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36화 (536/813)

530 흑마술사의 마궁

「환인, 정령들 데려왔어.」

물의 정령들과 함께 돌아온 환연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던 환인은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온 인어 형상의 정령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1:1 스케일의 푸른 정령을 본 환인의 감상은 ‘가진 힘에 따라 미모가 바뀌는 건가’였다. 그게 아니고서는 저 인어 형상의 물의 정령이 가진 미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

진부한 표현이지만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푸른색이지만 눈동자에는 폭풍 치는 바다의 광포함이 새겨져 있고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 앵두 같은 입술에 갸름한 턱선은 바람 불지 않는 호수의 고요함으로 그린 듯하다.

거기다 영육靈肉은 또 어떠한가.

그 얼굴에 걸맞은 가녀린 목과 어깨선, 그리고 그런 상반신에 어울리는 풍만한 유방과 앙증맞은 유두.

모래시계처럼 잘록한 허리는 일정 이상의 미모일 경우 획일적인 아름다움이 되기 마련임에도 절로 손이 뻗어나갈 만큼 유혹적이다.

특이점이라면 윗허벅지부터 물고기의 하반신이 시작된다는 걸까. 그 때문에 양 허벅지 사이에 Y 존이 형성되어있는데 도끼로 찍은 듯한 자국의 통통한 대음순과 귀여운 존재감을 자랑하는 음핵 표피가 적나라하게 보인다.

자연을 미모로 빚어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아름다움.

저 정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상급 정령인가? 하지만 중급과 상급의 격차가 너무 큰데. 그렇다면 최상급?

상급이든 최상급이든 그동안 보이지 않다가 왜 이제 와서 눈에 띈 건지도 의문이다.

〈으음?〉

환인의 시선을 느낀 정령은 호기심을 더욱 진하게 드러냈다. 설마 내가 보이나? 플뢰도 아니고 정령 친화력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날 볼 수 있다고?

「야. 정령들 데려왔다니까?」

3초. 환인이 정령을 본 지 3초가 지났을 때 환연이 뭐하냐는 듯이 환인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환연의 눈에도 저 커다란 정령이 안 보이는 건가.

그녀의 재촉에 커다란 물의 정령에게서 시선을 돌린 환인은 일단 눈앞에 닥친 일부터 먼저 하기로 하고 손을 들었다.

“…….”

그런데 이 경우에는 누구에게 심핵력을 흘려 넣어주어야 할까. 환연? 아니면 중급 물의 정령?

정령이겠지. 환연은 특유의 자질로 소통해 지시 아닌 지시를 내리는 거니까.

환인이 손가락을 내밀자 표적이 된 물의 정령이 「으악!」 괴상한 소릴 내고는 꺄하하 웃으면서 도망친다.

“환연, 정령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라.”

「야! 도망가지 말고 이리 와!」

흥미로워하는 인어 형상 정령의 시선을 느끼며 환인은 환연에게 붙잡혀 버둥거리는 물의 정령에게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심핵력을 아주 약간. 0.1%가량 밀어 넣어주었다.

「우오오옷?! 힘이 넘쳐흐른닷!?」

환인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목덜미를 잡힌 고양이처럼 얌전해졌던 물의 정령은 심핵력이 주입된 순간 크기가 10배 이상, 7살 꼬마 정도로 훌쩍 커지더니 몸 주변으로 희미한 물의 아우라를 흘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드러나는 폭주의 낌새.

촤아악- 촤아앗-

=어푸?!=

=윽.=

=아앗.=

사방으로 뿌려지는 물줄기에 얻어맞은 여자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깜짝 놀란 환연이 커진 물의 정령의 정수리를 탁탁 내려치면서 미궁 안으로 물을 퍼부으라고 다그쳤다.

「여기?! 여기!?」

「그래! 거기다 있는 힘껏 물을 퍼부으면 돼!」

「간다아아아~!」

콰과과과과-

아이만큼 커진 물의 중급 정령이 두 팔을 내밀자 양손에서 소방차가 뿌리는 물만큼이나 강한 수류가 형성되며 미궁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수량도, 수압도 거의 작은 폭포 수준이다.

=와……. 물의 정령들이 저렇게 물을 퍼부으면 금방 미궁 안이 물로 가득 차겠네.=

=저, 주인님. 인신 공양으로 끌려간 여자들은…….=

“여자들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할 거다. 미궁 안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면 흑마술사가 본격적으로 움직일 수 있으니 슬슬 전투를 준비하도록. 중앙은 신성 방호벽을 펼칠 수 있는 안느가 서서 피조물의 공격과 저주에 방비해라. 이실리테는 뒤에서 다중 검기로 원호하고.”

사방으로 뿌려지는 물을 가벼운 동작으로 전부 피해 하나도 젖지 않은 환인이 지시를 내리고는 미궁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폭포 같은 물줄기를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넷만 있었어도 충분했겠는데.”

물이 초당 쏟아져 들어가는 양을 가늠해보면 단층, 그것도 짧은 미궁 정도는 몇 분 안에 가득 채울 수준이다.

「그럼 나머지 여섯은 돌려보낼까?」

「뭐?」

「어?」

환연의 질문에 남은 정령 아홉이 멈칫했다가 순간 환연에게 달려들어 포도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소리치기 시작한다.

「나! 나 할래! 나한테 해줘!」

「나나나나! 나도나도!」

「나도 저거 해줘! 해줘어어어!」

「아악?! 뭐, 뭐야! 그만 매달려!」

자신이 아니라 왜 환연에게 매달리는 걸까. 환인은 물의 정령들에게 파묻혀 버둥거리는 환연의 팔을 살짝 잡아 들어 올리며 약한 강제력으로 물의 정령들에게 말했다.

“저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차례대로 자연의 기운을 넣어줄 테니 줄 서서 얌전히 기다려라. 난동부리거나 끼어들기를 하면 그 정령은 호수로 돌려보내 버리겠다.”

「……!」

「……!」

「……!」

차자자작- 완전히 흥이 올라 물을 마구마구 분사하고 있는 정령 뒤로 나란히 서는 물의 정령들.

“한 줄로 설 필요는 없다. 세 줄이면 되겠군.”

차자작-

다시금 세 줄로 선 정령의 가장 앞열에 심핵력을 살짝 넣어주니 앞선 정령과 마찬가지로 7살 남짓한 어린아이만큼 커져서는 신나하며 물을 미궁 안으로 마구 퍼붓는다.

그즈음 처음으로 심핵력을 받아들인 정령은 그 크기가 절반 가까이 줄어든 상태.

폭주 기미도 사라졌고 줄어드는 속도도 점점 빨라지는 느낌이다.

‘힘을 쓸수록 팽창했던 크기가 줄어드는가.’

그렇다면 걱정할 일은 없겠지. 잠시 후 모든 힘을 다 쓰고는 에이~ 아쉬워하며 정령이 줄에서 빠지자 두 번째로 서 있던 정령이 앞으로 나와 얼른 힘을 달라는 표정으로 환인을 쳐다본다.

이러는 와중에도 환인에게 요구하거나 요청하지 않는게 정령답다고 할까.

그런 정령에게 심핵력을 0.1%가량 흘려 넣어주었을 때였다.

줄곧 뒤에서 지켜만 보던 인어 물의 정령이 환인의 몸에 얽히듯 바짝 붙어 그의 어깨에 풍만한 젖가슴을 올려놓으며 중얼거린다.

〈흐응……. 신기해. 친화력은 참새 눈물만큼도 없으면서 이토록이나 강한 지배력이라니…… 이 못생긴 인간에게 명령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배덕감에 온몸이 찌릿거리는 걸.〉

“…….”

객관적으로도 자신은 못난 편이 아니다. 정령에게 있어 미모란 정령 친화력이 모든 지분을 가져가기 때문이겠지.

지구를 예시로 든다면, 매우 못생긴 재계 서열 1위의 황태자가 아이돌이나 배우를 불러 돈과 사회적 지위로 깔아뭉개면서 지시하는 셈.

〈게다가 이 뒤죽박죽인 냄새는 뭐람? 기린에 백룡의 냄새도 섞여 있는 것 같고…… 하늘 평원의 냄새도 조금이지만 나는 거 같네?〉

자신의 머리며 목의 냄새를 맡으며 하는 정령의 이야기에 생각이 깊어진다.

환연도 그렇고 정령 기사가 된 안느도 이 정령을 못 보고 말도 듣지 못하는 건가. 게다가 아드네빌라처럼 정체불명의 냄새로 상대의 행적을 읽을 수 있고…… 역시 평범한 정령은 아니겠지.

그때 성벽의 방패를 앞으로 내세워 땅에 박아 고정한 안느가 잠깐 당황하다가 가죽 갑옷의 목깃 쪽을 늘려 안을 들여다본다.

=으응? 루모,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루모가 갑자기 겁먹은 것처럼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어. 미궁 안에 얘를 겁먹게 하는 뭔가가 있는 건가?=

=안느 언니. 우리가 도착했을 때부터 그랬나요?=

=그건 아니야. 얌전하다가 갑자기 이러네.=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자신의 어깨를 가슴걸이처럼 이용하는 인어 형상 물의 정령을 어깨에서 털어내며 말했다.

“바로 근처에 등급을 상정할 수 없는 물의 정령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군.”

「응?」

=어? 뭐?=

“환연이 물의 중급 정령들을 데려올 때 따라온 듯하다.”

눈을 크게 뜬 환연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눈썹을 한껏 올리며 불신을 드러낸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내 눈에는 쟤들 말고 다른 정령은 아무도 안 보이는데?」

=나도……. 그런데 환연이한테도 안 보여? 그럼 의식적으로 시야에서 벗어나는 능력을 지녔다는 건데… 그 정도면 못해도 최상급…….=

안느의 표정에 긴장이 스며든다. 그 표정 변화에서 환인은 이 정령이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존재라는 암시를 받았다.

그야 그렇겠지. 아드네빌라와 닌실을 언급할 때 억양이나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최소 그들과 비슷한 급이라는 방증이다.

닌실이나 아드네빌라는 그 기운과 기백에서 압도당해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느꼈다면 이 정령은 오히려 그런 게 전혀 없어 더 위협적인 느낌.

〈저 플뢰 아이는 너보다 조금 덜 못생겼지만, 제법 지식과 눈치는 쌓았나 보네.〉

자신을 향해 웃으며 말하는 물 정령의 태도는 여전히 처음 다가왔을 때와 같았다. 호기심, 궁금증, 관심, 재미.

“슬슬 미궁 안에서 반응이 나올 시간이다. 긴장해라.”

=으, 응.=

=…네, 주인님.=

〈어머. 무시?〉

“환연도 지켜보다 만에 하나 긴급 사태가 벌어진다면 힘을 써라. 적이 저주를 쓰는 흑마술사인 만큼 사소한 방심도 하지 마라.”

「어응.」

자기 눈에 안보이는 정령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눈치지만, 이야기는 나중에도 할 수 있다.

환인 자신도 손지갑, 아스펜드에서 광창과 천칭을 놓고 고민하다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지금이라면 광창보다 천칭이 더 도움되겠지.

이어서 들개 전사단의 흑옥 구슬 7개를 꺼내 영혼 화살 두 발과 영혼 폭발을 장전하고 자신, 안느, 이실리테, 백려강에게 각각 흑옥 영혼 방패를 씌웠다.

일반적인 육각형 방패 모양이 아니라 몸의 전면부를 통째로 가리는 약간 거무스름한 반구형태다.

그러자 인어 형상 물 정령이 거리를 두며 약한 히스테리를 부렸다.

〈아잇, 뭐야 그건. 혐오스러워!〉

“혐오스럽다고 하지 마십시오. 언젠가 봉사와 헌신을 마치고 정화되어 신의 정원으로 올라갈 영혼들입니다.”

〈…흐~응. 그건 명령?〉

“원한다면 명령하겠습니다.”

〈…….〉

인어 형상 물 정령에게서 느껴지던 긍정적인 감정이 조금 옅어진다. 약간 자존심이 상했으면서도 살짝 기대감을 드러내는 느낌.

반대로 흑옥과 연결된 감정은 그녀들에게서 미약한 감동의 감정이 전해져왔다. 자신들을 생각해준 발언에 감동한 모양새다.

그런것보다.

“…….”

환인은 머릿속으로 저 정체불명의 정령과 전투를 벌인다면 어떤 식으로 벌어질지를 염두에 둔 시뮬레이션이 수십 회 진행된다.

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하다. 닌실이나 아드네빌라와 동일선상에 두자 여러모로 불리하고 불합리한 결과가 도출되는 거다.

환인의 미간에 점점 주름살이 늘어갈무렵 긴장을 유지하고 있던 안느의 기다란 귀가 쫑긋하고 섰다.

=뭔가 온다. 여럿이 물살 가르는 소리야.=

안느의 말에 환인도 귀를 기울였지만 콰과과과과과— 정령 넷이 퍼붓는 억수 같은 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다중 검기 두 자루를 레이피어처럼 매우 가늘게 만들어 시인성을 낮춘 이실리테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미궁 출입구의 3/4을 물줄기가 차지하고 있는데. 빠져나올 수 있을까?=

=모르겠네. 물 가르는 소리가 난잡한 걸 보면 흑마술사의 피조물일 수도 있어. ……소리가 멈췄다.=

그 말과 동시에 모두의 말소리가 사라지고 숨소리도 극도로 줄어든다. 들리는 것은 격한 물소리뿐.

타이밍도 절묘하게 정령 넷의 크기가 줄어들며 퍼붓는 물줄기 또한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기다렸다는 듯이 촤악— 분수대 물줄기만큼이나 줄어든 정령들의 물보라를 뚫고 역병에 걸린 늑대 같은 것 세 마리가 쏜살같이 날아든다.

퍽— 깨갱!

푸북- 촤악! 깨핵!

화살 날아드는 속도쯤은 이제 별것 아니게 된 안느의 워 해머에 한 마리가 얻어터져 날아가고, 이어 날아든 두 마리는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가 몸을 꿰뚫고 들어가 한 바퀴 원을 그리는 것으로 절단해버린다.

=계속 나온다!=

크아악! 크와아앙!!

촤악-! 캐액!

크어아아-!! 쿵! 뻑!

깽! 끄애액!

콰직!

몸의 대부분 가리는 성벽의 방패에 황색의 빛을 씌운 안느가 전방을 틀어막고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워 해머를 휘두른다.

거기에 얻어맞은 흑마술사의 피조물은 머리통이, 척추가 박살 나 튕겨 나가고 일부는 안느의 뒤에 몸을 숨긴 이실리테의 다중 검기에 몸뚱이가 종잇장처럼 썰린다.

“환연. 미궁 안은 여전히 안 보이나.”

「정령 애들이 미궁 안으로 안 들어가려고 해.」

그렇다면 별수가 없군.

고개를 끄덕인 환인은 물의 중급 정령 열을 모두 불러 심핵력을 각각 0.05%, 환인이 최대한 적게 줄 수 있는 만큼 힘을 나누어주었다.

“흑마술사로 보이는 자가 나타나면 정령들에게 지시해 단숨에 죽여버려라.”

「어.」

자신의 흑옥 영혼 화살은 일단 견제와 구색 갖추기용이다.

이것에 맞으면 생물은 아마도 영혼 그 자체가 오염되어 소멸하거나 터져버릴 것이다. 흑마술사에게 물어볼 것이 있으니 혼이 소멸해서는 안 된다.

한쪽으로는 정체불명의 정령과 전투 시뮬레이션을 계속 돌리고 다른 쪽으로는 흑마술사의 처우와 질문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

환인은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서늘한 손길, 별로 우호적이지 않은 기척을 느끼고 홱- 그쪽을 향해 흑옥 영혼 화살을 겨누면서 무의식중에 전력을 다해 강제력을 터트렸다.

『멈춰라.』

화아악—!!

「!?」

「익.」

=윽?!=

=앗…….=

크르륵!?

그자리에 있는 모두가 한순간 움직임을 멈춘다. 몸을 날린 흑마술사의 피조물은 물론이고 환인의 목덜미로 다가오던 정령의 손길도 마찬가지.

환인의 날카로운 시선과 재미있다는 듯한 정령의 시선이 교차한다.

몸을 날렸던 흑마술사의 피조물이 빳빳하게 굳은 채로 안느의 방패에 몸통 박치기를 한 것은 1초 뒤였다.

투콱-!

=…하압!!=

그 충격에 경직에서 풀려난 안느는 기합과 함께 위상력을 터트려 성체술을 발휘,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로 방패에 부딪혀 떨어진 피조물의 두개골을 깨버리고 뒤이어 날아드는 피조물도 으깨버린다.

안느의 기합성에 경직에 풀려난 이실리테는 달려드는 피조물 대신 환인이 지팡이를 겨눈 허공으로 다중 검기를 겨누는 한편 기사검을 납검해 발검 자세를 잡는다.

조금이라도 무언가가 벌어지면 검섬을 날리기 위한 자세.

하지만 뻗었던 손을 되돌리며 천천히 물러나는 인어 형상 물 정령의 모습은 환인의 눈에만 보였다.

〈…흐응~. 인간 주제에 제법이네. 반푼이라지만 신언까지 쓰고…….〉

적의가 없다는 듯이 두 손바닥을 내보이며 물러나지만, 환인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공격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강화 영혼 시야는 물론 흑옥 영혼 화살에도 심핵력을 일부 부여하고 자신의 흑옥 영혼 방패에도 심핵력을 부여한다.

옆에서 보면 흑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반구형 보호막에 흑/황색 화살을 주변에 띄운 기묘하면서도 위압적인 모습이다.

‘에너지…… 심핵력이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말 한마디에 50%가 사라지다니.’

전력으로 터트린 혼령주도 30~40%가량만 먹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소비량이다. 그보다는 신언神言이라니, 방금 한 게 파워 워드 같은 건가.

머리 한쪽으로 생각을 하며 환인은 경계심과 화살 조준을 거두지 않고 입을 열었다.

“묻겠습니다. 당신은 나와 내 일행에게 위해를 끼칠 생각입니까.”

〈아니. 너라는 인간에게 막대한 관심이 생겼을 뿐이야.〉

“그렇군요. 당신 기준에서만 위해가 아닐 뿐, 이쪽은 심대한 위협이겠습니다.”

〈아니라니까?〉

“아니라면 당신의 존재에 맹세코 이쪽에 생채기 하나 입히지 않겠다고 선언하십시오.”

환인의 무감정하고 담담한 지시에 정령의 눈이 순간 태평양을 뒤덮는 사이클론처럼 광포한 기운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 변화에 주변 기상과 풍경까지 영향을 받기 시작해 먹구름이 삽시간에 푸른 하늘을 뒤덮고 어디선가 습기 가득한 칼바람까지 불어닥친다.

사방으로 풀 이파리가 날아다니는 가운데 인어 형상 물 정령의 크기가 점점 거대해져 가며 포악한 음성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보자 보자 하니… 인간의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삽시간에 고층 빌딩만큼이나 거대해진 인어 형상 물 정령의 분노에 환연이 데려온 정령들은 작게 비명을 지르며 삽시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미궁에서 계속해서 뛰쳐나오던 피조물들도 뚝 끊긴다.

‘그런가. 투라드 마을이 발전하지 못한 근본적인 배경에 이 정령이 있었던 거군.’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아무리 순례자, 여행자들의 특징이 있다 해도 이동 중에 쓰는 돈은 결코 적을 수가 없다.

상단 행렬은 남쪽으로 알류겔 호수를 향해서만 내려가고 돈 없는 순례자들이 온다 해도 물자 보급과 식량 보충 등으로 쓰는 돈이 다 외부 유입인 거다.

그런데도 투르다 마을에 들르는 사람이 적다면, 마을 근처에 있는 호수의 정령, 이 정신 나간 정령의 패악질이 알음알음 주변에 퍼졌기에 사람들이 투르다 마을을 피해 움직였다면 설명이 된다.

속으로 상황을 정리하면서도 환인은 정령의 분노에 굴하지 않고 되레 정련된 살기를 마구 뿌리며 정령에게 맞섰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이야기 알고 있나. 그게 지금 네게 가장 어울리는 비유군.”

〈뭐야?!〉

“이쪽에 수작질을 부리려다 걸리고 발뺌하려다 못하게 되니 되려 화를 내면서 불리한 상황을 타파하려는 속셈이 아닌가.”

〈이게……!〉

내심을 찔린 것처럼 우르르릉— 우렛소리와 함께 내리기 시작한 비가 광포한 바람에 사방팔방 어지럽게 뿌려진다.

거대한 정령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과 분노는 자연의 분노와도 같았다.

어두컴컴해진 세상에서 마구잡이로 날뛰는 비바람과 자연의 분노를 맞으면서도 환인은 그리모암의 유물을 모두 발동할 준비와 함께 남은 심핵력의 7할을 내보내 흑옥 혼령주를 준비한다.

어둠 속에서 심핵력을 머금어 금빛을 뿌리는 흑옥 영혼 화살 하나와 흑옥 영혼 폭발 구슬을 회수, 여분으로 남겨둔 흑옥 하나를 꺼내 세 개에 심핵력 35%를 밀어 넣으며 평온의 파동 준비 모션을 시작하니…….

〈……!〉

환인의 눈에서 악령의 시커먼 기운에 심핵력의 황금빛이 동시에 흩뿌려지고 온몸에서도 흑색과 황금색이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것처럼 일렁인다.

여기에 심신이 약한 사람은 기절할 정도의 정련된 살기까지 몰아치니 평범한 사람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할 정도의 위압력이 발생했다.

미리 해둔 시뮬레이션이 도움되었다.

현재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위력의 범위 전체 공격.

환인은 지팡이를 세워 인어 형상 물 정령의 가슴, 강화 영혼 시야에 비치는 정령의 핵 같은 것을 조준하며 말했다.

“너와 비교하면 나는 세상에 널리고 널린 흔한 생명일 뿐이다.”

〈…….〉

“하지만 범인은 범인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법이지. 맹세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너의 손에 죽게 되더라도 그냥 죽어주진 않겠다. 이후 나의 죽음을 알게 된 영도의 전력도 널 퇴치하기 위해 움직일 테지.”

……그렇게 영도가 움직일 가능성은 한 20% 정도 될까. 없는 것은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다.

“싸우겠다면 말해라. 아니라면 힘을 거두고 물러나라.”

흑색과 금색의 광채에 망토가 펄럭이듯이 나부끼는 환인의 모습은 말 그대로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 성마검 같은 모양새였다.

발동하게 되면 자신은 물론 대상 또한 절대 무사하지 못할 상호확증파괴 무기.

〈……왜 그렇게 심각해? 그냥 장난이었어.〉

정령의 주변을 휘감던 광포한 기운이 가라앉고 포악한 음성 또한 잔잔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호수면처럼 낭랑해진다.

크기 또한 점점 줄어드는 한편 하늘의 먹구름도 빠르게 흩어지며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물 정령은 이전 크기와 분위기로 되돌아왔지만, 환인은 힘을 거두지 않고 여전히 지팡이로 물 정령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오히려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 상태로 재차 전투가 벌어진다면 저쪽은 다시 힘을 끌어내기 위해 집중해야 할 텐데 이쪽은 즉각 기술을 펼칠 수 있으니까.

“…….”

〈…….〉

“…….”

눈싸움이 1분가량 이어지자 정신 나간 정령 쪽이 먼저 손을 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너희가 나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릴라이스의 이름으로 너희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게. 맹세해. 됐지?〉

“의도하지 않은 피해는 제외해라.”

〈……진짜. 너희가 나한테 의도한!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릴라이스의 이름으로 너희 손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게! 맹세해! 됐어?!〉

환인이 니오네브레스에서 느낀 가장 특이하고도 특별한 점을 꼽으라면, 능력이 범상을 초월한 자들의 경우 자기 이름과 정체성에 대고 한 맹세는 절대로 어기지 않으려 하고 어기지 못한다는 거였다.

영도의 기록실에 있는 서적은 그걸 존재성과 인과율을 인용해 설명했는데. 요약하자면 물질을 벗어나 영적인 존재에 가까워질수록, 영적인 존재가 될수록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는 그 존재성에 막심한 손상을 입혀 크게는 불멸성까지 소실 된다고.

즉, 자신의 이름에 건 맹세를 어길 경우 불멸자에서 필멸자로 격하되는 것이다.

아드네빌라나 닌실 그리고 눈앞의 정신 나간 정령 정도면 자신의 이름에 대고 맹세했을 경우 절대 어기지 못한다.

그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환인은 그제야 심핵력을 회수하고 준비해놓은 흑옥 혼령주를 해제했다.

“……환연, 괜찮나.”

「흐으, 으으우…….」

환인은 한발 늦게 자신의 발치에 추락해 진흙탕에 파묻혀있는 환연을 발견하고 들어 올렸지만, 저 정신 나간 정령과 자신의 위력 전개에 받은 영적인 충격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확히는 저 정신 나간 정령, 릴라이스의 존재감에 받은 타격이겠지.

‘이래서야 미궁 공략에 차질이 생기겠는데.’

손수건을 꺼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환연의 진흙투성이 몸을 감싸서 안주머니에 넣은 환인은 팔짱을 끼고 가슴을 강조한 채로 흥흥 콧방귀를 끼고 있는 릴라이스를 바라보았다.

“……쯧.”

〈방금 나한테 혀 찬 거야?!〉

아무래도 정신 나간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이실리테와 안느도 경계심과 적개심이 반 반 정도 섞인 모습으로 정령을 주시하고 있고 백려강도 정신 나간 정령을 멍하니 바라본다.

환인은 백려강에게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백려강, 누구 때문에 미궁 공략에 차질이 생겼다. 마을로 돌아가서 유르파에게 전격을 가할 수 있는 것이면 마도구든 마도기든 가리지 않고 받아와라. 가능한 한 빨리.”

=네, 네? 아… 네!=

이 정도만 전달해도 유르파라면 상황을 파악하곤 전격을 최대 출력으로 일으킬 수 있는 마도구를 쥐어서 보내줄 것이다.

환인의 지시에 정신을 차린 백려강은 성체술과 바람을 같이 일으켜 쏜살처럼 마을로 달려간다. 저 속도라면 왕복에 10분 정도 잡아야겠지.

잠깐 생각하던 환인은 여전히 릴라이스를 적으로 간주한 것처럼 긴장하고 있는 두 여자친구를 다독였다.

“이실리테, 안느. 저쪽은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 그러니 저쪽은 신경 쓰지 말고 미궁에 집중해라.”

=……네.=

=어…….=

〈그 작은 게 기절해서 곤란해졌나 보지? 내가 도와줄 수도 있는데?〉

얄밉기 짝이 없는 말투에 이실리테와 안느의 눈썹 끝이 치켜올라가고 환인의 미간 주름도 더욱 짙어진다.

“입.”

〈입?〉

“다물어.”

〈…….〉

여전히 살기를 감추지 않은 환인의 타박에 릴라이스의 얼굴도 잔뜩 찡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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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릴라이스: Why so serious?

아드네빌라가 분노합니다.

아드네빌라: 저 개년이 상회입찰하려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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