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31화 (531/813)

525 히스론드로 가는 길

이동하면서 알을 품을 수 있도록 왜건을 만들어준 뒤. 쿠라와 쿠핀은 번갈아 가며 알을 품었다.

이것은 쿠에의 습성 때문이기도 한데 알을 품을 때는 보통은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달리고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쿠에에게 꼼짝도 못 하는 것은 굉장히 괴로운 일. 이 때문에 쿠에 부부는 하루씩 번갈아 알을 품으며 식사와 배변 등을 해결하는데 이건 쿠핀과 쿠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둘은 야생 쿠에가 아니고 일행은 먹을 걸로 곤란을 겪지 않는다.

끼니때가 되면 여자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고 쿠라와 쿠핀은 아무런 걱정 없는 환경에서 하루씩 번갈아 가며 알을 품어나갔다.

흐라스린드를 나오고 6일째.

일행은 척박하고 험난한 산악-구릉지 지형을 벗어나 끝없는 초원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길을 따라 한가로이 북상했다.

사방 어디를 돌아봐도 지평선밖에 안 보인다. 때때로 작은 구름만 흘러갈 뿐인 쪽빛 하늘, 그리고 봄 내음이 물씬 풍기는 온전한 초록빛 들판.

불어오는 바람에 이름 모를 꽃들이 살랑거리는 분위기가 완연한 봄이다.

흐라스린드에서 히스론드의 주도 팔라툼으로 가는 루트는 두 가지다.

하나는 흐라스린드 동문으로 나와 길을 따라 1,500km의 긴 여정을 크고 작은 촌락, 마을을 방문해가며 지나는 길.

다른 하나는 북상, 1,500km에 이르는 거리를 중간에 마을 하나만 들르는 코스다.

흐라스린드는 소도시여서 따로 정보를 입수할 만한 조합이 없었기에 유르파가 중상급 규모의 상단에서 마도구를 다량 처분하며 얻어낸 정보였고, 환인 일행이 선택한 길은 북상하는 쪽이었다.

마을에 들를 생각도 없는데 많은 마을을 지나치는 길을 선택해봤자 행적만 노출될 뿐이니까.

=하아압-!=

눈을 감고 바로 앞에 꽁꽁 묶여 푸슉- 푸휴- 숨소리만 내는 칼날 사자에 정신을 집중하던 환인은 높고 날카로운 기합 소리에 눈을 떴다.

환인이 눈을 뜨는 모습에 재갈이 강하게 물리고 사지가 등 뒤로 묶인 채 배만 오르락내리락하던 회색 갈기 사자가 꿈틀하고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한다.

화악-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을 정도의 살기를 칼날 사자에게 집중하자 한순간 나무토막처럼 딱딱해져서는 눈만 끔뻑인다.

=자기. 잘 안돼?=

자신의 살기 방출을 느끼고 다가와 묻는 유르파를 무릎 위에 앉힌 환인은 그녀의 보들보들한 몸을 안으며 대답했다.

“산채로 영혼을 뽑아내려는 행위에 한해서라면 잘 안 됩니다. 하지만 영혼술 전체적인 측면에서 영혼 추출을 보자면 안되는 게 당연한 일인 듯하군요.”

=생명력이 강할수록 영혼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이야기구나.=

“오히려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유르파는 그 생각에 궁금증을 드러내면서도 샤프한 그의 눈매가 보고 싶어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옆으로 쓸어넘겼다.

응. 역시 잘생겼어.

“만약 산 자의 영혼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면 무언가 말썽이 생길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문제? 혹시 천원에서 찾아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걱정하는 거야?=

“예. 천원을 본지도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걱정이 중첩되는 느낌입니다.”

=난 부여 계통이라 잘은 모르지만…… 그걸 알아보는 게 가능할까?=

“영혼과 육신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기록되는 것 같습니다.”

아드네빌라는 마주한 순간 단숨에 천원에 방문했던 걸 알아차렸고 운명의 실이 시작된 본질마저도 꿰뚫어 보았다.

닌실 대성녀 또한 자신을 보자마자 혼돈 속의 인물이라는 걸 확신했으며 새벽의 빛,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영기를 눈에 담았었다.

“천원에서 찾아올 인물들도 그런걸 못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명색이 신의 정원, 사람이 죽어 영혼이 향하는 곳이니까요.”

=으음…….=

그의 이야기에 유르파는 영도의 기록실에서 읽은 신전기행이 생각났다.

니오네브레스 역사상 최악의 사기꾼이라고 알려진 파-레 사. 백려강이 입에 담았던 그의 저서인 신전기행神前奇行은 영도의 기록실에도 있었다.

관련학계에서는 금서라고 불리는 것이 영도에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그야 영도가 사기꾼의 잡서를 중요한 기록실에 보관할 리 없으니까) 책을 정독한 유르파.

신전기행에서 등장하는 신의 정원을 꿰뚫는 요점은 이거였다.

‘신수들의 쉼터.’

지성과 신비를 깨우친 지상의 모든 짐승이 오르고자 열망하는 신들의 권역.

그러한 곳에서 자기에게 사람을 보낸다면 적어도 신수와 비슷한 급의 사람을 보내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의 추측은 타당한 것이다.

영혼이 승천하는 곳이며 신수가 모여 있는 신들의 영역이다. 그곳의 관리자라면 당연히 영혼과 관련된 능력 또한 갖추고 있다고 봐야겠지.

=확실히 자기 말이 일리가 있네. 하지만 지금 자기가 영혼술에 매진하는 건…… 그 사람들이 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 거지? 아드네빌라는 그 사람들에 대해 경고 같은 건 안 했다고 했잖아. 적으로 상정하는 건 조금 위험한 생각일지도 몰라.=

환인은 성욕을 자극하는듯한 그녀의 포근하고 폭신한 살냄새를 맡다가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부드러운 살결에 푹 파묻히는 느낌이, 하루종일 만지고 싶을 정도의 젖가슴이 자신의 가슴에 마주 닿아 뭉개지는 감각이 자못 환상적이다.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대고 스읍- 숨을 들이마신 환인은 유르파가 간지러운 것처럼 목덜미를 움츠리는 걸 느끼며 말했다.

“여차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힘뿐입니다. 메리아놀과 엘위드리스라는 잠재적인 적대 세력도 있는 만큼, 현재로서는 부단한 훈련과 수련으로 능력을 키우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유르파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가만히 끌어안아 주었다.

자신의 품 안이 그에게 약간이나마 휴식처가 되길 바라면서.

환인은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영혼술이 벽에 부딪힌 느낌인 게 아쉽군요. 좀 더 실전 경험을 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 그러니?=

영혼술의 깊이를 더하려면 여러 색의 혼옥으로 펼치는 혼령주와 여러 영혼술의 단련 및 확장이 필요한데 청옥과 적옥을 구하기란 요원하다.

색이 있는 혼옥을 더 구한다고 해도 문제인 게, 혼령주를 펼치는 것은 아무 데서나 쓸 수 없는 힘이다.

검게 물든 들개 전사단의 영혼 구슬로 두더지 괴물을 향해 영혼 화살을 쏘았을 때 환연은 ‘엄청 더럽고 냄새나는 오물 같아. 그거에 맞으면 막막 썩고 부패할 거 같은걸.’이라고 말했었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가는 묘사이지 않은가. 그런 걸 아무 곳에서나 써보다가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기라도 하면…….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서라도 명성이 감소할만한 일은 하고 싶지 않은 게 환인의 심정이다. ‘저 새끼 또 저러네’와 ‘설마 성제님이 그런 사람이었을 줄은’의 차이는 명확하지 않은가.

영혼술 말고 실력을 늘리자니 심핵력을 서술한 책에서 익힐 건 다 익혔다.

아드네빌라도 차원 이동에 관한 것은 모르는지 거기에 적혀있지 않았지만, 심핵력을 위상력처럼 다뤄 기술의 위력 증진과 효과 증대를 불러오는 기술은 이미 익숙해질 만큼 익숙해진 상황.

그 증거가 일부 이실리테의 검섬을 모방하긴 했지만, 흐라스린드에서 광창으로 펼친 창섬이다.

결국 실력을 끌어올리려면 여러 가지로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퍼버벅, 콰곽! 퍽! 펑-

박투 소리에 그쪽으로 시선을 주니 안느가 몸에서 하얀빛을 뿜어내며 비슷하게 녹색과 하얀색의 빛으로 몸을 휘감은 백려강과 맨손 격투 대련을 진행하고 있었다.

환인과 유르파는 대화를 멈추고 대련을 구경한다.

둘 다 성체술을 기반으로 안느는 빛의 정령을 몸에 강령한 상태고 백려강은 바람술을 체술과 접목한 상태.

펑!

=꺅!=

줄곧 열세였던 대련 양상대로 안느의 장저에 명치를 얻어맞고 뒤로 튕겨 나가는 백려강. 데굴 구르려다 머리에 난 뿔에 걸려 기괴하게 나동그라진다.

목이 조금 위험한 각도로 꺾였지만, 신체 유연성이 압도적이어서 그런지 백려강은 큰 부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바라보던 유르파는 자신의 유방을 은근슬쩍 환인의 얼굴에 비비면서 말했다.

=려강 아가씨는 확실히 재능이 있네.=

“이제 바람술도 제법 잘 다루는군요.”

그녀가 고속 기동을 선보일 때마다 발치와 몸 주변에 펑펑 터지는 소리가 났었다.

바람을 응축시켜 터트리는 것으로 추진력과 가속력을 얻고 있는 모양인데 그런 식의 응용은 꽤 고난도에 속한다.

=응. 살아있을 때의 경험 덕분인지 바람술의 시전 속도도 법술사에 비해 몇 배나 빨라. 여기에 머리도 좋아서 용인체에 완전히 적응했는지 위상력 감응도 물이 오르고 있어. 바람술에 한해서는 조만간 날 완전히 뛰어넘을 거야.=

“직업자의 직업 효과를 받지 않고서도 그 정도입니까.”

=응. 이전 육체로 녹술사의 직업 각성을 경험한 덕분이려나? 녹술사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면 진작에 5급은 달성했을 거라고 봐.=

니오네브레스에서 술법사라고 하는 자들은 정식으로 원거리 속성 발현 직업을 각성한 사람을 가리킨다.

술법을 펼칠 때는 정신 집중을 하며, 어느정도 실력과 숙련도가 쌓이면 위력이 낮은 술법은 정신 집중을 할 필요도 없이 즉시 발현할 수 있다.

이런 술법사와 반대로 지식으로서 기술을 배워 술법사의 기술을 펼치는 사람을 법술사라고 하며 그 기술을 법술이라 부른다.

법술을 펼치는 데는 정신 집중에 더해 영창도 필요하다. 숙련도가 쌓여도 영창은 반드시 필요하다.

백려강은 생전에는 녹술사였지만 현재는 법술사. 하지만 법술사인지도 애매하다.

이전 삶에서 녹술사 직업 각성의 경험과 몸에 새겨진 감각으로 바람술을 쓰고 있어서인지 법술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영창이 짧고 정신 집중도 적게 필요하기 때문.

‘술법 친화는 아드네빌라의 육신이 가진 플러스 요소겠지.’

아무튼, 여기에 안느가 창안한 성체술을 익혔고 그녀의 격투술도 배우고 있다.

이실리테에게는 검술을 배우고 있으며 환인과는 대련으로 싸움법을 몸에 새기는 중이다.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지 이제 보름 정도지만, 원래 머리가 좋았고 그간 그녀들의 훈련과 대련을 쭉 지켜봐서인지 무투 실력도 쑥쑥 자라나고 있다.

‘저 정도라면 미궁에 데리고 들어가도 제 몫은 충분히 하겠지.’

비교 대상인 이실리테와 안느가 그 계통의 정점이라 모자라 보이는 거지, 지금 백려강 정도라면 일반 3~4급 직업자 정도는 간단히 때려눕힐 수 있을 거다.

하늘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먼지투성이가 된 채로 안느와 좀전의 대련을 되짚어보는 모습을 구경하던 환인은 이실리테가 왜건에서 나오는 걸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련은 거기까지. 정리하고 출발 준비하지.”

환인은 백려강을 미궁에 데려가도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환인은 그에 앞서 그녀의 마음가짐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상대로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실전에서 써 먹어보는 것.

=어? 길에 웬 바위랑 통나무래.=

그 시기는 예상 밖으로 일찍 찾아왔다.

야트막한 언덕을 가까이서 둘러 가는 길, 그 한복판에 사람 키만 한 바위와 반쯤 썩어버린 고목이 나뒹굴고 있었기에 마차가 멈춰서고 안느와 백려강이 치우려 내린 순간 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멈춰라, 이 새끼들아!=

=어이구, 쿠에 세 마리에 마차에 왜건까지 묶어놓고 아주 짐이 한가득하시네~?=

=남자가 안 보이는 게 쪼끔 아쉽지만, 풍년이네! 풍년이야~. 킥킥킥.=

건들거리면서 언덕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여자 도적 여섯.

얼굴에 칼자국이 하나 이상 나 있는 여자들은 통일되지 않은 가죽-사슬-판금 갑옷 차림으로 킬킬 웃는다.

아무래도 마차를 멈춰 세우려고 일부러 길에 장해물을 올려놓은 모습.

=…….=

=…….=

이실리테와 안느가 ‘저건 또 뭐야’하는 한심하단 표정을 짓자 한쪽 늑대 귀가 찢어진 여도적이 녹슨 만도를 바우웅— 크게 휘두르며 버럭 성질을 낸다.

=뭘 꼬나봐 이 씨발년들아! 눈깔 뽑히고 싶어!?=

도적들이 성질을 낼만도 하다. 저 도적들은 전부 아우라는 희미할지언정 직업자이고, 근접 전투 넷에 활을 든 원거리 전투 둘로 이루어진 제법 알찬 도적단이었으니.

그에 비하면 이쪽은 아무도 아우라가 없는 데다 고작 네 명뿐.

만도를 든 여도적의 성질에 창을 든 갈색 여우 귀 여자가 간사하게 웃었다.

=언니언니. 두목 언니가 이해해. 촌구석에서 막 올라온 것 같은 년들이 언제 우리 같은 직업자 도적단을 봤겠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넋 놓는 건데 잘난 우리가 봐줘야지~.=

큭큭큭.

킬킬낄낄.

여우 귀 여자의 너스레에 다른 도적들이 웃음을 흘렸지만, 두목은 그럴 수 없었다.

=아니, 보지로 흙 퍼먹었을 것 같을 촌년들이 존나 띠껍게 꼬나보잖아! 너흰 화도 안 나냐!?=

=좀 있다 꼬나본 만큼 산채로 회 쳐주면 되는데 뭘 그래. 아, 거기 쿠에 등에 타고 있는 년은 도망칠 테면 도망쳐봐. 그사이에 네 동료 년들 구멍이란 구멍에 쇠꼬챙이를 기이잎게 하나씩 꽂아줄 테니까.=

“…….”

일행이 전부 후드 망토를 쓰고 있어서 여자로 오해한 걸까.

마차를 몰며 따가운 햇볕을 피하려고 후드 망토를 눌러쓰고 있던 이실리테가 한숨을 작게 내쉬면서 일어선다.

안느도 주먹을 풀면서 나서려 할 때였다.

“잠시 기다려라. 백려강.”

=네?=

“혼자서 저들을 해치워봐라. 결과에 따라 앞으로 널 미궁에 데리고 들어갈지 말지 결정하겠다.”

=……!=

바위를 치우기 위해 손을 올린 채였던 백려강은 환인의 그 이야기에 살짝 당황의 눈빛을 내비쳤다.

저 말씀은 이번 전투로 자신을 일행의 전력으로 판단할지 말지 정하시겠다는 이야기? 그럼 저들을 다 해치우라고 하신 건…… 죽이라는 걸까?

=……아니 씨발 근데 이 버러지 같은 년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지금.=

만도를 든 도적은 환인의 이야기에 어이없어하다가 만도를 치켜들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짐만 내놓으면 목숨만큼은 살려 주려 했는데. 생각이 바꼈다. 네년들 모두 발모가지 잘라서 근처 촌락에 감자 하나 값으로 팔아넘겨 주지. 평생 거기서 거적때기만 입고 꿀꿀이 죽만 먹으며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할 거다!=

=웃기고 있네. 아깐 싹 다 회 친다고 했으면서.=

안느의 비아냥에 여우 귀 도적도 눈썹을 꿈틀하고 만도를 든 도적은 아예 무표정이 되어 성큼성큼 안느를 향해 언덕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표정과 행동만 보면 아가리를 찢어놓겠다는 의도가 가득 묻어나고 있다.

그 모습이 같잖기만 하던 안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머뭇거리는 백려강의 엉덩이를 톡 쳤다.

=가서 실력을 보여봐. 도령한테 좋은 모습 보여야지.=

=아, 네!=

=배운 대로만 하면 별거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진 말고.=

=네!=

그래. 언니들은 흐라스린드의 불량배들을 상대로 자비 없이 목을 떨어트리고 심장을 터트려 죽이셨잖아.

저 도적들도 마찬가지야. 살려두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만 줄 테니까!

=아니 씨발년들이 진……?!=

자신들을 무시하는 모습에 다시 폭발하려던 만도 도적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어느새 기사검을 쥐고 쏜살처럼 날아오는 여자 모습에 기겁했다.

아니 씨발 뭐가 저렇게 빨—

써걱.

수십 미터 거리를 불과 수 초 만에 좁힌 백려강의 검격에 목이 잘려 나간 도적 두목.

단 일검에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스륵 쓰러질 때, 백려강은 아직도 상황판단을 못 하고 멍청하게 서 있던 다른 도적 중 궁수부터 먼저 노리고 재차 달려들었다.

퍼펑-

=…히익!?=

바람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달려드는 백려강을 보고 깜짝 놀란 궁수 도적이 활대로 그녀를 후려치려 했지만, 단단한 물푸레나무 가지로 만든 활대는 성체술의 힘이 담긴 기사검의 일격에 나무젓가락처럼 부러지며 머리부터 명치까지 세로로 갈라지고 말았다.

=……정신 차려! 이년부터 먼저 잡아! 카우언, 르파! 동시에 간다!!=

가슴께까지 반으로 쪼개져 죽은 여도적이 뇌와 내장을 피와 함께 잔디밭에 흩뿌릴 때 여우 귀 여도적이 남은 셋을 끌고 백려강에게 돌진했으나.

‘느려…….’

그들의 느릿하기 짝이 없는 대처와 공격에 백려강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련을 시작하면 저항조차 할 수 없는 환인 님은 물론이고 자신도 모르는 약점을 목검으로 집요하게 찌르는 이실 언니나 자신의 방어를 그대로 뭉개면서 들이닥쳐 땅에 패대기치는 안느 언니만도 못하다.

반응 또한 어린애가 나뭇가지를 들고 휘적거리는 수준이고, 창과 도끼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왜 저렇게 엉성한지.

너무나도 허약한 모습에 잠깐 ‘이렇게 약한 사람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던 백려강은 속으로 고개를 흔들어 나약한 생각을 떨쳐냈다.

자신은 기사가 아닐뿐더러 이 도적들은 명백하게 우리 모두를 죽이려 했었다. 그리고 환인 님이 하신 이야기.

자신의 실력을 보겠다는 말.

삼각 진형으로 검과 방패를 든 도적이 가운데, 좌우로 창과 도끼를 든 도적이 무기를 꼬나쥔 채 다가온다.

그 뒤로 하나 남은 궁수 도적이 화살을 조준하는 걸 본 백려강은 짧게 주문을 영창했다.

[갑작스런 돌풍.]

푸화화화확—

주문 그대로 세 도적의 발치에서 돌풍이 강하게 일어나 흙먼지와 풀 쪼가리가 어지럽게 흩날리며 궁수의 시야를 가리고 도적 셋의 눈을 멀게 한다.

=어억! 씨발 이게 뭐야!?=

=눈, 눈에 흙 들어갔어!=

눈이 가려진 도적들에게 날아든 것은 자비 없는 공격이었다.

쾅—!!

백려강의 돌진 앞지르기에 방패째로 걷어차인 여도적이 검을 놓치곤 =으가악!= 뼈가 부러진 듯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생겨난 길을 보며 떨어진 검을 집어 들던 백려강은 궁수 도적의 화살이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깨닫고 사선 상에 창을 든 도적이 들어오도록 이동한 뒤 틈을 노려 궁수를 향해 검을 던졌다.

쉬이익- 쓰걱!

=끼야악!=

날선 소리를 내며 날아간 검이 궁수의 왼팔을 손가락과 함께 날려버렸을 즈음, 백려강은 눈물을 철철 흘리며 사방에 창과 도끼를 마구 휘두르는 두 도적을 가볍게 해치운 상태였다.

환인의 기백에 놀라 검을 마구 휘두르다 무기와 함께 단숨에 제압당했던 경험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으, 사… 살려주세요.=

=미안해요.=

푹-

살려달란 말을 들어 표정이 살짝 무너졌지만, 백려강은 망설임 없이 왼팔이 날아간 궁수 도적과 방패째로 팔이 완전히 박살 난 도적의 심장에 기사검을 박아넣었다.

그 장면을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며 길을 막은 장애물을 치운 안느는 환인과 이실리테에게 돌아가 소감을 말했다.

=제법이네. 못 죽이겠다고 찡찡거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러게. 나도 조금 걱정했었는데.=

빛이 닿지 않는 미궁에서 살려달라고 오줌을 지리며 발버둥 치던 도적을 죽이라고 레심에게 지시를 내리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실리테다.

단호한 면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손을 쓰는 것과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내려 손을 쓰게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래서 제대로 살인을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던 듯하다.

환인은 기사검을 꼭 쥐고 내려오는 백려강을 맞이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 그러면 저도 환인 님이랑 언니들을 따라 미궁에 내려갈 수 있는 건가요?=

“그래. 미궁 정신 침해에 그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봐야겠지만, 지금은 합격이다.”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던 백려강은 이어진 환인의 지적에 다부진 표정을 지었다.

“다만 저런 도적들을 죽일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면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좀 더 마음을 독하게 먹을 필요가 있다.”

=…네!=

“그렇다고 마냥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니 힘들면 나나 언니들에게 상담도 받도록.”

=넷!=

그렇게 갑작스러운 순간에 벌어진 실력 테스트를 통과한 백려강은 몇 시간 뒤, 자신이 도적 떼를 참살한 게 잘한 행동이었으며 이후로도 악인의 목숨을 거두는데 망설이지 않게 되는 결과를 마주할 수 있었다.

=거, 거기 가시는 분들!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 저희를 좀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으앙. 부디 도와주세요오……!=

좀 전에 만났던 도적에게 몸뚱이 빼고 전부 빼앗겼는지 허허벌판에 알몸으로 덩그러니 쪼그려앉아있던 여자 둘을 만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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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칼날 사자는 해체되어 고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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