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 키사기와 유피
수풀 속에 반쯤 숨어있던 여자 둘이 알몸으로 뛰쳐나오는 걸 발견한 백려강은 살짝 당황하면서도 마부석에 앉아있는 환인에게 알렸다.
=환인 님, 저쪽에 두 사람이 벌거벗은 채 달려오고 있어요.=
바다에 빠졌다가 구명 튜브를 붙잡은 사람처럼 다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환인도 발견했다.
음모와 음부를 훤히 드러낸 채 가슴을 출렁이며 달려오는 여자 둘.
커피색 긴 머리카락에 하얀 담비 귀를 한 여자와 머리에 소뿔이 난 인우족 여자다.
=제발! 한 번만 도움을 부탁드려요!=
=후에엥……!=
그중 후에엥거리며 달려오는 하얀 머리에 검은색 브릿지가 곳곳에 들어간 인우족 여자에게 환인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젖소의 피가 흐르는지 젖가슴이…… 이실리테의 세 배는 될 지경이다.
이실리테도 조금 작은 사이즈의 수박 정도 크기인데 저 여자는 과장 보태서 밑가슴이 배꼽에 닿을 정도.
한 쌍 합쳐 20kg은 되어 보이는 젖가슴을 지탱하기 위해서인지 허리도 70은 될 것처럼 굵지만, 골반과 엉덩이도 120은 될법했으며 키도 컸기에 기괴하진 않아 보인다.
누군가의 눈에는 비만으로 보이고 누군가의 눈에는 육덕으로 보이는 수준.
나이 먹어 축 늘어진 젖이 아니라 탄력이 넘치는 젖가슴을 두 팔로 감싸 안고 달려오는 여자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환인은 이실리테와 환연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실리테는 마차를 세우고 환연, 주변에 매복이 있나.”
「없어. 주변 500m 안은 깨끗하고 하늘에서 내려다봐도 수상한 점은 안 보여. 쟤들 아까 그 도적떼한테 당한 거 아냐?」
수풀에 숨어있던 걸 알고 있었는지 평이한 어조로 말하는 환연에게 환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
마차가 천천히 멈춰서자 하얀 담비 귀 여자가 귀를 팔랑이며 먼저 달려와서는 마부석에 앉은 환인을 올려다보았다.
살았다는 그 얼굴에 당혹이 순간 스쳐 지나간다.
=나, 남자?!=
후드 망토에 가려진 몸의 윤곽이 우락부락하거나 크게 왜소한 형상이 아니어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후드 아래에 가려져 있던 환인의 얼굴을 본 담비 귀 여자는 한발 늦게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허벅지를 모아 민둥민둥한 사타구니를 가렸지만, 환인은 이미 귀엽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의 흔적까지 다 본 상태.
그걸 깨달은 여자도 한숨과 함께 가렸던 걸 풀고 두 손을 맞잡으며 간청하듯 입을 열었다.
=이런 꼴로 앞에 나선 것을 용서하세요. 저는 키사기, 저기 달려오는 가슴 큰 애는 동생인 유피에요.=
“저는 환인입니다. 일행의 책임자입니다만…….”
한발 늦게 도착한 유피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언니의 뒤에 숨어 기가 약한 여자 특유의 겁먹은 눈빛을 보여주고 있다.
그게 초식동물의 눈 같다고 생각한 환인은 이실리테에게 예비용 망토 두 벌을 받아 그녀들에게 넘겨주었다.
“일단 이걸로 몸부터 가리십시오.”
=감사합니다!=
=가, 감사드려요…….=
얼른 갈색 망토를 받아 몸을 가린 키사기는 한결 안도한 얼굴로 자신들이 어째서 이런 꼴이 되었는지 이야기해주었다.
=저희는 이 길을 따라 걸어서 10일 정도 가면 나오는 투라드 마을의 사람이에요. 흐라스린드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몇 시간 전에 전부 직업자인 도적놈들에게 걸려서 가진 걸 다 털리고 말았어요.=
=아, 역시…….=
=……?=
키사기는 마차 지붕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잠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녀를 바라봤다가 다시 환인에게 고갤 돌리며 말했다.
=저, 초면에 정말 죄송하지만, 조금만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부, 부탁드려요…….=
정말로 미안함이 가득 묻어나는 부탁에 환인은 키사기와 유피를 잠시 살폈다.
인우족인 유피 쪽은 체격이야 좋지만, 무직자에 성격도 소심해 보여 전투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키사기는 언어 구사도 제법 배운 층에 속하며 무엇보다 불을 다루는 3급 적술사.
게다가 얼핏 본 손바닥의 굳은살이나 11자로 갈라진 복근, 탄탄한 어깨와 허벅지 등을 봤을 때 근접 전투에도 제법 일가견이 있어 보였다.
‘말에도, 행동에도 거짓은 안 보이는군.’
환인이 짧은 순간 그녀들에 대한 분석을 끝냈을 때 마부석의 쪽창이 열리며 유르파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슬이 아가씨~ 갑자기 왜 멈춘 거니? 또 도적…… 응? 저 아가씨들은 누구? 내 망토를 왜 걸치고 있지?=
=도적 떼한테 가진 걸 전부 빼앗겼다고 해요. 알몸으로 계셔서 망토를 드린 거예요.=
……아, 방금 도적 떼한테 털린 여행자인가.
대충 사연을 눈치챈 유르파는 잠깐 환인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마차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도적 떼에게서 수탈한 물품 중에 저 여자들 것이 있을 텐데 돌려주는 건 그가 결정할 일이니까.
훌쩍, 마차에서 내린 환인은 마차 뒤로 걸어가며 키사기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주쳤던 도적이 어떠했는지 이야기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갑자기 왜 그걸 물어보는 걸까. 게다가 어디로 가는 거지? 잠깐 자신과 동생의 몸을 어찌하려는 건 아닐까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었지만.
‘그런 거였다면 애초에 망토를 주지도 않았을 거야.’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저 남자도 그렇고 마부석에 후드 망토를 쓰고 앉아있던 다른 사람도, 마차 위에 올라가 있던 여자에게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런 분위기는 보통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나 보이는 것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쿠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와 왜건도 뭔가 평범하지 않다.
마차에서 미미한 위상력이 느껴지는 걸 보면 마도구라는 뜻인데 쿠에 두 마리가 끄는 마도구 마차? 절대 평범한 일행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이 사지로 걸어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키사기가 침을 꼴깍 삼켰을 때였다.
같은 여자마저도 반할 만큼 아름다운 푸른 머리카락의 여자가 마차 지붕에서 사뿐히 뛰어내리며 말을 걸어왔다.
=환인 님은 나쁜 사람이 아니세요. 그러니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그런 게 아니라……?=
달칵, 마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결에 그쪽을 돌아본 키사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차 지붕 위의 여자만큼이나 아름다우면서 여동생보다 더 큰 키의 여자. 기다란 귀를 보면 플뢰인데 플뢰가 저렇게 클 수 있나?
=당신들이 도적 떼한테 당했다는 언니들이구나. 고생 많았겠네.=
플뢰는 선 성향 종족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남을 속이려 들지도 않는 종족이 플뢰인 것.
그런 플뢰가 일행이라면 적어도 도적떼는 아니겠지.
의심과 불안감을 빠르게 털어버린 키사기는 재빨리 남자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게, 저희를 습격한 것들은 6인조 도적이었는데 전원 직업자였고 여자였어요. 다들 탈것을 타고 있었죠. 우리도 조랑말이랑 작은 마차가 있었지만 달려서 도망치거나 저항할 수 없어서…….=
허망하게 짐을 빼앗길 수 없어 도적들과 대치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등급은 더 높아도 저쪽은 1~2급으로 여섯이다.
인원수에서 차이 날 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동생도 있다. 싸우면 패배는 확정이며 특성상 패배는 곧 죽음.
키사기는 죽음이라는 최악의 선택지를 염두에 두었지만, 사태는 최악까지 치닫지 않았다.
도적들도 잔뜩 경계 중인 3급 술법사, 위력만으로 따지면 모든 속성 중에서 최고를 달리는 화염의 술사와 목숨 걸고 싸우고 싶진 않았기에 위협과 윽박과 협잡질 끝에 키사기와 유피는 짐은 물론 속옷까지 전부 도적들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수도 있지만, 저희한테는 반드시 흐라스린드로 가야 할 의무가 있어서 죽음을 고를 수는 없었어요.=
=…그, 흐라스린드에는 왜 가려고 했는데?=
=그게…….=
환인은 안느의 질문에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키사기를 바라보다 마차 뒤의 짐칸에 붙은 아공간 상자에서 가방 몇 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여자들도 환인을 도와 도적 떼에게서 갈취한 짐을 모두 꺼내 땅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환인은 땅에 쌓아놓은 짐가방을 가리키며 키사기와 유피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이 만났다는 도적을 우리도 만난 것 같군요. 이 짐은 전부 그 도적 떼에게서 빼앗아온 것이니 여기에 두 분의 짐도 있을 듯합니다만. 찾아보고 있다면 가져가십시오.”
=……네? 정말이신가요? 어, 어떻게?=
=담비 귀 언니.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귀공녀라고 해도 믿을법한 아름다운 플뢰 아가씨의 이야기에 키사기는 살짝 얼굴을 붉히곤 유피와 함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써왔던 가방을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잊을 리는 없으니까.
금방 짐을 찾은 키사기는 자신들의 짐을 찾아 환한 기색으로 환인에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였다.
=이게 저희 짐가방이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짐이 있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두 분의 말은 도적들이 아무래도 잡아먹은 것 같더군요. 마차도 부숴서 장작으로 쓴 흔적만 남아있었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짐이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말한 키사기는 무두질한 소가죽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뒤진다. 그런데 뒤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안색이 점차 어두워져 간다.
옷보다 짐 내용물을 먼저 확인하다니. 평범한 이유로 흐라스린드를 향하는 건 아닌 건가.
=담비 귀 언니. 중요한 거라도 없어졌어? 아, 속옷이랑 옷이 없어서 그런가?=
안느가 궁금증을 내비치자 키사기가 어두운 얼굴로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그 도적들이 서신을 불쏘시개로 태워 버렸나 봐요. 흐라스린드의 영주님께 올릴 상소문인데 어쩌지…….=
=흐라스린드에 가려고 했다 했지? 그 상소문이 혹시 중요한 거야? 아니, 영주님에게 올릴 상소문이니까 중요한 건 당연하겠지만 그러니까…….=
=네. 돌아갈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제일 중요한 거예요…….=
환인의 여자들이 살짝 난감한 얼굴로 그를 돌아본다. 흐라스린드의 상황이 현재 어떤지 알고 있기에 나오는 표정이다.
그때 안절부절 꼼지락거리던 유피가 언니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응? 왜?=
=저 분들…… 마을 상황을 모르시잖아…….=
=아. 아아. 그러니까 지금 투라드 마을 상황은 그렇게 좋지 못해요. 마을 인근의 작은 미궁에 미친놈이 자릴 잡았는데 미친놈도 그렇고 수호자로 데리고 있는 괴물들도 강해서 토벌을 못 하는 상황이에요. 혹시 투라드 마을에 용건이 있으시면 돌아가시거나, 아니면 건너뛰는 게 좋을 거예요.=
설명에서 중요한 부분이 군데군데 빠져있고 대답도 산만한 느낌이 강한 것을 보면 정신적인 여유가 없어 보이는 모양이다.
그걸 느낀 이실리테가 키사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걸었다.
=키사기 씨는 지금 정신적으로 한계인 것처럼 보이네요. 따뜻한 차를 내려줄 테니 동생분과 함께 옷부터 챙겨입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아가씨.=
키사기와 유피의 짐은 태반이 소실되었다. 남은 것은 약간의 식량과 옷 몇 벌, 키사기의 떡갈나무 술법 지팡이 정도.
도적들이 조랑말을 잡아먹으며 돈이 안 되는 것들은 속옷까지 불쏘시개로 태운 것이다.
남은 게 옷뿐이라 키사기와 유피는 어쩔 수 없이 노팬티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고 이실리테가 타준 따뜻한 차를 마셨지만, 그럼에도 입을 수 있는 옷 돌아왔다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신의 짐은 도적 떼들이 가져갔고 그런 도적 떼는 환인 님 일행이 해치웠다. 소유권은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나 도적 떼에게 넘어갔고 다시 환인 님의 수중에 들어갔다.
자신의 것이 아닌 거다.
하지만 환인 님은 감사하게도 짐과 팔면 2금화는 나올 자신의 술법 지팡이를 아무 조건 없이 돌려주셨다.
빼앗겼던 짐 일부와 지팡이가 손에 돌아온 것이 감사할 따름.
그렇게 차를 모두 마시고 마음의 여유를 어느 정도 되찾은 키사기는 유피와 함께 환인에게 꾸벅, 허리를 깊게 숙이며 감사를 표시했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감사 인사조차 못 드렸네요. 저희들 위해 마차도 세워주고 차도 대접해주시고 짐까지 돌려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아.=
자기 짐과 돈을 내놓으라 떼를 쓰지 않고 그저 돌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태도.
예의가 가득한 행동은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기 좋다. 환인은 그녀들의 예의범절에 그냥 넘어가려 했던 소지금에 대해서도 물었고, 도적 떼에게 빼앗긴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말로 거절하려는 키사기에게 캐물어 그녀들이 잃었다는 여비 21은화를 보전해주었다.
도적 떼의 시체에서 수거한 금품은 13금화에 달하는 금전과 보석이었다. 그에 비하면 21은화 정도는 얼마 안 되는 돈.
여비까지 되찾은 키사기는 환인에게 다시금 허리 숙여 감사를 표했고, 좀 전에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한 투라드 마을 상황과 자신들이 흐라스린드로 향한 이유를 조리 있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라드는 근처에 호수가 있는 평범한 마을이었어요. 그랬는데 7년 전쯤 호수와 마을 사이의 언덕 절벽에 미궁이 하나 생겨났죠.=
미궁이 주변 땅에 미치는 효과를 생각하면 마을에 큰 경사가 생긴 것과 다를 바 없다.
1급 미궁은 일반인인 마을 사람들이 조금만 신경을 쓰면 관리할 수 있는 수준이니 말 그대로 금싸라기 땅이 생겨난 것.
다만 미궁의 등급이 낮으면 땅이 비옥해지는 범위도 좁기에 사도는 마을 유지들과 함께 의논했다.
주제는 미궁을 조금 더 키워 마을 부흥의 발판으로 삼을 것인지, 이대로 미궁을 1급으로 유지하며 그 주변에 농사를 지어 평온하고 안온한 삶을 이어갈 것인지.
나온 결론은 무사안일주의, 미궁을 그대로 1급으로 유지하며 주변 땅을 경작해 나오는 소출은 마을 전체를 위해 쓰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투라드 마을 사람들은 그 결론에 반대하지 않고 미궁이 더 성장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한편 미궁 주변의 땅을 개간한 뒤 경작을 시작했다.
그 결과는 그들의 기대를 한참이나 웃도는 것이었다.
투라드 마을 사람들이 경작하는 마을 인근 논밭의 1/5도 안 되는 땅에서 그 몇 배에 달하는 소출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더욱이 새로 생긴 이름 없는 미궁은 평범한 석재 동굴식이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형종은 맛있기로 정평이 난 하이어 울프hire wolf였다.
마을 사람들은 소소한 낙이 생긴 것에 기뻐했다.
1급에 불과한 곳이었기에 나오는 늑대도 몇 안 되고 그 숫자도 적어 늑대 고기는 마을에서 금방 인기품이 되었으며 경작은 가뭄에도, 수해에도 꿋꿋하게 열매를 맺어 마을에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
마을에 몇 명의 직업자가 있었기에 관리도 어렵지 않았고 개간한 땅은 가만히 내버려둬도 알아서 쑥쑥 자랐기에 손도 많이 가지 않았다.
좋은 일은 언제나 나쁜 일과 함께 찾아온다던가. 올해 씨를 파종해 농사를 시작할 무렵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당시에는 뭘 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첫인상도 좋지 않았죠. 비쩍 마른 몰골이 사람 같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착한 마을 사람들은 차별하지 않고 받아주었고 그 남자는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에 자릴 잡았어요.=
=…….=
사태 전개가 어찌 될지 익히 짐작이 가는 전조에 환인의 여자들 표정이 안 좋아진다.
=그놈이 본색을 드러낸 것은 어느 정도 혈색을 되찾았을 때였어요. 늑대 미궁 동굴로 들어가 미궁을 차지해버리더니 안에서 나오는 늑대를 족족 잡아 수호자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흑마술사였구나.=
유르파의 짐작에 키사기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이 좋은 흑마술사였는지 수호자로 만들어낸 하이어 울프는 한 마리가 2급 이형종 수준은 되어 보였어요. 그런 게 20마리가 넘으니 마을 사람들은 저항할 의욕이 꺾였죠. 자신에게 적의를 드러내면 마을에 저주를 내리고 독을 풀어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위협도 한몫했고요.=
=2급 이형종 20마리를 다루는 흑마술사면 마을 하나 정도는 밀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보다 미궁을 흑마술사가 차지했다는 게 더 위험한데.=
어둠의 위상력에 미궁이 물들면 비틀리고 뒤틀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최악의 상황에는 미궁 자체가 흑마술사의 의도에 따라 던전화 되어서 그놈의 요새가 될 수도 있는 일.
=네……. 그러는 와중에 저랑 동생이 상소문을 가지고 흐라스린드로 향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놈이 인신 공양으로 젊은 여자들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어요.=
키사기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여자들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흑마술사가 여자를 인신 공양으로 요구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십중팔구 젊은 여자의 몸을 모체로 삼아 키메라를 연성해내기 위해서기 때문.
차분히 이야기를 들은 환인은 키사기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
키사기는 차마 대답을 못 하고 고뇌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여기부터 걸어서 흐라스린드까지 간다고 하면 3주 가까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돌아가서 다시 채비를 갖추고 상소문을 가져온다 해도 되돌아가는 길만 걸어서 10일이 넘을 테고, 돌아갔다가 흑마술사 놈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환인은 그녀의 고심과 고뇌를 읽고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현재 흐라스린드의 영지 업무는 완전정지 상태여서 가더라도 큰 도움은 못 받을 겁니다.”
=네? 어, 어째서죠?=
이해를 못 해서 되묻는 키사기에게 유르파가 흐라스린드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영혼사 일행이라는 점을 빼고.
=그런…… 영주님께서…….=
크게 낙담하고 좌절하는 모습에 안느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었다.
=영주님을 잘 알아?=
=……미궁이 나타났을 때 보고를 위해서 제가 마을 대표로 흐라스린드에 갔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영주님이 직접 맞이해주시고 이해와 미궁 관리에 대해서도 조언해주셨었는데……. 그래서 이번 일도 영주님이시라면 잘 해결해주실 거라고 생각해서 출발한 거였는데…….=
=…….=
“…….”
확실히 사랑하는 여자가 죽기 전에는 영주가 도시를 잘 관리했다 들었다. 그때의 성실했던 영주라면 찾아온 마을 사람을 홀대하진 않았겠지.
환인은 저녁 시간이 다가옴을 느끼고 하늘을 올려다본 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키사기 양. 우리와 함께 마을로 돌아갑시다.”
=……예?=
“키사기 양의 마을에 우리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러니 같이 돌아가자는 겁니다.”
=아, 아니! 그럴 수는 없어요. 이 일과 관계도 없는 분께 위험한 일로 끌어들일 수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고 보따리도 건져주었으니 이리된 거, 마지막까지 책임져서 도와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우리는 키사기 양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러니 믿어보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환인을 키사기는 고심이 가득 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물론 은인이신 분을 위험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괜히 사람을 데려갔다가 흑마술사의 분노만 끌어내면 어쩌나 하는 걱정.
질끈 눈을 감았던 키사기는 발딱 일어나 환인에게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비록 3급 밖에 안되는 적술사이지만 저도 목숨 걸고 도울 테니까요!=
자신이 목숨을 걸고 마을의 직업자 동생들도 끌어들이면…… 가능성이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키사기였다.
저녁 식사 준비가 시작되었을 때 백려강은 해맑은 얼굴로 자신의 머그컵을 가지고 키사기의 여동생, 인우족인 유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머그컵을 순박한 얼굴의 그녀에게 내밀며 부탁했다.
=유피 양. 우유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
그 장면을 우연히 본 환인은 잠깐 굳어버렸다. 뭘 부탁한다고?
당황한 것은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 유르파는 황급히 달려가 백려강의 어깨를 잡아 돌리며 유피에게 사과했다.
=유피 아가씨? 미안해. 우리 아가씨가 좋은 집안의 사람이라서 평민의 삶을 잘 몰라.=
=려강아. 그런 거 함부로 부탁하면 안 돼. 인우족의 우유는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야.=
=앗, 집에서 부탁하면 다들 주시길래 그만……. 유피 양, 미안해요.=
당황한 백려강의 사과에 유피는 수줍게 웃으면서 손사래와 함께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오…. 저, 저랑 언니의 짐도 돌려주시고 마을도 도와주신다고 하셨는데 우유 정도도 드리지 못해서야…….=
백려강에게 컵을 받은 유피는 무릎 사이에 컵을 끼우고 스웨터를 가슴 위까지 걷어올린 뒤 컵 안쪽에 주먹만 한 유륜과 포도알처럼 영근 유두를 맞춘 다음 가슴을 한차례 주우욱 짜낸다.
그러자 콸콸이라는 의성어가 어울릴 만큼 하얀 우유가 유두에서 쏟아져나와 단숨에 머그잔을 가득 채웠다.
=여기… 드셔보세요…!=
기쁜 얼굴로 그걸 받아든 백려강이 단숨에 잔을 비우더니 윗입술에 하얀 수염을 만든 채로 후아! 감탄사를 토해낸다.
=정말 맛있어요! 지금까지 마셔본 우유 중에서 제일이네요!=
=가, 감사합니다아. 에헤헤…….=
=…저기, 유피 아가씨? 괜찮다면 나도 부탁해도 될까?=
=앗! 그럼 나도!=
=네에. 우유는 많으니까 얼마든지 괜찮아요오.=
“…….”
환인은 여자친구들이 차례차례 유피에게서 젖……을 받아 마시는 걸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으로 넘어와 상식을 파괴당한 적은 많았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이 세상의 비상식에 익숙해져서 더는 상식 파괴의 감각을 느껴볼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 느낌도 오랜만이군.’
인우족의 우유를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주 예전, 파르히스트를 지척에 두었을 때 인우족의 모유… 우유?를 커피에 타는 걸 본 적이 있으니까.
그때도 권유를 받았지만 사양했었는데…….
=환인 님, 여기요! 유피 씨의 우유는 정말 맛있어요!=
해맑은 미소와 함께 백려강이 자신에게 우유, 그것도 갓 짜내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우유를 내미는 모습에 고민에 빠졌다.
일단 색은 의심할 겨를 없는 하얀 우윳빛이다.
“…….”
근래에 들어 가장 큰 고민이었지만, 유피가 살짝 기대감이 깃든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자들은 유피의 우유를 두고 특등품질을 받아도 될 거란 품평을 하는 모습에 결정을 내렸다.
이실리테가 유피의 우유를 받아다 요리에 쓰는 것도 그의 결정을 부채질했다.
“…잘 마시지.”
결정을 내렸다면 나머지는 일사천리. 환인은 망설임을 버리고 천천히 컵을 기울였다.
“……!”
그리고 진심으로 놀랐다. 이게 정말 인간의 모유란 말인가.
어렸을 적 환인은 부모님과 함께 목장 견학을 한 적이 있었다. 거기서 우유 짜기 체험도 해봤고 직접 짠 우유를 마셔본 적도 있었다.
그때 마신 우유는 환인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맛있는 우유였는데, 유피의 우유는 그때 마신 우유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고소하면서도 약간의 감칠맛과 함께 드는 은은하면서도 깔끔한 단맛. 비린내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전혀 나지 않으면서 입자가 무척 가늘어 마치 물처럼 깨끗하게 넘어간다.
그렇게 우유를 넘기고 나자 비강을 가득 채우는 포근하고 달짝지근한 냄새. 어린아이의 분유 냄새를 희석한 듯한 기분 좋은 향기다.
속물적으로 표현하자면 지구에서 1ℓ에 10만 원을 받아도 불티나게 팔려나갈 맛이다.
“정말이군. 유피 앙, 이때까지 맛본 우유 중에서 최고의 맛이었습니다.”
=오~ 유피 대단한데? 우리 도령이 저렇게까지 극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영광으로 여겨도 돼.=
=아…… 가, 감사합니다아. 여러분들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으니까, 마시고 싶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한 잔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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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특등급 프리미엄 휴먼몰트 밀크※
우리가 마시는 우유는 여러 목장을 거치면서 우유 탱크에 생유를 다 섞어버린다고 합니당.
거기다 살균을 위해 이리저리 가열하고 처리한 뒤에 나오는 우유가 우리가 마시는 우유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