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25화 (525/813)

519 흐라스린드의 혼재

크로알 영주의 얼굴에 천천히 동요와 정신적 충격이 떠오른다.

그녀가 영혼으로 남았다니. 거기다…… 혼재가 되었다고? 한차례 비틀거린 영주는 반쯤 몸을 날리듯이 환인에게 달려들었다.

=호… 혼재라니, 그녀가 혼재가 되었다는 말입니까!?=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환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천칭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내었다.

복수? 좋다. 죽은 사람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하니까.

복수는 허무함만을 낳는다고? 그렇다면 그 복수의 대상이 잘못된 거다.

그리고 복수를 끝마치고 자신도 죽겠다고 한다면 그건 미친놈이다.

영주는 그 미친놈이었다. 갑자기 정신이 나가 자신에게 발톱을 휘두를지 누가 아는가.

크로알 영주가 자신의 여자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보복하고 복수하는 것은 심정적으로 공감 가는 행위지만,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참새 눈물만큼도 이해 가지 않는다.

당연히 그에 대한 감정 또한 최저를 찍는 중이기에 환인의 입에서 절로 한기 서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답, 대답해주십시오! 세나가 정말 혼재가 됐단 말씀입니까!?=

밀쳐진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답만을 바라며 재차 달려드는 모습에 환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의 턱을 목표로 천칭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뻑!!

=끄?! 헉…….=

턱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뇌가 크게 흔들린 영주는 그대로 주저앉아 상체를 크게 흔들었다.

깨끗하게 들어간 일격이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뇌진탕을 일으킨 모습.

일순간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좀비처럼 으어어, 신음을 흘리며 땅을 기는 영주의 모습에 혼재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부축하듯이 옆에 붙는다.

이어서 환인을 향해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눈물과 표정으로 항의했다.

“전 영혼사입니다. 당신을 볼 수도 있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하십시오.”

그 말에 순간 놀란 혼재는 눈을 끔뻑이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떻게 이렇게 사람을 때릴 수가 있어요?! 난폭하잖아요!」

“…….”

보통 이런 경우에는 영주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를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던가.

환인은 조금이지만 위화감을 느끼며 그녀에게서 혼재의 기운이 강성해지는 것을 깨닫고 달래는 것을 목적으로 입을 열었다.

“루크랑 족 남자들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는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당신이나 저와 같은 지구인은 그가 마음먹는다면 삽시간에 살해당합니다.”

「에……?」

“미쳐버린 영주가 갑자기 돌변해 공격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가까이 오지 못 하게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아니 잠깐만요. 쿠로가 미친 건 맞는데…… 당신도 지구에서 온 사람이에요?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영주를 팼다는 것보다 같은 지구 출신이라는 말에 반응한 세나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다. 위화감이 조금 더 강해진다.

“한국인입니다. 당신은…… 일본인이군요.”

「맞아요! 정말…… 저 말고도 다른 지구인이 있긴 했네요…….」

영혼 상태여서인지 언어가 달라도 통하는 게 불가사의하지만, 환인은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아련한 얼굴로 환인을 바라보던 세나는 이윽고 잔뜩 화났음을 표정으로 어필하며 그래도 사람을 때리는 것은 안 된다고 소리쳤다.

「대화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어요! 폭력은 나쁜 거니까 쓰면 안 돼요!」

“…….”

또다시 느껴지는 위화감. 환인은 세나의 언행에서 느껴지는 비정상인의 위화감에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자신부터가 비정상이기에 누구보다 비정상을 쉽게 알아보는 환인이다.

그런 환인의 눈에 세나는 후천적 감정 결핍 장애로 보였다.

자신이 선천적으로 감정 결여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이 여자는 주변 환경 요인으로 폭력은 나쁘다는 세뇌를 받아왔고 그로 인해 성격이 뒤틀려버린 것이다.

일본인의 다수라고 꼽을 수 있는 특징은 남을 향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는 좋게 포장했을 때의 이야기고,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피곤해지지 않기 위해 남을 배려하는 척 타인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지 않으려는 습성이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식의 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지며 그 탓에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을 잘 존중해주는 것이 일본인이라는 편중된 시각을 낳은 것.

환인은 전 회사에 근무하던 시절 일본에 출장 업무를 몇 번 나가며 그 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개중에는 과한 교육 탓에 성격이 어그러진 인간들을 몇몇 봐왔었는데, 눈앞의 여자는 그런 교육의 폐해라 할 수 있는 표본 그 자체다.

그걸 증명하는 것은 환인의 이야기에 답을 했을 때부터다.

화를 내다가도 환인의 대답에 크로알 영주가 미친 건 맞다고 인정한다. 그러다 같은 지구인이라는 점에 신경을 쏟다가 다시 화를 내며 폭력은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까지.

행동에서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 감정의 일관성이 없다. 행동이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한 감상마저 느껴진다.

환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영혼 감응 능력을 살짝 풀어 그녀의 기억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3년간 흐라스린드에서 겪었던 일, 그리고 남쪽, 알류겔 호수 북쪽의 작은 촌락에 트립되어 그곳에서 지내다 플뢰들의 방문을 받은 일.

‘악녀가 본성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니군.’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다가 심기가 조금 비틀린 것처럼 입을 다무는 모습에 환연이 그의 어깨에 앉으며 물었다.

「환인. 혼재가 환인네 세상 인간이야?」

“…그래.”

서서히 뇌진탕에서 풀려나는 크로알 영주와 ‘어째서 폭력을 쓰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세나.

환인은 끼리끼리 만나서인지 아니면 크로알 영주가 세나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건지 잠시 생각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다.

확실한 것은 저 여자가 꺼림칙하다는 것.

‘계약은 포기한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에서 내린 결론이지만, 환인은 그 결론에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저런 비정상인 여자와 계약해 혼옥으로 만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들개 전사단의 여자 영혼들은 환인의 명령을 군말 없이 따른다. 하지만 저 여자는 어떠할까.

혼옥으로 만들면 들개 전사단처럼 자신의 지시를 따를까, 아니면 혼옥을 쓰려 할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같잖은 자신의 주관을 세뇌하려 들까.

만약 후자라면 좋지 못하다. 적옥, 혼재가 재료인 영혼 구슬인 만큼 지시에 따르지 않고 패악질을 부린다면 일행까지 위험할 수 있다.

강제력으로 명령을 내린다면 통제할 수야 있겠지만, 그런 피곤함을 감수하면서까지 저 여자를 혼옥으로 만들어 가지고 갈 생각은 없다.

「쿠로, 괜찮아요? 정신 차려요, 쿠로…….」

환인은 세나를 향해 조금 꺼림칙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쿠로는 일본어로 흑색을 뜻할 텐데 알비노 타이거인 크로알 영주를 왜 쿠로라고 부르는 걸까. 부른다면 시로 쪽이 더 맞지 않나.

……설마 이름이 크로알이라서 쿠로라고 부르는 건가.

「지구에서는 영혼을 한 번도 못 봤잖아. 지구인도 영혼이 될 수 있었나? 신기하네.」

“지역적인 요소의 차이인지 아니면 인종적인 요소 때문인지 궁금하긴 하군.”

그때 이실리테가 엉망진창으로 두들겨 맞아 기절한 가르파테를 질질 끌면서 온실로 들어왔다.

환인의 어깨에 앉아있다가 그 모습을 본 환연이 날아오르며 뭐하냐는 듯이 묻는다.

「그건 왜 들고 와? 그냥 밖에 버리고 오지.」

=밖에 방치하면 안될 거 같아서…… 그런데 무슨 일이야? 영주가 왜 저러고 있어?=

「환인한테 처맞았어.」

영주를 팼다는 이야기에 이실리테는 순간 살짝 당혹을 드러냈지만, 이내 ‘맞을 짓을 했겠지.’하고 생각하며 환인의 옆에서 작게 속삭였다.

=주인님. 신관 기사들의 인기척이 근처에서 느껴져요. 주변을 수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겠어요.=

“곧 찾아오겠지. 그들의 목적은 영주와 대화인듯하니.”

환연도 지금은 가만히 있다. 만약 땅신 교단의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이쪽을 수색하려 하면 그때 알려줄 것이다.

그보다, 환인은 심하게 쥐어터진 얼굴로 옷이 검에 베인 것처럼 한쪽 젖무덤과 잘려 나가 서혜부를 훤히 드러낸 채 뻗어있는 가르파테를 눈짓하며 물었다.

“저 여자는 왜 저렇게 만들었지.”

=기다리라 했는데도 자꾸만 나이겔 총집사에게 가서 알리려 하길래 때려눕혔어요.=

그리고 들키지 않게 온실 정원으로 끌고 온 건가.

가르파테가 이곳에 들어서지 못하게 막으려 한 것을 보면, 일반적으로 출입금지 지역으로 설정되어있을 것이다. 다른 누가 더 다가오진 않을 것이니 어느 정도 유예는 될듯하다.

=어……째서…….=

뇌진탕에서 회복되어가고 있는지 영주가 힘없고 느릿하게 입을 연다.

환인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혼재가 발생하게 되는 두 가지 경위를 그에게 설명해주었다.

하나는 극도의 원한과 분노에 불타 혼재가 되어 주변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경우. 다른 하나는 어떤 인물에게 오랫동안 붙어있으며 해당 인물의 타락에 같이 물들어 혼재로 변해버리는 경우.

“당신의 여자는 후자입니다.”

세나를 혼옥으로 만드는 것은 포기했다. 하지만 다른 쪽은 포기하지 않았다.

혼재가 무난하게 성불할 경우 남길 빛구슬. 그걸 흡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베트의 경우를 떠올리며 되도록 무난하게 성불시킬 생각을 한 환인은 먼저 현세의 미련을 풀어주기 위해 세나의 몸에 손을 올려 약간, 10분 정도만 지속될 영기와 원기를 넣어주었다.

오로지 붉은색의 영혼에 생전의 색이 덧칠되어간다.

잠시 후 반투명하다는 것과 몸 주변에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살아생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어진 세나의 모습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세나의 모습에 크로알 영주는 환인에게 맞았다는 사실도 잊고 자신을 보호하듯 감싸주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 나?=

「쿠로? 제가 보이는 건가요?」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크로알 영주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빰에 손을 올렸고, 세나도 놀란 눈으로 자신을 만지는 영주를 돌아보았다.

잠시 현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지나고, 크로알 영주는 눈물을 왈칵 흘리며 세나를 껴안고 오열했다.

=세나…… 세나! 크흐흑, 미안해! 내가 힘이 없어서 당신을……! 으흐으으으……!=

그동안 맺힌 한이, 빙산이 녹아 부서지는 것처럼 눈물이 쏟아져 흐른다.

이런 영주의 모습은 보지 못했었는지 세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내 자상하게 웃으며 그를 안고 괜찮다며 다독여준다.

“…….”

환인은 팔짱을 끼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물귀신처럼 모두를 끌고 지옥으로 떨어질 것처럼 굴더니 사랑하는 여자의 영혼을 보자마자 무너지듯 울음을 터트린다.

복수는 심정적으로 이해가 갔지만 저 모습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자신과 여자친구들을 저 둘에 대입시켜보아도 자신은 눈물을 흘릴 것 같지 않다.

환인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환연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이실리테는 뭔가 이상함에 눈썹을 찡그렸다.

=저기…… 주인님.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무엇이 이상하다는 거지.”

=저 남자는 흐라스린드의 영주잖아요. 그런데 지금까지 들은 것을 모두 모아놓고 보면…… 영주로써 힘이 없는 거 같아서요. 오히려 총집사가 권력이 더 강한 거 같아요.=

환연의 사견이 든 설명에서 느낀 점을 말하자 환인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는 도시의 절대 권력이다. 영주가 어째서 영주인가. 도시의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에 영주가 아닌가.

=그렇게나 사랑한 여자 하나를 살리지 못한 것도 그렇고 영주가 총집사장의 도움을 요구한 것도 좀 이상해요. 총집사장이 영주를 넘어선 권력을 가진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영주 자리를 탐내서 영주를 밀어내려 하는 것 같지도 않던데…….=

“나이겔 총집사장은 전형적인 라드세아의 호족이다. 거기에 성향은 킹 메이커, 자기 자신의 출세와 진보보다 누군가를 왕으로 만드는 데 성취감을 느끼는 인물이지.”

환인은 영혼 시야로 세나를 부둥켜안고 꺽꺽 우는 영주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 점만 보면 문제 될 게 없는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다. 능력 있는 군주, 그런 군주를 보필하고 섬기는 신하.”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너희는 라드세아 영주의 힘은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나.”

=네? 음…… 핏줄이요.=

「돈?」

상반된 의견에 이실리테와 환연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도 이상해. 돈에서 군주의 힘이 나오면 상단 주인들은 전부 군주가 되는 거잖아.=

「무슨 말이야? 핏줄이 밥을 먹여줘, 옷을 입혀줘? 돈이 없으면 저런 인간은 못 살아.」

=고귀한 핏줄이면 사람들이 모여서 떠받들어 줄텐데? 진상하는 것도 있고…….=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대부분은 돈이 중요해. 영지 운영에 드는 것도 전부 돈이잖아. 기사단을 키우고 병력을 모으고 도시 정비에 내정에…… 돈이 없으면 도시는 제대로 안 굴러가.」

=그건…… 돈보다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도 있어.=

「너희들 정도나 그렇지 보통 사람은 돈, 정확히는 욕망으로 움직여. 내가 너희랑 합류한 뒤에 일어난 사건 태반이 돈이랑 연관되어 있던 거 잊었어?」

=…….=

둘의 대화가 살짝 과열될 조짐에 환인이 끼어들었다.

“둘 다 맞다. 혈통으로 권력을 잡고 금력으로 무력을 확보해 도시와 사람을 지배하는 거지. 다시 말해 영주의 진정한 힘은 혈통으로 물려주는 보물고에서 나온다. 아니…… 이 경우는 영혼 금고라고 할까.”

「영혼 금고……. 아, 혹시 그거 말하는 거야?」

=……영혼 금고가 뭔지 알아?=

「프라버에서 너도 봤잖아. 늙은 새 인간이 허공에 손 집어넣고 환인의 광창을 꺼내던 거.」

=아.=

환인이 파르히스트 인근에서부터 그 존재를 인지했고 영도의 기록실 자료를 통해 정체를 확신하게 된 영주들의 전유물, 영혼 금고.

요약하자면 개인에게 귀속되며 일평생 단 한 번 양도가 가능한 개인용 아공간이다.

일종의 특별한 부여 비술로 막대한 비용과 매우 희소한 재료를 써서 만들 수 있는 이 개인 아공간은, 무게 제약이 없으며 크기는 비술 부여 시 소비한 재료에 따라 크게 갈리는데 보통은 작은 저택 하나를 통째로 넣을 수 있는 수준이다.

지갑이나 주머니처럼 들고다니지 않아도 되기에 잃어버릴 염려가 없고, 언제 어디서든 물건을 대량으로 넣고 꺼낼 수 있다.

“영혼 금고에는 말 그대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귀중품, 또는 보물과 재화를 보관한다. 이 영혼 금고가 가득 찬 뒤에는 보물고를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것들, 부피만 많이 차지하는 것들을 옮기는 식이지. 나는 영시를 통해 이 영혼 금고의 소유자를 알아볼 수 있는데…….”

그의 시선이 끄흑거리며 우는 영주에게 향했고,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환연이 어이없어했다.

「뭐야. 영주인데 영혼 금고가 없다는 거야?」

“모종의 사건으로 영혼 금고를 영주가 인계받지 못한 거겠지. 상황을 보자면 나이겔 총집사가 신하들과 함께 관리하고 있을 확률이 100%일 거다.”

환인은 타성에 젖은 자신을 약간 반성했다.

지금까지는 중요하거나 지위가 있는 인물들, 예를 들어 영도의 영성들이나 주도의 친왕인 호천명 정도만 확인했었다. 그랬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딱히 문제 될 게 없는 실수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어떤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복잡한 계획 같은 경우에는 사소한 이유로 계획이 크게 어그러질 수 있는 만큼 그걸 반성하는 환인이다.

이실리테가 으음, 작게 한숨을 흘리며 물었다.

=영주에게 집중되어야할 권력이 분산되어버린 거네요.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요?=

“가능성은 두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다. 나이겔 총집사가 영주에게 왕의 풍모를 요구하며 인계를 거부하고 있는 것. 또는 전대 영주의 지시로 현 영주에게 영혼 금고의 이전을 제한한 것.”

영혼 금고의 소유자가 이전을 하지 못한 채 사망하면 아공간 속의 보물은 그대로 아공간에 삼켜졌다가 일정 시간이 지난 뒤 무작위 장소에 뿌려진다.

그 위치와 시간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불상사를 대비해 영혼 금고 속에 초장거리 위치추적 마도구를 섞어놓기는 하지만, 이 세상의 육지와 바다의 비율 또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3:7에 달한다(고 기록실에 자료가 남아있었다).

마물과 마수와 괴수와 영수와 성수, 신수, 진수로 득실거리는 니오네브레스의 바다에 보물이 떨어지면 회수는 불가능.

이런 특징을 생각해본다면 전대 영주의 사망이 불시에 이루어졌고 그 장소에 차기 영주가 없었기에 나이겔 총집사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 영혼 금고를 이어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제님의 추측이 맞습니다…….=

환인의 추리가 끝나자 뇌진탕 증상도 사라지고 사랑하는 여인, 비록 영혼 상태라지만 그 품에서 울 만큼 운 크로알 영주가 몸을 일으켜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기 영주 업무로 인근 마을을 순회하기 위해 도시를 떠나있는 사이 아버님께서 급환으로 앓아누우셨고, 황급히 귀환길에 올랐지만 도시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네 엄마나 형제 남매는 없었어?」

환연의 어처구니없어하는 질문에 크로알 영주는 상심이 드러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의 어머님과 제 아래로 동생이 여섯 있었지만, 여동생들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모두 출가하였고 남동생들과 어머님들은 차례로 병환과 사고로 타계하셨습니다. 현재 가문에 남자는 저 하나뿐입니다.=

“…….”

=성제님. 부탁이 있습니다.=

“…….”

환인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크로알이 아프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절 믿지 못하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제 계획대로라면 수십 명의 목이 잘릴 것이고 수백 명이 잡혀갈 것이며 수만 명이 고통에 신음을 흘릴 테니까요.=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을 복수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당신이 할 부탁이란 제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뿐.”

=들어보시고 그럴 수 없다 하시면 두 번 부탁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환인이 팔짱을 풀자 크로알 영주는 영혼인 세나의 손을 꼭 잡은 채 말했다.

=성제님께서 절 찾아오신 이유는 세나를 성불시키기 위해서이겠지요. 그 성불을 단 며칠만 미루어주십시오.=

“……저 멀리 파르히스트 남부의 비자룩스 마을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작년 즈음 혼재의 재앙화가 발생하였다 들었습니다. 성제님께서 그 자리에 계셨기에 피해가 최소에 그쳤다고 하더군요.=

“제 개입으로 그녀의 불안정하면서도 안정화를 이루던 상태가 흔들렸습니다. 언제 재앙화가 벌어질지 모르는 일입니다.”

재앙화가 일어나면 적어도 영주 성은 쑥대밭이 될 거고, 여기서 재앙화를 막아내지 못하면 도시로 내려가 도시가 쑥대밭이 될 것이다.

이 대답에 눈물로 붉어진 크로알의 눈에서 시퍼런 광기가 터져 나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재앙화를 거들어 도시를 깡그리 쓸어버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랬다간 성제님께 폐가 되겠지요.=

마음을 다스리듯이 숨을 고르는 크로알 영주. 세나는 그런 영주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안타까운 얼굴로 쳐다본다.

=성제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후회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다 목숨이 끊어졌을 겁니다. 수만 명의 고통을 자아내려는 놈이지만 은혜는 압니다. 세나와 마지막을 보낼 수 있게 해주신 분께 그런 폐는 끼칠 수 없습니다.=

그러더니 품 안에 손을 넣은 크로알 영주는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카드 지갑 형태의 파우치를 꺼내 이실리테에게 눈짓하여 그것을 환인에게 전달해주었다.

=차기 영주에게 주어지는 가문의 보물, 무한의 손지갑입니다. 안에는 가문의 3급 보물창고의 재물이 전부 들어있습니다. 단순히 보석과 금화, 위상석만 들어있는데, 대략 4천 금화는 될 것입니다.=

4천 금화라는 말에 이실리테의 눈이 크게 떠지고 멈칫, 지갑을 살피던 환인의 손도 멈춘다.

=3급 보물창고는 영주 사비로 쓰이는 것이기에 성제님께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환인의 시선이 크로알 영주에게 향하자 영주는 담담하게 부탁을 꺼냈다.

=사흘. 사흘이면 됩니다. 그러면 제가 의도한 일이 모두 결말을 맺을 터이니 그때 그녀와 저를…… 성불시켜주십시오. 의뢰 대금으로 지갑과 내용물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자기 죽음을 암시하는 이야기를 꺼낸 영주는 =크로알 돔드 흐라스린드의 이름으로 보고 아스펜드의 소유권 이전을 선언한다.= 약속어를 외웠다.

그 순간 청색이 감도는 가죽 지갑에서 불투명한 청색이 흘러나와 환인의 팔을 타고 오르려다 파직- 스파크를 튕기곤 사라진다.

=엇? 소, 소유권 이전이 실패하다니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이유를 짐작한 환인은 위상류를 반대쪽 팔로 모두 이동 시킨 다음 다시 시도해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영주는 재차 약속어를 외웠고, 환인은 지갑에서 흘러나온 청색 기운이 마치 새로운 주인을 확인하듯 몸을 한차례 훑고 다시 지갑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손지갑 안의 내용물과 지갑의 기능이 저절로 머릿속에 주입되었다.

작은 궤짝 두 개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의 금화와 수백 개의 보석, 그리고 자루에 따로 담긴 2~5급 위상석 백여 개.

무게 감소 99.9%에 크기는 어지간한 대형 짐수레 정도이며 시간 동결이 걸려있어 안에 넣어둔 것은 절대 풍화되거나 부패하지 않는다.

수납과 출납의 크기 제약은 없으며 지갑에 손을 올리고 생각을 하면 절로 수납과 출납이 이루어진다.

‘유물이군.’

안에 든 재물보다 이 지갑이 더 비싸다는 것을 눈치챈 환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손지갑을 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 당신과 세나 양이 제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 그 조건입니다. 또한 사흘 내에 세나 양이 재앙화 되려 한다면 강제로 성불시키는 것에 동의하여야 합니다.”

=…….=

크로알 영주는 상처로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세나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 성제님? 죄송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해주실 수 있으—.=

=아리엔네 교구장님. 성제 예하의 발언을 의심하는 태도, 좋지 않습니다.=

=앗! 죄, 죄송합니다. 대너리오 대주교님. 환인 성제니— 예하.=

“아닙니다. 혼재를 두고 지켜본다고 하니 그리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다만 그 사흘간 제가 곁을 지킬 것이며 문제가 발생할듯하면 즉각 성불 승천을 진행할 것입니다. 그러니 불안하시더라도 지켜봐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사정이 있어 지켜보아야 한다고 말하자 대너리오 대주교는 완고한 인상을 부드럽게 풀어 웃음 짓는다.

=혼재의 정화에 대해서는 성제 예하께서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잘 아실 분, 그런 분께서 장담하셨으니 걱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흐라스린드의 상위층 대다수가 자국민의 매매 범죄 및 국가 간의 분쟁마저 빚을 수 있는 중요한 문제에 연루되어있는 만큼 성제 예하께 도탄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 들 따름입니다.=

“대너리오 대주교님의 우려는 타당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도시의 성불행을 이행하며 흐라스린드에 쌓인 어둠을 목도하였습니다. 게다가 저 역시도 차원 방랑자 출신.”

뒷골목 패거리의 장부를 빼앗아 아리엔네 신관장에게 제출한 것도 자신이라 말하며 곁에서 지켜볼 권리가 있다 하자 대너리오는 잠시 생각하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놓아라! 감히 흐라스린드의 3급 호족이자 영주님의 최측근 왼팔인 본인에게 이 무슨 행패……!=

성 입구 쪽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시선을 돌리자 펄펄 뛰는 나이겔이 두 명의 신관 기사에게 양팔이 붙들려 끌려가는 것이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집사들 대부분, 시녀 복장인 여자들도 다수 끌려가고 있고 귀부인처럼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도 핼쑥해진 얼굴로 이송당하는 중이다.

=대주교님. 흐라스린드 영주님의 협조 아래 신체 수색을 끝마쳤습니다.=

머리를 깃털 장식의 황동색 아멧armet으로 빈틈없이 가린 여기사의 보고에 대너리오가 환인과 그의 곁에 선 크로알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영주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침실에 유폐하는 것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답답하시더라도 부디 참아주시길.=

=각오한 일이니, 대주교께서는 할 일을 하시기 바라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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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나를 돈으로 매수할 생각인가.

(내용물 확인 후)

......라고 꾸짖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돈+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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