 했었던 건가요?=

이걸 물어봐도 될지 머리와 가슴이 맹렬히 싸우다 머리가 승리한 이실리테가 기사검을 내리면서 환인에게 질문했다.

“정령이니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가설을 전제로…… 내게 무언가를 하려 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언가인가요?=

“그래. 아마도 추측하자면 아드네빌라가 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겠지.”

=…….=

=…….=

환인은 릴라이스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태도를 이야기해주었다.

굉장히 못생겼지만, 재미와 흥미가 돋는다며 관심을 보이던 모습.

젖가슴을 문대며 희롱하다가 자신이 매몰차게 대하자 조금 심기가 상한 모습을 보였던 것.

그리고 자신이 과민반응하게 했던 그 접촉 시도까지.

지금 생각해본다면 자신에게 막대한 관심이 생겼다는 릴라이스의 말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보기에 별것 없어 보이는 추남(환인)이 여배우(아드네빌라)에 톱모델(닌실)까지 끼고 거리를 걷고 있다면 누구나가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겠지.

“이실리테, 너도 정령의 제멋대로인 성격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좋다.”

=네.=

이실리테는 툴툴거리는 미친 정령을 잠깐 응시하다가 후- 울렁이고 두근거리는 내심을 한숨으로 흘려보냈다.

=…….=

검은 물이 계단 위쪽까지 출렁이는 미궁 입구를 경계심과 함께 응시하던 이실리테는 생각에 잠긴 환인을 힐끔 보았다.

그러자 조금 전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심장이 다시금 쿵쾅콩닥거리기 시작한다.

멈춰라, 벼락같은 한 마디에 온몸의 피와 심장이 한순간 멈추는 듯한 충격. 그건 대체 뭐였을까.

이실리테는 고민을 거듭하다 바로 옆의 안느에게 작게 물었다.

=안느. 아까 주인님의 한 마디…… 뭐였는지 알겠어?=

=……아니. 짐작 가는 것도 없어. 대성녀님의 목소리하고 비슷한 거 같았지만…… 전혀 달랐지.=

=응…….=

솔직히 말해서 그 한마디를 들었을 때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이 전신을 내달렸다. 말 그대로 온몸이 꽁꽁 언 것처럼 멈춰버렸었다고 할까.

절대적인 존재의 명령에 몸은 물론 영혼까지 그에 따르는 느낌이었었다.

말로 표현하자면…….

=…신의 한 마디.=

=…….=

정말 그거일까? 그렇다면 주인님의 몸은 괜찮으신지 이실리테는 문득 걱정이 앞섰다.

인간의 몸으로 신의 힘을 빌리는 것은 엄청난 후유증, 혹은 대가를 동원한다고 들었다.

전쟁터에서 신의 힘이 몸에 강림해 전투 내내 기적적이고 압도적인 힘을 보여준 뒤 전투가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죽은 용병이나 병사의 이야기는 비교적 흔하다.

‘주인님…… 정말 괜찮으신 거겠지?’

백려강이 돌아올 때까지 이실리테와 안느의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대화가 오가지 않으니 걱정이 걱정을 불러 근심이 태산처럼 쌓였을 지경.

움직여서 걱정을 드러내자니 뒤에서 째려보는 미친 정령이 신경 쓰이고 환인이 지시한 미궁 감시에 소홀해지는 거 같아 망설여진다.

그래서 백려강이 돌아와 환인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여자들은 속으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매우 멀쩡했으니까.

“부적이군.”

=네. 이게 유리 언니가 가장 강한 전격 속성 부적이라고 했어요.=

“6분 만에 다녀오느라 수고했다.”

=넵!=

힐끔힐끔, 릴라이스를 곁눈질하는 백려강에게서 복잡한 도형이 그려진 부적 다발을 받아든 환인은 바로 한 장을 꺼내 미궁 입구, 내부에 물이 빠지는 곳이 없는지 여전히 물이 고여있는 계단에 던진 뒤 동화를 힘껏 날렸다.

팅- 소리와 함께 총알처럼 날아간 동전이 부적을 관통하자 빠지지직—!! 샛노란 번개가 10초간 물 주변을 빠직거리다 잦아들었다.

“…….”

10초 정도 기다린 환인은 이어서 두 번째 부적을 던져놓고 다시 동전을 날려 찢었다.

빠자자작……! 찌지지직-! 파지지지…!

세 번, 네 번, 다섯 번. 시간을 두어서 계속 부적을 찢기만 하는 모습에 안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령. 감전을 노리고 계속 찢는 거야?=

“미궁 안쪽까지 전류가 이어지려면 이 주변을 새카맣게 태울 정도의 전력이 필요하겠지.”

=그럼 왜 벼락 부적을 찢는 건데?=

“번개 정령을 부르기 위해서.”

=아.=

하지만 번개 정령이 와도 문제인 것이, 환연이 정신을 차리고 있다면 번개 정령을 다뤄달라고 부탁하면 되지만 지금 환연은 기절과 혼절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중이다.

처음에는 릴라이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펼친 신언에도 영향을 받았겠지.’

이실리테와 안느도, 피조물도 신언에 직격당했는지 한순간이지만 딱딱하게 굳었던 걸 보면 반은 정령인 환연이 더 큰 영향을 받았을 터.

다행인 점은 강화 영혼 시야로 본 환연의 상태가 기절과 비슷할 뿐이라는 걸까.

아무튼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계속 부적을 찢는다. 그렇게 개당 10은화씩은 하는 부적을 7장 째 찢었을 때였다.

파직- 지지직.

=오? 도령, 번개 정령이 온 거 같아.=

이전처럼 스파크와 전하가 흘러 사라지지 않고 한데 작게 모인다.

“그래. 이리와라, 재미있는 걸 보여주지.”

눈을 동그랗게 뜬 이실리테와 백려강이 다가오는 모습에 환인은 그녀들에게 고개를 저었다.

=……!=

=앗.=

뒤늦게 번개 정령에게 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둘이 얼굴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을 때, 환인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다가오는 번개 정령을 자신의 몸에 강령시켰다.

환연이 있을 땐 쓸 일이 없었는데. 어찌어찌 사용할 일이 생기긴 하는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몸 안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느낌으로 손바닥에 힘을 집중하자 환인의 손가락 끝에서 딱, 따닥— 스파크가 튀기 시작한다.

후우, 심호흡한 환인은 심핵력을 끌어올릴 준비를 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물러—.”

어느샌가 바로 뒤에 바짝 붙어 진심으로 호기심을 드러내는 릴라이스를 향해 눈썹을 찌푸렸던 환인은 여자친구들을 좀 더 뒤로 물린다.

“……다들 물러서라. 처음이라 힘 조절이 어려울 텐데 자칫 감전당할 수 있다.”

=괜찮아요, 주인님.=

=어. 우린 알아서 방어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옆에서 지켜줄 사람은 있어야지.=

=저, 저는 물러날게요…….=

“그래.”

주제를 파악하고 물러나는 백려강에게 품 안의 환연을 넘겨준 환인은 손을 찰랑이는 물속에 담근 뒤 입을 열었다.

“시작한다.”

그 말과 함께 이실리테의 몸에 옅은 위상력의 막이 처지고, 안느도 몸에 위상력을 두르는 동시에 성술 마력 방호를 펼쳐 자신과 환인, 이실리테에게 덧씌운다.

자신은 위상류가 있어 전기에 딱히 영향을 받지 않을 텐데.

어쨌든, 후우- 숨을 들이마신 환인은 잠시 정신을 집중하다가 심핵력을 일으키는 동시에 영기를 손끝에 보내며 전기를 일으켰다.

— — — —!

=윽!=

=하읏.=

한순간 눈앞이 하얗게 변했던 환인은 귓가에 이실리테와 안느의 신음이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를 인식했다. 하얗기만 하던 눈앞이 다시 색을 찾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시선을 조금 들자 체렌코프 현상처럼 물속이 푸르게 빛나는 게 눈에 먼저 들어온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심핵력에 영기까지 곁들어진 니오네브레스 특유 현상이라고 이해한 환인은 몸 안 상태부터 살폈다.

심핵력의 소모는 5% 정도, 영기는 그보다 좀 더 많이 감소해 18%가량 줄었다.

영기 소모는 어쩔 수 없다. 속성 정령을 강령한 뒤 정령의 속성력을 일으키는 데 영기를 자원으로 쓰니까.

하지만…….

‘방금 잠시 정신을 잃었던 거 같은데.’

시간으로 따지면 0.5초도 안 되는 정도였으나 분명 눈앞이 하얗게 변한 채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음을 인지한 환인이었다.

천천히 출력을 올릴 걸 그랬나. 너무 급하게 올린 여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심핵력과 영기를 계속 소모하며 전기를 물속으로 흘려보내고 있으니 이실리테와 안느가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물러섰다.

주변으로 흐르는 전류를 버티지 못한 모양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 전기를 발생시키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위상류와 마력 방호 덕분인가.

약 1분 동안 심핵력 12%와 영기 50%를 소비한 환인은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가 살짝 현기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단번에 영기를 많이 쏟아부어서인가. 그게 아니면 위상류가 계속 발동했기 때문에?

“…….”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으로 현기증을 떨친 환인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곤두선 머리카락을 애써 다듬는 이실리테와 안느, 그리고 좀 전보다 세 배는 더 멀리 떨어진 백려강을 볼 수 있었다.

“너희 둘이 그렇게 됐을 정도이니 미궁 안에 있던 놈들은 다 죽었다고 봐도 되겠지.”

=어어. 방심 안 하고 잔뜩 힘주고 있었는데도 눈앞이 번쩍거리더라.=

=주인님의 문양 에너지는 정말…… 굉장하네요. 처음 30초 정도는 어떻게 버텼는데…….=

전기에 뻗친 머리를 한 손으로 빗어 내리는 이실리테의 감상에 안느도 고개를 마구 끄덕인다.

피식 웃은 환인은 왠지 좀 전보다 더 관심이 강해진 릴라이스의 시선을 무시하며 흙먼지가 둥둥 떠다녀 조금 탁한 물이 고인 미궁 입구를 쳐다보았다.

일단…… 안쪽을 청소하는 것은 얼추 된 거 같은데, 미궁에 가득 찬 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릴라이스의 분노에 도망갔던 정령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다. 물의 정령을 강령한 뒤에 물을 밖으로 퍼내야 하나.

하지만 무력으로 사출하는 것과 물질로 구현된 물의 조작 운동은 전혀 다를 텐데.

환연이 일어나있으면 물의 정령을 시켜 금방 물을 빼냈을 텐데, 계단 위쪽까지 찰랑이는 물을 보면서 고심하고 있으니 릴라이스가 수호령처럼 뒤에 바짝 붙은 채로 속삭인다.

〈물 때문에 곤란해 보이네. 내가 도와줄까?〉

“네 도움은 안 받는다.”

〈그러지 말고. 도와줄게.〉

“필요 없다.”

〈아까 그 일로 삐진 거니? 못생긴 데 속까지 좁으면 사랑 못 받는다?〉

“…….”

환인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릴라이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가락을 세워 그 끝에 자그마한 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 보인다.

정령들은 여러모로 자기중심적이고 호기심 마왕에 재미 본위인 성격인데 릴라이스 또한 그에 걸맞은…… 아니, 그러한 성격에서 정수만 뽑아 형성된 인격이 느껴진다.

「아으그그그…….」

백려강의 손바닥 위에서 몸이 삐걱거린다는 듯이 앓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는 환연에게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릴라이스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의심이 많다. 강한 힘을 가졌으면서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마찰과 분쟁을 일으킨 대상은 특히 더 의심하지. 너는 존재성에 맹세했기에 놔두는 것일 뿐. 이 이상 관계되고 싶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니 더는 다가오지 말길 바란다.”

〈못생겼지만 솔직해서 좋네. 하지만~ 난 네가 엄청 관심이 가는걸?〉

그렇게 말한 릴라이스가 손가락을 가볍게 한 바퀴 돌리니 미궁 안의 물이 쏴아아악— 마치 시간을 되감은 것처럼 단숨에 미궁에서 빠져나와 허공에서 한데 뭉친다.

이어서 다시 손가락을 한 바퀴 돌리자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수십톤에 가까운 대량의 물.

환인의 이마에 식은땀이 살짝 흘렀다.

강화 영혼 시야로 릴라이스를 해체할 듯이 응시하고 있었는데 방금 두 번의 손짓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 개입했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공간 이동도 아니었고 힘으로 소멸시킨 것도 아니다. 그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

환인은 직감했다. 이 정령은 자신과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사람은 살다 보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여러 인간관계를 형성한다.

개중에는 이쪽이 좋아서 상대에게 다가가지만, 상대는 이쪽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거리를 두는 관계도 있고, 반대로 이쪽은 체질적으로 저쪽과 안 맞는데 저쪽은 되려 좋다고 다가오는 관계도 있다.

자신과 릴라이스는 후자다.

아니, 오만방자하고 방약무인한데다 어린애 같은 성격에 강한 힘을 가진, 제어 불가능한 존재를 세상 누가 좋아할까.

아드네빌라를 상대할 때보다 더 피곤해지는 것을 느낀 환인은 릴라이스와 대화하는 것을 포기하고 여자친구들을 불러 미궁을 가리켰다.

“지금부터 미궁에 들어간다. 막대한 전기를 흘렸기에 흑마술사가 인위적으로 설치한 함정이라던가 피조물은 훼손되고 죽었겠지만, 미궁 자체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긴장을 풀지 않도록 해라.”

=네, 주인님.=

=으응.=

릴라이스는 맹세에 따라 이쪽에 피해를 끼치지 못한다. 무시하면 그만이다.

‘피해의 범주가 넓고 해석의 여지가 많으니 릴라이스가 교묘하게 장난을 걸어 귀찮고 번거롭게 한다면…….’

그땐 알류겔 호수로 돌아가 아드네빌라에게 중재를 요청하든, 영도로 돌아가 닌실 대성녀에게 조력을 요청하든 해야겠지.

“가지.”

정신을 차렸지만 기운이 없는지 축 늘어진 환연을 백려강에게서 받아든 환인은 처음부터 물에 잠기지 않은 것처럼 물기 하나 없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흥~ 흐흥~ 흐흐흥~.〉

릴라이스가 콧노래를 부르며 뒤를 바짝 따른다. 그게 신경 쓰여서 환인은 목덜미가 뻣뻣해질 지경이지만, 작은 한숨과 함께 떨쳐버리고 진형을 지시했다.

“선두에는 안느가 서라. 사악함의 탐지 성술을 계속 발동하도록 하고 이실리테는 최후방, 백려강은 내 뒤에서 따라와라.”

안느가 엄청 신경 쓰인다는 얼굴로 릴라이스를 힐끔거리며 지나쳐 가장 선두에 나서고 환인의 지시대로 백려강과 이실리테가 일렬로 뒤에 늘어선다.

약한 두통에 심핵력은 20%도 남지 않았고 영기도 46%가량.

그러나 여자친구들은 만반의 상태이며 영기는 지금도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

심핵력을 쓰지 않더라도 흑옥이 있으니(릴라이스의 눈이 신경 쓰여 정령들을 영혼 구슬로 만들지 않았다) 기본적인 무력은 충분할 것이다.

환인은 중급 정령을 둘 더 불러들여 이실리테와 백려강에게 강령하고 어둠이 모여든 듯한 흑마술사의 미궁에 내려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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