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궁기담-524화 (524/813)

518 흐라스린드의 혼재

눈처럼 하얀 모피에 검은 선이 날카롭게 그려진 호랑이 머리의 남자, 흐라스린드의 영주 크로알=돔드=흐라스린드는 갑작스런 침입자의 등장에도 화내거나 놀라지 않고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환인을 잠시 응시하던 은색 눈동자가 다시금 온실 정원의 한 곳으로 향한다.

=차원 방랑자…… 그렇군요. 당신이 그 성제입니까.=

“…….”

=보아하니 제 계획을 눈치채신듯한데…… 딱히 당신을 노려 저지른 일은 아닙니다만 저로 인해 피해를 보셨으니 사과드리겠습니다. 혹 사과가 성에 차지 않으시더라도 그냥 넘어가 주시길.=

잘못 넘겨짚었지만 숨기거나 하는 것 없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태도. 그러나 사과는 하지만 사과에 큰 의미는 두지 않은 모습이다.

아니, 오히려 도발하는 느낌이다.

‘미안해. 날 용서 못 하겠다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도 곧 죽을 건데.’

이런 감정이 행동에서 여실이 드러난다.

딱히 사과를 듣자고 온 것이 아니었고, 약간 도발의 느낌도 있지만, 영주의 발언을 대강 흘려넘긴 환인은 영주를 안타깝게 바라보는 혼재 여자를 응시했다.

일단 적색 소용돌이의 기척이 혼재인 건 확실하군.

그리고 어느 한 장소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고 영주의 태도에서 설마 했는데 아무래도…….

‘아베트 같은 경우인가.’

이실리테에게 붙어있던 아베트, 어린 시절 그녀의 자매는 족히 10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하다 혼재화해버렸다.

좋고 나쁜 일도 전부 이실리테와 함께 경험하며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어 혼재로 변해버린 사례.

저 여자 영혼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이런 세상에 내던져져 결국에는 요절하였고 영주의 곁에서 최소 5년은 복잡한 정치질과 남자의 음험한 계획을 전부 지켜보았을 테니 아베트와 다르게 좀 더 빨리 혼재가 된다 해도 이상한 것은 없지.

문제라면 여자의 종족이다.

완전히 붉게 물든 탓에 피부색이나 머리카락 색은 알 수 없지만, 이목구비의 형태와 체형은 자신과 같은 차원 방랑자. 그것도 동아시아계로 보인다.

나이는 대강 20대 중반 정도. 복장이 지구에서 입는 옷이 아니라 라드세아 복장인 걸 보면 살아생전 얼마나 여길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환인이 반응하지 않자 영주가 먼저 반응해온다.

=아무래도 제 사과나 목숨을 목적으로 오신 것은 아니신 것 같군요. 그렇다면 어째서 절 찾아오셨습니까? 시간이 남아도는 겁니까?=

저런 여자와 계약해 혼옥으로 만들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차원 방랑자인데 이 세계의 영혼 법칙에 구속되는 거였나.

환인은 몇 가지 의문을 떠올렸지만, 영주에게서 얻을 수 있는 답이 아니다. 그외에는 방금 마주친 것으로 전부 해결되었기에 영주에게 딱히 궁금증은 없었다.

어차피 죽을 남자. 이야기를 나누어봤자 시간 낭비일 뿐.

영주가 떠들든 말든 혼재 여자를 두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환인은 안주머니 속에서 환연이 가슴을 쿡쿡 찌르는 걸 느꼈다.

직접 묻고 싶은 게 있다는 건가. 환인은 재킷 앞섬을 살짝 열었고, 그 의도를 알아차린 환연이 안주머니에서 빠져나와 환인의 어깨에 앉으며 영주에게 물었다.

「인간. 인간은 왜 죽음을 각오하고 이런 일을 꾸몄어?」

작고 어린애 같은 요정들에 비해 성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요정이 갑자기 나타나 던지는 질문에 크로알 영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마음속에서 오래전에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타인의 질문에 추억과 감정의 뚜껑이 열려 안의 것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이었다.

감정을 추스르는 데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제 심장의 반쪽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심장의 반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도발의 기색은 사라지고 과거를 보는 듯한 아련한 음색의 이야기다.

「내가 한 질문이랑은 초점이 맞지 않는 대답인걸. 하지만 알아들었어. 하나만 더 물어볼게. 심장의 반이 사라졌으면 혼자 죽으면 되잖아. 왜 다른 사람들까지 끌어모아 죽으려 드는 거야? 사람들을 모두 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이 질문에 크로알 영주는 비릿한 웃음을 띠었다. 갑자기 흑화한 듯 흉험한 얼굴로 변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해주길 바랐던 것처럼 검고 탁한 감정을 술술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죽음에 이 도시의 모두가 크고 작은 책임을 졌기 때문입니다. 그녀를 검은 머리의 마녀라고 매도했고 그녀를 더러운 피의 창녀라고 모욕했습니다. 그녀가 병에 걸려 치료를 필요로 했을 때 치료의 시기가 매번 늦어졌고, 성술의 치료가 통하지 않아 고가에 희귀한 약재로 제조한 약이 필요했을 때 수집을 차일피일 미루기 일쑤였습니다.=

그녀가 걸린 병은 중병이긴 했지만, 돈과 약재만 있다면 충분히 나을 수 있는 병이었다.

그리고 호족이자 영주인 자신의 명령이 있으니 어렵지 않게 치료약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도시 사람들의 악의에 흐라스린드를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욕을 먹으면서도 아름답게 웃던 그녀는…… 선의와 호의를 배신당해 자신이 살던 곳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짧은 생을 끝마치고 말았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고통받게 음모를 꾸민 거였구나.」

=후후후. 도시에 폭력 조직이 태어날 수 있도록 뒤에서 손을 썼습니다. 온갖 범죄와 사채와 마약을 다뤄 시민들이 고통받게 했지요. 때마침 커다란 호우와 홍수가 일어 식량의 수입이 대폭 감소한 덕에 도시가 빠르게 망가졌습니다.=

하층민은 식량의 수입이 끊어지자 곧바로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었다.

꼴 좋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선동과 날조에 휘둘려 욕한 머저리 같은 놈들.

중급 거리의 중산층은 하급 거리보단 나았지만, 시간이 흐르자 하급 거리의 하층민과 다를 바 없어졌다.

생각 없이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짐승 같은 놈들. 그녀가 도시 밖을 나갈 때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달걀을 던져대던 쓰레기 자식들.

상급 거리와 고족, 호족들을 옭아매기 위해 선택한 것은 타국 종족의 인신매매였다.

그것도 자국민의 처우에 대해 제법 예민한 메리아놀의 신경을 긁을 수 있는 플뢰족 인신매매.

「인신매매는 좀 무리수 아니었어? 호족들에게 고통을 주기에 종족 인신매매는 임팩트가 약한데.」

“인신매매는 화력을 올리고 시선을 끌어모으기 위한 더미였겠지. 기폭제와 도화선은 차원 방랑자 매매에 붙어있었을 거다.”

환인의 이야기에 설마 그걸 알아봐줄 줄은 몰랐다는 듯이 흐릿하게 웃은 영주는 다시 의자에 앉으며 느릿하게 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이 도시의 역사를 들려드려야겠군요……. 약 500년 전의 과거에서 시작됩니다.=

흐라스린드는 처음부터 자원이 풍부한 도시가 아니었다.

혹독한 지리적 환경 탓에 마을과 촌락 사이 정도로 성장이 정체되었을 만큼 형편없는 마을이었다.

근처에 소도시가 들어갈 정도의 호수가 있다지만 지대가 도시보다 한참 낮아 물을 끌어올 수 없었다. 게다가 수자원도 다른 장소에 비해 부족한 편이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을 모아놓고 쓸 정도였으니.

농업용수로 사용할 만큼 주변에 수량이 풍부한 것도 아니고 땅도 척박한 구릉지 형태의 바위산투성이.

인접한 숲은 로아팅스 정글의 최동단으로 주기적인 텀을 정해 괴물이나 마물, 마수를 토벌해놓지 않으면 언제고 쌓여 사람의 흔적을 쫓아 침공해온다.

소출은 고작 소형 마을을 먹여 살릴 수준. 여기에 목숨을 위협하는 척박한 환경.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성장이 긴 시간 막혀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상황에서 마을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촌장과 이장이 유능했다는 증거이지만 아무튼.

이러한 환경에서 마을에 불과하던 곳이 소도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변이형 지하미궁인 또 다른 숲의 미로 덕분이었다.

또 다른 숲의 미로 미궁은 총 3계층으로 각 계층이 하나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계층은 숲, 2계층은 호수, 3계층은 광산으로 분류되어있다.

사람들은 미궁 형성 초기에 미궁을 그다지 활용하지 못했다.

이름의 유래대로 1계층은 광대한 숲의 미로가 형성되어있어 함부로 들어갔다간 길을 잃고 헤매다가 사망하기 십상인 위험한 곳이었던 것.

게다가 출토되는 것은 전투에 재활용하기 어려운 고기나 숲의 산물뿐이다.

2계층으로 내려가면 드문 수속성 이형종의 출현으로 제법 고가의 부산물을 획득할 수 있지만, 1계층인 숲의 미로가 너무 최악이었다.

가뜩이나 척박해 주변에 마을다운 마을은 아예 없고 작은 촌락뿐. 전투에 도움 되는 부산물은 나오지도 않으며 돈이 될만한 것도 거의 없고 위험성은 최상급인 주기적인 변이 미로 형태의 미궁이니 거의 버려진 상태였던 것.

하지만 흐라스린드를 소도시로 일궈낸 초대 영주는 발상을 전환했다.

미궁의 숲 미로는 나무라는 점에 착안.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라! 나무둥치를 뽑아내고 땅을 갈아엎는 거다!’

가산을 탕진해가며 하급 용병이나 모험가를 모집, 미궁의 1계층을 말 그대로 ‘개간’하기 시작했다.

시도와 의도는 제법 합리적이었다. 미궁의 재생은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약점을 꿰뚫어 본 것이다.

그러니 지상과 마찬가지로 밤낮이 존재하는 미궁 1계층에 사람들을 이주시켜놓고 머물게 하면서 미궁 안의 비옥한 토지에 농사를 짓는다는 발상.

여기에 1계층은 통으로 하나의 층이었기에 출몰하는 이형종은 대다수가 1급이며 가끔 2급 정도였기에 개간에 착수할 결심을 부추겼다.

1급 이형종은 사나운 맹수 정도다. 훈련받은 군인이나 모험가, 장비가 그럭저럭 갖춰진 용병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

가끔 출몰하는 2급 이형종은 당시 마을 기준으로 비싸디 비싼 값을 치러 고용한 모험가에게 맡긴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이자 이장의 계획은 빠르게 수립되었고, 처음에는 반대하던 이들도 이장의 끈질긴 설득에 찬성파로 돌아서며 본격적인 개간을 개시했다.

시작은 지지부진, 지리멸렬했다.

소도시가 통째로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은 미로를 개간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칫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은 곳이 재생되어버리기도 했고 1계층의 숲 미로를 밀어버리고 있으니 미로가 훼손되며 미로 속에 갇혀있던 미궁의 이형종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던 것.

경험도, 지식도 없는 시기였기에 이때가 흐라스린드 역사상 가장 어렵고 어두운 시기였다고 도시의 역사서는 말한다.

그러나 당시 마을의 이장도 대륙급까지는 안 되지만 소도시급 영웅 정도는 되었다.

악으로 깡으로 솔선수범해 미궁의 1계층을 밀어나갔고 동시에 상처 입고 피폐해지는 마을 사람들을 격려했다. 토끼 같은 아내를, 여우 같은 자식들을 배불리 먹이고 훌륭하게 키우려면 이 위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피를 토할 만큼 부르짖었다.

그러한 이장의 노력은 시의적절했다. 게다가 1계층 숲 미로의 이형종과 싸우며 고기, 그리고 집을 짓고 불을 땔 목재는 넘칠 정도로 공급되기 시작했기에 사람들은 당시 이장의 지휘에 따라 죽을 각오로 미궁의 개간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3년에 걸쳐 마을의 힘만으로 1계층의 1/7을 밀었을 때, 생각 외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다.

인력의 부족으로 그 이상 1계층의 정리가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개간은 단순히 나무를 베어내고 그루터기를 뽑고 습격해오는 이형종을 퇴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밀어낸 곳에 망루를 설치하여 미궁이 재생하지 않도록 감시 인원을 박아놔야 했고, 확장하면 확장하는 만큼 방책 울타리를 세워 혹시 모를 이형종의 공격에 방비해야 한다.

당연히 본격적인 개간 조 외에 방비 조를 따로 운용해야 했으며 개간이 진척될수록 방비해야 할 범위가 계속해서 늘어나 투입해야 할 인원도 덩달아 늘어났다.

개간이 완료되면 더는 이형종의 재생과 나무의 팝업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관리 인원 몇 명이면 운용할 수 있지만, 개간 중에는 그야말로 막대한 인력과 거기에 소모되는 물자와 임금으로 돈이 밑 빠진 독처럼 들어간다.

게다가 돈은 어떻게, 개간 중에 발견한 고가의 약초나 채집 소재와 돌멩이처럼 쏟아지는 하급 위상석으로 충당할 수 있지만, 인력은 아니다.

근 한 달간 지리멸렬한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피로가 극에 달해 실의와 절망이 찾아올 무렵,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마을을 성장시켜보겠다고 마을 하나의 사람들이 합심해 목숨 걸고 미궁을 개간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걸 회의적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3년이 지났음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기울며 주변 촌락과 사라지기 직전의 마을의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던 것.

인구가 늘면 활기가 늘어난다. 그런 활기를 받쳐줄 식량이 쏟아지고 먹을 것을 충분히 먹어 힘이 솟은 남자들은 미궁 개간에 뛰어들었다.

삽시간에 인구가 기존 마을의 3배, 4배로 늘어나고 그 인구를 이끌 지도자까지 있으니 그 결과는 기정사실.

충분한 인력에 탄력을 받으니 지리멸렬한 개간율이 빠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성과가 눈에 띄게 나오기 시작하니 어린아이와 노인을 제외한 남자와 여자 가릴 것 없이 전부 미궁에 달라붙어 개간과 농작을 동시에 진행하니 개간율은 더더욱 가파르게 상승해갔다.

그렇게 전 인구의 노력이 있은 결과, 개간을 시작한 지 5년째 봄이 찾아온 날 1계층의 마지막 나무가 쓰러지게 되었고 또 다른 숲의 미로 1계층은 인간의 손에 정복되었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이제 고생은 끝, 행복이 시작될 것이다.

개간과 농작이 동시에 진행되었기에 1층의 입구 근처에서는 이미 농사가 지어지고 있었다. 1계층의 한구석에는 작지만 호수도 있었기에 농업용수 걱정은 없었던 것.

나무가 한 그루도 남김없이 뽑혀 나간 미궁의 땅에 황금색 곡식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고, 첫 소출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다시 환호했다.

인간과 미궁의 싸움에서 땅신이 인간에게 손을 들어주었을 때, 이름이 없는 무명의 마을은 소도시의 최저 요건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주의 자리에는 만장일치로 당시의 이장이 추대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당시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자이자 유지였던 이장은 거의 전 재산을 미궁 개간 사업에 쏟아부었으며 열둘의 자식 중 아홉을 미궁에서 잃었다.

그런데도 투지를 잃지 않고 수천 명의 사람을 이끌어 마침내 미궁의 개간이라는 위업을 달성해낸 거다.

소도시 이름은 이장의 이름을 따 흐라스린드가 되었고 그 이름이 곧 가문 명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을 때 미궁 개간 사업 체계는 더더욱 공고해져 또 다른 숲의 미로 1계층은 완전히 흐라스린드의 곡창 지대가 되었다.

병충해와 수해가 발생하지 않으며 땅의 지기는 매번 회복되니, 식량의 생산율이 고작 소도시 정도 넓이만으로도 1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던 것.

농토로 변한 땅에서 식량이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자 당시 3만의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아돌 지경이었다.

위상력 또한 가득한 미궁의 특성 덕에 희귀한 약초와 희소한 식물의 재배도 손쉬워져 남는 식량을 주변 촌락과 마을에 팔고 비싼 값어치의 약초는 저 멀리 중급 도시 알소프까지 내려가 팔면서 부의 생산과 재분배가 빠르게 이어졌다.

식량과 돈이 풀리기 시작하니 사람이 점점 모여들었고, 사람과 돈과 식량과 미궁이 있으니 꽃꿀에 이끌려 날아드는 나비처럼 모험가와 탐험가, 용병들도 찾아오기 시작했다.

호수 지형의 2계층에는 제법 수속성 관련해 뛰어난 부산물이 나왔기에 수생 관련 미궁이 적은 라드세아 특성상 귀하거나 특징적인 소재를 원하는 사람들도 모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이 사람을 부르고 모인 사람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으니 인구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인구가 많아지니 각종 상점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각종 직업 관련 협회와 조합도 찾아와 건물을 세웠다.

짐승신 교단과 땅신 교단도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모험자들이 2계층을 지나 3계층의 광산에서 희귀 금속까지 캐오기 시작하니 완전한 미궁 도시의 완성이다.

여기까지만이었다면 다들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온갖 범죄도 따라오는 법. 인구와 인력, 금력이 크게 부족했던 도시의 역사는 범죄자의 처벌을 금고형 대신 노예형과 곤장 벌금형으로 압축해 개간에 필요한 경비와 노동력을 수급하기로 했습니다.=

당시의 노예형과 곤장 벌금형의 명맥이 현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탓에 흐라스린드는 다른 도시에 비해 노예의 비율, 노예 거래 횟수가 몇 배나 높은 상황.

더욱이 플뢰족은 사비족을 꺼렸기에 라드세아에 용무가 있는 플뢰들은 대부분 히스론드 - 흐라스린드를 경유하여 라수비탄으로 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흐라스린드 - 히스론드를 통과해 메리아놀로 향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영주는 계획을 꾸몄다.

=플뢰족을 대상으로 삼아 인신매매로 악명을 드높이고 차원 방랑자 매매로 결정타를 가하는 겁니다. 그즈음이 되면 호족들은 1가구 1플뢰 노예를 갖출 정도가 되어있을 테고, 사소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펑하고 터져 메리아놀의 군대가 들이닥칠 터였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차원 방랑자 이슈가 터지지도 않았는데 땅신 교단의 대주교가 들이닥쳤다.

그러나 크로알 영주는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반겼다. 메리아놀뿐만 아니라 땅신 교단의 참전도 확실시되었으니까.

열심히 거래 명세를 적은 장부를 일부러 들려주기까지 했으니 메리아놀 자체가 움직일 날도 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 땅신 교단의 난리가 겨우 가라앉았을 때 메리아놀의 군이 들이닥친다면 고통은 두 배가 되겠지.

환연은 관심 없다는 투로 흥, 콧방귀를 꼈다.

「그런 건 안 궁금해. 아무튼 죽음도 각오할 정도로 그 여자를 사랑했다는 거구나.」

=……예.=

여자의 신분은 나이겔과 영주의 대화로 미뤄봤을 때 신분의 차이가 극명한 수준이었을 거다.

결코 일반인과 결혼하지 않는 호족의 자존심을 생각해본다면 사람과 짐승이 결합하는 것과 마찬가지.

「잘 들었어.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

가만히 경청만 하던 환인은 무언가 후련하고 개운해진 얼굴의 환연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응시하는 영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영주의 눈빛은 마치 이렇게 묻는듯했다.

나는 이 땅에 수천 명을 죽게 했고 영혼이 극도로 쌓이게 해 영의 순결을 모독했다. 성제씩이나 되는 영혼사인 당신은 그저 보고만 있을 건가?

명백한 도발의 눈빛이지만, 이런 부류의 도발에는 면역이나 다를 바 없는 환인이다.

환인에게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이제 슬퍼하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저 혼재 여자와 계약을 맺어 혼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계획도 세웠지만…… 통할지는 확답을 내릴 수 없다.

영주를 볼모로 삼아 협박하는 것은 어불성설, 오히려 반감만 가지겠지.

자신이 혼재를 볼 수 있다는 걸 지금 알리지 않으면 차후 반발이 크게 일어날 거다.

영주가 교단 인원에게 끌려 나가 마구 당하는 와중에 도와주는 대신 계약을 요구하는 방법이 가장 온건하면서도 확률이 높지만, 아무리 봐도 저 혼재는 지구의 현대에서 넘어온 사람이라는 게 걸린다.

의식이 민주주의와 평등에 맞춰져있다면?

「……환인, 도개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이겔이란 인간이랑 기사단장이 기사단이랑

합류한 뒤부터…… 앗, 전투가 시작됐어.」

쿠궁…… 쾅, 쿠쾅…….

와아아아…….

멀찍이서 들려오는 소음과 함성, 폭음. 그 소리에 환인은 이실리테가 어디 있는지 기척 감지를 펼쳤다. 그러자 온실 정원 앞, 이실리테가 부러진 검 앞에 엎어진 가르파테의 등을 밟고 있는 것이 읽힌다.

일단 저쪽은 저대로 두면 될 거 같고…….

‘시간이 없다.’

오십이 넘는 검치호 기사단의 실력은 대주교와 서른이 넘는 신관 기사들에게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검치호 기사단이 밀리면 저들은 영주의 신병을 확보하러 움직일 터.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신병을 확보한 뒤 성안을 수색하기 시작할 텐데 그때가 되면 변수가 너무 많이 늘어난다.

영주가 당하는 것에 혼재가 발작을 일으켜 재앙화할 수도 있고 혼재에게 간섭해 혼옥화할 기회가 생길지도 알 수 없다.

어떻게 할까. 임시로나마 세운 계획대로 움직일까 아니면…….

「검치호가 아니라 고양이 기사단이네. 거의 다 쓰러졌어. 신전 측이 도개교를 넘으려 해.」

환연의 실황에 환인은 결정을 내렸다.

“크로알 영주. 당신이 사랑한 여성은 저와 같은 차원 방랑자입니까.”

=……알고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제가 찾아온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혼재 때문입니다. 멀리서도 느껴진 혼재의 영적인 기척을 따라온 것이지요.”

순간 울렁하고 영주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 그게…… 지금, 여기에 그녀의 영혼, 영혼이 있다는……겁니까?!=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영주: 그래, 내가 했지! / 열받나!? 안됐구만! / 아무도 호족인 나를 심판하지 못해! / 그게 이 나라 사법의 한계다!

환인: 어쩔tv

영주: ;;

0