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35화 (535/813)

529 투라드 마을

톡톡.

안주머니에서 환연이 할 말 있다고 보내는 신호가 가슴에 닿는다.

가장 앞에서 걷던 환인은 그 신호에 몸을 돌리며 뒤따라오고 있는 사도와 유지들에게 먼저 가라고 입을 열었다.

“이실리테는 남고, 셋은 마을 분들과 먼저 가 있어라.”

=네, 주인님.=

=엉.=

따로 남아 둘이서 이야기할 게 있다는 표현에 사도와 유지들은 조금 신경 쓰인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안느와 백려강이 바로 뒤를 따르고 있어서 다시 걸어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 멀리 떨어졌을 때 환인이 먼저 물었다.

“첩자로 의심되는 인간을 찾았나.”

「응. 흑마술사한테 매수된 걸로 의심되는 인간은 넷이야. 첩자 한 명은 확정했어. 환인이 사람들을 다 집으로 돌려보내서 마을이 조용해지니까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눈치 보는 거 같아.」

여기까지는 계획대로다.

흑마술사라고 하면 저주의 전문가. 정체를 들킨 흑마술사가 어떤 일을 저지를까.

이 두 가지를 고려하면 나오는 것은 결과는 명료하다.

퇴로를 만들어두기 위한 작업과 내부 고발자, 그리고 증거 인멸.

이중 증거 인멸은 해결했고 내부 고발자도 발견 했으니 남은 것은 흑마술사의 퇴로 발견 뿐.

‘아쉽군.’

생각보다 저주 폭탄의 몰골이 흉흉해서 안전 확보를 우선해 혼령주를 펼쳤는데 이 점이 아쉽다.

폭탄이 적당한 거였다면 일부러 건드려 흑마술사가 이쪽을 공격해오도록 유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냥 내버려두거나 임의로 터트리기에는 기운이 너무 찜찜했다.

현시점에 가장 성가신 상황은 겁먹은 흑마술사가 미궁에 틀어박혀 버리는 것.

가장 좋은 상황은 열받은 흑마술사가 먼저 괴물들을 이끌고 공격해오는 것.

하지만 흑마술사도 인간이다. 방금 혼령주를 보았다면 긴장감과 경계심이 최대치를 찍었겠지. 어쩌면 다 팽개치고 증거물과 흔적을 소각한 뒤 도주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저, 주인님? 흑마술사가 미궁에 틀어박히는 게 왜 성가신 건가요? 안느도 저주에 일가견이 있고 유리 언니도 주술에 박식한데…….=

흑마술사가 미궁에 틀어박혀 만약 미궁을 개조했다 하더라도 자신과 안느가 압도적인 힘으로 죄다 때려 부숴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주인님의 문양 강화 영혼술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훤히 보이는 이실리테의 질문에 환인은 작게 웃으며 그녀의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져주었다.

“우리가 주의 깊게 보고 있는 것은 흑마술사의 손에 미궁이 변질됐는가.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변질되었나인 거지.”

=네.=

“그 변질 중에는 미궁의 소멸도 포함된다.”

=……!=

“보통 미궁은 심핵이 부서진 뒤 몇 시간의 텀을 두고 붕괴한다고 하지. 하지만 그 부분마저 흑마술사가 손대서 즉시 붕괴하도록 바꾸었다면?”

미궁의 붕괴는 평범한 구조물, 건축물의 붕괴와 다르다.

미궁 안쪽은 바깥세상과 유리된 곳으로 전혀 다른 차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미궁이 소멸하면 미궁 내부에 남은 사람은 크게 세 가지 상황에 처하게 된다.

미궁 밖의 무작위 장소에 전이 되는 경우.

미궁 소멸과 함께 세상에서 소멸하는 경우.

차원의 미아가 되어 영원히 심우주 같은 곳을 헤매게 되는 경우.

=…….=

「…….」

“그러니 우리는 미궁에 들어가지 않고 해결하는 쪽이 가장 좋은 거다.”

「어떻게 해결할 건데? 들어가지 않고 미궁 밖에서 흑마술사를 격살할 방법이 있어? 정령도 미궁 밖에서는 안쪽에 힘을 펼치지 못하잖아.」

“당연히 생각해둔 것이 있다.”

환인의 옅은 미소에 흉악함이 깃들었지만, 이실리테는 주인님이라면 마냥 좋은 해바라기였고 환연은 그와 닮은 면이 많은 반인반령이었기에 둘 다 개의하지 않고 넘어갔다.

「아. 첩자가 지금 집 밖으로 나왔어. 마을 서문 쪽으로 몰래 이동 중이야.」

“그래. 이실리테, 가서 잡아 와라.”

=네.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그자들은 마을 사람들이 해결할 문제지.”

=네.=

환연에게 첩자의 인상착의를 들은 이실리테는 빛의 검을 밟아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

환인과 이실리테를 밖에 두고 먼저 사도의 집으로 들어온 안느는 마을 사람들에게 살짝 화가 나 있었다.

발전과 동떨어진 마을이니까 혼령주가 뭔지 모르고 평온의 파동과 같은 감각인 줄도 모르는 건 이해한다. 자신도 처음에는 혼령주가 평온의 파동에서 한 단계 나아간 기술임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도령을 위험 요소로 볼거리는 없는 걸 알 수 있지 않나?

땅신 교단의 성직자이자 성투사인 자신이 곁에 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만큼이나 평소 행실 또한 고귀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려강도 그의 말이면 다 듣는다.

신묘한 매력과 함께 술사 계열 특유의 지적인 느낌이 느껴지는 율이 언니, 저 하늘의 태양만큼이나 화사한 미모와 풍요의 여신 같은 몸매를 가졌으면서도 도령을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충성하는 이슬이까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 뿐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는 도령한테 그 흑마술사와 한 패거리가 아닐까 의심하는 시선을 보내다니.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

=……율이 언닌 화도 안 나?=

=우리가 자기랑 같이 다니기 시작하며 뛰어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와서 눈이 높아진 거지, 이런 촌락에 가까운 마을 사람들의 인식 수준은 이 정도가 평범한걸.=

=…….=

=무지가 죄라고 하지만, 그건 배울 기회가 널려있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야. 저 사람들의 반응과 생각이 일반적이란 거 아가씨도 잘 알잖아?=

그 말이 맞다. 저들은 살면서 평생토록 영혼사를 몇 번 못 볼 정도니까.

도령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별말 안 하는 거겠지. 저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면 영혼사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는데 그러자니 지금 우린 정체를 감추고 이동 중이고.

위장하고 이동 중에 혼령주를 쓴 것은 어떤가 싶겠지만, 효과만큼은 유일무이한 혼령주라 해도 발동시 벌어지는 빛기둥 현상은 유사한 것이 제법 된다.

그리고 지금은 대낮이며 주변 1천여 킬로미터 이내에 마을이나 촌락은 전혀 없는 대초원이다.

유목민이 산다고 들었지만 좀전의 회색 빛기둥을 목격한 유목민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빛기둥을 혼령주라고 생각할 사람은 또 얼마일까.

아마도 태반은 뭔가 큰 전투가 벌어진 흔적이라고 생각하겠지.

영혼사라는 정체만 밝히지 않으면 행적이 발각될 확률은 여전히 낮다. 그럼에도 행적을 좇아올 인물들은 그런 혼령주가 아니더라도 추적할 기술을 가지고 있을 테지.

결국 혼령주를 쓴 것은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는 거다. 문제가 되더라도 귀찮은 놈들이 따라오는 정도일까.

안느는 마을 주민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유지들이 하나둘 집에 들어와 자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에 앉는 것을 바라보다 후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언니. 조금 화가 나서 침착하질 못했어.=

=아니야. 안느 아가씨가 화내는 이유는 나도 이해해. 아무리 저주 폭탄을 바로바로 찾아낸 게 수상쩍다지만, 저들이 한 짓은 그 방법을 궁금해한 게 아니라 흑마술사와 공범으로 의심하는 짓이었으니까. 그건 도가 지나쳤어.=

유르파라고 왜 화가 나지 않을까. 그녀가 화를 참고 있는 것은 전부 환인의 뜻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의와 경고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환인의 의도와 계획을 떠올린 유르파는 짝짝. 가볍게 손뼉을 쳐서 마을 유지들의 시선을 그러모은 뒤 조금 차가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투라드 마을의 사도님, 그리고 유지분들. 지금 여러분들은 크나큰 실수를 저지르고 계신 걸 알아야합니다.=

=…이 촌 무지렁이에게 가르침을 주신다면 귀를 열고 경청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도련님께서 저주 폭탄을 재깍재깍 찾아내는 것에 흑마술사와 한 패거리가 아닌가 의심하였지요. 그럴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그 방법을 여쭈었어야 했어요.=

투라드 마을 사도는 그 말에 반박이나 항변하지 않고 그저 허리만 깊게 숙였다.

좀 전에 눈앞에서 터져 나온 빛의 폭발에 저 아가씨들이 말씀하시는 도령이라는 분이 절대 범상치 않은 분이란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록 한평생 촌구석에서 살아온 사도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알고 있다.

어느 하나의 기술을 극으로 익힌 사람은 다른 기술 또한 범상치 않게 높다는 것.

그 빛의 폭발은 충분히 극에 이른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걸로 저주를 몽땅 날려버린 분이 무력으로도 약할까?

게다가 사슴뿔이 머리에 나고 도마뱀과 비슷한 꼬리가 엉덩이에 난 아가씨는 그분 일행에서 가장 약한 아이라 하지 않으셨나. 그럼에도 마을 순찰대원들을 모조리 때려눕혔지.

사도는 이마가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머리를 깊게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의 어리석은 행동에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멀리서 도움을 주시러 달려오신 분께 이 무슨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그래도 눈치는 있네.’

눈치마저 없었다면 화딱지가 크게 났을 텐데.

=언니, 도령이 와.=

안느의 귓속말에 고개를 끄덕인 유르파는 사도와 유지들에게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자신들과 도련님은 키사기 자매의 하소연을 듣고 당신들을 아무 대가 없이 도움을 주러 온 사람들이라고. 그러니 좀 전 같은 불경한 행동을 두 번 다시 보이지 말라고.

마을 사람들이 그 경고를 뼛속 깊이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환인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

이실리테가 잡아 온 첩자를 간단히 심문하고 사도의 집으로 들어온 환인은 경직된 홀의 분위기에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자친구들에게 경고라도 받은 듯이 긴장된 표정과 몸짓의 마을 유지들.

그들을 잠시 바라본 환인은 이실리테를 불러 그들이 있는 긴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에 던져놓아라.”

=네.=

첩자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며 들어온 이실리테가 휙, 첩자를 1자 테이블 위로 집어 던진다.

콰당, 굉음과 함께 테이블 위에 내동댕이쳐진 첩자, 마을 여자들이 보통 입는 평상복의 돼지 귀 여자가 끄흐윽, 비명과 신음 그사이를 흘리며 몸을 비틀자 코와 입, 몸에 난 상처에서 시뻘건 피가 후드득 떨어진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지거나 주춤거리면서 물러나는 가운데 사도가 황망해 하며 입을 열었다.

=이건……. 대체 무슨…….=

“흑마술사가 마을에 심어놓은 첩자입니다.”

말을 잘 잇지 못하던 사도가 입을 쩍 벌렸다. 사도뿐만이 아니라 유지들도 마찬가지다.

믿지 못하겠는지 유지 하나가 벌떡 일어나 고통에 몸을 꿈틀거리는 여자에게 고함을 질렀다.

=루오르! 저분의 말씀이 사실인가?! 자네가 저 흑마술사의 첩자라고!?=

=끄흐으으…….=

=자넨 마을에서 태어나 마을에서 결혼하며 이때까지 살아왔잖은가! 그런 자네가 첩자라니!=

“정확히 말하자면 흑마술사에게 회유당했습니다. 회유당한 이유로 1부인과 2부인을 언급하더군요. 자신을 도와준다면 그 둘과 둘의 자녀들을 모두 죽여주겠다는 것이 그 거래 내용이었습니다.”

=……!=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이었는지 유지들의 안색에 핏기가 빠져나간다. 가족을 죽일 것을 요구했다고?

=저…… 지, 질문이 있어요.=

유지 중 한 명인 야라가 겁먹은 것처럼 흑표범 귀를 바짝 눕힌 채 묻는다.

=그, 어떻게 루오르에게서 그 사실을…… 알아내셨죠? 첩자라면 자기 목숨 때문이라도 거래 같은 걸 말하지 않으려 들었을 텐데…….=

“적당한 엄포와 고통, 그리고 제 일행에 누가 있는지 상기시켜주었습니다.”

환인의 시선이 아름다운 은발의 플뢰, 안느에게 향하자 홀 안의 마을 주민들도 그녀를 보곤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확인 작업을 거칠 생각이니 여러분들도 같이 들으시지요. 유르파, 물약으로 저 여자를 치료해주십시오. 그리고 안느는 진실의 주시자로 저 여자가 거짓말을 하는지 지켜봐다오.”

=으응? 그럴게.=

=어? 응.=

환인은 유르파에게 강제로 물약을 먹여져 몸이 회복된 돼지 귀 여자를 향해 좀 전에 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첩자가 맞느냐.

첩자가 된 이유가 무엇이냐.

흑마술사의 미궁에 들어가 본 적이 있느냐.

미궁 내부가 어떻게 변했느냐.

흑마술사는 뭘 하고 있었느냐.

인신 공양으로 바쳐진 여자들은 어떻게 되었느냐.

맞다.

꼴 보기 싫은 1부인과 2부인을 죽여서 자신을 1부인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해서.

있다.

별로 변하지 않았다.

무언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솥을 끓이며 약 같은 걸 만들고 있었다.

흑마술사의 실험체가 되었다.

안느가 은색 눈동자에서 황금빛을 흘리며 플뢰족의 선천 능력, 상대의 말과 행동에서 진실을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 대답의 진실 여부를 가려주자 홀에 망연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진다.

연이은 충격적인 사실과 정보에 뇌가 반쯤 파업을 일으킨 모습의 사람들.

그 충격으로 다들 입을 열지 못하는 가운데 사도가 힘이 쭉 빠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짐승신님 맙소사……. 자네가 어떻게 흑마술사에게 넘어갈 수 있는가…… 어떻게…….=

=쳰과 또레나는… 저는 물론이고 제 아이들과 유누까지도 못살게 괴롭혔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그때는 저와 제 아이들을 모두 집에서 쫓아내 재산도 한 푼 주지 않겠다고 조롱하고, 이 사실을 알리면 아이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매일같이…….=

=……설마, 설마 자네가 그 저주 폭탄을 마을에 심은 것은 아니겠지?=

=…….=

대답하지 않는 모습에 사도는 다리 힘이 풀려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버렸고 유지들 대다수는 안색이 거무죽죽해져 버렸다.

다들 한 가족처럼 사이좋은 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독버섯이 자라고 있었단 말인가……?

환인은 망연자실한 사람들에게 무감정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저 여자의 처분은 사도님과 유지분들께 맡기겠습니다.”

=예, 예? 어…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필요한 정보는 얻었으니 마을을 찾아온 목적을 이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아, 아니. 마을에 도착한 지 이제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빨리?

“그 여자는 흑마술사가 있는 미궁에 제법 들락거렸던 것 같더군요. 방금의 빛 폭발도 있고 시간을 더 지체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도하 순찰대장님.”

=네, 네.=

“우리가 나간 뒤 흑마술사의 피조물이 마을을 공격해올지 모릅니다.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처리할 테지만, 대비는 해놓으십시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환인은 마을 사도와 유지들이 상심에 빠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비상과 쿠에들이 모여있는 마구간을 찾아 유르파에게 지시를 내렸다.

“유르파는 비상과 함께 마을에 남아주십시오. 혹시 마을에 수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다 쓸어버려도 됩니다. 그때는 비상, 너도 힘을 보태라. 그전까지는 모두를 잘 지키고.”

큐으!

=응. 이쪽은 나한테 맡겨두고 조심해서 다녀와.=

“예.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이실리테, 안느, 백려강. 가지.”

=네.=

=넷!=

일행 최대 전력인 여자친구들과 마을을 나와 늑대 미궁이 있다는 서쪽으로 향하자 안느가 후우우우우, 탄식과도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속에 화가 쌓인 듯한 숨소리. 환인은 그녀의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간 것을 보고 건틀릿을 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 그 정도로 스트레스였던 건가.”

=……응. 의심해도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싶어서 조금 화났었는데, 율이 언니랑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지금은 괜찮아졌어.=

=저도 마을 분들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실망했어요. 어떻게 도우러 온 사람을 그렇게 의심하는 거지…….=

백려강도 미간을 귀엽게 찡그리며 푸념을 늘어놓지만, 이실리테는 담담한 얼굴로 환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걸음을 옮기며 자기 의견을 말했다.

=촌민을 이유 없이 촌민이라고 하지 않아. 배움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하루살이처럼 살기 때문에 멍청한 거야. ……주인님을 만나기 전의 나처럼.=

=…….=

=…….=

그 이야기에 안느와 백려강이 입을 다무니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는다.

환인은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반응은 바로 돌아왔다. 세 여자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환인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확실히 그때 이실리테는 굉장했지. 내게 호모냐고 묻기까지 했으니.”

=……!=

=으에엥? 진짜!?=

=정말요?=

설마 그 이야기가 나올 줄 몰랐는지 이실리테는 삽시간에 빨개진 얼굴로 허둥거리다가 차마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성큼성큼 빠르게 앞서 걸어 나간다.

잠깐 그 뒷모습과 환인을 번갈아보던 안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령도령, 자세하게 말해봐. 어쩌다가 그런 말이 나온 건데?=

“그녀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던 그때, 나는 돈도 몇 푼 없고 능력도 보잘것없었던지라 여관방을 하나만 빌렸었지. 어쩌다 보니 이실리테와 같은 방에서 자게 되었는데……. 그녀의 영기를 확인한다고 몇 번, 그녀의 아랫배를 쳐다본 것을 내가 몸에 흑심이 있다고 여겼던 것 같았다.”

=풋…! …그래서?=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속옷용 반바지만 입고서는 ‘어차피 이 몸의 주인이 될 테니까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더군.”

그때 일을 설명하자 귀까지 빨개진 모습으로 앞서 걷던 이실리테가 후다닥 달려와 환인의 가슴에 안겨 제발 그만하라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그때 저는 진짜 아무것도 모르던 바보 천치였다니까요오……. 제발 그만…….=

“그래. 그래서 성난 암소처럼 들이대는 모습이 얼마나 심란했는지. 그런 날 보더니 의심스러워하며 호모냐고 물었었지.”

=으아앙……!=

급기야 쪼그려 앉아 귀를 막는 이실리테의 모습은 수치심과 흑역사에 몸부림치는 처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 이상 놀리면 이동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 환인은 이실리테를 달래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이상해진 안느와 백려강을 눈빛으로 나무란다.

아니, 웃겨놓고서는 웃지 말라고 하는 게 말이 돼? 하지만 안느와 백려강은 억지로 웃음을 억누르고 애써 입매를 다듬는다.

수치심이 폭발한 이실리테 앞에서 폭소하다가 그녀의 매운 손맛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그랬던 선머슴이 여신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되었으니 세상일은 알 수 없다고 하는 거겠지.”

=주인님…….=

“자. 기분이 풀렸다면 조금 속도를 올릴까. 환연은 주변 감시를 소홀히 하지 말고 이실리테와 안느도 집중해라. 백려강은 이번 일을 경험으로 만든다고 생각하고 조금 뒤에서 따라오도록.”

=네에.=

=응!=

=넷!=

환인은 슬슬 눈에 띄기 시작하는 정령 중 물과 불, 바람을 위주로 끌어당겨 영혼 구슬로 만들며 마차가 계속 오가느라 생긴 길을 따라 빠르게 달렸다.

영혼 시야를 열어놓고 주변을 감시 중이지만 생명과 영혼의 흔적은 전무하다. 길 주변이 탁기나 저주에 오염되어있지도 않고 흑마술사의 피조물이 숨어있다 덮치지도 않는다.

=여기가 미궁인가 본데?=

=겉보기에는 별거 없는 바위 언덕 같아요.=

=1급 미궁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네.=

중급 정령 강령으로 20여 분간 달려 도착한 미궁 앞도 얼핏 보면 그저 평범한 바위 무더기 언덕. 그리고 그 주변은 휴경지처럼 잡초가 무성히 난 논밭일 따름이었다.

미궁 앞에 도착한 환인과 그의 여자들은 반경 1km 안, 수풀과 덤불과 구릉과 언덕 등 주변을 낱낱이 살피며 피조물을 찾았지만,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일행은 지하로 내려가는 동굴처럼 검게 아가리를 벌린 미궁 앞에 다시 모였다.

=밖에 파수병으로도 세워놓지 않은 건가. 방심이 지나친데.=

안느의 감상에 이실리테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대답했다.

=미궁 안에 전력을 집중해놨을 수도 있어. 밖에 파수병을 내놓으면 여기에 흑마술사가 있다고 광고하는 셈이니까.=

=하긴.=

카이트 실드와 일반적인 워 해머를 꺼낸 안느가 환인에게 물었다.

=도령. 이제 슬슬 어떻게 할지 계획을 말해주면 안 돼?=

“계획은 별거 없다. 이 미궁은 감옥 미궁처럼 차폐 방식이 아니라 대다수의 미궁처럼 입구 개방형이다. 여기에 환연의 힘으로 물을 퍼붓는 거지.”

=엑……. 미궁 안을 물로 채운다고? 그게 가능한 거야?=

“너도 들었겠지만, 이 미궁은 1급이다. 거기다 1층이라 규모는 오울링에서 들어가봤던 그 미궁보다 더 작다.”

그렇다고 입구가 차폐되어있지도 않고 마침 적당히 지하로 내려가는 형태. 수계를 쓰기에 안성맞춤인 조건이다.

혹시 미궁에 보이지 않는 틈이 있어 물이 계속 빠져나간다 해도 문제없다. 물이 빠져나가는 만큼 퍼부으면 되니까.

마을 밖으로 나왔기에 환인의 어깨 위로 올라온 환연이 환인의 저돌적인 계획을 듣고 어이없어하며 대꾸했다.

「그러려면 힘 엄청 써야 하는데? 물의 정령이야 저 언덕 너머에 호수가 있어서 무진장 있지만 내 힘으로는…….」

“심핵력은 자연의 힘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에너지지. 에너지는 내가 계속 보충해줄 테니 너는 중급 물의 정령으로 최소 열을 데려와 물을 퍼붓기만 하면 된다.”

「언제 또 그런 거 배웠대…….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잠깐 기다리란 말이 무색하게 호수로 날아갔던 환연은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와 크기가 비슷한 물의 정령 열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환인은 그런 환연을 보며 빨리 다녀왔다고 칭찬을 해주지 못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온 예상 밖의 인물…… 아니, 예상 밖의 정령 때문이었다.

〈흐응…… 요정도, 정령도 아닌 것이 이상한 소리로 아이들을 데려간다 하였더니. 이건 또 신기한 인간이로구나.〉

“……!”

온통 푸른색 물로 이루어진 사람 크기의 정령. 하반신이 물고기인 물의 정령이 선녀의 날개옷 같은 반투명한 빛을 몸에 감은 채 재미있다는 듯이 환연의 뒤에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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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환연: 야! 신기한거 보고 싶고 맛있는거 먹고 싶은 애들은 날 따라와!

???: .....?

환연의 어그로에 끌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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