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 메리아놀의 내부 사정, 그리고 종족연합 금화.
환인은 그 어떤 반응도 내보이지 않고 아우반을 응시했다.
그가 안느와 아는 사이라는 건 처음 인사를 나눌 적에 중간중간 안느에게 시선을 주는 것에서 눈치챘었다.
그리고 오늘.
비록 안느가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가 어렸을 때 보통의 플뢰들과 다른 체격 탓에 겪은 일을 생각하면 저 반응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해서 환인 자신까지 그녀의 감정에 공감해 아우반 8급 귀족을 적대할 생각은 없었다.
아우반 8급 귀족이 만약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독선적인 자였다면 무시로 일관했거나 대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크로알 영주와 언쟁하는 모습에서 결코 악인이 아님을 환인은 알아차렸다.
선한 자는 아니지만 악한 자도 아니다. 자신의 자리에 걸맞은 행동을 할 줄 아는, 정치적으로 중립에 가까운 인물.
환인은 머릿속으로 메리아놀 측과 만났을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왔던 것을 되새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경고와 설명을 경청하겠습니다.”
달칵.
이실리테가 찻잔을 놓아주자 아우반은 그녀에게 작게 목례를 한 뒤 질문을 먼저 던졌다.
=성제 예하께서는 지구인의 차원 전이가 어떠한 이유로 벌어지는지 알고 계십니까?=
“제 경험을 빗대어보자면 무작위로 이 세상 어딘가에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보다, 이 차원으로 흘러들어오는 방랑자는 지구인밖에 없는 겁니까.”
환인은 플뢰족의 종족 특성인 거짓을 간파하는 진실의 눈과 귀를 의식하며 중요한 내용은 자르고 표면적인 대답만 늘어놓는다. 거기에 질문을 한 스푼.
=그렇습니다. 차원 방랑의 유래는 매우 오래되었습니다. 최초의 차원 방랑자는 아마도 3100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할 정도이니까요.=
“…….”
간단하게 넘어온 아우반의 대답에 환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지구와 니오네브레스 사이의 시간 괴리는 자신이 겪기로 저쪽의 하루가 이쪽의 한 달 정도였다.
여기 니오네브레스의 3100년이면 약 37,200개월. 지구 시간으로 101년 전의 일이 된다.
3100년. 아득한 시간이다. 그러나 니오네브레스의 삶의 방식과 문화, 사상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메리아놀이 갖은 노력으로 사상과 기술의 전파를 틀어막았다고 봐야겠지.
‘영도의 기록실에서 보았던 이 세상의 문명 연도는 약 1만 7천년 정도였나.’
잠깐 딴 생각을 하던 환인은 아우반이 입을 여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제 조국 메리아놀은 첫 차원 방랑자의 존재를 인식한 뒤부터 종교적, 정치적 이유로 차원 방랑자분들을 찾아서 확보하여 본국에…… 이런 표현이 불쾌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반쯤 유폐하였습니다. 이유는…….=
“차원 방랑자들의 지식과 사상 때문이겠지요. 격리하지 않는다면 독소 같은 지식을 마구 뿌릴 테니까.”
=맞습니다. 어찌하여 지구에서 니오네브레스로 지구인만 넘어오는지 그 원인은 아직 알아내지 못하였지만, 메리아놀은 최대한 성실히 그리고 차원을 넘은 방랑자분들이 불편하지 않게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지원해주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차원 방랑자와 사이가 좋아진 몇몇 인물들이 이세계의 문물을 알게 되어 기술이 조금 발전하는 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만…….=
아우반은 크로알 영주가 죽기 직전에 소리쳤던 것처럼 차원 방랑자를 착취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리 말하는 아우반의 얼굴에 거짓은 한 점도 없었다. 상대가 거짓말을 하면 뒤에서 슬쩍 찔러주며 지금 상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알려주는 안느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종족연합 금화를 줍고 전이한 건 무슨 이유에서인가.
안느는 플뢰족의 공주라고 했었다. 그리고 아우반의 여동생이 그녀의 모친이다.
그 말은 아우반도 성골 바로 아래, 진골이나 다름없는 8급 호족이란 뜻인데 그도 모르는 메리아놀의 이면이 있다는 건가.
별로 좋지 않은 소식에 환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걸 눈치챈 아우반은 그의 심기가 나빠진 것이 메리아놀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까, 오해하며 변명을 덧붙였다.
=조국이 차원 방랑자를 찾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균열 발생 징후를 포착, 해당 지점을 찾아가 탐문수색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교단을 통한 신고입니다. 이 방식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어서…….=
솔직히 말해 1년에 몇 명이나 니오네브레스로 흘러들어오는지 알 수 없고, 차원의 균열이 발생하는 징후를 포착해 최대한 빨리 달려가더라도 전이 지점이 위험한 장소라면 도움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사망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고 설명한다.
환인은 그러한 내막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고개를 가만히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거리가 멀어질수록 술법의 효율은 급격하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제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내디딘 곳은 메리아놀에서 대륙 반대편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반경 수백 킬로미터 안에 인적 또한 없는 곳이었으니 메리아놀이 알아차리기는 어려웠겠지요.”
=이해해주시는 것과 앙금이 남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행히 성제 예하의 능력과 자질이 출중하여 영도의 대성자 후보가 되셨지만, 그 과정은 절대 간단하지 않았겠지요. 게다가 그 판돈은 목숨이었으니…….=
그리 말한 아우반은 옥을 가공해 만든 작은 함을 꺼내 탁자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이것은.”
=메리아놀 협의회가 드리는 조촐한 성의라고 생각하여주십시오.=
옥함 안에 든 것은 은색 바탕에 무지갯빛이 은은히 감도는 금속제 신분증이었다.
=메리아놀 협의체가 소유자의 신분을 보장하며 보호한다는 무제한 신분 보장 증표입니다.=
이것이 있다면 메리아놀 권내는 물론 타국의 도시에서도 통행세와 신분 확인 없이 출입할 자격이 생긴다며 설명하는 아우반이지만, 환인은 신분증의 재질에 약간 관심을 보였을 뿐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성제라는 이름값이면 어딜 가든 자유 출입이다. 변장한 것에 대한 신분 또한 대성녀가 신경 써서 만들어주었기에 이런 신분증 따위는 의미가 없다.
=물론 일반적인 신분증이 아닙니다. 성제님께서 혹 의도치 않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어 곤란한 상황일 때 메리아놀이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약속이기도 하며 그 신분증을 제출한다면 메리아놀 각 종족의 왕궁에도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도시의 정식 인가를 받은 은행에서 매달 100금화의…….=
“이것은 제가 받기 난감한 성의로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으음…….=
“이와 비슷한 것은 헬루멘에서도, 프라버에서도, 현친왕 전하께도 제안해주셨었습니다. 그분들께 어떤 답을 내놓았는지, 투르시온 공이라면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
아우반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진심에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시를 받았기에 사죄의 보상 정도로 포장하여 내밀었지만 역시나 거절이다.
아무리 차원 방랑자라 하여도 상대는 영혼사, 그것도 단시일 내에 문무 양쪽에 두각을 드러내며 대성자 후보까지 거론된 거물이다.
이런 노골적인 선물이 통할 리 없다고 하였거늘…….
아우반은 정말 놀랍도록 변한 조카를 보았다가 속으로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조카가 저렇게 변한데다 그의 영혼 기사로 재직 중인 줄 알았다면 좀 더 매끄럽고 그의 마음에도 흡족한 보상과 대가를 준비하였을 터인데.
환인은 아쉬움을 알게 모르게 드러내는 은발의 미남자 얼굴, 어딘가 모르게 안느와 닮은 듯한 아우반을 바라보다 물었다.
“차원 방랑 건에 관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엘위드리스 가문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습니다. 저에게 해주실 경고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 그것은…….=
환인은 창가에 서서 아우반이 호위와 함께 영주성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해준 경고란 것은 별것 없었다.
예언자 가문인 엘위드리스의 가주, 프슈드=오울=엘위드리스의 지시 아래 예언자들이 가문으로 복귀하고 있었으며 가문 내 후계 구도가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가문이 영도의 영혼사가 된 이엘카타에게 신경을 쓰고 있으며 성제인 자신과 그녀의 관계 또한 파악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의도는 간단하지 않다. 그 본의가 드러날 때까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
아우반이 돌아가기 전에 한 말이 마음에 걸린다.
엘위드리스 가문이 외부 활동을 중단하였다는 이야기. 자신의 기준에 따르면 엘위드리스 가문의 일련의 변화는 공격의 전조지만…….
=안느, 아까 온 귀족이랑 친척 사이야?=
=……친척 사이였고 지금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어음…… 별문제는 없었니? 돌아가기 전에 안느 아가씨한테 돌아오라던가 뭐 그런?=
=할 리 없지. 내가 어떻게 가문에서 쫓겨났는지 잘 아는 사람인데…….=
=안느 언니 혹시 그분이랑 사이 안 좋게 헤어지신 거예요?=
=그렇게 말하니까 꼭 사귀는 사이처럼 들리잖아! ……고위 플뢰족은 태어나면서 정략결혼이 걸리는 건 너희도 알지? 내 정략결혼 상대가 그 아저씨의 아들이었어. 그 아들은 나랑 결혼할 바에는 콱 죽어버릴 거라면서 난동을 피웠고…… 결과적으로 내가 플뢰 사회에 알려지면서 절연 당하게 된 계기가 됐지.=
=…….=
=…….=
=…….=
=아무튼 그 아들놈 때문에 아저씨도 싫어졌지만, 그건 내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고 실제로는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의 직함은 못 들었네. 메리아놀에서 무슨 직위야? 8급이나 되면 신분이 꽤 높을 거 같은데.」
=법률 집정관. 협의체 직속 6인의 집정관 중 한 명이야. 메리아놀 전 종족 통틀어서 권력 순으로 줄 세웠을 때 20위 안에 들어.=
「……오우.」
그런 사람의 며느리로 예정되었다니, 여자들은 새삼 안느가 진골 중의 진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자리에서 쫓겨날 정도로 플뢰족 내에서 이질감이 심했다는 것도.
「그 약혼자였다는 인간, 지금 변한 안느를 보면 아까워서 땅을 치고 울려나?」
=외모로 차별하는 인간이잖니. 지금 안느 아가씨도 키가 무척 큰 편이니까 키 커서 싫다고 하지 않을까? 그런 남자는 자존감이 무척 낮아서 여자는 무조건 자신보다 못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법이거든.=
=아……. 일리 있는 이야기네요.=
=려강. 비슷한 경험이 있는 건가요?=
=앗. 제 이야기는 아니고 사교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어요. 루크랑 호족에도 그런 남자가 많아요.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는 한심한 남자요.=
=그런 남자는 어디에나 있죠……. 그나저나 안느가 저렇게 변했으니 안느네 가문에서도 손을 뻗칠 거 같은데…….=
안느는 자신의 과거로 쏠리는 관심이 부담스러웠는지 두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친다.
=이 이야기는 이제 그만! 그 인간네랑은 이제 아무런 관계도 없고, 난 도령의 여자야. 이제 와서 돌아오라 마라 하면 워 해머로 머리를 내려칠 거니까!=
그리고는 여전히 창가에 서서 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밤의 거리를 바라보고 있는 환인에게 달려가 팔짱을 낀다.
환인이 습관적으로 손을 올리자 잽싸게 머리를 숙이는 안느. 환인은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녀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너는 내 여자다. 누가 되었든 널 데려가려 한다면 나부터 쓰러트려야 할 거다.”
=헤헤…….=
도령이 진심을 내면 자신이나 이슬이가 전력으로 덤벼도 승리 가능성이 한 자릿수를 맴돈다. 그런 그가 자신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말은 즉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이야기.
보고 싶지 않던 사람을 만나 기분이 조금 처졌던 안느는 그 이야기에 다시 기분이 좋아져 긴 귀가 쫑긋하고 위로 솟아올랐다.
=그런데 자기. 그…… 자기가 여기로 오게 된 경위 같은 건 일부러 말 안 한 거지?=
“예. 투르시온 공도 잘 모르는듯한데 괜히 이야기를 꺼내 대비할 기회를 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법률 집정관이라 푸른 나뭇잎의 탑하고 연관성이 적은 걸까, 아니면 그도 모를 만큼 기밀 사항인 걸까?=
“애초에 탑의 소속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슬슬 잘 준비를 하지요.”
아우반과 면담하느라 시간이 제법 지났다.
자신의 이야기에 재잘거리며 오늘 밤 불침번 순서와 잠자리 순서를 정하며 옷을 갈아입으러 작은 방으로 들어가는 여자들.
환인은 여자친구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신도 잘 준비를 위해 침실로 향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라드세아 측 외교처장이 찾아왔다.
이번 사건에 혼재가 발생하게 된 경위, 크로알 영주와 혼재가 함께 있었던 이유의 조사와 증언에 협조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마룡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어젯밤 메리아놀의 아우반 집정관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찾아온 듯하였는데.
“영도는 영혼사에게 정치 대립 구도에는 개입하지 말 것을 강권합니다. 이유는 외교처장께서 더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하면 투르시온 공께서도……!=
“그분은 조력과 협조가 아닌, 제가 메리아놀에 선입견을 품지 않도록 해명을 위하여 찾아오셨던 겁니다.”
환인은 얄짤없이 바쁜 걸음을 했을 텐데 도울 수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로 처장을 간단히 돌려보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점심 즈음에는 땅신 교단의 대주교, 대너리오가 찾아와 흐라스린드에서 고통받는 시민들을 위해 거금을 쾌척한 것을 두고 감사를 표하고 돌아갔으며 하얀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난 짐승신 교단의 여신관장도 찾아와 다시금 감사를 표했다.
=정말 성제님의 배포에는 감탄했다고. 600금화나 되는 거금을 흔쾌히 던지고 가고 말이야.=
“어차피 제 돈도 아니었습니다. 조직폭력배들이 시민들을 갈취해 모아둔 돈을 다시 시민들에게 돌려준 것뿐이니까요.”
=크으, 진짜 남자로구만. 대다수 모험가는 그 벌레들이 모은 돈을 우리가 획득했으니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라고 개소릴 씨부렁거렸을 텐데. 근 10년 만에 보는 진짜 남자라서 자궁이 다 떨리는걸. 당신이 성제님만 아니었으면 당장 아기 만들기를 하자고 졸랐을 텐데 정말 아쉬워.=
“…….”
백사자의 피를 이은 여신관장은 이실리테와 안느의 사나운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으하하 호탕하게 웃으며 돌아갔다.
환인의 여자들이 무슨 저런 여자가 신관장이냐며 화를 낸 것은 덤.
이 연이은 방문의 원인에 환인은 아우반이 테이프를 끊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영주가 사망한 이후 자신은 이 일에 관해 손을 떼겠다고 선언하고 이전에 묶고 있던 여관으로 돌아와 묶고 있는데, 아무래도 메리아놀 vs 라드세아, 땅신 교단 vs 짐승신 교단의 매치가 이루어져 서로 눈치를 보며 방문 각을 잡고만 있었던 것.
그런 거 치곤 별 말없이 돌아간 게 조금 의아했지만, 이것도 대성자 후보라는 이름값 때문이라고 환인은 결론을 내렸다.
환인이 기다리던 상급 영혼사 두 명의 일행은 그날 오후에 도착했다.
당초 예정했던 8일에서 3일이나 단축해 5일 만이었는데 그 내용이 조금 어이가 없었다.
파견을 지시받은 상급 영혼사 2인은 그렇지 않아도 혼재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라는 소식에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대성녀의 지시를 받은 조인족을 통해 흐라스린드의 소식을 전해받고는 하루에 몇 시간 자지도 않고 말에게 채찍질과 회복약을 번갈아 써가며 쉬지 않고 달려왔던 것.
“……급히 오지 않아도 된다고 연락을 드렸던 것이었는데 중간에 착오가 생겼나 봅니다.”
=아니, 아닙니다…….=
=예. 이건, 저희가… 흐으으…….=
기진맥진해서 대답도 제대로 못하는 영혼사 두 명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영혼 기사들의 모습에 환인은 더 이상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마 자신의 부탁에 대성녀는 아랫사람을 통해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언급을 했을 것이다.
불쌍한 상급 영혼사들은 대성녀의 ‘천천히 가도 괜찮다.’는 전언을 반대로 해석해 죽을힘을 다해 달린 것이고.
그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준 환인은 당연히 대성녀에게 통신을 신청했고, 사정은 예상대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라? 그 아이들이 벌써 도착하였다고? 아니 천천히 가도 된다는 것과 연락을 받으면 통신을 걸라고 말한 것이 전부였는데 어찌하여…….]
“상급 영혼사라면 평소 기관을 통해 일정을 배분받거나 통지할 테고 정 급한 일에는 집행부가 나섰을 겁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보통의 영성도 아닌 영도의 정점인 대성녀님이 직접 지시를 내렸으니…… 이들은 유례없는 일에 반어법으로 받아들였던 거겠지요.”
[이것 참. 이런 일은 처음이라 배려를 못 했군. 앞으로는 주의하여야겠소.]
“그건 그렇게 하시고, 이분들은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시 영도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까.”
[아니. 그들의 일정은 흐라스린드의 혼재를 성불시킨 뒤 여력이 남는다면 알류겔 호수 북부를 돌아 조천 도시 엘스너펠 쪽을 통해 성불행을 하며 복귀하는 것이었소. 흐라스린드가 정리되었다 하니 이대로 알류겔 호수 인근 촌락과 마을을 돌며 성불행을 하겠지.]
질문에 답해준 대성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환인에게 물었다.
[성제는 이제 흐라스린드를 뜰 것이오? 북상하는 코스를 보자면 히스론드 주도를 향하는 것인가.]
“그럴 예정입니다. 주도 팔라툼에 두 가지 용무가 있으니까요. 혹시 가는 길에 제게 맡길 임무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은 아니고…….]
잠깐 말 끝을 흐린 대성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차원 방랑자 매매 사건의 파문이 의외로 가라앉지 않고 있소. 성제인 그대도 그대이지만 그대의 영혼 기사들도 뛰어나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다만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높으니 다닐 땐 되도록 소녀가 마련해준 일반인 신분증을 이용하길 바라오.]
“한동안 차원 방랑자가 보물 보따리로 보이겠군요. 그러겠습니다.”
크로알 영주가 죽었는데도 며칠째 외교처장과 집정관이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만 봐도 사안이 가볍지 않다는 건 확실하다.
멍청하고 선민의식이 가득 찬 영주라면 차원 방랑자를 따로 빼돌려 이득을 취하려 들겠지.
환인은 과연 이 일이 니오네브레스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변화를 일으킬지 궁금해하며 대성녀와 통신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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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은밀한 병-신은 있을 수가 없다는게 점점 정설로 다가오는 느낌입니당
저는 그래도 건전한 변태인데 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