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26화 (526/813)

520 흐라스린드의 마지막 영주

영주의 구금은 당사자의 40평 남짓한 호화로운 침실에서 이루어졌다.

환인은 당연히 같은 방에 머물렀고, 호위로 이실리테와 안느 둘 중 한 명이 반드시 그와 함께했다.

다른 일행은 침실과 연결된 거실 겸 응접실에 대기했으며 하루에 세 번씩 교단의 인사가 찾아와서 영주와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의 내용은 대동소이했다.

플뢰족을 비롯한 사비족, 플라비우스족, 프라우드족의 노예 매매를 인지하고 있었느냐

매매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느냐

차원 방랑자의 매매 또한 이루어졌다는 걸 알고 있느냐.

영주는 철저하게 라드세아의 선민의식이 충만한 호족을 연기했다.

노예로 들어왔기에 거래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분이 불분명한 부랑자였기에 팔린 것으로 알고 있다.

차원 방랑자? 다른 차원의 사람이 아닌가. 사고판다 해서 문제가 있나.

그러면서 면담을 하러 온 대주교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흐라스린드의 호족 대부분이 노예 거래에 가담했다는 것을 누출했고.

=그렇게 자국민이 중요하다면 잘 지키지 그랬소. 영도를 보시오. 그리고 성제님을 보시오. 전세계가 영혼사님들을 존중하고 존경하오. 성제님 또한 차원 방랑자이지만 누구에게도 얕보이지 않지. 당신들은 왜 그러지 못한거요?=

오히려 면담하러 온 대주교와 메리아놀 협의회 측 외교관을 향해 너희가 무능해서라고 조롱하였다.

외교관은 플뢰족과 프라우드족 두 명이 왔는데 프라우드족은 그 이야기에 대격분, 영주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고 영주 또한 길거리 불량배처럼 노호성을 지르며 프라우드족 외교관과 주먹다짐을 하였다.

=네놈들이 무능해서! 관심이 없어서!! 욕망에 눈이 멀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차원 방랑자가 그토록 중요하다면 어째서 안내자에 신경을 쓰지 않았나!! 왜 제도적인 장치로 그들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나!! 전부 네놈들의 안일주의가 빚어낸 일이 아닌가!!!=

루크랑의 인종 중 강함으로는 언제나 한 손에 꼽히는 인호족의 힘은 대단해서, 무직자임에도 근력과 체력만으로 따지면 니오네브레스 종족 상위권에 드는 프라우드를 압도적으로 두들겨 패버린다.

프라우드족 외교관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면서도 반격을 멈추지 않고 분노의 고성을 질렀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놈이 무얼 아느냐!! 너 같은 놈의 욕심이 세상에 만연하니 아무리 예산을 들이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도 절망의 신음은 멈추지 않는 거다!!=

“그만하십시오.”

난투극은 환인이 평온의 파동을 펼치고 나서야 멈추었지만, 이로 인해 사태는 더더욱 심각해져 갔다.

반성할 줄 모르는 흐라스린드 영주의 태도에 더해 지난 10년간 차원 방랑자 다섯 명이 흐라스린드에서 매매되었고 다섯 명 전부가 흐라스린드에서 종적이 끊겼다는 조사 결과에 종족연합국가 메리아놀의 협의체가 정식으로 라드세아의 성궁에 항의와 협조문을 보낸 것이다.

사안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겼는지 좀처럼 쓰질 않는다는 초장거리 공간이동 술법진을 이용, 양측 주요 인사들이 흐라스린드에 집결하는 가운데 크로알 영주와 세나는 죽음을 앞둔 연인처럼 하루종일 붙어 지냈다.

=미안해. 언제나 네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는데……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는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쿠로가 얼마나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는지 옆에서 다 지켜봤으니까요.」

=……하다못해 죽은 뒤에만큼은 네가 외롭지 않도록 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할게.=

「쿠로…….」

=세나…….=

“…….”

팔짱을 끼고 창문틀에 앉아있던 환인은 크로알 영주와 세나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걸 묵묵히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건 발생 3일째 오후.

상급 거리에는 오가는 주민이 1명도 없다. 이따금 보이는 사람은 라드세아 측 조사관과 호위 병력, 그리고 메리아놀 측 조사관과 심문관, 탐문관 및 호위 병력뿐.

침체하다 못해 거리의 분위기가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중이다.

반대로 중급 거리와 하급 거리는 오히려 그런 상급 거리가 꼴 좋다는 듯이 활기찬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간 쌓여만 가던 패배감과 부족한 물자로 인한 위기감, 음울한 분위기가 환인의 성불행 이적과 뒷골목 조직의 일망타진으로 반전되어 무력하게만 지내던 이들이 힘을 합치기 시작한 것.

영주성, 거기다 영주 침실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어 삼삼오오 힘을 모아 도시 밖으로 나가서 사냥과 채집을 하거나 성벽 바깥의 몇 안 되는 농경지의 개간, 중급과 하급 거리의 미관 개선에 앞장서는 것이 보인다.

한둘도 아니고 수천 명이 그리 움직이니 덩달아 다른 사람들도 뭔가 해야 할 분위기에 움직이며 할 일을 찾아다니는 중.

그리고 하급 거리 한편에서 짐승신 교단의 사제들과 땅신 교단의 사제들이 구호품을 풀고 있는 것도 눈에 들어온다.

구호품을 받아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희망이 넘쳐흐르는 모습에 환인의 옆에서 같은 것을 보고 있던 안느가 절그럭, 건틀릿의 쇳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 구호품, 전부 도령이 준 기부금에서 충당하고 있대. 신전들이 신님의 이름을 앞세워서 상급 거리 상점들이 창고에 쟁여둔 걸 반쯤 강탈하다시피 하고 있다나 봐.=

뒷골목 조직을 박살내며 회수한 재화를 두 신전에 반반씩 던져줬는데 그걸 쓰고있는 듯 하다.

“상인들도 목 바로 아래까지 칼이 들어온 기분일 거다. 흐라스린드를 뜰지 말지 고민하는 판국일 테니 마냥 강탈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흐라스린드의 최상류층이자 지배계층인 호족이 싹 잘려 나갈 분위기다. 그건 상급 거리에 사는 상인들이 누구보다 피부로 느끼고 있을 터.

이러다 혁명이 일어난다거나 대규모 폭동 사태 같은 게 벌어지면 가진 물건을 싹 날리게 될 판이니, 평소보다 싼 값이라 해도 다 팔아넘겨 버리는 게 정답일 수 있는 것.

환인은 가라앉은 눈으로 점심 무료 급식이 진행되고 있는 하급 거리의 영주 동상 광장을 바라보다 인기척에 침실의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똑똑똑.

노크 후 문이 열리더니 면사포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린 백려강이 이실리테와 함께 황금색과 은색으로 이루어진 음식 카트를 밀고 들어온다. 영주의 점심 식사다.

=주인님. 식사할 시간이세요.=

이실리테의 알림에 환인은 잠시 세나의 무릎을 벤 채 눈을 감고 있는 영주를 바라보다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유르파가 한창 음식에 독 검사를 하고 있었다.

영혼 시야로 확인한 음식의 색 계통에 독극물의 반응은 없었지만, 색계통으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기에 환인은 그녀가 독 검사를 마치길 기다렸다가 물었다.

“유르파. 영도에서 연락은 없습니까.”

=응. 자기 예측대로인거 같아.=

사흘 전 영도와 통신으로 상황을 알린 뒤 상급 영혼사 두 명이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는 그 두 명에게 혼재의 성불이나 정화를 맡기고 자신은 도시를 뜰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작 이틀 사이 상황이 완전히 변해버렸기에 헛걸음하지 않도록 연락했지만…….

‘환인 성제…….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고 다니시는 것이오? 지금 소녀의 귀에 들려오는 소문이 무척이나 흉흉하오만?!’

‘이 통신 수정구는 소녀의 신력으로 연결되어있는 것이기에 도청의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오. 이야기해보시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런…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그런…….’

‘알았소. 그거에 관해서는 소녀에게 맡겨놓으시고…… 그보다 제발 부탁이니 조용히, 조용히 좀 여행을 다니길 간곡히 부탁하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거요?! 성제가 이때까지 지나쳐온 도시에서 전부 대형 사건사고가 터졌지 않소! 그대는 무슨 걸어 다니는 사건 제조기인 거요?!’

‘……말대로 엘스너펠은 확실히 아무 일도 없긴 했지만…… 아무튼 제발 부탁이니 소녀를 더 걱정시키지 말아 주시오, 부탁이오…….’

“…….”

간절히 애원하는 닌실의 목소리를 떠올린 환인은 피식, 작게 웃음을 지었다. 걱정이라면 자신보다 자신과 싸울 상대에게 해야 할 텐데.

=아, 오히려 땅신 교단 본단에서 통지가 왔었어. 여기.=

유르파에게서 통지 내용이 적힌 쪽지를 받아든 환인은 안느가 옆에 붙는 것을 느끼며 쪽지를 펼쳐보았다.

내용은 별것 없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알고 있지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서지 말아 달라는 당부.

=르아의 문양이네……. 어떤 일이라는 게 뭘 말하는 거지?=

“영주의 처형 같은 거겠지. 그로 인한 라드세아와 메리아놀 간의 마찰 분쟁이라던가.”

=…….=

=…….=

환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상상을 초월했는지 안느와 유르파의 입이 딱 벌어진다.

그래도 전쟁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통지를 보면 메리아놀은 중간에 결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걸 연관 지어 생각해본다면 라드세아 또한 흐라스린드 호족의 처분을 자신들이 내리고 싶을 터.

‘하지만 니오네브레스 대륙 상황을 보면 일반적인 국가 간 전쟁은 불가능하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고등급의 괴물. 사방에 득실거리는 마물. 바다에는 괴물이 가득 차 있다.

무엇보다 거리가 문제가 된다.

메리아놀과 라드세아 사이에는 걸어서 수개월 걸리는 거리와 그 사이를 가로막는 히스론드와 벨티칼이 있다.

이런 상황을 뚫고 국가 간의 전쟁을 치른다? 병력을 보낸다는 말은 그 병력을 모두 버린다는 말과 같다.

가뜩이나 방어를 뚫기 위해서는 공격 측이 비등한 전력을 동원하거나 매우 뛰어난 전략이 필요한데 원정에 드는 비용도 가볍지 않다. 그렇다고 전원 직업자로 병단을 꾸려 보낸다면 본국의 방비가 허술해진다.

병력을 보내면 보낼수록 본국의 대對 미궁 방비 또한 약해지니 이래저래 위험도가 높아지는 것.

‘나라면 소규모 특작 부대를 꾸려 테러를 저지르겠지만, 이건 상대방도 따라 할 수 있으니 상호확증파괴로 가는 길.’

무엇보다 신이라는 존재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같은 나라의 도시, 호족들이 소규모 전쟁을 벌이는 건 몰라도 섬기는 신이 다른 국가가 전면전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정권은 한 번 다 뒤집히지 않을까.

“대부분 자급자족이 이루어지고 있는 만큼 경제보복도 의미가 없는 세상이고 외교 단절도 있으나 마나 한 이야기. 교단은 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니 손을 댈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의 골이 크게 파이겠네.=

음식도 들지 않고 환인의 이야기를 주의하여 듣던 유르파의 발언에 환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작게 대답했다.

“이대로 간다면 결국 영주는 주도 라수비탄으로 호송, 호족들은 지위 파면과 함께 메리아놀 호송으로 결론이 날 겁니다. 그 사이 흐라스린드에 모여든 양측 외교관과 감시관들의 피를 튀기는 외교전이 있겠지만…… 그건 라드세아와 메리아놀의 낙관적인 전망이겠지요.”

영주는 자살을 암시했다. 자기 죽음으로 이 계획에 정점을 찍겠다는 이야기였다.

문제라면 그러한 자살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인데…….

「밥 안 먹고 뭐 해?」

나가서 영주성의 마구간에 있는 비상과 놀다 온 환연이 음식이 차려진 탁자 앞에서 가만히 있는 환인을 보곤 고개를 갸웃한다.

「아 맞다. 환인, 임시로 설치한 공간이동장에서 사람들이 또 도착했어. 라드세아랑 메리아놀의 높은 사람이라더라.」

“…….”

환인은 그 시기가 바로 코앞에 다가왔음을 깨달았다.

영주는 아마 이들이 도착하길 기다리며 세나와 이승에서 마지막 해후를 이어가고 있었던 거겠지.

음식으로 손을 뻗어 점심 식사를 시작하자 안느와 유르파도 식사를 개시한다.

유르파가 과일, 샐러드, 고기를 먹기 좋게 잘라 담은 접시를 환연에게 내어주자 환연이 두 손으로 양상추를 당겨서 아삭아삭 먹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참, 차원 방랑자가 그렇게 중대 사항이라는 건가? 고작 다섯 명 가지고 일이 엄청 커지는 거 같은데.」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환연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알아. 하지만 고작 다섯이잖아?」

“숫자에 연연해할 것이 아니라 전례로 남는다는 것에 초점을 잡아야 할 거다. 거기다 두 나라의 체면 문제, 특히 메리아놀의 체면이 강하게 걸려있지.”

「…….」

“게다가 차원 방랑자의 지식은 위험한 것이 맞다. 평범한 일반인이라면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지식이니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겠지만,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어 심연의 마굴이 운영하던 카지노, 상급 거리에 있는 레스토랑 같은 것.”

그게 만약 전문적으로 정치나 사회, 인문과 역사 등을 배운데다 특정 자의식과 계몽 의식을 가진 사람이면 어떨까. 거기에 우연이 겹치고 겹쳐 자신처럼 물리적으로 큰 힘을 얻게 된다면?

“하나둘 정도 되는 요소로 이 상황을 풀어쓸 수 없다. 적어도 일고여덟 종류는 되는 각종 요소와 이해관계가 얽혀 이렇게 커다란 문제로 비화한 거지.”

=그만큼 크로알 영주도 머리가 좋다는 거지?=

환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을 먹고 얼마 뒤, 라드세아의 주도 라수비탄의 행정외교부의 8급 호족과 메리아놀의 주도 패시지의 협의회 8급 귀족의 방문을 받았다.

양쪽 모두 중세 후기 고딕 복식처럼 무겁고 헐렁하게, 옷과 외투와 코트를 몇 겹이나 껴입은 차림이다.

인사는 푸른색 여우 머리의 루크랑 남자가 먼저 해왔다.

=영도의 차기 대성자 후보이신 환인 성제 예하를 뵙습니다.=

“대성녀 닌실 아나그 님의 계승 후보자로서 수행 중인 환인입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현친왕 전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라드세아의 안위를 위하여 마룡과 교섭에 큰 힘이 되어주셨다고…….=

“과찬이십니다. 현친왕 전하께서 저를 찾아오시지 않으셨다면 우스꽝스럽게도 저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겠지요.”

라드세아 측 인사와 표면적인 대화를 나누며 플뢰족인 협의회 8급 귀족을 기감으로 살폈지만, 딱히 유별난 반응은 없었다.

현친왕이나 이때까지 만났던 인사들은 자신이 차원 방랑자라는데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메리아놀은 직접적으로 차원 방랑자를 관리하는 곳이기도 하고 이번 일도 차원 방랑자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 신경 쓰는 모습을 약간은 보일 줄 알았는데.

‘명색이 외교관련자라는 건가.’

그 후 협의회 쪽 8급 귀족과도 인사를 나누었는데 특이점 없이 8급 호족과 마찬가지로 담담히 자기소개와 함께 형식적인 덕담과 치켜세우기를 이어갔다.

은색 머리카락의 8급 귀족은 중간중간 무표정을 하는 안느에게도 시선을 주었지만, 따로 말을 하거나 하진 않았다.

잠시 휴식을 위해 거실로 나와 있다가 두 호족과 귀족을 만났던 환인은 그들과 함께 영주 침실로 들어갔다.

영주는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와 3인용 의자에 세나와 손을 잡고 앉아있었다.

세나 쪽은 미련과 아쉬움을 모두 내려놓은 듯한 얼굴이지만, 영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정도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6급의 호위와 함께 침실로 들어선 두 명은 세나의 모습을 잠깐 응시하다 영주에게 눈길을 돌렸다.

=크로알 돔드 흐라스린드 영주. 본인은 라수비탄 중앙행정외교부 수석 외교처장이오. 이번 일로 여왕 폐하의 명을 받아 찾아오게 되었소.=

=…….=

한쪽 눈만 살짝 뜨고 외교처장을 본 영주는 다시 눈을 감아버린다. 그 행동에 외교처장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그를 대신해 이번에는 8급 플뢰 귀족이 나섰다.

=귀공이 저지른 행동은 정도를 넘어섰다고 협의회는 결론을 내렸소. 그대에게 마지막으로 변론할 기회를 주지. 할 말이 있다면 해보시오.=

인사조차 건너뛴 대화에 영주가 비릿하게 웃는다.

=뭘 말하라는 거요? 무릎 꿇고 대가리를 처박은 뒤 용서라도 구하라고?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듣기에도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난폭한 말투가 튀어나온다.

세나에게 보여주던 다정다감한 모습과는 180도 다른 태도. 이 태도에 고위층 두 명의 기세가 사뭇 날카로워졌다.

영주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해할 수 없군. 차원 방랑자 몇 명이 사고로 죽은 것과 여행하던 플뢰족 몇몇이 의심스러운 행동을 하다 잡혀 노예로 만들어 부렸을 뿐인데 뭐가 그리 문제라는 거요? 오히려 변론이라면 거기 당신이 해야 하는 게 아니오?=

=…….=

영주의 뜬금없는 지적에 메리아놀 협의회 8급 외교산업부 장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메리아놀은 다른 삼국에 비해 유달리 기술력의 발달이 빠르다지. 내 차원 방랑자 몇 명과 사귀며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전부 분야는 다르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소. 말해서 무얼 할까. 저곳에 계신 성제 예하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소? 차원 방랑자들은 하나같이 자질이,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이라는 걸. 메리아놀은 그런 차원 방랑자들을 모아 사리사욕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오!=

=그만! 그 이상 허튼 망상으로 협의회와 모국과 의장을 모욕한다면 절대 좌시하지 않겠소!=

=하! 찔리는 것이 있으니 그런 식으로 나오는 거겠지! 차원 방랑자를 전원 메리아놀로 옮겨야 한다는 법률이 사대 국가 공용이라도 되는 거요?! 전부 메리아놀이 어거지로 주장하여 동조하길 강요하는 것이 아니오!=

영주와 8급 귀족 사이에 고성과 비난과 지적이 오가고 사태와 분위기가 급속도로 악화하여가는 사태에 8급 호족이 긴급히 끼어들어 중재하려 들었지만, 영주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언행은 그런 호족에게도 날아들었다.

=주도의 성궁도 마찬가지요! 대체 얼마나 겁쟁이기에 자국의 호족을 지키기는커녕 타국의 눈치를 보아 협상하려는 것인지! 비탄과 통탄을 금치 못할 지경이란 말이오!!=

=그만하게! 자네 미쳤나?!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뭔가! 사태를 이토록 악화시켜 그대가 얻을 것이 무엇이 있느냔 말이야!=

=500년 호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자부심이 저 말라깽이 귀쟁이들에게 짓밟혔소! 가문의 역사와! 가문의 선조와!! 본인의 가문원들과!! 본인의 시민들이 저들에게 압박과 핍박받고 있는 마당이지 않소?!! 이러고도 본인이 흥분하지 않고 배기겠소?!!=

플뢰족에게 있어 극심한 모욕 발언과 동시에 영주가 살기가 흐르는 눈으로 벌떡 일어나자 협의회 귀족의 호위가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앞에 서고 마찬가지로 외교처장의 호위도 그를 감싼다.

하지만 크로알 영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를 토해낼 듯이 외침을 쏟아냈다.

=타국 귀족에게 핍박받는 자국의 호족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성궁은 의무를 외면하고! 본인과 본인의 가문은 역적으로 낙인찍혀 몰락을 앞에 두고 있으니 조상을 볼 면목이 없구나!! 성궁이 메리아놀과 한패이니 본인과 가신들이 살아날 길이 없다! 이러한 모욕과 불합리에 항거할 수단은 하나 뿐이니!!=

뿌드득, 송곳니에 금이 갈 정도로 이를 악물며 그들을 노려본 영주는 품에서 장도粧刀를 꺼내 들었다.

=흐라스린드 영주! 허튼짓은 하지 마시……!=

=흐라스린드의 이름 아래 한치 부끄러움도 없으니!! 보아라, 이것이 나의 결백이다!!!=

그리고 외교처장이 미처 제지할 틈도 없이 영주는 장도를 자신의 심장에 꽂고 크게 비틀어 가슴을 찢어버렸다.

추와아아악—

2m가 넘는 단단한 체구의 가슴이 쩍 벌어지며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온다.

=이, 이런?! 그가 죽으면 안되오! 투르시온 공, 그를 살려야하오!=

=미리스리엔, 회복약을!=

=쿨럭! 꺼…져라…!=

영주는 심장과 폐가 크게 찢어 발겨진 상황에서도 자신을 제압해 치료하려 드는 호위들을 향해 장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전문적인 전투 기술을 배운 6급 직업자를 고작 20cm 남짓한 장도로 밀어내는 것은 불가능.

삽시간에 두 손이 잡힌 크로알은 생명이 반쯤 빠져나간 눈으로 침실의 한쪽에서 태산처럼 굳건히 서 있는 성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

환인은 그의 시선에 담긴 뜻을 읽고 눈을 감았다가…….

‘나와라.’

문양 에너지의 힘에 강력한 영혼의 강제력을 발휘, 영주의 몸에서 강제로 혼을 잡아뽑았다.

평상시 멀쩡한 사람이라면 이런 영혼 추출은 불가능했을 터이지만, 심장이 찢어지며 생명의 끈이 크게 약해졌기에 영주의 영혼은 육신에서 힘없이 빠져나오고 말았다.

툭, 자신을 치료하려 드는 호위의 팔목을 잡고 있던 영주의 손이 떨어지고 머리도 힘을 잃은 채 축 늘어진다.

=안돼! 그가 죽어선 안 된다!=

=심장이 멈췄습니다!=

=어떻게든 살려내야 해! 최상급 회복제도 아낌없이 써라!=

=여기 회복 두루마리입니다!=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주의 영혼은 매우 청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영주는 아주 잠깐, 발아래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윽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세나를 발견하곤 환하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는 환인을 돌아보더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깊게 허리를 숙였다.

청색 영혼, 청령. 청옥의 소재.

아주 잠깐 갈등했지만, 환인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늦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육신을 떠났습니다.”

=……!=

=아…….=

어떻게든 그를 살리기 위해 회복제로 상처를 흔적도 없이 치유한 영주의 시체에 심폐 소생술과 인공호흡을 하던 호위들, 그런 그들의 곁에서 다그치던 귀족과 호족이 환인을 돌아보곤 하아, 맥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호족, 외교처장은 이대로 포기할 수 없는지 환인에게 달려와 간곡히 요청한다.

=성제 예하, 그가 이대로 성불해서는……!=

“외교처장님. 지금 하시려는 말씀과 제가 누구인지 다시 생각해보신 다음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

“저는 죽은 자의 영혼을 안식으로 이끌어 신님의 정원으로 향할 수 있게 돕는, 그저 그뿐인 영혼사입니다.”

환인의 냉담한 반응에 외교처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을 몸짓으로 드러내다가 크윽,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급한 마음에 그만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용서해주시길.=

“…….”

환인은 말없이 세나에게 밀어 넣어놨던 영기와 원기를 회수했다.

사람들의 눈에서 벗어난 푸른 영혼과 붉은 영혼은 이윽고 서로를 사랑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부둥켜안는다.

‘그야말로 미녀와 야수군.’

그렇게 생각하며 환인은 문양의 힘을 약간 담아 평온의 파동을 펼쳤다.

화아아아—

문양의 힘을 받아 드넓은 방안을 가득 채우는 금색의 파동.

그 파동에 푸른색 야수와 붉은색 미녀의 영혼은 천천히 빛무리로 변해가며 천장으로,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표백되는 것처럼 영혼에서 붉은색과 푸른색이 빠져나가고 회백색으로 변해간다.

강력한 정화의 파동에 휩싸인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손을 풀지 않은 채로 환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제 억지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제 예하.」

「고마워요. 성제님. 이 은혜는 하늘에서도 잊지 않을게요.」

인사와 함께 천장을 뚫고 사라지는 두 사람의 영혼.

환인은 얼마 안 가 온전한 빛무리로 변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영혼 감지로 확인하고는 두 사람의 영혼이 남긴 푸른색과 붉은색 빛구슬을 잠시 바라보다가 회수했다.

두 사람의 호족과 귀족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혼재가 사라졌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허어. 책임을 져야할 이가 자결하고 말았으니, 이를 어찌한단 말인가…….=

=……일단 본국에 연락을 하여야 할 듯합니다.=

=문제가 겉잡을 수 없이 커지겠소이다…….=

“…….”

환인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있는 영주의 눈을 감겨주고 여자친구들과 함께 주인을 잃은 침실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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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영주가 싸지른 빅똥이 구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흐라스린드 편은 이걸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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