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 투라드 마을
투라드 마을까지 동행하는 동안 유피의 우유는 일행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응푸하! 이거 진짜 맛있네.」
오죽하면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 앞에서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환연도 유피에게 우유를 얻어 마셨을 정도.
다른 여자들도 아침과 점심 저녁 한 번씩 그녀의 우유를 마셨으며 환인도 커피를 마실 때면 그녀의 우유를 받아 카페오레, 카페라떼, 카푸치노를 만들어 즐겼다.
원래도 하루 1~2잔은 꾸준히 마셨는데 유피와 합류한 이후 마시는 커피의 양이 2배나 늘어난 환인.
아침 출발 전, 그가 식후경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모습에 안느는 유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유피. 이렇게 우유를 많이 내도 괜찮아? 보통 인우족은 하루에 1리터 정도가 한계라고 하잖아.=
여섯 명(여자 다섯과 환인+환연 합쳐 1인분)이 하루에 세 번 200mL씩 마시면 이것만 해도 3.6ℓ다. 일반적인 인우족의 하루 우유 생산량을 아득히 넘어가는 것.
=저…… 저는 가슴이 비정상적으로 커서 다른 인우족 분들보다 우유가 더 많이 만들어져요.=
=가슴 크기는 모유량이랑 관계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보다 얼마나 차이나?=
=네, 네? 어… 양쪽 다 하면…… 5리터 정도…….=
=5리터?!=
=아으으…. 목소리가 너무 커요……!=
=미, 미안. 그보다 5리터나 된다니 그 정도면 매일 짜내는 것도 힘들텐데 가슴이 아프거나 하진 않아? 멍울이 생기면 엄청 아프잖아.=
=저는 그렇게 아픈 적이 없어서…… 어느 정도는 언니가 매일 마셔주기도 하구…….=
=진짜로?=
안느도 임신한 것은 아니지만, 신체가 환인을 위한 수목화를 완벽히 이룬 뒤에는 유방에서도 정수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하루에 한 번, 못해도 사흘에 한 번씩은 빼주지 않으면 젖몸살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유피라는 아가씨는 매일매일 5ℓ나 되는 모유를 만들어내면서도 젖몸살이 안 온다고? 어떻게? 인우족 체질인가?
안느의 정신이 우주를 헤매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유피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젖몸살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요……. 대다수는 가슴 안마만 잘해도 60%는 예방할 수 있어요. 안느 님도 수유하시는 거죠…?=
=보통 수유랑은 의미가 전혀 다르지만 말이야. 그래서, 젖몸살이 없을 때도 유방을 안마해야 한다고?=
=네. 그러면 최소한의 유축으로도 젖몸살이 잘 안 와요. 더러운 손으로 꼭지를 만지는 것도 피해야 하고 가슴가리개 안쪽에 깨끗한 천을 덧대서 꼭지가 닿는 것도 피해 주면 더 좋구요…….=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 혹시 인우족에게 전해 내려오는 그런 거?=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유피의 손을 안느가 덥석 붙잡고 부탁한다.
=괜찮으면 그거, 나도 배울 수 없을까? 가끔 젖몸살이 오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야. 그렇다고 여기에 막 치유술… 회복약을 바를 수도 없잖아. 응? 부탁해!=
안느의 간절한 부탁에 유피는 순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딱히 비밀은 아니니까요. 일단 가슴을 이렇게…….=
=흐힉?!=
뒤로 돌아간 유피가 덥석, 옷 위로 가슴을 잡는 것에 안느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자 유피도 덩달아 놀라서는 사과한다.
=죄, 죄송해요…!=
=아냐아냐! 갑자기 그래서 놀란 거니까. 계속해줘. 이렇게 잡고 어떻게 하면 돼?=
=넷. 꼭지부터 천천히 동그라미를 그려서 이렇게…….=
“…….”
환인은 그녀들과 떨어진 장소에서 둘이 하는 짓을 가만히 바라봤다.
안느의 뒤에서 그녀의 가슴을 주무르며 마사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유피. 그녀의 손동작을 기억하다가 스스로 가슴을 주무르며 가슴 마사지하는 법을 배우는 안느.
그냥 봐서는 임산부의 모유 마사지 장면이지만 그걸 안느가 배우고 있는 게 환인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수가 모유처럼 젖몸살을 일으키는 건가.’
마사지 중에 킥킥 웃는 그녀들을 잠시 쳐다보던 환인은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맞은 편에 앉아 커피의 향과 맛에 집중하는 키사기로 눈을 돌렸다.
마침 그녀도 커피를 다 마셨는지 잔을 내려놓고 환인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다.
=커피까지 대접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맛과 향이 풍부한 커피는 처음이라서 정말 놀랐어요.=
“키사기 양도 커피 애호가였다는 사실에 저 역시 놀랐었습니다.”
아열대 지역에서만 자라는 커피는 재배 지역의 서민들이나 기타 지역의 고족, 호족들이 즐기는 기호품이다.
그런 아열대 지역에서 벗어나 사계절이 뚜렷한 북쪽에서, 그것도 유통망이 짧고 좁기 그지없는 곳에서 커피를 즐기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정말 좋아하지만 마실 기회가 적어서 저도 안타깝죠. 남부를 여행할 적에는 그래도 커피콩을 사놓고 마셨는데…….=
“재배 지역에서는 가격이 싼 편이지만 재배지를 벗어나면 급격하게 가격이 오르는 게 기호품 아니겠습니까. 사놓은 커피가 제법 되니 나중에 커피콩을 나누어드리겠습니다.”
=그런! 아니에요. 이만큼 맛있는 커피라면 굉장히 비싼 물건일 텐데.=
“아닙니다. 물론 품질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맛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커피콩을 볶고 블렌드하고 내리는 과정이지요.”
환인은 영도를 목표로 했을 때부터 용돈이 생길 때마다 커피콩을 kg단위로 사서 재워놓았다. 무한의 손지갑, 아스펜드 속의 절반이 직접 고른 커피콩으로 채워져 있을 정도.
작게 웃은 환인은 약간의 경계심마저 완전히 사라진 키사기를 보고 본제에 들어갔다.
“이제 며칠 뒤면 키사기 양의 마을에 도착하겠군요. 슬슬 마을 근처에 자리 잡은 흑마술사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만. 괜찮겠습니까.”
환인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색이 살짝 변하는 키사기.
트라우마가 올라온 듯한 변화였지만, 환인이 며칠 안정할 여유를 준데다 카페인이 잔뜩 들어가도록 커피콩을 살짝만 볶아 내린 커피를 대접해준 덕분에 금방 침착을 되찾는다.
어제 이글 자칼 여섯 마리의 습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퇴치해낸 것도 그녀가 믿음을 가지기 충분했다.
독수리 날개가 달린 자칼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1분도 지나지 않아 단검 투척으로 모두 떨어트리고 머리를 으깨놓다니.
키사기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놈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 괴물…… 나르타는 인서족 남자예요. 키는 140cm 남짓에 왜소하고 구부정한 체격이고 바르둘로 의심할 만큼 짐승의 피가 짙어요.=
환인은 유르파가 볼펜을 베껴 만든 목제 펜으로 종이에 인상착의와 외모를 그려나간다.
시궁쥐처럼 툭 튀어나온 주둥이. 기분 나쁘게 번들거리는 까만 눈알. 들쑥날쑥한 치열에 듬성듬성한 쥐 털. 길고 기분 나쁜 꼬리에 배불뚝이 하반신과 역관절 다리, 털이 없어 혐오스러운 손가락과 발가락…….
판타지에서 랫맨의 귀여움 요소를 0%로 줄이고 혐오스러움을 100%로 늘린 모습에 키사기가 눈을 크게 뜬다.
=또, 똑같이 생겼어요. 아니 조금 다른 점이 있긴 하지만…….=
“이자가 흑마술을 쓰는 걸 본 적이 있습니까.”
=요시 할아버지의 밭에 저주를 내려 땅과 작물을 시커멓게 말려 죽이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저주를 내렸습니까. 뭔가를 뿌렸다거나 저주를 내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거나……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주십시오.”
키사기는 흑마술사, 나르타가 저지른 그때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늑대 미궁에서 나오는 하이어 울프보다 1.5배는 더 크지만, 몸의 털이 죄다 빠지고 혹처럼 살이 부푼 끔찍한 모양의 하이어 울프 여덟 마리를 대동한 채 마을을 찾아온 나르타.
괴물을 부려 사람들을 위협해 100명이 겨우 넘는 마을의 사람을 대충 한자리에 모은 나르타는 사람 팔뼈 같은 것을 가공한 본 완드를 휘두르고 거무튀튀한 가루를 뿌려 100평 정도 되는 땅에 저주를 내린다.
원혼의 울부짖음과 함께 땅은 시커멓게 썩어버렸고 작물도, 밭에 붙어있던 나무집도 삽시간에 삭아버리는 광경에 기겁하고 경악하는 마을 사람들.
저주로 마을 사람들을 위축시킨 나르타는 젊은 마을 여자 하나를 요구한다. 거기에 분노한 순찰대가 나르타를 공격했지만…….
=변이한 하이어 울프는 말도 안 되게 셌어요. 지능도 높아졌는지 보통의 하이어 울프와 다르게 협공까지 하고…… 유후다 아저씨는 3급 전사이기까지 했는데 세 마리를 상대하기 어려워했고 조멘, 튀스라, 아빈 셋은 나머지 다섯 마리를 겨우 상대하는 수준이었어요. 그때 나르타가 저주를 내리니까 다들 피부 가죽이 쭈글쭈글해지고 힘이 빠져서…….=
다들 물려 죽고 말았다며 고개를 숙이는 키사기.
환인은 잠깐 감정을 다스릴 시간을 주고 물었다.
“흑마술사가 저주를 내릴 때 어떤 방식을 썼는지 기억나십니까.”
=……완드를 휘두르기 전에 허리춤의 주머니를 열었던 거 같아요.=
“음……. 괴물 20마리를 부렸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걸 보았을 당시 주변 상황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해주십시오.”
=그때는…….”
그녀의 이야기에서 요점만 받아적은 환인은 싫은 기억을 떠올리느라 정신적으로 지친 키사기에게 쉬라고 이야기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느와 유르파를 불러 의논해봐야겠군.’
투라드 마을을 향해 출발한 뒤 마차 안으로 안느와 유르파를 부른 환인은 그녀들에게 요점을 적은 종이를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다.
=흐음. 그다지 뛰어난 흑마술사는 아닌 거 같은걸?=
=100평 남짓한 밭에 부패의 저주를 내리는 데 완드랑 시약까지 쓰고……. 상급 흑마술사는 그냥 맨손으로 수백 평의 땅에 저주를 내리는데 말이야.=
=그치? 먼저 이 흑마술사, 수준은 잘 해봐야 중급일 것 같아.=
=나도 율이 언니랑 동감이야. 저주와 연성, 조종 세 분야 전부 쓰고 있지만, 깊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넓은 범위에 저주를 뿌렸다지만 시약의 도움을 빌렸고 20마리나 되는 수호자를 지배했다지만 추종향을 쓴 거로 보여. 젊은 여자를 요구한 것도 괴물 연성을 시도하려는 거겠지만…… 저주와 조종 쪽이 이런 수준이면 연성도 비슷한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흑마술에 지식이 있나 보군.”
평범하게는 알 수 없는 지식이 안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본 환인이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흑마술사는 각 교단의 공적이나 다름없으니까.=
어둠 속성을 각성한 흑술사와 흑마술사는 전혀 다른 존재다.
전자는 어둠을 속성으로 부패나 관통, 부식 같은 공격을 가하며 어둠 속성 특성상 일부 저주도 내리는 경우가 있지만, 기본 바탕은 술법사.
하지만 흑마술사는 법술사와 이블팩션의 주술을 섞은 개념으로 자신의 이익과 지식욕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계열이다.
교단이 적으로 지정하는 게 당연한 존재인 것.
영도의 기록실과 대도서관에서 수집한 정보와 지식을 떠올린 환인은 그녀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한다.
“아무튼. 능력이 되면 급이 높은 괴물을 만들어냈겠지. 하지만 고작 2급, 그것도 머릿수만 늘린 것으로 사람들을 위협했으니 그 수준은 높지 않은게 틀림 없다. 100명도 안 되는 소규모 마을 근처에 자리 잡은 것만 봐도 대강 능력을 추측할 수 있겠지.=
=응. 능력 있는 흑마술사는 자신의 정보가 흘러나가지 않도록 인기척이 없는 곳에 자릴 잡는 편이니까.=
”그런가.“
=고위 흑마술사는 존재 자체가 위협이라서 교단의 성직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 그런데 어떻게 마을 주변에 자리 잡겠어?=
약한 흑마술사는 저급 술법사조차 이기지 못할 만큼 약하다는 게 정설, 그 때문에 혼자서 살아가기 힘들어서 사회의 그림자에 숨어서 지내는 편이라고 안느가 설명해준다.
=자급자족을 못 하니까 말이야.=
=응응. 이걸 종합해보면…… 이 나르타라는 흑마술사를 해치우는 건 어렵지 않을 거 같아. 이 작자가 자기나 아가씨들처럼 엄청난 천재면 반년이 지난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가 됐겠지만 그런 걸로는 전혀 안 보이고.=
=맞아. 그러니까 빨리 찾아가서 목을 쳐버리고 우리 갈 길 가는 게 좋겠네.=
별것 아니겠다며 긴장을 푸는 여자친구들에게 환인이 경고를 날렸다.
“경계심과 긴장을 푸는 건 이르다고 본다. 1급이라 해도 미궁에 자리 잡은 게 무척 신경 쓰여.”
=응?=
1급 미궁에도 심핵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심핵의 에너지를 몸에 받아들여 기술 강화에 쓰는 자신의 경우를 보자면 흑마술사가 우연히 발견한 1급 미궁을 지식으로 무언가 활용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안느 네 말에 따르면 흑마술사의 최대 적은 교단이다. 그리고 교단의 신자들은 어디에나 있지. 고작 2급 정도 되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사역하며 마을 사람을 끌고 와 키메라 연성에 쓰려고 정체를 드러내는 게 정상일까.”
=…….=
=…….=
“반년 전부터 미궁에서 나오지 않고 괴물을 보내 식량을 가져다 나르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면 의구심은 더욱 깊어진다.”
=자기가 심핵력을 몸에 받아들인 것처럼 흑마술사도 1급 미궁에서 뭔가 저질렀을 수 있다는 거구나…….=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그쪽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사회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수준의 흑마술사처럼 느껴지는데 대놓고 정체를 드러냈다.
정체를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미궁을 차지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이 말이다.
환인이 말하고자 하는 점을 깨달은 그녀들도 긴장감과 경계심의 고삐를 잡으며 대답했다.
=자기 말이 맞아.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봐야겠네.=
“그러면 키사기 양과 유피 양을 불러 투라드 마을에 도착하면 바로 움직일 준비를 해야겠군요.”
통통, 마차의 천장을 두드리자 선루프가 달칵 열리며 백려강의 아리따운 얼굴이 나타난다.
=부르셨어요?=
“그래. 키사기 자매들과 같이 내려와라. 앞으로 예정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거다.”
=네!=
기운찬 대답과 함께 다람쥐처럼 날랜 몸놀림으로 백려강이 먼저 내려온다.
마차 바닥에 소리 없이 착지하자마자 용의 꼬리를 가볍게 흔들어 무게 중심을 잡는데, 동작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다.
=내가 받아줄 게 맘 놓고 내려와.=
=으응.=
손을 위로 뻗어 키사기를 받아 내려주는 백려강. 환인은 그녀가 키사기에게 반말을 했다는 거에 눈을 살짝 빛냈다.
=저, 저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무거울 거예요….=
=그래봤자 70kg도 안 되잖아? 나 매일같이 100kg이 넘는 무게추를 몸에 달고 근력 훈련하니까 괜찮아. 나 믿어.=
그리고 유피까지 받아주는 백려강에게 유르파가 신기하다는 듯이 묻는다.
=려강 아가씨 기분 좋아 보이네? 위에서 아가씨들이랑 재밌는 이야기라도 나눴니?=
=앗. 그게요, 키사기를 공격한 도적들을 해치운 게 뭐라고 해야 할지…… 조금 마음에 짐이 된 거 같았거든요. 그랬는데 키사기랑 유피랑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세상에는 용서하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어서요.=
도적 떼를 참살한 게 잘한 행동이었다는 인식을 가졌다는 이야기인가.
안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그 여자들을 보면 도적질에 살인까지 즐기는 살인귀가 되어있었으니까. 내버려 뒀으면 피해자는 더 많이 생겼을 거야.=
=네. 그래서 앞으로도 언니들처럼 악당을 해치우는데 망설이거나 마음의 가책을 가지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고는 칭찬을 바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백려강에게 환인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좌우명과 마음가짐을 바로 했다는 건 칭찬받아 마땅하지. 잘했다.”
=……!=
환인의 칭찬에 표정이 더욱 환해지는 백려강. 하지만 이어진 말에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자신이 한 행동을 전부 받아들일 각오를 세웠다고 해서 생각하는 것도 멈추어서는 안된다.”
=……?=
“백려강, 세상에 완벽한 정의란 없다. 완벽한 악도 없지. 있는 건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삶뿐.”
=……잘, 모르겠어요.=
순진함을 드러내는 백려강에게 환인은 작게 웃음을 지으면서 예시를 들어주었다.
“네가 보기에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와 평소의 내가 같다고 생각하나.”
=……아…니요.=
“그런 거다.”
=…….=
환인은 사람들에게 성자라고 추앙받는 존재다. 그의 겉모습만 아는 자들은 한없이 존경하고 흠모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하며 바로 옆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본 백려강은 완벽한 성인군자가 아니라 그냥…… 때때로 피곤해하기도 하고 여자친구들을 사랑하며 이따금 이익과 호기심을 좇고 추궁해나가는,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이었다.
“무한하고 광대무비한 세상에서 사람 한 명은 티끌만도 못한 존재일 뿐이지. 많이 생각해라. 그리고 다름을 이해하려 노력해라. 다름이 무엇이냐는 자기 자신의 질문에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길을 헤매지 않게 될 거다.”
그의 이야기에 안느는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맑게 빛냈지만, 백려강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 얼굴로 고민하다가 환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 환인 님은 그 질문에 대답하셨나요?=
환인은 대답 없이 작게 웃었다.
자신의 본질은 쾌락 살인광에서 아슬아슬한 한 걸음을 남겨둔 상태다.
이런 자신이 어떻게 제대로 된 인생의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해준 이야기는 그녀가 단순무식해지길 원하지 않아 어떤 책에서 본 글귀를 인용했을 뿐이었다.
사람은 생각이 단순해지면 행동 또한 단순해진다. 그렇게 단순해진 사람은 큰 실수를 쉽게 저지르기 마련. 그녀의 성정을 생각해서 지금까지 읽었던 책 중 그녀에게 도움 될 것 같은 그럴싸한 글귀를 인용했을 뿐.
그런 그의 웃음을 ‘환인 님도 아직 찾아가는 중이시구나.’ 알아서 해석하는 백려강을 두고 환인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키사기와 유피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좀 전에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다.
“……해서, 미궁은 현재 나르타라는 흑마술사가 점령해서 자신의 진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6개월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가설의 신빙성을 입증한다고 봅니다.”
=으음…….=
“최악을 가정한다면 미궁 내부에는 흑마술로 설치한 함정이 가득하겠지요. 이미 세 명을 인신 공양했다고 들었으니 새로운 괴물을 연성했을 수도 있습니다.”
=새, 새로운 괴물이라면…….=
좀전의 이야기에 눈앞의 남자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걸 깨달은 키사기는 무직자라는 생각을 버리고 잔뜩 자세를 낮추며 물었다.
“하이어 울프의 잡종……이라던가.”
=…….=
=…….=
“……나르타라는 흑마술사를 해치우더라도 미궁은 더 이상 예전처럼 기능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는 투라드 마을의 사도님과 유지분들의 확인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사도님과 마을 유지 어른들도 이해하실 거예요.=
“좋습니다. 마을에 도착하면 키사기 양과 유피 양이 해줘야 할 일은…….”
환인은 천천히 자신의 구상을 그녀들과 여자친구들에게 이야기해주었고, 여자들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이보다 나은 수단은 없을 거라 생각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틀 뒤 정오.
푸른 초원 위 아담한 숲 바로 옆에 세워진 투라드 마을은 겉보기에 무척 평화로웠다.
바깥에서 본 마을은 담쟁이덩굴이 가득 얽힌 높은 방책 덕분에 녹색 초원 속에 스며들어 눈에 띄지 않았고, 마을 내부는 도무지 흑마술사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평화로움이 만개해있었던 것.
=엇!? 유피, 유피 아니냐! 키사기도!=
=어엉? 뭐야, 갔다 오는데 한 달은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어떻게 벌써 돌아왔어?=
순박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대변하듯 활짝 열린 나무 방책 입구로 들어가자 자경 순찰대원인지 미노타우로스처럼 들소 뿔이 멋지게 자란 갈색 인우족 남자가 점박이 인견족 남자와 같이 놀란 눈으로 다가선다.
마차 지붕에 앉아있던 키사기는 그런 두 사람에게 약간 힘없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하 아저씨, 쿨카스. 다녀왔어요.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조금 길어요. 갔던 일은 잘 안 됐지만, 오히려 잘됐다고 할지…….=
=으응? 그게 무슨 말이냐. 같이 계신 분들은 누구시고?=
=저랑 유피가 도적 떼를 만나서 다 털리고 어쩔 줄 몰라 할 때 도와주신 분들이세요. 이글 자칼 여섯 마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도륙할 만큼 강한 여행자님들이에요.=
=어허! 뉘신 지 모르지만, 키사기와 유피를 구해주셔서 참으로 고맙소. 얼른 들어들 오시오. 작은 마을이지만 여행자들이 푹 쉴만한 여관 정도는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통행세는…….”
=저 녀석들을 구해주었는데 통행세는 무슨! 괜찮으니 어서어서 들어오시오!=
“…그러면 말씀대로.”
투라드 마을은 내부는 촌락보다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다.
정갈하지만 제대로 포장되어있지 않은 거리. 집은 대부분 흙벽돌과 통나무로 지어져 있었고 사도와 유지의 집으로 추정되는 건물만 돌로 지반을 세워 2층 건물로 올린 수준.
50여 채 정도 되는 건물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광경에 이실리테가 조금 이상하다는 듯이 옆에 앉은 안느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여긴 팔라툼에서 영도로 가는 길목 마을 아니었어? 마을이 발전할 요소는 충분한 거 같은데 왜 이렇게…….=
낙후되어있어? 하는 질문에 안느도 달빛처럼 반짝이는 은발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라서 그 흑마술사가 움직인 건가? 나도 잘 이해가 안 가네.=
그녀의 눈에 마을 주민이 물품을 들고 다른 집을 방문하는게 보인다.
각 가정은 전부 2차 생산 전문 기술을 익히고 있으며 물건이 필요하면 의뢰와 함께 물물 교환을 하는 느낌.
노점은 거의 없고 점포도 촌락처럼 잡화점과 대장간, 가죽점에 여관 정도뿐이다.
상업이 거의 발달하지 않은 모습에 여자들이 살짝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키사기가 마차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유피도 조금 위태롭게 땅에 내려선다.
=난 유지 아저씨들을 모아올테니까 유피는 환인 님 일행을 사도님 집으로 안내해드려.=
=응, 언니. 저어. 이,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환인 일행은 낙후된 느낌의 마을에 조금 의아함을 가지면서도 소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앞서 걸어가는 유피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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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글쟁이는 두말할 것 없는 심연의 변태입니다.
독자님들이 보고 계신 것은 심연의 어둠을 주욱 짜서 탈탈 털어내고 세탁기에 돌려 표백시킨 맛이에요....
몇 편 안으로 살짝 매콤한 맛을 보여드릴까말까 고민중인데..
흐으으으음
으으으으으으으으음....
매콤한맛 보여드리면 '으앆씨발!'하시면서 뒤로가기 누르실거 같아 쵸큼 고민되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